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now Child (Paperback)
Eowyn Ivey / Little Brown & Co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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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bel said. "As fantastic as it all sounds, I know the child is real and that she has become a daughter to us. But I can't offer a single bit of evidence. You have no reason to believe me. I know that."

 메이블이 말을 이었다. "듣기엔 이상해 보이겠지만 난 그 애가 진짜라고 생각해요. 그 애는 진짜이고, 우리에겐 딸이나 다름없어요. 물론 그걸 에스더 당신에게 확인시켜줄 방법은 하나도 없어요.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




 지난 세기의 알라스카, 눈과 얼음의 땅, 아이 없는 부부가 눈이 오는 날 밤 눈사람을 만들고 외투와 모자를 씌워준다. 그 다음 부부를 찾아오는 어린 여자아이. 그 여자아이와 함께 다니는 작은 여우. 


 



 환상과 현실이 섞인 이 허구에 앞서 소설은 어떻게 소설 속의 세상을 직조해 내는 것인가, 회의감과 궁금함이 생긴다. 대형서점의 수많은 책 속에서, 헌책과 새 책, 떨이로 파는 책과 신간 속에서, 헌책방의 두툼하고 편안한 쿠션이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서 순간 설핏, 들었던 이천사백 년도 더 된 의문. 소설은 무엇일까.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작은 이야기'라는 정의를 중학교 문학 시간에 들은 이후 이 작은 이야기에 한눈을 파는 나는 드라마 팬과 다름없었다. '걸 온 더 트레인'의 레이첼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망설였고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렇다면 문학 속의 소설이, 이 작은 이야기는 대체 왜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간질거리게 하는 것일까.





 잠시 다시 눈을 돌려 에오윈 아이비의 스노우 차일드를 다시 읽는다. 장마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 '스노우 차일드'의 도입부 내지는 말미가 있다. 그 어느 것도 그저 행복하기만 하거나 그저 슬프기만 하지는 않는다. 눈의 결정처럼 어느 순간 나타났다 어느 순간 사라지는 아이. 동화와 민담에서 출발한 이 이야기는 '사라지는 아이'라는 점에 계속 주목한다. 에오윈 아이비의 이야기하는 입술이 주목하는 것도 그 부분이다. 단어와 단어가 눈 위에 작은 발자국을 찍고, 여우가 그 발자국을 따른다. 에오윈 아이비의 단어와 문장은 지극히 조용하고 고요해서 가장 격동적인 순간, 남편 잭이 눈길에서 크게 다치고 메이블이 집안을 일구어 나가는 장면에서조차 통나무 집 안에서 바깥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눈이 사각사각, 회오리가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남는 것은 다시 거대한 백색의 눈. 





 "frost...and snowflake... turned to flesh and bone."

  "얼음, 눈 속에서 나타난 생생하게 살아있는 아이."





 메이블이 어느 순간 눈 속에서 나타나 봄과 함께 사라지는 아이, 파이나를 이렇게 보며 꿈꾸는 사이 잭은 파이나의 눈 속에서 부모가 죽고 혼자 살아남아 살아가는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이미지는 다시 생생하게, 백조를 사냥하고 죽이는 파이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백만 가지 눈의 결정을 하나씩 보여주듯 에오윈 아이비의 이야기는 파이나의 다른 모습을 조금씩 보여준다.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이 전부가 조금씩 움직여 조용히 켜켜이 쌓인 눈밭을 보기 전까지, 독자의 눈이 보는 것은 사각사각 눈이 밟히는 알래스카의 겨울 풍경이다. 





 그 겨울이 호흡하는 것은 눈의 아이, 파이나의 숨결. 에오윈 아이비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삶의 접점과 맞물린다.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짜 살아있는 삶일까. 알래스카의 몰아치는 눈, 폭풍, 굶주리는 겨울이 빚어내는 풍광은 이상하게도 그곳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 먼 곳이 어느 순간 창문을 열면 성큼 다가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눈과 얼어붙은 강물, 숲과 산, 그리고 야생동물이 빚어내는 리듬감일 것이다. 그 리듬을 느끼다 보면 어느 순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소녀가, 멀리서 울부짖는 야생 곰이, 겨울이 오면 자취를 감추는 야생 딸기가, 오븐에서 겨울을 버티게 하는 파이와 약간 한기가 도는 부엌 식탁 위에 놓인 따뜻한 차 한 잔과 수프가 눈앞에 펼쳐진다.





 읽다 보면 추워지는 이야기, 슬픈 이야기. 어느 순간 현실이 이와 같다고 여기다보면 생각지 못한 순간에 작가는 자신이 직조한 언어의 짜임으로 놀라운 스타카토를 만들어 낸다. 에오윈 아이비는 고요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알래스카의 창밖 묘사를 시작으로 독자의 경계심을 풀어낸다. 민담과 동화가 섞인 눈의 아이 이미지를 곳곳에 넣어 진짜 눈의 아이 파이나를 만들어 낸다. 처음 파이나를 발견하고 자신의 아이로 생각하는 메이블과 나중에 파이나와 사랑에 빠지는 가렛의 파이나를 대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말미, 파이나를 대하는 두 사람의 방식이 다른 방향에서 몰아치는 눈보라 같은 갈등을 일으킬 때조차 두 사람의 반응은 모두 가능케 한다. 메이블은 파이나를 눈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그가 숨 쉴 수 있도록 얼어붙은 겨울 바람 속에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렛은 파이나를 따뜻한 피가 온몸을 돌고 숨결이 조용한 사람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메이블은 파이나를 품는 어머니이며 가렛은 파이나를 객체로 보는 인간인데, 에오윈 아이비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고 독자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애매한 중간을 선택하게끔 종용하지도 않는다. 테리 이글턴의 말처럼, 비극에서 중도가 제공되는 일은 극히 드물어 마땅하다. 





