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물만두 > 퍼플라인 1 중에서...

가브리엘 데스트레

가브리엘 데스트레는 앙리 4세의 수많은 애인들 가운데 그가 결혼하려고 마음먹었던 유일한 여자였다. 피카르디 출신으로 보포르 공작부인을 제수 받은 가브리엘은 매우 아름다웠지만 성품은 약간 잔인한 데가 있었다고 하며 앙리 4세와의 결혼을 앞두고 자간으로 사망했다. 항간에는 왕비였던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독살이라는 설이 유포되었으나 진위는 알 수 없다. 슬하에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다. (방돔 공작 세자르, 몰타 대 수도원장 알렉상드르, 엘뵈프 공작부인)
1598년 앙리 4세는 장자 방돔 공작 세자르를 로렌 가문의 일족인 메르쾨르 공작의 딸 프랑수아즈 드 로렌 메르쾨르와 결혼시키기로 결심했다. 당시 세자르는 4살, 프랑수아즈는 6살이었다. 메르쾨르 공작은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브르타뉴를 세자르에게 넘겨주라는 요구는 불만족스러웠지만 당시 왕이 가브리엘과 결혼하려 했었기 때문에 딸을 왕비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유혹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결혼식 며칠 전에 죽고 말았고, 세자르 드 방돔은 서자로 전락했다. 따라서 메르쾨르 가에서는 프랑수아즈를 시집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얼마 후 메르쾨르 공작은 전사했으나 그의 부인인 마리 드 뤽상부르는 딸을 방돔 부인으로 만드느니 카푸친 수도회에 보내겠다고까지 했다. 그러나 그토록 강경했던 그녀도 결국 가주 로렌 공작의 뜻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로렌 공작은 앙리 4세의 누이인 카트린 드 부르봉과 결혼했으나 상처했다. 따라서 로렌 가는 다시 앙리 4세와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할 필요가 있었다.)
프랑수아즈 드 로렌 메르쾨르와 세자르 드 방돔은 1607년 7월 5일 결혼했으며 그들 사이에 메르쾨르 공작이자 후에 아버지 사후 방돔 공작을 물려받은 루이 드 방돔, 보포르 공작 프랑수아 드 방돔, 느무르 공작부인 엘리자베스가 태어났다. 루이는 마자랭의 질녀인 로라 만치니와 결혼해 아들 루이 조제프와 필립을 두었다.

낭트칙령

신교파인 위그노에게 조건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약 30년간 지속된 프랑스의 종교전쟁(일명 위그노전쟁 1562∼98)을 종식시킨 점에서 의의가 크다. 앙리 4세가 즉위할 당시 프랑스는 신 ·구 양파의 종교적 대립으로 국내는 2분되었고, 혼란이 극도에 달하였다. 왕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직접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하면서 신교도(위그노)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하고자 이 칙령을 공포한 것이다.
따라서 이 칙령은 일찍이 프랑수아 1세와 앙리 3세에 의하여 규정된 ‘구교 이외의 이단(異端)은 엄벌에 처하며, 이의 밀고자는 벌금 또는 몰수재산의 1/4을 양여한다’ 등의 조항을 삭제시켰다. 결국 국민에게 신앙의 자유를 부여한다는 취지에서 공포되었으나, 국가의 입장에서는 구교를 국교로 규정한 실정이어서 이 칙령 이후에도 구교도는 신교도에 비해서 훨씬 유리한 조건이 부여되었다. 주요한 조항을 보면, ① 기정사실로 인정한 곳에서의 위그노의 예배의식 집행은 용인되나 파리 시내에서는 금한다. ② 위그노에 대하여도 재산상속 ·대학입학 ·관리취임의 권리를 인정한다. ③ 이미 8년 전부터 위그노가 장악한 요새는 이후에도 신앙상의 안전지대로서 장악함을 허가한다. ④ 구 ·신 양교도 간의 분쟁을 심리하기 위하여 가톨릭교도 10명, 위그노(신교도) 6명으로 구성된 특별법정을 파리 고등법원 내에 두며, 신 ·구교 같은 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특별법정을 세 곳의 지방고등법원 내에 설치함을 인정한다 등으로 되어 있다. 결국 신앙의 자유를 규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위그노에게는 결정적으로 불리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측의 불만은 더욱 심하여 고등법원이 칙령의 등록수속을 거부하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이듬해 2월 앙리 4세가 고등법원에 대하여 강경조치를 발동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루앙의 지방고등법원의 경우는 1609년까지 등록을 지연시키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다음의 루이 13세 때에는 재상 리슐리외가 무력으로써 위그노의 정치력을 분쇄하고 칙령 중의 안정지대 인정조항을 삭제하기에 이르렀고(알레 칙령), 또 절대군주인 루이 14세는 85년 10월 18일 전 조항을 폐지하고, 위그노의 종교적 ·시민적 자유를 전면적으로 박탈하였다. 이로써 남 ·서 프랑스에 많이 살던 신교도 약 100만이 크게 동요를 일으켜 그 중의 약 40만 명이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등으로 망명하였다. 신교도는 거의가 근면한 상인 ·기사 ·공예인 ·군인 등이었으므로, 이로 인한 프랑스의 손실은 많았다.

