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풍속화와의 비교_김홍도와 샤라쿠
둘다 남성적이지만, 자연주의와 감각주의로 대별

교수신문 2006년 04월 25일   정병모 경주대 이메일 보내기

조선후기에 풍속화가 유행한 것은 조선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중국의 니엔화(年畵),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와 오츠에(大津繪), 베트남의 테트(Tet)화 등 17~19세기?동아시아를 휩쓴 추세였다. 나라마다 약간 차이가 나지만, 풍속화 혹은 민화와 같은 민간 회화가 성행했다. 비슷한 시기 동아시아에 민간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민간의 문화가 발달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청명상하도 ©

중국은 이미 북송 때 수도인 카이펑(開封)의 도시풍속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그린 ‘淸明上河圖’라는 명품을 낳은 전통을 갖고 있다. 명나라 때 구영(仇英, 1494~1552?)이 다시 그린 ‘청명상하도’는 조선에 전래되어 조영석의 풍속화와 정조 때 제작된 ‘城市全圖’에 영향을 주었다. 명대에는 소설의 삽화를 중심으로 풍속화가 발달했다. 그런데 정작 청나라 들어서면서 국가의 기반을 바로 잡는다는 명목으로 퇴폐적인 소설을 탄압하는 바람에 풍속화 제작이 주춤해지고 대신 우리의 민화에 해당하는 니엔화가 유행하게 됐다. 


동아시아 국가 중 풍속화가 가장 발달한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17세기 후반 에도(江戶)를 중심으로 전개된 서민회화인 우키요에가 꽃을 피웠다. 사창가인 遊里의 遊女를 그린 미인와 가부키의 인기 있는 배우를 선전하는 브로마이드 사진과 같은 야쿠샤에(役者繪)가 에도시대(1603~1867)에 인기를 끈 풍속화의 주제다.


도슈사이 샤라쿠(東州齋寫樂, 18세기말 활동)는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호평을 받을 만큼 우키요에를 대표하는 화가다. 한 때 어떤 소설가에 의해 김홍도가 일본에 가서 샤라쿠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는 주장이 화제가 됐으나, 생애와 화풍으로 보아 그가 김홍도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렇지만 에도시대 최고의 미인상을 그린 우키요에 화가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 1753~1806)가 신윤복에 해당한다면, 샤라쿠는 김홍도에 비견할 수 있다. 우타마로의 작품이 신윤복처럼 여성적이라면, 샤라쿠의 작품은 김홍도처럼 남성적인 면모가 강하기 때문이다.

▲'오타니 오니지가 분한 하복 에도헤이' ©
샤라쿠는 강렬한 필선으로 매우 독특하고 미묘한 성격의 캐릭터를 즐겨 나타내었다. 그의 대표작인 ‘오타니 오니지가 분한 하복 에도헤이’는 금품을 빼앗으려는 악한을 그리고 있다. 음흉한 눈빛과 꾹 다문 입에서 결코 선한 배역이 아니고 목을 앞으로 쭉 내밀고 양손을 활짝 펴고 달려드는 자세에서 긴박한 순간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치카와 에비조가 분장한 다케무라 사다노신’는 가부키 배우의 내면적인 성격을 강하게 표출한 작품이다. 이마에서 미간으로 쏠린 눈썹, 은행잎 모양의 눈에서 발산되는 눈빛, 그리고 굳게 담은 입의 모습에서 강인한 인상을 받는다.


김홍도가 등장인물의 ‘관계’를 극화시켰다면, 샤라쿠는 등장인물의 ‘개성’을 표출하는데 주력했다. 전자가 질박하고 자연스러운 조형을 창출했다면, 후자는 세련되고 정제된 작품세계를 보여줬다. 조선의 사회적이고 자연주의적 미의식과 일본의 개인적이고 감각주의적 미의식이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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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水巖 > 보리 세밀화 기획전


<보리 세밀화 기획전-자연과 맺어온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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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巖 2006-04-25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도도 찾아 놓았습니다.

하늘바람 2006-04-25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수암님

소나무집 2006-04-26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과 꼭 가보려고 합니다.

