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시 언젠가 꼭 비룡소의 그림동화 311
팻 지틀로 밀러 지음, 이수지 그림.옮김 / 비룡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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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다시언젠가꼭 #이수지 #팻지틀로밀러

“여기서 거기로 내 사랑을 모아서 할머니에게 계속 보낼 거예요. 내가 만나러 가면 할머니가 깜짝 놀라겠죠?”

힘이 느껴지는 그림체를 보자마자 단박에 알아차렸다. 이수지 작가님의 신작이란 걸.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팻작가님의 마음과 세상 모든 할머니를 떠올리는 수지 작가님의 마음이 책 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에서는 할머니와 멀리 떨어져서 사는 아이가 있다. “우리 언젠가 또 만나요!” 할머니와 떨어져 있는 동안은 이 말을 마법의 주문처럼 외는 아이이다. 어떻게 하면 할머니를 만나러 갈 수 있을까. 엄마와 아빠는 바쁘고 아이는 학교에 가야 한다. 어떻게 하면 할머니에게 나의 이야기를, 나의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작은 고민에서 시작된 아이의 무한한 상상력이 인상적이다. 로켓을 타고 할머니네 마당으로 착륙한다면? 내가 편지 봉투 안으로 들어간다면? 컴퓨터 화상 채팅으로 만난다면?

페이지 곳곳에 있는 입체 컷들은 어떤 쪽수에선 편지 모양이고 어떤 쪽수에선 컴퓨터 모양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아이와 할머니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이의 상상이 다채로워지고 생동할수록 두 사람의 거리가 계속해서 좁혀지고 가까워진다. 정말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 다시 언젠가 꼭! 반드시 물리적인 거리가 좁혀져야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만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우리는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다음엔 할머니가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줘요. 주거니 받거니 우리는 끝없이 이야기해요. 너무 졸려서 이젠 정말 전화를 끊어야 할 때까지요.”

부모님보다 할머니와 더 애틋한 관계가 있다. 내가 그랬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을 읽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엄마와 아빠는 모르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던 사람. 나의 뒤에 몇 발자국 떨어져 내 걸음걸이를 그저 따라오던 사람. 뒤돌아 손을 뻗으면 그때서야 거리를 좁혀 왔던 사람. 내가 겪지 않은 시간을 그저께 일처럼 이야기하던 사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는 나와 할머니간의 우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독특한 우정. 부모님이 주는 사랑과는 조금은 다른 결의 사랑과 신뢰. 둘 사이의 긴 세월을 뛰어넘어 서로의 질문과 투정에 혀를 내빼고 웃던 시간들이 이번 책을 보면서 새록새록 떠올랐다.

작가의 말에서 수지 작가님의 문장을 오랫동안 곱씹게 되었다. “보고 싶을 때 서로 볼 수 있고, 안고 싶을 때 서로 안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생각하곤” 한다는 것. 이 글을 보고 언젠가 할머니가 내게 “언젠가 네가 할머니가 된다면 내 마음을 알게 될 거야.”라고 얘기했던 게 생각났다. 언젠가 알게 될 거라는 말은 지금의 나는 아마 모를 거라는 의미였을 텐데도, 그때 나는 그 말이 왜 그렇게 애틋하게 느껴졌을까.

퇴근길에 책을 읽어 보다가 별안간 지하철에서 그림책 보다가 우는 어른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하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젖은 운동화로 빗속을 걷는 일이 잦은 요즘, 아이들에게 그리고 내 또래 어른들에게 권하고 싶은 따뜻하고 예쁜 동화책이다.

(해당 후기는 비룡소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입니다.)

#비룡소 #그림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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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 26가지 키워드로 다시 읽는 김수영
고봉준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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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든무수한반동이좋다 $고봉준김명인외22

"언제나 아이러니 속에서 그의 시는 태어나고 아이러니를 껴안고 사랑하며 괴로워하며 눈을 뜬다."(김행숙, p.184)

 

 김수영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스물네 명의 문인들이 모였다. 이 책은 가족, 유교, 일본어, 한국전쟁, 전통, , 여혐, 니체, 죽음, 사랑, 풀 등 여러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김수영의 삶과 문학을 돌아본다. 시인의 탄생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과 4·19혁명 이후의 시간들을 통과하여 김수영이라는 사람의 흔적을 짚는 과정이다.