 브르타뉴대공성

프랑스 낭트. 앙리 4세가 1598년에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에게 종교적인 자유를 주는 낭트 칙령을 내린 곳이다.

 

 

 

 

 

 

 브루노 [Bruno, Giordano, 1548~1600.2.17]

르네상스 사상을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국적 이탈리아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이탈리아 놀라
주요저서 《원인 ·원리 및 일자()에 관하여》(1584) 《무한, 우주와 제세계에 관하여》(1584) 《최소자론()》(1591)

나폴리 근처 놀라 출생. 어려서부터 나폴리에서 공부하고, 18세에 도미니코 교단(敎團)에 들어가 사제(司祭)가 되었다. 그 동안에 고대와 당시의 자연학(自然學)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점차 가톨릭 교리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되었다. 1576년 이단(異端)과 살인 혐의로 사제복을 벗게 되자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유럽 각국을 돌아다녔으며, 프랑스 ·영국 ·독일 등지에서 강의도 하였다. 1592년 베네치아에서 이단신문(異端訊問)에 회부되었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에서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자연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찬 그의 철학은 범신론적인 특징이 강하다. 우주는 무한하고, 신성(神性)은 전우주를 꿰뚫는 생명, 즉 ‘우주령(宇宙靈)’이라고 해석하고, 인간은 ‘영웅적 정열’로 이 우주령의 영원한 활동과 결부된 본성을 자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브루노는 그것을 참다운 종교로 생각하였다. 저서는 《원인 ·원리 및 일자(一者)에 관하여 Della causa, principio ed uno》(1584) 《무한, 우주와 제세계에 관하여 Dell’ infinito universo e mondi》(1584) 《최소자론(最小者論) De triplici minimo》(1591) 등이 있다.

조르조네 [Giorgione]

 Giorgio da Castelfranco라고도 함. 본명은 Giorgio Barbarelli.
1477경 베네치아 베네토 카스텔프랑코~1510 베네치아.
이탈리아의 화가. 