하늘바람 2006-04-27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정말 좋을 것같아요
 
 전출처 : 이매지 > [프랑스] 고흐의 까페

 





<사진> 반고흐카페를 알려주는 그림판이 카페 앞에 놓여져있다,음식 가격은 생각보다 비싸지는 않다

이곳 아를은 너무나유명한 빈센트반고흐의 대표작 '밤의 카페 테라스'(흔히 고흐의카페라 불린다)
의 배경이 된곳이다, '해바라기' , '별들이 반짝이는밤' 과 함께 최고로 불리는 걸작이며,
늦은밤 카페에서 나오는 노란 마법같은 빛과 신비로운 밤하늘이 어울려져 있다








<사진> LE CAFE LA NUIT(밤의카페) 비수기에 늦은시간까지 겹쳐서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사실 아를에는 원형경기장등의 유명한유적지가 많지만 고흐의 작품그대로 같은 구도로
찍어보기 위한 욕심에 아를로 가게 되었다.. 대가를 흉내내보고 싶었지만... 사실그때와 지금은
좀 다르게 변화되어서 비슷하게 찍는것은 사실무리였다





<'밤의 카페 테라스'>






<사진> 수십장 찍어서 그나마 많이 흡사해진 사진,별과 사람이 없어 매우 아쉬웠다




<고흐의카페에대한 관련 이야기>
고흐가 1888년 5월부터 9월 18일까지 하루 1프랑을 주고 하숙하였던 아를의 카페 드 라르카사르의
내부이다. 고흐는 사흘 밤 잠도 자지 않고 이 카페의 밤을 담았다.
고흐는 "나는 간혹 낮보다는 밤이 더 생동감이 있어, 색채가 넘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카페가 사람들을 망가뜨리고 미치게 하며,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장소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이런 생각을 빨강·노랑·초록의 무서운 대비에 의해서 표현하고자 한 의도가 이 그림의 화면에
넘쳐흐르고 있다. 그것은 그의 창작 의도라기보다는 이 밝은 아를의 환경에서도 과로 때문에 점점
정신이 이상과민성으로 기울어져가는 고흐의 육체적·정신적 상태를 그대로 표현하였다.

 

출처 : VISUAL MOS http://www.visualmos.com  

현재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는 사진작가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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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리스 > 클레, 시적 추상으로 다양한 색채 변주

[오마이뉴스 2006-04-11 15:28]    
[오마이뉴스 김형순 기자]
▲ 올림픽공원 옆 미술관, 마치 영화 제목 같다. 현대적 건축물이 조각 공원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미술관이다. 이 미술관 뒤로 움직이는 백남준 작품 '쿠베르탱'이 자리 잡고 있다.
ⓒ2006 김형순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미술관이 이름을 바꾸고 새로 단장한 '소마(SOMA)미술관'에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동화적 환상과 다양하고 실험적인 형태와 색채를 표현한 20세기 미술의 거장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의 '눈으로 마음으로' 전이 오는 7월2일까지 국내에서 처음으로 판화, 유화, 수채화, 드로잉 등 약 60점을 선보이며 열린다.

파울 클레(Paul Klee) 생애 및 프로필

 
▲아틀리에에서 작업에 여념이 없는 파울 클레
1879 12.18 스위스 뮌헨부흐제 출생
1898 뮌헨 이사. 뮌헨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
1906 릴리 슈툼프와 결혼
1910 첫 전시회 56점(베른, 취리히, 바젤 미술관)
1912 F. 마르크, W. 칸딘스키와 함께 '청기사 그룹전' 참가
1914 마케 등 친구들과 튀니지 여행
1920 '클레 회고전'에 362점 출품(골츠 갤러리)
1921 '바우하우스'에서 강의 시작
1925 '바우하우스' 데사우로 이전
1929 '탄생 50주년전'(뉴욕 근대미술관, 베를린 국립미술관)
1931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교수
1933 나치 압력으로 교수직에서 해고
1935 희귀병인 진행성 피부경색증 발병으로 다작 시도
1937 나치가 주관한 '퇴폐미술전'에서 100여점 압류
1938 스위스 시민권 획득
1940 6.29 스위스에서 사망
파울 클레는 우리가 익히 들어왔고 미술 교과서에서 많이 봐왔지만 뚜렷한 대표작이 연상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술의 본질을 추구했는지 모른다. 프랑스에서는 그를 '그림의 시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지적인 요소와 함께 시적이고 타고난 음악적 감수성이 그림 속에서 잘 구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파울 클레는 스위스 베른 근처 뮌헨부흐제(Münchenbuchsee) 음악가 집안에서 1879년 12월 18일 태어났다. 아버지 한스 클레는 성악가 활동을 하다가 나중에 음악 교사가 된 사람이었고, 어머니 마리아 프리크도 슈투트가르트 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후에 결혼한 릴리 슈툼프도 피아노 교수였다.

