요즘 짜증나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망가진 그를 처음 세상에 알린 옛 글을 읽어보자.
이렇게 해서 죽음은 인간과 사회로부터 추방되었고, 어느덧 애도를 공개적으로 표현한다거나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그러한 행위가 장기간에 걸쳐 이뤄지는 경우는 병리적인 것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과거 우리는 부모상을 당하면 1년 이상 어두운 색 옷을 입고 경사가 있는 집안에 참석하거나 웃음을 보이는 일을 삼갔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지속적인 슬픔으로 울적해하는 날이 많아지면 우울증으로 여겨 치료받을 것을 권유한다.
과학은 기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순수하고 고귀하게 해. 야만적인 족장이나 사제의 무지한 상상력에 따라 마법 지팡이를 내뻗는 대로 마구잡이로 작용하는, 그 악하고 교활하며 변덕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작은 힘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오늘날의 라듐 입자가 가진 효능 역시 기적적이란 점에선 다르지 않으나 분명하고 정당하며 이로운 효능에 비하면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비트겐슈타인
형제가 셋이나 자살하는 것을 목격한 그로서는 자살 그 자체가 선도 악도 아니라며 약간은 모호한 태도를 견지하는 어쩔 수 없는 타협만이 차선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모호함은 비단 철학자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자살에 반대하는 우아한 글을 남겼지만 그도 후일 그가 백혈병에 걸려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자살이라는 수단을 선택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