 결국, 이것은 모두 문학의 일이다. 인물을 다루는 작가의 부분적인 방식들이 구조를 이룬다. 독자는 잭, 메이블, 파이나, 에스더, 가렛 등에게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사건을 위에서, 그리고 아래에서 양옆에서 살펴보게 된다. 이야기의 구성은 단순하지만, 작가는 독자에게 쉴 틈이 생기면 눈의 아이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독자는 파이나가 사람을 경계하지만 자연 속에서는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아이이며 메이블이 자기 죽은 아이를 그리면서도 파이나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 잭이 아버지 같은 태도로 파이나를 대하는 것을 쉽게 알아차린다. 이것이 눈의 아이 민담, 동화와 이 소설의 묘한 상충관계를 일으켜낸다. 독자는 눈의 아이 민담에서 어떤 단락이 오든 간에 그것이 비극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에오윈 아이비의 이 소설에서도 그럴 것인가? 소설 끝에서 파이나가 인간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와 함께 생활을 꾸려나갈 때까지도 독자는 살짝 의심을 거듭하게 된다. 그간 작가가 파이나를 묘사할 때마다 사용한 단어는 눈, 서리, 안개, 눈 폭풍우, 차가운 공기 등이며 파이나와의 모든 대화에는 따옴표가 없다. 한마디로 작가는 문학의 많은 언어를 자기의 것으로 활용한다. 





 이 작은 이야기를 읽으며 에오윈 아이비가 성글게 쌓은 눈사람같은 이야기를 읽노라면 앞서 생각했던 의문이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그가 이야기하는 형식을 따른다. 소설의 이야기는, 문학의 내용은 언어와 분리할 수 없는 경험이다. 언어가 도구로 전락하는 가구 조립 설명서 같은 실용문과는 달리 문학에서의 언어는 핵심이자 본질, 실체이다. 파이나, 라고 말할 때의 파열음이 눈의 조각처럼 느껴지고, 내뱉는 숨이 차가운 알래스카의 공기처럼 느껴진다면 실로 묘한 일이다. 그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데 어느 순간 작가는 그 이름 안에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지를 생각하게끔 한다. 동화와 실제가 실재하는 마법같은 이야기. 읽고나면 차가운 겨울, 12월 밤이 생각나는 알래스카의 이야기.



 Jack and Mabel gasping for breath. The moon lit up the entire valley, gleaming off the river ice and glowing on the white mountains.

 Let's keep going, Faina whispered, and Jack, too, wanted to skate on, up the Wolverine River, around the bend, through the gorge, and into the mountains, where spring never comes and the snow never melts.


 잭과 메이블은 숨을 몰아쉬었다. 달빛이 언덕 전체를 뒤덮어 하얀 산과 얼어붙은 강이 어슴푸레 빛났다. 

 계속 가요. 파이나가 속삭였다. 그리고 잭 역시, 스케이트로 계속해서, 울버린 리버를 지나, 옆으로 살짝 꺾어서, 협곡도 지나서, 산 속으로, 봄이 결코 오지 않고 눈이 절대 녹지 않는 곳으로. 그런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읽다 보면 쉼표와 숨표, 녹아버린 따옴표와 공백이 서리처럼 녹아내리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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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가만히 죽은 나무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나는 죽은 내 얼굴을 만져볼 수 없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젖을 물리듯 햇살은 죽은 나무의 둘레를 오래도록 짚어보고, 고스란히 드러난 나무의 뿌리는 칭얼대듯 삐죽 나와있는 오후. 어떤 열렬한 마음도 이 세상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내가 싸워야 한다면 그 때문. 내가 누군가와 섹스를 한다면 그 때문. 거짓말처럼 내 몸을 지나간 칼자국을 기억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글거리는 상처 따위가 아니다. 맨드라미는 지금도 어디선가 제 키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나를 두소 살이 있는 내가 입을 꾹 다물고 먼지처럼 그릇 위에 쌓여가는 일은 그러므로 아주 서러운 일은 아니다. 이젠 벼랑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에 잠긴 귀를 흔들어보는 일. 입을 벌리면 피가 간지러운듯 검은 웃음이 햇살 속으로 속속들이 박혀드는 날. 집이 사라지면 골목은 어디로 뛰어내려야 하나. 

-맨드라미는 지금도, 이승희





 검정 원피스와 하이힐을 신고 아끼던 반지와 목걸이도 했었다. 마지막으로 향수를 뿌리고 길을 나설 때 그의 전화를 받았다. K, 그날은 네가 헤어진 날이었다. 




 길고양이 같은 표정의 오후.




 십여 년 전 오후, 처음 랑콤의 미라클을 뿌렸을 때 나는 백 밀리그램짜리 오 드 뜨왈렛을 사서 매일 그 향만 뿌렸다. 사각거리는 리넨 원피스, 또각거리는 샌들 굽, 조용한 무채색 인테리어의 향수라고 생각하고 내가 무척 좋아하던 이의 옷장 속에 그 향수를 넣어두고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다시 찾은 그 향은 꽃향기와 달콤함, 단정한 느낌이 사라지고 매서운 초겨울 바람의 냄새로 변한 것에 다시 놀랐다. 

 내가 미라클, 이 향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지금은 디올의 미스 디올과 딥디크의 오이도를 더 자주 뿌리지만 한때 이 깔끔하고 단정한 느낌이 내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잠든 것들의 이마를 짚어주며. 




 K, 내가 왜 너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왜 너의 잠든 이마를 모르겠는가. 부드럽고 살짝 사람을 잡아당기는 느낌의 향수를 너와 그의 좋았던 때라고 하자. 또는 내가 사랑에 빠졌던 때라고 생각해 보자. 순진하게 세상을 낭비하고 시간을 엑셀 파일처럼 끌어쓰던 때. 향이 날아가리라는 것도, 체취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리라는 것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단, 내가 놀랐던 것은 네가 했던 말 속 '알지 못한다'와 '행복, 혹은 불행'이라는 낱말이 주는 이질감이었다. 행복과 불행, 이 앞에서 나는 내가 죄인이라고 아직도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은 어디까지나 '아닐 불'자를 써서 행복의 결여 상태가 불행이라고 알린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알지 못한다' 대신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모르는 것은 결코 '앎'의 결여가 아니다. 반대일 뿐. 너는 지금 네가 행복의 반대에 오롯이 앉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너의 체취와 그의 체취 중 누구의 냄새가 변했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이미 헤어짐은 그의 입에서 나왔는데, 너는 네 목을 그 앞에 곱게 내밀 준비가 안 되었으니까. 




