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times I think I have felt everything I'm ever gonna feel. And from here on out, I'm not gonna feel anything new. Just lesser versions of what I've already felt.

가끔 느껴야 할 모든 감정은 이미 다 느낀 게 아닐까, 그래서 이제 더이상 새롭게 뭔가를 느끼는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 그저 내가 지금껏 느꼈던 것의 작은 변주일 뿐일 거란 생각. -영화 속에서, 테오도르.




 호아퀸 피닉스, 에이미 아담스, 루니 마라가 나오고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가 내도록 귓가에 울리는 스파이크 존즈의 영화 '그녀'를 보고 나오는 길의 햇빛은 유난히 따가웠습니다. 흡사 모두가 백열전등 아래서 움직이는 듯, 창백하고 조금씩 노래지는 얼굴. 햇빛 아래서 차가웠다가도 필터를 거친 다음 따뜻해 보인다는 것을 느끼던 찰나, 저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왔던 천사 다미엘이 떠올랐습니다.



 찰리 채플린이 톱니바퀴 사이에 끼이고(모던 타임스), 잿빛 도시에서 리플리컨트를 사랑하고(블레이드 러너), 진화된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고(터미네이터, 아이 로봇), 마침내 있지 않은 그 여인과 사랑에 빠져도(시몬) 변치 않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인간과 기계, 이 대립 항을 늘 지켜왔기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톱니바퀴로 나타나도 사람의 피부는 더 말랑했고 기계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지를 궁금해했지요. 앞서 말한 베를린 천사의 시는 사람이 되고 싶은 천사의 이야기입니다. 기계, 문명, 운영체제와 는 관계가 없지요. 하지만 저는 종종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이미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모두 이야기해버렸다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욕망과 꿈. 수직과 수평. 꾸며낸 것과 진짜. 영원과 찰나, 생각과 느낌을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천사 다미엘은 인간을 꿈꿉니다. 그가 바라보는 공중곡예사는 영원히 하늘에 머물듯 그네를 타지만 결국, 중력을 느끼고 지상에 머물지요. 반면 수직의 높이조차 느끼지 않던 천사 다미엘이 보는 것은 세로축이 아닌 가로축, 지축을 타고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그녀'를 보면 계속해서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나옵니다. 도시가 잠들고 깨고 움직이는데 종종 카메라는 도시를 하늘에서 바라봅니다. 손편지를 대필해주는 손편지닷컴에서 일하며 아이폰의 시리 같은 운영체제를 활용하는 테오도르의 생활을 조용히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합니다. 호아퀸 피닉스의 사무실은 옆에서 바라본 칸막이와 걸어나가면 닿는 데스크로 되어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가 사는 집으로 가면 갑자기 모든 공간 감각이 사라집니다. 유리창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밤의 마천루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나무 바닥은 반들반들해서 창밖 풍경이 바닥에 그대로 반사됩니다. 그가 방 한가운데 서 있을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집 안에 있는 테오도르가 아닌, 도시 한가운데 이름없는 공간의 테오도르입니다. 사람 만나기 싫어하고 친구에게 다가서기 힘들어하면서, 마침내 그녀를 만나는 테오도르.








 
 잠시 스파이크 존즈의 전작의 공간과 목소리를 살펴볼까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는 존 말코비치의 머릿속으로 이르는 한 층의 절반에 이르는 공간이 나옵니다. '어댑테이션'에서는 난초에 미친 사람이 나오지요. '괴물들이 사는 곳'에 나오는 상처 입은 목소리는 또 어떻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스파이크 존즈의 경우 히치콕처럼 뭔가를 마음속에 꼭 정해두고 그 목표를 향해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촬영장 뒷이야기를 들으면 실제로는 '액션'이라는 외침이 들리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감독에게 통제와 허용, 두 가지 방패가 있다면 스파이크 존즈의 경우 통제보다는 허용에 더 능한 감독이라는 뜻입니다. 문학과 영화가 내는 이렇게 달리 노래합니다. 전작의 프로덕션 디자인도 담당했던 K.K.Barrett의 가장 따뜻한 세트(녹아내리는 노랑, 반짝이는 초록, 선명한 오렌지), 유난히 편안한 연기를 보이는 호아퀸 피닉스와 에이미 아담스, 스칼렛 요한슨의 호흡,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도시를 위, 혹은 아래에서 바라보는 카메라를 생각해 보면 스파이크 존스는 영화가 공동의 작업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활용하는 감독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날, 테오도르는 OS 하나를 사서 설치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참 재미있습니다. 우연히 새로 나온  OS를 구경하는 테오도르의 모습이 나오고, 곧바로 설치를 완료하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모습이 점프컷으로 나옵니다. 분명 뭔가를 돈을 내고 샀건만 그 과정이 생략되면서 테오도르를 보는 사람은 곧바로 그가 새 OS와 만난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그 다음 이야기는 더욱 인간적입니다. OS가 그에게 묻는 것은 '남자 목소리가 좋으세요, 여자 목소리가 좋으세요?'입니다. 이어지는 질문은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제가 당신 하드 드라이브를 봐도 될까요?' 입니다. 