 

그동안 우리에게 김수영이란 시인은 혁명또는 참여시로 가장 먼저 해석되었던 시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채로운 시각으로 다시금 관찰되어지고 새롭게 발굴되는 김수영은 우리가 그전까지 이해했던 시인보다 더욱 복잡하고 입체적이다. 그의 시적 세계가 삶의 어떤 순간들을 거쳐 만들어져 온 건지, 그가 말하는 온몸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지를 그가 생동하는 삶 가운데에서 짚어 볼 수 있었다. 그의 삶을 살피는 순간 그의 시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았다.

 

 김수영은 평생 이분법과 싸워왔다는 문장이 떠오른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쟁과 분단, 냉전과 이념 대립, 혁명과 반동의 역사는 무수한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오연경, p. 133) 시대였다. “전쟁을 체험하고 오랜 시간 가족들과 떨어져 있었던”(이경수, p.25) 김수영에게 이 시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제대로 확신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기꺼이 의지할 수 없었던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잇따른 상실의 경험으로 이 시기에 김수영이 바로 봄”, “대상을 정확히 바라보아야한다는 자기다짐과도 같은 태도”(박수연, p. 45)를 취하게 된 건, 어쩌면 격동하는 세계에서 휩쓸리지 않기 위한 안간힘이 아니었나 싶다.

 

 "”모든 사물을 외부에서 보지 말고 내부로부터 볼 때, 모든 사태는 행동이 되고, 내가 되고, 기쁨이 된다라고 담뱃갑에 썼던 메모처럼, 그는 보는 법을 배움으로써 사물의 발견생활의 발견’, 나아가 내면의 발견을 이루어내려고 했다."(나희덕, p. 112)

 

 치열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가족과 일상의 의미를 파고들었을 시인이 건져 올리게 되는 것이란, “평범함 속에 위대함이 있고 거칢 속에서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이”(이경수, p. 25)인다는 발견이다. 대상의 본질을 읽어 내려는 시도에 대하여 헬리콥터나 팽이의 균형 잡힌 원운동”(p. 89)이라 표현한 게 인상적이다. 이것이 그가 사용한 시어가 비유나 상징이 아닌 온몸인 이유”(오영진, p.90)인 것이다. 그렇게 사물을 보는 법과 사랑의 기술를 익혀 나간다.

 

 "그리하여 김수영은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같은 무수한 반동”(거대한 뿌리, 1964)에 굴복하고 그에 대한 애정을 고백한다. 어쩌면 진보와 혁명은, 그처럼 비루한 일상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자리에서 시작해야 한다." (심보선, p. 167)

 

 그 외에도 흥미로운 키워드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욕과 돈, 그리고 죽음이란 키워드가 기억에 남는다. 욕설이란 것은 어쩌면 나의 고유한 감정과 언어를 누르고 웅얼거리거나 그럴듯한 말로 번역하지 않는 일”(p. 194)일 것이란 것. 시인이 자주 언급했던 새로움, 온몸, 온몸으로 쓰는 시, 자유, 사랑, 생활은 사실 추상에 있지 않, “비루하고 옴짝달싹 못하는 생활속에 숨어”(김진해, p. 190)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란 말이 와닿는다.

 

 "욕은 가장 강력하고 인간적인 감정의 발산이자 최후의 언어다. 기저귀에 싼 똥오줌, 불결한 냄새, 옷에 게운 젖, 밤새 이어지는 울음을 껴안아야지만 비로소 아이에 대한 사랑이 완성되는 것처럼, 언어도 욕이 있어야 완전해진다." (김진해, p. 190)

 

 시에 대하여 자기를 죽이고 타자가 되는 사랑의 작업’(산문 로터리 꽃의 노이로제, 1967)이라 표현한 것도 생각난다. 김수영에게 죽음이란 끝이 아니고, 거듭됨으로써 또 다른 삶을 가능”(p. 237)케 하는 무언가. “삶을 각성시키고, 생성을 이어나가게 하고, 나를 공동체로 나아가게 하는”(이미순, p. 242) 무언가라는 것. 이를 두고 이 과정에서 몸은 자신을 둘러싼 억압의 실핏줄들을 비로소 보이게 하고 그것과 싸우게 될 것이므로 이 사랑은 미시적 투쟁이지 달콤한 도피는 아니라는”(신형철, p. 230) 이야기도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이처럼 끊임없이 사유하고 질문을 던지는 시인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김수영 시는 독자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흔들고 복잡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내 몸이 아프다”. 내 몸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플 수 있는가. 아니, 어쩌면 거꾸로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가 모르는 자기를 이라고 부른 것인가." (신형철, p. 223)

