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있은 후로 남자, 특히 중년 이상의 남자가 너무 무서웠고, 줄곧 그들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품고 살아왔다.
..그 마음이 점점 부풀어 올라 어느덧 소위 ‘여우짓’이라는 갑옷을 몸에 걸치게 됐다. 중년 이상의 남자와 마주할 때만 걸치는 갑옷이지만, 그 덕분에 득을 볼 때도 적지 않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며 나이 많은 남자에게는 귀여움과 비호를 받았다. 회사원 시절도 마찬가지였고 프리랜서가 된 후에도 ‘여우짓’의 갑옷은 크게 유용했다. 같은 여자들이 그걸 나쁘게 보고 뒷말을 한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이렇듯 처음 보는 편의점 점원에게까지 무의식적으로 아양을 떨 만큼, 여우짓은 호흡처럼 살아가기 위한 생리현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때 좀 더 의심해야 했다. 애당초 스스무의 말이 적중한 적은 거의 없으니까. 그럴듯한 소리를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리와 그 자리의 분위기에 맞추어 적당한 말을 꺼내놓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 말을 곧이듣다가 뼈아픈 경험을 몇 번이나 했으면서 질리지도 않고 계속 듣게 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스스무는 상대방이 바라는 말을 해줄 뿐이리라. 그러므로 그 말을 들으면 뭔가 면죄부를 얻은 듯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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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떠났고, 저는 몇 시간 동안이나 해방의 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배회했습니다. 그러면서 줄곧 바샤라트가 한 말이 얼마나 옳았는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더 잘 알 수 있을 뿐이다. 과거로의 제 여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제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알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관객이고,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살아감으로써 그것이 전해주는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우주는 엄청난 양의 공기가 비축된 데서 시작됐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그 사실에 감사한다. 나는 바로 그것 때문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욕구와 고찰은 우리의 우주가 점진적으로 내쉬는 숨에 의해 생성된 소용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내쉼이 끝날 때까지, 나의 사고는 계속될 것이다.

...그들은 단순한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복잡한 정신은 스스로 발달할 수 없다. 그럴 수 있다면 야생화된 인간 아이들도 다른 아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아야 한다. 정신은, 무관심 속에서도 혼자서 쑥쑥 자라는 잡초처럼 자라지는 않는 법이다. 만약 그렇다면 고아원에 버려진 아이들도 너나없이 훌륭하게 자랄 것이다. 정신이 그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다른 정신들에 의한 교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교화야말로 데릭이 마르코와 폴로에게 제공하려는 것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애나는 자기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노력한다. 동물과의 비非성적인 관계는 정상으로 보면서 왜 성적인 관계는 그럴 수가 없을까. 동물이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한정된 동의는 동물을 애완용으로 기르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데, 왜 그들과 섹스를 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것일까. 이번에도 애나는 개인적인 불쾌감에 근거하지 않은 반박 논리를 찾을 수가 없다. 불쾌감이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깨끗이 용서하고 모두 잊어버려라"라는 말도 있듯이 이상화된 우리의 관대한 자아에게는 그런 충고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이 두 행위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용서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어느 정도 망각을 해야 한다. 과거의 심적 고통을 더 이상 생생하게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을 유발한 행위를 용서하기도 더 쉬워지고, 그 결과 해당 기억 자체가 덜 중요해지는 식으로 말이다. 과거의 당신을 격분케 했던 악행도 반추의 거울에 비춰 보면 용서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현상의 이면에는 바로 이런 심리적 피드백 고리가 존재한다.

