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규범의 신봉자'들은 여전히 장르의 구분이 정치적인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지한 대상으로서 파악하고 있는 유형의 소설 - 주류 소설, 순문학, 등등 - 자체가 다른 유형의 소설에 대해 어떠한 고유의 우월성도 지니지 않는 장르라고 하는 사실도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정열을 담아서 말씀드립니다. SF의 이러한 자기모멸의 태도에 종종 수반되는, 강도 높은 여성혐오증 - 일종의 편안한 여성 기피 - 이 저는 아주 싫습니다. 도리스 레싱, 마거릿 애트우드, 캐롤린 시, 패트리샤 기어리, 그리고 저 자신을 포함해 많은 작가들은, 외부의 세계로부터 와서 SF의 세계에 자리를 잡았고, 늘 자유롭고 간단하게 SF의 영역을 넘나드는 것을 반복해왔습니다. 우리가 우연히 여성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우리가 만든 게 아닌 규칙과 우리에게 있어 의미가 없는 경계선의 인정을 거부하는 것은, 20세기의 아홉 번째 10년기를 사는 여성이면서 작가인 우리들의 직접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 서문 중

 

 

나는 일부 아이들처럼 SF만 골라 읽지는 않았다. 손이 닿는 책이라면 뭐든 읽었고, 책은 끝없이 있었으니까. 집에는 책이 빼곡했고, 공립 도서관도 훌륭했다.

 

- 몬다스의 시민 중

 

 

물론 애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쓰는 일은 단순하긴 하다. 딱 애들을 키우는 것만큼.

 그저 성행위를 전부 제거하고, 간단하고 짧은 단어를 사용하고, 단순하고 어리석은 주제를 부여하고, 너무 무섭지 않게 만들고, 행복한 결말로 끝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지? 아무것도 아니잖아. 얼른 쓰라고. 지금 당장.

 이렇게만 하면 <갈매기의 꿈>같은 걸 써서 한 200억 달러쯤 벌고 미국의 모든 성인이 당신 책을 읽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의 모든 어린이들이 당신의 책을 읽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번 휙 넘겨보고는 그 또렷하고 냉정하고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속임수를 전부 파악한 다음, 책을 내려놓고 떠날 것이다. 어린이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먹어치우기는 하지만(좋은 일이다) 어른과는 달리 아직 플라스틱을 먹는 법은 배우지 못한 것이다.

 

- 꿈은 스스로를 설명해야 한다 중

 

 

많은 독자와 평론가들, 그리고 대부분의 편집자들은 문체가 작품의 여러 요소 중 하나인 것처럼 말한다.  ... 그러나 당연한 소리지만, 문체야말로 곧 작품이다. ... 문체를 제거하면 개요와 줄거리밖에 남지 않는다.

 

문체란 당신이 작가로서 대상을 관찰하고 그 대상에 관해 말하는 방식이다.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당신의 눈, 당신이 생각하는 세상, 당신의 목소리다.

 

- 엘프랜드에서 포킵시까지 중

 

 

한 위대한 초기 사회주의자는  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야말로 해당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평가하는 믿을 만한 시금석이 된다고 말했다.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대부분의 SF작품은 놀랍도록 역행적이며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다. 그 모든 은하 제국들은 1880년의 대영제국을 고스란히 옮겨왔을 뿐이다. 수많은 행성들은, 서로 80조  마일씩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삼는 민족 국가나 약탈의 대상인 식민지일 뿐이거나, 그것조차 아니면 자력 발전을 위해서 자비로운 지구 제국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존재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백인 남성의 책무가 등장하는 것이다. 로터리 클럽 알파 센타우리 지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미국의 SF와 타자 중

 

 

 

예술과 오락은 한몸이며, 깊이 있는 진정한 오락을 제공하는 작품은 보다 나은 예술인 겁니다. 예술은 무겁고 진중하고 지루하며, 오락은 겸손하지만 즐겁고 대중적인 것이라 간주하는 자세는 네오빅토리아풍 어리석음의 정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작가의 관점에서 보면, 글을 쓸 때의 선택이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거나, 느긋하게 앉아서 쓰레기를 뱉어내거나. 그리고 정말로 불공평한 점은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결과는 조금도 보장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노예처럼 일하더라도 헛소리가 나올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반대쪽 의도는 보증수표입니다. 그 어떤 작가도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을 먹지 않고서 우연히 명작을 써낼 수는 없습니다. 완벽을 지향하더라도 쓰레기가 나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쓰레기를 지향한다면, 어머나 세상에, 항상 쓰레기를 얻게 되는 겁니다. 완벽을 추구하면 최소한 95퍼센트는 실패하지만, 쓰레기를 추구하면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돌도끼와 사향소 중

 

 

그러나 노먼 메일러 씨의 창작물을 읽은 사람은 등장인물의 이름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도 사과할 필요가 없다. 물론 단 하나의 이름, 당연하지만 노먼 메일러라는 이름을 제외하면, 메일러 씨의 책은 브라운 부인에 관한 것이 아니라 노먼 메일러 씨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 SF와 브라운 부인 중

 

 

최근의 판타지 베스트셀러인 <갈매기의 꿈>은 진지한 책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진솔하다. 또한 지적으로, 윤리적으로, 감정적으로 하찮은 작품이다. 그 책의 작가는 깊은 숙고를 하지 않았다. 이 나라의 공업 특산품인 예쁘게 포장한 즉석 조리 해답을 밀어붙였을 뿐이다. 아주 빨리 날 수 있다고 생각만 하면, 놀랍게도 아주 빨리 날 수 있게 된다고 말할 뿐이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기만 하면 전부 잘 풀릴 거라고. 세상 모두가 잘 될 거라고. 당신이 미소를 머금기만 하면 캄보디아에서 다리가 괴사되어 죽어가는 남자와 방글라데시에서 기아에 시달리는  네 살 먹은 아이와 암에 걸린 옆집 여자도 훨씬 기분이 나아져서 당신과 함께 미소를 머금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희망찬 사고방식은, 고통과 패배와 죽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단호한 거부는, 훌륭한 성공을 거둔 미국인 작가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발견될 뿐 아니라 자먀친이 '실패'한 일에서 '성공'을 거둔 소비에트 작가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즉, 끔찍한 낙관주의를 가진 스탈린 국가상 수상자들 말이다. 질문을 멈추면, 스탈린을 당신의 영혼 안으로 받아들이면, 그저 웃고 웃고 또 웃을 수밖에 없다.