 

 "사랑의 소리-파동은 멀리 나아가면서 가청권에서 지워지지만, ‘침묵의 형태로 사랑하는 암흑, 봉오리, 가시, 기차 등을 모두 아우른 후 거대한 사랑의 숲이 되어 다시 여기로, ‘사랑의 첫 발성자인 에게로 벅차게 밀려닥”(사랑의 변주곡, 1967)친다." (김수이, p.255)

 

 #하니포터 #하니포터3_이모든무수한반동이좋다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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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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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자리 #고민실작가님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중 어느 쪽을 더 잘 잊어버릴까? (p. 55)


무엇을 믿어야 할지 선택하는 과정은 젖은 운동화를 신고 돌아다니는 일과 비슷했다. 멈추기 전에는 발을 말릴 수 없었다. (p. 163)


조제약은 의사의 처방이 필요하지만 일반약은 누구나 쉽게 쇼핑한다. 열이 나면 해열제, 속이 거북하면 소화제, 설사가 나면 지사제, 염증에는 진통소염제. 스스로 판단하여 복용 여부를 결정한다. 부작용은 오롯이 내가 감당할 몫이다. (p. 167)


‘영혼이 없다’고들 한다. 마음에 없는 행동을 할 때 관습적으로 쓰는 말이다. 말과 행동에 담기지 않은 영혼은 어디를 떠도는 것일까. 어디선가 다른 사람들은 알아 듣지 못할 언어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영혼이 떠난 몸은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죽은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이것을. 껍데기만 남아서 있으나 마나 한 이것을. 그저 사람들 틈에서 영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이것은, 또 다른 의미에선 꼭 유령 같지 않는가.


‘양’이란 사람이 있다. 마지막 실업급여를 받은 양은 알바 자리를 찾던 중 플라워 약국이란 곳을 발견한다. 나이도 학력도 경력도 무관. 무엇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양에게 이만한 일자리는 없었다. 평생을 남들만큼만 노력해 오고 그만큼만 살아온 양이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들이 더 하찮아 보’(p. 12)인다고 양은 생각한다. 플라워 약국으로 면접을 보러 가던 날도 양에겐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어떤 기대나 희망을 갖고 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유령을 보는 약사를 만난 뒤로 양은 잔잔한 일상의 진동을 느끼게 된다. 오감으로 느끼지 못했던 끊임없는 증발과 응결을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약사가 유령을 보긴 했지만 플라워 약국은 여느 약국과 똑같았다. 영양제나 진통제를 찾는 사람들과 처방전을 든 노인들이 약국을 찾았다. 가끔씩 구구단을 외우는 아이나 인상을 찌푸린 영업사원, 넋두리를 하는 아주머니 같이 유령인지 의심스러운 사람들도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김 약사의 눈에는 ‘네에에…’하고 대답하는 양이나 ‘글쎄요오…’하고 대답하는 조 부장이나 유령과 별반 차이가 없는 듯했지만 말이다. 김 약사의 입에서 나오는 ‘유령’이란 말은 어떤 면에선 꼭 증세에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햇빛을 받은 사람이 재채기를 하는 것을 보고 광반사 재채기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처럼. 증상에 이름을 붙였다는 건 유의미한 통계가 생긴 것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유령이 되어야지.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양은 자신을 둘러싼 복잡하고 불편한 상황들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엄마의 한탄을 듣고만 있어야 할 때, 회사가 폐업했을 때, 혜의 마지막 메시지에 답장하지 못했을 때, 부모님에게 보증금으로 돈을 빌렸을 때, 덕질을 시작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할 겨를 없이 휩쓸리기에 바빴던 나날이었다.


유령의 눈으로 보게 되니 알게 되었다. 유령의 자리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보이는 것이다. 왜 혜와의 관계가 점점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나의 마음이 얼마나 마모되고 소모되어 왔는지도. 진통제를 복용하듯 덕질을 한 이유도. 그리고 늘 인생의 가해자라 생각했던 엄마가 어쩌면 나와 같은 유령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모두가 부작용을 감수하고 약을 먹는 사람들이었던 거다. 넋두리를 하고 한탄하고 의존하고 화를 내는, 모든 양상들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팔이 찢어진 남자가 약국에 왔다. 치료는 불법이라고 고개를 젓는 김 약사에게 양이 남자를 치료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중 어느 쪽을 더 잘 잊어버릴까? 오래 안 살아도 좋으니까 나쁜 기억을 남기는 일은 하고 싶지 않’(p. 199)다는 양의 독백이 떠오른다. 퇴근하는 길에 양은 비에 젖은 뺨을 만져 본다. 오랜만에 할 수 없는 일을 했다고 말하며, 그는 뺨에서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고 덧붙인다.