그는 이렇게 음악의 한복판에서 살았지만 최종적으로는 미술을 택했다. '그림 한 점에 대하소설이 담겨 있다'든가 '예술의 꽃은 단연 미술이라는 말'도 하지만 그는 결국 스스로 제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음악을 포함하여 모든 지식과 경험을 미술 안에서 통합시켰다.

그의 작품이 조금 괴기하고 상형문자를 연상시키는 선묘와 추상적 기법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이 서정적 분위기 연출하는 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낭만적인데다가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적 요소가 공상적이고 우화적인 요소로 승화되어 그림 속에 스며 있기 때문이리라.

▲ '미래의 남자(1933, 좌)', '비탄에 빠짐(1934)' 클레 작품은 독특한 선묘와 구도와 색채 이 모든 것들이 신비하고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하여 관람객 마음을 사로잡는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2006 김형순
갖가지 구도와 색채 실험

클레는 평생 일기를 거르지 않고 쓸 정도로 성실했고 지적 호기심을 불태우는 학생처럼 살았다. 철학, 식물학, 인류학 등 학문 전반에 대해 폭넓은 독서와 광범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산과 바다, 꽃과 나무와 물고기 등 주변의 사물을 예의 관찰하였고 그 속에서 풍부한 이미지를 발굴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르네상스 화가들처럼 해부학에서 푸생이나 다비드, 밀레 등 고전주의 작가에 이르기까지 탐구했다. 또한 이글거리는 태양 이면에 인간의 번뇌를 표현한 고흐, 현대 회화를 연 세잔, 야수파의 선각자 마티스, 북유럽의 표현파 특히 입체파를 한 단계 끌어올려 오르피즘의 창시한 들로네 등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 '별들과 함께(1923)' 판지 위에 종이에 연필과 수채. 클레의 9천여 점 작품이 다 천차만별이지만 이 작품도 이채롭다. 엷고 진한 색채 간 대조와 어린이처럼 장난기 넘치는 해학과 유머가 돋보인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2006 김형순
그림 재료도 캔버스, 삼베, 천, 거즈, 나무판 등 복합 매체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안료로는 유화는 물론, 불투명한 수채 물감인 구아슈, 동판, 드로잉, 그리고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 썼다는 템페라 물감까지도 두루 시도했다.

무려 9146점에 달하는 작품은 제작한 클레는 사물의 원리를 다각도로 실험하고 검사하는 과학자 같은 작가로 보인다. 또한 그는 자신의 그림 하나도 모방하지 않으면서 다르게 그린 것 같다. 그는 이런 각고 끝에 그때까지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미술의 공간성 실험이나 시각적 확대, 현대적 조형성을 창조하여 20세기 미술계의 거장이 되었다.