베네치아 미술에서 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처음 시작했다(→ 베네치아 화파). 베네치아 회화의 주요장르인 연상적이고 목가적인 풍경화 가운데 최초의 작품으로 꼽히는 〈폭풍 The Tempest〉(1505경)는 그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전기작가이자 마니에리스모미술가인 조르조 바사리가 〈이탈리아의 뛰어난 건축가·화가·조각가들의 생애 Vite de'piú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d architettori italiani……〉(1550, 1568)에서 기록한 전설들을 제외하고 실제로 알려진 것은 전혀 없다. 조르조네의 이름은 현재 남아 있는 1507, 1508년의 두 자료에 초르치 다 카스텔프랑코(베네치아의 방언), 즉 카스텔프랑코의 조르조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관례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조르조네(또는 초르촌)라는 이름은 1528년 그리마니 컬렉션의 작품 목록에 처음 나온다. 이 이름은 '키가 큰 조르조' 또는 '몸집이 큰 조르조'라는 뜻으로 그가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미남이고 호색적이었다. 르네상스기의 유명한 미술 후원자인 만토바의 이사벨라 데스테와 그녀의 대리인인 베네치아의 타데오 알바노 사이에 오고 간 1510년 10월 25일 편지에는 조르조네가 그무렵 베네치아에 널리 퍼져 있던 흑사병에 걸려 바로 얼마 전에 죽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를 다룬 기록 중 가장 최초의 것은 바사리가 쓴 전기이다. 그것은 조르조네의 평범한 태생, 고상한 정신, 인간적인 매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런 특징은 바사리가 조르조네의 그림들이 가지고 있는 시적인 특성을 기초로 나름대로 상상한 결과임이 확실하다.
청년 조르조네가 1490년경 베네치아에 가서 당대의 가장 뛰어난 대가인 조반니 벨리니 밑에서 공부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조르조네의 그림에 나타나는 기법과 색채, 분위기는 확실히 벨리니의 후기 양식과 비슷하다. 1507년 베네치아에 있는 두칼레 궁의 접견실에 걸기 위해 주문받은 그림은 그후 더이상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완성되지 못한 것 같다. 조르조네의 주요한 공공 작품으로는 폰다코 데이 테데스키(독일 대사관)의 외벽에 그린 프레스코가 있는데, 그는 운하를 향하고 있는 이 건물의 정면에 인물상들을 그렸다. 거리쪽의 프레스코들은 젊은 티치아노가 그렸는데 아마 조르조네의 감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508년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 작품들은 부분적으로 흐릿한 인물 윤곽선만 남아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소실되었다.
몇 가지 특별한 자료에 기록된 작품들을 제외하고, 1520~43년 베네치아의 귀족 마르칸토니오 미키엘이 쓴 베네치아의 미술 컬렉션에 대한 기록에 조르조네의 그림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기록은 조르조네가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성되었기 때문에 대체로 믿을 만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 기록된 12점의 그림과 1점의 소묘 중 5점이 남아 있는데, 〈폭풍〉·〈3명의 철학자 The Three Philosophers〉·〈잠자는 비너스 Sleeping Venus〉·〈화살을 든 소년 Boy with an Arrow〉·〈피리를 가진 양치기 Shepherd with a Flute〉 등이 그것이다. 〈폭풍〉은 르네상스기 풍경화에서 하나의 이정표로서 폭풍우가 막 몰아치기 직전의 상태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르네상스의 저술가 피에트로 벰보와 자코포 산나차로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시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감정은 또한 르네상스기의 중요한 철학자인 피에트로 폼포나치를 중심으로 형성된 베네치아와 파도바의 동시대 인문주의자들의 '자연주의' 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폭풍〉의 전경(前景)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나타내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왔지만 정확한 것은 하나도 없다. 미키엘은 그들을 군인과 집시로 해석했다. 르네상스 미술가라면 의미 없이 2명의 모호한 인물을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이들은 낭만적이고 아르카디아적인 자연을 묘사한 문학 작품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와 똑같은 문학적 주제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전원의 합주 Pastoral Concert〉(1510경)가 있는데 그 제작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잠자는 비너스〉(1510경)는 조르조네가 죽을 때 미완성으로 남았다. 미키엘은 이 풍경화의 배경을 티치아노가 덧붙였다고 전하고 있다. 오른쪽 원경에 건물들이 있는 풍경은 티치아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으므로 그림 자체가 그 사실을 입증해준다. 〈잠자는 비너스〉를 시작으로 베네치아의 미술에서는 사랑의 여신을 주제로 한 일련의 그림들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특히 티치아노의 그림들이 유명하다. 그러나 장엄하고 이상적인 이 그림만큼 한적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완전하게 표현한 작품도 없다. 〈유딧 Judith〉(1505경)은 자료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와 똑같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녀는 자기 민족의 복수자라기보다 일종의 여신으로 표현되어 있다.