.."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잊어버릴 수 있죠? 우리 모두 종이 없이 지금 이렇게 말을 나누고 있는데요."
.."설교는 대화와는 달라." 모스비는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난 최대한 좋은 설교를 하고 싶어. 하고 싶은 말을 잊어버리진 않겠지만, 그 말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잊어버릴 수 있거든. 미리 써놓으면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지. 하지만 글을 쓴다는 건 단지 기억을 위해서만은 아니야. 글을 쓰면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지."
.."글을 쓰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죠?"
.."좋은 질문이야. 묘하게 들리지? 정확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글을 쓰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결정하는 데 도움이 돼. 내가 온 곳에는 이런 말이 있어. 베르바 볼란트, 스크립타 마넨트. 티브어로는 ‘입에서 나온 말은 날아가버리지만, 글로 쓴 말은 여전히 남는다‘라는 뜻이 되겠군. 무슨 뜻인지 알겠어?"

..지징기는 글 쓰는 연습을 계속했고, 점차 모스비가 한 말을 이해하게 됐다. 글이란 단지 누군가가 한 말을 기록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다. 글은 입밖에 내서 말을 하기 전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결정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단어들 또한 단순한 말 조각이 아니었다. 단어들은 생각의 조각이었다. 그것들을 옮겨 적으면 생각을 벽돌처럼 잡고 다른 배열들 속에 끼워넣을 수 있었다. 글쓰기는 단지 말을 하는 것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스스로의 생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일단 보고 나면, 그것들을 개선시켜 더 강하고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다.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들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특정 순간들을 선별하는 기준은 각자 다르며, 그것은 우리의 인격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우리들 각자는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는 세부 사항들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기억하며, 그 결과 구축된 이야기들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만약 모든 사람이 모든 사건을 기억한다면, 개개인 사이의 차이 또한 깎여나가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자아상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방범 카메라가 기록한 무편집 영상이 영화가 될 수 없듯이, 완벽한 기억이 절로 이야기가 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사실로 입증된 기적은 딱 하나, 천지창조뿐이며, 우리 인간 모두가 그 기적으로부터 정확하게 똑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세속적 합의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진리의 탐구만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과학은 의도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줄곧 진리와 의도가 동일한 것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에드거 앨런 포는 단순히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경향을 ‘비뚤어진 임프’라고 표현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심술궂은 악마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분명, 선택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내리는 모든 결정은 당신 성격의 일부가 되고, 당신이라는 사람을 형성하니까요. 만약 당신이 잘못 받은 거스름돈을 언제나 돌려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지금 행동은 당신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에 영향을 끼칠 거예요..."

...어떤 개인의 성격이 그가 지금까지 해온 선택들에 의해 밝혀지는 것이라면, 그와 비슷하게 그 개인의 성격은 그가 여러 세계에서 해온 선택들에 의해 밝혀진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에게 여러 개의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명의 마르틴 루터들을 조사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교회의 권위에 거역하지 않은 루터를 찾기 위해서는 아주 멀리 떨어진 세계까지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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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갈색 머리의 꺽다리와 굽은 등의 작다리가 내게 최후의 펀치를 날린다. 그러고는 갑자기 떠나갔다. 곧 둘은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상의, 밍밍한 문장들. 이런 사실은 내게 상처를 줬다. 그들이 나의 삶에서 중요한 것보다 나는 그들의 삶에서 덜 중요했으니까. 나는 생각과 고뇌 전부 다를 그들에게 쏟아붓는다, 그것도 눈 뜨자마자. 그토록 재빨리 나를 잊을 수 있는 그들의 능력에 속이 상했다.

..몇 년 후 나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평전을 읽다가, 배고픔과 가난에 시달려 잔뜩 성이 난 여자들이 1789년에 베르사유로 몰려가서 항의를 하던 중에도 군주가 모습을 드러내자 자연스럽게 국왕전하 만세!라고 외치는 장면을 기술한 대목에서, 내가 유년기를 보낸 마을의 주민들과 특히 나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되리라. 권력에의 전적인 복종과 항시적 항거 사이에서 찢긴 ─ 그들 대신에 발언을 해왔던 ─ 그들의 육신.

