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모먼트
권김현영 외 지음 / 그린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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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반복해서 읽지 못하는 내가
다 읽자마자 다시 첫장을 열었다.

내가 몰랐다고 해서 없었던게 아니라는
너무나도 당연해서 놀라운 사실들.



그나저나 회사 컴으로는 이제 페이퍼는 못쓰게됐다. 애인님 그 뭐지 그 휴대용 자판이었나 그거 나 줘요!

앤과 술마시고 알라딘 중고서점가서
술취한 상태로 이책들을 책꽂이에서
찾아낸 나님 대단해. ㅡ‥ㅡ
앞으론 절대 음주쇼핑은 안하는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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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든』을 읽다 보면 늘 당연하다고 여겼던 자연의 24시간이 낯설게 다가 옵니다. 소로는 아침에 눈을 뜰 때 그저 사무적인 절차에 따라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버리지 않는 새벽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눈을 떠 보라고 조언해 줍니다. 새벽이 우리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 어김없이 오늘도 새벽이 와 주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하는 삶이란 얼마나 겸허하고 경이로울까요. p87

 

 정여울의 책은 늘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런 점에서 많은 위로와 위안을 받았었는데 내가 예전보다 훨씬 더 어둡고 차가운 인간이 되어버린것인지 이제는 이러한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답답하다. 내 우울증때문이겠지만 아침에 눈뜨지 않아도 상관 없다 라는 생각을 할때도 있다. 눈을 뜨는게 죽을 만큼 싫은 것도 아니지만 뜨지 못해도 상관없고. 뭐 떠졌으니 사는거다.

 

 손택은 우리가 멈춰야 할 것은 타인에 대한 연민(sympathy)이며 되찾아야 할 것은 타인을 향한 공감(empathy)임을 일깨우지요. 연민은 아픈 사람이나 배고픈 사람의 고통을 안방의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며 ARS로 3000원을 기부하는 아늑한 자기만족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공감은 당신이 지금 고통받고 있는 그 자리로 달려갈 수 있는 용기의 시작이며, 타인의 고통을 걱정의 대상이 아니라 내 삶을 바꾸는 적극적인 힘으로 단련시키는 삶의 기술입니다. 연민이 내 삶을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만 남을 걱정하는 기술이라면, 공감은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게 하는 삶의 태도 입니다. p133

 

 연민 없이 타인에 대한 공감이 가능할까. 연민이 무조건 멈춰야 하는 감정일까? 나는 연민에서 시작한다고 본다. 지옥같은 타인에게 공감을 하려면 연민이 시작이다.

 

 하지만 뫼르소가 사람을 죽이는 이 대목에 이르면 바로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첫걸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을 분석하고 해부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인간의, 인간을 향한 폭력이 아닐까요.

 이때부터 뫼르소는 자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 사회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재판은 이상하게도 그가 왜 살인했는가보다 그가 왜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전혀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가로 초점이 맞추어지게 됩니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의 냉혈한'이기 때문에 살인을 했다는 식으로 '믿고 싶어 하는'군중 권력의 한가운데서 무참하게 조리돌림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뫼르소는 전혀 자신의 사정을 해명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에 머루른 채 조용히 자기만의 성벽에 갖히려 합니다. 그에게는 기댈 곳이 없습니다. 살려달라고 애원할 만한 사람도 살고 잎다고 고백할 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남들처럼 목놓아 울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과연 '살인을 저지를 만한 사람','굳이 제대로 재판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이방인』을 여러 번 읽었지만 나는 그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을 읽을 때마다 뫼르소의 고독이, 뫼르소의 어찌할 수 업음이 더욱 절절한 슴픔으로 물들어 옵니다. 안간힘을 써서 이 사회에 일부분으로 살아간다는 것, '이 세상'에 속하기 위해 때로는 온갖 상처를 감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해가 갈수록 더 깊이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p127-8

 

지난 수요일은 동생의 1주기여서 납골당에 다녀왔다. 늘 그렇듯이 엄마는 울고 나는 엄마가 다 울고 진정될때까지 어슬렁어슬렁 납골당 주변을 배회한다.

동생이 죽었을때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동생의 죽음 후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눈믈을 터뜨린적이 있기는 하지만, 망자에 대한 그리움은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죽음은 역시나 남겨진 자의 몫이다. 나는 이 두사람의 죽음에

그 어떤 몫도 가지고 싶지 않다.

