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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화 깊이 들여다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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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동화 공부를 같이 하는 학생의 습작 한 편이 최근 내게 한 화두를 다시 던져 주었다. 동화에 나오는 아이의 가장 중요한 환경을 만드는 가족의 모습이 그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나 조부모, 경쟁자이기도 하고 조력자이기도 한 형제자매들. 그 안에서 아이들은 자란다. 성격이 굳어지고, 인간관과 인생관을 세우게 되고, 인격이 형성된다. 아이들이 어떤 인간으로 자라는가는 어떤 환경 아래 어떤 가족들 틈에서 사는가에 거의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이다. 작가들이 그리는 가족의 모습은 그들이, 혹은 더 나아가 그 시대가 아이들을 어떤 인간으로 간주하는지, 어떻게 키우고 싶어하는지, 어떤 인간으로 만들고 싶어하는지를 부지중에 말해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우리 동화는 지금 어떤 가족, 어떤 아이들을 그리고 있을까. 나는 몇 권의 책을 찾아 보았다.
가출, 별거, 이혼, 죽음, 실종 등등으로 가정이 무너지는 세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부쩍 가속화되었지만, 이런 가정 문제가 동화의 주요한 소재로 떠오르게 된 것은 그 뒤 몇 년이 지난 21세기 들어서부터였다. 가정의 해체로 가장 힘들어지는 게 아이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동화가 아이들의 변하는 현실을 발 빠르게 포착하여 함께 호흡하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못했다는 혐의가 그다지 근거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별로 다양하지도, 심도 깊지도 않았던 듯하다. 가족 해체 후 아이가 겪는 의문, 혼란, 슬픔, 방황이 그만그만하게 그려지고, 결론은 해체된 가족의 재결합이라는 해피엔딩으로 나아가려고 애쓴다.
사회가 급격하게 변하면서 의식주를 비롯한 사랑, 결혼, 직업, 죽음, 탄생 등 인생의 온갖 범주에 이전과 아주 다른 틀이 세워지는데, 유독 가족이라는 범주는 옛날 틀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족만을 완전한 가족으로 간주하여 그 이외의 가정에 모자라고 불완전하다는 뜻으로 붙이는 ‘결손 가정’이라는 용어가 그렇고, 재혼 가정 아이들이 성(姓)이 서로 다른 경우 놀림 받는다며 호적법을 고쳐 같은 성을 쓰게 해 달라는 요구가 그렇다. 재혼 가정의 성 다른 형제들이 차별 대우를 받거나 따돌림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어떤 한두 아이의 성을 바꿔서 같은 아버지 소생인 척하는 방법은 한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만약에 또다시 이혼하고 재혼해서 또 다른 성을 가진 아버지를 맞게 된다면, 그 때도 아이들 성을 또다시 바꿀 것인가. 그럴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의 성이 서로 달라도 그들은 당당한 하나의 가족임을, 그것을 가지고 놀리고 괴롭히는 태도가 옳지 않음을, 그런 편견과 부당한 대접에는 의연히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함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살아가야 하는 길고 험한 인생길에서 필요한 것은 새 호적법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삶에 대한 자세, 자기 확신일 것이다.
최근 만난 동화 몇 권은 그런 면에서 예전의 동화와 조금은 달라진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가족의 해체 과정이 꼼꼼하게 파헤쳐지거나, ‘결손 가정’의 아이가 상실감에 시달리기만 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 주거나, 한쪽 부모의 부재로 괴로워하던 아이가 그 괴로움을 넘어서 새로운 ‘가족 정체성’을 찾아가는 모습 등을 밀도 있게 그려 내는 그 책들은 확실히 지금까지의 가족 체제를 점검하고 거기에 다른 시각,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걱정쟁이 열세 살』 『엄마 따로 아빠 따로』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이 그것들이다.
