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살아남기
줄리아 워츠 지음, 김보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새벽 3시. 뉴욕 브루클린의 24시간 빨래방.

파자마 차림으로 크래커를 씹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날은 내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에 지문이 있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내가 다녀와 본 곳, 가보지 못한 곳, 앞으로 가볼 곳. 첫인상으로, 그곳에서의 경험으로, 그곳의 사람들로 채워진 지문은 하나하나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내가 가진 뉴욕의 지문과 캐리 브래드쇼가 가진 뉴욕의 지문은 다르다. 같은 공간과 시간, 어느 특정 도시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더라도 도화지처럼 깔린 경험의 깊이가 다르기에 백 명이 백 개의 화두인 것처럼, 도시는 제각각 다른 의미를 지닌다. 




'뉴욕에서 살아남기'의 줄리아 워츠는 우중충한 생활을 청산하고 거지 같은 생활을 펼친다. 상상 속의 산뜻하고 매끄러운 샌프란시스코의 생활을 청산하고 스타일리쉬한 뉴욕으로 하는 이사. 현실의 악몽같은 부업, 빌털터리 생활, 마약 중독자 오빠를 두고 얼어 죽거나 쪄 죽고, 에어컨도 개판, 집세는 지붕을 뚫고 사라지는 뉴욕이라. 그녀는 뉴욕을 예찬하지도, 샌프란시스코를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도시를 비교하거나 정치관을 피력하거나 젊음의 패기를 자랑하는 것은 이 책의 특징이 아니다. 이 책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만화의 첫 페이지를 넘기기에 앞서 등장하는 작가의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위해 앉았을 때 나는 뉴욕을 좋아하는 이유와 싫어하는 이유를 두서없어 세 페이지나 늘어놓았다. 내가 쓴 글은 뉴욕의 매력을 묘사하려는 작가들이 흔히 저지르곤 하는 실수처럼 빤한 이야기와 화려한 미사여구로 가득했다. 뉴욕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웃음거리가 되기 쉬운 바보짓 같았다. 그래서 글은 접어두고 만화를 통해 이야기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분명히 뉴욕에는 '이상적인 젊은이가 대도시로 와서 어려운 일을 겪지만,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이야기'가 넘쳐난다. 안타깝지만 이 책의 내용도 거의 그렇다. 나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리는 작가라서 내 인생이 전개된느 그대로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 나만큼이나 이런 이야기에 신물 난 이들이 있다면 사과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의 어떤 부분에서는 독자들이 공감하리라 기대한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또한 고향을 떠나 쓰레기 같은 집을 비싸게 얻고, 취직했다가 해고당하길 반복하며 예기치 않은 백수가 되기도 햇던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20대 중반에는 나쁜 선택을 하거나, 그보다 더 나쁜 결과를 얻기도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도 첫해를 견딜 수 있는 팁이 한 가지 있다면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는 글 중에서.





  그리하여 이 그래픽 노블을 펼치면 가장 먼저 접하는 이미지. 바로 뉴욕 브루클린의 24시간 빨래방에서 새벽 세 시, 파자마 차림으로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맞는 줄리아 워츠의 모습이 한 페이지 가득하다. 이상과 현실의 갭이 가장 클 때, 그녀는 그 틈새로 도망칠 줄 아는 재주를 지닌 사람이다. 즐거운 일자리, 오크 마루와 커다란 창문의 집, 화목한 가족과 완벽한 남자친구가 아닌 구질구질한 서빙, 침실을 세주고 큰 벽장에 들어가 잠자야 하는 집, 마약 중독자 오빠와 장거리 연애 때문에 생기는 짜증이 나는 일들. 다른 누군가가 그 도시를 꿈꾸는 것과 같은 이유로 그는 그 도시를 떠나고 싶어한다. 장소를 바꾼다 하여 문제의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제를 이동하는 것에 따른 책임만 늘어날 뿐이다. 그러나 줄리아 워츠의 만화를 읽으면, 어쩌면 장소는 어떠한 문제의 근원이 아닌 문제의 조력자 역할을 해내기도 한다. 작가 자신이 겪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가 그 자체로서 어떤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단, 그 장소 안에 똑같은 작가가 몸담고 있어도 장소는 드러내지 않고 뒤에 숨어서 어떤 일은 하게 해주고, 어떤 일은 은근슬쩍 가려주기도 한다.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기도 하고 이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가능성을 슬쩍 내어놓기도 한다. 물론 무엇을 생각하든 상상 그 이상, 혹은 이하이다. 상상했던 것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장소는 세상에 없는 원더랜드 아닐까. 이 상상의 이상과 이하가 차례로 펼쳐지는 것이 줄리아 워츠의 만화.






 작가 자신이 2007년 챕터에서 비교한 바에 따르면, 맛있는 베이글과 피자, 맛없는 인도음식, 사계와 거미줄 같은 지하철, 언제나 중요한 일을 하며 바쁜 듯한 현지인, 그리고 덤으로 꼬질꼬질한 작가 자신이 있는 도시, 뉴욕으로. 그곳에서 얻은 첫 번째 집은 재앙이었고 두 번째 집은 거지 소굴이었다. 거지 소굴이라. 자학이라는 장치는 참으로 기괴한 멋을 지녀서, 자기 자신이 먼저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으면 그 기회를 놓친 타인에게는 이해와 공감이라는 감정만이 남는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이런 거지 소굴에 왜 왔나' 하며 이리저리 뒤척인다. 마침내 밤을 새우고 아예 비상계단으로 나가 뉴욕의 일출을 보며 하는 생각. '샌프란시스코가 그리워.' 아, 만약 작가가 청년다운 패기를 내세우며 멜팅 팟이 어쩌고 했다면 화가 날 뻔 했다. 그는 스스로 '부끄럽지만, 이 만화는 그렇게 기발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이 솔직한 감정이 더 기발해 보인다. 모두가 정성껏 치장한 무도회장에서 폴리냐크 부인의 수수한 모습을 본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음이 이러했으리라. 스스로가 집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 작은 일에 화내다가 신문 정치면을 보고 스스로 얼간이라고 자책하는 광경. 





 그래서 그는 저녁 7시에 벌써 잠을 자느냐는 말에 '실패만 하는 인생인 너무 피곤해서'라고 답하며 술을 마시거나 영화를 보거나, 일자리를 구한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뉴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상을 사는 것이다. 특별한 일 없이 꾸려가도 종종 하루하루가 매달 서른 하나, 혹은 서른 개의 다른 얼굴로 보일 때. 죄책감이나 기다림으로 일상의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다가도 기다리던 전화 한 통에 '정말 다행이에요! 윽, 배고파.'라는 말이 나올 때. 그의 만화는 때때로 우습거나 불경스럽다. 비행기를 타기 전 소지품 검사를 너무 꼼꼼히 하는 직원, 엄마의 급작스러운 방문에 앞서 집안에서 엄마가 보아선 안 될만한 소지품을 죄다 침대 밑에 밀어 넣지 못했을 때의 그녀는 난처한 미소를 띠고 있다. 클린턴이 성적인 관계를 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텔레비전 앞에서 그녀는 '에이, 했네'라고 말하고 산타클로스 퍼즐이 정치와 같다는 점을 이야기할 때의 그녀는 정치적으로 열성적이지는 않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안다는 점에서 온건한 자의식을 보인다. 다른 사람의 우울증에는 효과적으로 반응하면서도 자신의 우울증에는 놀랄 만큼 형편없이 대처하는 모습을 통해서는 다른 이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묘한 위로를 보여준다. 몰라서 안하는 게 아니랍니다. 뱃살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이런 말이 주는 자학의 딜레마, 굳이 하려고 하지도 않고 건네는 작은 일상의 동질감.






 밤 아홉 시의 이웃집 음악 소리에 짜증을 내고, 텔레비전 재방송, 라디오 들으며 그림 그리기, 와인 한 병과 함께 일찌감치 침대에서 팝콘을 먹으며 책 읽기. 해고된 다음 드는 차라리 후련한 감정. 이따금 탈출해서 가장 퀴퀴하고 냄새나는 곳에서 놀고 있는 그의 뇌, 몇 번이고 탈출을 시도했다가 번번이 돌아오는 오래된 지갑. 그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닌 장소를 각인시키는 각각의 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뀌거나 이어지는 배경과 풍경, 장소가 사람에게 말을 걸기까지는 걸리는 시간. 곧, 지문이 인식되기까지의 시간. 그 시간을 채우는 느낌과 생각. 중요한 것은 흐르지 않는다. 어떤 것은 쌓여서 역사를 만든다. 그는 2009년에는 전업 만화가가 되어 웨이트리스의 앞치마를 더 이상 입지 않게 되었다. 가족은 다른 방향으로 회복되고 있으며 술을 끊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어른이 될 준비가 거의 다 되었다. 물론, 어질러진 방의 소파에 앉아 피자를 먹으며 만화책을 읽는 모습으로. 어떤 사람들은 변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더욱 재미있게 변한다. 내 생각으로는 줄리아 워츠는 후자 쪽이다. 







