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했던 겨자색 재킷이 사라지고 나서는, 바람 없이 서늘한 그곳의 공기가 사라지고 나서는, 무인 순환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문을 나섰던 그 이후 느꼈던 마음의 소용돌이가 우박처럼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일주일 전 오늘 우리는 필레 미뇽을 굽고 내가 가진 값비싼 포도주를 꺼내 환송회를 벌였다. 웃고 떠들고 밤늦게까지 이야기하다 잠들었고 그로부터 이틀 후, 나는 공항에서 떠나는 그를 배웅했다. 그는 천천히 사라졌고 나는 천천히 무너졌다. 사람들 그림자가 허깨비 같았고 사방이 텅 빈 것만 같았다. 지독한 환지통이었다.




 햇빛을 한가득 받으며 산책하기.

 그의 것까지 같이 커피를 주문하기. 

 군중 속에서 프라이드 퍼레이드(LGBT  퍼레이드가 이곳에서는 꽤 대중적인 행사이다) 구경.  

 유람선 타기. 

 집에서 스테이크 구워먹기. 

 아껴둔 와인을 따기. 

 항의편지 쓰기. 

 관광명소 둘러보기. 

 동양사 박물관 가기. 

 등산. 

 지도를 보고 길 찾기. 


 


 그 여름, 이 여름, 


 나는 그를 위한답시고 참 안 하던 일을 많이 했다. 그는 나의 가장 절친한 벗이자 나의 소중한 손님이었으니, 그가 보고 싶은 걸 많이 보여주고, 먹고 싶어 하는 걸 많이 차려주고, 내 집에서 머무는 동안 최대한 편안히 머물렀으면 하고 바랐다. 내 마음이 부담되었는지 그는 내 집에 오고 난 딱 사흘 후부터 일주일간을 앓아누웠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먹지도, 일어나지도 못한 그를 내 고양이들만 무심한듯 살뜰하게 보살폈다. 그가 기운을 차린 후부터는 어디에 가고 싶으냐, 무엇을 보고 싶으냐, 먹고 싶은 것이 없냐고 닦달해댔고 일어난 첫날 그는 육개장이라고 말했다. 쇠고기를 삶아서 알맞게 뜯어 넣고, 얼큰하게 갖은 양념을 하여 끓인 국. 그는 한 숟갈 뜨고 몸을 회복했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아스라한 모래바람 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 서걱서걱 불었다. 예쁜 거리도 보여주고 싶었고 내가 즐겨가는 가게의 커피도 맛보게 하고 싶었다. 지나고 나니 모두가 다 내 욕심이었던 것들.




 "무슨 술 마실까? 너 맥주 좋아하지?"

 "맥주는 사귀던 걔가 좋아하던 거야."

 "너는 걔 이야기 빼면 남는 게 뭐야?"

 "없는 것 같아."

 



 나는 이럴 때 잘 스미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다. 그저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을 뿐.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고양이 봐라! 너무 예쁘지 않냐? 나날이 귀여움을 갱신한다! 이런 나의 말에 지청구처럼 '같이 가자! 불출산!' 이라고 말해주는 그의 재주가 부러웠다. 마음이 텅 비었다는 말에 난 머리까지 텅 빈 것 같다는 답을 했다. 시간은 우리 것이 아니었다. 그 어리고 여리던, 교복을 입고 같은 반 교실 책상에 앉아있었던 너와 내가 이렇게 한 달을 같이 보낼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나는 당시에도, 지금에도 스미는 재주는 없는 사람인 채로 남았을 뿐, 동동 뜨다 보니 여기까지 떠밀려 와버렸다고 서로 보며 웃었다. 





 산책, 커피 주문. 비용 대 효율 따져보기. 헤어진 사람 이야기 하기. 서로에 대해 이야기 하기.


 "집 안에만 일주일 있었는데 핏빛을 찬 손목과 비교해보니 이렇게 살갗이 탔어." 


 "네가 주문해 볼래? 외국 나오면 이런 게 기억에 남더라."

 "그건 너 같은 인간이나 해당하는 말이고, 난 이 나라 말 못해. 네가 주문해."

 "사이즈는? 얼음 양은? 샷은 몇 개? 우유는 무슨 종류로 해?"

 "나한테 왜 그런 걸 다 물어보냐! 저기 메뉴판에 있는 대로 할래! 난 서브웨이 주문도 귀찮아."


 "저기 바다 건너 내가 구경해 보고 싶은 데가 있어!"

 "가볼래? 기왕 왔으니까."

 "입장권이 생각보다 비싸. 그 돈 주고 왜 거기에 가냐!"

 "가보고 싶었다면서!"

 "입장권 가격 알기 전 이야기지!"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 지금 너와 하는 일들, 좋은 고기를 사와서 집에서 구워 먹기, 좋은 와인을 곁들이기, 함께 밤늦게까지 이야기하기는 전부 다 헤어진 걔와 하고 싶었던 것들이야."

 

 나는 그에게 이런 답을 한 적이 있다.


 "너와 나는 좋아하는 것도, 취향도, 성격도, 모든 것이 다르지만 나는 네가 하려는 말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어. 아마 너도 그렇겠지."



  

  그가 내 집에 머무는 동안의 중간 즈음, 우리는 숲을 산책했다. 등산이라고 하기도, 산책이라고 하기도 모호한 무엇을 함께 했다. 산장 초입에서 방문객 틈에 길게 늘어선 줄 끝에서 주문한 뜨거운 커피를 마실 때 내가 말했다.

 "나도 이런 데서 커피 내리고 싶어."

 산장, 사람들이 한 번 왔다가는 곳. 공기는 차갑고 바람은 서늘한 곳. 어쩌면 곰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르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을 수도 있는 곳.

 그러자 그가 깊이 수긍하며 말했다.

 "그러게. 나도 여기서 커피 내리고 싶다. 물 반 고기 반이네."




 산에 가면 사람이 착해진다는데 몇 년에 한 번꼴로 산에 왔으니 착하지 않은 날이 태반일 것이다. 고소공포로 손에 땀이 축축해진 내 손을 잡아주고, 아래를 보지 말고 자기 얼굴을 보라고 말해주고, 부지런히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그를 보다 생각했다. 아마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높은 산중에서 '저 앞에 먼저 가던 사람 중 하나 당뇨 걸렸나보다. 서울에서 유명한 병원은 어디라는데....' 하던 그의 말이 쓸데없이 떠오를 것 같다고. 