 그럴 수 있기나 할까?




 오페라가 눈과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K는 괜찮을까. 거의 십 년을 만나다가 헤어진 그는 어떨까. 그 생각이었다. 나의 현재와 그의 과거가 겹쳤다. 나의 공백과 그의 상실이 겹쳤다. 나는 헤어진 애인이 아니므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의 자존심은 그에게 있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친한 친구들끼리 밤늦게 커피를 마시다가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애인이 많이 취해서 집에 데려다주려고 잠시 일어났다는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사랑은 그런 것일까? 그가 좋아하는 공연도 함께 가고, 축제도 함께 가고.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같이 먹고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그를 믿고 이야기를 듣고 손을 잡는 것. 그 모습이 너희의 전부라고 말하던 때. 향이 사라지는 것도 변하는 것도 모르고 싶던 때. 지금 변했다는 것을 안 순간 다시 잡고 싶은 네 마음을 모르는 것 아니다. 살아오다 자연스레 만나고 헤어졌던 이들을 하나씩 쌓아가던 때가 있었다. 변해서 향이 다 날아가고 시큼한 맛만 남아도 이제는 그 존재를 그대로 둘 생각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울어도 되는 때가 이미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오페라는 끝났고 바깥은 더욱 짙은 검은 고양이의 털빛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은 빈방이군요.




 사랑은 커녕 연애조차 뜻대로 되지 않고 늘 빈 방에 혼자 있는듯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는 말보다는 사랑에 빠진다는 말이 좋았다. 사랑을 나누었다는 말보다 섹스했다는 말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다니. 주고받음이 언젠가는 서로의 장사밑천이 바닥나면 끝나는 푸닥거리처럼 느껴지는 것에 반해 빠진다는 말이 주는 그 넉넉함. 그러나 헤어나올 때의 천 길 사람 속이 더욱 막막하다는 것은 이제 K도 나도, 열여덟 살이 아니기에 잘 안다. 소중한 것을 일생에서 몇 번이나 잃었다가, 그것을 어느 골목길에서 우연히 다시 찾고 기뻐하는 것도 잠시. 그 빛나는 것이 진짜였는지 사금파리였는지를 판별하는 과정은 더욱 지리멸렬하다. 낯선 마음, 우울감, 상실과 애도. 누군가를 잊기 위해 걸리는 시간은, 내가 그에 둔 의미의 무게에 달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불을 빨리 켜고 싶어 했다는 것을. 어둠을 이해하는 빛을 얼른 되찾고 싶었다는 것을. 우울과 체념과 절망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시간. 마침내 애도를 거친 다음 찾아오는, 내가 나에게 건네는 작별 인사는 빠를 수록 좋았다.





나 맨드라미로 지고 싶네.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열없어지는 때. 이미 충분히 받을 것을 다 받아낸 자의 오만함이 생길까 봐 스스로 다섯 가지 감각을 다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때가 왔다. 가장 간단한 음식이 오히려 더 정성이 들어가고 검은 빛깔의 옷을 입을 때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지, 실망과 후회가 생길 땐 내가 필시 나에 대해 오해를 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 이런 것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안녕, 안녕.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이승희의 시집은 늙음과 젊음을, 애도와 치유를 같은 무게로 바라본다. 행복과 불행이 아닌 빛과 어둠, 앎과 모름의 세계를 등분하여 내미는 시인 앞에서 그 마음을 읽는다. K의 말을 듣다가 같은 말이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면 잠시 이승희의 낱말을 들여다보곤 한다. 상실과 죽음을 지나 도착한 해진 후의 들녘처럼 따뜻한 시간이, 시집을 다 읽은 다음 천천히 다가온다.





시집을 선물해주신 D님, 고마워요. 멀리서 고맙다는 인사를 보냅니다. 

회색빛 글씨는 이승희 시인의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에서 부분발췌.



Hello from the out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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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서점 주인이 되었습니다 - 빈의 동네 책방 이야기
페트라 하르틀리프 지음, 류동수 옮김 / 솔빛길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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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서점 밖으로 나오니 모든 게 허황된 꿈만 같았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래서?" 남편이 물었다.

 "뭐가 그래서?" 내가 물었다.

 "당신은 어땠어?" 

 "끔찍해. 당신은?"

 "나도 그래."

 "그럼 뭐."

 침묵.

 "그런데 잘만 꾸미면 작품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그래. 하지만 살림집 말이야. 그건 아무래도 안 되겠어."

 "어째서? 크고 멋짐 살림집이 될거야! 생각해봐, 포장실에는 부엌을 들이는 거야. 그리고 책상이 있는 큰 사무실은 밥 먹는 방으로 만들자고. 복사기가 있는 곳은 텔레비전을 보는 작은 방으로 괜찮을 것 같아. 암실은 욕실로 만들고. 그렇게 하고도 우리 침실과 아이들 방으로 쓸 작은 방 몇 개가 남아."

 "말도 안 돼."

 "그렇다는 거지 뭐."





 취미와 직업이 일치하는 것은 일종의 판타지. 노래를 잘 불러 가수가 되고 악기를 잘해 연주자가 되고 책을 좋아해서 책을 쓰거나 팔고, 커피를 좋아해서 커피를 만들어 판다는 이야기는 마치 구운몽의 한 가닥 같다. 그 자락이 어떤 것일까. 밥벌이의 고단함, 입속의 단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일터의 마감 앞에 닥친 막막함 같은 것. 그런 것 한 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이 책을 집어 드는 독자의 절반은 이 책의 장르를 절반 정도는 착각했을거라 생각한다. 회고록 VS  판타지.





 어느 날 빈에 사는 친구네 집에 갔다가 작고 오래된 서점 하나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접한다. 