초기 자료들에는 종교화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모세의 시련 Trial of Moses〉·〈솔로몬의 재판 Judgment of Solomon〉을 묘사하고 있는 패널들은 보통 조르조네의 초기 작품(1495~1500경)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인물들은 약간 고풍스럽게 보이지만 차분하고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원경의 풍경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은 명백히 〈폭풍〉를 그린 화가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종교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성모와 아기예수와 성 프란체스코와 성 리베랄레 Madonna and Child with SS. Francis and Liberale〉(1504경, 카스텔프랑코)이다. 이 그림의 구도는 르네상스기의 특징인 기하학 양식에 따라 이등변3각형을 이루고 있다. 풍경과 종교적인 환상에 빠져 있는 듯한 인물들의 환상적인 분위기는 완전히 조르조네의 성향을 보여준다. 〈성가족 The Holy Family〉(1508경)·〈양치기들의 경배 Adoration of the Shepherds〉(1508경)도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후자의 작품은 특히 색채의 완벽한 조화로 유명하다. 〈3명의 철학자〉(1510경)는 미키엘이 특별히 조르조네의 것으로 단정한 작품으로서 미키엘은 조르조네가 죽은 뒤 베네치아의 화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가 그것을 완성했다고 진술했다. 이 그림의 구도와 색채는 완전히 조르조네의 화풍으로서 세바스티아노는 다만 약간의 끝마무리를 했을 뿐인 것 같다. 게다가 청년·장년·노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세 남자의 꿈꾸는 듯한 우울한 분위기는 조르조네의 전형적인 성향을 나타낸다. 이 그림이 인간의 세 연령기를 나타내고 있음이 확실하지만, 그 인물들이 실제로 3명의 동방박사나 3명의 철학자, 또는 고대 로마의 전설에 나오는 문학적 인물들을 의미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비평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Christ Carrying the Cross〉(베네치아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로코)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쟁이 일고 있다. 그러나 바사리는 1568년에 이 그림의 화가가 티치아노라고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그가 1550년 판에서 조르조네의 것이라고 진술한 것을 정정했다. 상당부분이 복구되고 다시 그려졌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가치만을 가지고 있다. 그밖에 20세기의 많은 비평가들이 티치아노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조르조네의 것이라고 의심하는 그림으로는 〈그리스도 앞에 선 간통한 여자 The Adulteress Brought Before Christ〉(1500경)·〈풍경 속의 성모와 아기예수 Madonna and Child in a Landscape〉(1504경)·〈성모와 아기예수와 파도바의 성 로크와 성 안토니우스 Madonna and Child with SS. Roch and Anthony of Padua〉(1505경) 등이 있다.
초상화 분야에서 조르조네는 매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티치아노, 팔마 베키오, 로렌초 로토 같은 베네치아 화가들은 16세기초에 조르조네를 흡사하게 모방했기 때문에 때때로 그들의 그림을 구별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청년 Youth〉(1504경)은 대체로 그가 그린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작품은 뚜렷한 윤곽선과 입체적인 효과와 더불어 평온한 분위기와 정적인 얼굴 표정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르네상스기의 인간상을 매우 인상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시인 〈안토니오 브로카르도 Antonio Broccardo〉의 초상화(1506경)도 이와 마찬가지로 정교한 세련미와 섬세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모든 비평가들이 한결같이 그가 그린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작품은 이른바 〈라우라 Laura〉의 초상화로, 그 뒷면에는 1506년 6월 1일이란 날짜와 이것을 그린 화가가 카스텔프랑코의 초르치라는 글이 적혀 있다. 독일의 유명한 동판화가인 벤첼 홀라르가 1650년에 인그레이빙으로 기록한 조르조네의 〈다윗으로 분장한 자화상 Self-Portrait as David〉(1510경)은 크게 손상되긴 했지만 크기를 아주 축소한 원작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조르조네는 이 자화상에서 눈살을 찌푸린 채 몸을 난간 안쪽으로 기울게 그림으로써 좀더 극적인 효과를 연출했다. 티치아노는 푸른 옷을 입은 남자의 초상화(1512경, 런던 국립미술관)에서 이와 똑같은 구도를 택했는데, 여기에 씌어 있는 머리글자 'TV'(Tiziano Vecellio)는 이 그림의 제작자는 조르조네가 아니라 티치아노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의 상당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카스텔프랑코 출신의 이 단명한 대가는 여전히 르네상스 화가들 중 가장 불가사의한 인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이 지니고 있는 특질과 매력으로 인해 그는 당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이상적인 형태와 색채, 밝기를 통해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 베네치아의 대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H.E. Wethey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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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프레이야 > 이쁜 순수우리말 시어

