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기 전까지 나는 '나'였다. 그때의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부모님,친구들의 몫으로 조금 남겨뒀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나니 나 보다는 가족의 삶에 더 많은 초점을 맞추게 됐다. 일부러 그렇게 정한것도 아닌데 자연스레 그렇게 됐고, 이제 자식들이 다 크고나니 그제서야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됐다. 아이들은 엄마에게도 화려한 시절이 있었음을, 미래에 대한 희망과 많은 꿈이 있었다는걸 알지 못한다. 부모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였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내가 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으니 섭섭해할 이유는 없겠다. 그럼에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엄마에게도 찬란한 역사가 있었다는걸 말이다.
나미(유호정)의 현재는 여느 학부모의 모습과 동일하다. 바쁜 남편은 함께하지 못하는 시간을 돈 으로 때우고, 하나뿐인 딸은 사춘기를 겪는건지 대화도 잘 하지 않으려 하고 말도 툭툭 내뱉는다. 용돈을 줄때만 빼고 말이다. 정신없이 아침을 준비하며 남편과 딸의 수발을 들고, 출근하고 학교가고 난 후에야 겨우 갖게 된 개인시간엔 가족이 먹다 남긴 식은 토스트를 한입 베어물고 창밖을 내다보며 멍하니 있는다. 그때 나미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으면서 지나가는 여고생들 이었는데, 문득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리며 잠시 추억에 잠기게 된다.
그런데 친정 엄마의 병문안을 간 곳에서 25년만에 친구 하춘화를 만나게 된다. 자신처럼 유명 가수의 이름을 닮은 춘화는 카리스마 있는 멋진 친구였는데, 지금은 말기암 환자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왕 만날 거 좋은 소식으로 만났으면 좋았으련만, 친구의 힘든 모습을 지켜보는게 너무 가슴 아프다. 그런 나미에게 춘화는 한가지 부탁을 하는데, 고등학교 시절 '써니'멤버들을 다시 보고싶다는 거였다. 총 7명의 소녀들은 좋아하는 DJ오빠가 라디오를 통해 지어준 '써니'라는 이름으로 우정을 쌓았고 꼭 성공해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는데, 25년 동안 한번도 만나지 못했고 그저 추억으로만 묻어둔 사이였다.
써니 멤버들을 찾으면서 이제 나미는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여고생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맛보게 되고 그 전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감행하는데 소녀 같은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어른으로 살아가곤 있지만 꽁꽁 싸매고 있던 진짜 모습속엔 소녀의 감수성과 아이같은 순진함, 그러면서도 강한 엄마의 모습까지 두루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모습은 많이 변했을지 몰라도, 시간은 많이 흘렀을지 몰라도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과의 만남은 그녀를 미소짓게 했고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그렇게 하나 둘 써니 멤버가 모이게 된다.
예쁜 외모와는 달리 엄청난 포스를 내뿜는 춘화, 입만 열면 욕을 내뱉는 진희, 쌍커풀 만들기에 열을 올리는 장미, 미용실을 하는 엄마 밑에서 미스코리아를 꿈꾸는 복희, 생긴건 모범생인데 각종 연장을 휘두르며 괴력을 발휘하는 금옥, 천사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도도하고 차가운 수지, 그리고 조금은 촌스럽지만 귀여운 나미는 잠 잘때를 제외하곤 언제나 함께였다. 하지만 여고생들의 일상이 예쁠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시길 바란다. 나쁜 짓을 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모범생 모임도 아니기 때문이다. 라이벌 '소녀시대'멤버들과 싸움을 하기도 하고(주로 욕배틀로 끝나긴 하지만) 신경전을 벌인다. 담배를 피고 화장에 술까지 들이키는 모습은 소녀의 이미지 와는 동떨어지지만, 그럼에도 이 모습에 눈쌀이 찌푸려지기는 커녕 웃음이 나오는 건 어른 흉내를 내고 강하게 보이려고 하는 그 치기어린 모습이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난이 위험수위를 넘는 순간 안타까운 비극은 발생하고 25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흐르게 된다.
재잘재잘 떠들고 웃던 소녀들은 성공한 사업가가 되고, 엄마가 되고, 실적 나쁜 보험 판매사가 되고, 술집 여자가 되고, 시어머니 구박에 힘겨워하는 며느리가 되고, 우아한 사모님이 되어있다. 아마 성인이 되서 만났더라면 이들은 친구가 되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순수하게 친구만 좋아하고 사귀던 그 시절엔 마음만 맞으면 모든걸 다 내어줄수 있는 관계를 만들수 있다. 남자들의 우정만 끈끈하진 않는 법이다. 이들의 우정도 그에 못지 않았고 그랬기에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해하지 않고 금방 어울릴수 있었다. 그들은 친구를 바라볼 때 마흔이 넘은 얼굴에서 풋풋했던 그 시절의 어린 모습을 보는지도 모르겠다. 춘화의 유언이 친구들에겐 일종의 행운으로 볼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녀들은 더 큰 선물을 받은 셈이다. 그녀들을 '나'답게 만들수 있는 소중한 친구들이 평생 곁에 있을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