 폐업하는 작은 서점, 이 말을 듣노라면 가지치기를 하는 많은 낱말이 떠오른다. 인터넷 서점, 수요와 공급, 마감, 매출, 원리금 상환까지.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의 세계에 과감히 발을 들이미는 저자의 모습은 그러나 서점 운영의 길잡이 대신 서점 운영의 재미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내 인생 최대의 실수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해?' 등의 말이 오가지만 서점 운영을 해보지 않았으나 흥미를 느낀 독자 앞에서 저자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우리는 일에 파묻혀 살았다' 였다. 


 



 곧, 이 책은 서점 운영의 ABC 대신 자기 사업을 하고 아이도 키우고 남편을 거느리는 오스트리아 출신 여자의 작은 미소. 자기 서점을 갖고 있다는 자만심이 넘쳐나 '아무리 그들이 열심히 일한다 한들 빵의 성분표를 읊어대는 것 말고 다른 것이 있을까?'라고 말하며 맞은편 베이커리를 얕보기도 하고, 자기는 몰랐던 서점 직원의 또 다른 생활을 얕잡아 보기도 한다. 처음 면접을 했을 당시 자신의 두 번째 정체성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자기도 별로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는 것이 아니라 말할 필요를 못 느꼈으니까. 굳이 필요없이 직함을 나열하는 저자의 글 쓰는 태도를 보아 하면, 이것은 어쩌면 직함 자체에 집착하는 오스트리아인의 국민성일까, 저자 개인의 특성일까, 사뭇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이 책의 태도는 '조금 거만하면서도 즐거운 서점 운영자의 회고록'에 기본을 두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쩌면 이는 사람들의 각기 다른 표정만큼 다르고 또 다른, 책과 서점을 대하는 태도 중 일부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최근 나온 다양한 서점 관련 책들을 보노라면, 어떤 책은 서점을 살짝 홍보하거나 자랑하기도 하고, 어떤 책은 동네 책방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또는 자기가 돌아본 서점 여러 군데를 가이드북처럼 소개하기도 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서점 경영인으로서의 자존심, 자만심, 긍지를 자기 생활 공간에의 소개로 포장해나가는 것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는 갑자기 일터에서 일에 파묻혀 살게 되었다. 서점 뒷방을 우리 주거 공간과 연결해주는 회전 계단은 우리 삶의 중심축이 되었다. 처음에 우리는 그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목이라도 부러지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하지만 우리는 곧 그 철제 구조물을 다람쥐처럼 재빨리 오르락내리락하게 되었다. 아침이면 커피 잔을 손에 든 채로, 낮에는 커피를 새로 끌이거나, 세탁기를 돌리거나, 아니면 점심 식사를 하러 그 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했다. 남편이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거나 딸이 친구네 집에서 잘 때면 나는 한밤이 되도록 바깥 날씨가 어떤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출근하려고 저고리를 입을 필요도, 차를 탈 필요도 없었다. 또 어떨 때에는 신발 신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오븐에서 닭고기가 익어가고 있으면 맛난 냄새가 서점으로까지 퍼지곤 했다. 그러면 손님들은 유난히 행복해 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방사선과 의사 친구네 아이들이 매주 한 번 우리 집에서 잘 때면 아이들 나름의 의례가 있는데, 그때 이 회전계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녁을 먹고 이를 닦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나는 세 아이와 함께 두꺼운 양말을 신고 그 계단을 지나 서점으로 내려갔다. 서점에는 작은 야간용 조명만이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손을 더듬으며 아동도서 코너로 갔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각자 잠자리에서 읽을 책을 한 권씩 골랐다. 나는 아주 조용히 그 책을 아이들에게 읽어준 다음 아침이 되면 다시 서점에 반납하곤 했다. 





 집과 연결된 서점, 집에서 커피를 끓여 서점에 들고 오고 일하는 도중 집안일을 처리하기도 하고, 그러던 중 이웃들이 점심이나 저녁을 요리해서 갖고 오기도 한다. 그러다가 저자의 남편은 서점 일을 함께하다가 빈에 일자리를 잡기도 하고 아이들은 조금씩 자란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종종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남에게 추천하는 것을 즐기곤 하는데, 저자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책을 파는 사람이 하는 추천은 매상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독서를 좋아하는 이의 관점에서 멀리 갈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종종 조심스러워지곤 한다. 이를테면 '읽기가 좀 까다로운 것이 좋은가요, 아니면 재미있는 통속소설이 좋은가요?'라고 묻기도 하고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 분인가요?'라고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산 분들은 oo에도 관심을 보입니다'라고 보여주는 인터넷 서점의 서비스와 차원이 다른지는?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으므로 설득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책을 추천했다가 막상 아니다 싶어 고객에게 밤늦게 '책 계속 읽지 마세요! 모두 다 죽어요. 개까지요!'라고 문자를 보내는 저자의 모습을 보노라면 자만심과 애정은 이렇게 어우러질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밤늦게 술을 마시고 귀가하다가 서점 하얀 차양막 위에 쌓인 눈을 단골손님과 함께 치운다든지, 뭘 좀 드셔야 할 텐데, 라고 말하며 집에서 구운 빵을 갖고 오는 손님을 본다든지, 혹은 '책을 전혀 안 읽는데, 추천해주실 책이 있나요?'라고 말하는 손님에게 책을 한 권, 두 권씩 추천해 주고 책 이야기를 함께 나눈다든지, 이런 경험담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게다가 무대는 성탄절이면 책을 서로에게 선물해서 12월에 매출이 급증한다는 빈, 오스트리아. 치명적인 단점, 자만심과 치명적인 장점, 애정이 두루두루 섞인 서점 주인 이야기.





할 일은 끝없이 더 계속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 우리로 하여금 그냥 계속 일을 하도록 추동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다른 모든 것은 지루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서점같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가게에 대해 한 주에 한 번, 서점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이 나오는 이 시대에 계속 서점을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달리 남은 게 없기에. 우리는 더 잘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우리는 다른 것은 차라리 하고 싶지 않기에.




