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력의 변화와 맞물린 전투적인 페미니즘은 노동의 성격을 바꾸었다. 페미니즘에 찬성하는 쪽이건 아니건 점점 가정 밖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지지하는 남성이 늘어나고 있음이 여러 조사를 통해 증명되었다. 여성이 새로이 경제력과 자유를 가지게 되면서 운동은 힘을 잃어갔다. 집 밖에서 페미니즘의 성공은 쉽게 인정됐지만 집 안에서의 일들은 천천히 그리고 계속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곧 모든 페미니스트를 실망과 좌절로 몰아넣은 사실이 드러났다. 사회학자 엘리 러셀 혹실드가 "2교대 the second shift" 라고 이름 붙였듯이 여성들은 점점 바깥일을 하면서 여전히 집 안에서도 아이 양욱과 요리, 청소 등의 가사를 거의 모두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바깥에서의 혁명보다 집 안에서의 혁명이 더 어려웠던 것이다. 각 가정 내부에서 여성이 남쳔과 자식에게 뿌리 깊은 버릇을 바꾸라고 설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p78

 

가부장적 가정의 보통 여성이 생각을 바꾸고 자심의 삶에 페미니즘적 사고를 도입할 때 실제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기록은 거의 없다. 이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는 페미니즘이 가족을 바꿀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음을 알려준다. 홀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많은 이가 포기했고 항복했으면 패배감과 우울감을 맛봐야 했다. p79

 

우리는 모든 사람이 가정폭력을 겪지는 않았으며, 대부분 가부장적 사고를 옹호하고 높이 사는 가정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여자들이 배우자인 남자들보다 사랑을 주는데 능숙하다고 믿도록 교육받으며 가부장적 추정들을 수용하는데, 이런 추정은 친밀한 관계 내에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의 방식을 형성한다. 여성이 사랑에 더 적합하다고 믿는 남성과 관계를 맺는 여자들은 남자의 정서적 결핍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남자가 수종적이리라 예상한다고 해서 곧 남자가 정서적으로 더 적극적이길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도 기대한다. 이때 발생하는 비극적인 아이러니는 가부장적 사고가 남자들에게 정서적 수동성을 남성성이라 믿게끔 사회화했다는 것이다. 사회적 훈련은 남녀 간의 차이를 만들어내 우리가 그것을 '자연스러운'것으로 생각하게 만들며, 이는 동시에 갈등의 토대를 이룬다. p134

 

페미니즘이 단순히 그것을 선언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일이 되기 이전에 여성들은 의식화 모임에 참여함으로써 내적 변화를 거쳐 페미니스트가 되곤 했다. 모임에서 여성들이 둘러앉아 남자들을 욕할 거라는 모두의 근거 없는 전형적 믿음과는 달리, 이런 모임은 대부분 우리가 우리 자신과 다른 여성들을 어떻게 보고 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면서 시작된다. 우리는 다른 여성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과 증오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질투의 정치 등에 맞서 싸우는 법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성차별적 방식을 비판하고 바꾸는 것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의 일부다. 자매애는 생리, 외모에 대한 집착, 남자를 욕하기 등 단순히 우리가 무언가 공유한다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자매애는 불만이 있거나 스스로가 희생자라고 느낄 때뿐아니라 언제든 서로와 자기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p169-170

 

의미 있는 변화는 곧 상실을 마주해야 함을 뜻한다. 아무리 필요한 것이더라도 뭔가를 포기할 때에는 언제나 위험부담이 있다. 그럴 때 보통 우울증을 앓곤 한다. 베스 베나토비치가 인터뷰한 여성들은 모두 변화를 끌어안기 위해 거처야 했던 두려움과의 사투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인터뷰에서 일본계 미국인 작가 제니스 미리카타니는 이렇게 말했다. "변화는 많은 사람에게 쉽지 않다. 사람들은 종종 나쁜 현실을 변화보다 선호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긍정적인 힘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악함을 감수하려고 한다." 많은 여성이 그런 상황에 정체되어 있기를 선택한다는 사실은 왜 그들이 사회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자아실현을 이뤄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는 여성들을 의심쩍어하며 공격하는지 설명해준다. p184-5

 

특히 많은 것을 성취한 강한 여성에 대한 부정적이고 전형적인 성차별적 이미지에 페미니즘이 열심히 도전하고 있지만, 이런 이미지는 여전히 우세하다. 이런 전형적 이미지가 대중문화의 상상력을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독립적이고 강하며 성공을 원하는 여성이 쌍년bitch이라는 생각은 쉽게 받아들여 진다. 성공한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전형을 굳히는 이런 이미지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한편 젊은 여성들은 자아실현과 성공을 택할 때 당할 처벌과 고통을 굳이 대면하지 않을 길로'쌍년' 이미지를 받아들이려고 한다. 물론'착한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뛰어넘으려는 여성들에게는 대담함이 요구되지만, 이런 이미지가 바깥에서의 전통적 성차별적 개념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전통적 성파별적 개념을 여성을 성녀 혹은 창녀, 성러러운 양육자 혹은 이기적인 쌍년으로 나눈다. 쌍년이 되기를 택하는 것 역시 실질적으로 성차별주의가 규정한 경졔 안에 머물기를 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군도 혁명가도 아니다. 단지 강해지려면 쌍년이 되기를 감수해야 한다고 하며 성차별적 개념에 굴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p190

 