그 순간만큼 그는 더 이상 유령이 아닌 것 같았다. 있으나 마나 한 존재에서 좀 더 뚜렷하고 다채로운 존재가 되어 간다. 약국을 관두기로 결심한 날, 양은 생각했다. ‘유령이 되는 건 외로움에 대한 저항이 실패하는 과정이었다’(p. 218)고. 마음의 헛헛함을 채우기 위해 의지할 것들을 찾았던 시간이었다.
여러 실패 끝에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외로움을 완벽하게 저항하는 방법이 아닌 완전히 받아들이는 방법이었다. 나뿐 아니라 모두가 ‘어디선가 한 칸의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작은 픽셀’(p. 232)이란 깨달음.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여백에 0을 놓아둘 발상을 했을까. 어떤 숫자를 더하거나 곱해도 자리가 비어 있지 않다는 것. 여전히 하나의 단위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 무한히 태어나고 성장하는 자리가 바로 영의 자리인 것이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를 앞둔 양은 다시금 헤엄을 칠 준비를 한다. 이번엔 헤매는 일이 있더라도 좀 더 오래, 좀 더 멀리 헤엄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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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햇살 문지아이들 169
윤슬 지음, 국지승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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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햇살 #윤슬작가님 #윤슬연작동화집 #오늘의햇살_서평단 #문지아이들

바깥에선 아직도 빗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더 이상 그 빗소리가 따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일은 아마도 비가 그칠 것 같았다. (p. 29)


너무 어색해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웃는 게 낯설어진다는 게 이상했다. 나중에는 다시 웃지 않는 게 낯설어질까, 시간이 흐른다는 건 어떤 걸까. 언젠가는 다 괜찮아진다는 걸까? 그건 얼마만큼 괜찮아진다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꼼짝도 않고 한구석에 가만 머물러만 있는 베타를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지금은 그냥, 이 베타가 잘 버텨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p. 57)


엄마, 안녕. 안녕. 나는 마음속으로 엄마에게 다시 한 번 작별인사를 건넸다. 모든 것들이 괜찮아지길 바라게 되는 밤이었다. (p. 66)


“녀석. 이제야 제대로 웃는 구나.”/ 은하 아빠가 진호의 손을 잡아 주며 말했어요. 그 옆에 서 있던 은하는 ‘제대로 웃지 못했던 순간’들에 대해 잠깐 생각했어요. 엄마가 떠나고 영영 웃지 못할 것 같았던 그 순간들에 대해서 말이죠./ ‘이제 괜찮아. 나 괜찮아, 엄마.’/ 은하는 마음속으로 작게 속삭이며 앞을 바라봤어요. 엄마와 찍은 사진 옆에 놓을 새로운 사진이 생겨 참 기뻤어요.(p. 103)


새삼 작별(作別)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지을 작, 헤어질 별. 헤어짐을 짓는다는 의미였다. 문득 짓는다는 말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짓는다는 말만큼 능동적인 행위의 표현이 있을까. 세상엔 셀 수 없이 많은 이별의 순간이 있을 텐데. 그때마다 나는 이별에 대하여 어떤 행위를 해야 할까. 생각해 보면 누구도 내게 작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작별할 때 어떤 말을 주고받고, 어떤 마음으로 상대를 떠나보내야 하는지.


이별의 순간은 예측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우리 삶에 들이닥친다. 그 순간을 아무쪼록 잘 지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오늘의 햇살』에선 네 아이들이 나온다. 소유, 미유, 은하, 진호. 한 동네에서 살고 있는 이 아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이별을 경험하거나, 이별을 목격하거나 아니면 이별을 예감하기도 한다. 아이들에겐 너무나도 생소하고 낯선 이별의 순간들이다. 그 누구도 이 아이들에게 헤어짐의 순간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전해주지 않았을 텐데도.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자기 나름대로의 작별 방법을 찾는다. 그 과정을 그린 책이 『오늘의 햇살』이다.