덧-그런데 어쩌나. 난 이 책을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다른 책을 구경하다가 '이 책을 구경하신 분들이 다음 책도 구입하셨습니다.-by 추천마법사' 코너에서 보고 주문하여 읽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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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6-03-2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싫어요. 서점이 없어지는 것이, 손으로 감촉을 느낄 수 있는 책이 없어지는 것이.
이렇게 우리가 편리한 인터넷으로 소통하고 있음에 시공간의 자유를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사라지지 말아야 할 아날로그 중 하나가 - 내게는 책이거든요.

Jeanne_Hebuterne 2016-04-03 09:18   좋아요 0 | URL
L.SHIN님
이 글을 쓰며 저야말로 인터넷 서점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사람 아닌가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저번주에도 헌책방에 가서 이것저것 오만원 상당의 책을 사들였어요. 통로 구석구석 배치된 깨알같은 메모도 재미있고, 직접 책을 손으로 만지며 탐색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제겐 재미있는 경험이어요.
인간은 종종 신기술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오래된 무언가가 금방 사라질거란 생각을 많이 하지만, 정작 우리가 아직도 꾸준히 사용하는 많은 물품은 어제 나온 새로운 것이 아닌 몇천년이 된 무엇임이 분명합니다. 전 아직도 전자책은 읽지 않고 편지를 보내고 종이책을 넘기는 사람이어요.
 
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One for sorrow, two for joy, three for a girl... Three for a girl. I'm stuck on three, I just can't get any further. My head is thick with sounds, my mouth thick with blood. Three for a girl. I can hear the magpies-they're laughing mocking me, a raucous cackling. A bidding. Bad tidings. I can see them now, back against the sun Not the birds, something else. Someone's coming. Someone is speaking to me. Now look. Now look what you made me do.-이 책의 여는 글.




 스릴러의 기본에 충직한 이야기, 히치콕의 가스등을 떠올리게 하는 플롯, 판단을 밀고 나가거나 망설이는 사람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의 모든 것은 간단하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인물, 사건, 배경, 이 세 가지를 저자 폴라 호킨스는 그의 첫 작품에서 영리하게 섞는다. 그 손놀림이 능란해서 마치 작은 도시의 카지노에 온 기분이다. 창밖에 보이는 것을 보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한가지가 명확해진다. 확신이 아니라 실수에의, 불확실성에의 가능성. 확신은 쉽다. 내 머릿속의 잣대로 명제를 가늠하는 일. 어려운 것은 불확실함에의 인식이다. 옳고 그름, 관계의 정직성 내지는 부정직, 부드러움과 날카로움, 전직 저널리스트였다는 폴라 호킨스의 소설 '걸 온 더 트레인'은 스릴러의 외피를 둘러쓴 감정의 곡선을 보여준다. 





 2013년 7월 5일 

 기찻길 옆에 옷 뭉치 하나가 버려져 있다. 셔츠처럼 보이는 연한 파란색 천이 더러운 흰색 옷과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다. 아마도 철둑의 작은 덤불숲에 불법으로 버려진 화물에서 빠져나온 쓰레기겠지, 아니면 이 구역 선로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이 남기고 간 것일 수도 있다. 그 사람들은 이곳을 뻔질나게 드나드니까. 어쩌면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고. 어머니는 내가 상상력이 지나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톰도 그렇게 말했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더러운 티셔츠나 신발 한 짝이 버려져 있는 걸 보면, 나머지 한 짝과 그 신발들에 꼭 맞는 발밖에 생각나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인가. 

 기차가 갑자기 덜커덩, 끼익 하고 새된 소리를 내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작은 옷 뭉치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기차는 힘차게 조깅하는 속도로 런던을 향해 달려간다. 내 뒷자레어 앉은 사람이 짜증 섞인 한숨을 힘없이 뱉는다. 아무리 기차 통근에 이골이 난 사람이라도 애시버리에서 유스턴까지 가는 오전 8시 4분 완행열차는 견뎌내기가 그리 쉽지 않다. 원래대로라면 45분 걸리는 구간이지만 제시간에 도착하는 경우가 드물다.-레이첼


 

 걸 온 더 트레인, 이 책의 창문은 바로 레이첼이다. 소설의 문을 여는 것은 레이첼, 2013년 7월 5일 금요일, 그리고 기차 안의 사람들이다. 경쾌한 전화벨 소리, 기찻길 옆에 버려진 옷 뭉치를 보고 공상을 하는 레이첼, 기찻길 옆의 집을 보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 것으로 생각하는 그의 머릿속이 바로 독자가 접하는 첫번째 창문이다. 책장을 넘기면 조금씩 드러나는 몇가지 필터. 그가 직업을 잃었지만 계속해서 런던으로 통근하는 척한다는 것, 톰은 그의 전남편이고 두 사람 사이에는 불임, 알콜 중독의 문제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레이첼은 아직도 알콜 의존이 심각한 수준이며 술을 마시면 자주 정신을 잃고, 기억을 잃는다는 것. 간단하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





 남편과 이혼했는데도 아직 결혼 전 성으로 이름을 바꾸지 않은 여자, 술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마시는 여자, 전남편과 지금 그의 부인이 사는 집을 찾아가기까지 하는 여자, 실직했음에도 아침이면 런던으로 가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 그의 상황을 관통하는 화살은 중독일까 의존일까, 나는 판단을 망설였었다. 중독의 어원은 addicene. 양도, 굴복을 뜻한다. 한마디로 스스로 권리를 다른 어떤 존재에게 내어주는 것. 스스로 노예 상태가 되는 것. 중독 관련 질문지를 접하면 한 가지 반복되는 형용사, 부사가 있다. '과도한'이라는 단어가 계속 등장한다. 동사와 명사를 넘치게 하는, 그 자체로 압도하는 단어. 

 과도하게 화내는가? 과도하게 필요로 하는가? 바로 '과도하게'. 레이첼은 과도하게 술을 마신다. 과도하게 거짓말을 한다. 전남편 톰과 그의 부인인 안나는 그런 레이첼 때문에 과도하게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그러던 와중 이 책의 다른 화자, 메건이 실종된다. 