 때로 잘못된 걸 찾았을지도 모르지만 괜찮아. 더 많은 것들이 변하는 것 처럼 보여. 

 하지만 다 같은 곳에 있을거야. 망설이지 마. 좋아하는 곡을 틀어. 뭘 좋아하는지 말해줄래? 

 계속 해. 머리카락은 그대로 늘어뜨려도 돼. ... 곱슬머리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해. 

 가끔은 두려워할 수도 있지만 괜찮아. ... 




 이미 해봐도 가질 수 조차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네가 원하는 걸 해. 

 너는 어디선가 너 자신을 찾겠지. 어디선가, 어떻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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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9 14: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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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30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30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2 05: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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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 왕실의 운명을 건 최후의 도박, 바렌 도주 사건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이봄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혁명의 노도에 위기감을 느낀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1년, 스웨덴 귀족 페르센의 도움을 받아 변장을 한 채로 튈르리 궁전의 삼엄함 경비를 뚫고 도망쳤지만 목적지까지 거의 다 가서는 벽촌 바렌에서 발각되어 굴욕적으로 체포되었고, 증오 속에 파리로 호송되는 최악의 결말을 맞았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바렌 도주 사건'이다.




  너무나도 드라마틱해서 수많은 변주를 낳는 어떤 일. 그 수많은 변주가 각각 다른 호흡으로 말하는 하나의 정황. 그 모든 것이 '기록'을 바탕으로 할 때 나는 그 중심에  역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카노 교코의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마리 앙투아네트 평전의  레이스와도 같이 느껴진다. 사실에 근거했으며 틀림이 없다. 고증을 바탕으로 한 저자의 상상력이 글을 풍성하게 부풀린다. 이 부드럽고 드라마틱하며 위엄있고 우아하지만 숨 가쁜 사건을 어떻게 읽어야 했을까. 나카노 교코의 시선은 명확하다. 소설보다 더 꿈같고 역사보다 더 진짜 같은 필치의 츠바이크를 번역했던 저자는 바렌 도주 사건에 집중한다. 번역자의 각주이자 링크인 셈이다. 




 이 각주는 물론 실체를 전제한다. 그 실체는 곧 평전임을 생각해 보면, 독자는 평전의 특성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평전, 그것은 죽은 사람을 다루는 장르이다. 당연히 대상과 직접 대화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는 곧 평전을 쓸 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료, 자료, 자료, 또 자료라는 점을 알려준다. 죽은 이 앞에서 그를 볼 수 없는 산 자들은 알 수 없다. 대상을 볼 수 없기에 흔적을 뒤쫓는 작업 도중 만나는 것은 쓰는 자의 해석이다. 실제 얼마나 많은 죽은 자들을 산 자들은 땅에 묻었다 꺼냈다 분탕질을 했다가 다시 피라미드까지 세우는 작업을 해왔던가? 잔 다르크는 흔적도 없이 죽었다가 성녀가 되었는가 하면 다시 희대의 정신분열자가 되었다가 성모 마리아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정신이 외출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살아있는 자들이 자신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해 일어나는 희비극일 뿐.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그렇다. 살아생전 평가는 둘째치고, 시체조차 어딘가 유기되었다가 지금 파리 생 드니 대성당에 가면 루이 18세 당시 만든 조형물이 있다. 왜곡과 굴절로 얼룩진 시간의 프리즘이다.




 그 순간 그 프리즘을 통과하는 드라마. 나카노 교코는 바렌 도주 사건 당시 24시간을 종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인물을 횡으로 꿰뚫는 시도를 한다. 간결하고 명료하면서도 따뜻하다. 감상적이지 않으면서도 감성적이다. 현재를 잊지 않으면서도 과거를 쉽게 설명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나카노 교코의 자료를 챙기는 세심함, 인물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는 섬세함이다. 펜을 잡은 손에 성격이 있다면, 픽션을 쓰는 손과 논픽션을 쓰는 손은 정반대의 성격을 지녔다. 더 냉정하고 차가운 쪽은 픽션이다. 주제와 무관한 것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버린다. 논픽션은 다르다. 주제와 무관해도 취재한 것을 차마 버릴 수 없다. 그 많은 기록 앞에서, 버릴 것과 취할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기준 삼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 나카노 교코는 아마 대상의 성격을 가장 잘 규정할 수 있는 정신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실제 이 책에서 나카노 교코가 말하는 정신성은 일화를 통해 입체적으로 독자 앞에 드러난다.



 

 +가구도 없는 텅 빈 방들, 지저분한 벽, 깨진 창, 뒤틀려 잘 닫히지 않는 문, 들끓는 쥐, 그리고 마음대로 들어와 사는 빈민들...... 1789년 10월, 혁명의 불길에 휘말려 베르사유 궁전에서 강제 연행되어 온 왕가의 새 거천느 이처럼 황폐하기 짝이 없었다. 날 때부터 사치스럽게만 살아온 왕태자 루이 샤를은 앙투아네트를 올려다보며 "어머니, 여기는 꽤나 지저분하네요." 라고 정직한 감상을 말했다. 왕비의 대답은 훌륭했다. "여기는 루이 14세께서 편안하게 지내신 곳이에요.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바라서는 안됩니다."



 +불행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앙투아네트의 편지)


+앙투아네트는 베일을 걷어올려 홍조로 물든 뺨을 드러내며 슈아죌에게 맨 먼저 "페르센은 무사할까요?"라고 물었다. 



 이 모든 장면은 기록을 근거로 한다. 추측은 신문기사의 접속사와 같다. 쓰는 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읽는 이는 그 보이지 않는 흔적을 들이쉰다. 사실과 사실을 연결하면 실제 그 상황에 우연히 있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옷자락이 보인다. 옷자락은 살짝 바닥을 한 번 쓸고 지나갈 때도 있고 무겁게 질질 끌릴 때도 있다. 바닥에 닿을락 말락 움직이기도 하고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 때도 있다. 무엇보다도 나카노 교코의 글을 지탱하는 것은 생명력이다. 옷자락 자체에는 생명이 없되 움직이는 그 그림자를 보노라면 상황이 소설처럼 펼쳐진다. 곧,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 있었던 사건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은 인용과 기록의 출처가 아닌 현재와의 극명한 대비이다. 감상은 쉽다. 우수는 미적지근하다. 동정은 질척거린다. 왜곡은 끈적인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시선을 거두지 않되 과거의 호흡을 막아버리지 않는 것. 




 어떠한 사건이든 그 인물이 처한 상황에서 바라보려는 시선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이해'라고 부른다. '순수의 시대'에서 뉴랜드 아처와 올랜스카가 무도회에서 서로 바라만 보고 있었던 순간에 그들은 소심해서라든지 덜 사랑해서가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손을 내미는 그 순간의 파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에서 베르터가 로테와 사랑에 빠진 것은 그저 로테의 미모나 재력 때문이 아니었다. 괴테가 그 작품을 쓸 당시 '사랑'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위대한 정신작용이었기 때문에 베르터의 권총자살을 로맨틱한 사랑의 실패라고 말한다면 이는 작품의 심각한 오독이다. '이성과 감성'에서 굳이 남자에게 '나를 택할 것이 아니라 결혼을 약속한 여자에게 돌아가 충직함을 완성하세요'라고 말하는 여인은 그를 떠보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랑이라는 개념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이다. 즉, '약속을 지키는 것' , 그것을 이행함에 있어 예를 완성하는 신의성실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무척 친절한 책이다.




+게다가 또다른 문제. 어떻게든 가져가고 싶은 짐-왕과 왕비의 위엄을 보여주는 호화로운 의복-이 부피가 크고 무거워서 이륜마차에는 실을 수 없었다. ... 겨우 옷 때문이라니,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인가......

 그렇게 비웃는 것은 현대인의 감각일 뿐이다. 당시는 입고 있는 것이 그 인간의 신분, 지위, 재산의 증표였던 시대였다. 차림새에 대한 집착은 곧 자긍심에 대한 집착이다. 당시의 엄격한 계급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에게, 설령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국면일지라도, 자신의 신분에 걸맞게 입지 못하고 공적인 장소에 나선다는 것은 더할나위 없는 수치였다.