 

 납골당으로 가는 길은 인도가 없다. 명절때는 차와 사람이 엉켜서 위험하고 명절이 아닐때는 차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서 위험하다.

 

 언제부터 이글이 있었던 것일까. 이런 내용의 글들이 가로수에 여러개 매달려 있었다.

아들을 보러 가는 길이 너무나 위험해서, 인도가 만들어지길 바라는 바람으로

꽃씨를 뿌리셨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만 생각하며 오갔을 저길을

저분은 그 슬픔을 안고 타인을 위해 꽃씨를 뿌리셨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로 힘겹게 유지되는 것이겠지. 나는 그저 내가 그 꽃길을 망치지나 않기를 바랄뿐이다.

 

 

정여울의 신간은 도서관에 신청하는걸로.

하긴 유명 작가라 내가 신청안해도 조금 기다리면

비치가 되겠지.

 

주말에는 애인과 도서관에 갈까 한다.

김밥을 또 싸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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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양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고는 인류 역사 전반을 지배해 온 전제였을 뿐 아니라 그간의 언어와 사유 체계가 만들어지는 데 핵심 역할을 해 왔다. 이분법, 짝(pair)의 논리가 그것이다. 이분법은 반반으로 분리된 상황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로는 주체와 타자가 하나로 묶인 주체 중심의 사고다. 우리가 흔히 "남성 중심적, 서구 중심적, 미국 중심적, 서울 중심적 사고"라고 비판하는 논리를, 말하는 주체(the definer, subject)와 그에 의해 규정된 (the defined, object)의 존재를  전제한다. 주체(one)가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삼아 나머지 세계인 타자(the others)를 규정하는 것, 다시 말해 명명하는 자와 명명당하는 자의 분리, 이것이 이분법(dichotomy)이다. 즉 이분법은 대칭적, 대항적, 대립적 사고가 아니라 주체 일방의 논리다. p29

 

 이처럼 언어의 지위는 언어가 만들어진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언어가 정해지면, 자신과 외부의 차이는 자연스러운것이 된다. 다시 말해, 이분법은 무엇인가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안식하게 만드는 인식의 절차이자 과정이다.

 이분법은 근대에 이르러 인간의 기준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수평이 아니라 기울어진 상태, 아니 아예 종적인 상하 관계다. 여성주의는 이분법이 'A'와 'A가 아닌 것(not A/-A)을 구분하기, 다시 말해 A를 기원(origin)으로 규범(norm)으로 진리로 만들기 위한 방식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무엇이 다르다는 규정 자체가 이미 사회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적인 것에는 계급, 인종, 연령, 성별 등 다양한 권력이 개입하고 관련을 맺으며 작동한다.

 근대화, 제국주의화 과정에서 백인 남성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인류의 위계를 만들고, 문명화 작업의 이름으로 타인의 삶을 정의하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노동을 가용해 왔다.("여성은 음식을 만들고, 흑인은 목화솜을 따며,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일해야 한다.") 백인 남성은 A가 되어 보편, 일반 , 진리, 기준으로 작동하고 그들과 다른 것은 인간 외로, 다른 범주가 되었다. 물론 A는 백인 남성에 한정되지 않는다. 중산층, 이성애자, 서울사람, 절고 건강한 사람, 외모 , 학벌, 장애 여부 등에 따라 기준은 언제든지 변한다. 이처럼 이분법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는 위한 사고다, A가 아닌 것을 사용하고 배치하고 규정할 수 있는 A의 권력을 말한다.

 젠더(gender)는 남성의 여성 지배를 의미한다. 양성은 두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성 하나만 존재한다. 남성성은 젠더가 아니다. 남성적인 것은 만성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p32-33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민주주의 가치이자 자유주의의 최고 이념으로 간주되는 평등은 사실 쉽게 부정될 수 있는 매우'취약한 사상'이다. "모든 인간은 법 앞에, 신 앞에 평등하다."는 정언은 특수성 담론을 앞세워 언제든 폐기될 수 있다. 특수성 개념은 예외를 만드는 배제의 정치의 핵심이다. 모든 현상은 일반화할수 없기 때문에, 즉 하나의 버전(uni/versal)일 수는 없기 때문에 차이는 언제든 발생한다. 권력은 이 차이를 특수라는 예외로 만든다. 그러므로, 보편성은 권력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고정된것이 아니다. 평등은 희망이자 지향이지 현실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강자의 보편만이 보편이고, 약자의 보편은 특수로 간주된다. 보편의 폭력성과 권력 의지는 '특수'라는 개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보편과 특수는 짝을 이루면서 권력의 필요에 따라 평등, 자유, 민주주의 같은 가치를 특정 사회 구성원에게는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예외의 정치에서 자신을 보편적 주체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예외의 이미가 임의적으로 정해진다. 이들은 시기상조, 일시적 차별, 생물학적 차이, 관용, 배려, 시해, 다양성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지배 전략을 구사한다.

