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권김현영>
질문에는 나쁜 질문과 좋은 질문, 쉬운 질문과 어려운 질문이 있다. 나쁜 질문은 사실 대부분 질문이라기보다는 주장에 가깝다. "왜 그때 가만히 있었니?" 같은 질문은 사실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네가 문제다"라는 주장이다. 이런 질문들은 적대적 대립 구조를 만들어 내고 개연성에 불과한 것을 인과관계로 묶는다. " 왜 여자의 적은 여자인가?" 같은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은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편향된 명제에 적합한 사례를 애써 떠올리게 된다. 질문 자체에 이미 편견이 숨어 있다. (...)이 질문은 어떤 여자들이 어떤 상황에서 서로 적개심을 가지게 되는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여자들 간의 차이 자체를 갈등으로 만든다. 반면 어떤 순간에 어떤 여자들이 서로 적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이들이 각기 어떤 위치에 있으며 이 상황에서 서로를 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그리고 연대하기 위해 어떻게 서로의 차이를 견디고 각자의 위치에 개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 있다. p34-5
여성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언제나 듣는 질문 중 하나는 군대문제이다. 남학생들은 여성학 수업시간에 "왜 남자만 군대를 가냐?"고 종종 묻는다. "왜 군대를 가냐"는 질문은 굉장히 중요하다. 현재 한국의 강제 징집제도는 병역 비리부터 양심적 병역 거부, 군대 내 다양한 인권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이는 모두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로서 논의되어야 한다. 하지만 "왜 남자만 군대를 가냐"는 질문은 좀 이상하다. 정작 여성 징병제 관련 논의가 본격화되었던 2005년, 여자들은 "갈 수 있다면 가겠다"고 찬성한 반면 남자들은 반대했다. 징집의 주체인 국방부는 여성 징병은 고려해 본 적 없다며 논외로 일축했다. 하지만 왜 남자만 군대를 가야 하냐는 일부 남성 단체들의 항의가 국방부에 겨눠지지는 않았다. 누구에게 질문이 던져지는지를 유심히 보아야 한다.
비슷한 다른 질문을 예로 들어 보자, "왜 여학생 휴게실만 있나요? 이 질문 뒤에는 보통 "왜 여학생들을 위해서 학교가 특별히 공간을 만들었죠? 이건 부당한 역차별이에요"라는 주장이 뒤따르면 여학생 휴게실을 없애자는 요구로 귀결된다. 만약 이 질문이 정말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왜 여학생 휴게실만 있나요? 언제부터 생긴 거죠? 여학생들은 다른 휴게 공간에서 어떤 불편함을 겪고 있나요?"라는 질문이 뒤따라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질뭉이 이어지는 건 듣지 못했다.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 위해 질문이라는 형식을 차용하는 사람들은 결국 질문하는 능력을 읽어버린다. 질문하는 법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함께 사는 법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p40-1
그렇다고 내가 페미니즘을 엄청 사랑하느냐 하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정답 없는 질문들의 무게에 스스로 짓눌릴 때는 공부를 그만두고 싶기도 하고, 가장 오래된 문제에 도전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늘 새로워져야한다는 강박을 느끼기도 한다. 경전이 있지 없기 때문에 늘 읽고 있는 책과 저자의 권위를 의심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뭐 하나 외워서 얻을 수 있는 쉬운 지식이 없는 피곤한(?) 학문이기도 하다.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학문들 간의 벽을 세워서 서로 대화할수 없게 하는 기존 학문 체계에 대한 비판이론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모든 벽을 허물어 필요한 지식과 경험들을 조합해 낼 수 있도록 열려 있는 학문이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헤메고 있는 기분이 들 때도 종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십 년전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공부할지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마 다시 페미니즘 연구를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더 공부할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라 공부할 게 너무 많기 때문에 괴로운 거라면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버릴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는 여성이라는 이름의 역설, 그리고 그것이 주는 긴장 속에서 현실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것 그것이 페미니즘이 내게 알려 준 길이다. p43-4
<할머니들/손희정>
