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p.
..남자라는 인간은 육체적 관계와 경험이 풍부해지면, 허세를 부리지 않고, 여자를 차분하게 응시할 수 있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그들은 매우 침착해 보인다.

43p.
..결국, 나는 ‘어쩐지, 기분으로‘ 살고 있는 듯하다. 그런 퇴폐적이고 주체성 없는 생활방식으로 살아간다고 꽤 한심하다고 말할 어른들도 있겠지만, 신세대라는 혹은 신세대로 태어난 나는 ‘내 기분‘이 내 행동의 척도가 되어버렸다.

84p.
..브랜드에 약한 거야: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마네킹이고, 내용은 공허하다.‘라고 하는 ‘문예지‘ 평론가라고 해도, 학력이나 직함이라고 하는 브랜드에는 구애받는 게 인간입니다. ‘이 소설에는 생활이 없다‘라는 ‘문예‘ 기자라고해도, 신문사의 배치라고 하는 브랜드를 떼버린다면 평범한 인간인 것입니다.

127~129p.
.."크리스탈이란 말이지...... 지금 생각해봤는데 우리들의 청춘이란 뭘까. 연애란 뭐지...... 이따위 것들. 철학을 생각하는 소년처럼 생각해본 적이 내겐 없어. 책도 그다지 많이 읽지 않고. 바보처럼 한 가지 일에 열중하게 되는 일도 없어.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니? 그렇다고 머리속이 텅텅 빈 것도 아니고, 흐려져 있는 것도 아니지. 그렇다고 완전히 깨어있는 상태도 아니고, 암울한 느낌은 물론 아니고. 게다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있는 그대로, 여과없이, 수용할 정도로 단순한 것도 아니고 말야."
..그렇게 말하곤 담배불을 껐다.
.."차갑다라는 느낌이 아닐까. 제대로 딱부러지게 말할순 없지만, 역시 크리스탈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

191p.
.."저, 두 커플이 차에 탔을 때 남자끼리 앉는다든지, 커플끼리 앉는 건 그다지 좋지 않아."
..준이치가 말하길 원래 커플이 전후로 교차하여 앉는 것이 상류층 사람들이 차를 타는 방법이라 한다.
..준이치는 이러한 독도 약도 되지 않는, 알고 있어도, 알고 있지 않아도 될 법한 것이라면 정말로 상세하게 알고 있다. 그런 딜레탕트(dilettante)한 점이 가정교육을 잘 받은 걸 느끼게 하고...... 아무튼 그런 점들이 내가 좋아하는 점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1p.
소유욕은 중력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지구가 우리를 붙잡아두려 하는 마음처럼

85p.
그애에게
가는 순간
그 허둥지둥한 때에

버스나 지하철이 정거장이라면서
차곡차곡 지켜 서는 것을
문득문득 참아서지 못해
택시를 타고 만다

121p.
강가엔
고전 건축물들이 주르르 서 있다

건강하게 세월을 참아내어
이 건축물로부터 멀기만한 나라와
멀기만한 시대에서 온 나를 반겨주며

지난 역사를 모두 믿게 한다

149p.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 밖으로 나가는 길에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떠올리며

프삭프삭 웃으며

나의 친구, 나의 일, 사랑 그리고 어려운 문제들
다시 잘 보고 풀어내야지
새로 살 것 없어

스물다섯 살 쪽으로 출렁출렁 걸어나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7p.
.."임계점에 도달한 가장 큰 이유는 극대화된 연결성 때문입니다. 인터넷의 발달 이후 전 세계는 국경 없이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었고, 하늘 아래 무엇이 있는지 쉽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알면 피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인류는 그 어떤 시대보다 새로운 것을 단기간에 쏟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임계점에 도달한 겁니다. 이제 인류가 무엇을 만들어도 그것은 모방과 변주에 불과합니다."

106p.
.."그래서 노인들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부자로 산 인생이나 가난하게 산 인생이나, 후회되거나 만족하거나, 외롭든 풍요롭든, 어떤 인생이었든 간에 그게 헛되지 않았음을 아니까 말입니다. 이 우주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해 왔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몇 달 뒤 하나의 몫을 할 거란 사실을 말입니다."

190p.
.."오늘 제 이야기는 정말 궤변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이 사회에는 이보다 더한 궤변들이 사실인 양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린 무엇이 궤변이고 무엇이 사실인지도 모르는, 성공한 궤변들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2p.
..그 새벽 이래로 나는 삶에 대해 희망을 품지 않았다. 내게 희망이란, 실체 없이 의미만 수십 개인 사기꾼의 언어가 되었다. 절망의 강도를 드러내는 표지기, 여섯 시간이면 약효가 사라지는 타이레놀, 반드시 그리되리라 믿고 싶은 자기충족적 계시, 그 밖에 자기기만을 의미하는 모든 단어.