쌍년 페르소나를 인정한다면 강한 여성도 사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셈이다. 쌍년으로 불리는 게 근사하다고 생각한다면 사랑에 대한 경멸을 훈장처럼 여기는 것과 같다. 정서적 성장과 보살핌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가부장적 남자를 따라하며 그들은 '쎈'페르소나를 즐긴다. 나이가 젊든 더 들었던, 쌍년 카테고리에 안주하는 여성들은 여전히 성차별주의적 여성 혐오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여성이 용기와 기품을 가지고 자신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대신 그들은 온전히 자아실현의 길을 택한 여자를 쌍년으로 만드는 성차별적 관념을 지지함으로써 가부장제를 돕는 것이다. p192

 

사랑할 줄 아는 남자를 찾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남자는 사랑하지 않는 대신 가부장제가 가져다준 보상과 권력의 형태에 여전히 연연한다. 가부장제는 남성들이 스스로를 사랑하게 하지 못하게 하고 온전한 자신을 부인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상처 입힌다. 그러므로 사랑을 알고자 하는 남성들 역시 가부장제에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저항을 시도하는 남자들이 분명히 있으며, 여성들은 그런 남성을 찾고 있다. p220

 

남성을 향한 성차별적 태도를 의식적으로 지울 때 우리는 남성을 더 제대로 평가하고 우리가 마주치는 진짜 남자들을 좋아할 수 있을 것이다. 성차별적 사고를 가진 남자든 자유주의자든 자애로운 남자든 가부장이든 내가 알고 있는 몇몇 남자를 나는 좋아한다. 굳이 파트너로 고르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그들에게서 다른 미덕들을 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그들의 성차별주의를 허용하거나 용납한다는 뜻이 아니다. 남녀 모두 가부장적 사고를 받아들이도록 사회화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남자에게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문제는 가부장제다. p221

 

세상은 아직 신남성을 완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의 행동은 그 어떤 페미니즘 이론보다 남성성에 대한 관습적인 믿음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 스톨튼버그의 『남성의 종말』은 그들이 가부장적 남성성을 거불할 때 어떤과정을 거치는지를 자세히 보여준다. 저자는 남자들이 가부장적 남성보다 정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각 있는 남자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는 건 다른 남자들이 당신의 남성성에 대해 찬단하는 기준에 매달리기보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신의가 언제나 더 중요하다고 믿기로 선택했다는 뜻이다." 진보적인 남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제 평등에 대한 여성의 참여 양상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성차별에 반대하는 남성들이 등장하자 페미니즘이 여성을 우위에 두는 것이라고 여겼던 이들은 궁지에 몰렸다. 진정한 평등은 여성이 마음의 문제, 양육과 사랑의 행위에서 '우월한 성'이라는 생각조차 버려야 함을 뜻한다. p236

 

그들은 여성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좋은 남자'들이다. 그들과 함께라면 여성들은 성폭력의 위협이나 지배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들에게는 여성을 공격함으로써 증명해야 하는 남성성이 없다. 좋은 남자에 대한 유용한 정의를 제안하며 실버스타인과 래시봄은 다음과 같은 통찰을 보여준다. "좋은 남자는 좋은 여자와 마찬가지로 공감할 줄 알고 강인하며 독립적이면서 연결되어 있고 자신과 가족, 친구, 사회에 책임감을 느끼며 그런 책임감이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p237

 

페미니즘이 여성의 전유물일 떄 가부장적 문화는 별로 타격을 입지 않는다. 남성이 더 많이 개입할수록 페미니즘 문화 혁명은 가부장제를 끝낼 수 있는 위협이 된다. 페미니즘은 이 같은 삶을 긍정하는 희망찬 변화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맹렬히 공격받았다. 그 어떤 반동적인 프로파간다도 페미니즘이 이미 여성들이 원하는 상호적 사랑을 줄 수 있는 신남성들이 존재하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신남성 중에는 사랑할 준비를 갖춘 게이들도 많으니, 이성애자 남성들은 그들을 역할모델로 삼을 수도 있다. 남성 파트너와 함께 사랑을 탐색하기를 원하는 여성들은 우선 가부장제 안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인식이 확산될때 더 많은 남성이 해방을 선택할 것이다. p238

 

존 웰우드는 『사랑과 각성』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교감하는 방법도 모르면서 누군가와 사랑하게 되면 그런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한다. (…)종종 우리는 누군가와 맺는 관계가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닮아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즉 타인과의 관계는 그저 내면의 삶의 확장에 불과하며, 자기 자신과 열려 있는 관계를 맺을 때에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과거에 여성들은 어릴 때부터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만족할 수 있는 교육적 여건에 놓이지 못했다. 그리고 여전히 (소녀기에 대한 모든 학자들이 말하듯) 사려 깊고 자기 성찰적인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들만큼 스스로를 탐구하도록 장려되지 않는다. 중년의 여성은 자신의 경험에 대한 진실을 젊은 여성들에게 이야기해준다. 사랑은 우리가 내면의 사랑을 발결한 수 있을 때에만 찾아온다. 그리고 사랑의 여정은 자기인식을 감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p294

 

 

 

 

글을 쓰기 시작했을때와 지금 글을 맺으려고 할때 마음상태가 달라져 버렸다.

무언가 주절거릴 말들이 있었던것 같은데,

월급명세서와 카드명세서를 나란히 놓고 보니 아무 할말이 없어지네.

 

 

내가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이 책을 공공장소나 회사에서 읽을때

표지를 가리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어느정도 드러나는듯 싶다.