메건은 제스. 레이첼이 매일 기차로 통근하며 하루에 두 번 지나치는 어떤 집에 사는 여자이다. 통근길에 지나가는 집을 보며 레이첼은 그 집에 사는 부부를 보고 상상한다. 아마도 남자의 이름은 제이슨, 여자의 이름은 제스일 것이다. 그 상상이 너무나도 강력한 토대를 지녀서, 심지어 레이첼은 경찰에게 그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제스는 아마도..'라고 상상의 그 이름을 언급하기까지 한다. 레이첼은 그런 사람이다. 기찻길에 버려진 신 한 짝을 보면 그 신에 꼭 맞던 발을 상상하는 사람. 걸 온 더 트레인이 나아가는 방향은 독자가 가졌던 확신이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독자는  앞서 말했던 감정의 곡선을 만질 수 있다. 알콜 중독, 폭력, 거짓말, 신의, 믿음, 사실, 몸과 마음이 다칠 때 느끼는 절망,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무력감. 





관계에 만약 성공과 실패라는 것이 있다면,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성공은 무엇이고 실패란 무엇일까. 이 답은 비교적 쉬웠다. 덧셈과 뺄셈의 명확한 공식. 혹은 곱셈과 나눗셈 같은 것일 것 같았다. 도약, 혹은 정확성.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관계. 한마디로 주도성을 잃지 않는 관계. 그러나 그것을 언제 알아챌 수 있을 것인가의 질문에 생겨나자 답하기가 어려웠다. 당장은 내가 좋아하고, 나를 나일 수 있게 해주는 관계라고 생각했건만 돌이켜 보면 아닐 때가 있었다. 이 사람과 있을 때의 나는 이카로스 같다고, 비약 없이 도약하고 햇빛도 머지않다고 생각했으나 바닷물에 풍덩 나자빠질 때는 실패도 그런 실패가 없었다. 그 실패가 도리어 나를 계속 걷게 만들 때도 있었으니, 이것은 주정뱅이의 마지막 한 잔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 마지막이라는 것이 끝이 없을지니.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무력감보다는 몸과 마음이 다칠 때의 절망이 더 클 때가 있다.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 어디서 상처를 입었는지조차 모르는 레이첼을 보며 독자는 그의 기억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심스럽다. 이 스토리 텔러는 어쩌면 마지막에 최후의 진실을 토로하는 최후의 일인이 아닐까? 아니면 모든 것은 술로 만든 강물 아래에 있고, 레이첼은 단지 거짓을 사실이라 주장하는 것인 아닐까? 이 두 가지 상반된 시선 속에서, 조금씩 메건이, 안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I can hear the train coming : I know its rhythem by heart. It picks up speed as it accelerates out of Northcote station and then, after rattling round the bend, it starts to slow down, from a rattle to a rumble, and then sometimes a screech of brakes as it stops at the signal a couple hundred yards from the house. My coffee is cold on the table, but I'm too deliciously warm and lazy to bother getting up to make myself another cup.-Megan.





 빛나던 소녀, 도망자, 아내, 화랑 딜러, 외도, 다시, 어디론가. 그리고 그사이 어딘가 있는 메건. 레이첼이 스스로 투영시켜 상상하던 제스는 기차가 오는 소리를 듣고, 레이첼이 상상하던 커피를 마시고, 레이첼이 상상하던 제이슨과 조용히 포옹한다. 실제 그의 마음 속에서 어떤 폭풍이 몰아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고, 그 폭풍의 세기가 오히려 남들을 화나게 한다면 메건에게는 불합리한 일일 것이다. 폴라 호킨스는 천천히 주저함 없이 메건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창밖에 보이는 것을 다 믿지는 마세요. 어떤 구름 뒤에 해가 있는지, 혹은 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답니다.






 메건이 실종되고 레이첼이 경찰에 증언할 때, 바로 그 구름이 문제가 된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 레이첼의 증언은 믿기가 힘들다. 메건이 실종되던 날 레이첼이 맨정신이었다 해도 믿기 힘들었겠지만 그의 모든 상황은 그의 모든 증언을 반박하기에 충분하다. 그렇지만 누구를 믿을 것인가? 일 년 전, 남편이 있지만 다른 남자와 자기 집 정원에서 포옹을 하던 메건을 믿을 것인가? 전 부인 레이첼이 했던 것 처럼 남편 톰의 가방을 뒤지고, 컴퓨터 비번을 알아내서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고 찾는 안나를 믿을 것인가? 전남편과 그의 부인을 스토킹하며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치 않게 메건 실종사건의 수사에 끼어드는 레이첼을 믿을 것인가? 




 

 이 물음표 속에서조차 확신은 쉽고도 힘든 것, 마음속 잣대가 분명하다면 쉬울 것이고 상황의 개별성을 인지한다면 어려울 것이다. 게으른 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 앞에서 레이첼, 안나, 메건은 각자 숨 쉬는 개별적인 존재가 된다. 





 I feel very cold. Did I know then that he wanted her? Megan was blond and beautiful-she was like me. So yes, I probably knew that he wanted her, just like I know when I walk down the street that there are married men with their wives at their sides and their children in their arms who look at me and think about it. So perhaps I did know. I wanted her, he took her. But not this. He couldn't do this.

 Not Tom. A lover, husband twice over. A father A good father, an uncomplaining provider.

 "You love him," I remind her. "You still love him, don't you?"