 보편성의 반대는 특수성이 아니라 차이다. 이 차이를 '또 하나의 보편'으로 드러낼 때, 기존의 보편성이 실제로를 편파적이고 당차적임을 인식할 수 있다. 특수성은 보편의 하위 개념인 반면, 차이는 보편성의 전체주의를 문제 제기할 수 있는 보편과 동등한 개념이다.

 몇몇 사람만 평등했던 영역(sphere)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다는 의미의 평등 개념에서는, 기존에 기득권을 누리던 사람들이 이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 이질감은 누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가? 이 점이 '양성평등'이 정의(justice)로서의 평등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여성이 남성의 기준에 맞추는, 남성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의미의 평등은 그것을 실현하는 데도 수많은 어려움이 따르지만 이러한 의미의 평등은 특히 기득권 세력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문제다. 여성주의는 남성과 같아지는 것('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평등해지고 싶은데, 남성들 중 누구와 평등해질 것인가 역시 미봉된 문제다. 누구와 평등해질 것인가. '노숙인','빈민','알코올 중독자'와 평등해지고 싶은 여성은 없을 것이다. 최소한 양성평등은 남성 중산층과의 평등을 의미한다. 한편, 이러한 평등이 현실화되면 남성의 반발은 필연적이다, 즉 남성 사회에서 양성평등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논리,"남성들끼리도 경쟁하기 힘든판에 여자들까지 끼어든다."는 이데올로기가 힘을 얻게 되고 여성에 대한 혐오로까지 발전한다. 이처럼 양성평등은 갈등, 대립 논리일 수밖에 없다. (...)

 평등 개념은 개인의 고유함(in/dividual,타인과 공통분모가 없는, 양도 불가능한, 분할할 수 없는 몸)에 근거를 둔 가치다. 다시말해, 평등은 다른 사람과 같아지는 것(sameness)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다른 이들과 공정한 대우(fairness)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상황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평등은 언제나 논쟁적이고 경합적이다. 또 평등은 '적용'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된다. 적용의 주체와 대상의 구별 자체가 바로 정치의 시작이다.  p45-47

 

 

「양성평등에 반대한다」-정희진-

 

 

 무엇을 음란 행위로 보고 '건전한 사회 통념'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음란 행위는 심각한 폭력이 될 수도 있고 범죄가 될 수도 있고 아무 일이 아닌것처럼 취급될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장발을 단속하던 시기엔 남성으로 인지되는 사람의 장발이 경찰의 단속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혹은 전직 국회의장의 명백한 성추행/성폭력 사건은 실제 판결 내용과 무관하게 단순 해프닝처럼 취급되면서 ooo전지검장의 행위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폭력이자 검찰 집단 자체의 도덕적 문제로 다뤄지는 것처럼, 음란 행위가 심각한 폭력이자 범죄가 되고, 성/폭력이 단순 해프민이나 음란 행위로 해석되는 것은 폭력에는 관대하고 음란에는 엄격한 한국 사회의 태도를 반영한다. 이것은 한국에서 작동하는 지배 규범의 한 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존재를 인지 가능한 존재로 보고 어떤 존재를 인지 불가능한 존재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크게 죄우된다.p82

 