 꼭,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블루'에서 교통사고의 순간에 '자, 이제 딸꾹질을 해 봐'라고 말하던 남자처럼. 그래서 그 순간이 왔을 때, 이상하게 남은 것은 그가 남긴 낱말 몇 조각, 경쾌한 억양,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이, 집사가 왜 이렇게 늦었나?'하며 고양이 셜록의 앞발을 잡고 있던 그의 모습 같은 것. 나이가 들면서 이별이 자주 다가온다. 오늘 헤어지면서도 겉으로 인사하지 않고 마음이 물러나곤 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가 떠난 다음, 그는 내 방에 물건 하나 남겨두지 않고 흡사 여기 다녀가지 않은 듯 사라졌다는 생각을 하다가 세면대의 가그린 병 하나를 보고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제목은 김행숙 시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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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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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錦繡

1.수를 놓은 직물

2.아름다운 직물이나 화려한 의복

3.아름다운 단풍이나 꽃을 비유하는 말

4.시문, 훌륭한 문장을 비유하는 말




 금방이라도 변할 것 같은 빛을 바탕으로 흩날리고 바스러지는 잎사귀, 한글과 한자로 쓰인 책 제목과 작가의 이름. 1982년, 미야모토 테루가 쓴 흰 아름다운 책을 손에 넣었습니다.




햇빛이 넘치고 바람이 가득하던 날, 집에 돌아오던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하늘이 유난히 파랗고 높은 날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길가 담장을 따라 자란 푸른색 나뭇잎이 더 눈에 띄었고, 그 푸른색 속의 노란빛도 더 그랬겠지요. 나뭇잎은 온통 짙은 초록색이었어요. 그런 초록의 나뭇잎이 담장을 둘러 빼곡했는데, 그중 유난히 샛노란 개나리 빛의 뭔가가 눈에 띄었어요. 늦거나 이른 봄꽃인가, 싶어 보았더니 그 샛노란 빛깔은 나무의 여리고 아픈 잎사귀였습니다. 너무 연약해서 꽃으로 보이는 잎을 만지려다가, 마침 머리 위에서 새가 크게 울어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어요. 그것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지만, 갑자기 작년에 읽었던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가 다시 떠올라 책장을 펼쳤습니다. 재독을 잘 하지 않지만, 다시 따라가는 이 남녀의 편지는 제 기억과는 다른 부분이 조금씩 있었어요.



어느날 새벽 5시에 사건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2층 침실에서 자고 있던 저는 가정부인 이쿠코 씨가 깨워 일어났습니다.

 "야스아키 씨께 큰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쿠코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목소리가 떨려 저는 심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저는 파자마 위에 카디건을 걸치고 계단을 뛰어내려 갔습니다. 전화를 받아 보니 굵고 차분한 목소리로 경찰서라고 하면서 아리마 야스아키 씨와 어떤 관계냐고 물었습니다.

 "안사람입니다만." 저는 추위와 동요로 떨릴 것 같은 목소리를 억누르며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나서 사무적인 어조로 당신 남편으로 보이는 남성이 아라시야마의 여관에서 동반자살 사건을 일으켰다, 상대 여성은 사망했지만 남편은 어쩌면 목숨을 건질지도 모르겠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데 아주 엄중한 상태이니 당장 오시라, 하며 병원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아키와 아리마는 이혼하게 됩니다. 십 년의 시간이 흘러 마음이 무뎌질 무렵 자오의 달리아 화원에서 돗코누마로 오르는 케이블카 리프트 안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아키가 아리마의 주소를 알아내어 편지를 보내지요. 아키는 그저 당시 동반자살 사건을 일으켰던 여자, 유카코의 부친이 자살 사건 이후 자신을 방문하여 사과했던 일을 전하는 걸 목적으로 우편함에 이 편지를 넣는다고 썼지만...... 정말, 그랬을까요?



 저는 이 때로는 조용하고 때로는 섬뜩한 이야기가 주는 매력에 다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가 어느정도 자극적이고, 미야모토 테루에게는 뒷페이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재주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인물들의 마음이 심연에서 차츰 뭍으로 오르는 과정에서 나름의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살인은 격정의 범죄입니다. 어지간한 마음의 동요, 혹은 계획이 있지 않고서야 벌이기 힘든 일이지요. 그런데 이 유카코 라는 여성은 내연관계에 있던 아리마를 찌르고, 자신도 찔러 스스로 죽고 맙니다. 그 격정이 어쩌면 그렇게 활짝 핀 꽃 같은 자기까지 죽인 것일까. 그리고 그 뒤 시간은 왜 그렇게 잔인한 것일까. 그런 생각이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들었다면, 어젯밤 다시 읽었을 땐 이 두 사람의 차분한 격정이 향하는 방향이 꼭 사람의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키와 아리마, 이 두 사람의 편지가 모조리 제 마음과 쏙 닮았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아리마는 유카코에 대해 써내려간 아리마의 편지에 격분해서 물음표를 잔뜩 넣은 편지를 쓰게 되고, 아리마는 그에 대해 '저에게 유카코와의 전말을 써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신을 보낼 때가 그랬어요. 

 또는, 기막힌 사업 아이템을 내놓고도 오히려 아리마에게 '역시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저 같은 사람은 결국 여자라니까요. 거기까지 머리가 안 돌아가요.' 라고 레이코가 감탄할 때엔 슬프기도 했어요. 아리마가 어떻게 움직일지 다 예측하고 그에 선수를 두는 대담한 이 사람이, 1982년의 여자였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고서야 이 이야기는 다른 시대의 이야기라는 것을 다시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소설은 작은 이야기입니다. 그 속에서 무엇이 정말 리얼한 것일까요? 저는 이야기가 시대를 벗어날 수도, 혹은 시대를 반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의 독자는 책을 읽기에 앞서 그 책이 언제 일어난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앞으로 부모님에게 효도해야겠다든지, 혼외정사를 하는 사람들을 벌주어야겠다든지 하는 일체의 도덕적 판단을 하게 된다면 그 소설은 실패한 소설입니다. 그 속의 미학적 구조와 진정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게 되었다는 말이니까요.