나는 그 시간들의 중첩을 나의 "각성의 순간' 혹은 '페미니스트 모먼트'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극적으로 변해 가는 시간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겼던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 시간들. "정말?왜?" 라고 말하게 되는 바로 그 시간들. 페미니스트로서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인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조건들에 대해 인식한다는것, 그러니까 계급과 연령, 신체적 조건 , 민족, 성적 지향 등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인식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로서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보편'이라는 것이 기실은 다양한 차이의 배제와 몰살로부터 비롯된 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p52-3
<세계와의 불화, 피부의 연대/나영정>
'더러움'과 '오염'이라는 표현은 타자들을 혐오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내뱉는 말이기도 하지만 요즘 나는 혐오에 대항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이러한 언어를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같이 가져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누가, 어떤 행위가, 무슨 관계들이 더러움과 오염의 자리에 할당되는지 따져 묻지 않는다면,'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한다고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이 지배질서를 유지시킬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혹은 혐오하는 사람들이 권력이 많아서 그러하다는 근거로 단순히 권력의 문제로 치환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p103
이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2007년 「차별금지법」제정이 추진되던 시점부터 조직적으로 창궐하기 시작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과 차별 선동, 그리고 여기에 굴복하는 정치인, 공무원들을 보면서 성소수자가 지금 어떤 대우를 받는 것인지 너무나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반성소수자 단체 및 보수 개신교는 성소수자를 2등시민이자 異등시민으로 천명했고, '모든'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차별금지법」으로 보호받아서는 안 될 특별히 문제적인 존재, 사회질서를 무너뜨는 위험한 존재, 공식적인 법과 제도에서 언급해서는 안 될 더러운 존재로 만들었다. 정치인과 공무원은 '빨갱이'혹은'간첩'과 같은 수준으로 성소수자를 비시민으로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확신하지도 못했다. 확실한 것은 성소수자라는 존재가 공적으로 불려 나오지 않기를 , 자신의 업무와 관계되지 않기르 원했고, 호명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시민임을 부인했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2013년 당시 민주통합단 내 유력한 정치인인 김한길, 최원식 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가 '종북게이'라는 비난을 받고 법안을 철회했던 때였다. 「차별금지법」으로 상징되는 성소수자는 소위 민주세력에 부담을 주는 존재였다. 이 철회 결정은 성소수자는 '민주','87년 체제','486' 에 포함될 수 없다는 확인이었다. 따라서 이 상황은 단지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이르는 퇴행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만주주의의 근본적인 한계와 구멍에 의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p107
페미니스트 관점으로 전쟁·국가·군사주의를 비판할 수 있게 되면서 자주국방·민족자주를 내세웠던 학생 운동의 경험을 찬찬히 돌아볼 수 있었고, 전쟁과 평화라는 시공간적 이분법이 폭력을 정당화 하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시에 정당화되는 폭력과 착취는 권력을 독점한 이들의 자신의 해악을 정당화하며 전시와 평화시를 구분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전시에 벌어지는 성적 폭력과 착취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소위 평화로운 시기에 벌어지는 비가시화된 폭력과 착취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전시와 평화시에 대한 이분법이 가리는 폭력과 착취의 문제들을 인식함으로써 폭력 수단을 독점하는 국가의 적법성과 그것을 넘어서는 인권의 가능성을 질문할수 있었다. 근대 국민국가 민주주의 체제와 근본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는 소수자의 위치에 대한 감각을 자지게 되었다. p110