사랑은 부수적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는 사치 일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저자의 말을 보면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수 없는

제도 때문에 여자들이 그리고 남자들이 괴로운거 라고 하는데

인류가 언제 그렇게 사랑 넘쳐났던 시절이 있었던가.....?

 

 

 

내맘대로 별점 ★★★

서구 페미니즘 책은 이제 좀 접어둘까 싶다.

 

 

 

다음 읽을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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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10-12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급명세서와 카드명세서..... Orz

아무개 2016-10-12 16:24   좋아요 0 | URL
세금만 거의 40만원돈.
국민연금. . .크흡

하이드 2016-10-12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사랑이 뭔가요?

아무개 2016-10-12 16:24   좋아요 0 | URL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이드 2016-10-12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 책은 저도 어서 읽고싶네요.

아무개 2016-10-12 16:25   좋아요 0 | URL
저는 내일부터 읽을 예정입니다.

단발머리 2016-10-12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이 여성의 전유물일 떄 가부장적 문화는 별로 타격을 입지 않는다. 남성이 더 많이 개입할수록 페미니즘 문화 혁명은 가부장제를 끝낼 수 있는 위협이 된다.˝

이 문장이 와서 박히네요. 가부장제를 끝내기 위해 결국은 남성의 개입이 필요한가.
얼마만큼의, 어느 정도의 남성이 필요한가.

읽었던 책인데, 아무개님 밑줄을 정좌하고 읽는 동안 이 새로운 느낌은.... 뭘까요? @@

아무개 2016-10-12 16:28   좋아요 0 | URL
기득권이 참여를 하게되면 아무래도 변화에 좀더 속도가 붙고 크기가 커지겠지요. 자신들이 기득권이라 믿었던 그것이 사실은 족쇄라는것을 깨닫게 하는게 우선인듯 싶어요.

저도 다른분들 밑줄 볼때마다 읭? 이런게 있었나? 그래요. 사람은 정말 자기가 보고싶은것만 보는것 같아요^^;;;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 부끄러움을 모르는 카리스마, 대한민국 남자 분석서
오찬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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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시간들여 읽을 만한 책은 아닌듯. 페미니즘에 관심있는 여성들은 이미
생각해왔고 말해왔던 부분들에 대한
몇몇남자들의 뒤늦은 깨달음 또는 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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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holoudly 2016-11-29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해요. 반성문에 가까워 술술 읽히는 책이네요. 날카로운 분석을 기대했는데 아쉬웠습니다.
 
의지력의 재발견 - 자기 절제와 인내심을 키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
로이 F. 바우마이스터 & 존 티어니 지음, 이덕임 옮김 / 에코리브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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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자기성찰하고 눼눼
살빼고 싶을땐 다이어트하지 말고(?) 절대로 안돼 같은 말 하지말고 오늘은 안돼 라고 할것.


하아. . 역시 이런책으로는 안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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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어떤 여성들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노라 하고 어떤 여성들은 오히려 예전보다 못하다고 말할한다.여하튼 '남성 폭력'은 유례없이 확실하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제부터 성폭력은 다른 사회적 폭력과 동일시되었다. 남자들은 (여자들은 지배한다는 이유로)죄인으로 몰려 손가락질 받게 되었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하고 있다. 게다가 많은 사회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자연이나 문화에서 남성 지배는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라고 함으로써 '남성 지배'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결론은,'여자는 항상 어디서나 열등한 위치에 있고 실제적 또는 잠재적 희생물이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임신하여 아이를 낳는 분야'에서는 여성들이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여성들은 거의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모든 결론을 도툴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p19

 

생물학적 차이가 인간을 평가하는 최종적인 잣대가 되면서, 남성과 여성을 대립적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p197

저자는 남성과 여성의 성(性) 분리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여성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는 분야'에서 뒤쳐지지 않는 다는 것이 도대체 누구에게 무엇이 뒤쳐지지 않는 다는 것인지 이해할수 없다. 남성에게는  출산을 위한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 하지 않는 능력을 가진 상대방과 비교하여 무엇이 더 낫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여하튼, 90년대 신페미니스트들처럼 '남성 지배'에 동의하다 보면, 이제는 두 배로 더 불편해진다. 우리에게 제시된 치유법도 그렇고 진단법도 그렇다. 가장 비관적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서양 여성의 신분과 행동 양식이 상당히 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진보가 불가능한 인간 부류인가? 남성의 본질(남서의 지배)은 요지부동의 것인가?

우선 여성 계층과 남성 계층이라는 대립된 층으로 일반화 하는데에서 오는 불편함이 있다. 남성/여성 계층을 양분화 시킴으로써 그간 페미니스트들(90년대 이전의 페미니스트들)이 전력을 다해 반대해 오던 본질주의의 함정으로 다시 추락하는 것은 아닌가? 사실상, 모든 남성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남성다움'이라는 것은 없다. 여성다움에도 여러 종류가 있듯이 남성다움이라는 것도 여러 양상을 띤다. 이원적인 카테고리는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구속적인 구도를 위해 현실의 복합적인 측면을 지워 버리기 때문이다. 하나의 성을 하나로 묶어서 비난하는 것도 성차별주의와 비슷하기 때문에 불편하다. p70-1

 

 

우리가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권력 남용의 또 다른 예가 있다. 30년 전부터 여성들은 임신-출산의 권리를 독점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임신 여부를 결정짓는 것이 여성이라고 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듯하지만 만일 남자가 아이의 출산을 원치 않는 경우, 이는 남자의 정액을 이용하는 '권력 남용'이라 할 수 있다. 무관심해서 혹은 여자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아서, 한 남자가 아이를 낳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은 상당한 진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남성이 원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여성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출산한 후, 남성에게 부성애를 강요하는 것은 '정신적 침해'라고 할 수 있다. p113-4

복합적인 측면을 이야기 하면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폭력과 임신과 출산에서의 여성의 권력을 이야기 한다. 수치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나는 전혀 동의 할수 없는 의견이다.