...어머니가 하는 말들이 일관적이지 않거나 모순적인 게 아니며, 일종의 전향자의 오만함으로 내가 믿는 가치들과 ─ 나의 부모, 나의 가족에 반해서 나를 구축해 나가면서 획득하게 됐던 가치들 ─ 양립이 더 잘되는 또 다른 논리성을 어머니에게 강제하려고 들었던 것은 바로 나였고, 특정 언설과 실천을 생산해 내는 논리들을 재구성해 낼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만 일관성이 결여된 것임을 깨닫는 데 여러 해가 걸렸다. 수많은 언설들이 어머니를 가로질러 지나갔고, 그러한 언설들이 어머니를 통해 말을 했고, 어머니는 공부를 하지 못했다는 수치심과 어머니 스스로도 말해 왔듯이 어쨌든 난관을 헤치고 빠져나와 잘생긴 아이들을 낳아 놨다는 자부심 사이에서 늘 갈팡질팡했으며, 이 두 종류의 언설은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 하나도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됐다.

...사촌은 할머니에게 외출 허가 기간 동안 느꼈던 행복한 감정을 털어놓았다. 누구라도 그만큼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라면 다른 그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모든 것이 서로가 맺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결핍이나 모욕을 겪어 보지 않고 안락함만 누리는 사람들에게는 뭔가가 결여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사람들은 진정으로 삶을 살아 보지 못한 셈이었다.

...마치 어느 날 문득, 사람들이 전부를, 가족도 친구도 일자리도 포기해 버리고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이제 더는 믿지 않기로 선택하듯이. 그러한 믿음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삶을 더는 믿지 않기로 선택하듯이....

...죄악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이다. 특히 겉모습이다.

..나는 갑자기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어머니의 말이 겨우 들렸을 뿐. 아니, 저 미친놈 뭐 하는 거야?
..그들 곁에 있고 싶지 않았고, 나는 이 순간을 그들과 함께 나누기를 거부했다. 나는 이미 그들로부터 멀어졌고, 이제부터 더 이상 그들의 세계에 속하지 않았다. 편지가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들판으로 달아나서 밤이 깊도록 한참을 걸었다. 북쪽 지방의 선선함, 흙길, 1년 중 그맘때면 몹시 강하게 풍겨 오는 유채 냄새.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새로 시작될 내 삶을 계획하느라 밤을 오롯이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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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은 여전히 수많은 상심의 이별과 행복한 만남이 얽히는 가장 감정적인 공간이다. 만약 방사선 측정기처럼 작동하는 ‘감정 측정기’가 있다면, 그래서 어떤 공간에 떠다니는 슬픔, 행복, 기쁨, 설렘, 절망 등의 감정을 측정할 수 있다면, 아마 세상의 모든 공간 중 공항에서 가장 다양하고 많은 감정이 측정되지 않을까.

..우리는 텔레비전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보고 있지 않다. 실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텔레비전이 우리를 보고 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응시’하며 끊임없이 시선과 말을 건네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텔레비전이다....

..책걸상을 두 개 놓으려면 방이 크거나 많아야 했다. 크고 푹신한 소파를 놓으려면 그것을 놓을 만한 거실이 먼저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거실이 있기 위해서는 조금 더 ‘잘’ 살아야 했다. 의자는 사물이나 가구를 넘어 내가 선망하던 일종의 계층, 문화, 삶의 양식 같은 것을 대변하는 기호였다. 하지만 우리 집엔 배고플 때 마술처럼 펼쳐지는 양은 밥상, 좌식 책상이라고 주장하는 밥상, 꼬리 긴 학이 우아하게 노니는 할머니의 자개 화장대, 방바닥에 깔린 이불, 재래식 변소 등이 있었을 뿐 의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 집은 마치 어른들이 사라지고 아이들만 남은 도시처럼 키 작은 공간이었다.