클레는 1912년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인 바실리 칸딘스키 및 프란츠 마르크와 알게 되어 상호 교류했으며 그들의 전위파 그룹인 '청기사파(Blaue Reiter)' 전시회도 참가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쾰른, 베를린 등 유명 사립미술관에서 초대를 받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 '언덕(1914, 하좌)', '색채 띠에 연결된 추상적 색채의 수채(1914, 하중)', '그리고 아, 나를 더욱 쓰라리게 하는 것은 당신이 내가 가슴속으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1916, 상좌)' 글씨를 채색화로 형상화한 작품, '여러 층의 작은 구조물(1928, 우)' 튀니지 여행 후 채색의 확연한 변화를 읽을 수 있다. 파울클레미술관
ⓒ2006 김형순
2년 후 30대 중반이 된 클레는 겨우 12일간 짧은 여행이었지만 어린 시절 친구인 루이 무아예와 동료 화가인 마케와 함께 튀니지로 여행을 가게 되는데 지중해 해안의 이글거리는 색이 주는 눈부신 광채에 반해 버렸다. 이 여행은 그의 미술을 자연 그대로의 현상에 대한 묘사로부터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보는 더 강력한 추상적 화풍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본다면 극과 극이 통하나 보다. 아프리카의 가장 원시적 색채와 미술이 서구의 가장 전위적 미술의 원형이 된 것이다. 하긴 피카소나 마티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첨단 미술을 대표하는 입체파나 야수파도 결국은 아프리카 부족의 원시 조각이나 미술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 '수염이 있는(1939 좌)', '빛에 비추어진 나뭇잎(1929)' 두 작품이 10년간의 간격이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구상에서 보다 확대된 추상으로 변모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추상은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미술 개념에 더 가까우리라.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2006 김형순
보이지 않는 색채와 소리까지 그리기

이는 이번 전시회 부제인 '눈으로 마음으로'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냥 '눈으로 보는 관점'과 '마음의 눈으로 보는 관점'으로 나누어 봐야 한다는 점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2층 전시실에 붙어 있는 클레의 명구 "미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는 말과 전시 표제어는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에 대한 해석을 이 미술관 책임 큐레이터 박윤정씨에게 부탁드렸더니 그는 "그림은 사실의 표현이 아니라 심신의 표현"이라는 명쾌하고 멋진 해석을 내놓았다. 클레다운 이 명구에 전문가다운 해석이다. 이런 해석을 듣고 보니 이런 말이 떠오른다. "현대 미술은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더 나아가 들리지 않는 것도 그리는 것이다."

▲ '피라미드(1932)' 판지 위에 종이에 펜과 수채. 기하학적 아름다움이 넘치는 작품으로 선과 면, 형태와 색채만으로 조형 효과를 최대화했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2006 김형순
위에 '피라미드(1932)'를 보게 되면 사람의 이목구비가 약간 보일 정도로 완전한 추상화는 아니지만, 이목구비를 그대로 그리는 것보다 선과 면이나 삼각형이나 사각형 같은 형태 그리고 여러 밝기의 붉은 색, 고동색 등 색채를 통해 사물의 이미지를 더 실감나게 보여준다. 바로 이런 것이 기하학적 구성과 추상적 미술의 미덕이 아닌가 싶다.

나치 박해와 불치병과 투쟁

한편 40대에 들어선 클레는 '바우하우스' 조형예술 학교에서 후배 양성에 힘쓴다. 당시 그의 별명은 '바우하우스 부처'였다고 하니 그의 미술을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구도자적이었을 거라는 추리해 볼 수 있다. 이 학교가 바이마르 공화국 언론과 당시 따가운 여론에 밀려 1925년 문을 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 1931년 대학을 뒤셀도르프로 옮겼으나 이마저 여의치 않아 1933년엔 나치에 의해 해임된다. 게다가 1937년 나치가 주관한 '퇴폐미술전'에서 102여점 자신의 작품이 압류하는 등 나치 탄압이 극에 달하자, "독일은 이르는 곳마다 시체 냄새가 난다"라 말을 남기고 스위스로 귀화했다. 그는 본의 아니게 가장 잔인한 한 시대의 생생한 증언자가 되었다.

▲ '눈(1938)' 삼베에 파스텔. 캔버스 대신에 삼베를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그는 이렇게 그림 재료에서도 두루 다각적 실험을 시도했다. 한눈으로 보이는 것을, 다른 한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는 메시지가 담긴 것 같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2006 김형순
1938년 작 '눈'이라는 작품은 당시 분위기를 풍긴다. '한눈으로 보고 다른 눈으로 느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도 보고 들리지 않는 것도 들어라'라는 메시지도 포함된 것 같다. 제작 연도로 봐서 스위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로 나치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했을 것 같다.