프랑스의 백인여성이 임신-출산의 권리를 독점하였는지 알수 없으나, 현재 한국에서 부녀자가 강간 심지어 인척에 의해 임신하였을 경우 남편의 승인이 없이는 낙태를 할수 없고, 만약 할 경우 그것은 불법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임산부의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도 임산부는 스스로 낙태 결정을 내릴수도 없다.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게 된 것도 성(性) 본능때문이며, 이 성에 의해 여성의 사회적 열등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면, 본질주의 또는 문화주의 철학 중 어떤 것을 선택하는 가에 따라 두 가지 다른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우선, 본질주의 철학적 관점은 남자의 성과 여자의 성의 분리를 주장하게 되고, 따라서 이성애에 대한 거부감을 유발시킨다. 두 번째로 문화주의 철학적 관점은 남자의 성 본능을 변형시키기 위해 투쟁한다. 미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부터 이 두개의 선택 사항에 대해서 페미니즘의 이론들이 상당히 발전되어 가고 있었다.p160-1

 

만일 문화주의 페미니즘의 공식적인 목표가 더 이상 남자의 본질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남성의 병적인 증상(포르노, 희롱, 폭력, 매춘, 강간)만을 억제하려는 것이라면, 요사이 남성에 대한 비판은 너무도 과격한 것 같다. 그리고 이 세상 대부분의 남성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여서 오로지 극소수의 남자들만이 이 맹렬한 비난을 피해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p162

 

 

성(性) 문제에 있어서 현재의 방어적 페미니즘은 완전히 이중적 모순에 빠져 있다. 여성 자신들의 성해방에 대해서는 일언반두 없이, 남자의 성을 제한하는 점점 더 엄격한 틀만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이 틀은 여자의 성까지 제한하게 된다. 성범죄에 해당하는 영역이 점차로 확대되고,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몇 년 전부터 자리 잡게 되어, 결국 합법적이고 도덕적이며 신성화된 섹스란 것이 제시되기에 이르렀지만, 이것은 신세대들이 향유하는 -어떤 사람들은 남용이라고 할-성적 자유와는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게다가, 남녀 차별주의를 마다하지 않는 이 페미니즘은 성의 유사성이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곳에서 유사성을 주장하고 있다, 남성의 절대권레 대항하는 투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여성성에 남성을 끼워 맞추기 위해 남성성을 파괴하는 것은 오류이거나 또는 실수이다. 남자를 변화시키자는 것이 남자를 없애 버리자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와 '다른 하나'가 존재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하나'가 '다른 하나'가 될수 있기 때문이다.p175-6

 

그들은 여성들이 지난 30년간의 큰 승리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이런 여성에 대해 자신들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말했다. 소유권을 박탈당했거나, 어찌할 바를 모르거나. 비통해하거나 불안한 상황에 빠진 남자들은 그들의미래상에 대해 아주 끔찍한 악목을 꾸고 있었다. 앞으로는 물건과 다름없는 남자, 거세된 남자, (번식에 있어서까지도)무용지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남자들은 그들을 KO시킨 '여자 챔피언'에 대해서 말했으며, 젊은 남자들은 '여성들의 지배'에대해 운운하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들의 새로운 경쟁자인 여성을 다소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예외적인 조사를 읽다 보면 남자들은 대체로 그들에게 강요된 변화 때문에 희생되었으며, 자신들이 부당하게 비난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여성들에게 절대적 힘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여성 자신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사실, 페미니즘은 이데올로기적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남성들로 하여금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도덕적 힘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남성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을 좌우할 수 있는 힘, 즉 경제권과 재정권을 남이 부러워할만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모르는 체하고 있다. 남자보다 교육수준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실직률이 남성 실직률 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것이 필요하다. 동등한 교육 수준을 가잔 남녀 간의 급여차는 언제나 여성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고 프랑스 최고 기업 5천개사에서 여성 간부는 8%에 그치고, 프랑스 최고 1백20개 대기업 이사의 5.26%만 여성에게 할애되었다는 것만보아도, '유리 천창'이 신화가 아니라는 것을 아 수 있으며 , 끝으로 많은 남자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우월성을 내세워 가족과 가사에서 필수적인 의무를 배우자에게 모두 떠넘기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p184-5

 

 

나는 여성학을 제대로 공부해 본적이 없다. 그저 띄엄띄엄 관심이 가는 책들을 찾아 읽는 정도이고 특히나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실제와 강단 철학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처음 충격과 전율을 느끼며 읽었던 책이 정희진 씨의 책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접한 대부분 페미니즘 도서들은 '제1세계의 백인이성애자' 들이 서술한 책들이다. 그들에게는 구페미니즘, 신페미니즘을 나눌만한 여러갈래의 지나온 길이 있는것 같다.

이책을 읽으며 저자의 주장에 대부분 동의할수 없었던 것은, 저자 스스로 문화주의 페미니즘을 주장하면서 제3세계나 동성애자들등 자신보다 문화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위치에 있는 여성들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다.

잘못된 길에 대한 비판은 구구 절절 하지만 가야할 길에 대해서는 흐리멍텅하다.