 _Anna




 메건은 점점 불행해지고 안나는 혼란스러워한다.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이젠 남자들이 탐내기는커녕 좋아하기 힘든 여자가 되어버렸다. 단순히 살이 쪄서, 혹은 음주와 수면 부족으로 얼굴이 부어서만은 아니다. 내가 잠자코 있을 때나 움직일 때나 내 얼굴에 고스란히 새겨진 상처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는 것 같다.' 레이첼의 이 말을 들을 때면 독자의 혼란은 더 강해진다. 자신의 존재, 혹은 마음에 비쳐 가장 닮은 듯한 어떤 캐릭터를 택하여 그 캐릭터에 이입하려는 독자의 성향을 폴라 호킨스는 십분 활용한다. 술 취한 채 어떤 소리를 층계 위에서 들었는데, 어쩌면 그 소리가 살인의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가장 강력히 어필하는 스릴러 영화의 믿을 수 없는 주인공 같은 레이첼. 독자는 단지 무언가 위험한 일이 레이첼이 본 창문 뒤편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챌 뿐, 그것이 진짜 위험인지 아닌지를 확신하기는 아직 이름을 알고 있다. 알아채기는 했지만 입증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이 상황. 추리와 스릴러는 이렇게 속삭인다. 






심연을 담았으되 닮지는 않은, 스릴러 이전에 사람의 마음 속 열 길 우물을 담은 소설.






 She's buried beneath a silver birch tree, down towards the old train tracks, her grave marked with  cairn. Not more than a little pile of stones, really. I didn't want to draw attention to her resting place, but I couldn't leave her without remembrance. She'll sleep peacefully there, no one to disturb her, no sounds but birdsong and the rumble of passing trains. -이 책의 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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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5-11-13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오자마자 쿠폰이랑 신간세일가격 얹어서 사놓고서는 아직도 못 읽고 있네요.-_-: 기대되는 책인데 말이죠.

Jeanne_Hebuterne 2015-11-14 10:21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은 나오자마자 와락 끌어안았다가 슬쩍 밀쳐두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딱히 호오의 감정이 있는 건 아닌데 그냥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전 정말 오랜만에 알라딘에서 책 주문을 하고 주문과 즉시 오매불망 기다림을 시작했어요. 황지우 시인의 편지가 떠오를 지경입니다 호홋
 

 9. 당신의 무렵.


 그래도 9월이라서 하늘은 구름을 경작하고.

 9월이라서 오늘은, 9라는 이름을 생각합니다.


 그건 마치

 세상을 향해 나올 준비를 마친 아홉 달 태아를 닮았지요.

 10에서 하나 모자란 수라기 보다 

 완성을 향해 가는 가능태.

 미완의 아름다움이 9에는 있습니다.


9로 말하자면 '무렵'이라는 말에 가까운 수죠. 

그러고 보니 9월은 '메밀꽃 필 무렵'입니다.


 9월은 또 여름과 가을의 사이라서

 이 세상의 무수한 '사이'에 대해 생각합니다.

 밤과 아침의 사이, 벽과 벽의 사이,

 당신과 나의 사이......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여름과 가을, 계절의 이 '사이'를 간절기라고도 부르지요. 

 '간절'이라는 말에는 어쩐지 

 건너가려고 하는 간절함이 배어있는 것 같은데요.

 당신에게 건너가려고 합니다.

 이 절룩이는 말들이

 당신과 나 사이에 놓은 접속사 같았으면 합니다.


-허은실,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잠을 자다 무언가 편치 않아서 깨는 때가 많다. 아니, 무언가 편해서 깨는지도 모른다. 

 그저 눈을 번쩍 떴다가 다시 잠들기를 한밤에 너덧 번. 이것이 코골이의 흔적인가 싶어 어쩌다 친구나 가족과 같이 잠을 잘 때면 물어보곤 했는데, 늘 그러지는 않는단다. 한 달에 두어 번, 몸이 지독히 녹진 거릴 때만 그런다니 세계 2차 대전 가스실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들어가야 하는 독일군들이 쓸법한 마스크는 쓰지 않아도 될 일. 그러나 늘 잠을 자다 깼을 때 내 옆의 공기가 생경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

 그럴 때면 침대 아래를 슬쩍 내려다본다. 호랑이 무늬 고양이 칼리가 침대 아래에서 조용히 잠을 자고 있다. 고양이들도 잠을 자는 한밤, 뭔가 불편하다. 그럴 때면 조용히 마룻바닥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창밖을 내다본다. 반짝거리는 불빛이 반딧불이처럼 느껴지면 종종 발목에 고양이가 살갑게 꼬리를 슬쩍 스치며 지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스탠드 불 하나를 켜놓고 책을 읽거나, 작은 소리로 음악을 듣거나 하다 보면 더러는 잠이 오기도 한다. 잠이 온다는 경상도 말투를 나는 참 좋아한다. 어떻게 그것이 내게로 오는 것일까. 

 어릴 적 읽은 커다란 계몽사 동화책에서는 잠의 요정을 찾아 달걀 모양 기구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박사가 나왔는데, 나의 달걀 모양 기구는 책이나 음악인 셈이다. 조용한 소리도 너무 크고 큰 소리는 더욱 조용한 불빛 같은 밤. 






 

 


 허은실 작가의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이 책에 관해 좋은 말, 싫은 말이 많이 생각난다. 이렇게 쉽게 스미는 감성을 지녔다니. 우리 말을 이렇게나 예쁘고 곱게 쓸 수 있다니. 긴 이야기를 짧게 풀어내는 시인의 글씨가 참 부러웠다. 

 그러나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 이렇게 책을 쏟아내는 것에 있어서는 아직 그 성과를 가늠하기가 힘들다는 쪽에 슬쩍 손을 들어 본다. 그것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십만 원짜리 DVD로 풀렸을 때 느꼈던 그런 종류의 마음이었다. 그에 반해 일종의 하드코어 방송을 진행하는 김영하 작가의 경우, 그래. 그 양반 팟캐스트는 설마 오디오북으로 팔리진 않겠지. 정도의 생각을 하는 데서 그쳤달까.