 마찬가지로 언론에 보도되는 많은 소아성애나 아동성애 혹은 아동성범죄 사건은 이성애 맥락/관계에서 발생한다. 즉 성인 남성 가해자와 어린 여성 피해자라는 구도에서, 나이 권력과 함께 이원 젠더 권력 관계가 함께 작동하며 발생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건드은 결코 이성애-이원 젠더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으로 호명되지 않는다. 가해자를 성도척증 혹은 소아성애증으로 규정하며 정신이상으로, 괴물로 추방할 뿐이다. 즉 이성애와 이원 젠더는 그 자체로 매우 협소한 범주일 뿐만 아니라 범죄가 가장 많이 발생하고 폭력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실천임에도 범죄와 가장 무관한 것으로 규정된다. 더 정확하게는 밤죄와 연관될 때는 이성애를 삭제하고 '이상'섹슈얼리티 범죄, 병리적 현상,(정신)장애와 관련 있는 행위로만 명명된다. 아동성폭력이 아무리 문제가 되어도, '바바리맨'사건을 아무리 심각한 성폭력 범죄로 인식한다고 해도 이성애-이원 젠더 체제는 안전하다. 범죄 행위를 성도착.정신병리로 추방하며 이성애-이원 젠더는 법을 통해 암전한 섹슈얼리티-젠더로 보호받는다. p88

 

 누가 괴물이고 무엇을 보호하는가? 지배 규범의 도덕 윤리를 밑절미 삼아 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규정된/추방된 존재가 괴물인가, 많은 괴물을 재.생산하며 사회 구성원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을 방치하고 방조하는 지배 규범 혹은 한국 사회가 괴물인가? 쾌락을 생산하는 음란 행위와 성행위를 범죄로 찬결하는 현행법 혹은 사회규범이 정말로 보호하는 것은 성/폭력을 재생산하는 바로 그 자신 아닌가? 지배 규범의 윤리에 따라 괴물로 추방된 존재인 나는 나와 같은 괴물을 '보호'하기 위해'괴물'을 보호하는 사회에 질문하고 싶다. 괴물을 보호하라, 그런데 누가 되물이고 무엇을 보호하는가. p90

 

「음란과 폭력을 다시 생각한다 -루인-

 

 아무런 권리가 주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성에 대해서만 동의 여부를 만 13세 이상부터 결정할 수 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있는 자격이 주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과연 성관계를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까? 부모 혹은 성인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야말로 성적 자기 결정에 유해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미성년자의 자유권을 제한하는 방식이 아니라 보장할 수 있게 하려면 이 문제를 청소년의 신체적·정신적 '건전한'발달 과정의 문제라는 발상부터 버려야 한다. 오히려 더 효과적이고 현실적인 성교육을 받을 권리, 미성년자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더 좋은 교육 환경과 정치 제도를 요구할 권리, 생활 임금이 가능한 최저 임금을 받을 권리 등이 미성년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의제강간 연령 상향 여부에 대한 토론이 종종 '요즘 애들'의 성적 발육에 대한 (굉장히 소아성애적인 굑망처럼 들리는)사례로 빠지거나, 과거의 뿌리리 깊은 악습인 조혼을 미성년자의 성을 존중한 사례로 잘못 이해하는 곤경에 빠지느 ㄴ이유는 성을 다른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변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에게 성적 자기 결정권, 투표권, 혼인 가능 연령, 직업 선택의 자유 등이 주어진다면 게일 루빈의 말처럼 더는 섹스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의제강간 문제는 이제 섹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문제로 비로소 방향을 잡아 갈 수 있다. 선거 연령을 낮추고 최저 임금을 시해하고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라는 식의 조정을 상상해보자, 나는 이것을 세 번째 쟁점 전환이라고 부르고 싶다. 미성년자 의제강간법을 젠더와 나이 변수가 교차적으로 고려되고 권력의 재배치를 통해 더 나은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공적 개입의 계기로 사유하는 것 말이다. p123-4

「미성년자 의제강간, 무엇을 보호하는가」-권김현영-

 