 

 

 

평등이란, '동일한 것(=)'을 기반으로 할 때 가능한 것이지, '서로 다른것(≠)' 으로부터는 성립될 수 없다. 이 기본적인 논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평등'이란 용어의 의미만을 강조한다면, 결국은 원하던 것과 정반대로 나아가게 된다. '서로 다른 것들 안에서의 평등'에 호소하는, 즉'남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성동등주의'는 시한폭탄과 같은 것이다. p219

 

생각해 볼것들.

 

1.영원 불변하는 남성성/여성성 따위는 없다고 나 역시 생각하지만, 남성과 여성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존재한다. 물론 그 차이의 폭은 개개인에 따라 크게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등을 주장할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것인가?

2.성매매 여성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수 없는 금치산자와 같은가? 성매매 정당화 하고 성을 파는 이를 보호할것인가? 그들을 노동자로 인정하면 그들이 보호가 되는가? 남성에게 성매매란 무엇인가? 모든 일에 지극히 이성적이라는 남성들이 오로지 성에 관해서는 어째서 늘 '주체할수 없는 성욕'이라고 하는가? 호르몬때문에?

 

 

 

 

 한남충, 살인마로 일반화 되고 있다고 억울해 하는 남성들이 읽으면, 무릎을 탁 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깔끔하게 ★

동의하지 않는 글들을 대부분 발췌했다.

 

 

 

 

 

 

 

 

 

 

 

 

 

 

 

 

올해 안에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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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귀농이나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며 가난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세련된 이들이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자발적 가난'이라고도 한다. 가난을 정치적이나 도덕적 실천 차원에서 '선택'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가난이 아니다. 삶의 태도다. 그러나 가난은 '무소유'를 선택하는 삶의 태도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가난'이라는 언어마저 가난한 이들은 빼앗기고 있다.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이다. 선택하지 않았다는 건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나기 어렵다는 뜻이다. 열심히 '노오력'한다고 해도 빈곤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을 때 노동 의욕도 함께 사라지기 마련이다. 벗어날 수 있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점차 사라지고, 빈곤은 그렇게'순환'한다. p39

 

지금도 여전히 '매일, 그 시간에, 그 장소에 학교가 끝나면 와야'하는 운명에 처해진 '가난한 아이들'이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부모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아이를 모른 척하는 사회의 방관 속에서, 그 아이들은 가해자로 성장할 수도 있고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관심은 내팽개치고 '감시와 처벌'의 사회를 구축하려는 꼼수만 부린다. 느슨한 처벌을 강화할 필요는 있으나 처벌강화가 곧 사건의 해결책은 아니다. 사회적 안전장치도 부모의 보호도 없는 빈곤 계층의 아이들이 무방비로 놓여 있는 허술한 구조를 개선하지 않는 한 , 같은 문제는 반복될 것이다. 가해자 응징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난한 아이들이 '실종'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튼튼하고 촘촘한 사회적 제도다. p49

 

여성을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출산을 하거나 남성의 성욕을 위한 '거대한 자궁'이라는 틀에서 바라보면 여성이라는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이 생물학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출산을 했으면 여성으로서 임무를 수행한 셈이고, 그렇지 못하면 마땅히 공격받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여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많은 담론들이 이렇게 여성의 몸에 갇혀 있다. 반면 그들의 생각이나 표현은 아버지, 남편, 애인, 오빠라는 남성의 영향 아래에 둔다. 여성을 비판하는 방식에서'성별'을 떠나 그가 맡은 역할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p63

 

 

24시간 영업은 고객의 입장에서는 편하지만 그 때문에 누군가는 한밤중에 일해야 한다. 주말, 밤, 점심시간, 여름휴가 등을 챙길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결국 어느 계층에 속해 있느냐와 직결된다. 노동 빈곤 계층은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시간의 약자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하는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꽉 찬 노동의 시간, 휴식 없는 고된 시간을 보내는 노동자의 일상을 상징한다. 이들은 시간을 빼앗기고 빼앗기다 극단적으로는 '삶'을 통채로 탈취당한다. 자살이라고 명명되는 타살이 그것이다. 살아갈 시간이 부족하다. p91

 

설치 반대를 위한 오체투지와 결사적으로 유치하기 위한 삭발 투쟁이 둘 다 벌어졌다. 자연을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벌어지는 사안에서 늘 반복되는 일이 있다. 한쪽에서는 지역 경제를 살리자며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의 마음을 드러내고, 다른 한쪽에서는 생태 파괴를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한다. 이 문제가 과연 경제 발전과 환경보호의 충돌일까. 경제와 환경의 대립이라는 틀은 눈속임에 가깝다. 경제 효과의 실체는 알 길이 없다. 경제를 살린다'는 언설은 많은 사안들을 아주 단순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메르스로 인한 경제 손실'로 불안감을 조성 하고 '임시 공휴일로 인한 경제 효과'로 기대를 부풀린다. 급기야 재벌 사면도 국민경제를 살인다고 한다. 재벌을 위한 특혜가 국민경제 살리기로 둔갑하듯이, 지역의 케이블카 설치는 지역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추진된다. 케이블카 설치는 실제로 '국민'이나'지역'보다는 특정 계층에게 특혜를 주는 사업이다 .수년간 진행이 안 되던 사업이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의 평창동계올림픽 추진위원회 방문 이후 가속도가 붙었다. (주)설악케이블카는 박정희의 사위인 한병기에서 그의 아들 한태현과 한태준에게로 이어지는 사업체다. p101

 

현실에서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모두에게 있지 않다. 게다가 어디까지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고 어디부터 폭력이 되는가. 이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어와 목적어다. '누가'표현하는가. '무엇을'표현하는가, 특히 표현하는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표현하는 자의 위치이며, 표현의 주제가 표현의 맥락을 완성한다. '누가'라는 주어를 괄호 속에 감춘 채 외치는 표현의 자유는 종종 오만한 힘의 과시가 되기 십상이다. 탈북자 단체의 대북 삐라 살포는 표현의 자유로 받아들여졌지만 트위터로 '우리민족끼기'를 리트윗한 박정근은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어 무죄가 확정될 때까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그 박정근은 북한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풍자와 조롱'의 의미로 리트윗했을 뿐이었는데도 말이다.