성소수자 단체와 여성 단체들이 여성가족부에 대한 항의 활동을 함께 하면서 , 여성 운동은 여성 정책, 성평등 정책이 현재 어디에 놓여있는가, 여성 정책이 제도화되면서 강조되어왔던 여성 정책 거버넌스는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았다. 또한 성소수자 운동은 성의 개념이 어떻게 법에 기입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직면하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법제도의 한계들은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의 한계와 닮아 있다. 성을 분석 범주로서 섹스-젠더-섹슈얼리티로 나누었지만 섹스는 여전히 본질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고, 젠더는 남성과 여성의 불평들을 지적하기 위한 언어로, 섹슈얼리티는 그저 성적인 것, 심지어 동성애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리고 있다는 점이 이번 「양성평등기본법」논란의 과정에서 드러났다. "아직은 법이 섹슈얼리티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말은 "동성애는 시기상조"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성을 분석하기 위해서 나눈 개념이 어떤 집단에게 할당되고, 권리의 제한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것을 확인하게 된 이상, 몰랐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구체적인 '법'을 통해서 다시 마주치게 된 마당에 , 퀴어 정치와 페미니즘이 계속 갱신하도록 서로 추동할 수밖에,p 123
누군가가 사랑받을 권리, 성적 매력을 가질 권리는 중장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지만, 그러한 속성이 권리를 확보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이러한 권리 박탈은 특정한 이들의 성적 재현을 금지하도록 만들었따. 예컨대 장애인, 노인, 노숙인 등은 성적으로 재현되지 않는다. 또한 주류 미디어에서는 젠더 규범을 따르지 않는 신체나 관계, 종성 간의 성적 재현을 당사자의 목소리를 지우고 범죄화된 방식으로만 재현한다. 재현을 금지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타자성을 유지하는 데 매우 핵심적이 역할을 한다. 더러움과 역겨움과 같은 감정들은 신체적인 반응이긴 하지만 선험적으로 신체에 코드화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각적·촉각적·후각적 스킨십의 기회를 차단당한 이들, 특정한 방식으로만 재현되는 이들과 관계 맺기 위해서는 피부를 맞대는 것이 정말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다. 이것이 소수자의 시미권을 확보하는 방식과 연결되고, 개별적인 신체들이 반응하는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는 출말이라고 생각한다. p129
마지막으로 '활동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이글에 서술된 내용들은 약 20여 년간 대학의 끄트머리에서 시작해서 대학원생으로 살았던 몇 년간을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전업할동가로 지냈기 때문에 만나고 만들고, 쓸 수 있었던 것들이었더. 많은 친구들이, 회원들이, 대중들이 나를 비롯한 전업활동가들에게 '고맙다','훌륭하다'고 진심으로 말해 준다. 이 민망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대답은 여러 가지다. '나도 나름의 직업윤리르 가진 생활인일 뿐'.'여러분 덕분에'.'부모를 잘 만나 빚이 없어서'…분명한 것은 전업활동가는 공공의 지지와 지원을 받아. 공익과 정의에 부합하는 내용과 방식으로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확보한 (넓은 의미의)노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활동가로서 목표와 지향이 있다면 자아 안찪의 경계가 최대한 유연한 몸을 만들고, 그 몸으로 목소리와 몫이 더 작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것을 통해 또 변형된 몸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하는 것이다. 이 글에 내내 박힌 '나는'.'내가'라는 주어들이 매우 낯설지만, '나는'이라는 단어가 나의 자아로 환원되지 않고 내가 그 당시에 있었단 좌표로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실제로 내가 있었떤 위치가 달라질 때마다 어떤이들이 그리로 이끌었다. 나의 인식론을 변형시키고, 열정이 향하도록 손을 내밀었던 구체적인 타인이 있었다. 이제는 도저히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골라낼 수가 없다. p133-4
<'페미니즘 고틱체' 권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법/김홍미리>
알다시피 분노는 여성들에게 허락된 감정이 아니다. 성폭력 생존자들이 가해자에 대한 분노를 줄기차게 표출함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피해를 입증하는 주요한 감정으로 채택된 것은 두려움이나 '(성적)수치심'같은 것들이었다. (아마도 가부장의 목소리는 이렇지 않을까?'여자가 화를 낸다고? 그것도 남자에게 화를 낸다고?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라고 그럴리가?! 여자는 수치심을 느껴야 해 , 그리고 두려워해야 하지. 피해여성이 분노한다니 아니 아니 그럴 리 업어 절대 그럴 리 없지. 그래서는 안 되고 말고!) p143
지금의 사회는 예외 없이 여성혐오의 정서로 들어차 있다. 페미니즘 역시 이러한 정서 구조의 예외가 아니어서 '이기적인 여자들의 조잘거림'이나 '배운 여자들의 특권의식','꼬인 여자들의 히스테리' 등 꾸준히 여성화되고 대상화되어 왔었다. 그리고 지금도 오래된 그 방식대로 '페미니즘! 너희가 걱정되어서 그런다'면서 '페미니즘에게 페미니즘을 기르치는'중이다. 페미니즘과 떨어져서 그것을 관찰하고 진단하고 평가하고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페미니즘 애착을 결코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메갈리안의 정체를 '남혐'과 떨어뜨릴 생각도 없다. 터져 나오는 분노에 귀기울일 생각이 없고 페미니스트와 메갈리안을, 진짜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을, 진성 메갈리안과 아닌 메갈리안을 또 어떻게든 구분 지으려는 시도도 멈추지 않을 전망이다.
