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나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2
이주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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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의나 #이주란작가님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괜찮다, 말해 주네.”(p. 9)

 

소설의 첫 문장이다. 이야기는 주인공 유리가 언니의 방문에서 떨어진 포스트잇을 줍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누구일까. 누가 언니에게 괜찮다고 말해 준 걸까. 누구인지는 몰라도 언니에게 그 말을 해 준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유리는 안도한다. 소설은 유리의 독백으로 진행된다. 떠오르는 풍경들을 기억나는 대로 에피소드처럼 적어 놓았다. 유리는 사실 이 글이 살기 위해”(p. 10) 쓰기 시작했던 거라고 미리 이야기한다. 죽지 않으려고 기록했던 기억들. 한 인물이 어떻게든 살아가 보려고 그러모았던 순간들을 엮은 것이, 이주란 작가님의 신작 어느날의 나였다.

 

언니와 골목에서 헤어진 뒤에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이럴 때면 지나간 불행이 줄어드는 것 같다. 골목에, 정류장에, 버스에, 길가에 수많은 사람이 어딘가를 향해 걷는 것, 지나친 횡단보도의 신호가 깜빡일 때 누군가 다급히 건너는 것. 그가 안전하게 인도에 도착했을 때 혼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p. 47)

 

유리와 언니가 같이 산 지 1년이 되어 간다. 오랜 시간 동안 할머니의 간병을 했던 유리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혼자가 되었다. 언니는 가족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다. 홀로 보내 온 시간이 길었어도 혼자 있기가 어렵”(p. 102)게 느껴지는 밤이 있다. 그 밤이 얼마나 긴지 알고 있는 사람만이 타인의 밤을 알아차린다. 언니가 유리에게 따뜻한 밥과 국, 새 칫솔을 쥐어 준 것처럼. 유리가 언니에게 기꺼이 현관문을 열었던 것처럼.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건너 온 긴긴 밤에 대한 이야기는 인물들의 대화에서 조금씩 언급되는 기억이었고 그들이 이미 지나쳐”(p. 89) 온 터널이었다.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에 나를 끌어올리고 일으켜 세우는 것은 그런 사랑의 기억들이다. 그런 기억들이 있어 우리는 우리 안의 아픔을 응시할 수 있고 건너갈 수 있다. 그리고 소설은 그 이후의시간을 다룬다. 터널을 건너 온 유리가 자꾸만 시선을 두는 풍경과 귀를 기울이는 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시원하게 몸을 씻고 편안 옷으로 갈아입고 내 방에 누우면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되는 기분이다. 이 세상에 내가 있구나. 나라는 사람이 숨을 쉬고 있구나. 여러 모습으로 여러 마음으로 종일 말하고 움직이다가, 몸과 마음에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나인 채로, 나로 살아 있는 상태로 나 자신이 되고 내 세상이 되는 것.”(p 37)

 

무엇이 로 만드는 걸까. 지금까지 나는 내가 만들어 내는순간이 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유리라는 사람이 유리라는 걸 알아가는 과정은 달랐다. 그런 순간뿐 아니라 유리가 찾아보고’ ‘발견하는풍경이 유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한 느낌이었다.

유리가 무엇을 보았더라. 집 문을 두드리기가 미안해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주인 아주머니를 보았다. 슈퍼 앞에 앉아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수많은 사람, , 자전거를 보았다. 손톱달을 보려고 멈춰 서는 남자와 한 가족의 사진을 찍어 주는 언니를 보았다.

또 무엇을 들었지. 싸우다 화해한 주민들의 웃음소리와 상가 주민들의 농담, 클레이로 크림빵을 만들자 아이들과 선생님이 질러 주었던 탄성을 들었다. 유리는 앞 건물 위층에서 앵무새가 우는 소리를 깐따삐아라고 외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재한 씨와 언니가 다만 캠핑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먹으며 두서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것을 들으며 사는 게 엄청 재미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행이라 여긴다”(p. 108).

유리의 마음이 가닿았던 곳곳을 짚어 볼 때마다 유리란 사람에게 괜찮다고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그의 전부를 알지 못하더라도.