..입식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이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의 의자를 물려받고 그것을 다시 자식에게 물려주곤 한다는 이야기가 언제나 부러웠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간과 사연을 지금 우리의 공간 한쪽에 놓아두고, 다시 그곳에서 또 다른 사연을 담아가며 사는 것. 그리고 그것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삶의 역사성을 가지고 싶었다. 기억과 시간과 감정을 오래된 사물에 담고 그것에 또 다른 이의 기억과 시간을 축적하는 그런 역사성을. 하지만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경험한 우리의 도시처럼, 우리 집 역시 어떤 기억과 시간이 축적된 사물을 갖지 못했다. 대신 합성수지나 플라스틱으로 쉽게 만들어지고 쉽게 사용되고 쉽게 버려지는 사물들만이 공간에 넘쳤다. 가난한 사회에서는 좋은 재료로 정성스레 만든 사물을 소유하기 힘들었다. 그것은 물질적인 부의 결핍보다 더 근원적인 결핍을 안겨주었다.

..이 반 평의 공간에서 우리는 몽상하고 욕망하고 휴식하고 잠들고 꿈꾸고 깨어난다. 슬플 때, 아플 때, 피곤할 때 우리는 이 작은 공간에 몸을 누인다. 이곳에서 때론 절망하고 자주 슬퍼하고 종종 사랑한다. 그리고 대개 우리는 침대에서 태어나고, 마지막 호흡을 멈춘다. 사람이 살면서 조금은 겸손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침대의 공간 크기 때문이 아닐까. 침대가 아무리 커져도 항공기나 유조선처럼 커질 수는 없다. 침대는 침대로 정의되는 크기를 넘어서지 않는다. 낮에 어떤 대단한 일을 성취하든, 혹은 어떤 사소한 일에 절망하든 우리는 결국 이 반 평 크기의 사물에 몸을 누이고 잠이 든다. 그리고 결국 침대보다 더 작은 다른 사물에서 영원히 잠들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난다.

...명확하게 들리는 것을 듣는 능력은 실은 능력이 아니다.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것은 ‘확인’이나 ‘점검’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듣는 일에는 사랑의 능력이 필요 없다. 만약 사랑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일에서 시작된다면, 그것은 빛이 너무 많은 공간이 아니라 조금은 부족한 곳에서 비롯되는 일이다.

...어떤 옷을 정리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지만 비교적 쉽게 버릴 수 있는 옷도 있었다. 그런 옷에는 유용성이 아니라 기억이 부재했다. 대개 자주 입지 않은 옷들이라 함께한 날이 적었다. 함께한 날이 적은 만큼 옷에 담긴 풍경도 적었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상태 좋은 옷이 버려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반면, 어떤 옷은 쉽게 버릴 수 없었다. 대개 그런 옷은 낡았고, 그만큼 옷에 담긴 기억이 많았다. 낡은 옷일수록 버리지 못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평생 달고 다닌 얼굴이지만, 또 여기에 형성된 여러 기관을 통해 보고 듣고 먹고 말하고 싸우고 사랑했지만, 막상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는 이 얼굴이 꼭 내 것만은 아니었다. 이 얼굴로 수많은 말을 하고 표정을 지었지만, 꼭 내 뜻대로 말하고 표정 지은 건 아니었다. 내 얼굴은 나를 위해서 기능하기보단 종종 남을 위해서 애쓰곤 했다. 평생 나보다 다른 이가 훨씬 더 많이 본 내 얼굴은 내 것이지만 동시에 내 것이 아니기도 했다. 얼굴을 풍경처럼 보는 것은 거울을 통해 본 내 얼굴이 꼭 나만의 얼굴은 아닐 수도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내 얼굴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고 나만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 얼굴은 그간 살아오며 만났던 사람과 마주쳤던 사건과 감당했던 감정이 뒤섞인 아득한 풍경이었다.

...이제 내 삶도 천천히 살펴볼 때다. 가끔씩 천천히 거울에 담긴 ‘얼굴’을 바라본다. 그럴 때, 얼굴은 먼 곳이 된다. 타인처럼, 낯선 여행지의 풍경처럼, 때론 달의 뒷면처럼.