나의 우려는 애착 없는 이들이 퍼뜨리는 '진단 프레임'에 빠져서 애착과 고착을 오가는 페미니스트들이 정작 열어야 할 문을 찾지 못해 길을 읽고 주저앉을지도 모른다는 데에서 온다. 구정짓고 구별짓는 방식으로 그렇게 또 여자들의 분노는 힘으로 직조될 수 없게 흗어지는 중이다. 2015년 메르스 갤러리 발화를 기점으로 '처음'페미니즘을 맞이한 사람들은 저 많은 '진짜','진정한','진성'등의 말들 속에서 자신이 어디쯤 있는지 가늠하는 일에 (또) 집중하기 시작했따. 이렇게 또 조직화되지 않는 분노는 우리들 몸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개별화되어간다. 그 사이 우리는 또 서로에게 위로받은 후, 다시 서로에게 상처받는 중이다. (...)우리는 각기 다른 속도로 페미니즘을 향해 있다는 걸 기억해 냈으면 한다. p167-9
<계속, 끝까지, 페미니스트로/전희경>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설명해 온 것처럼, 가부장제 사회에서 '감정적'이라 분류되어 온 여성들에게 '분노'는 거의 유일하게 금지된 감정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억압 체계인 가부장제하에서, 여성들이 분노를 조직화하는 것은 위협적인 일이며 그만큼 집요하게 공격 받아 왔다. 소위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남성들이 일관되게 요구해온 것이 바로 '부드럽게'페미니즘 하라는 성역할 규범 아니던가. 물어 뜯지 말고, 소리 지르지 말고, 과격하지 않게, 혹시라도 편이 되어 줄수 있는 사람(남자)들을 차분하게 설득해 가면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져 준 고마운 사람(남자)들이 기분 상하지 않도록, 페미니즘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다는 것을 칭찬해 주면서, 불편해진 기분을 달래 주고, 그래도 불편함을 감수하려 애쓰는 것만으롣 고마워하고 치켜세워주면서 말이다. 이런 가당찮은 요구에 대해 '닥쳐!'라고 하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며 비난받고, '엿 먹어!'하면 과격한 페미니즘이라고 불려 가고, '꺼져!'라고 하면 분리주의 페미니즘이라고 욕을 먹었다.
화가 났는데 화를 낸다고 욕을 먹는 상황이라니 부당하기 짝이 없었지만, 오랫동안 자신의 감정을 믿지않도록 키워져 온 평범한 여자였던 나에게 ,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새로운 준거집단은 질실하게 필요했다. p174-5
100인위가 공식적으로 백서를 내고 조직을 해산한 것은 2003년이었지만, 시실 조직의 해체는 2001년부터 서서히,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소송이라는 상황에 대응하기 100인위의 조직 구조는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조직을 "자유로운 개인들의 수평적 네트워크 조직"이라 불렀다. 이 문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아지만, 무엇이 아니어야 하는지 분명했다. 반면교사로 삼을 사례들이 눈앞에 넘쳐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권위주의를 없애기로 했고(그래서 100인위에는 '대표'가 없었다), 일상 속 성별 분업을 해체하기로 했고(그래서 모든 일을 '자발성'에 기대어 분담했다), 폭력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지양하자고 약속했다(그래서 이견이 '폭력적으로 들릴까 봐 끊잉없이 검열하거나, 아예 말하지 않았다). 아무런 체계를 만들지 않은 것에 가까운 이런 조직 구상에 내부 민주주의를 향한 순정한 바람이 담겨 이었다는 점은 기억되어야 한다. (...) '수평적 네트워크'라는 건 누구나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구나 평등하게 뒤로 빠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의사 결정은 온/오프라인의 열린 회의에서 이루어졌지만'누구나 말할 구 있다'는 형식만 가지고 누구나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동의가 만들어지는 과정, 이견이 말해지는 방식에 무언가 비공식적인 요인들이 힘을 발휘했다. 명시적으로 운영되지 않는 조직은 명시적이지 않은 힘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그 결과. 책임은 책임감 강한 사람이 지고, 일은 하겠다고 손 든 사람이 '담당'하고, 반성은 양심적인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자발성'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기대할 수는 이어도 요구할 수는 없다. 몇 번 기대가 좌절이 되는 무릎이 꺽이고, 사람이 미워지고, 나중에는 억하심정이 생겼다. 가장 민주적이고자했던 조직론이 가장 부정의한 분업을 가져오는 아이러니에 나는 참담한 심덩이었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우리의 이상이 이꼴로 끝나다니.p187-9
'피해자중심주의라는 표현이 이후에 가져온 문제적 효과들은 바로 이 지점관 관련이 있다. 사건의 피해자는 '사람'이고, 구조적(잠재적) 피해자는 '위치'다. 위치(position)은 아직 입장(standpoint)이 아니며, 분노 그 자체만으로 정치학이 되는 것도 아니다. 특히 100인위가 16년 전 주장한 '원칙'이 이후 운동사외에서 '메뉴얼'화되면서 젠더 구조로 인한 모든 부정의와 고통을 성폭력'처럼'다루려는 경향이 생긴 것은 문제적이다. 구체적인 사건 속에 정당하게 다루어지고 경청되어야 할 고통이 있음을 의심치 않지만, 성폭력 사건을 문제 해결 전략의 유일한 참조점으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인간이 되는 자기 완성만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관심이 있는 페미니스트라면, 더 정확한 언어를 만들고 그것을 의미 있게 작동시킬 책임이 있다 성푝력 사건을 해결하는 것과 성폭력 사건'처럼'해결하는 것은 다르다. '피해자=취약함/운동가=강함'이라는 이분법을 허물고자 했던 100인위가 실패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페미니스들이 더 작업해 나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p192-3