* 까치노을 - 풍랑이 일 때 솟아오르는 하얀 물거품

* 구슬눈물 - 구슬처럼 둥글게 맺힌 눈물

* 다소니 - 사랑하는 사람

* 다손말 - 사랑하여 하는 말

* 명주바람 - 부드럽고 화창한 바람

* 미리내 - 은하수

* 발편잠 - 마음 놓고 편안히 자는 잠

* 보득솔 - 작달막하고 가지 많은 어린 나무

* 살싸하다 - 맵고 아리다

* 싸울아비 - 무사

* 작달비 - 굵고 거세게 내리는 비

* 장어구름 - 모양이 길고 빛깔이 몹시 검은 구름

* 할림비치 - 눈흘기기를 잘 하는 사람

* 희나리 - 채 마르지 아니한 생나무 장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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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프레이야 > 이쁜 순수우리말 시어

* 까치노을 - 풍랑이 일 때 솟아오르는 하얀 물거품

* 구슬눈물 - 구슬처럼 둥글게 맺힌 눈물

* 다소니 - 사랑하는 사람

* 다손말 - 사랑하여 하는 말

* 명주바람 - 부드럽고 화창한 바람

* 미리내 - 은하수

* 발편잠 - 마음 놓고 편안히 자는 잠

* 보득솔 - 작달막하고 가지 많은 어린 나무

* 살싸하다 - 맵고 아리다

* 싸울아비 - 무사

* 작달비 - 굵고 거세게 내리는 비

* 장어구름 - 모양이 길고 빛깔이 몹시 검은 구름

* 할림비치 - 눈흘기기를 잘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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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프레이야 > [퍼온글] '못'의 띄어쓰기

'못'의 띄어쓰기

"술을 못 마신다/ 잠을 통 못 잤다"에서 '못'은 동사가 나타내는 동작을 할 수 없다거나 상태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부사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론 서술어를 꾸며 주면서 띄어 쓴다. 그러나 '못나다, 못마땅하다, 못생기다'처럼 완전히 한 단어로 굳어진 것은 붙여 쓴다.

'못' 뒤에 '하다, 되다, 쓰다'가 올 경우는 띄어쓰기가 달라진다. 두 단어가 하나의 합성어가 돼 뜻이 변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노래를 못하다/ 음식 맛이 예전보다 못하다/ 잡은 고기가 못해도 열 마리는 된다/ 바빠서 동창회에 가지 못했다/ 보다 못해 간섭을 하다"처럼 '일정한 수준에 못 미치거나 할 능력이 없다, 비교 대상에 미치지 아니하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의 뜻을 나타내거나, '-지 못하다, -다(가) 못해' 꼴로 쓰일 때는 한 단어이므로 붙여 쓴다. 그러나 "어제 병이 나서 일을 못 했다"처럼 단순히 어떤 동작을 할 수 없다는 부사의 뜻이 살아 있는 경우는 별개의 단어로 보아 띄어 쓴다.

"못되게 굴다/ 그 일이 못된 게 남의 탓이겠어"처럼 '성질이나 품행 따위가 좋지 않거나 고약하다'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즉 잘못되다의 의미'일 때는 한 단어지만 "한 시간도 채 못 돼서 돌아왔다"처럼 단순히 '되다'를 부정하는 경우에는 두 단어다.

"얼굴이 못쓰게 상하다/ 그는 너무 게을러서 못쓰겠다"처럼 '얼굴이나 몸이 축나다, 옳지 않거나 바람직한 상태가 아니다'의 뜻일 때는 붙여 쓰고, "컴퓨터가 고장나 못 쓰게 되었다"처럼 '쓰지 못한다'의 뜻이면 띄어 쓴다.

중앙일보 한규희 기자<kh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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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프레이야 > 깎아내기

갈수록 태산이다.

나만의 색깔을 살리자니 교수님의 가지치기가 매섭다.

살리고 싶은 구절과 비유와 단락들이 많이 잘려나간다.

일반적이고 순탄한 길을 따라가는 주제표현을 좋아하시는 교수님의 성향에 때때로 반기를

들고는 싶은데 아직은 역부족이다.

쳐내야한다. 깎아야한다. 줄여야한다. 말, 말, 말... 삼가야한다.

그만큼 내실을 길러놓고 깊은 눈도 갖춰놓고, 모든 면에서 너무 앞지르려는 욕심도 버려야겠다.

하기야 욕심대로 잘 되지도 않는 부족함이 내 욕심을 부추기는 면이 있지만...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 나의 경쟁자는 바로 나..

오늘 부경문학수필 전문반 수업 있는 날.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나서 솔숲 등나무 의자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50대, 60대의 언니들에게서 살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이래저래 넉넉해지는 것 같았다.

대학생들의 풋풋한 모습들도 보기에 유쾌했다.

내 나름대로 새겨본다.

- 결미에서는 미화하지 말고 단촐하게 말을 최대한 줄여라.

- 설명하려들지 말고 인식을 형상화하라.

- 문장 내에서의 군더더기도 깎아내라.

- 의미를 중첩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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