정작 자기 검열이 필요한 이들은 과도한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행위, 가령 약자 조롱과 혐오)을 하고 있으며, 표현을 제한받는 이들은 과하게 자기 검열에 시달린다. 검열하는 자와 검열당하는 자가 누구인지 생각하자. 자신을 들여다보는 자와 타인을 심판하는 자가 나눠진 이 규범은 전혀 정의롭지 않다. 이성애의 표현을 동성애자가 심사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무엇이 검열당하는가'보다 '누가 검열하는가'로 고개를 돌려야 한다.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고 검열의 대상이 되지 않는 표현에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의 침묵을 담보로 얻는 표현의 자유는 특정 표현의 독주가 될 뿐, 민주주의와는 무관하다. p109

 

여성의 몸이 '미'의 대상으로 추앙받는 데 반해 벗은 남자의 몸은 금기시된다.여성이 '이미지화' 된다면 남성은 '언어화' 되기 때문에, 남성은 의미를 만들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체이지 미적 대상이나 성적대상의 주제가 되지 않는 편이다. 주체/능동/남성적-객체/수동/여성적이라는 문법 속에서 '말 없는 여성의 이미지'는 계속 육체를 중심으로 의미를 가지며, 남성의 시선에 의해 해석되고 관찰되는 것을 넘어 폭력적인 시선의 침범을 받고 있다. p157

 

'페미니즘은 노동문제에 무관심하다'는 공격은, 늘 노동하고 있는 여성의 노동을 지속적으로 지우는 습관과 무관하지 않다. 의도적 무시가 일어나고, 그 무시가 굳어져서 실제로 사회는 여성의 노동에 무지하다. 노동하는 인간과 노동에 대한 의제를 남성의 것으로 만들며, 여성을 남성의 경제력에 의지해서 사는 비노동 인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비노동 인간이 남성의 돈으로 즐긴다는 공식은 점점'요즘은 남자가 불쌍한 여자들 시대'라는 망상을 낳는다. 시장에서는 부추기고 일상에서는 혐오하는 여성의 소비는, 그 실체와 무관하게 화려하고 거대한 포장지로 싸여 있다. p168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공감 능력은 감수성의 영역만이 아니라 치밀한 이성과 부단한 노동으로 얻을 수 있다. '애처가'나 '공처가'라는 말의 존재가 이미 남성의 감정 노동이 얼마나 특별한지 알려 준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애처가'라고 분류될 정도로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애기다. 또한 남성은 '현부'이기를 강요받지 않고 '가장'으로 산다. 남성이 생물학적으로 감정 노동을 못하는 동물이라는 근거는 없다. 오히려 그들이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고 아부라는 것도 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자 . 여자들은 이벤트를 좋아한다? 이벤트를 좋아한다기 보다 옆구리 찔러서라도 감정 노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의 감정 표현은 여성에 비해 협소하다 .사회적으로 여성이 감정 노동을 강요받는다면, 남성의 눈물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으로 최급되는 등 남성은 감정을 억제할 줄 알아야 남성답게 여기기때문이다. 감정은 통하고 흘러야 한다. 사랑은 노동이다. 관계를 생성, 유지 나아가 말소시키는 순간까지도 상당한 육체적, 감정적 노동이 요구된다. 타인은 나의 쉼터가 아니다. p188-9

 

술맛과 커피맛을 돋게하는 여자는 필요로 하지만 묘하게도 술자리 바깥에서 그들은 도덕의 심판을 받는다. 다방 여자'나 '술집 여자'는 비하와 멸시의 대상이다. 또 술을 남자처럼 마시는 여자도 기존의 도덕에 어긋난다. 술에 취해 몰래카메라 퐐영을 당하거나 물리적 성폭력을 겪었을 때 피해 여성을 향한 비난은 여전히 큰 목소리를 낸다. 술 먹고 제 몸을 못가누는 여자에는 자기 몸 관리 못한다고 탓하지만, 술 먹고 남의 몸을 침범하는 남자에게는 그저 '술 탓'이라며 관용을 베푼다. 그래서 많은 가해자들이 여성을 성폭행해도, 살인을 해도, '술김에'라는 변병을 하고는 한다. 실제로 친절한 판사들은 '술 탓'에 어느 정도 동조해 주고 있다. 술, 도박, 그리고 여자는 남자가 '빠지지'말아야 하는 대표적인 위험물이기에 남자들이 '조심'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내탓이 아니라 술과 여자 탓이기 때문에 '소라넷'이라는 사이트에서 술 취한 여성을 대상으로 공개적으로 강간 모의를 벌이기도 한다. 술취한 여성은 일종의 '공공재'다.p226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무엇을 할 것인가, 다 좋다. 다만 그 이전에 필요한 질문은 도대체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생명체인다. 그것이다. 바뀌지 않는 '나'들이 바꾸려는 대상과 세상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타인을 품평하고 세상을 논하는 자들이 주변을 피폐하게 만든다. 이들은 제 주변의 약자를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로 이끈다. (...)구타 그 자체가 아니라'구타유발자들'을 교정시키려는 습관이 있다. 여성은 '악의 유발자'이며 동시에 '악의 배출구'다. '맞아야 할 이유'혹은 '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p240