클레는 말년에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희귀병인 피부경색증를 보이자 반대급부인지는 몰라도 놀라운 정도로 많은 작품을 쏟아 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초기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선묘와 다르게 병마로 손길이 무뎌지면서 선과 면이 단순해지고 굵어졌지만 원숙하고 중후한 아름다움으로 넘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그림자를 작품 전반에 담은 듯하다.

▲ '밤의 암탉(1939)' 작고 1년 전 작품으로 검붉은 바탕에 굵고 검은 선이 더욱 완숙해 보인다. 작가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에게도 감지되는 것 같다. 이 그림은 구상적 요소를 해체하여 추상적 바탕에 담았다. 추상파울클레미술관 소장
ⓒ2006 김형순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

클레 그림은 때론 추상 화가답지 않게 고전적 느낌을 준다는 지적도 받는데, 이는 그가 미술과 음악, 추상과 구상, 서구적 미술과 비서구적 미술, 천진난만함과 괴기함, 차가운 지성과 따뜻한 서정 등 경계를 넘나들며 퓨전적 요소를 많이 보였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클레는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나중에 배워야 하는 작가라고 이 미술관 큐레이터 박윤정씨는 귀띔해 준다.

▲ '소문(1939)' 판지 위에 페이스트에 유채. 극도로 단순화한 형상과 구도를 띠고 있으며 돌고 도는 소문처럼 아래 작은 바퀴처럼 인생의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생사화복을 초월하여 말년의 대가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그림 같다. 파울클레미술관 소장
ⓒ2006 김형순
한국 작가 중 그의 영감을 많이 받은 분이 장욱진 화백이 아닌가 싶다. 새와 나무가 많이 등장하는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에서 만나는 넉넉하고 한가로운 마음과 우화적이고 해학적 형식으로 표현한 장욱진 그림은 들여다볼수록 반추상이긴 하나 도교 풍의 한국판 클레 같다.

클레의 '보이게 하는 그림'과 장욱진의 '마음의 눈으로 그리는 그림'이 동서를 넘어서 서로 통한다고 생각하니 클레가 먼 나라 작가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친숙하게 느껴지는 작가라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덧붙이는 글
*[소마미술관(구 서울올림픽미술관)] 서울 송파구 방이동 88번지 전화 02)410-1060
교통편 홈 페이지 참고 홈페이지 www.artmuseum.or.kr
입장료:성인 1만원, 청소년 8천원, 어린이 6천원.
관람시간:일-화-수요일 및 공휴일(10:00~18:00)
목-금-토요일(10:00~21:00)/월요일 휴관(야외 조각공원은 개방)
어린이를 위한 클레 그림 체험 코너가 마련됨(토-일 14시) 02)410-1066. chaeh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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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巖 2006-04-22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마미술관 소개할 때부터 벼르던 전시횐데 잘 보았군요. 퍼 갑니다.

하늘바람 2006-04-22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벼르던 전시회요 다녀오시면 꼭 이야기 들려주셔요
 
 전출처 : 이매지 > 그림 그리는 엠마 할머니

엠마
웬디 케셀만 글 / 바바라 쿠니 그림 / 강연숙 옮김 / 느림보 


 
 




 

엠마 할머니의 일흔두 살 생일이었어요.
엠마 할머니에게는 아들 딸이 네 명, 손자가 일곱 명, 증손자가 열네 명 있었어요.
가족이 찾아오면 할머니는 행복했어요.
그러나 할머니의 가족은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어요.
할머니는 혼자 지낼 때가 많아서 무척 외로웠어요.
 
 




엠마 할머니의 하나뿐인 친구는 주황색 고양이, 호박씨였어요.
할머니와 호박씨는 함께 햇볕을 쬐기도 하고
딱따구리가 나이 든 사과나무를 쪼는 소리도 들었어요.
가끔씩 엠마 할머니는 나무 꼭대기에서 꼼짝도 못하는 호박씨를 구해 주기도 했어요.
 
 




 

가족은 할머니의 일흔두 번째 생일 선물로 산 너머 작은 마을 그림을 선물했어요.

"멋지구나!"