이 책들은 가족 해체의 원인, 그에 반응하는 아이들의 자세, 주위 어른들의 태도를 각각 다양하게 그린다. 가장 무난(?)한 아빠의 죽음이 원인으로 나오는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의 주인공 비읍이는 “그럭저럭 아빠 없는 생활을 잘하고 있다. 문제는 엄마다.”라고 단언한다. 아빠의 죽음을 차마 알리지 못해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다고 둘러대는 데에는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믿는 척한다. 속아 주는 게 엄마에게 좋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빠가 없는 것 때문에 비읍이가 슬퍼하는 대목이 두어 군데 있기는 하지만, 크게 상처받는 것 같지는 않다. “아빠가 없어서 나한테 나쁘다는 생각만 했다. (……) 하지만 영감의 죽음을 보니 아빠가 불쌍하다.”고 적을 정도로 아빠라는 대상을 객관화해서 볼 줄도 안다. 자기 연민과 두려움에 빠져 있는 대신 비읍이는 자기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 내어 실행한다. ‘문제는 엄마’라고 진단하면서.
정말이지, 어른들은 ‘괜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닐까? 없는 것과 힘든 일이 없을 수 있는 인생은 없는데, 아이들의 인생이라고 다를 바 없는데, 어른들이 그 사실을 아이들 앞에서 털어놓기를 너무 힘들어 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털어놓아 봤자 아이들에게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겨 나갈 능력이 없을 거라 여기는 것은 아닐까? 둘 다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는 아닌 듯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이들의 슬픔을 안쓰러워하고 적응력 없음을 걱정하는 일은, 사실은 어른 자신들이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현실을 헤쳐 나갈 힘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태도로 보인다.
정작 아이들에게 절실한 관심사는 지금 주어진 삶의 조건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충족시켜 나가는가이다. 아빠가 없는 ‘결손 가정’에서 비읍이에게 가장 결정적인 삶의 조건은 엄마이니, 자기 정립의 기반, 세상과의 통로로서 엄마의 역할은 ‘정상 가정’에서의 엄마의 역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리하여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은, 린드그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엄마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이 책이 “엄마는 삐삐의 팬이었지만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누구인지는 모른다.”로 시작해서 “혹시 여든한 살이 되면 엄마도 졸지 않고 책을 읽을지도 모른다.”로 끝나는 것을 보라. 린드그렌이라는 표면적 모티프 밑에는 엄마가 숨어 있다. 린드그렌은 비읍이가 ‘다시 태어나도 엄마랑 한 가족이 되고 싶지만, 그 때는 엄마가 아니라 동생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처음부터 버릇을 잘 들일 수 있을 테니까’ 하고 생각할 정도인 ‘문제 엄마’를 비판하고, 염려하고, 애틋해 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요긴한 도구이자 통로인 것이다. 린드그렌을 통해 비읍이는 결국 엄마를 더 잘 이해하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 그러면서 무연히 바라보기만 하던 세상 속 여기저기로 제 발자국을 또박또박 남기며 다닌다. 첫 문장, 부정의 의미가 담긴 ‘모른다’는 단어에는 딸에게 무심하고 무력한 엄마에 대한 비읍이의 불만과 안타까움이 숨어 있는 듯하지만, 마지막 문장의 ‘모른다’는 엄마가 달라질 거라는 비읍이의 희망과 기대, 엄마의 그 변화에 자신이 큰 몫을 했다는 기쁨과 자부심을 보여 준다.
