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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독서논술,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입니다. 한국사편지를 가지고 직접 워크북을 만들어 수업하고 있는데, 이런 워크북이 나오니 정말 좋네요. 아이들 가르칠 때 정말 도움이 될 것 같아 체험단활동을 신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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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8 16: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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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그댑니다

 

암에 걸린 쥐 앞에 열두 씨앗 놓아둡니다

성한 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씨알 쪽으로

병든 쥐가 시름시름 다가가 그러모읍니다

오물오물 독경하듯 앞발로 받듭니다

 

병든 어미 소를 방목합니다

건강한 소들은 혀도 디밀지 않는 독풀

젖통 출렁이며 허연 혀로 감아챕니다

젖는 눈망울로 뿌리째 뽑아먹습니다

 

그대 향한 내 병은 얼마나 깊은지요

그대 먼 눈빛에서 낟알을 거둡니다

그대 마음의 북쪽에 고삐를 매고

살얼음 잡힌 독풀을 새김질합니다

 

내가 아프니까 비로서 그댑니다

 

 

 

나뭇가지 얻어 쓰려거든 

 

먼저 미안하단 말 건네고

햇살 좋은 남쪽 가지 얻어 오너라

원추리꽃이 피기 전에 몸 추스를 수 있도록

마침 이별주를 마친 밑가지라면 좋으련만

진물 위에 흙 한 줌 문지르고 이끼옷도 입혀주고

도려낸 나무 그늘, 네 그림자로 둥글게 기워보아라

남은 나무 밑동이 몽둥이가 되지 않도록

끌고 온 나뭇가지 채찍이 되지 않도록

 

 

홍 어

 

욕쟁이 목포홍어집

마흔 넘은 큰아들

골수암 나이만도 십사년이다

양쪽다리 세 번 톱질했다

새우눈으로 웃는다

 

개업한 지 십팔년하고 십년

막걸리는 끓어오르고 홍어는 삭는다

부글부글,을 벌써 배웅한

저 늙은네는 곰삭은 젓갈이다

 

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

단골 내 남자 왔다고 홍어좆 내온다

남세스럽게 잠자리에 이만한 게 없다며

꽃잎 한 점 넣어준다

 

서른여섯 뜨건 젖가슴에

동사한 신랑 묻은 뒤로는

밤늦도록 홍어좆만 주물럭거렸다고

만만한 게 홍어좆밖에 없었다고

얼음 막걸리 젓는다

 

얼어죽은 남편과 아픈 큰 애와

박복한 이년을 합치면

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

 

우리집 큰놈은 이제

쓸모도 없는 거시기만 남았다고

두 다리보다도 그게 더 길다고

막걸리 거품처럼 웃는다

 

이정록 시집 <정말>에서 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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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푸른 저녁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전자는

곧,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비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 없이 고개를 갸우뚱해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들을 주고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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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 정원 9

--번짐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강 1

   ㅡ흘러감

 

어느 깨달음이 저보다 더 예쁜 자세가 될 것인고

무엇이 저렇듯 오래 젊어서 더더욱 찬란할 것인고

강을 건너는 것이 어디 나뭇잎들이나

새들뿐이던가 봄이나 안개들뿐이던가

저 자세

저ㅡ 밑바닥에서 지금 무엇이 가라앉은 채 또한 강을 건너고 있는지

때로 강의 투명은 그것을 보여주려는 일

이 세상에 나온 가장 오랜 지혜를 보여주려는 일

 

가장 낮은 자가 가장 깊이 삶을 건너는,

가장 가벼운 자가 가장 높이 이승을 건너는,

 

어느 깨달음이 저보다 더 어여쁜 자세가 될 것인고

 

 

 

해남 들에 노을 들어 노을 본다

 

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해남 들 가운데를 지나다가

들판 끝에 노을이 들어

어찌할 수 없이

서서 노을을 본다

노을 속의 새 본다

새는

내게로 오던 새도 아닌데

내게로 왔고

노을은

나를 떼매러 온 노을도 아닌데

나를 떼매고 그러고도 한참을 더 저문다

우리가 지금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저 노을 탓이다

이제는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르지 말자고

중얼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저문다

해남 들에 노을이 들어 문득

여러날 몫의 저녁을 한꺼번에 맞는다

모두 모여서 가지런히

잦아드는 저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가슴속까지 잡아당겨보는 일이다

어쩌다가 이곳까지 내밀어진 생의 파란 발목들을

덮어보는 일이다

그렇게 한번 덮어보는 것뿐이다

내게 온 노을도 아닌데

해남 들에 뜬 노을

저 수천만 평의 무게로 내게로 와서

내 뒤의 긴 그림자까지 떼매고

잠긴다

(잠긴다는 것은 자고로 저런 것이다)

잠긴다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에서 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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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신현림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처절하게 울어 본 사람은 안다.

울음의 끝에선 슬픔이, 고통이 잠시 무너진다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우는 것은

인간에게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작은 출구가 된다는 것을.

실컷 울고 난 뒤 젖은 눈을 손등으로 쓱쓱 닦고 있는

슬픈 여인의 모습에 목이 메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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