97p.
..그때 나는 승주가 ‘꽃다운 존재‘라는 생각 자체를 해보지 못했다. 사람 구실 못한다고 화를 내느라, 앵무새한테도 주어지는 저 따뜻한 연민을 품어보지 않았다. 어쩌면 나 역시 꽃다웠던 적이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320p.
.."과학은 후진이 불가능해. 그저 도착하기로 예정된 곳에 도착한 것 뿐이야."

375~376p.
..어떤 계획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그럴싸한 계획이 있으리라 믿는 쪽을 택했다. 그럴싸하지 않을 경우 내게 들이닥칠 갈등을 미연에 봉쇄하는 차원에서, 알아봐야 내가 도울 것이 없으리라는 비겁한 심사에서, 더 캐물어봐야 아버지가 말해주지 않으리라는 편의적 예측에서,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근거 없는 낙관에서 나는 그렇게 했다.

381p.
..어떤 이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매 순간 이것은 허상이라는 자의식이 끼어들었다. 그들은 자기 의지로 움직이는 자가 아니었다. 내 기억이 만들어내는 대로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또 다른 고통을 상기시키는 촉매이기도 했다. 그 고통에는 분명한 이름이 있었다. 내가 떠나온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388p.
...억겁을 살아도, 모든 것이 가능한 천국에서 살아간다 해도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안의 고통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감정적 존재였다.
..그간 만나온 의뢰인들 역시 그랬다. 문제를 잊고자 하는 이들은 대개 롤라 극장으로 뛰어든다. 자기 인생으로 돌아가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자는 드림시어터를 택한다.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예전의 삶과 비슷하게 살다가 비슷한 문제를 안고 롤라로 돌아온다. 최소한 내가 설계하는 드림시어터에선 그렇다. 나는 내 운명이 나 자신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나 자체라고 믿는다. 이 신념이 내가 설계한 운명에도 적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488p.
..내 삶에서 미래라는 유니콘은 없애버렸다. 직장에 나가고, 자전거로 도로와 산악을 달리고, 장미 정원을 만들면서 생존 기계처럼 살았다. 그것이 상습적으로 불운한 한 인간이 사납고 변덕스러운 운명에 맞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519p.
..나는 경주를 오독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의식이라는 외피에 가려진 ‘무엇‘이었다. 동생의 죽음으로 벼랑 끝에 몰렸을 때 그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구원하려 했는지 기억했다면, 가슴에 칼이 박히는 찰나에 기어코 상대의 눈에 젓가락을 찔러넣은 걸 기억했다면 나는 사전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의 본성에 웅크리고 있는 ‘무엇‘이 무엇인지.
..견디고 맞서고 끝내 이겨내려는 욕망이었다. 나는 이 욕망에 야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어쩌면 신이 인간 본성에 부여한 특별한 성질일지도 몰랐다. 스스로 봉인을 풀고 깨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라는 점에서. 어떠한 운명의 설계로도 변질시킬 수 없는 항구적 기질이라는 점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2p.
..렌소이스 사막의 생명체는 마치 아베 코보가 <모래의 여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강한 적응력을 이용하여 경쟁권 밖으로 벗어난 생물들‘일 것이다....

34~35p.
..물과 공기를 제외하면 인류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천연자원은, 모래다. 건축용 자재나 유리뿐 아니라 반도체 칩, 스마트폰 액정, 실리콘 등 모래의 변신이 너무나 신묘하기에 잊고 지낼 뿐. 컴퓨터, 콘크리트, 아스팔트로 만들어진 대도시를 상기하면 인류가 이룩한 현대 기술문명 자체가 사막과 다를 바 없는 ‘사상누각‘이다.

