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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터 - 사라지게 해드립니다 ㅣ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김중혁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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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이든 사람이든 상처가 있는 부분에는 기억이 매달려 있거든요.”(p. 227)
가제본과 함께 전단지와 명함, 의뢰서를 받았다. ‘당신이 사라지게 하고 싶은 물건을 이 세상에서 지워드립니다.’ 실제로 어딘가에 딜리팅 사무소가 있을 것만 같았다. 나였다면 무엇을 의뢰했을까 고민했다. 도로 빼앗는 게 아니라 사라지게 하는 일이란 게 중요했다. 대상이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어도 내가 그 흔적을 여전히 기억할 테니까. 대상을 없앨 수 있어도 이미 통과해 온 시간은 바꿀 수가 없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지우고 싶었던 건 사물이 아니라 기억일지도 모른다. 실수했던 기억, 사랑했던 기억, 미워했던 기억…. 누군가에게 더는 상기되거나 거론되거나 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시간을.
“사람들이 기억 속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내는 이야기는 언제나 신선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겪은 일이고, 오직 한 사람만 경험한 감정이고, 오직 한 사람만 이야기할 수 있다.”(p. 102)
책에서는 마술사가 등장한다. 딜리터와 픽토르. 딜리터는 무엇이든 사라지게 할 수 있었고, 픽토르는 딜리터가 사라지게 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고스트라이더인 강치우는 딜리터 능력으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딜리팅해 주는 대신 그들의 이야기로 소설을 써 왔다.
집중만 하면 사라지는 사물과는 다르게 사람을 딜리팅하기 위해서는 대상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으니 그에게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오랫동안 픽토르를 찾았다. 픽토르인 조이수에게는 딜리팅된 모든 것이 보인다는 걸 알았을 때, 딜리팅된 것들이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여분 레이어로 옮겨진 것뿐이란 걸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의 손으로 딜리팅했던 사람을 떠올렸다. 자신이 딜리팅했던 모든 것들이 여분 레이어에 남아 있다면 그곳으로 꼭 한번 가 보고 싶다고 그는 생각한다.
“딜리팅을 위해서는 대상자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야 해요. 모든 이야기를 알고,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정확하게 알고, 그 사람에게 완전히 감정이입한 다음에야 겨우 시작할 수 있는 작업이었죠.”(p. 128)
사물과 사람을 딜리팅할 수 있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지우기 위해, 누군가는 찾기 위해, 누군가는 지워지기 위해, 누군가는 발견하기 위해 움직인다. 서로 다른 목적으로 움직이는 인물들의 동선이 계속해서 겹치고 포개진다.
사람을 딜리팅하는 방법과 딜리팅된 사람을 찾는 방법이 똑같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딜리팅된 사람을 여분 레이어로 보낼 수 있고 현실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것이 오직 그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고 기억하는 딜리터뿐이란 게. 가족과 친구보다도 나를 알고자 했던 사람인 것이다. 자신을 지울 수 있는 딜리터에게 자기 이야기를 꺼냈던 사람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실을 벗어나 여분 레이어로 달아나고 싶었던 마음까지도.
”죽은 사람들의 세계를 계속 보고 있으면 평화로워 보일 때가 있어요. 거긴 모두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니까,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도 없으니까, 그런 게 좋아 보일 때가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속으면 안 돼요.“(p. 115)
이야기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 자체만은 ‘삭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다른 레이어로 보내어지고 달아나더라도 그 사람은 ‘제거’되거나 ‘삭제’되지 않는다. 현실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레이어라는 층위만 다를 뿐 여전히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 대목이었다.
여분 레이어로 간 사람에겐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그곳은 기억으로 존재하는 세상이다. 내가 이미 겪어 와서 결말을 알고 있는 세상. 그래서 실패나 상실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결말이 있다는 점에서 여분 레이어의 삶은 소설과 다를 게 없었다. ‘다음’이 없었으니까. 딜리팅된 사람들은 유령처럼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던 중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온 딜리터를 마주하게 된다면 어떨까. 소하윤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어쩌면 이 문장이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예전으로 가는 건, 이제 별로야. 그런데 나,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p. 279)
재밌게 본 소설이다. 대사 하나하나에 찰기가 있고 유머러스하다. 대사로만 짜인 부분을 쭉 따라 읽다 보면 인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럴 땐 꼭 희곡을 읽는 기분. 각 인물들의 구체적인 서사와 흥미로운 상상들이 돋보였던 소설이었다. 온점으로 끝나지 않은 결말도 인상 깊었다. 최고. 가제본을 읽을 땐 작가님을 결국 추리하지 못했는데, 김중혁 작가님이었다니. 저번 작품과는 다른 톤의 목소리였다. (사랑합니다. (냅다 고백…))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
“사람들이 인쇄 오류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지만, 출판사의 양자인 대표도 극구 반대했지만, 최근 소설<캥거루>의 마지막 문장에서, 강치우는 마침표를 빼버렸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열어두고 싶어서”(p.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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