뒤에서 안아주는 것을 좋아한다. 귀지 파주는 것을 좋아한다. 고양이의 관능과 무심함을 좋아한다. 무신경하고 무성의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아름다움과 슬픔과 리듬을 믿는다. 꽃보다 나무, 서슴서슴한 사귐을 좋아한다. 영롱보다 몽롱. 미신을 좋아한다. 집필 오르가슴을 느낄 때 충만하고 잎사귀를 들여다볼 때 평화롭다. 한 생은 나무로 살 것이다. 병이 될 만큼 과민한 탓에 생활의 불편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의 예민함은 스크래치 기법의 뾰족한 칼끝 같은 것이라고. 그것으로 검은 장막처럼 칠해진 어둠을 긁어내는 것이라고 우기며 위로한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지 않지만 상상하려 애써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애쓰는 일로 절반의 삶을 쓰고 싶다. -책 앞날개, 작가소개 글에서.



 


 구부정한 당신의 등, 뒤척이는 밤들, 간신히 있는 것들에게 보내는 이 오프닝. 펼치면 나타나는 앞선 글 중에는 9월에 바치는 글이 있다. 10에서 하나 모자란 수, 무렵으로 존재하는 달. 여름과 가을의 사이. 무수한 '사이'의 글들.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일은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그 서슴서슴한 말 앞에서는, '그래, 이 사이 당신은 오데를 갈라고 여기에 섰나' 하는 민요의 한 자락이 떠오른다. 이 책을 읽다가 창밖 너머 달님을 본다. 얼마 전 추석 이후 이제 기울어갈 달님. 은희경의 소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달을 보지 않으면, 사람들은 어떻게 시간 가는 것을 알지?'라고 말했더랬다. 일본 소설 '종이달'에서 달은 늘 초승달. 앞으로 부풀어가고 점점 차오를 그 가짜 달을 배경으로 사람들은 사진을 찍어 순간을 남기곤 했다. 그렇다면 지금, 추석도 지나 슈퍼 문이라는 정말 대단해 보이는 그 이름도 지나 보기만 해도 눈이 시리던 그 달이 지금의 이 달과 다를 것은 무엇일까. 





 "내가 너무 말을 많이 하지요? 이상하게 당신과 있으니 이렇게 되어요. 당신에게 말하지 않는 일은 이상하게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되는 것 같아요."

 

 스스로 종이달을 지나왔다 생각하는 이가 떠오른다. 구부정한 등, 그의 뒤척이는 밤. 그가 간신히 보아온 것들에게 바쳤던 헌사. 

 이렇게 말하며 비밀을, 과거의 일을, 기억과 추억과 악몽과 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 날 그와 나 사이에는 매콤한 호박 맛이 나는 커피가 놓여 있었다. 추출은 더디고 손길은 바쁘다. 단어는 쉴 새 없이 떨어지고 말들은 물결을 이룬다. 그 비밀과 거짓말 앞에서 나는 좀 숨이 가빴던 것도 같다. 언젠가 시차가 적응 안 되어 며칠 잠을 못 잔 상태에서 꽤 무거운 스웨이드 코트를 입어보며 한숨을 내쉬던 때처럼. 비밀은 늘 발성하는 그 순간 가벼워지고 과거는 생각하는 순간 가장 에로틱한 곳으로 되살아난다. 그래서 이젠 누가 내게 비밀을 말해주겠다 하면 말하지 말라고, 혼자 간직하는 편이 더 빛날 거라고 말하는 나이가 되었다. 





 "말하고 싶으면 말해요. 들어줄게요."


속에도 없는 말을 한 대가로 온종일 낱말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결국 허기가 느껴진 그 날은 찬장에서 컵라면을 꺼내 조용히 끓는 물을 붓고 3분을 기다렸다. 이걸 못 기다려서 면이 익었나 확인해보던 날이 있었고 자판기 종이컵을 빼낼 타이밍을 보느라 허리를 숙이고 기웃거리고, 시간 아끼느라 화장실도 못 가던 때가 있었는데...이젠 아주 여유롭게 노래 하나를 틀어놓고 흥얼거리며 허기를 달래려 기다린다. 

 그와 나 사이. 컵라면과 나 사이. 그 많은 낱말을 겪고 난 다음, 그는 나와 더 가까워졌다며 안도 어린 표정을 지었다만 나는 왜 컵라면이 더 좋았던 걸까. 매콤하고 단 맛이 어우러진 묘한 커피를 자학의 심정으로 다시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비밀을 건네는 자의 마음은 늘 종이달을 지나간 자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한 사람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때. 단어와 낱말, 목소리와 내음, 그림자와 소나기가 지나가는 그런 풍경. 

 나는 사람들이 슈퍼문이라 부르는 달의 앞면과 내가 그 날 들은 달의 뒷면을 조용히 맞대어 본다. 밤은 흐른다. 어쩌면 몰랐어도 좋았을 뒷면. 그러나 뒷면 없이 있을 수 없는 달의 앞모습. 달도, 그 사람도, 파니 핑크의 오르페오도 다 한통 속. '어쩜 남들은 다 아는데 너만 몰랐어. 어떻게 거길 안 가볼 수가 있니.'라고 말하는, 인생의 어둡고 그럴싸한 공간을 스쳐 지나온 이들의 속삭임. 





 나는 아직 멀었다. 

 9월, 달빛이 밝아 어둠 속에 눈이 부시다. 

 종이달은 아직 멀었다고 달님이 조용히 말해 주었으면. 









How come I'm so alone there?


How come you never go there?


How come I'm so alone there?


I went up to a window
Lightning banging on the cymbals
I ripped into the night
Came storm into your eyes



My horse had worked the fields too long
My bear had lost its innate calm
It's true enough we're not at peace
But peace is never what it seems



Our love is not the light it was
When I walk inside the dark I'm calm
Where we look for where we went
It's only echoes in the melody



How come you never go there?
How come I'm so alone there?

How come you never go there?
How come I'm so alone there?



We waste time on blame and weak revenge
Waste energy and projections
We're living proof, we gotta let go
And stop looking through the halo



We carry on as if our time is through
You carry on as if I don't love you
And so we find the way is out
To cut the heart out of the doubt now



The room's full but hearts are empty
Like the letters never sent me
Words are like a lasso
You're an instrumental tune



How come you never go there?
How come I'm so alone there?

How come you never go there?
How come I'm so alone there?


-feist, 'how come you never go there?'-metals 수록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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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4 07: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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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7 18: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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