 

- 영혼의 스탈린 중

 

 

 

--- 밑줄 중 일부 옮겨 적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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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피카소가 그린 멋진 부엉이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요즘 미술가는 부엉이를 잡아다가 속을 채워서는 케이스 안에 집어넣어 버릴 것이다. 박제 말이다. 하지만 피카소의 부엉이는 한 인간이 부엉이를 관찰하고 그것을 설명한 결과이다. 그쪽이 박제보다는 훨씬 흥미롭다.
모든 픽처는, 뭔가를 관찰하고 그것을 설명한 것이다.

 



우리는 카메라 렌즈와 동일한 방식으로 세계를 볼 필요가 없다. 인간의 두 눈과 뇌는 렌즈처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픽처의 역사를 연속적인 것으로 보기 시작하면, 각기 매우 다른 시대와 지역에서 탄생한 이미지들 사이에도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픽처의 역사는 일방통행으로 직진하지 않는다. 모든 픽처는 특정한 문제,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시간과 공간을 재현할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하면 붓터치나 펜 자국을 사람이나 사물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직면한다.

나는 세계를 관찰하는 일을 즐기며, 우리가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보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하는 문제에 언제나 관심을 갖고 있다.

픽처는 세계를 재현하는 수단, 그리고 그것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수단이다.

픽처의 역사는 동굴에서 시작되어 (일단은) 아이패드에서 끝난다.

세켸를 2차원으로 묘사하는 일은 우리에게 영원한 문제로 남을 것이다.

 

 

 

 

---- 서론 중에서만 옮겨 적었다. 도판이 크고 선명한 것이 보기 좋기도 하고(세부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다), 적어두고 싶은 부분이 많아 일단 장바구니에 넣어 두었다.

예술가들이 카메라 옵스큐라나 사진을 어떻게 활용하였는가에 관한 부분은 호크니의 전작에서도 본 바 있고 약간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전반적으로는 술술 넘어가는 흥미로운 그림의 역사였다. 호크니가 동양 미술을 간간이 언급하는 것도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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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작품은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게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특징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취미, 의심이나 비판, 위화감이나 저항 등의 감정을 일단 젖혀두고, 말하자면 몰주체.몰아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몸을 두고 크나큰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이 바그너의 음악에서 감명과 도취를 얻는 최상의 방법이다. 또 그런 태도만큼 파시즘에 바람직한 것도 없으리라.
'예술과 정치는 별개다'라는 말을 받아들여야 할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대와 사상을 깊이 담지 못한 범용한 예술이라면 오히려 어떤 정치체제하에서도 편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그너의 예술이 빼어난 것은, 그것이 이 두 가지를 완벽할 정도로 융합해놓았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서 고민도 시작된다. 71

130中 지명은 니시오지구조인가 니시다이지구조인가.
인명은 후지노 노부루 ㅡ> 후지노 노보루로 고쳐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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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자들 - 셰익스피어에서 월트 디즈니까지, 위대한 예술가 17인의 창조 전략
폴 존슨 지음, 이창신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위대한 작가나 화가 또는 음악가가 악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사악한 면과 창조적인 면이 공존했던 천재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피카소처럼 사악한 측면이 인물 전체를 지배했던 창조자는 흔치 않다. p.431폴 존슨 책은 어느 정도의 재미는 보장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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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소설 미학을 몇 가지 열거해본다. 입말체 대화법, 빙산이론과 하드보일드 스타일, 그리고 남근중심주의 미학이다. 네 가지로 나눴지만 이들은 서로 겹쳐지는 부분이 많고 서로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헤밍웨이라는 하나의 실존에서 나온 것들이다. 네 가지로 나누어 있지만 실은, 헤밍웨이라는 한 인간의 다른 표현들이다.


헤밍웨이는 삶의 경험도 많고 어디 한군데 머무르지 않는 폭넓은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지만,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만큼은 단 몇 줄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단편적이고 단조로웠다.


ㅡㅡㅡㅡㅡㅡㅡㅡ
클래식 클라우드 피츠제럴드를 읽고 이어 헤밍웨이. 따로 떼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두 작가. 개인적으로는 피츠제럴드 편을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 위에 발췌한 부분이 그 이유 중 하나이려나. 파파는 가까이 하기엔 좀 부담스럽긴 하지..ㅡ.ㅡ; 올여름에 헤밍웨이의 쿠바 생활을 다룬 영화를 봤는데(제목이 기억이 안 나네) 책에 실린 사진을 보니 마사 겔혼 역으로 나온 배우는 겔혼 본인이랑 엄청 닮았네.. 그 영화에서도 헤밍웨이가 마사 겔혼을 대하는 태도는 정말 밥맛이었다..

'파리는 언제나 축제'는 정말 좋았지만, 장편 중에서는 '무기여 잘 있거라'만 재미있게 읽었고 나머지는..;;
올해가 가기 전에 단편을 영어로 읽고 그 문장의 맛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기는 하다. 그러려면 일단 단편집 원서 중고책을 사야지..집근처 알라딘에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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