..기억이 시간과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기억은 공간과 상관한다. 아니, 기억은 그 자체로 공간이다.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함께 갔던 무수한 공간과 풍경을 떠올리지 않고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릴 수 없고, 함께 뛰어놀던 골목과 놀이터를 떠올리지 않고 어릴 적 친구를 떠올릴 수 없다. 어떤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공간을 떠올린다는 의미이고, 그렇기에 공간이 내밀할수록 그 기억도 함께 내밀해진다. 그래서 바슐라르가 말했듯이 깊이와 내밀함을 부여하는 수직성이 부재한, 즉 옥상이나 지하가 없는, 오로지 수평성만 존재하는 아파트에 사는 일은 어쩌면 작은 비극일지도 모른다. 위로 오를 수 있고 아래로 내려올 수 있는, 또 많은 구석이 존재하는 주택은 그만큼 많은 기억을 만든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통해 수평에서 다른 수평으로 이동하는, 단조로운 평면을 가진 아파트에는 다양한 구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만큼 기억도 단조로워진다. 단기간의 경제성장과 도시화가 만들어낸 결과겠지만 내밀함이 부재한 아파트의 대대적인 보급은 어쩌면 소비사회의 전全 사회적 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만 자고, 일하고, 소비하기 위해 배터리를 충전하는 곳으로 주거 공간을 전락시키는 어떤 전략. 먹고 놀고 쓰고 공감하고 즐기고 읽고 듣고 공부하고 파티를 열고 사랑하는 일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집 밖에서 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해지는 어떤 전략. 이 총체적인 전략을 통해 아파트에 부재한 내밀함을 풍족한 외부 소비 공간에서 끝없이 소비하여 대체하는 것이 전 사회적 구성원의 비계획적 계획은 아니었을까.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경제 발전은 집의 내밀함과 추억의 내밀함을 잃고 얻은 대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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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p.
..그것은 그의 기질이다. 그의 기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 그의 기질은 고착되어 있다. 기질과 두개골은 몸에서 가장 딱딱한 두 부분이다.
..기질을 따르라.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그렇게 고차원적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 그것은 베네딕트회의 법칙처럼, 하나의 법칙이다.
..그의 몸은 건강하고 정신은 맑다. 직업상, 그는 학자다. 혹은 그래왔다. 가끔씩 그의 중심부는 학문적인 일에 관련돼 있다. 그는 그의 수입과 기질과 감정의 반경 내에서 살아간다. 그는 행복한가? 대부분의 척도로 보자면 그렇다. 그는 그렇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가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 후렴구를 잊은 건 아니다. 죽기 전에 누구도 행복하다 말하지 말라.

11p.
..그는 새로 맡은 과목의 강의 준비에 하루에 몇 시간씩 할애하지만, 커뮤니케이션 101 안내서를 보고 그 과목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 사회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 의도를 서로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언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겉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말은 노래에서 시작됐으며, 노래는 지나치게 크면서도 다소 텅빈 인간의 영혼을 소리로 채우기 위해 생겼다고 생각한다.

12p.
..그는 계속 가르친다. 그렇게 하면 기운이 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어주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실감케 해주기 때문이다. 배우러 온 학생들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데, 가르치러 온 교수는 가르치면서 가장 예리한 교훈들을 얻는다. 그가 그 아이러니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는 이런 것에 대해서는 소라야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상황에 비춰볼 때, 거기엔 아이러니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87p.
..고백, 사과. 왜 이렇게 굴욕감을 주려고 난리인 걸까? 조용해진다. 그들은 이상한 짐승을 구석에 몰아놓고 어떻게 끝낼지 모르는 사냥꾼들처럼,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돈다.

93p.
.."개들이 있어요. 개들은 아직 쓸모가 있어요. 개가 많을수록, 더 도움이 되죠. 여하튼 도둑이 들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더 나을 것도 없어요."
.."그 말은 아주 철학적인데."
.."예.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철학적이 될 수밖에 없죠."

109p.
...그는 몸을 가꾸지 않는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전에 루시의 친구들을 못마땅해한 이유다. 자랑스러워할 건 없다. 그의 마음에 자리잡은 편견이니까. 그의 마음은 나태하고 빈곤하며 정처없는 낡은 생각들의 도피처가 되어 있다. 그는 그것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깨끗하게 쓸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거나, 그럴 만한 관심이 없다.

