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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숨
김혜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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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를 하고 명상을 할 때면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으니까. 인종, 성별, 이름, 언어를 벗어나 그저 나로서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있으니까.” (「아버지가 없는 나라」, p. 127)
책을 읽고 떠올린 단어는 '무해함'이었다. 나 자신이 타인에게 무해하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순간들. 또는 타인에게 무해하고 싶어 스스로에게 제동을 거는 순간들. 당신의 애인이나 가족, 당신의 일상에 관해 내가 "그렇게 사악하고 불온한 존재"(p. 53)가 아니라고, 수시로 스스로를 변호하는 여자들. 그런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 이번 김혜나 작가님의 『깊은숨』이라 생각했다.
각 소설의 화자들은 대체로 언어와 감정에 민감한 사람들이다. 세심하고 부드럽고 내밀하다. 이들의 이야기는 익숙한 공간을 떠나며 시작된다. 글을 쓰기 위해서,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 더는 요가를 할 수 없어서. 저마다의 이유를 안고 방콕으로, 인도로, 고향으로 건너간다. "인생에 실패한 사람들이 마치 조류에 떠밀리듯 들어와 버린 해안 도시. 나는 왠지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p. 79)란 문장이 인상적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피처 같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도리어 그곳에서 떠나왔던 문제를 다시금 직면하고 만다. 현실로부터 도피하였지만, 결국 마주하는 것이 '또 다른 현실'이었던 것이다.
"나 자신마저도 포기한 채 그저 견디는 삶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어디로 도망칠 수 있다는 말인가?"(pp. 250-251) 하는 독백이 떠올랐다. 이들은 왠지 모르게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과 상황들을 만난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커플과 태도가 모호한 남자들이 그랬고, 어릴적 헤어졌던 모니카에 대한 기억이 그랬다. 친부를 만난 입양아와 상대의 무례한 가족까지. 안팍으로 자신을 괴롭게 하는 일들 사이에서 인물들은 더 이상의 도피가 불가하다는 걸 알아차린다.
물이 보이고, 소리가 보이고, 호흡이 보였다. 숨을…… 쉬고 있는 나는…… 자연이구나. 자연과 나는 분리되어 있는 개별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흐르고 있구나. 모든 것이 나에게로 흘러들고, 나로부터 흘러가고 있구나. 물속의 소리가, 내 안의 소리가, 빛 속의 내가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면」, p. 94)
타인의 감정에 예민할수록 이들은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감각을 기울이려 해 본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임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p. 161)려 한다. 요가와 명상 장면들이 인상 깊은 이유이다. "우리가 얽매여 있는 온갖 기억과 감정"을 내 안에서 비우는 일. 비워 낸 자리에 또 다시 기억과 감정이 차오르겠지만, 그럼에도 묵묵히 "현상을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하는"(p. 162) 여정이다. 악순환 같다는 어느 화자의 말에도 공감이 갔다. 어떤 진실은 마주할수록 고통스러울 테니까. 그럼에도 이를 감내하려는 사람들을 볼 때면 마음을 보태고 싶다. 잘 통과해 나가기를 바라고 싶어진다.
단지, 어머니와 나라는 존재만이 서로를 마주할 뿐이었는데 말이야. 어머니의 눈을 들여다보고 나니까 나는 결국 누구의 아이도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어. 내 과거를 찾아야만, 내 친부모를 찾아야만 내가 완전해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단지 내 망상에 불과했어. 그래, ’나‘라는 존재는 어느 누구에게서 발생한 게 아니고, 어느 누구에게 속해 있지도 않았어. 나는 그저 존재할 뿐이지. 마치 그날 바라본 친어머니의 눈처럼, 그 속에 담긴 하나의 영혼처럼, 나도 그저 존재하고 있어. 내가 잃어버린 퍼즐 조각은 나의 친부도 친모도 아닌, 나 자신이었어. 내가 찾아야 할 존재는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진실.” (「아버지가 없는 나라」, pp. 138-139)
때문에 제목 '깊은 숨'의 의미가 인상 깊었다. 단전까지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 정적인 운동처럼 보이지만, 자기 자신에게 가장 격렬히 집중하는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깊은 내면을, 외면해 온 감정의 실체를 끊임없이 언급하고 떠올려 건져내 보이는 과정을 지나는 듯했다.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리고, 꽃이 피어나고, 열매가 맺고, 시냇물이 흐르고, 해가 저무는 순간과 같이"(p. 130) 통과할 수 있는 시간.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혼자가 아님을, 각자의 존재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는 작가님의 말도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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