 

여성이 조심하도록 강조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남성의 폭력을 불가피한 본능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진짜 폭력은 바로이 관념에 있다. 한쪽은 폭력을 피하도록 기럴지고 다른 한쪽은 폭력이 폭력인 줄 모르게 길러진다. 남성의 폭력성을 통제 불능의 본능처럼 여기기에 상대적으로 그들의 행위는 법 앞에서도 고의성이 적은 폭력으로 인정받는다. 남성의 폭력은 늘 '우발적'으로 규정된다. '위威'는  창으로 여자를 위협하는 것으로 '위엄'을 뜻한다. '남자다움'의 밑바탕에는 약자를 향한 힘의 과시가 깔려 있다.

어릴 때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 치마를 덜렁 틀쳐 올리며 낄낄거리는 행동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건 일종의 '놀이'다. 놀이지만 여자아이는 운다. 추행과 놀이의 개념은 이렇게 혼선을 빚는다. 가해자는 자신이 도대체 어떤 '가해'를 했는지 인식하기 어렵다. 사소한 농담, 장난, 친근감 표시일 뿐인다. 피해자가 폭력 피해 사실을 '인정'받으려면 누구나 명명백백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로 죽기 직전까지 되거나 죽어야만 한다. 목숨을 걸고 저항의 흔적을 남겨야 폭행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해괴한 상황이다. p243

 

 

성매매가 필요악이라는 주장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분석보다는 남성의 성욕은 반드시 배출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성욕을 '받아 주는'여성이 필요하다는 가부장적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울러 성매매에'유연한'사회에서도 남성 판매자와 동성애 성매매에 대해서는 이중적 시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여성' 성 판매자가 아닌,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남성 성판매자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남성 성 판매자는 성매매의 비주류다, 이들은 더욱 음지 속에 있다. 성매매가 함법화된 국가에서도 자연스럽게 성 판매자는 여성에 국한된다, 성 판매자가 특정 성별에 집중되어 있듯, 성 구매자 역시 특정 성별과 성적 지향성에 편중되어 있다면 이는 불가피한 성욕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 .성매매라는 제도는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p257

 

예외적으로 낙태를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의 '배우자 동의'조항에도 모순이 있다. 이법에 따르면 산모의 건강을 해치는 경우는 물론, 강간이나 인척에 의한 임신 등의 경우에도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야만 낙태가 가능하다. 현행 모자보건법에서의 배우자(남성)는 임신한 여성이 낙태를 했을 때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느 주체는 되지만, 임신이나 출산. 양육등의 문제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것이다. p261

 

임신은 오직 여성의 몫이고 불법 수술을 맡은 남자는 이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성관계(성폭행) 요구도 서슴지 않는다. 생명 존중? 사람이 '살아가는'세상이 사람을 존중하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되면 낙태는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출산률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p263

 

그렇듯 성희롱은 대체로 권력관계에서 벌어지기에 여성과 성소수자의 노동환경을 더욱 악화시킴으로써 경제적 약자를 더욱 약자로 만든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런 측면을 감안한다면 성희롱은 개인간의 분쟁이라기보다'차별이 가능한 사회'속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범죄'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타자에 대한 희롱은 그 존재에 대한 존중의 결핍, 즉 차별 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차별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행동은 취향의 다양성이나 표현의 자유와는 무관하다. 파리의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포스터의 글귀다. "차별은 견해가 아니라 범죄다."p278-9

 

사랑을 바라보는 인간 사회의 기준은 아주 편파적이다. 사랑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범주도 한정적이며, 욕망이라는 상당히 협소한 개념에 갇혀 잇다. 욕망은 이성애 어른의 전유뮬이다.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성적욕망이란, 법적 기혼자만이 당당히 표출할 수 있는 권리다. 이성애자라 하더라도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욕망을 드러내기는 어렵다. 국립국어원에서 '사랑'의 의미를 "남녀 간의 사랑'으로 한정했듯이, '강제적 이성애'속에서 사랑,욕망, 성관게 등의 언어가 가지는 의미는 제한적이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대부분 자역적으로 발생하는 성질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되는' 결과이다. 이 '되는'과정은 법과 제도, 관습 등에 대한 순응을 필요로 하며, 그 순응하는 '나'에게 우울이란 질병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니 성소수자 청소년 집단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 것을 이 강제적 이성애 사회에서 지극히 논리적인 현상이다. p287

 

성욕이 인간에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본 욕구라는 관념이 다른 많은 담론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성적 욕망과 자극이 모든 인간의 본능이고 필수처럼 여겨지는 관념 속에서 무성애의 삶은 뭔가 문제가 있는 '비정상'으로 치부된다. 그래서 때로 무성애자들은 '정상'이 될 수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은 소수이며, 보편적으로 인간에게는 성욕이 있기는 하지만 소수라고 해서 비정상으로 구정하면 곤란하다.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필리프 브레노는 "만약 성생활이 없는 삶에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병리학적으로 문제가 없다"라고 한다. 그렇다 문제 없다. p307

 

노동, 여성, 성소수자등 삶의 변방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자들에 관한 짧은 글들이 묶여져 있다. 