 그러나 오히려 이 책의 모든 인물은 도덕, 윤리의 축이 아닌 뭔가 다른 저마다의 기준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키가 혼외정사로 아이까지 둔 남편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였다, 라고 합니다만 아키야말로 자기 인생의 패턴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신기한 것은, 아키의 그 노력이 출구를 찾게 되는 것은 오히려 가장 비논리적인 레이코의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서 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학실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깨달은 것은 아니다. 군대로 끌려간 네 아들이 먼 남방에서 차례로 죽어 나간 뒤 곧바로 종전을 맞이하고, 그리고 1년 가까이 지나 나는 쉰 한 살이 되려 하고 있었다. 내 아들들은 왜 서른도 안 되어 죽어야만 했는지를 생각하면서 불탄 들판인 더운 오사카의 어느 거리를 걷고 있다가 문득 생각한 것이다. 나는 어쩌면 죽은 아들들과 또 어딘가에서 만날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만날 것이다. 그것도 내세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다시 귀여운 아들들 중 세 명을 만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비할 데 없는 기쁨이 느껴져 눈물을 흘리고, 비할 데 없는 슬픔도 느껴져 눈물을 흘렸다. 나는 네 개밖에 없는 손가락을 몸빼 바지의 주머니에서 꺼내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나는 내내 서서 그 기분 나쁜 손을 얼마나 오랫동안 응시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나 자신도 오싹해질 만큼 추하고 무서웠다. 하지만 그 추함과 무서움의 덩어리 같은 타고난, 네 개밖에 없는 손이 왠지 이 세상에서 다시 한번 아들들과 틀림없이 만날 거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던 것이다. 




 레이코의 할머니는 왼손 손가락이 네 개였습니다. 이 손가락이 네 개라는 것과 전사한 아들들을 다시 만날 것이라는 믿음은 실은 전혀 관계가 없지요. 그러나 할머니는 자신의 손가락 네 개와 전사한 아들 중 셋을 떠올립니다. 자살한 아들인 겐스케는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을 테니까, 만날 수 없다는 생각, 그러나 셋은 꼭 만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어쩌면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겐스케를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가여운 아이로 마음속에 품고요. 



 어쩌면, 우리가 살아있는 일은 종종 이상할 만큼 인과관계를 벗어납니다. 아키의 두 남편이 외도한 것은 아키의 행동과 무관한 일입니다. 아리마가 백화점 6층 침구 매장에 발을 들인 것과 아키가 낳은 아이가 아주 아팠던 것에도 아무런 인과관계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키는 필시 누군가와 결혼해도 딴 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기는 업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아내려고까지 합니다. 이것은 손에 쥔 카드와 빼앗긴 카드를 비교해보려고 하는 노력이지요. 

 



 자신의 무엇인가가 원인과 결과가 되어 지금에 되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던 아키가 오히려 홀가분해 하는 것, 레이코의 할머니가 아들을 만날 것이라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 아리마가 지도를 펴고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하며 미용실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것. 

 이 세 사람의 이야기가 길가 담장을 따라 웃자란 푸른색 나무의 꽃같던 노랑 잎사귀 같이 느껴졌습니다. 종종 하늘이 높고 푸르거나 낮은 회색빛으로 내려앉으면 어떻게든 흔들리거나 언젠가는 사라질 그 꽃같던 잎사귀. 

 소설 속 아키는 내도록 십년 전의 전남편의 자살 사건을 잊지 못하다가 모든 것을 알게 된 다음 더이상 뒤돌아보지 않게 됩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편지는 그러므로 긴 터널을 빠져나가려는 사람의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도 같습니다. 빠져나가고 나서야 손에 쥔 것을 조용히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터널이, 너무 길거나 짧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인간의 바람이지만 그것조차도 시간의 일이겠지요.




나이프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은 세오 유카코 씨. 죽어 있는 자신을 바라보았으면서도 다시 살아 돌아온 당신. 나이 들어 한층 일에 집중하고 있는 쓸쓸한 아버지. 또 하나의 숨겨진 가정을 갖고 그 여자와의 사이에 태어난 세 살짜리 여자아이의 아버지로서 고심하고 있을 가쓰누마 소이치로. 당신이 고양이에게 먹히는 쥐를 봤던 바로 그 시각에 근처 달리아 화원의 벤치에 앉아 무한한 별들을 바라보았던 저와 기요타카. 우리의 생명이란 얼마나 불가사의한 법칙과 구조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요?

 언제까지 써도 끝에 없습니다. 드디어 펜을 놓을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우주에서, 불가사의한 법칙과 구조를 숨기고 있는 우주에서 당신과 레이코 씨가 앞으로도 쭉 행복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이 편지를 봉투에 넣고 발신인을 쓰고 우표를 붙이고 나면 오랜만에 모차르트의 <39번> 심포니에 귀를 기울이려고 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무쪼록 내내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그럼 이만 줄입니다.

11월 18일

가쓰누마 아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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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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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검은 양조장'카운터에 기대앉아 나는 맥주 한 잔을 마신다. 이봐, 오늘부터 넌 혼자야. 홀로 세상에 맞서야 해. 마음이 안내키더라도 사람들을 보러 나가 즐기고 연기를 해야 할 거야. 이 땅에 발붙이고 있는 동안은 말이야. 오늘부터는 수심에 찬 원들만 소용돌이치는군......전진이 곧 후퇴인 셈이지. 그래,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과 레그레수스아드 푸투룸은 같은 말이야. 너의 뇌는 압축기에 짓이겨진 한꾸러미의 사고에 불과하지.

 햇살을 받고 앉아 맥주를 마시며 카렐 광장은 쉴새없이 오가는 사람들의 무리를 지켜보았다. 젊은 사람들, 젊은이와 학생뿐이다. 그들의 이마에는 모두 별이 하나씩 새겨져 있다. 삶이 시작되는 순간 저마다의 내면에 싹트는 천재성의 표징이다. 그들의 시선은 힘을 발휘한다. 소장이 나를 바보 천치라고 부르기 전에는 내게서도 샘솟던 힘이다. 나는 난간에 몸을 기댄채 바라본다. 전차들이 돌며 한 방향에서 내려와 다른 방향으로 되올라간다. 그것들의 붉은 줄무늬를 보니 내 마음도 유쾌해진다. 내게는 이제 시간이 있다.




 어떻게 지내는지를 묻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조금씩 아스라해질 때,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빙하가 녹은 물에 세수하고, 짧은 시간 빨리 샤워를 끝내야 하고, 조그만 노트에 그림을 그리거나 수첩에 뭔가를 적으며 신문도 인터넷도 도착하지 않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니, 마침내는 나는 아직도 집에 온 것인지, 여행 중인지가 헛갈렸던 봄날. 인터넷도 안되는 곳에 가져가야 할 책은 얇고 짧고 깊은 것이어야 했다. 깊은 초록빛의 얇은 책, 와주었구나. 