 

희망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거나 대단한 미래를 꿈꾸며 살지는 않지만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은 어차피 바꿀 수 없고 오늘 나는 그 어느 날의 나보다 괜찮으니까. 가진 것을 생각하면.” (p. 114)

 

삶을 계속해서 이어 가기 위해 유리가 적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거창하거나 대단하지 않은 삶의 풍경들. ‘내가모르는 사람들과 나를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장면들이었다. 한영인 평론가님이 쓴 문장이 떠오른다. “삶을 계속 살게 하는 힘은 완벽한 이해나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 어떤 존재를 염려하는 애틋한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 온기 가득한 발견들이 인상적이었던 따뜻한 소설이었다.

*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주란 #어느날의나 #핀시리즈 #042 #핀서포터즈 #서포터즈 #한국소설 #한국문학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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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피컬 나이트
조예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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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피컬나이트 #조예은작가님

이 괴이한 것을 어쩌자고 집 안에 들였을까.”(고기와 석류p. 32)

 

괴담에는 대체로 금기가 있다. 열어선 안 되는 문이 있거나 들어가선 안 되는 방, 불러서는 안 되는 이름이나 닿아선 안 되는 존재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괴담 속 주인공들은 매번 금기를 어겨 왔던 것 같다. 공포를 느끼면서도 문을 열어 보고, 뒤를 돌아보고, 말을 걸고야 만다.

이번 여덟 편의 단편소설에서도 저마다의 금기를 깨뜨리며 나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다만 그동안 우리가 숱하게 접해 왔던 괴담이 미지의 존재와 마주친 순간 끝나 버리는 이야기였다면, 트로피컬 나이트는 그러한 존재와 마주한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수안은 뒤돌아서서 좀 전에 자신이 빠져나온 문을 바라보았다. 허무할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숨이 막히지도, 머리가 아프지도, 토할 것 같지도 않았다. 수안은 주먹을 꽉 쥔 채, 한 발을 더 내디뎠다. 그리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가장 작은 신p. 195)

 

트로피컬 나이트 라는 제목처럼 여름만큼 괴담과 어울리는 계절이 있을까. 피부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창문을 열어 놓고 잠드는 계절. 바깥과 안쪽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여름에 괴담을 듣는다는 건 꼭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피부로 감각하는 일 같았다. 온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존재를 촉감으로 더듬거리는 느낌.

그런 순간들을 소설에서 발견할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문을 열거나창을 통과하거나 차원을 넘어비로소 어느 존재에게 는 장면들. 온기와 부피를 만지잡아보던 모습들을 기억한다. 반드시 물리적인 거리가 좁혀져야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자꾸만 내게 증명하는 것 같았다.

바깥에 있는 괴물이 안쓰러워 현관문을 열었던 할머니와 할머니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던 괴물처럼. 악몽을 꾸면서도 누더기 인형을 끌어안는 은성이와 은성이의 인형 뽑기를 도와주었던 악마처럼. 소중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또는 지키기 위해 문 밖으로, 차원 너머로 나아갔던 사람들처럼. 누군가 문 앞에 놓고 간 떡국이나 어느 신체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손목, 별모양 트리 장식같이. 마음이란 것이 갖가지 형태로 서로에게 가닿는다. 당신이 어떤 존재이든지 간에.

 

알코올과 새벽의 힘인지, 함께 울면 울수록 우리 사이에 존재했던 공백이 메꿔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 달, 1, 10, 20년가량을 거슬러 올라간 나는 어느 찰나를 기억해냈다. 최악의 명절로 남은 설 당일. 어른들의 고함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던 이불과 이불 안에서 맞잡고 있던 손을.”(새해엔 쿠스쿠스p. 132)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평생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p. 93) 타인은 얼마나 미지의 공포일까.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이 단지 아는 것뿐이라면, 우리는 평생 셀 수 없이 많은 질문과 발견을 거듭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긴 터널을 걷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괴담 속 인물들에게 작가가 보내는 따스한 응원처럼 나도 터널을 걷는 일을 즐겁게 생각하고 싶다. 혹시라도 지치거나 힘들어지더라도 다만 어차피 삶은 계속될 테고, 그 사실이 버틸 만하다는”(p. 209) 작가의 문장을 이따금씩 떠올릴 것 같다.