111p.
.."그렇다면 썩 좋은 일이다. 얘야,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일에 신경을 쓰는 게 피곤하다. 너나 베브가 하는 일은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동물복지에 관계된 사람들이 특이한 종류의 기독교인들 같아 보인다. 모든 사람이 너무 즐겁고 선의가 지나쳐, 얼마 후에는 몸이 근질거려 밖으로 나가 강간을 하고 약탈을 하고 싶겠어. 아니면b고양이를 발로 차버리든가."

112p.
.."하지만 그건 사실이에요. 그들은 나를 더 높은 차원의 삶으로 이끌지 않아요. 그 이유는 더 높은 차원의 삶이 없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유일한 삶이에요. 우리는 그것을 동물들과 공유하는 거예요. 베브같은 사람들이 모범을 보이는 겁니다. 저는 그 모범을 따르려고 해요.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특권 일부를 동물들과 공유하려는 거예요. 저는 개나 돼지와 같은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면 우리 밑에서 사는 개나 돼지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얘야, 화내지 말아라. 그래, 나는 이것이 유일한 삶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동물에 관해서 얘기하자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동물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자. 하지만 균형을 잃지는 말자. 우리는 동물과는다른 차원의 피조물이다. 반드시 더 높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다르다는 말이다. 따라서 동물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려면, 죄의식을 느끼거나 보복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단순한 아량에서 그렇게 하자."

148p.
..어떤 것을 소유하는 것에 따르는 위험. 차 한 대, 구두 한 켤레, 담배 한 보루. 너무 많은 사람들에 너무 적은 물건들. 모든 사람이 하루동안 행복할 수 있도록, 모든 게 순환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론이다. 이론을 따르고, 이론이 주는 위안을 따르고. 인간의 사악함이 아니라 거대한 순환 시스템일 뿐이다. 동정이나 두려움은 그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과 아무 관련도 없다. 그런 식으로 이 나라의 삶을 바라봐야 한다. 그런 도식적인 방식으로 그걸 바라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이다. 차들, 구두들, 그리고 여자들. 그 시스템 안에는 여자들과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위한 자리가 있어야 한다.

169p.
..저녁이 온다. 배는 고프지 않지만 먹는다. 먹는 것은 의식이다. 의식은 일을 더 쉽게 만든다.

220p.
..자신처럼 이기적인 사람이 죽은 개를 위해 봉사하다니 신기하다. 세상에, 혹은 세상에 대한 생각에, 자기를 바치는 더 생산적인 다른 방법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더 오랫 동안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아이들한테 몸에 독이 묻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타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을 더 다부지게 먹고 앉아서 바이런 대본을 쓰는 것조차 아쉬운 대로 인류에 대한 봉사로 쳐줄 수 있을지 모른다.
..동물 복지, 재활, 심지어 바이런에 관한 일—이런 일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다. 동물의 시체의 명예를 지키는 일을 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는 그 일을 한다. 그는 그처럼 어리석고, 미치고, 비뚤어진 인간이 돼가고 있다.

261p.
.."당신은 미안하며, 당신에게 서정적인 게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한테 서정적인 게 있었다면, 우리가 오늘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발각이 되면 미안해 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아주 미안해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미안해 하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미안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309p.
.."정말로 굴욕적이구나. 그토록 원대했던 희망이 이렇게 끝나다니."
.."그래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굴욕적이죠. 그러나 어쩌면 다시 시작하기에는 좋은 지점일 거예요. 어쩌면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걸 배워야 할 거예요. 밑바닥에서 출발하는 걸 배워야죠. 아무 것도 없이. 어떤 것밖에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아무 것도 없이. 카드도 없고, 무기도 없고, 재산도 없고, 권리도 없고, 위엄도 없고."
.."개처럼."
.."그래요, 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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