95p.
..배낭여행자들이 통상 ‘천국‘이라 부르는 곳은 산천이 아름답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냥 좋은 곳이다. 처음엔 히피들이 하나둘 머물기 시작하고, 이어서 배낭여행자 무리가 오가고, 나중엔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이쯤 되면 숙박업소, 식당, 클럽들이 우후죽순 골목마다 들어선다. 그렇게 해서 ‘심심한 천국‘이 ‘신나는 지옥‘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나는 3년에 걸쳐 볼리비아의 사마이파타를 세 차례 방문했다. 그때마다 사마이파타는 ‘배낭여행자들의 천국‘ 초창기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113~114p.
..인류는 오랜 세월 대지의 길을 따라 서로의 풍습과 문화를 주고받았다. 한 달을 35~36일, 1년을 10개월로 계산했던 켈트족은 한 해의 끝으로 여겼던 동지에 ‘귀신을 피하려 얼굴에 가면을 쓰고‘ 속을 파낸 ‘순무 안에 불을 켜고‘ 밤새 돌아다녔다. 켈트족의 ‘송년 의식‘은 1년을 12개월로 계산하던 기독교로 흡수되면서, 10월 마지막 밤에 열리는 ‘핼러윈‘이 되었다. 이란에서도 동지 때면 변장한 아이들이 이웃집 앞에서 접시를 두드려 견과류를 받았다. 아제르바이잔에선 아이들이 이웃집 문 앞에 바구니를 두고 나무 뒤에 숨어 사탕을 기다렸다. 배달족 또한 동지를 한 해의 마지막 날로 여기던 시절 ‘귀신을 쫓기 위해 붉은 팥죽을 뿌리고‘ ‘밤새 등불을 켜고‘ 마을을 쏘다니며 놀았다. 동지, 핼러윈, 카니발, 홀리, 삐마이 등 송년 혹은 새해맞이 축제를 부르는 이름만 저마다 달랐을 뿐이다.

168p.
..나는 악사라이 소재 카라반세라이로 들어섰다. 현존하는 카라반세라이 중 가장 큰 규모라고 했다. 수용 인원 3,000명, 짐 실은 낙타가 들고 날 수 있을 13미터 높이의 정문, 닫으면 그 자체로 요새였다. 안마당을 가로질러 곧장 낙타가 머물던 방으로 들어갔다. 유적을 방문할 때마다 나만의 관습이 있다. 첫 번째 유물이나 마음에 드는 장소를 찾아가 ‘환청‘이 들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낙타를 묶던 돌기둥 사이를 걷노라니 환청이 차츰차츰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낙타 울음소리, 각기 다른 부족어로 떠드는 짐꾼들의 대화, 나는 환청을 따라 햇볕 내리쬐는 마당으로 다시 나왔다. 나무 위에선 새들이 짹짹거렸고, 상인들이 피로를 달래기 위해 저마다 자기 고장의 악기로 연주하고 합주를 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경험한 최고의 환청이었다.

182p.
..무더운 나라, 외딴 오지에서 지내다 보면 차가운 맥주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 맥주는 ‘문명의 맛‘이다. ‘냉장고‘가 돌아가지 않으면 시원한 맥주 맛을 볼 수 없으니까. 차가운 맥주가 그리우면 도시로 돌아갈 때가 됐다는 신호다. 아이들에겐 ‘칫솔‘을, 어른들에겐 ‘의약품‘을 드린 후 마을을 떠났다. 오지 부족민의 호의에 사탕이나 초콜릿으로 답례하면 그들의 치아를 망치고, 티셔츠로 답례하면 그들의 고유문화를 망친다.

194p.
..십승지지(十勝之地) 같은 마을이었다. 전쟁, 흉년, 전염병 같은 환란이 온 나라를 뒤덮을지라도 안심할 수 있는 곳. <정감록> 등 예언서에 등장하는 십승지지는 첫째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자급자족 가능하고, 둘째 물이 풍부하고, 셋째 밖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이라야 한다....

267~268p.
..중남미 전설에 따르면 세계는 원래 까만색과 흰색밖에 없는 흑백이었다. 그러다 신이 바라보기에 너무 지루해서 여러 사물들로부터 빛을 뽑아내 다시 색을 칠했다고 한다. 그중 ‘소년들의 웃음‘에서 추출한 색깔이 노란색이었다. 카르타헤나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색이다. 노랗게 칠한 건물과 노랗게 담벼락이 연이은 골목들. 그래서 마르케스의 소설에선 노란 나비가 그토록 자주 날아다녔던 걸까?

301p.
...그런 사실을 떠올리면, 고대, 중세, 근대, 현대, 그 어느 시대에나 ‘머무는 자‘와 ‘떠나는 자‘가 동시에 존재했으며, 지금도 동시에 존재한다. 머무는 자와 떠나는 자, 두 무리를 가르는 기준은 ‘현재, 이곳에 적응하는 능력의 차이 ‘일 수도 있고, ‘현재, 이곳보다 미래, 저곳으로 가고자 하는 기질의 차이‘일 수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