이 책의 아이들 대부분이 엄마가 부재한 아이들이다. 엄마와 헤어진 아이, 엄마가 돌아가신 아이, 엄마 대신 할머니와 사는 아이이다. 각기 다른 상실을 안고 있는 아이들은 어느 날 자신의 처지와 똑 닮은 것 같은 동물들을 만난다. 수로에 빠진 새끼 고라니가 그렇고, 곧 죽을 것만 같은 열대어 베타가 그렇고, 또 서로를 부모 자식처럼 여기는 고양이와 오리가 그렇다.


이 어리고 연약하고 말도 못하는 동물들에게서 아이들은 자신을 발견한다. 새끼 고라니의 엄마 고라니를 찾아 주고 싶어 하는 장면이나, 아픈 열대어를 살리려고 마음먹는 장면, 오리와 고양이를 위협에서 지켜 주는 장면은 꼭 아이들이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위로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위로. 내가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고, 전해 주고 싶은 응원인 것이다.


아이들이 서로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덮으며 "잊지 마라. 네 옆엔 나도 있다!“ (p. 29)라고 말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이들은 자기만의 작별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주위 어른들을 본다. 이별을 앞둔 어른들은 어떠한지 살펴본다. 엄마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를 보며 은하는 생각한다. ‘언제든 엄마에 대해 말해 줄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새삼 든든했다. 엄마가 보고 싶냐던 할머니의 말은, 마음껏 엄마를 그리워해도 된다는 말과도 같다는 걸 문득 알아차릴 수 있었다.’ (p. 62)고.


극복한다는 말보다 지나간다는 말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장면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만 같다. 어쩌면 슬픔이라는 건, 이별이라는 건 극복하거나 지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거나 통과하는 것이 아닐까. 꼭 잊거나 묻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리워하고 생각하고 오래 슬퍼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혼자인 것보단 함께인 게 좋으니까.” (p. 26)


잘 헤어지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제대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질 수 있을까. 친구와 이웃 들과 다같이 찍은 사진을 엄마의 액자 옆에 걸어 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아이의 마음처럼. 오늘은 비가 오고 날도 컴컴하지만, 내일은 해가 뜰 것 같다고 말하는 어느 독백처럼. 내일을 나아가게 하는 작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었다.


케이트 디카밀로의 책 『왜 동화는 약간 슬퍼야 하는가?』의 장면을 빌린 마지막 작가의 말에도 밑줄을 쳐 두었다. 우리는 왜 동화를 읽을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다시 읽어 보면, 모든 것이 너무나 아름다웠어. 그리고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다는 걸 확인했지.’(p. 106) 혼자인 것 같은 순간에 혼자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잘 지나가고 있다고 확인 받고 싶은 때가. 그런 때를 지나가고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두껍지 않은 책이라 부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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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없고요, 그냥 성공하고 싶습니다 - 180만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의 밍키 PD가 90년대생 직업인으로서 생존해온 방식
홍민지 지음 / 다산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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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없고요그냥성공하고싶어요 #홍민지피디님

메이저 근처에서 기웃거리며 우리의 가치를 알아주길 바라고 있을 시간에 우리는 우리만의 리그를 만들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억울하다면 분노해야 한다. 그 에너지가 있으면 관두고 싶다가도 조금 더 버텨내게 된다. 그럼 언젠가 내가 만든 담장 밖에서 들어오고 싶다고 두드리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p. 17)


이것들이 묘하게 불편했던 이유는 마치 나에게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사회생활을 하며 임하는 진지한 태도를 우습게 보는 어른들도 있고, 내가 전문성을 발휘하는 걸 기대하기보다는 회식을 하며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기대하는 어른들도 많았다. 그런 지점들이 아이돌이 방송에 나가서 받는 대우와 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나를 불편하게 만든 거다. (p. 23)


애초에 꿈을 이루겠다는 강박이 없다면 타인의 긍정적인 평가를 목 빠지게 기다릴 일도, 불합격 딱지를 받을 일도 없다. (…) 꿈을 이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 강박에 시달리다 보면 내 꿈을 인질로 악마의 손길을 내미는 빌런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 누군가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내 세상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p. 38)


그래서 나는 무엇이든 좀 헐렁하게 시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시작이 하찮다고 결과까지 하찮은 건 아니니까. 좋은 운동화 없이도 맨발로 가볍게 출발선에 서는 일에 더 익숙해졌으면 한다. 밟혀서 때가 탈 운동화가 없어서 그런지 용감해진다. (p. 57)


