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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전 - The Front Lin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최근에 본 할리우드 영화 《퍼스트 어벤져》4번이나 신검에 떨어졌음에도 다시 군인이 되길 원하는 남자 주인공이 나온다. 노약자를 제외한 모든 남자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적들과 싸우는데, 자신만 제외됐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쌓였던 것이다. 키도 작고 허약한데다 온갖 병을 달고 사는 그는 모 드링크제 광고처럼 "꼭 가고 싶습니다!"라고 외치며 계속 도전한다. 이렇게 애국심에 불타오르고 군인이 되고 싶어하는 남자를 보다가 《고지전》을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이 영화엔 《퍼스트 어벤져》처럼 단 한명의 영웅이 나오지도 않고, 쉽게 적을 제압하는 무기도 없다. 또 적은 무조건 나쁜 악당이고 아군은 착한 사람들로 구성되어있어 적을 죽여도 죄책감은 느낄수 없고 오히려 통쾌함마저 느끼게 한다. 악당은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니 죄책감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래서 관객들도 온전히 화려한 볼거리에만 집중하고 즐길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고지전》은 진짜 전쟁을 보는 것 같았다. 처참하고 슬프고 아프게 만든, 실제로 한국전쟁때 많은 이들이 이렇게 죽었겠구나 싶어 가슴 한켠이 아리게 만든 영화였다. 왜 싸우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싸우고 죽고 후퇴하고 또 진격하며 삶에서 지옥을 보고있는 그들의 모습은 처절할 정도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전쟁은 이윤을 얻길 원하는 몇몇 높으신 분들이 책상에 앉아 이런 작전을 짜 볼까? 여기에 인원을 얼마나 투입할까? 라는 결정으로 수많은 목숨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걸 의미하는지 모른다. 전쟁에 참가해 싸우는 군인들이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라는 걸, 두려움에 떨고 아픔을 겪는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있는건지 모르겠다. 한명이라도 더 살아남을수 있는 전쟁을 하는게 아니라 적 보다 얼마나 더 가질수 있는 전쟁을 하느냐가 그들의 관심사니까 말이다.
그런 태도는 휴전협상 테이블에서도 여전히 진행된다. 남북을 반으로 갈라야 하는 상황이니 좀 더 자신들에게 유리하고 더 많은 땅을 얻고 싶어하는건 당연하겠지만, 이런 욕심 때문에 최전방에 있는 군인들은 지옥같은 하루를 더 살아내야만 했다. 그들에겐 한 시간이 하루보다 더 길었고 오늘 살아있어도 내일은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끌어안고 감내해야만 했다. 그런 하루를 몇년간이나 반복해온 그들이었다. 그들에겐 전쟁이 끝났다 라는 소식만큼 반가운 것도 없을텐데, 휴전협상 테이블에선 애록고지가 과연 누구의 것이냐를 두고 난항을 거듭하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악어 중대가 싸우는 애록고지는 아군이 점령했다가 또 다시 적군이 빼앗는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이제는 누가 이곳을 완전히 점령했는지 확신할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 하루는 남한의 것이 되었다가도 또 며칠후면 북한이 탈환한 곳이 되니 휴전협상의 뜨거운 감자라 할수 있겠다.
이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강은표(신하균)는 지지부진한 휴전협상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는데, 상관은 동부전선에 잠시 가 있으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곳에서 중대장이 전사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는데 아군의 총알이 사용된 점이 의심스러운데다, 누군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 은표에게 조사하라고 명한것이다. 그런데 그곳엔 인민군에 의해 끌려간 후 소식이 끊긴 친구 김수혁(고수)이 있었고, 그가 죽은줄로만 알았기에 은표는 더 없이 기뻐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수혁은 안경을 끼고 약해보이던 예전의 모습이 아니였고 바뀐 외모만큼이나 지위도 이등병에서 중위가 되어있었다. 전쟁에 큰 공을 세워야 가능한 빠른 승진도 이상했지만 더 놀라운건 악어중대를 이끄는 사람이 이제 갓 어린 티를 벗기 시작한 소년이라는 것이다. 춥다고 인민군의 옷을 입고 입고 뭔가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부대원들의 모습에서 은표는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다.
결국 의심했던 일이 사실로 밝혀지는데, 충격을 받은 은표와는 달리 부대원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솔직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의 한가운데 서 있는 그들에게 적과 내통하고 선물을 주고 받은 것에 대한 처벌이 뭐 그리 두렵겠는가. 정작 무서운건 이곳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상관이 갓 부임해 엉터리 지시를 내리는걸 따라야만 할 때이다. 포항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옥같은 경험을 해야만 했던 악어부대원들에겐 북한군과 쪽지로 연락하는 건 잠시나마 인간다움을 느낄수 있게 하고 휴식을 주는 시간을 갖는 것 뿐이다. 그리고 잠깐의 휴식 끝엔, 다시 북한군과 총부리를 겨누며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그들이 전쟁을 치루는 이유는 단지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위해서, 북한이 죽도록 싫기 때문에, 그들을 죽여야 하기 때문에 똘똘 뭉쳐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는게 아니다. 처음엔 어떤 사명이 있었을수도 있고 왜 싸우는지를 분명히 알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너무 많은 시간동안 싸우면서 잊어버렸다. 그저 전쟁이 하루 빨리 끝나기를,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할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극적으로 휴전협상이 됐음에도 양국의 욕심은 군인들을 다시 사지로 몰아넣었다. 싸우고 싶지 않지만 싸워야만 하는 처절한 마지막 전투를 보면서 대체 누구를 위한 전투이고 희생인지 모르겠다. 왜 그들이 원하지 않는 전투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땅을 더 많이 소유하는게 수백,수천명의 군인들의 목숨보다 더 값졌는가를 생각한다면 더 그렇다. 수많은 시체로 뒤덮여진 애록고지가 자꾸 눈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