 신자유주의 시대의 포스트 여성 주체가 스스로 자신을 말하는 방식은 어떻게 진전될까. 손희정이 이야기하듯, '메갈-이후'이들은 어디로 여행을 떠나서 어떤 모험을 하게 될까. 온라인에서는 미러링이라는 전복적 쾌락이 흘러넘쳤지만, 오프라인에서는 피해를 폭로하는 말들이 고통스럽게 이어졌다. 그러나 찰나의 해방감을 넘어 진정한 해방은 자기 도취도 자기 소멸도 아닌, 구조적 변혁과 일상의 변화에 있다. 이미 이들은 산발적이지만 어느 순간 집단적이며, 잠재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재적인 행위성이 무엇인지 경험한 세대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즐겁고도  또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대항 체로서 여성이라는 존재를  일으켜 세우는 한편으로 고정된 특질을 엮는 범주로서 여성성은 해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금 메갈리아 사이트가 분열되던 때를 떠올린다. 2015년 12월, 누구를 적대할지, 혹은 어디까지 미러링이 가능한지 등을 두고 내부에서 논란이 있었고 "여성의 인권만 챙겨 가겠다'며 한 무리가 포털사이트 다음으 비공개 카페'레디즘'과 '원마드'등으로 이탈해 나갔다. 그러나 페러디로서 미러링은 반드시 위쪽을 향하여 더 큰 권력에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역전의 쾌락은 더 많은 존재들과 만나는 계기로 나아가야 한다. 왜내하면 남성에 비하여 여성이 부정적으로 말해지고, 여성에 빗대어 소수자들이 차별받기 때문이다. 그런 혐오의 연쇠에서 여성만 오롯이 빠져나올 수 없다 큰 범부조러 여성뿐 아니라, 작고 많ㅇ느 소수자 특질을 자기 안에서 발견해내어,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차별적 구조를 깨부숴야 한다.

 다시 처음으로 가서, 메갈리아 미러링은 남성 중심 한국 사회가 유일하게 귀 기울여줬던 말이었다. 이러한 폭력을 가장하는 여성들의 언어 전략은 페미니즘 투쟁에서 내내 있어 왔다.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주인공은 여성 운동 때문에 가정을 돌보지 못했다며 이혼당해야 했다. 이떄 그는 아들과 헤어지면서 엄마의 이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ㅡ그러나 메갈리안을 비롯해서 포스트 여성 주체들, 이들 익명의 여성들은 과연 어떻게 기억될 수 있을까. 미러링이 아니라도 이미 이들은 차별적 현실에 대항하는 집단적 직접 행동으로 역사에 새계지고 있다. 물론 메갈리안이 페미니즘의 모든 주제를 떠맡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메갈리안이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거부는 해방의 언어로서 페미니즘을 왜소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페니니즘과 가짜 메갈리아'가 아니라, '빛의 페미니즘과 어둠의 메갈리아'가 낫겠다. 마치 인간의 성(sex)이 남녀 양성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뉘어 있다고 믿어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이둘은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 사이에는 드넓은 스펙트럼이 있겠지만 빛은 반드시 어둠이 되고 어둠은 빛이 될 수 있다P150-1

 

「그들이 유일하게 이해하는 말, 메갈이아 미러링」-류진희-

 

 우리는 한국의 개신교가 근본주의에 기반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근본주의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 사실상 젠더 이데올로기"였다는 강남순 교수의 지적도 기억해야 한다. 신학자 잭 로저스는 "남녀 평등을 반대하는 것과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 사이에는 강한 연결고리가 있다.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은 가부장제 가족 구조를 교회와 국가의 안정에 열쇠가 되는 것으로 본다. 이런 견해에서 가부장제와 애국심과 기독교는 하나의 깃발 아래 뭉치며, 그 깃발은 동성애에 대한 모든 논의 위에서 휘날린다. 동성애와 여성 평등은 둘다 남성 우위의 모델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확대하면 교회와 국가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들은 세상이 불평등하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평등하다. 창조주께서 그렇게 다 계산해서 만들어놓으신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리하게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무리들은 기존 질서를 깨려는 반란자들이고 자신들은 평화와 정이를 수호하는 위치가 된다. 반동성애 단체들의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건전한 '사회 또는 '올바른 성 문화',' 홀리라이프'.'차세대 바로 세우기'등이다. 더욱 철저하게 가족 중심적으로, 결혼 중심적으로 돌아간다. 1970년대 미국의 근본주의 개신교가 보수 우파 정권을 탄생기키기 위해 활용했던 이휴는 '낙태'였다. 하지만 남아 선호로 인해 여아 낙태가 횡행했고, 경제 개발이란 목표로 정권 차원에서 인구 억제 정책을 펼친 탓에 한국에서는 미국처럼 임신 중절에 대한 터부를 지나치게 강조하기는 어렵다, 이혼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목사들의 성폭력 사건이 끊임없이 폭로되는 현실에속에서 결혼의 가치를 내세우면서도 안전할 수 있는 전략은 바로'동성애 혐오'다. 그들에게 동성애는 자신들의 폐부를 찌를 수 있는 '성 윤리'의 칼날을 피하면서 '성 윤리'의 수호자 위치를 획득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완전히 타자화하면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정의와 윤리의수호자 위치를 독점할 수 있다. 대표성을 지니는 것은 중요하다. p185-6