+왕은 페르센 백작을 질투하고 있었다...... 맨 처음 떠오른 생각이 그것이었다. 궁정의 법도에서는 부부가 저마다 애인을 갖고, 결코 질투를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결혼은 가계를 잇고 번영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그런 정략으로 엮인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가소로운 노릇이고, 진정한 사랑은 결혼 뒤에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들은 모든 걸 왕비의 탓으로 돌렸다. 국고가 텅 비게 된 것은 사치스러운 왕비의 탓, 궁정의 풍기가 문란한 것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상대한다는 색정광인 왕비 탓, 국제관계가 악화된 것도 모국 오스트리아를 편드는 왕비의 탓이었다. 후사가 좀처럼 태어나지 않는 것은 물론 왕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까지, 왕비가 좋지 못한 의견을 불어넣어 왕을 어지럽히기 때문이었다. 왕비는 무죄라고 증명된 '목걸이 사건'도 실은 보석광인 왕비가 꾸민 일로, 실물은 아직 그녀가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모든 재액은 전부, 그 '머리 빈' '오스트리아 암캐' 앙투아네트에게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어여쁜 황태자비, 자애로운 프랑스의 어머니, 색정광, 암캐, 동성애자, 적자 부인.

 이 다채로운 호칭의 그 옆에는 우유부단하고 때와 장소를 제대로 파악 못 하고 모든 것에 지친 루이 16세가 있었다. 실제 이 결정적인 24시간 동안 그는 부지런히 시간을 기록한다. 지체해서는 안되는 때 느긋해 한다.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순간, 마차에서 내려 농부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절대 신분을 들켜서는 안되는 때에 '내가 바로 프랑스의 국왕이다.'라고 외친다. 성격이 운명을 좌우한다지만 실제 저자가 들여다본 이 24시간, 그리고 이 24시간이 관통하는 프랑스 혁명의 지축을 앞당긴 것은 성격과 더불어 그 누구도 미리 알 수 없는 '운'이었다. 바렌 사건은 잘못된 인물, 어긋난 사건, 놓쳐버린 배경이 만든 눈의 결정과도 같다. 교코가 재현하는 이 24시간 내도록 루이 16세는 전진해야 할 때 주저한다. 후회해야 할 때 낙심한다. 인내해야 할 때 초조해 한다. 무엇보다도 도망칠 거라면, 도망치는 것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저자의 평이 무색하도록 바렌 도주 사건 실패는 과거와 함께 결정체로 남았다. 그런데 그 결정체가 땅에 떨어지기 직전 그 어떤 사랑 한 조각.




 '나의 목숨과도 같은 사람이었던 그녀는 이제 없다. 신이시여. 왜 저를 이렇게 벌하십니까......왜 나는 그녀의 곁에서 죽지 못했던 것인가. 6월 20일 그날에 그녀를 위해 죽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영원히 가책을 느끼면서 생이 끝날 때까지 고통을 끌어안고 가는 것보다 훨씬 행복했을 것이다.'



 그가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서와같이, 페르센은 실제 '천 번이라도 목숨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현재 화폐가치로 한화 1200억 원에 이르는 자금을 조달하고 왕족 여섯 명을 모든 감시를 따돌리고 피신시킨다.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 , 그러나 '친정과 손잡고 프랑스를 팔아넘기려는 오스트리아 암캐'라고 불리는 사람을 위해. 바렌 도주사건 실패 다섯 달 뒤, '하지만 만나러 가겠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내고 지명수배를 뚫고 튈르리 궁까지 마리 앙투아네트를 몰래 만나러 온다. 물론 그 뒤에도 '나는 오직 당신을 섬기기 위해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탈출 계획을 꾸민다. 이쯤 되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로맨스가 있고, 서스펜스가 전반을 지배한다. 도도하고 극적인 성격이 차츰 우아함을 되찾는다. 




 문제는 이 모든 여정이 '있음 직한 이야기'가 아닌 프랑스 대혁명을 향해 가는 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시대에 부합하는가, 부합하지 않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저자는 에필로그를 통해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도 고려했던 루이 16세와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은 타고난 계급주의자였음을 지적한다. 인류가 평등하다는 사상은 가당치 않으며, 신민은 국왕의 절대권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음을 말하며 저자는 다시 한 번, 친절하게 덧붙인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이를 비난해봐야 소용없다. 사람은 자신이 놓인 입장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인권사상이 확산되는 흐름 속에서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것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필연적으로 1789년 바스티유 함락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왜 하필 바렌 사건을 이렇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야 했을까? 이 종과 횡의 호흡을 읽으면 혁명의 추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서민은 바스티유 이후에도 힘들게 살았다. 베르사유는 그대로였다. 실제 바스티유 함락은 1789년, 바렌 사건은 1791년, 마리 앙투아네트 처형은 1793년이었다. 시간이 서서히 움직이는 동안 1791년, 여섯 명의 왕족이 탄 베를린 마차는 긴 여정 동안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고 빠져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어긋났고 도망은 포기 혹은 성공이 아닌 실패에 그쳤다. 종종 나는 이 도주가 성공했더라면, 혹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면, 하고 생각해 본다. 아주 작은 나사 하나가 빠져도 축이 흔들리는 거대한 모형 앞에 선 듯. 그러나 이 모형은 너무나도 굳건하여 가정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여인의 숨결 같은 로코코가 아름다워도 그 아름다움은 강철의 틀 속에서만 하늘거릴 뿐. 결정적인 드라마, 정확한 사료, 섬세한 상상, 인물에의 애정, 균형잡힌 관점. 나카노 교코의 재현은 한 인간이 스스로 행동을 통해 성격을 드러내게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정치적으로도 바람직하다.






 바이용은 국민의회의 의결서를 루이에게 건넸다. 사실상의 체포장이었다. '누구든지 국왕의 이동을 저지하고 필요한 조치를 강구할 것, 그리고 왕은 의회의 결정에 따를 것' 이라고 명기되어 있었다. 

 "그럼, 프랑스에는 더이상 국왕이 없는 것이군."

 루이는 그렇게 말하고 의결서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앙투아네트가 즉각 그걸 집어 마룻바닥에 던지면서 분노를 터뜨렸다. "이런 종이 쪼가리로 우리를 모욕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요!" 왕보다 훨씬 왕다운 태도라고 할 수 있었다. 홍조로 물들어 아름다운 그 얼굴에 바이용까지 압도당해 뭐라 대꾸하지도 못하고 멍하니 왕비를 바라보았다.

 긴 침묵 끝에 슈아죌이 종이를 주워 다시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입구에는 어느새 소스와 드루에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앙투아네트와 엘리자베트 둘 다 베일을 내려 얼굴을 가렸다.




+모든 인용은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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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만인을 위한 철학 - 커피 홀릭 철학자와 커피 전문가 21인이 커피와 철학을 논하다
스콧 F. 파커 외 엮음, 김병순 옮김 / 따비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자동판매기 식당, 에드워드 호퍼. 캔버스에 오일.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한 잔을 따르세요.

 

 이제 진한 주황색 커피 같은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니까요. ... 커피는 보통 사람들에게 황금같이 귀중한 존재죠. 마치 황금처럼 모든 이에게 호사와 고결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고마워요, 후안 발데스. 

 -밥 딜런, <테마가 있는 라디오 시간 Theme Time Radio Hour>.

  '커피'. 방송 시작 멘트.

 



 마분지 슬리브를 끼운 종이컵. 라테, 카푸치노, 아메리카노, 치노 종류의 카페인. 코너마다 늘어나는 커피 프랜차이즈, 독립 매장. 백 가지 커피, 백 가지 이야기. 하지만 다른 것은 없을까. 어떤 것일 수도, 그 무엇도 아닐 수도. 소중했을 수도, 그저 그런 하루의 순간이었을 수도. 아침을 시작하는 누군가의 일상이었을 수도, 전투에 들어가기 위한 군장의 일부였을 수도 있었을 커피.