 

밀란 쿤데라, 줄리언 반스, 제임스 우드가 극찬한 책. 페이지를 조용히 천천히, 커피는 진하고 깊게. 밤에는 집에 있을 고양이들을 생각하며 별도 보고 타들어 가는 나무 냄새를 맡으며 곁의 휘파람 소리를 듣던 기억. 삼십오 년째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는 남자와 삼십오 년 남짓 종이 더미를 뒤지는 나의 공통된 기억. 내가 누구이든, 어디에 있던 간에 이름 앞에 숨은 그림자를 캐내는 듯한 목소리.





 폐지를 압축하던 남자, 한탸. 그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 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책 속에서 그는 문장이 천천히 스며들어 그의 뇌와 심장을 적시고, 혈관 깊숙이 모세 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고 고백한다. 책과 글씨가 그 자신이 되고, 그가 흡수한 것이 곧 그 자신이 되는 경지에 오른 글을 좋아하는 남자가 하는 작은 회상. 책 한 줄 읽지 않은 그의 연인, 그러나 누구보다도 멀리 갈 수 있었던 여자. 많이 읽는 것과 깊이 읽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똥스키를 타던 여자는 온몸으로 보여준다. 물 건너간 기품, 절망보다 먼저 터지는 웃음.





나의 만차는 투숙객들이 햇볕에 몸을 그을리고 있는 테라스를 따라 평소처럼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사업가 이나의 안목이 정확했다. 그날 만차는 정말이지 멋졌다. 그런데 그녀가 거기에 있던 투숙객 몇 명을 막 지나친 순간 여자들 몇이 돌아보며 웃음을 참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올수록 여자들의 웃음이 더 자지러졌다. 남자들도 뒤로 벌렁 나자빠지며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열심히 읽는 척하거나 차라리 눈을 감았다. 마침내 만차가 내 곁을 지나가는 순간 나는 보았다. 그녀가 신은 한쪽 스키, 그러니까 발꿈치 바로 뒤쪽에 큼직한 똥이 얹혀 있는 것을. 야로슬라프 브르흘리츠키의 아름다운 시에도 나오는, 문진만큼이나 큰 똥......나는 대번에 이해했다. 만차의 삶에서 이제 제 2막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명예를 지키지 못하고 치욕을 견뎌야 하리라고 예견된 삶이었다. 




 이 똥스키 사건에서 한탸는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생각한다. 폐지를 압축하며 만차를 생각하는 한탸, 밤새 샴페인을 마시며 용서를 빌었건만 결국, 떠난 만차. 그가 압축하기로 한 노자의 도덕경. 

 치욕을 겪고 명예를 지킨다는 내용의 페이지를 압축통 한가운데 놓는다. 바스러지는 종이, 바스러지는 명예, 결국 지금에야 회상하는 삶의 한 토막.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면 페이지를 더 넘기는 것이야말로 읽는 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조금씩 맞추어가는 호흡이 얼마나 황홀한지를 느끼게 해주는 문학적 성취. 책과 나 사이의 적절한 거리, 내 머릿속에 천천히 들어오는 작가의 목소리. 

 책의 각 장은 한탸의 일을 소개하는 짧은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어느 것 하나 같지 않고 조금씩 끝이 맞물려 돌아가서, 보흐밀 흐라발은 글씨와 이야기로 이어지는 작은 푸가를 완성한다. 




 침대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아주 작은 생쥐 한 마리가 내 가슴팍 위로 떨어져 미끄러지듯 달아나 몸을 숨겼다. 내 가방이나 외투 호주머니에 두세 마리가 딸려온 게 틀림없었다. 마당에 변기 냄새가 가득 퍼져 있는 것을 보니 곧 비가 퍼붓겠다 싶었다. 술과 노동으로 멍해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틀 동안 내 지하실을 청소하며 생쥐들을 희생시킨 참이었다. 그저 책이나 갉아먹고 폐지 더미에 뚫린 구멍 속에 살며 그 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들을 낳고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소박한 짐승들인데. 추운 밤이면 내 품안에서 공처럼 웅크렸던 내 어린 집시 여자처럼 몸을 사린 생쥐들이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절망에 앞서 웃음이 먼저 나오던 만차의 상황이 희비극이라면, 따스한 작은 둥지 속 생쥐를 뒤늦게 걱정하는 한탸의 상황은 부조리극에 가깝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지도 않고, 앞에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 뒤에 나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가 아닐까. 그저 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들을 낳고 키우고, 추우면 따뜻한 품안에 웅크리는 생쥐를 떠올리는 한탸가 보아온 것이 무언이던가. 왕실의 문장이 찍힌 책, 노자의 도덕경, 니체와 사르트르, 카뮈.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코카콜라를 마시며 그리스와 불가리아 휴가를 생각하는 신식 노동자들 앞에서 무너진다. 똥스키 사건으로 만차의 삶이 제2막으로 들어섰다면, 신식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한탸의 삶은 막장으로 들어선다. 갱도의 끝, 더는 갈 곳이 없음을 깨달은 그가 찾는 곳은 그가 평생을 바쳐온 압축기이다. 





 평생을 우체국에서 일하느라 등이 굽고 무릎이 불편한 동료들을 보던 '우체국'의 찰스 부코스키가 그려낸 노동, 접시닦이부터 시작해 그날그날 찾아드는 잡일을 하고 공원 벤치나 구빈원에서 체험한 조지 오웰의 밑바닥. 찰스 부코스키가 그의 노동을 담배 한 개비 후 느껴지는 쓴맛처럼, 조지 오웰이 그의 노동을 걸인의 너덜거리는 신발 밑창처럼 그렸다면 보후밀 흐라발은 한 세계의 종말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늙은 노동자의 회상을 더없이 깊은 명상으로 보여준다. 

 조금의 술 한 잔과 아스라한 모닥불 연기를 쐬고 나면 천천히 다가오는 맑은 새벽. 

 사라져가는 것들이 쌓인 새벽, 무리가 아닌 그 속에 스민 한 사람의 몸냄새가 풍겨오는 밤의 끝.