비읍이처럼 아빠가 없기는 하지만, 『걱정쟁이 열세 살』 정상우는 경우가 아주 다르다. 아빠가 떳떳하게(?) 죽은 대신, 엄마와 싸우던 끝에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설명 한 마디 없이 집을 나간 아빠, 그 때부터 지겹도록 울기만 하는 엄마, 몸져누운 엄마에게 너 때문에 내 아들, 동생이 집을 나갔으니 찾아 내라 다그치던 할머니와 고모들, 가족의 아픔 따위는 아랑곳없이 사는 듯한 누나. 그 사이에서 상우는 가엾게도 안절부절못한다. 그런데 상우의 괴로움은 아빠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 아이의 가장 큰 걱정은 자기가 ‘비정상적’인 가정의 아이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내가 아빠를 기다리는 까닭은 딱 하나다. 아빠가 돌아와야 우리 가족은 완전히 정상적일 수 있다는 것.”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 우리 집에서는 버젓이 일어나는 것이다.” 도처에 깔려 있는 ‘정상적인 가정’에 대한 강박 섞인 독백까지 굳이 들출 것 없이, 정상은, 정상우라는 아이들 이름에서부터 이 이야기의 중심 테마는 가차 없이 드러난다. 그것은 부모 중 한 쪽이 없으면 결손, 비정상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가족 개념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상우처럼 심약한 아이는 단짝 친구에게도 자기 정황을 숨기고, 아빠와의 체험 학습기를 지어서 써 내고,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해 가며 야영 행사를 피해 간다. “동정 받는다면, 그건 정말 참을 수 없”기 때문이고, “남들이 우리 집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다. “학부모 회의에 부모님이 참석 못하는 아이들에게 일일이 그 이유를 대게” 하는 학교, 엄마나 아빠가 돌아가셨다거나 이혼했다거나 별거 중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해야 하는 아이들 심정이 어떨까. 더구나 ‘아빠가 집 나가서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이유를 대야 하는 상우 같은 아이는! 아무도 제 심정을 헤아려 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상우는 위축되고, 분노하고, 두려워한다. 아빠가 없다는 상실감보다는, 그 때문에 일어나는 가족 사이의 갈등, 학교라는 사회가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있는 가족 제도에 대한 견해가 상우를 더 힘들게 한다. ‘결손 가정’ 아이 문제를 사회가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여 풀어 나가고 싶어한다면, 아이들이 자기 가정을 ‘비정상, 결손’ 가정으로 여기며 상처받고 위축되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배려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이번에는 엄마의 부재. 『엄마 따로 아빠 따로』는 부모가 이혼한 뒤 아빠를 따라 시골 마을로 이사와 살아가는 미라와 건희 남매 이야기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 아이들은 참 힘들”다고 중얼거리는 건희가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시시콜콜 펼쳐 놓는 이 책은, 그러나 안쓰러움보다는 오히려 재미를 준다. 비록 부모가 이혼했을지라도 아이들은 힘든 일조차 재미로 여기고, 슬픔은 행복으로 바꿔 가기를 바라는 작가의 응원의 마음이 읽힌다. 그 재미는, 이야기에 부력과 속도감을 주면서도 아이의 심리묘사는 밀도 있게 이뤄 내는 짧고 경쾌한 문장이 만들어 가는데, 이런 문체는 특별히 웃음을 주는 에피소드가 없는 이야기에서 어떤 유머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한다. 부모가 이혼한 아이의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풀어 내는 태도는, 그 상황을 경홀히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나 괴로움에 압도당하지 말고 가볍게 넘어서라는 격려의 뜻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 문체 덕분에 건희는 정말 귀엽게 그려진다. “어른이면 다야?” “이게 뭐야.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돼.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아빠가 엄마랑 이혼한 거지, 내가 엄마랑 이혼한 건 아니라고요.” 이야기 전반부에서 심통을 부릴 때는 귀여우면서 미안하고, 후반부로 가면서 “난 이제 4학년인데요. 이제 나도 아빠를 보살펴 줄 수 있어요.” “난 어른이 되면 절대 안 그럴 거야. (……) 대답하는 사람이 힘들 거 같은 건 절대 안 물어 볼 거야.” 