 

릴리, 나는 아마도 세상을 만지는 시도를 할 거야. 동시에 내가 잃어버린, 떨어져 나간 나의 일부를 찾아 나설 거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찾아 나서는 과정보다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더 길지도 몰라. 이거 하나만 기억해 줘. 물은 어디로 가고 어디로든 흐르잖아. 아마 세상도 곧 그렇게 될 거야. 이건 확신이야. 내 애정이, 내 목소리가 너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닿을 거라고 믿어. 내 꿈속의 네가 진짜 너라면 내 손을 잘 간직해 줘.”(릴리의 손pp. 104-105)

 

여름 막바지에 멋진 책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작가님이 단단한 문장으로 그려 낸 으스스하지만 따뜻한 세계. 각 소설의 소재들이 표지에 조화롭게 펼쳐져 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솔직하고 용감했던, 생동하는 인물들도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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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터 - 사라지게 해드립니다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김중혁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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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터사라지게해드립니다 #김중혁작가님 #자이언트북스

“사물이든 사람이든 상처가 있는 부분에는 기억이 매달려 있거든요.”(p. 227)


가제본과 함께 전단지와 명함, 의뢰서를 받았다. ‘당신이 사라지게 하고 싶은 물건을 이 세상에서 지워드립니다.’ 실제로 어딘가에 딜리팅 사무소가 있을 것만 같았다. 나였다면 무엇을 의뢰했을까 고민했다. 도로 빼앗는 게 아니라 사라지게 하는 일이란 게 중요했다. 대상이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어도 내가 그 흔적을 여전히 기억할 테니까. 대상을 없앨 수 있어도 이미 통과해 온 시간은 바꿀 수가 없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지우고 싶었던 건 사물이 아니라 기억일지도 모른다. 실수했던 기억, 사랑했던 기억, 미워했던 기억…. 누군가에게 더는 상기되거나 거론되거나 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시간을.


​“사람들이 기억 속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내는 이야기는 언제나 신선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겪은 일이고, 오직 한 사람만 경험한 감정이고, 오직 한 사람만 이야기할 수 있다.”(p. 102)


책에서는 마술사가 등장한다. 딜리터와 픽토르. 딜리터는 무엇이든 사라지게 할 수 있었고, 픽토르는 딜리터가 사라지게 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고스트라이더인 강치우는 딜리터 능력으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딜리팅해 주는 대신 그들의 이야기로 소설을 써 왔다.


집중만 하면 사라지는 사물과는 다르게 사람을 딜리팅하기 위해서는 대상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으니 그에게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오랫동안 픽토르를 찾았다. 픽토르인 조이수에게는 딜리팅된 모든 것이 보인다는 걸 알았을 때, 딜리팅된 것들이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여분 레이어로 옮겨진 것뿐이란 걸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의 손으로 딜리팅했던 사람을 떠올렸다. 자신이 딜리팅했던 모든 것들이 여분 레이어에 남아 있다면 그곳으로 꼭 한번 가 보고 싶다고 그는 생각한다.


​“딜리팅을 위해서는 대상자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야 해요. 모든 이야기를 알고,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정확하게 알고, 그 사람에게 완전히 감정이입한 다음에야 겨우 시작할 수 있는 작업이었죠.”(p. 128)


사물과 사람을 딜리팅할 수 있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지우기 위해, 누군가는 찾기 위해, 누군가는 지워지기 위해, 누군가는 발견하기 위해 움직인다. 서로 다른 목적으로 움직이는 인물들의 동선이 계속해서 겹치고 포개진다.

사람을 딜리팅하는 방법과 딜리팅된 사람을 찾는 방법이 똑같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딜리팅된 사람을 여분 레이어로 보낼 수 있고 현실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것이 오직 그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고 기억하는 딜리터뿐이란 게. 가족과 친구보다도 나를 알고자 했던 사람인 것이다. 자신을 지울 수 있는 딜리터에게 자기 이야기를 꺼냈던 사람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실을 벗어나 여분 레이어로 달아나고 싶었던 마음까지도.