 

 

 



 커피에 관한 책이 나왔다. 철학, 이데올로기, 이야깃거리가 되는 테제와 안티테제, 공간과 비공간, 녹색무역과 소비, 장소와 고독, 역사와 이야기를 엮은 이 책을 읽노라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패션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는 신입 앤디에게 미란다가 '세룰리안 블루'에 관해 천천히 말하며 조소하는 장면이 겹친다. 너의 그 허접스러운 아웃핏을 완성하기 위해 오스카 드 라 렌타가 처음 그 세룰리안 블루를 등장시켰을 때 패션업계는 환호했었지. 혹은, 영화 속에서 편집자 나이젤이 '너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롱 아일랜드에서 바느질 수업 대신 축구 클라스에 억지로 들어가야 했던 어린 소년에게 이런 잡지는 빛나는 이정표였어. 라고 말하던 대목. 패션이든 커피든, 어떤 대상을 좋아하기 위해서는 이해가 우선이다. 읽고 난 다음 좋고 싫음을 가리는 정도의 예의는 필요하지 않을까. 최소한 '전 어떤 무엇을 볼 때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 그래서 아예 읽지(보거나 듣거나 먹거나) 않아요.'라는 말이 얼마나 무례한 말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경험해보지 않은 것은 포기할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엮음이 울퉁불퉁하여 그 불협화음이 오히려 협화음을 만들어낸다. 깊게 파려는 욕심 대신 넓게 나아가려는 욕망을 택했다. 다양한 화제가 커피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곡선을 그린다. 묵직하고 가볍다. 때로는 그 애정 탓에 약간의 억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생각해 보자. 커피가 없었다면 발자크의 소설이 없었을까. 커피가 없었다 하여도 철학은 존재했을 것이고 토론의 장은 다른 형태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첫 번째 장, 커피와 형이상학의 각각의 글을 읽노라면 커피가 무엇인가를 오히려 거칠게나마 생각해 볼 수 있다. 커피의 수요가 이렇게 늘어나기 전, 혹은 사람들이 커피를 이렇게 많이 마시기 전에도 잠에서 깨기 위해, 혹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다른 이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커피 비슷한 무언가는 있었다. 요컨대 어떤 필요로 이미 커피의 본질은 세상에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는 말이 오히려 틀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것을 사람의 본질이라고 치환해 본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먹고 마시고 떠드는 어떤 사람이 있기도 전에 이미 그 사람의 본질은 존재해 왔었다. 어쩔 수 없게 정해진 운명. 첫째, 혹은 둘째로 태어나는 운명. 프랑스나 가나에 태어날 운명.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마시기도 전에 알 수 있을 때 더욱 또렷해지는 그 굴레를 우리는 무엇이라 해야 할까.

 

 

 

 

 이것은 한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기대. 운명하는 기대가 아닌 운명된 기대를 둘러싼 욕망과 갈등.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타인이 요구하는 본질. 이에 반대해서 스스로 회복해 나가는 실존에의 과정. 역설적으로 1장에서 다섯 명의 저자가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것은 커피를 통해 떠올리는 실존과 본질의 가치이다. 커피는 매개이기도 하고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인은 형이상학이어야 했다.

 

 




 1장의 책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커피는 커피이고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이다. 그것이 아무리 어떤 의미를 가진다 해도 커피가 다른 이름일 수는 없다. 단, 중독성이 다른 중독성 물질(발륨, 코카인, 헤로인 등) 낮으면서도 이렇게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음료 자체의 신비로움, 혹은 그 음료에 바치는 애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 책이 1장으로 끝나지 않고 2, 3, 4장으로 엮인 것이 당연하다.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2, 3장을 읽노라면 각기 다른 아홉 명의 저자는 굳이 엮은이로부터 '애정을 담아서 부드럽게'라는 요구를 받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깊이 바라보고 찬찬히 관찰하고 천천히 마시는 가운데 이들이 커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가 보인다. 개인이 사적인 경험, 떠오르는 경험. 그것이 옳은 일인지, 겉치레와 허세 가득한 일은 아니었을지 뒤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1장보다 억지가 덜하다. 예의를 갖추어서 다른 가치를 허용하는 조용한 글쓰기가 아래와 같은 생각으로 조용히 빛난다.


 


 


 따분한 근무일을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커피는 짧은 휴식과 각성을 제공한다. 돈을 벌어 무엇에 쓸까? 중산 계급의 빠듯한 수입으로 실컷 살 만한 것이라고는 5달러짜리 커피밖에 없다. 단조로운 일터와 고립된 가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갈 곳은 어딜까? 유감스럽게도 미국에서 공공의 공간은 소비 공간이다. 커피숍은 돈을 많이 쓰지 않고도 외출할 기회를 제공한다. 시간에 쫓기며 통근하는 직장인의 삶에 무슨 낙이 있을까? 비록 차 안에서라도 커피 마실 시간은 있다. 캐러멜 시럽을 탄 커피는 몇푼 안 되는 돈으로 누릴 수 있는 향락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즐거움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다. -Brook. J. Sadler.

 


 


 빠듯한 업무 시간, 혹은 해야 할 과제. 또는 깊이 숙고해야 할 어떤 일. 계속 나아가야 하는 어떤 과정 중에서 시간을 남겨두기. 커피가 많은 사람에게 하는 가장 흔한 일은 이런 것일 것이다. 위의 저자가 말하는 커피 일상에 있어서 문화적 공간을 벗어나 다른 방향에서 다른 곳을 본다 하더라도 많은 각색이 필요하지는 않다. 즉, '커피를 마시는 것에 내재한 현실은 우리의 삶에 냉정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 

 우리가 하는 많은 일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하나씩 줄여나가는 일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집과 우산을 구한다. 언젠가 걸릴지 모르는 암을 준비하기 위해 보험에 가입한다. 혼란스러움, 필사적인 발버둥. 불안함, 소비. 긴박감, 서두름. 이러한 커플링의 한가운데 종종 커피가 있다. 커피는 겹쳐져 정신없는 서류 몇 장 위에,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걷는 구두 굽과 함께, 공사장의 먼지를 배경으로, 혹은 활자와 숫자, 말소리와 함께 있다. 별도의 형식과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음료는 기대와 충족이 만나는 점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배경으로 존재하는 공간은 어떨까. 나는 그것이 스페셜티 커피이든, 스타벅스의 커피이든 대부분의 카페가 공항과도 같은 일종의 비장소non-place를 연출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카페 첸트랄, 카페 드 플로르 내지는 데멜 같은 이야기가 있는 몇몇 카페가 있다. 그러나 평소 사람들이 자주 가는 카페는 묘하게 단절된 에어 커튼을 치는 느낌이 든다. 종종 말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카페는 여전히 비장소이다. 분명히 사람들은 함께 있지만, 같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카페에 혼자 갈 때 나는 누구도 내 공간에 들일 생각이 없다. Will Buckingham이 아래에서 말하는 종류의 고독이 피어나는 공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숍의 고독은 묘한 종류의 고독이다. 나는 파스칼이 자기 방에 홀로 있었을 방식으로 홀로 있지는 못한다. 그것은 타자와 함께하는 고독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타자와 함께하는 특별한 종류의 고독이다.  (중략) ... 그것은 타자를 배제하는 고독이 아니다. 사람들은 카페에 앉아서 글을 읽거나 커피를 마실 때, 역시 고독하게 커피를 마시는 다른 사람들과 일종의 동지애를 느낀다. 이것은 레비나스가 두려워할 법한 비 사회, 곧 연대 없는 사회가 아니다. 우리처럼 월요일 오후에 게으름을 피우며 숨는 사람들 사이에는 일종의 예의가 있다. 우리는 서로의 고독을 존중한다. 우리는 마치 저마다 타자의 고독을 보호해주는 사람인 양 서로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우리는 자기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으며 함께 있는 것이다. -Will Buckingham



 



 공기가 사라진 대기. 배경이 멈춘 공간. 그 사이를 채우는 커피.

 음료치고는 꽤 훌륭한 매개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의미를 두고 싶어한다. 종종 부러 어떤 느낌을 간직하기도 한다.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월요일 오후 조용한 카페를  Will Buckingham은 조용한 배려가 있는 공간으로 읽는다. 그러나 그는 지나친 도약을 피하려는 듯, '카페가 일시적인 휴식의 장소라는 것 또한 명백하다'고 말한다. 즉,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영원함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커피 브레이크는 브레이크일 뿐이다. 

 반증에 반증을 거듭하여 이 책을 중간 즈음 읽어가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복잡하고 어려우며, 요구에 응하는 일은 성가시고 무언가를 훌륭히 해내기는 더욱 어렵다. 다른 이에 대한 책임감, 나에 대한 중압감, 눈을 떠서 잠들기 전까지 닿지 않는 바닥에 닿으려 허우적거리는 와중 커피는 종종 괜찮은 친구가 되어준다. 그곳이 스타벅스이든 블루보틀이든,  길모퉁이 카페이든 간에 커피가 있는 곳은 스톱 버튼은 아니더라도 일시 정지 버튼 정도는 될 수 있다는 것.