그렇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저건 내가 그리워하는 고향 마을이 아닌데...'

 




 

 

그러던 어느 날 엠마 할머니는 물감이랑 붓, 이젤을 사왔어요.

그리고 창가에 앉아서 기억나는 대로 고향 마을을 그렸어요.

엠마 할머니는 가족에게 받은 그림을 내려 놓고 자기가 그린 그림을 걸었어요.

가족이 찾아오면 선물 받은 그림을 다시 걸어놓았다가

가족이 떠나면 자기 그림으로 바꿔 놓는 숨바꼭질을 계속 했죠.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가 깜박했지 뭐예요?

 

"저 그림 어디서 난 거예요? 우리가 선물한 그림이 아닌데요?"

"내가... 내가 그렸어."

 

할머니는 그 그림을 얼른 벽장 안에 감추었어요.

 

 




 

"감추지 마세요! 멋져요! 그림을 더 그려 보세요."

 

"많이 그렸어."

 

그러고는 벽장에서 스무 점도 넘는 그림들을 꺼내 왔어요.

 

 




 

 

그날부터 엠마 할머니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어요.

할머니는 현관 문턱까지 쌓이는 눈을 그렸고

꽃이 활짝 핀, 나이 든 사과나무와

그 나무를 쪼고 있는 딱따구리도 그렸어요.

 

 




 

 

햇볕을 쬐면서 발끝을 오므리고 있는 호박씨도 그렸고요.

할머니는 고향인 산 너머 마을을 그리고 또 그리고 자꾸자꾸 그렸어요.

곧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엠마 할머니의 그림을 보러 오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할머니는 또 혼자였어요.

 

 




 

 

그렇지만 이제 엠마 할머니는 무언가 달랐어요.

할머니는 날마다 창가에 앉아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림을 그렸어요.

할머니의 그림은 벽에도, 벽장에도 찬장에도 가득했어요.

엠마 할머니는 자기가 좋아하는 곳들과 사랑하는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조금도 외롭지 않았어요.

 

 

 

 

 

 

우리 나라에서 일흔두 살의 나이란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모습이 연상되는 그런 나이에요.

엠마 할머니처럼 뭔가를 시작한다기보다 뭔가를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이.

하지만 이 책 속의 엠마 할머니는 젊은 사람들도 선뜻 하기 힘든 결심을 내리고

외롭고 무료하게만 흘러가던 삶의 방향을 비틀어 버려요.

자기가 좋아하는 곳들과 사랑하는 친구들에 둘러싸인 삶을

그림으로 그려야겠다고 생각한 결심이 엠마 할머니를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한 거죠.

그냥 흘러가는대로 내버려 뒀던 삶이었는데

삶은 흘러가는 방향을 바로 잡아 주길 기다렸던 것처럼

엠마 할머니의 하루하루는 기쁨으로, 행복으로 가득하게 돼요.

엠마 할머니는 이제 더이상 산 너머 고향 마을을 그리워하지 않을 거예요.

고향 생각이 나면 햇살이 따뜻하게 비치는 창가에 앉아 그림으로 그리고

온 집안 구석구석에 걸어 놓으면 되니까요.

고향은 산 너머가 아닌 바로 곁에서 엠마 할머니를 지켜 주겠죠.

 

 

이 이야기는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한 엠마 스턴이라는 화가의 이야기에요.

바바라 쿠니의 책 속 그림들은 엠마 스턴의 그림을 바탕으로 그려낸 거죠.

하지만 8호 [에밀리]의 그림과 비교해 보세요.

바바라 쿠니와 엠마 스턴의 그림이 참 닮은 꼴이라는 느낌이 들 거예요.

목가적인 느낌, 판화로 찍어낸 듯한 기법, 세밀한 선 등이 많이 닮아 있어요.

바바라 쿠니의 따뜻한 그림처럼 엠마 할머니의 그림에서도 따뜻함이 느껴져요.

프랑스의 노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세상을 바라보는 정감 있는 시선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아요.

내 주변을 사랑하고 캔버스에 담는 여유.

엠마 할머니가 참 부럽습니다.

 

출처 : http://paper.cyworld.com/boo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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