 여행의 끝, 어둠 속의 집을 보면 조용히 안도감이 든다. 여전히 낱말과 글씨 앞에서 조용해지고 뒷마당의 새들에게 줄 모이를 사게 된다. 꼬리털을 살짝 스치며 지나가는 고양이를 보면 고향의 '새첩다'는 말을 떠올리다 그곳 공기를 생각하기도 한다. 잘 돌아와 반갑다는 인사를 들으며 눈뜨고 잠드는 생활. 한탸의 생활처럼 바깥이 아수라장이어도 여전히 호기심과 품위를 유지하고픈 인간적인 욕망 하나쯤을 품은 생활로 돌아와 다시 한번 책장을 열었다 닫는 봄날에 스치는 시 같은 소설.





...이 작품을 규정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자유나 저항 같은 거창한 단어보다 '연민'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도처에 허무가 널려 있어도 삶은 자체의 생명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불가항력적이면서 매력적인 것임을 흐라발은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일상의 삶이 신성화되어 예배의 노래 같기도 한, 짧지만 강렬한 이 책을 읽노라면 책을 관통하는 한줄기 바람, 성령이기도 한 숨결에 단숨에 실려가는 느낌이 든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두고 흐라발 자신은 자신의 삶과 작품 전체를 상징하는, 그가 쓴 책들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책이라고 고백했다. 그가 세상에 온 건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쓰기 위해서였다고.-역자 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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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4-10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를 못하겠더라고요. 그런게 서재브리핑에 이 글에 대한 리뷰를 쟌님이 썼다고 뜬 순간, 이 분은 좋아했을 것이다! 단번에 생각했어요. 아니나다를까, 별 다섯이네요. 훗.

Jeanne_Hebuterne 2017-04-10 10:2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다락방님.
책은 요즈음 많이 읽었는데 리뷰에 많이 소홀했었어요.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라는 보후밀 흐라발의 전작이 참 좋아서 이 책도 기대가 컸는데, 전 이 책이 산문을 가장한 시 같이 느껴졌어요.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 쓰고,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그런데, (제가 너무 똥똥거리나 싶지만) 똥스키 부분은 우습지 않던가요ㅠㅠ 전 우리집 고양이 김칼리의 풍성한 털 탓에 못볼 것을 본 적이 꽤 되어서 꼭 만차 라는 여자친구가 김칼리같더라구요! (아무개 님이나 하이드 님은 나를 이해할 것이야...라고 집사를 끌어들여 보는데, 이건 김칼리만 이런지도ㅠㅠ)
너무나도 귀엽고 우아하게 아아아아?? 하면서 다가오는데 풍성한 꼬리털에 그것을 본 순간..만차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남의 일 같지가 않았어요..

더군다나 책을 압축통에 늘 넣고, 온갖 책을 다 접하는 남자라니, 묘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고, 그 스스로가 압축통에 들어가게 될 때엔 이렇게 사라지다니, 슬프기도 하고. 보후밀 흐라발은 늘 제겐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자마자 다시 앞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작가였어요. 줄리언 반스가 톱니바퀴처럼 낱말을 딱닥 맞춘다면 흐라발은 돌림노래, 푸가의 울림을 만드는 작가랄까요.

미세먼지 조심하시고, 또 자주 뵈어요^^

mysuvin 2017-04-14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다 그래서 장바구니에 담아놓고...이러다 해를 넘기겠구나 싶을 정도로 뒤로 밀리고 있는데 한 번 도전해 볼까 싶네요. 이렇게 예쁜 리뷰는 오랜만에 읽어봐요~♥ 다른 리뷰들도 천천히 보고 가야겠어요!

Jeanne_Hebuterne 2017-04-19 10:22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mysuvin님!
실은 저 이 책 읽는데 시간이 정말 오래 걸렸어요. 앞에 한 페이지 읽었다가 다시 되돌아가서 또 읽고, 이게 무슨 말이지? 하며 또 곱씹고, 뒷장 먼저 쓰윽 훑어보기도 하다보니 책은 얇은데 정말 오래 걸렸어요.
오래, 천천히, 조용히 들여다보아야 하는 얼굴이 있는 것처럼 책들도 그런듯 합니다. 한번에 빨려들게 하고 일체의 거부감도 없이 읽다가 책장을 덮고나면 줄거리가 두번다시 기억나지 않는 종류도 있고, 반대로 계속 나를 튕겨내고, 밀어내고..그러나 책장을 덮고나면 종종 오랫동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이 책은 후자의 경우에요. 저는 두 경우 모두 우리 삶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벚꽃이 질 즈음에는 이런 느긋한 독서도 좋을 것 같아요.
미세먼지 조심합시다ㅠㅠ
 

 "에옹! 에에에옹!"

 아까처럼 잦아들겠거니 하며 다시 눈을 감아 보았지만, 새끼고양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옆집에서도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내려가 봐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믿기지 않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아! 시끄러워 잠을 못 자겠네!!! 내 야구 빠따 어디 갔어! 내 이 도둑고양이 새끼들 다 잡아 죽여버릴라니!"

 자리에서 90도로 로보트처럼 삐끄덕 하고 튕겨져 일어났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부엌에 씻어 놓은 햇반 그릇 하나와 간식 캔을 호주머니에 넣자마자 문을 잠그고 파자마 바람으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숨을 몰아쉬며 새끼고양이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옆 건물 1층 주차장에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오도카니 건물 현관을 등지고 앉아 울고 있었다. 

 ... 순간 묘하게 뒷덜미가 서늘했다. 이상한 느낌에 슬며시 뒤를 돌아보니 얼마쯤 떨어져 있는 어둠 속에서 아저씨 하나가 비틀비틀 약주를 거하게 한 모양새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온."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을 말과 판이하게도 다르게 아저씨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물체가 나를 소리 없이 경악케 했다.

 "나비야. 나비 시키. 이 도둑괭이 새키. 어디갔어. 이리 나와 봐!"

 아저씨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붉은색 벽돌 한 개였다. 



 인연과 묘연이 엉키어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잠시 맡아만 봤다가 입양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고양이 넷을 맡은 것이 올해 5월이 되면 이제 채 2년이다. 엄마 고양이 하나와 새끼 셋, 그중 엄마 고양이는 입양처가 생겨 중성화 수술을 한 다음 보냈고, 새끼 셋은 지금도 나와 함께 지낸다. 얼마 전 동물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고 몸무게를 재어보니 그나마 제일 큰 수놈 셜록이 4킬로그램, 암컷 칼리가 3.6킬로, 님부스가 3.1킬로그램. 잘 먹고, 잘 놀고, 잘 싸고, 잘 난다. 세 마리의 이름을 지었다고 했을 때 지인 하나가 '너 그러다가 못보낸다'라고 한 말대로, 임시 보호 기간이 끝나고도 나는 셋을 보내지 않고 데리고 있기로 했다. 그래서 잠시 여행을 결심했을 때 셋을 함께 케이지에 넣어 같이 여행을 다닌 다음부터는 아예 여행을 포기했다. 