같은 속 깊은 소리를 할 때는 귀여우면서 고마워진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건희가 그저 속 깊은 아이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아빠랑 있으면 엄마가 보고 싶고, 엄마랑 있으면 아빠가 보고 싶어. 이것도 병인가 봐. 어쩌지? 난 어쩌지?” 하고 중얼거리는 건희는, 세상은 그저 한 방향으로 곧장 달려가는 곳이 아니라 양쪽을 왔다갔다, 뒤뚱거리며 사는 곳임을 어렴풋이 알고 혼란스러워한다. “아주 빠르게. 멀리도 가”는 트럭을 타고 엄마에게 멀어져 새 집으로 달려가던 때의 분노는 가라앉지만, “엄마를 만나면 아빠를 놓치는 것 같고, 아빠와 살 때는 엄마가 멀어지는 것 같”은 불안이 새로 생긴다. 이 혼란과 불안은 아이가 앞으로도 계속 겪으면서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는, 때에 따라 존재하면서도 부재하는 부모의 뒷받침이 힘이 돼야 한다. “넓게 보고 크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라는 아빠, “아빠가 너희 정성스럽게 돌본 거”를 알아 주는 엄마 밑에서 건희는 균형을 잡아가며 자기 말마따나 “엄마 아빠 다 같이 사는 애들보다 빨리 철이 들”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은 또 다른 무게로 마음에 얹힌다. 이혼이나 가출을 유발하는 부부 갈등의 원인이 유독 상세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부부 갈등이 아이의 상태보다 더 비중 있게 묘사되어, 이 책은 동화라기보다는 페미니즘 소설 쪽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치매에 걸려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고 한탄하는 시어머니를 보면서 자기 인생을 찾겠다고 나서는 엄마가 이야기의 초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린 주인공의 심리와 인식 지평에 대한 관심은 자칫 뒤로 물러서기 쉽다.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를 가장 강력하게 자극했던 인물도 아이들보다는 아빠였다. 이 책 전체를 붙드는 주제어는 아마도 ‘이기심’과 ‘소통 부재’일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시어머니와 자신을 강력히 비난하는 남편과 불만에 찬 아이들을 떠나 자기 인생을 찾겠다며 그림을 그리는 엄마,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면서 어머니에게 소홀하다며 아내만 닦달하는 아빠, 어른 싸움을 걱정하는 동생에게 “그건 엄마 아빠의 문제야. 둘이서 해결해야지. 너나 나는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들 것 없다구.”를 내뱉는 가희, “아픈 할머니나 예전과 너무 다르게 구는 엄마, 자기밖에 모르는 언니도 다 지겨웠다.”며 넌더리를 내는 가영. 네 사람은 모두 각각 이기적이다. 그러나 이 가족들에게 이기심보다 더 큰 문제는 소통 부재이다. 누구도 자기를 이해시키려 입을 열지 않고 상대를 이해하려 귀를 열지 않는다. 소리만 지르는 아빠, ‘아빠가 묻지 않았으니 엄마가 말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 아니다’는 궤변을 펼치며 “내가 아무리 진지하게 얘기해도 별로 심각하게 듣지 않”는 엄마, ‘짜증 나’를 입에 달고 다니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는 가희, 대화를 한 번 시도해 보고 “우리 엄마지만, 정말 정이 떨어질 정도로 싫다”며 “앞으로 벌어질 일은 순전히 엄마 책임”으로 떠넘기는 가영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이 가족은 왜 이럴까? 나는 그 실마리를, 엄마가 집을 나가고 할머니가 죽은 뒤 술취한 아빠가 딸들을 껴안고 울먹이며 하는 말에서 찾았다. “아빠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제 세상에 너희 둘밖에 없어.” 아빠‘가’가 아니라 아빠‘를’이라니. 할머니의 죽음과 엄마의 가출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한꺼번에 겪은 어린 두 딸에게 아빠가 하는 말이, 아빠‘를’ 사랑하는 사람은 너희밖에 없다는 푸념이라니. 자신이 주어, 주체가 되어야 할 상황에 오히려 목적어, 객체로 밀어 넣는 이 어른 남자를 보면서 나는 착잡해졌다. 내‘가’ 어떤 존재이며, 가족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이며,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만이 모든 사태의 핵심인 아빠에게 어떻게 ‘정상적’인 가정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식구들이 모두 이기적인 것도, 산산이 흩어지는 마음들을 부드러우면서 끈질긴 대화를 통해 모아 보려는 노력이 없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이 아빠 앞에서는 엄마의 자아 찾기 노력의 적절성 여부를 묻는 것도 부질없어 보인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에서 가장 조심스레 배려하고 성장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인물은 아이들이 아니라 아빠인 듯하다. 