”죽은 사람들의 세계를 계속 보고 있으면 평화로워 보일 때가 있어요. 거긴 모두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니까,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도 없으니까, 그런 게 좋아 보일 때가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속으면 안 돼요.“(p. 115)


이야기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 자체만은 ‘삭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다른 레이어로 보내어지고 달아나더라도 그 사람은 ‘제거’되거나 ‘삭제’되지 않는다. 현실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레이어라는 층위만 다를 뿐 여전히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 대목이었다.

여분 레이어로 간 사람에겐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그곳은 기억으로 존재하는 세상이다. 내가 이미 겪어 와서 결말을 알고 있는 세상. 그래서 실패나 상실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결말이 있다는 점에서 여분 레이어의 삶은 소설과 다를 게 없었다. ‘다음’이 없었으니까. 딜리팅된 사람들은 유령처럼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던 중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온 딜리터를 마주하게 된다면 어떨까. 소하윤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어쩌면 이 문장이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예전으로 가는 건, 이제 별로야. 그런데 나,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p. 279)


재밌게 본 소설이다. 대사 하나하나에 찰기가 있고 유머러스하다. 대사로만 짜인 부분을 쭉 따라 읽다 보면 인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럴 땐 꼭 희곡을 읽는 기분. 각 인물들의 구체적인 서사와 흥미로운 상상들이 돋보였던 소설이었다. 온점으로 끝나지 않은 결말도 인상 깊었다. 최고. 가제본을 읽을 땐 작가님을 결국 추리하지 못했는데, 김중혁 작가님이었다니. 저번 작품과는 다른 톤의 목소리였다. (사랑합니다. (냅다 고백…))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


“사람들이 인쇄 오류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지만, 출판사의 양자인 대표도 극구 반대했지만, 최근 소설<캥거루>의 마지막 문장에서, 강치우는 마침표를 빼버렸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열어두고 싶어서”(p. 290)


#딜리터 #딜리터사라지게해드립니다 #자이언트북스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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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 베이비 - 제2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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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베이비 #강성봉작가님

하늘의 별처럼 땅속의 돌처럼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도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가슴속에 소중히 품고 살아가는 한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다. (p. 12)

 

지음은 탄광촌에서 카지노 관광 도시가 된 마을이다. 마을에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그 주변으로 전당포와 모텔, 식당과 주점이 생겨났다. 카지노에서 돈을 잃은 사람들은 가진 물건들을 모두 전당포에 맡겼다. 돌반지, 적금통장, 땅문서, 산삼주, 스마트폰. 주인공 하늘은 소설 첫 문장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아빠는 나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렸다. 소설은 아이가 전당포에 맡겨진 이후의 시간을 다룬다. 하늘은 말한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길. 버림받은 아이의 이야기라고 우울하게 시작하진 않는다.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지만, 하늘의 곁에는 동하늘이라 이름을 지어 주고 할머니, 엄마, 삼촌이 되어 준 전당포 사람들이 있었다.

 

그림자 속에 앉아 세상을 내다보면 어른들 이마에 새겨진 작고 검은 흉터가 보인다. 흉터는 엄마도 있고, 삼촌도 있고, 할머니도 있다. 동네 사람들도 다 하나씩 갖고 있다. 그 흉터를 읽는 게 나의 일이다. 이상하단 생각은 감히 할 수도 없다. 내가 어른들이 이상하다고 하지 않는 건 어른들도 날 이상하다고 하지 않았으면 해서다. (p. 27)

 

하늘은 지음을 걷는다. 어떤 때엔 가족이나 이웃과 어떤 때엔 혼자서 걷는다. 호적이 없는 아이는 그림자 같다. 만질 수도 주울 수도 없는 그림자. 그러나 그 안에 분명 무언가 있는 듯한 그림자. 아이는 그림자의 모양으로 도서관을 가고, 맞은편 스피드 전당포에 들른다. 지장산을 오르기도 하고 카지노로 향하기도 한다. 하늘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듣기만 한다.