 

 

 

 



 커피와 공간에 대한 생각이 2장을 채웠다면 3장과 4장은 녹색 커피, 직접 무역과 커피를 만드는 사람들의 고민을 담았다. 저자가 다르기에 그 굴곡이 마치 비포장도로를 랜드로버로 운전하는 기분이다. 공정 무역을 통해 커피 농민의 삶을 개선해왔다는 한 저자의 글을 읽고 나면 실제로 커피 농민의 삶이 달라진 것은 여전히 거의 없다는 목소리가 있다. 다 읽은 다음 엮은 이 두 사람의 에필로그에는 흥분과 과장이 있다. 시작과 끝이 다른 커피 볶는 공간에 들어선 느낌의 책. 그 책을 따라가는 독자의 호흡도 종종 울퉁불퉁, 비뚤비뚤해짐이 당연하다. 어쩔 수 없다. 모든 읽기는 글쓴이의 호흡을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 리뷰가 원문을 이길 수 없다는 변명으로 끝을 맺기에는 뭔가 좀 허전하다. 마치 아래 영화에 나오는 두 명의 케이트 블란쳇을 본 느낌이랄까.


 

 

 



 앞서 보았던 레비나스의 그 구절을 다시 읽는다. "여기서 당신은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게 될 때까지 완벽하게 긴장을 푼다. 사람들이 영혼 없는 세상의 공포와 불의를 견뎌내는 것은, 카페에 가서 모든 일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내는 다양한 뜻이 담긴 개념이다. 한편으로, 우리가 공포와 불의를 용인하지 않으며, 우리의 대응 능력과 의지를 유지하는 것-우리가 할 수 있는 처지에 있고, 능력이 있으며, 우리의 행동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을 때-은 좋은 일이다.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끔찍한 짓과 사건을 접하더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세상 속에서 사는 방식을 배우는 것 또한 좋은 일이다. 또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이 세상을 견뎌낸느 법뿐 안라 올바르게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좋은 일이다. 견뎌낼 수 없는 것과 마주칠 때 가장 좋은 대응책은 힘겨운 의무감이 아니라 일종의 발명, 곧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하는 것이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생각과 발명, 창조성이 꽃피는 열린 공간도 없다면, 세상에 어떤 희망이 남을 수 있겠는가.-Will Buckingham



 



-글 속 모든 인용은 '커피, 만인을 위한 철학' 발췌.

-영화는 짐 자무쉬 감독, 커피와 담배 중의 한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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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5-03-04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읍~ 왜이리 오랫만에 오셨어요~~~

커피로 이렇게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사유할수 있군요...

이책을 읽지 않았지만,
감히 리부가 책보다 나을것이라고 믿쓤니닷*^^*

Jeanne_Hebuterne 2015-03-05 09:38   좋아요 0 | URL
아무개님
2월엔 이런 저런 일들로 산만하고 분주했지 뭡니까. 그러면서 마음이 무엇인가 의아했어요. 그게 무엇이길래 어제와 오늘이 같은데 나만 이렇게 들떴다가 가라앉았다가, 어제는 잘 읽던 책을 오늘은 한 페이지를 단숨에 못 읽고 이리 딴생각을 하게 하는걸까.
이 책은 여러 사람이 각자 커피에 관련된 생각을 쓴 글모음집이어서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제가 읽기에 시기적절했습니다. 칭찬은 잘 읽으셨다는 인사로 들을게요.
대형황사가 곧 들이닥친다는데 3월도 건강하게 보내시기를 바라요 :)

VANITAS 2015-03-04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참 좋아합니다.^^

Jeanne_Hebuterne 2015-03-05 09:41   좋아요 0 | URL
VANITAS님!

이 책은 사실 저자에 따라 호오가 심하게 나뉘었던 책이었어요. 아무리 커피가 그리 대단한 물질일지언정, 커피가 없었다 해서 형이상학이 없었을거라는 생각은 좀 과장이 아닐까 싶기도 했고, 그 애정의 강도가 커피를 좋아하는 저로서도 좀 갸웃하게 되기도 했거든요. 그치만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읽기에는 꽤 괜찮은 책 같았습니다.
요즈음에는 커피, 공항, 요리, 이런 식의 눈에 보이고 제가 인상적으로 접했던 소재가 참 재미있어요 :)

2015-03-05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06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코이 2015-05-07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 향이 물씬 풍겨지는 리뷰 덕분에 어떤 책일지 좀 더 궁금해졌습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Jeanne_Hebuterne 2015-05-14 07:48   좋아요 0 | URL
요코이님, 커피를 마시며 썼어요. 정말로요. 좋아하는 것에 대해 요즘은 조금씩 읽거나 보는 중인데 의외로 제가 이 두 가지를 하지도 않으면서 좋아한다는 생각만 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가까이서 계속 바라보니 그 전과는 다른 것이 보이더라구요.
요코이 님 댓글을 보고 나니 또 커피 생각이 떠올라요! 고맙습니다 :)
 
인문학, 공항을 읽다 - 떠남의 공간에 대한 특별한 시선
크리스토퍼 샤버그 지음, 이경남 옮김 / 책읽는귀족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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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려면 나와 함께 비행기를 타야 한다. 일단 앉으시라. 내 좌석은 통로 쪽이고 당신은 창가 쪽이다. 갇힌 셈이지. 당신은 페이퍼백을 펼친다. 지난봄에 히트를 친 법정 스릴러다. 혼자 있겠다는 뜻이로군.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사실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지. 멋진 남자 승무원이 음료수를 가져온다. 내게는 얼음 조각을 하나 넣은 2퍼센트 저지방 우유를 주고 당신에게는 와일드터키를 준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활주로는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어두워진다.

-업 인 디 에어, 월터 컨.


 


 


  다른 날. 밝았던 낮이 사라진 캄캄한 어둠, 그러나 눈앞의 무언가를 볼 수는 있을 정도로 일부러 꾸민 어둠 속에서 인체공학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의자에 비스듬하게 앉아 목을 쭉 펴고 사방을 본다. 통로 건너편 11시 방향의 남자의 모니터에는 운항정보가 보인다. 그 옆에 앉은 누군가의 모니터에는 액션 영화가, 그 뒤에서는 아예 모니터를 끄고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다. 옆의 누군가는 리딩 라이트를 켜고 책을 읽는데, 페이지가 휙휙 넘어가는 페이퍼백인 것을 보니 필시 댄 브라운이나 다빈치 코드 같은 페이지 터너 같은 책인듯하다. 늘 항공기 안은 춥고 또 추워서, 담요를 세 개 정도 둘러서 얼굴만 빼꼼 내놓고 다시 눈을 감는다. 때로는 너무 갑갑해서 내리고 싶고, 때로는 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다는 안도감에 좋아한 공간, 비행기 안. 연락 두절의 매혹과 기다림의 마법을 담은 공간. 이륙할 때 중력이 가볍게 사라지고 착륙할 때 중력이 삶의 무게만큼 느껴지던 곳. 재빨리 스쳐 지나가던 공항을 떠올린다. 새를 닮은 비행기와 여행 가방을 닮은 공항에 관한 책을 읽는다. 

 다음 떠남을 계획하거나 이전 떠남을 반추하는 이에게 알맞은, 공간에 대한 관점을 또렷이 밝힌 글.

 

 


 


 

 이 책은 공항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은 일상에서 회자되는 평범한 공항 이야기면서 공항만의 비밀스러운 이야기, 공항의 겉모습에 감추어진 당황스럽거나 언짢은 이야기다. 나는 미국에서 공항이 현대생활의 특정 개념을 보호하는 방식에 늘 관심을 가져왔다. 공항은 사람들의 정체를 수상히 여기거나 신분을 확인하는 장소이고, 남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는 장소이고, 사생활이 먼저냐 국가 안보가 우선이냐를 놓고 갈등을 빚는 현장이며, 애국심과 기동성의 특권을 조장하는 종합 공장이다. 동시에 공항은 금방 잊게 되고, 때로는 불쾌한 기억으로 남는 포괄적인 장소로 여겨지기도 한다. 공항은 통과하기 위해, 그것도 빨리 통과하기 위해 설게되었다. 인류학자 마크 오제가 비장소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의미의 전형이 공항이다. 또한 공항은 장소와 지역과 표준 시각의 문제와 얽힌다. 이런 것들도 내가 이 책에서 말하려는 주제의 일부다.

-책 앞부분에서.

