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피아노 소설Q
천희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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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거대한 서사가 담긴 소설책은 아니었습니다. 작가가 스스로 말합니다. “이제야 고백하건대,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95면)

끊임없이 ‘나’, ‘너’, ‘그’ 그리고 ‘그녀’가 느끼고 서술하는 죽음이지만 이것은 분열된 하나에서 시작된 것에 불과합니다. 정말 #소설Q 의 젊은 문학의 새로운 발견- 과 가장 어울리는 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낯설게 시작되고 분열되다가 끝나지만, 이야기는 적절하게 뒤섞이며 탁한 혼합물처럼 매듭이 지어집니다. 다소 어렵고, 거리감 있게 느껴질 수 있는 구성이지만 120페이지를 통째로 집어삼킨 작가의 죽음과 피아노 연주는 읽는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그다음을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관해 적은 책들은 대부분 자기 고백적 글 같았으며, 길고 복잡하게 쓰인 유서 같다고 느꼈습니다. 화려한 수식어구가 많고, 동일 어구의 끝없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이 글은 정말 ‘즉흥 연주곡’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문단만 보면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은 언어들이었고, 장마다 서술자가 바뀌는가 싶으면서도 결국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이 글의 정확한 흐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구나. 심지어 작가 본인도.’ 였습니다. 즉흥 연주곡은 말 그대로 즉흥적이기 때문에 당시의 기록이 무의미합니다. 그때의 심정을 가진 연주자만이 어렴풋이 기억할 뿐입니다. 소설은 끝없이 삶과 죽음을 교차시키며 고통을 나열합니다. 고통은 익숙함에 무뎌질 뿐,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흥적이면서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죽음의 굴레는 연주자 없이도 선율을 만들어 냅니다. 이젠 굳이 말하는 사람 없어도 괜찮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읽을 때마다, 죽음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끝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는 여러 갈래로 분열된 '연주자'를 중심으로 반복되는 죽음에 관한 사고를 보여줍니다.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죽음과 자신을 가깝게 연결하지 않을 겁니다.(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요) 해봤자, '아 죽겠네-'하는 정도일 텐데, 이것이 사색으로 연결되거나 우울감을 불러올 만큼 깊고 진심의 언어가 아닌 거죠. 죽음은 때로 가볍게 소비됩니다. 어쨌든, 죽음을 가장 자주 사고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거나, 가까이서 죽음을 엿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죽지 않았기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알 수 없는 확률로 태어나, 알 수 없는 행운과 기회로 죽지 않고 살고 있기에 죽음은 삶과 먼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삶은 죽음이고 죽음이 삶인 인간의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맞춰진 죽음에 얇은 삶을 따라 사는 것이죠.

소설은 피아노 연주곡을 동반하여 쓰여 있습니다. 작가의 말을 읽으면, 연주곡들이 글에 맞춰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연주곡과 함께 글을 읽다 보면, 글과 연주가 하나 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피아노 연주는 피아노의 소리만 담고 있지 않습니다. 중간에 끼어드는 관객의 환호와 탄식 그리고 연주자의 호흡이 생생하게 끼어있습니다. 피아노만큼 단순하면서도 익숙한, 그러나 완벽하게 끝낸 사람이 드문 분야는 없을 겁니다. 당장 저도 피아노를 13년이 넘게 쳤지만 결국 88 건반을 전부 눌러보지 못하고 끝내버렸거든요. 피아노의 이런 속성은 추상적인 죽음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하게 느껴집니다.

멈춰 서서 왜 아무도 내게 신발을 신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는지 물으면, 왜 신발에 대해 묻지 않았는지 되묻는 세계가 등 뒤에 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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