자신과 어머니에게 무조건 희생적 사랑을 베풀지 않는 아내에 대한 유아적 분노로, 장례식장에서 흐느끼는 그녀를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다 필요 없어! 당장 나가!” 하고 고함치며 끌어내는 남자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어린 딸은 생리를 시작하고부터 비난하던 엄마를 여자로서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인생의 전환기적 사건을 맞고서도 인식의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아빠. 깨어진 가정에서 아빠는 아마 그 어느 누구보다 불행할 것이다. “남들이 우리 집에 대해 어떻게 말하건 나한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엄마랑 아빠랑 행복하게 살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불행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은 가영이가 이제 아빠의 불행을 덜어 주게 되지 않을까.
단 네 권을 상대로 한 분석이지만 흥미로웠던 결과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여 주는 것은 남자들보다는 여자들 쪽이었다는 점, 아이들의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어른들까지 변화시킨다는 점이었다. 비읍이는 주도적으로 자기 자리를 찾아 나가면서 책을 통 안 읽는 엄마가 책을 읽게 하는 데 성공한다. “아빠가 떠난 것도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까 아빠는 아빠대로 행복한 게 좋잖아.” 하는 ‘쿨’한 상은이는 무기력하고 체념적이던 엄마가 딸 때문에 불려간 학교에서 “선생님, 우리 너무 좁게 생각하지 말자구요.” 하고 튕기는 배짱을 부리도록 만든다. “아빠? 아빠 좋지. 하지만 네 행복을 왜 아빠가 만들어 줘? 너희 아빠가 집을 안 나가셨으며 넌 행복했을까? 결코 아닐 걸.” 하면서 문제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일깨우는 오폭별은, 상우의 인식 지평에 큰 변화가 생기게 한 결정적인 변수이다. 이모와 단 둘이 살면서도 “어른들도 실수를 하지. 우리가 봐 줘야지 어쩌겠니. 우리까지 어른들을 안 믿어 주면 어른들은 너무 슬플 거야.”라고 의젓하게 말하는 다진이도 건희의 성장에 한몫한다, 아마 가영이도 아빠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해진 이야기, 주체적인 아이들, 솔직해진 어른들을 보여 주는 최근의 가족 동화가 믿음직하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서로 삶을 아프게 나누며, 울고 웃으며 삶의 힘겨운 계단을 하나씩하나씩 함께 밟아 올라가면서 함께 자라는 모습을 보여 주는 그런 이야기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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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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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정 / 동화를 읽고, 쓰고, 옮기고, 가르치고, 평론하는 일로 몹시 바쁜 (척하는) 아줌마입니다. 지은 책으로 『용감한 꼬마 생쥐』 『나의 사직동』 『믿거나 말거나 동물 이야기』, 평론집 『어린이문학 만세』 『멋진 판타지』 『동화가 재미있는 이유』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어린이문학의 즐거움』 『용의 아이들』 『일주일 내내 토요일』 『미오 나의 미오』 등이 있습니다. 숙명여대 겸임교수이고, ‘김서정동화아카데미’에서 동화를 가르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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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나온 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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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 유은실 장편동화, 권사우 그림 / 창비 |
엄마 따로 아빠 따로 / 임정진 글, 허구 그림 / 시공사 |
엄마의 마흔번째 생일 / 최나미 지음, 정용연 그림 / 청년사 |
걱정쟁이 열세 살 / 최나미 지음, 정문주 그림 / 사계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