호기심을 갖고 분주히 움직이지만, 안 본 것도 아주 본 것처럼 얘길하는 하늘의 서술에는 어떤 판단이나 해석이 있지 않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p. 295) 아이의 시각으로 포착되는 카지노 도시는 아주 화려하거나 근사하진 않다. 카지노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도시이지만 하늘의 이야기는 카지노 밖에서 전개된다. 카지노 밖의 사람들. 화려한 랜드 이면에서 이루어지는, 어쩌면 조금 사소하고 왜소한 일상에 감각을 기울인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펑펑 내리는 눈 속에 서 있었다. 곡괭이를 둘러멘 할아버지를 보고 겁먹은 사무실 막내의 눈동자 속에 내가 있었다. 나는 안경다리 돌멩이 속에도 있고 어둡고 더들썩한 다방 구석에도 있었다. 할머니가 바닷가에 가면 나도 바닷가로 갔고, 할머니가 산으로 가면 나도 산으로 갔다. 할머니와 함께 이 땅 위를 훨훨 날아다녔다. (p. 261)

 

사전에서 아름다움이란 단어를 가장 좋아하는 하늘아름다움이란 곧 나다움”(p. 34)이라고 이야기한다. 한 아름이란 두 팔을 둥글게 모아서 만든 만큼의 크기이고, 어른과 아이의 팔 길이가 다르듯이 그 아름다움도 사람마다 다르다”(p. 34). 나다움을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할머니가 하늘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장면이다. 이야기를 들으며 하늘은 할머니와 함께 기억 속을 걷는다. 할머니의 어린 시절부터, 지음에 처음 왔을 때, 전당포를 열었을 때. 겪어 본 적 없는 그 시절의 할머니. 낯선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아이는 할머니를 알 것만 같아진다. 나다움처럼 할머니다움이 있다는 것. 그런 점에서 누가 언제 어떤 이유로 돈을 빌렸는지 적혀 있는 할머니의 장부는 지음에 대한 기억들”(p. 232)이자 지음다움 같은 게 아니었을까. 군데군데 흉터가 있는 이야기였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그에 대해선 어떤 말도 얹지 않는다. 그저 가만 듣기만 할 뿐이다. 아이가 영진 씨!”하고 부를 때마다 빙긋 웃던 할머니의 모습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할머니는 당부했다. 나에게 벌어진 일들을 알고 나서도 분노하지 않거나 스스로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되면 그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라고. 언젠가 정말로 그런 때가 되면 이 길에서 시작된 이야길 해봐야겠다. 그저 혼자 걷기 시작했을 때는 그 길이 끝날 때까지 계속 걸어가는 거라고 할머니가 그랬으니까. (p. 295)

 

후반부에 가서 견고하고 아름다운 랜드는 무너진다. 몰락과 붕괴를 통과하더라도 그럼에도 살아야겠다고 말하는 것. 우리의 시간을 연민하지 않는 것. 그 낙관과 유머가 지음을 향해 달리는 아이의 등을 따뜻하게 밀어준다. 고사리 화석에 대해 박수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오랜 시간 차갑고 단단하게 타오르는 불”(p. 279). 어떤 순간의 라도 헛된 것은 없다는 거. 아이의 다음 이야기가 기대될 만큼 재밌게 본 소설!

#카지노베이비 #강성봉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4_카지노베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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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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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랜드 #천선란작가님

고라니도 몰랐을 거다. 왜 하필 이곳에서 태어났는지. 그걸 알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것이 태어나는 존재들에게 가장 처음 내려지는 수수께끼다. 평생 답을 찾아 헤매지만 아무도 알지 못하고 죽겠지. (「이름 없는 몸」, p. 199)


‘이유 없이 살아가자는 말을 너무 길게 한 것 같다’. 작가의 말에서 본 문장이다. 이유 없이 산다는 건 어떻게 사는 걸까 생각하다가,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열 편의 소설들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어떤 상황에 처했든 계속해서 살아가고 사랑하려는 사람들을. ‘만약’으로 시작되었을 상상이 구체적인 서사와 다채로운 묘사로 더욱 생동해진 느낌이다. 만약 지구가 멸망한다면, 만약 우주생물체가 지구를 습격한다면, 만약 로봇이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면, 만약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면…. 이 만약이라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수수께끼를 안고 살아간다. 해답을 찾기도 하고, 또 다른 질문을 만들기도 하면서.