 포기한 것은 아래와 같다.



 =내가 삼남매 칼리, 셜록, 님부스와 함께 살면서 포기한 것=

고양이 털 안묻은 검정 옷

고양이 털 안묻은 흰색 옷

여행

외박



반면 삼남매와 함께 살면서 하게 된 일들은 아래와 같다.



=내가 삼남매 칼리, 셜록, 님부스와 함께 살면서 하게 된 일=

고양이 화장실 청소(매일 2회, 화장실 살균소독 주 1회)

집안 환기(매일)

바닥 청소(진공청소기, 진드기 퇴치제 살포 주 2회)

캣사료, 캣 모래 구입

고양이용 음식(주로 닭가슴살, 새우, 가끔씩 연어) 상비





귀여우면 됐지 뭘 더 바래?-김칼리, 1년 10개월, 암컷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냥?-셜록 딩글베리, 님부스 이천(1년 10개월령, 수컷, 암컷)


 아무리 보아도 득보다 실이 많은 이 관계인데, 이들이 눈을 맞추며 내게 말을 걸고, 침대에서 곁을 파고들고, 내게 놀자고 장난감을 물고 올 때면 예상치 못한 만족감이 스민다. 이들은 간섭하지 않고 공감한다. 종종 내가 집을 오랜 시간 비우면 밥을 먹지 않고 기다린다. 고양이는 장소를 섬길 뿐, 주인을 모른다니. 개처럼 충성스럽지도, 머리가 좋지도 않다니. 원래 길에서 사니까 버리고 가도 된다니, 역시 '신비롭다'는 말의 어원은 '모른다', 내지는 '관심 없다'가 아닐까. 






 


 윤소해의 '커피 타는 고양이'는 고양이에 관심 없으면 지나치기 쉬운 책이다. 책의 언어는 뜨겁고 종종 집사의 마음이 글의 리듬을 앞질러가서 정돈되지 않은 듯 보일 수도 있다. 어쩌랴. 지나친 애정은 불출산 맑은 공기를 불러올 수밖에. 어쩌면 전의 고양이 키우는 집사들과 2017년 지금 고양이 키우는 집사들은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혹은 1990년대 초반 정도만 하여도 고양이를 돌볼 수 있는 동물병원도 드물었고, 길고양이를 보살피는 사람은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동물 보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나만 빼고 다들 고양이 있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이 키우고, 많이 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버려진 고양이들 42마리와 윤소해가 만든 풍경이 '커피 타는 고양이'라는 캣카페이다. 




 길고양이들과 유기된 고양이들을 구조하면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순간이 있다. 도둑고양이에게 또 밥을 주면 망신당하게 할테니 각오하라거나 죽여버리겠다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듣는 순간도 아니다. 오랜 시간 밥을 챙겨주며 멀리서 자라는 것을 지켜보던 아이가 누군가의 잔인함과 서슬 퍼런 외면 때문에 보란 듯 처참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다. 

 가난한 살림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병원비에 허덕이며 비어있는 통장 잔고를 매번 확인하는 순간도, 가족과 친구에게 왜 그러고 사냐며 한심하다는 핀잔을 듣는 순간도 아니다. 오히려 내가 이 아이를 지켜줄 수 없다는 걸, 내가 이 아이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직감하는 그 순간이다.




 왜 하필 고양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말할까. 그저 나 자신보다 더 작고 약한 존재, 자신을 챙길 수 없는 존재를 보살피는데 왜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 라는 질문에 '그럼 당신은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에 반대합니까?'라고 되물은 적이 있다. 최근에는 '너는 왜 그렇게 도둑고양이 밥을 주고 다녀?'라는 질문에 '그러면 너는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해?'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책임질 수 없으면서 모든 생명을 떠안고 데려와 내버려두는 것이 애니멀 호더라면, 나는, 혹은 저자 윤소해는 자기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어떤 친구는 차라리 독거노인이나 기아난민을 도우라는 말을 들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왜 틀린 일,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보통 죄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왜 약한 존재를 보살피는 사람에게는 그가 한 일 말고 다른 일을 해야 한다고 종용할까. 





 지하철역 부근에서 성인 남자에게 빗자루로 두들겨 맞다가, 꽁꽁 묶은 쓰레기 봉지 속에 버려져서, 이민 간다고, 여행 간다고, 결혼한다고, 들였다가 알레르기가 있거나 다른 이유로, 임신해서, 줍냥했다가 부모님이 반대해서, 싫증 나서.




 42마리의 사연이자 흔히 접하는 사유. 동물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한 나라의 국격이 보인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떠오른다. 저자의 희망은 그래서 카페 문을 닫는 것이다. 더는 버려지는 고양이가 없어서 카페 문을 닫는 것. 자생하기 위해 영업하는 곳. 생명이 돈으로 거래되는 것을, 무지가 무관심으로, 혹은 폭력으로 번지는 것에 반대하는 곳. 

 거대한 담론보다 한 마리의 고양이. 커피 타는 고양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로 언젠가의 쉼터를 준비하고 싶다. 동물이 가족이라고 하면 이해 못 하는 시선이 있어도 좋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아직도 도둑고양이가 표준 국어로 등재되어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저자가 후기에 썼듯이, '어느 날 불현듯 만난 고양이가 지금의 성격과 상태에 이르게 된 원인과 이유가 궁금해지고 그 이유를 알게 되거나 느끼게 되는 때. 바로 그 순간 내가 '움직일 이유'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카페를 운영하면서 반드시 받는 질문이 있다. 

 "도대체 왜 카페를 하시는 거에요? 이렇게 힘든데."

 그러면 한참 부연 설명을 들려준 뒤 마지막에 대답한다.

 "카페를 그만두기 위해서 카페를 합니다."

 사람들은 고양이 카페에 대한 진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고양이 카페에 살고 있는 고양이들은 거의 대부분 품종묘이다. 그 아이들은 숍에서 사왔거나(나는 이 표현을 굉장히 싫어한다. 숍엔느 어떻게 아이들이 오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가정에서 분양받아 데려왔거나.