 

 

 

 

 일상이 이토록 어수선하고 불확실한데, 이만큼 매력적인 휴식처가 또 있을까? 요컨대 공항은 떠나기 위해 만든 곳, 모든 것이 명확하고 분명한 곳. 저자는 공항이 떠나기 위해, 그것도 빨리 통과하기 위해 설계된 곳이라는 점을 짚는다. 국경을 넘기 위해 만든 곳이고 통과해서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만든 장소. 마크 오제가 설명하는 non-place는 바로 이런 장소, place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라면 참지 않을 일을 공항에서는 참는다. 반면 일상생활에서라면 불가능할 정확성을 공항에서는 기대한다. 정확하게 사람을 가려낸다. 사람이 하는 일. 심증만으로도 사람을 검문한다. 카프카가 보았다면 '성'의 장소를 '공항'으로 삼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부조리하면서 복잡하고, 간단하면서도 비일상적이다. 

 911 이후 조지 부시가 patriot act에 서명하는 모습은 샤를 드골 공항의 공항 책임자가 '무슨 일이 있어도 승객의 흐름을 끊지 않는다'고 자랑스레 말하던 장면과 이상한 충돌을 일으켰다. 그것은 흡사 이 책에서 발췌한, 공항 안 무빙 워크에서 일부러 반대로 걷는 운동을 하는 인물이 일으키는 생경스러움과도 같은 것이었다. 



 

 


 


 

 장소라고 하기에는 기묘한 곳. 

 인천국제공항만 하더라도 그곳에 가려면 리무진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가량을 도심에서 달려야 한다. 중국의 베이징은 고속철로 한 시간 반의 거리를 칠 분으로 줄였지만, 늘 세계각국의 공항을 오가는 길은 평균 삼십 분에서 한 시간의 거리. 그것이 버스이거나 승용차이거나 택시이거나 리무진이거나, 베이징의 경우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지리상의 거리가 줄어든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곳은 늘 지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일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 

 

 

 

 

 도착지와 같은 출발지, 떠남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 요컨대 이 책의 저자가 바라본 공항은 씨실과 날실이 모여 하나의 텍스타일을 만드는 장소이다. 그곳에서 '읽기'는 어떤 의미인가? 또한, 그 장소 자체를 읽는 것은 어떤 일일까? 사람들이 떠나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일은 무엇인가? 모든 일터가 그 자신만의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진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공항도 마찬가지일진대 그곳의 숨은 무늬는 어떤 것일까? 911 이후 공항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보안심사, 탑승절차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복잡해졌다는 것, 제한사항이 더 늘었다는 점 말고 또 무엇이 달라진걸까? 계산하고 수거하는 수하물 공간은 어떤 곳일까? 저자의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흩어진 구슬을 한데 그러모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기도 하고, 손바닥에 들어 올려보기도 하는듯 다각도에서 조망된다. 총 아홉 개 장으 따로 흩어진 이야기는 책장을 덮을 무렵이면 일상으로 희미하게 사라진다. 

 

 


 


이러한 각 장을 채우는 것은 이 공간과 관련된 이야기, 시, 소설, 논문, 신문기사, 저서 등이다. 그것은 마크 오제의 비공간이기도 하고 제인 베넷의 존재 이야기이기도 하다.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보낸 일주일 이야기이기도 하며 디프랑코의 노래이기도 하다. 그리고 때로는 이렇게 은근한 안개가 책장 속에 자리 잡기도 한다.


 


 



차를 기다리며



짐 옆에 서서 시간을 흘려보낸다.

오스틴텍사스 공항-내가 탈 차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전처는 집에서 웹사이트를 만들고 있다. 

아들 하나는 좀처럼 볼 수 없다.

다른 아들과 그의 처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고 있다.

아내와 양딸은 주중을 읍내에서 보내고 보낸다

그래서 그 아인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

96세인 어머니는 여전히 혼자 살고, 역시 읍내에 있다.

항상 제정신을 찾는 일이 드물다.

전전처는 특이한 시인이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은 거의

변변치는 않지만                       다 됐다.

올해의 만월은 10월 2일, 나는 월병을 먹고, 데크에 나가 잤다.

소나무 검은 가지 사이로 지나가는 백색 달빛

부엉이 울음소리와 덜걱거리는 사슴뿔,

카스토르와 폴룩스가 힘차게 떠오른다.

부극ㄱ성이 흘러간다는 것을 알면 좋을 텐데

지금 우리의 밤하늘도 미끄러져 가버린다는 것을,

나야 못 보겠지만

아니 볼지도 모르지, 한참 나중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하늘에 난 정령의 오솔길을 걸으며,

정령의 기나긴 걸음-거기서 너는 곧바로 다시 떨어져

"좁고 고통스러운 바르도의 통로"속으로

너의 작은 머리를 들이밀어 봐

그러면 다시 그곳일 테니


네가 차를 타기를 기다리며

(2001년 10월 5일, 스나이더)


 

 


 

 독립된 여정, 서로 모르고 알 생각도 없이 한 장소에 일시적으로 모이는 행위, 이 두 가지가 만날 때 생기는 묘한 매력을 저자는 '버려진 땅과 뜰과 건물 지대, 여행객의 걸음걸이가 달라지는 대기실과 역의 플랫폼, 계속되는 모험의 가능성으로서 도망자의 기분이 계속되는 우연한 만남의 장소, 할 일이라고는 "일어나는 일을 보는 것뿐"이라는 느낌이 드는 매력이라고 말한다. 







 버려진 땅, 생명이 움직이는 땅,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 기다림이 지배하는 공간. 이 공간이 갖는 매력 속을 스미는 기억을, 스나이더는 산문시 blast zone에서 끌어낸다. 단도직입적인 도입, 개인의 연고와 기억, 생태와 천문에서 시가 닻을 내린다. 그 확고한 지점은 독자를 오스틴 공항의 수하물 찾는 곳에서부터 노스 캐롤라이나 생태 지역으로 이끌고 간다. 별이 떠도는 법을 생각하고 속도를 없앤 느린 시간에 맞춘 시선으로 스스로를 생각한다. 생각과 영혼이 흘러가는 길이 은하수라면, 저자 크리스토퍼 샤버그가 인용한 스나이더의 산문시는 컨베이어 벨트를 은하수로 변환한다. 인용 시에서 스나이더는 공항에서 자신이 탈 차를 기다린다. 다른 시 '강인한 영혼'에서 그는 '공항에서 그를 곧 만날 것' 이라고 밝힌 다음 '세관에서 [고은을] 만나기 위해 공항으로' 간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왜 하필 공항이어야 하는가. 무대는 바다 가까운 산등성이의 무덤일 수도, 풀이 무성한 야산일 수도 있고 에코 모텔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필 공항이어야 했던 이유를 저자는 '시에서 공항은 주변적이고 삭막하고 단순한 무대 배경으로 존재한다. '다른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다. 공항이 하나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그것이 잠시 속도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라고 밝힌다. 

 

 

 


 

 

 일레인 스케리가 말하는 평범하고 당당한 형태, 일상과 상호작용의 패턴을 가로질러 활보하는 그 무엇의 무대가 되는 곳. 스나이더의 '건물 지대'에서 출발해 오제의 '체험 강도'를 높이는 공간. 속도가 순간 사라지고 기다림이 가득 채워 다음에 일어날 일만을 기다리는 곳. 

 그곳에서 사람들은 잡지를, 페어퍼백을, 와이파이로 인터넷을, 킨들을 읽는다. 그러나 무엇을 읽을 수 있는 라운지와는 달리 수하물 앞 컨베이어 벨트에서는 모두가 뚫어져라 가방이 고무 커튼을 통과하거나 검은 입구를 통해 나오는 광경을 주시하며, 말 그대로 '기다림' 말고는 할 일이 없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다른 점은 정확한 때와 대상을 확신할 수 있다는 점이며, 카프카의 '성'과 다른 점은 언젠가는 다른 장소로 진입할 것이라는 '다음'의 확신이 있다는 점이다. 여러 모로 이 공간은 확신과 불확실성이 만남으로서 그 특징을 갖는 공간이다.


 


 


그 불확실성이란 무엇인가. 

 911 이후의 불안. 심증만으로도 길게 누군가를 심문할 수 있다는 사실. 

 '내가 아는 누군가는'으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길게 이어진다. 출입국심사대의 태도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오는지 가는지 신경 쓰지 않으련다'와 '당신이야말로 미래의 불체자 혹은 테러리스트'. 크나큰 환대를 기대하지는 않더라도 후자의 경우가 사람 신경을 긁는 것은 오로지 심증만으로 생면부지의 관리가 승객을 세컨더리 룸으로, 심하면 입국을 불허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크리스토퍼 샤버그는 '무함마드 아타의 마지막 날'(마틴 에이미스)을 인용함으로써 추측과 무작위의 가상영역과 연결되어 표준화된 전산과정을 이야기한다. 

