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연한 자에게는
몰두할 무언가가 있는 것이 좋다.
그것이 일이든 취미든 간에,
적어도 그것을 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상황을 잊을 수도 있다.
그런 종류의 일로 나는 채린에게 책을 권하고 싶다.
이를테면 추리소설 같은 것.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살해될 확률보다
아는 사람,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죽을 확률이 더 높다.
사랑은 잔인하다.

- 본문 222~223쪽에서

 

 

- 백수생활백서, 박주영.
((민음사 2006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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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6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사람은 할 수 없지만 아는 사람은 할 수 있는 것 -
상대의 영혼을 죽일 수 있다는 것.
 

2006.08.21 23:21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말로 해놓고 보면 역겨우리만큼 평범하다.
완전한 일반론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공기로서 몸 속에 느꼈던 것이다.
문진 속에도,
당구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네 개의 공 속에서도,
죽음은 존재해 있었다.

 

 

- 개똥벌레,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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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6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흔히들 '살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물' 도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동물이나 인간처럼 움직이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닐 뿐, 식물이 가만히 있지만
살아있는 것처럼. 그러므로 살아있다는 것은 죽음도 함께 있다는 뜻이겠죠.
그래서 쓸모없어졌다고 버려지는 모든 물건들에 애도를 표합니다.
'버림' 받는다는 것은 누구나 슬픈 일 아니겠습니까.

302moon 2007-05-16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 글보다 더 끌리는! 좋은 말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웃음)

비로그인 2007-05-16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엣, 별말씀을...(머쓱)
 



2006.07.02

나는 그때 그곳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긴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싸웠다.
그러나 그 시간은 결국 끝났다.
기다리는 대상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그 시간은 아픔이 되고 슬픔이 되고
끝을 알 수 없는 우물이 된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그 시간을 떠올리면 아득해진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때 난 그곳에서 평생을 기다렸다, 라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던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 그때 나는 그곳에서 평생을 기다렸다, 황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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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3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왠지 저도 훗날에 저 대사를 읊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잔잔한 피아노곡을 듣고 있는데. 어쩜 이리도 잘 어울리는 글인지. (웃음)
 

 

    【카타르시스】 [katharsis]

    정화. 배설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제 6장, 비극의 정의(定義) 가운데에 나오는 용어.
    '정화'라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는 한편, 몸 안의 불순물을 배설한다는 의학적 용어로도 쓰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의에 대해서는 이 구절의 표현이 불명료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설(異說)이
    분분한 채 오늘에 이르지만, 요컨대 비극이 그리는 주인공의 비참한 운명에 의해서 관중의 마음에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이 격렬하게 유발되고, 그 과정에서 이들 인간적 정념이 어떠한 형태론가
    순화된다고 하는 일종의 정신적 승화작용(昇華作用)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정신분석에서는 무의식 속에 잠겨 있는 마음의 상처나 콤플렉스를 말. 행위. 감정으로써 밖으로
    발산시켜 노이로제를 치료하려는 정신요법의 일종으로, 정화법, 제반응(除反應)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마음의 상처, 응어리는 상기하거나 말하기가 괴롭고, 전혀 생각나지 않는 수도 있다.
    이 방법을 처음으로 발견한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J.브로이어'는 이 저항을 완화하기 위해 최면술을
    사용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마취제(아미탈, 펜토탈)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라도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 어느 정도의 마음의 연결이 없으면 성공
    하지 못한다.  문제아의 치료에 쓰이는 유희요법(遊戱療法)도 【카타르시스】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블로일러'에 의한 이러한 【카타르시스】의 발견은 정신분석의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

    자, 여기까지가 사전적 의미이고 -

    한 마디로 말 하면, '억압된 감정의 표출'을 영화나 소설 속의 주인공을 통해서 이루거나
    어느 날 무언가를 계기로 느끼게 되는 감정의 배설 - 오르가즘, 환희, 희열, 성취감, 충족감, 만족 등.

    '환희' 나 '희열' 혹은 '쾌락' 같은 감정/느낌의 최고봉에 달하는 감각들은 흔하게 접하는 문자들이지만,
    실제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피부 속, 정말 발 밑에서부터 영혼이 끌어 올려지는 듯한 그런 느낌의 감각은 애당초 쉽게 느낄 수가
    없는 감각.
   

    그럼에도, 나는 운 좋게 - 딱 한번 '환희'를 느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느낌은 정말로 -
    온통 하얀 것 밖에 없는 시.공간에 둥- 떠 있는 느낌이다.

    온 세상의 빛이 내 주위에 모여 있는 오로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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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에는 서로 모순된 두 가지 감정이 있다.
물론 누구라도 타인의 불행에 동정심을 품지 않는 이는 없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이 불행을 어렵사리 극복해내면
이번에는 어쩐지 뭔가 아쉬운 듯한 마음이 든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다시 한번 그 사람을
똑같은 불행에 빠뜨리고 싶은 듯한 마음까지 든다.
그리하여 어느새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자칫 그 사람에 대해 적의까지 품게 된다.

― 라쇼몽,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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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1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시련을 극복하여 성공한 사람을 보면 내가 된 것처럼 기분이 좋고 자극이 되어
의욕도 약간 생기고 그러던데.
저 사람은 주관적인 불특정 소수에서 일어나는 심리를 마치 '인간의 모든 마음'에
있는 것처럼 표현했군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남들도 다 그런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저 얼마나 작은 그릇의 생각입니까.

moon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302moon 2007-05-11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러게 말입니다. 좀 어이없다 싶어서, 밑에 의견을 단다는 게 그만 빠트리고 말았군요.
어제, 20분 동안 컴퓨터와 씨름하다가 겨우 페이퍼 3개 올려놓고/
이거,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아닙니까, 정말!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데, 순간 분노에 휩싸여서.
저 글은 웹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예전에 제가 읽은 적이 있던 소설이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_-), 저런 구절이 있었나 싶습니다. 책을 다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슬쩍 기록해둡니다. ^^*

비로그인 2007-05-12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