 애초에 고양이 카페의 존재 자체가 슬픈 일이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고양이들을 제대로 케어한다면 고양이 카페는 엄청난 적자에 시달리다 빚만 떠안고 망할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카페가 영업을 종료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많든 적든 카페의 고양이들은 당장 갈 곳이 없어진다. 품종묘라 하여도 몇 개월 몇 년 동안 입양처가 구해지지 않는 것이 태반인데 하루아침에 그 많은 고양이들을 어찌한다는 말인가. 

 ...더 이상 버려지는 고양이들이 없어서 카페 문을 닫는 것. 이것이 내가 진정 바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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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7-01-31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삼남매 칼리, 셜록, 님부스와 함께 살면서 포기한 것=
고양이 털 안묻은 검정 옷
고양이 털 안묻은 흰색 옷
여행
외박


저도 얼마전 이 얘기 했어요. 예전에 여행 많이 다녔지만, 고양이와 함께 하고 나서, 고양이들 때문에 못 간다고 해도, 제가 얻을 수 있는 것이 고양이와 함께 하는 늘 같은 일상뿐이라고 해도 비교대상에 올릴 수도 없을만큼 고양이와 함께 하는 일상이 소중해요.

별 일이 없는한 내가 녀석들보다 오래 살텐데, 함께 하는 모든 시간 아끼며 잘 보내야지 싶습니다.
말로는 이제 두자릿수 나이라 제 노년도 냥님 노년도 점점 자주 생각하게 돼요.

Jeanne_Hebuterne 2017-01-31 11:48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떠오르지는 않지만 포기한 것이 더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카펫이 깔린 목조건물에 살고, 셜록은 산책냥이라서 매일 뒷마당 풀숲도 다니고 나무에도 올라가고...4,5월이면 벼룩과의 대전쟁이에요ㅠㅠ 병원에서 검사해보니 제가 벼룩 알레르기라는데 겨울 빼고는 가려워서 잠자리가 힘듭니다. 그만큼 예방과 박멸에 신경을 써도 산책냥+중장모+목조건물+카펫 효과가 ....집을 불태우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래도 참고 지내요. 아마 모든 집사들은 뭔가 힘든 점이 있으나 참는 것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여행도 그래요. 함께 다닌다고 해도 세마리를 이동장에 같이 넣고 모래박스 들고 룸서비스 하지말고 푯말 걸고 지내기를 몇 번 해보니 그냥 집에 있고 말자...하게 되더라고요. 남매끼리 떨어지면 힘들겠다는 생각에 셋 다 같이 지내기로 결정하는데 툭탁대며 싸우다가도 같이 그루밍하고 엉켜 자는 걸 보면, 과연 이들과 나는 무슨 인연이어서 이렇게 먼 바다 건너와서까지 만났나..신기해요.

이 글을 쓰다 생각했습니다. 전 모든 사람이 고양이를 좋아하기는 바라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고양이를 좋아하거나, 길고양이를 돕거나, 함께 지내는 고양이에게 정성을 다하는 걸 보고 소위 ‘고나리질‘은 좀 그만 해주었으면...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타인의 취향이고 생명을 대하는 태도이니까요.

덧-말로, 대학까지 보내야죠! 제 주변의 노묘를 돌보는 집사가 ‘난 우리 고양이 대학 갈 때까지 키울거야!‘라던데 그 말이 쏙 박혔어요. 그러니까 오래오래 같이 살기를 바라는 마음..좋아하는 존재를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을까, 생각하는 마음.
 
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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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서른네 살이다. 3년 전 결혼해 지난해에 딸을 낳았다. 세 살 많은 남편 정대현 씨, 딸 정지원 양과 서울 변두리의 한 대단지 아파트 24평형에 전세로 거주한다. 정대현 씨는 IT 계열의 중견 기업에 다니고, 김지영 씨는 작은 홍보대행사에 다니다 출산과 동시에 퇴사했다. 정대현 씨는 밤 12시가 다 되어 퇴근하고, 주말에도 하루 정도는 출근한다. 시댁은 부산이고, 친정 부모님은 식당을 운영하시기 때문에 김지영 씨가 딸의 육아를 전담한다. 정지원 양은 돌이 막 지난 여름부터 단지 내 1층 가정형 어린이집에 오전 시간 동안 다닌다.


 나와 비슷한 나이, 비슷한 지역에 사는 작가의 책을 읽는 것은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도 같다. 이때 소설은 작은 반사판이 되는 것 같다. 도시 생활자라는 별명이 붙은 정이현 무렵부터, 서울이나 대구, 부산, 혹은 다른 친숙한 지역 출신의 작가들이 조금씩, '지금, 여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 이전 작가들은 그러지 않았던 것일까? '그게 이상하게도, 그렇게 됩니다.'라는 어느 소설가의 말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정이현이 '삼풍백화점'을 통해 냉면을 먹고, 백화점에서 어떤 무늬 다이어리를 살까 고민하고, 정장 바지 코너에서 친구라기에는 낯선 그를 만나는 이야기를 그려낸 그 시점이 하나의 갈림길을 만든 때라고 생각한다. 대도시에서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나가고, 커피를 마시거나 쇼핑을 하는 여자의 이야기. 이상하게도 그 전에는 소설 속에서 조금은 보기 힘들었던 이야기들.



 1978년생, 사회학을 공부하고 PD수첩, 불만 제로 등의 작가로 10년간 일했다는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은 제목이 많은 정보를 준다. 82년생, 그러니까 지금 삼십 대 중반, 한국에 사는 여자. 1982년, 여아 낙태 통계 그래프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고 그 이후 99년, 워렌 버핏은 금융위기를 맞은 한국을 돌아본 다음 경구피임약 회사의 주식을 사들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국은 여성인권이 낮았다가 당시 그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으며, 90년대 후반부터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남성과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낮은 혼인율과 출산율. 이것이 그가 예상한 대한민국의 미래였다. 
 결코 원금을 잃지 않는다는 이 주식 전문가의 의견과 맞물리는 82년생 김지영 씨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쉬워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쉽다는 것은 어떤 일이 행해지는 데 그다지 많은 수고나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고,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이야기의 속도감이 상당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나는 외려 이 '쉬움'이 나로 인한 것임을 안다. 한 치의 틈이 없이, 내가 잠시 82년생 김지영이었으므로. 그래서 나와 이 글의 간극이 긴밀하여 마음이 급해질까봐, 그 점이 저어된다.