 

 

 




"가방은 직접 꾸리셨습니까?"

무함마드 아타의 손은 이마를 향해 움직였다.

"예."

그가 말했다.

"가방을 계속 지니고 있었습니까?"

"예."

"누가 운반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비행 일정이 시간대로 진행됩니까?"

"중간에 갈아타야 합니다."

"그러면 이 가방들은 곧장 갑니까?"

"아니오. 로건에서 다시 수속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절차를 또 겪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테러행위가 지난 수십년 동안 이룩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세상의 지루함에서 순증가를 이룬 것만은 분명했다. 세 가지 질문을 묻고 답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약 15초 정도였다.

 그러나 데드타임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한 마디도 틀리지 않고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되었다. 항공기 운항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무함마드 아타는 더 많은, 아마도 훨씬 더 많은 데드타임을 지구 곳곳에 남겼을 것이다. 테러가 또한 가장 확실한 적을 적극조장한다는 것은 적절한,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논리일 것이다. 지루함이라는 적 말이다.

-'무함마드 아타의 마지막 날', 마틴 에이미스





 911의 간접적인 발현은 공항에서였다. 수수께끼로서, 해석해야 하는 장소로 드러나는 공항. 일상과 떨어져 있고 구분할 수 있는 장소. 이야기를 왜곡하거나 드러내고 발전시키는 장소. '무함마드 아타의 마지막 날'에서 911 테러범의 하루를 공항에서 재현함으로써 그곳은 출입구이자 걸림돌이었으며 세세한 내용을 기억하고 다시 말하게 한다. 같은 소재를 우리는 상상하고 재현할 수 있으며 이 자체는 911을 기억하는 것, 혹은 중재하는 것을 복잡하게도 하고 시간을 중첩하기도 한다. 설화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 아닐까.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하나의 아우라를 뿜는 일. 그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아우라의 힘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우리는 그 아우라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싶어서 폐쇄 회로와 공항 검색대, 출입국 수속과 서류 더미, 감시 카메라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닐까. 


 


 


그 모든 문답과 계획, 감시와 이동에서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은 인생의 한 부분이다. 육하원칙이 이보다도 존중받는 공간이 또 있을까? 또렷해야 하고 분명해야 한다. 불안할수록 순서는 복잡해진다. 전신 스캐너 앞에서 신발과 노트북, 핸드폰까지 스캐너에 맡긴 채 신체를 검색한다 해도 마약은 누군가의 몸속에, 폭발물은 100밀리리터 이하 액체 병이 아닌 항공기 좌석 밑에 미리 장착될 수도 있다. 혹은 저자가 직접 보았다는 증언에 따라 음료수 병 속에 권총을 넣어서 탈 수도 있다. 요컨대 이것은 막고자 하는 자와 막히지 않으려는 자의 대치이다. 그 사이에 수법은 다양해지고 자유는 제한된다. 전신 스캐너까지 등장한다면 이제는 무엇이 더 남았을까. 불안은 높은 밀도의 조사를 동반한다. 계획적인 진부함, 특정 시간 동안 소비하는 일회적 여흥을 거치고 나서 돌아오는 곳은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의 존재 확인이다. 늘 내 존재의 압축을 보는듯한 묵직한 수하물을 찾고 나면 여행이 끝났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물질과 부담, 여행이 끝난 후, 공항이 이제 저 너머 일상 속으로 희미해지는 부분. 그 곳에 있을 때는 늘 인생의 어느 부분을 좀 더 깊이 조사받은 이후의 묘한 허탈함이 느껴진다.








사진, 음악 출처는 

SF airport International lounge by Jeanne_Hebuterne

New Yorker cover by Adrian Tomnie

Samson, by Brian Goggin

Music for airports by Brian E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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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7 0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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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7 15: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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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7 19: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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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9 14: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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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9 2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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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9 21: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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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9 21: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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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2 13: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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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로렌스는 타오스 푸에블로에서 어딘가에 도달한 느낌, "어떤 최종적인" 느낌을 경험했다고 한다. 어떤 장소들은 지구상에 잠시 머물러 있는 것처럼만 보이는데, 타오스는 "옹이처럼" 단단히 자리잡은 느낌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곳 렙티스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은 내 발로 들어간 어떤 장소가 아니라, 과거의 꿈의 공간이었다. 나는 '구역' 안에 있었던 것이다. '구역' 안에 있을 때는 다른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다. '구역'안에 있을 때는 다른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다. '구역'이 아닌 곳에 있을 때는 늘 어딘가 다른 곳, '구역'에 가기를 소망한다.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제프 다이어




 



 아니, 제프 다이어는 물리적인 공간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책의 모든 폐허는 궁극적으로 그 자신이었다. 그것은 고대와 현대, 전쟁과 평화를 아우르는 한 개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 사람의 마음이란 참 불가사의하다. 언제 어떤 움직임의 바람이 불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니까. 






 여행기가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 줄 거라는 환상은 도로시의 작은 구두 뒷굽 소리만큼이나 황량한 것이 되었다. 우디 알렌이 언젠가 속독법으로 전쟁과 평화를 읽은 다음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났다.'라고 줄거리를 요약한 것과 같이 결국, 여행기도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난 것 이상이 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좀처럼 가기 힘든 장소를, 혹은 아무 것도 배우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여행기를, 또는 이렇게 자기 마음 속을 향하는 시선(제프 다이어)을 읽게 되는 것이다. 막상 여행지에 도착해서는 나는 풍경 사진도, 인증샷도 찍지 않는다. 음식 사진을 찍어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빈 접시만 눈앞에 있을 뿐이며 호텔 사진 한 번 찍어볼까 생각할 때 즈음엔 방은 이미 룸서비스가 필요한 바로 그 순간이다. 그러므로 내가 카메라 중의 카메라 아이폰을 들이미는 순간은 





1.증거가 필요해서(이를테면 결혼식장 증거사진같은 하객사진처럼)

2.마음이 너무 격해진 나머지 진정시키느라

3.그 풍경을 꼭 보여주고 싶은 누군가가 있어서.

4.그 풍경을 함께 기억해줄 사람이 옆에 없을 때.





1의 경우 평소 참되게 살았다 생각했건만 내가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지 않는 이에게 증거 사진을 제공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서였다. '아니, 내가 지금 튕기는 게 아니고 정말 뉴욕에 있다니까요.'

2의 경우는 내가 내 눈으로도 그 장소에 있다는 걸 못 믿을 때였는데 막상 공항으로 향하는 시티의 택시 안에서 그 사진을 찍었을 때는 이미 때가 많이 늦었다.

 3의 경우는 주로 술을 마시거나 호텔의 룸서비스를 혼자 느긋하게 시킬 때. 새벽 세 시의 술집, 오전 10시 대륙의 아침식사가 주를 이루었더랬다. 그리고 4는, 








4는 내 마음이 텅 비기 삼 초 직전. 내가 가까이하는 누군가가 있을 때는 오히려 사진을 잘 찍지 않았다. 그저 그럴 때는 '지금 참 좋아. 나,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할 거야.'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든다. 그런 다음 몇 달이 지나 그에게 다시 물어본다. 우리가 같이




나란히 스타벅스에 앉아 커피를 마셨던 이른 저녁을

한밤의 센트럴 파크를 내려다보았던 때를

광화문 어딘가에서 늦은 아침, 선물받은 새 구두를 신고 좋아서 팔짝 뛰어올랐던 때를 

부산, 해운대 검은 밤바다를 바라보던 때를




기억하는지를 물어보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그런 순간이 365일 24시간 계속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365일 365개의 그림자가 다 다른데, 그 순간은 아주 찰나일 뿐이다. 사람이 옆에 있어도 늘 같지 않고 풍경이 늘 머물러도 늘 반복되지 않으니까. 우리는 어제의 강물에 발을 다시 담글 수 없고 깨진 거울을 붙일 수도 없다. 내 모든 사진이 가난하지는 않지만 애처로운 까닭은 여기 있다. 나중에 네 모습을 기억하려고. 네가 없을 때 네가 있는 거라 마음을 속이기 위해. 언제 내 마음이 변할지, 네 마음이 변할지, 내 사정이 여의치 않을지, 네 사정이 지금과 다를지 알 수 없으니까, 오래오래 보려고. 이런 마음이 없어지면 아마도 그땐 내가 진짜 늙은 것일 게다. 산도르 마라이는 이를 이렇게 잔인하게 증언한다.