 

남성들의 의식이 바뀌어서 양성평등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고, 강제적으로 사회 제도가 바뀌어야 그 제도에 맞추어서 남성들의 의식이 바뀌게 될것 이라는 글을 보았다. 지금까지 여성들은 수세기동안 맞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해도 참고, 상냥하게 말하고 그리고 또 참고 상냥하게 말해왔다.(저한테 왜이러세요.......라고) 이제 그러지 않겠다는 여성들이 여기저기서 송곳처럼 찌르고 일어나니 너희들이 그러는 건 양성 평등도 아니고 페미니즘도 아니라고 난리난리다. 특히나 글 좀 읽었다는 사람들, 자칭 진보적이며 꽤나 가정적입네 하는 치들이 오히려 더 그런 말과 행동으로 맨스플랜 하려고 든다.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자기쪾으로 기울어져 있는지 느끼는게 쉽지 않을 것이란것 안다. 그런것을 느껴야할 불편함이 없이 평생을 살아왔으니까, 여자들 예전보다 살기 좋아졌다느니, 남자들이 요새는 더 불쌍하다느니 하는 소리를 무뇌아 처럼 할수 있는거겠지. 나 역시도 내가 숨쉬듯 누리는 많은 권리들에 대해서 일일이 고맙거나 대단하다고 생각치 않았으니까.

 

 

반복해서 이야기 하지만, 나에게 페미니즘은 이런것이다. '이 세상이 많이 기울어져 있구나, 내가 잘못 생각했을수도 있구나. 내가 모르고 있는 것들이 많구나' 라고 스스로와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오만한 나를 변화하게 만드는것이다.

 

내가 아는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을 위한것이고 메갈이나 워마드는 페미나치지 페미니즘이 아니다. 라는 말따위는 그만하고 당신이 생각하는 그 페미니즘 행동하면 된다. 단톡방에서 여자사람동료 성희롱 하면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 몰카 찍지 말고 , 소라넷따위 하지 말고, 여자니까 조심해야하고 남자니까 그래도 괜찮고 하는 습관적인 말과 행동들 하지 말고, 가사노동 도와주는게 아니라 각각 분담해서 하는게 당연한거니까 나부터 하고. 3차로 여자 있는 좋은데 가자고 하는 짓도 그만 두고. 회식때 꼭 젊은 여직원이랑 부르스 추려고 하거나 추라고 강요하는거 그만 두고, 커피랑 술은 여자가 만들고 따라야 맛있다는 개소리도 그만하고, 이렇게 누구나 다 아는 양성평등을 위해 행동하면되는 것 뿐.

요새 여자들 무섭다고 울지 말고. 행동하면 된다. 당신이 아는 그 페미니즘. 그 양성평등. 오만한 나를 변화하게 하는것.

 

 

*메갈이나 워마드는 그 자체로 페미니즘이라 할순 없다. 그들도 페미니즘의 다양한 층위속에 포함된 부분이란것.

실제로 메갈이나 워마드는 법을 어긴적도 없고, 남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을 자가 낙태사진도 정말 놀랍겠지만 여성들의 월경혈일뿐이고 실제로 남성에게 부동액 먹이고 강간한 사실도 없고(여성 강간용 약물은 시중에 절찬리에 판매중이며 어마무시한 사용후기가 있다), 남아만 골라서 선택적으로 살해한 적도 없다(현재도 경제 형편이 어려우니 하나만 낳으려면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한다). 부동액, 번식탈락, 좆린이. 자가낙태 등은 그동안 남성들이 여성과 어린이에게 수세기 동안 해왔던 일들에 대한 반짝이는 미러링일뿐이다.*

 

 

 

 

궁금증. 남자 화장실에도 이런 비상벨과 문구가 있나?

 

벨누르면 이 언니들이 와주면 좋겠다. 

WHO YOU CONNA CALL?  GHOSTBU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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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9-02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나중에 벨 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 다시 나오면 내가 사줄게요.

저 책도 읽어야지.

2016-09-08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6-09-0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성들의 의식이 바뀌어.... 그러니까 이런 일들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양성평등이 이루어질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나 생각했었는데...
근래에는 그런 생각을 버렸어요.
남성들 스스로가 양성평등의 길로 오지 않겠다면, 그렇다면 결국에 제도의 문제로 풀어야겠죠.
법으로 해결해야죠.
여자라는 이유로 임금차별하고, 산후휴가 쓴다고 눈치주고, 산휴휴가 들어가는 사람들한테 책상 치울 수 있다, 이런 이야기 하는 것 모두 불법으로 만들어야죠.
우리 할 일 많네요. ㅎㅎㅎ

아무개 2016-09-08 11:06   좋아요 0 | URL
그 비싼 대학등록금도 똑같이 받으면서 어째서 정원의 10%만 여성을 채용한다고 하고
임금격차는 40% 가까이 되는걸까요?
그렇게 어렵게 취직하고 애낳는다고 하면 책상을 빼버리죠, 애 안낳으면 안낳는다고 또 뭐라하고.

어떻게든 강제로 사회제도를 바꾸는 수밖에 없어요.
기득권 세력이 기득권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당연한 권리라고만 생각하는 권리들이
서로 나누어도 한쪽이 지거나 빼앗기는게 아닌 기본권이라는것을
제도로 만들어서 느끼게 만드는 수밖에는 없는데
그러기엔 소위 진보정당이라는 정의당이 하는 행태나 진보주의자 라는 남성들의 빻은 소리 들으면
어느 세월에 될까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