운전을 처음 배울 때 차선을 지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이리저리 맞추려고 할수록 더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멀리 보면 오히려 차선이 지켜져”라고 말씀하셨다. 도로의 끝에 점을 찍고 바라보니까 신기하게도 차선이 맞았다. (p. 102)


얼마 전 아빠가 내 방에 들어와서 말씀하셨다. “너는 둥그렇지 못한 모난 돌인데 계속 그렇게 살길 바란다.” (p. 212)


* * *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 무한도전에서 명수아저씨가 그렇게 말할 때 나는 웃었다. 또래 친구들도 어른들도 배를 잡고 웃었다. 그 말이 유머로 재미로 소비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당시 학교 필독 도서가 ‘아프니까 청춘이다’였기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웃음으로만 소비되어야 할 말이었다. 우리는 반드시 꿈이 ‘있어야’만 했고, 향후 10년의 나를 어렸을 때부터 미리 ‘계획해야’ 하는 게 당연했으니까.


문명특급은 스브스뉴스 채널의 ‘다시 만난 세대’에서 시작하여, 현재엔 독자적인 이름으로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채널이다. 90년대생에겐 익숙한 귀여니부터 시작하여 다꾸, 비혼식, 학교 앞 찾아가기, 숨듣명 등의 콘텐츠를 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특히 내가!♡) 사랑하는 채널이다.


책의 저자는 밍키PD로 그가 문명특급의 연출가가 되기 전후로 겪어왔던 일화와 느꼈던 생각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애니메이터와 광고인, 예능PD……. 어렸을 때부터 꿈을 꾸어 왔지만 그는 그 꿈들을 실현해 보기도 전에 불합격 통보를 받는다. 이후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지원한 스브스뉴스 인턴에 덜컥 합격하게 된 그는 인생 처음으로 꿈 없이 살아 보게 된다. 이에 대해 그가 남긴 말이 떠오른다.


‘나를 원하지 않는 곳에 미련을 두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를 원하는 곳에서 최선을 다할 때 어떤 결과가 있을지 궁금해졌다. (…) 불행할 줄 알았지만 이룰 것이 없으니 반대로 아주 행복했다. 짐이 가벼워져서였을까. 회사에 출근하는 모든 날들이 즐거워졌다.’ (p. 36)


원대한 꿈 없이 일을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하기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 알아간다. 직장에서의 지위가 아닌 직업에 대한 목표가 생기면서 회사에 가는 게 즐거워졌다는 말이 인상 깊다. 그에게 회사는 편집할 수 있는 컴퓨터와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있는 공간이 되었다는 말도. 많은 출연자들과 제작진들을 만나 오면서 그는 그 자신이 어떤 연출가가 되고 싶은지 알게 되었다. 그가 잘 알든 모르든 모든 사람들에겐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리더, 좋은 어른, 좋은 동료가 되는 방법 또한 배웠다. 앞으로도 고난이 찾아와도 견디어 나아갈 수 있는 맷집(p. 118)을 기르게 되었다. 그는 그가 모르는 사이에 계속해서 성장한다.


꼭 또래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이상하게도 나는 그가 다른 사람에게 무시를 당할 때면 함께 화가 나고 분했다. 그가 웃긴 일을 겪거나 든든한 동료들 덕에 기운을 얻을 때면 나도 함께 키득키득 웃었던 것 같다. 이건 내가 저자와 똑같은 90년대생이라 그런걸까. 퇴근길 지하철에서 ‘누군가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내 세상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문장을 보고 나도 모르게 훌쩍이고 말았다. 내가 나에게 해주지 못했던 말을 내 또래인 저자가 해 주었다.


당장 1년 후, 10년 후의 나를 상상할 수 없는 요즘이다. 꿈이 있지만 확신이 없는 오늘의 나에게 이 책은 그래도 괜찮으니, 달리지 않아도 괜찮으니 느릿하게라도 걸어 보라고 말해 준다. 발길 닿는 대로 걷는 모든 방향이 길이 될 거라 이야기한다. 그럼 나는 나를 마구 사랑해 주고 싶어진다. 혹시라도 여기에 강박처럼 꿈을 찾고, 꿈을 좇는 또래가 있다면, 혹시라도 꿈이 없다며 몸을 움츠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 표지 정말 잘 만들었다. 모난 돌멩이들을 표현한 걸까. 바코드도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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