“강설 씨,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요? 두려운 시절은 이미 다 지나갔는데. 강설 씨가 두려워하는 건 뭐예요?”(「흰 밤과 푸른 달」, p. 52)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사랑이 발견되는 순간들이다. 흔적처럼, 자국처럼 마음의 모양이 일상에 군데군데 찍혀 있는 것을 목격하는 장면들. 지키기 위해 싸우기를 택한 명월과 똑똑해지기를 택한 강설이 그렇고, 죽은 형을 닮은 로봇에게 밤마다 먹을 것을 가져다주던 아이가 그렇다. 친구의 이마에 총구가 향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려 했다는 누군가의 독백이 떠올랐다. 멸망한 지구에 남은 사람들이 “계속 가라”고 보낸 마지막 교신 또한. 마음과 마음이 이어진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과 형태로. 이 삶은 과연 나만의 것이 맞을까 질문하게 된다. 이렇듯 사랑을 빚지며 이어가는 삶이 어떻게 나만의 것일 수 있을까.


이름을 잊게 해서 정체성을 흐리게 만드는 거야.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는 건 결국 내가 누군지 잊게 된다는 거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거야. 뭔지 모르는 것에게. 그럼 이름 없는 몸이 돼. (「이름 없는 몸」, p. 219)


이름과 관련된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름이란 ‘나’라는 표상이다. 이름에는 기억과 역사가 있어 내가 나임을 증명한다. 그래서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을 이름 대신 죄수 번호로 부르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유바바가 치히로의 이름을 가져간다. 24601이 되고 센(1000)이 된 두 사람은 수많은 노동자 중 하나가 된다. 언제든 잊히거나 대체될 수 있는 존재가.

이름이 없는 것이 내는 소리는 대체로 “없는 소리”이다. “환청이나, 웃음소리나, 소의 울음이나, 개 짖는 소리”(p. 195)처럼, 해석의 필요를 느끼지 못할 소리. 그러나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다. 문을 열어 살피는 사람이 있다. 바닥에 있는 괴물이 된 친구의 손에 명찰을 쥐여 주는 아이가 그렇고, 적이었던 우주인에게 이름을 붙여 주는 사람과 적이었던 인간에게 보라색 꽃을 건네는 우주인이 그러했다.


몇 번의 계절을 넘기고 내가 죽었던 그 계절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성불되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았고 대신 죽은 이의 이름을 외우고 다녔다. 나와 비슷하게 살았고, 비슷하게 죽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혹시나 나처럼 잊을까 봐. 그들은 멍하니 눈만 깜빡이다 내가 이름을 부르면 돌연 울음을 터트렸다. 차사가 삼창을 할 때까지 나는 그들을 꽉 끌어안고 괜찮다고 다독였다. (「-에게」, p. 265)


이름과 기억은 연결되어 있다. 이름을 떠올리면 그 사람의 말투와 습관이 기억나니까. 다친 이인에게 엘런이 말했다. 사라지는 걸 원하면 말하라고. 네가 바란다면 이 우주에서 완전히 소멸할 수 있다고. 이인은 벤을 떠올렸다. 죽음을 간절히 바란 나머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 벤. 그렇지만 완전한 소멸이란 게 과연 있을까. 내가 기억하는 한 당신은 계속해서 나의 곁으로, 나의 일상으로 호출될 텐데.


기억을 완벽하게 지우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도려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경계가 보이지 않았다. 완벽히 지우려면 자신의 삶을 도려내야 했다. 그것도 꼴에 삶이라고 억척스럽게 들러붙은 것이다. 그것도 삶이라고.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p. 413)


이름을 잊었던 영혼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 무사히 이승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지구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푸른 별이었기에 사람들은 지구와 작별할 수 있었고, 유라는 유진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규영의 죽음을 끝이 아닌 탈출로로 여길 수 있었다. ‘나’의 기억이 ‘타인’의 완전한 소멸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것이다. 기억이라는 것이 나와 너를, 그리고 삶을 중력처럼 붙든다. 떠나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떠나더라도 계속 감각할 수 있도록.


‘우주를 떠올릴 때마다 고요한 그곳에 홀로 시끄럽게 돌고 있는 지구가 좋았다.’는 작가의 말에 밑줄을 쳤다. 작가님이 오랫동안 우주와 사람과 삶에 대해 관찰을 해 왔다는 걸 느꼈다.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다. 추천!

노랜드, 천선란, 천선란작가님,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3기_노랜드,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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