"원래 애 낳고 나면 마디마디가 다 약해져. 모유 먹이면 약도 편하게 못 쓰는데. 물리치료 받으러 올 수는 있어?"
 김지영 씨는 고개를 저었다.
 "손목 많이 쓰지 말고 잘 쉬어. 어쩔 수 없지 뭐."
 "애 보고 빨래하고, 청소하고.......손목을 안 쓸 수가 없어요."
 김지영 씨가 푸념하듯 낮게 밀히지 할아버지 의사는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쭈그려서 쓸고 닦고 다 했어. 이제 빨래는 세탁기가 다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다 하지 않나?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더러운 옷들이 스스로 세탁기에 걸어 들어가 물과 세제를 뒤집어쓰고, 세탁이 끝나면 다시 걸어 나와 건조대에 올라가지는 않아요. 청소기가 물걸레 들고 다니면서 닦고 빨고 널지도 않고요. 저 의사는 세탁기, 청소기를 써 보기는 한 걸까.
 의사는 모니터에 뜬 김지영 씨의 이전 치료 기록들을 훑어본 후, 모유 수유를 해도 괜찮은 약들로 처방하겠다고 말하며 마우스를 몇 번 클릭했다. 예전에는 일일이 환자 서류 찾아서 손으로 기록하고 처방전 쓰고 그랬는데, 요즘 의사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손으로 모심고 낫으로 벼 베고 그랬는데, 요즘 농부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라고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김지영 씨가 하는 대가 없는 노동, 까닭 없는 힘듬이 과연 대가를 측정할 수 없고 까닭이 없이 일어나는 일일까? 왜 김지영 씨의 말이 새롭게 들리고, 할아버지 의사의 말은 너무 많이 들어 당연한 것이 되었을까? 왜 그는 언어에 대한, 단어에 대한 선택조차 제대로 하기 힘든 것인가?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왜 여성은 자기 몸에 대한 주도권을 가질 수 없을까? 왜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해야 할까? 아무도 차별받지 않는다지만 그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와 누구의 귀로 들어가는 것일까? 많은 틀린 일을 하는 이들은 자기 행동에 그 어떤 반성도 자각도 없건만 왜 페미니스트들은 자기검열을 거쳐야 하며 다른 모든 방면에서 조심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아직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이야기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객체로서, 'her'로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여자이며, 화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책과 어떤 음악은 지독한 여성혐오자가 남긴 것일 때도 있다. 나는 짧은 드레스를 입는 것을 즐기고, 하이힐도 좋아한다. 그 하이힐이 내 엉덩이를 치켜올려주고, 남자들로부터 시선을 받는 것을 즐긴다는 것과는 다른 뜻이다. 왜 내가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서는 것이 남자들의 시선을 의식해서라고 재단하는 것일까?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없는 것은 그 물건이 무거워서이지, 내가 남자처럼 힘을 길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유와 당위를 헛갈리는 것은 어리석은데, 왜 김지영 씨는, 김지영 씨의 주변 사람들은 이 덫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을까? 




 "남자애들은 쉬는 시간 10분 동안도 가만히 안 있잖아. 축구든, 농구든, 야구든, 하다못해 말뚝박기라도 한다고. 그런 애들한테 어떻게 와이셔츠 목까지 닫아 입고 구두 신고 다니라고 하겠어?"

 "여자애들이라고 싫어서 안하는줄 아세요? 치마에 스타킹에 구두까지 신겨 놓으니까 불편해서 못하는 거라고요. 저도 국민학교 때는 쉬는 시간마다 말뚝박기하고 사방치기 하고 고무줄놀이 하고 그랬어요."



 그 그물망이 너무나도 촘촘하고 엄밀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이것이 전 사회의 암묵적인 동조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지금이 아무리 여자가 대학을 가고, 판사도 하고, 이전과는 다름을 강조하여도 그것은 전과의 다름이지 남자와 같은 자유를 누린다는 뜻은 아니다. 씨네 21의 이다해 기자가 말하였듯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라는 질문에는 '그럼 당신은 남자와 여자,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까?'라고 되받아치는 것이 적절하다. 적절한데, 문제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감히 '나치'라는 단어를 붙인 '페미나치'라는 조어를 만드는 시대에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모욕을 모욕이라 말하기 힘들 때가 있고, 내가 느꼈던 이상한 감정을 상대에게 설명하여야만 할 때도 있다. 내가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해서 누군가가 내 자동차를 들이박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왜, 유독 여성 범죄에 관해서, 여성이라는 특질에 대해서는 원인과 당위가 뒤바뀌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조남주의 소설은 조용하다. 지나치게 앞서나가거나 뒷걸음질 치는 법 없이 김지영 씨의 시간을 연도별로 훑는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통계자료나 당시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그 자료는 김지영 씨의 이야기에 간결한 힘을 싣는다. 

 이것은 일어나지 않았던 일, 허구가 아니라 지하철 어느 역에서 네 옆자리에 앉았던 어떤 여자의 이야기라고, 집회에 나가 함께 촛불을 들고, 무엇이 떳떳하고 옳은 일인지,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무엇보다도 너와 다를 것이 없는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어쩌면 좀 과할 수도 있는 소설 끝 진료 부분에 이르러서는, 좀 과장됐어. 그런데, 그게 그렇게 과장된 것도 아니고 다시 보면 실제 있는 일이잖아? 하는 자조적인 헛웃음이 나온다. 길가며 무심결에 바라본 누군가의 모습이 사실은 거울에 비친 나였음을 자각하는 순간 나오는 표정과 같은 색깔의 웃음. 나는 이 헛웃음이 아무 성과 없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거리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책.



 *따옴표 글은 모두 책속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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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6-12-12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냥이와 잘지내시죠?

Jeanne_Hebuterne 2016-12-28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개님!
삼남매 모두 잘 있습니다! 요즘은 사료 고민이 많아요ㅠㅠ 제가 먹이는 사료가 괜찮을까 싶어서 조리식을 시도중인데 이게 삼남매가 먹어야 먹일 수 있으니까요...홀리스틱 급 캔푸드를 주문했는데 이곳도 얘들이 잘 먹을까 조바심중입니다. 냥이들 소식 전해주셔요^^

2017-01-03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5 0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8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0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2 18: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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