모든 사회 운동은 피억압자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피억압 당사자의 말은 지금보다 훨씬 더 사회적으로 경청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사자성 자체가 곧바로 해석의 여지 없는 진실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직화를 통해 , 운동을 통해, 좀더 정확하게 대화하려는 언어의 교환을 통해, 책임을 나누는 내부 민주주의 속에서 서로를 길러 내는 과정을 통해서만 진실이'된다'.p194
가령, 의료의 남성 중심성을 비판하는 것과 좋은 의료를 지금/여기에서 만들어 내는 것은 다른 과제/문제다. 분노와 비판과 문제 제기는 언제나 중요하다민, 또한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구상하는 상상력, 구성원 개개인의 현주소를 점검하는 신중함, '능력'의 차이(존재한다)를 조화시키는 시스템과 개인의 성장을 기다려 주는 인내심, 그리고 '삑사리'와 지지부진과 성에 안차는 불완전성의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관용의 에너지 같은 것들, 전부 소수 엑티비스트들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래서 낯선 이들을 끊임없이 초대하고, 개인의 불완전성들이 부딪히고 어우러지는 장면들을 관찰하고, 나의 평범함을 발견하며 사람들과 대화하고 일하고 관계 맺을 수 있는 몸으로 나 자신을 변형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무엇이 문제인가'보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골몰하고 있기도 하다. p209-10
변하지 않는 세상에 절망하고, 한 걸음 나아갔다 생각한 것이 10년만에 무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도"계속 운동할 수 있는"힘은 무엇일까. 무엇에 기대어 계속 페미니스트로 살아갈 수 있는가. 대답은 나도 모르겠다. 다만, 막다른 길이라 생각한 곳에서 벽을 뛰어넘는 놀라운 사람들이 있고, 답이 없다 생각한 문제에 대해 포기하지 않 답을 발명하는 끈질긴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언제나 그랬다. 그러니 나도 그들 곁에서 계속 , 끝까지,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p211
페미니즘 이론가, 활동가들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각자의 페미니스트 모먼트에 대한 질문과 성찰 그리고 다짐들로 엮여진 책이다. 방향성을 잃고 지지부진하던 차에 많은 격려가 되었다.
문단내 성폭력 사태를 고발하기 위한 출판사 봄알람의 『참고문헌없음』프로젝트는 운영진 중에 성폭력 가해자가 있다는 피해자의 고발로 거의 엎어질뻔 했다. 그 논쟁중에 등장했던 2차가해, 피해자 중심주의, 100인위, 영페미 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몰라서 답답했었는데 실제 그당시 활동했고 그 용어들을 만들어 낸 활동가에게 이 책을 통해 이야기를 듣게 되서 답답함이 풀렸다.
논쟁중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가 바뀌고 용어를 오용하고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서로에게 큰 상처를 주고 몇몇 활동가들은 활동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나마 몇안되는 활동가들이 겪었을 상처와 절망이 너무나 안타깝다.
멀리서 지켜보는 나같은 사람이야 이 논란이 공부가 되었겠지만 당사자들과 페미니즘 운동에는 깊은 상처가 패였을 것이다.
경전도 없이 늘 그 권위를 의심해야 하는 학문이자 운동인 페미니즘을 '그건 페미니즘이 아니야'라고 단언할수 있는 사람들의 용기가 부럽다. 나는 그저 포기하지 않고 답을 찾아내는 이들을 찾아내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다.
나의 페미니즘 모먼트의 시작에는 정희진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와 생각이 다른 부분도 많다. 더 많은 그들을 만나서 더많은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새롭게 만들고 싶다. 내일은 친구들과 함께 북토크에 간다. 마치고 맛있는 저녁에 소주한잔을 함께 하며 우리는 함께 페미니스트로 살다 죽어갈 이야기를 하게 될것이다.
『남성성과 젠더』는 이미 읽기는 했는데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나진 않는다. 왜 절판이 되었나 했더니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라는 시의 적절한 제목을 달고 개정판이 나왔다.
권김현영, 루인의 강연이 가장 기대된다. 권김현영의 영민함 루인의 새롭게 생각하는 힘은 언제나 매력적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오늘 회식이라 4시퇴근인데
흠...점심 먹은게 아직도 소화가 다 안된듯.
나의 힐링 푸드인 돼지갈비가 회식메뉴다.
소화제라도 털어 넣고 가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