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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사랑 - Incendie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전쟁은 평범한 삶을 살 권리가 사치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이념과 종교로 인한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파괴시켰고, 나왈 마른완도 이 불행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그녀의 기구한 운명이 시작된 건 사랑, 순수하고 아름다운 감정인 사랑 때문이었다. 어떤 불손한 이념과 종교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를 좋아하고 같은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그런 사랑말이다. 하지만 레바논에선 사랑을 할 땐 조심해야 할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이교도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레바논은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얽힌 전쟁 때문에 내전이 끊이질 않았는데, 하필 기독교인 나왈이 사랑한 남자가 이슬람 난민 출신 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에겐 서로의 존재만이 중요할 뿐, 신분과 종교는 어떠한 제약도 아니었지만 나왈의 가족들 생각은 달랐다. 이슬람 난민을 만나는 것이 가족의 수치이고, 이는 명예살인이라는 악습을 행해도 될 만큼의 큰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알기 때문에 나왈과 남자는 마을을 떠나려고 하지만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한 채 오빠와 사촌에게 들키고 만다. 그렇게 나왈은 사랑하는 남자가 총에 맞아 죽는 걸 보게 됐고, 그녀 또한 총부리 앞에 운명을 맡긴 채 서 있을수밖에 없었다. 그때 할머니가 나타나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그녀 또한 가족에 의해 살해당했을 것이다.
한순간에 연인을 잃은 나왈의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게 죽음의 이유가 될수 있다는 게 믿기질 않는다. 이 가여운 여인이 기댈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도 슬프다. 그리고 이미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끝내 키우지 못하고 떠나 보내야 하는 건 참으로 잔인했다. 전쟁과 미움이 아니었더라면 나왈은 남편과 아이가 있는 가정을 꾸리며 평화롭게 살았을 테지만,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 2명을 한꺼번에 잃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갓 태어난 아들의 발뒤꿈치에 표식을 새기며 반드시 너를 찾겠다는 나왈의 말은 과연 지켜질수 있을까. 엄마 없이 고아원에서 살아야 할 아이의 운명은 또 얼마나 가혹할까.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 된 나왈은 학생운동을 하게 되는데 기독교인 마을이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마을에 자신의 아이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왈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곳으로 향하는데, 그 과정에서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다. 종교가 다르다는 건 언제든 죽임을 당할수 있다는 걸, 아이와 여자까지도 무참하게 살해하고 불지를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건이었다. 나왈이 기독교인 이라며 십자가를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이슬람교도 들과 똑같이 죽었을 것이다. 생지옥 같은 곳에서 겨우 살아나온 나왈은 더 정신없이 아들을 찾지만 이미 그곳은 대학살로 폐허가 된 채 불에 타고 있었다.

아이를 찾겠다는 한줄기 희망마저 사라져버린 나왈에게 이제 남은 것이라곤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증오 뿐이었다. "내가 겪은 것들을 적들에게 가르쳐 주겠어요"라는 나왈의 말 속엔 모든것을 잃은 채 상처투성이로 남게 된 여인이 있었다. 전쟁은 나왈과 같은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냈을까. 전쟁에 휘말려 인생이 뒤바껴 버린 사람들, 그러다 결국 그 전쟁의 고통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 분노를 표출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복수는 복수를 낳고 한번 시작된 폭력의 굴레는 누구도 끊지 못한채 계속 되풀이 된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 속에 발을 담근 후 였다.
이런 나왈의 과거를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나왈의 품에서 큰 잔느와 시몽은 어머니의 죽음 후, 공증인 으로부터 황당한 유언을 듣게 된다. 아버지와 친형을 찾아 편지를 전해주고, 그 후에 묘지 비석을 세우라는 이상한 유언이었다. 아버지와 형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컸기에 놀라움을 넘어 화가 났고, 이렇게나 큰 비밀을 여태껏 말하지 않은 것에 배신감도 느꼈다. 거기다 나체로 묻어 달라는 유언은 평소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던 엄마를 더 낯설게 느껴지게 했다. 원래 다정하고 가까운 엄마는 아니었지만, 이 유언은 엄마를 타인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화가 난 시몽과는 달리 잔느는 어머니의 유언을 따르고 싶었고, 아버지께 드릴 편지를 가진 채 단서를 찾아나간다. 잔느가 가진 정보라곤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과 다레쉬 대학의 학생이었다는 사실 뿐이다. 그렇게 가느다른 실마리를 안은 채 어머니의 과거를 밝혀내는 과정을 통해 잔느는 나왈 이라는 여성의 아픈 삶을 마주보게 된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나왈이라는 여자는 그 마을의 수치라는 것도 알게 된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이슬람 난민과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은 여자는 결코 용서할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왈의 딸인 잔느 또한 이 곳에서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게 홀로 어머니의 발자취를 따라가던 잔느는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 어머니가 1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는 것과 72번 수감자인 노래하는 여인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이 악명높은 감옥에서 어머니는 온갖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아부 타렉에게서 강간을 당하며 아이까지 낳았다는 충격적인 사실 앞에 잔느는 무너진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힘든 사실앞에 시몽을 부르고, 이제는 시몽이 내키지는 않지만 친형을 찾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이 남매가 밝혀 낼 진실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충격을 던져준다.
젊은 여인이 겪어야 했던 그 고통을 상상해본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왈은 이슬람 난민이 아니라 한 남자를 사랑했었을 뿐이다. 버스에 타고 있던 이슬람 모녀는 종교때문에 죽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런 편견없이 그저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수 없는 사회에선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될수 있다는 걸 나왈의 삶을 통해 알려준다. 그리고 이런 잔인한 삶은 어린 아이에게도 해당된다는 안타까운, 사실도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