 

 

「왜 한국 개신교는 '동성애 혐오'를 필요로 하는가?」-한채윤-

 

<조선일보 기자중 발췌>

 

 

 양성평등이라는 전제가 잘못된것이다. 세상은 양성으로만 이루어 지지도 않았고, 평등의 개념역시 잘못 전유되었기 때문이다. 성별, 인종, 성적정체성, 계급과 상관없이 내가 나로 살아갈수 있도록 하는 것이 페미니즘 학문이며 운동이다. 일부 남성들이 주장하는 '페미니즘 말고 이퀄리즘해요'는 진정한 개소리인것이다.

 

 루인과 권김현영의 글은 기존의 프레임을 깨고 사유하는것을 추동한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려는 사람이라면 이 새로운 언어와 지식에 대해 먼저 의심하기보다는 내가 가진 지식이 절대불변의 것이 아닐수도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먼저 해야만 한다. 특히나 남성이라면 본인이 맞다고 믿고 있는 본인의 지식에 끼워 맞춰서는 페미니즘을 이해하기는 힘들것이다. 낡은 틀에 새로운 것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니 될리가 없다. 새로운 시각을 가지려는 노력없이는 페미니즘 독서는 여남 모두에게 시간 낭비일 뿐이다.

 

 차별 금지법은 노무현 정부의 선거 공약으로 국가인권위원회가 2003년부터 법안을 준비하고 약 4년간 각계의 의견 수렴과 검토 끝에 법무부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든 법안을 입법예고 했었다.  물론..입법예고로 끝나버렸다. 차별 금지법 제정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하는 페미니스트 대통령 후보자가 아마도 다음 대통령이 될것 이다. 얼마전에 군법 92조 6항에 의거해 현역 대위가 잡혀갔다. 무엇이 시기상조인가. 이미 이렇게 차별에 의한 처벌이 현실화 되고 있는데.

어차피 찡찡이 안철수는 처음부터 거품이었다. 지지율을 상승하지 못할것이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심상정 찍겠다.

여성이며 노동자인 나를 위한 당연한 선택이다. 없는 살림에 처음으로 정치인에게 후원도 해보았다. 돼지발정제 강간모의를

추억팔이 하는 놈따위는 이겨주었으면 정말로 좋겠다.

 

 

1.남성 페미니스트는 가능한가?

2.남성 페미니스트 없이 성평등은 가능한가?

3.남성 입장에서 남성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었인가?

4.이상적인 남성페미니스트상은 무엇인가?

5.인간은 진실로 스스로 평등한 존재이기를 바라는가?

답을 찾다보면 또다른 질문이 생기겠지만.....

 

지난 4월7일 민우특강 '정치, 페미니스트가 싸울자리' 3강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님의 강연은 그 당시 나의 질문들에 대한 답이었다.

매번 제자리로 아니면 더 뒤로만 가는듯이 보이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답답함이 지금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김현미 교수님 덕분에 조금 나아지긴 했다. 김현미 교수님은 20년 동안 페미니스트로 살면서 늘 겪었던 문제라고 하셨다. 아..진짜 페미니즘 책 한두권 읽고 내가 뭔 소리를 한 것인가 싶어서 나 혼자 얼마나 낯뜨거웠는지 모르겠다.

 

"IMAGE ECHO"  메아리를 상상하라. 지금과 다른 세상을 원한다면 다른 것을 상상할수 밖에 없다. 현실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메아리는 분명 다르게 돌아온다.

 

이어 읽고 있다.

 

 

 

 

 

 

 

 

 

 

 

 

 

 

 

 

 

 

 4월11일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요양병원측에 시체포기각서를 쓰고 장례를 치루지 않았다. 발인에도 참석하지 않았기에 유해가 어떻게 처리 됐는지 알수 없다. 죽음은 죽은자에게는 완벽한 끝이다. 죽음후의 절차는 오로지 산자를 위한것일뿐. 아버지의 장예를 치루고 애도해야할 산자가 없기에 절차는 무의미 하다.