 세상만사 답답할 정도로 지루하게 되풀이되거든. 그것도 나이와 관계있겠지. 유리잔은 그저 유리잔이라는 것을 아네. 그리고 인간, 이 가련한 존재도 무엇을 하든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지. 그리고 나서 육신이 늙어가네. 단번에 늙지는 않아. 그게 아니라, 처음에는 눈이나 다리, 심장이 늙네. 단기적으로 늙어간다네. 그리고는 별안간 영혼이 늙기 시작하지. 육신은 늙었을지 몰라도, 영혼은 동경과 추억을 그대로 간직하기 때문일세. 영혼은 여전히 동경하고, 기뻐하고, 또 기쁨을 희구하지. 기쁨에 대한 동경마저 사라지면, 추억이나 허영심만이 남네. 그런 다음 정말로 영영 늙는다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지. 그런데 무엇 때문에 깨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게야. 하루가 어떠할지 너무 잘 알지. 봄 아니면 겨울이고, 삶의 자질구레한 일들, 날씨, 하루의 일과.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어. 예기치 못한 일, 특별하거나 끔찍한 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네. 인생의 모든 화복을 알고,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있고, 좋든 나쁘든 더 이상 알고 싶은 게 없기 때문이지. 그것이 노년이라네. 

-산도르 마라이, 열정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다. 흉터도 마찬가지다.오히려 상처는 더 많이 받아도 상관이 없다. 아픈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아픈 것이 너무 싫지만 잘 참는 것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내 특기 아니던가. 아니, 달리 말하면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내 특기다. 몇 일을, 몇 달을, 몇 년을 나름의 기억으로 메우면서 금맥을 찾듯 시간을 기다렸다. 하루키가 쓴 1Q84의 아오마메처럼 물론 강인하게 기다릴 자신은 없다. 하지만 강인하게든 연약하게든 기다리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다. 그 시간이 쌓였을 때 젊을수록 상처를 많이 받겠지만 늙을수록 상처를 덜 받는다는 것도 명명백백하다. 무엇보다도 상처는 치유할 수 있지만, 후회는 치유할 수 없다는 점이 어릴 때나 지금에나 두려웠다. 지금 읽는 산도르 마라이는 너무나도 담담하고 조용해서 두렵다. 겨울의 어둠, 안개비가 내릴 때 찾아드는 습기. 불을 밝히고 잔에는 따뜻한 글뤼바인을 채우고 촛불까지 켜고 나면, '열정'이라는 덮개 아래 후회와 진실, 사랑과 우정, 사실과 추억이 이야기의 외피를 쓰고 나타난다. 인간은 그 자신에 관해서는 늘 아무것도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을 드러낸다는 그의 글을 읽으면 사람들의 말이 얼마나 진실을 숨기는 쪽으로 발전해 왔는지가 보인다. 그럴 때 들여다보는 마음속 풍경은 어떤 것인가. 상처와 기다림, 시간과 기억이 뒤덮을 때의 폐허는.





 오든의 시는 "자신만의 풍경을 가지지 않은 자가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1연의 중간쯤 "자기 삶의 지도를 그릴 수 없는 자가 있을 것인가?"라고 묻는다. 나는 그릴 수 없다(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이 책은 내 삶의 특정 시기에 겪었던 몇몇 풍경에 대한 조각난,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지도다. 어떤 일이 생겼거나 생기지 않았던 장소, 내가 보고 싶었던 장소, 혹은 그저 지나쳤거나 마지막에 다다른 장소. 어떤 의미에서는 그 모든 곳이 같은 장소, 같은 풍경이기도 했다. 그 일들을 경험한 사람은 결국, 이런저런 장소에서 생겼거나 생기지 않았던 일들의 총합인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프 다이어, 위의 책.




 이 책을 읽는 내도록 진한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그리 곡진하지도, 강렬하지도 않지만 여러 층위에 걸친 폐허가 향하는 곳은 결국, 제프 다이어의 폐허 같은 마음 속이었다. 그것은 나이, 성별, 인종, 심지어는 안경을 쓰는지 안 쓰는지조차도 뒤로 하고, 한마디로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의 폐허이다. 마음에 품었던 무언가를 내려놓을 때 필요한 위로. 수많은 장소와 사람, 시간과 공간의 총합인 그 사람은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이러한 황폐한 시간과 공간에서도 여전히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떠올리게 한다.





 행복감을 느끼는 능력 말고 인생을 판단할 기준이 뭐가 더 있을까? "그들은 뭘 바라는 걸까요? 구역을 찾는 사람들 말입니다." 라고 영화 <스토커>의 작가는 묻는다. "행복이지요, 그 무엇보다도." 스토커가 답한다. 어떤 사람들이 구역에 들어갈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착하거나 나쁜 사람이 아니라 엉망이 되어버린 사람들이요"라고 답한다. 

-제프 다이어, 위의 책.





시간이 이룬 폐허, 사람이 이룬 폐허, 사건이 일으킨 폐허를 둘러보는 그의 글귀는 오로지 시선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행복감을 느끼는 능력이라는 말에서 만져지는 희망은 당위를 벗어난 능력에의 문제가 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신념으로 타인을 피곤하게 만드는 자기계발서적과도 같은 말이 얼마나 많은가. 도덕의 문제가 아닌 이상에야 당위가 인간의 감정까지도 조정하게 내버려두느니 나는 차라리 발륨과 프로작의 손을 잡겠다. 그러나 제프 다이어의 행복에의 능력은 의외로 간단하고 진실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은 오로지 바라보는 것이라는 통찰은 얼마나 다양성을 품은 것인가. 어느 여행지를 가도 제프 다이어의 기준은 단 하나. 자신이 그 광경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가. 마음이 폐허가 되었다는 이 사십 대 남자의 읊조림은 내도록 황폐함을 노래하지만, 읽고 나면 이상하게 긍정도, 부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모든 판단과 느낌은 자신을 응시할 줄 아는 능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에. 





 바다를 걸어 들어가 짐을 먼저 실은 다음 긴 배에 올랐다. 잠시 후 배는 나를 싣고 출발했고, 만을 끼고 크게 돌아 핫린으로 향했다. 바람은 없었다. 하늘도 맑았고, 바다는 짙은 바다색이었다.

 작은 배를 타고 어딘가를 떠나는 일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물결의 움직임, 엔진이 내는 소리. 삶을 뒤에 남기고 떠나지만, 당신은 여전히 뒤에 남기고 떠나는 그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당신의 일부는 그곳에 남는다. 죽음도, 최고의 죽음이라면 아마 그것과 비슷할 것이다. 모든 것은 기억이지만, 또 모든 것은 확장된 현재 안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제프 다이어,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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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1-27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으네요. 좋아서, 좋아요를 눌렀어요. 이런 표현은 지나치게 단순하지만, 그렇습니다.

나만 기억하는 줄 알았는데, 상대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꽤 놀랄 때가 있죠. 그러면 온 몸에 짜릿함이 퍼져가잖아요. 몇 번 만나지 않은 누군가, 내가 그랬듯이, 우리의 메뉴를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에게 말하지 못한채로 한참을 따뜻해했어요. 그랬어요.

오래오래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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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5-01-27 15:29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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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주시다니 저도 좋아요! (좋다는 말을 남발하는 중)

1.나만 기억하는 줄 알았는데 상대도 기억하는 일
2.나는 기억하고 상대는 기억 못하는 일
3.나는 못기억하고 상대는 기억하는 일
4.둘 다 기억 못하는 일

1~4를 보완하고 한 톨이라도 더 가져가려고 일기를 쓰거나 서재에 글을 남기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떤 부분은 당시에는 울컥 했으나 몇 년 후엔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는데 지나고 나서 더 아른거리기도 해요. 이때 모든 풍경은 결국 내 눈 속에 있다는 생각이, 제프 다이어를 읽으면 더 또렷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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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1-28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프 다이어는 저도 사두었어요. 그렇지만 사두기만 했어요. 물론 읽으려고 사두긴 했죠. 네, 그렇습니다. 하아-
또 페이퍼 써줘요, 또.
이런 페이퍼, 읽는 거 참 좋아요.

Jeanne_Hebuterne 2015-01-29 13:52   좋아요 0 | URL
(제 눈에는)작가가 잘생겨서 읽었어요 ㅋ
음, 이런 페이퍼 쓰려면 여행가야 하는데, 좀만 기다려줘요, 다락방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