 4월 26일은 동생의 기일이다. 1년새 두번의 사망신고를 했다. 나의 사망신고는 누가 하게될까. 어느 누구에게라도 폐끼치는 죽음을 남기긴 싫다. 아들 앞세우고 어찌 부모가 살겠냐고 양쪽다 울고 불고 했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없었고, 아버지는 병세가 악화될때 어떻게든 살겠다고 버둥거렸다. 죽음을 겪어보지 못한 나는 어떤 말도 할수 없지만, 죽음 만큼은 내 의지가 반영되기를 바래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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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6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7-04-26 13:02   좋아요 0 | URL
동생 1주기라 납골당 왔어요. 날씨 엄청 좋네요. 따뜻한 위로말씀 늘 감사해요!
 

길친_입양임보
https://m.facebook.com/groups/1297388700285564?view=permalink&id=1500069450017487
제가 요새 요녀석때문에 정신이 없네요.
회사 급식소에 갑자기 나타난
꽃님이는 사람을 심각하게 좋아해요.
길냥인듯 아닌듯한 4개월령 꽃님이의 임보처나 입양처 구합니다.
꽃님이가 아무한테나 너무 애교를 부려서
결국 신고가 들어갔는지
통덫설치해서 포획할듯 합니다.
페북하시면 부디 바쁜시간 짬내셔서
좋아요 눌러주시면
글이 뒤로 밀리지 않으니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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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7-04-11 13: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꽃길만 걷자 꽃님아!!!

아무개 2017-04-13 10:41   좋아요 0 | URL
꽃님이는 간수치가 엄청 높은데 그것때문에 복수가 찬것같다고 진단받고 어제 입원했어요ㅠㅠ
 

3월 한달이 정신 없이 지나갔다. 처리해야하는 일들을 처리 했고, 포지션을 바꿔보려고 토익 시험을 준비했는데 시험은 망쳤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지원했던 공석공고는 취소가 되었다.

 

공부하느라, 이것저것 하느라 마음이 분주해 책을 한자도 못읽고 3월 한달이 지나갔다. 쌓아둔 팩을 보면 가슴만 답답.....

벨 훅스의 책은 읽을때마다 맛없는 채소즙이라도 마시는 느낌이다. 쓰고 불편했다. 백인 엘리트 페미니스트들 처럼 어려운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닌데도 너무나 쉬운 언어로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가 활동했을 당시 얼마나 많은 페미니스트 적들이 있었을지 상상이 간다. 지금의 나도 이렇게 내부비판(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페미니즘 내부에 대해)에 혀끝이 쓴데 말이다.

 

 

1.기회주의적인 개혁적 페미니스트 배제

2.끊임없는 내부 비판과 그를 받아 들일수 있는 상상력

3.대중을 위한 쉬운 페미니즘 전파

4.모든 억압을 철폐하고 각자가 자신의 모습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페미니즘.

목표는 이 한가지 이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는것 인지

대략 이렇게 정리할수 있겠다.

 

내가 주변인들에게 자주 해왔던 말이, '그래서 이제 뭘 어떻게 해야하는건가?' 이다.

남성중심주의에 입각한 가부장제로 인한 억압에서 여남 모두를 해방시켜 자유로운 삶을 살수 있도록 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면 '그래서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걸까?' 책만 계속 읽어? 강의 찾아 다녀? 그래서? 그리고?

 

 

 

 

 

 

 

 

사람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알변서도 계속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모인 집단들도 마찬가지 일수도 있겠다.

페미니즘이 사람들을 살기 좋게 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여성혐오를 기반으로하는 여성폭력과 살인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폭력적이고 교묘해지고 있는데, 이런것을 가시화할수 있는 것 정도가 페미니즘이 해낸 일이라면.....

힘들게 쌓은 업적들은 쉽게 지워졌고, 과오는 과장되어 새겨진다.

뒤로 새로고침이 아니라, '갱신'이 필요하다.

 이 책의 모든 부분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권김현영의 해제는 복간된 이책의 가치를 높힌다.

 

 

외국의 사례들보다 지금 여기 내가 살고 있는 이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오늘 퇴근하고 친구들과 함께 김현미 교수의 강연에 참석할 것이다.

내가 어떤 답을 어디서 어떻게 찾게 될지는 모르겠다.

우선은 범위는 넓고 깊이는 얕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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