 차례차례 질문으로 스파이크 존즈는 계단을 한 칸씩 오릅니다. OS를 인간처럼 만드는 단계의 계단을요. 그래서 앞에 앉은 사람에게 인격을 주면서, 동시에 '제가' 라는 주어로 보이지 않음에도 스스로 주격을 부여하는 이 질문은 흡사 대관식에서 손을 불쑥 내밀어 황제의 관을 쓰는 나폴레옹을 떠올립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하는 순간. 스스로 기계가 문장의 주어가 되는 이 짧은 질문으로 스파이크 존스는 드디어  앞선 영화들이 넘지 않았던 벽을 영화 초반에 넘습니다. '기계가 생각할 수 있을까?'의 질문은 '제가 당신 하드를 봐도 될까요?'로 인해 이제는 나올 단계를 넘어선 것이지요. 이미 우리는 '사만다'라는 OS가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만다가 테오도르를 점점 사랑해 가면서 인간의 형체를 꿈꾸는 것이지요. 라캉의 말처럼, 부모의 꿈을 욕망하는 아이처럼 그녀는 테오도르의 꿈을 욕망합니다. 인간이 아니면서도 마치 인간처럼 말하기 전 숨을 들이쉬거나 등이 가려운 기분이 궁금하다는 것과 진짜 육체를 찾아 나서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특징을 잊고 그가 원하는 특징을 욕망하다가 마침내는 섹스 상대까지 데려오는 대목에 이르면, 남은 것은 탄식. 그것은 진짜'처럼' 보였을 뿐, 진짜가 아니었으니까요. 이것은 실체와 환상, 사랑과 오해의 문제에만 머무르는 수준을 어느새 넘게 됩니다. 실체와 환상의 문제였다면 사만다가 데려온 여자와 테오도르의 이야기가 조금 더 있었을 겁니다. 사랑과 오해의 문제였다면 그 뒤의 긴 탄식은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을까요? 





  섹스를 할 수 없는 사만다가 섹스를 할 수 있는 인간을 꿈꿀 때, 나아가서 자신을 대신해줄 육체를 구할 때, 사만다와 테오도르의 문제는 이미 그 모든 것 이전에 실존과 본질의 영역에 있었습니다. 형체가 없는 사만다가 형체를 만들어내려 할 때, 이것은 이미 존재하는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무시하는 일이지요. 그녀의 본질은 자유로움입니다. 문제는 인간 역시 (사만다 보다는 덜) 자유롭다는 것이지요. 매 순간 선택해야 하고 복잡해지는, 사르트르가 말했던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인간을 사만다는 순간순간 갈망합니다. 









 나도 그렇게 복잡해져 봤으면 좋겠어. 누군가를 잃는 기분이 어떤 건지는 난 몰라. 이렇게 고백하는 순간 사만다와 테오도르가 서로를 갈망하는 지점이 일치합니다. 그러나 8천 명이 넘는 사람과 동시에 이야기하고 6백 명이 넘는 사람과 섹스를 하지만 숫자가 늘어날수록 테오도르를 사랑하는 마음이 강해진다는 말을 할 때에는 갈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비극의 간극은 아득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방식대로만 상대를 사랑할 때에는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그 비극은 기준을 잘못 잡는 데서 비롯된 것일 겁니다. 간극은 좁히라고 있는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It's like I'm reading a book... and it's a book I deeply love. But I'm reading it slowly now. So the words are really far apart and the spaces between the words are almost infinite. I can still feel you... and the words of our story... but it's in this endless space between the words that I'm finding myself now. It's a place that's not of the physical world. It's where everything else is that I didn't even know existed. I love you so much. But this is where I am now. And this who I am now. And I need you to let me go. As much as I want to, I can't live your book any more.-영화 속 사만다의 대사.


꼭 내가 책을 읽는 것과 같은 문제야...그리고 그 책은 내가 깊이 사랑하는 책이지. 지금은 무척 천천히 읽고 있어. 그래서 단어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간극이 거의 영원에 가까울 만큼 벌어져. 나는 여전히 너를 느껴...그리고 우리 이야기에 나오는 단어도...하지만 동시에 난 단어의 그 끝없는 간극 사이에서 나 자신을 찾았어. 눈에 보이질 않아서, 난 그 세계가 있는지도 몰랐어.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해. 하지만 바로 이곳이 내가 지금 있는 곳이야. 그리고 바로 이게 나야. 나를 보내줘. 나는 이제 네 책 안에서는 더는 살 수 없어.





 떠나기 전 사만다의 말을 들으면서 테오도르의 생각과 느낌은 더욱 또렷해집니다. 고개를 끄덕이지만 말줄임표 밖에 내뱉을 수 없을 때. 풍선이 높이 높이 떠올라서 모두가 그것을 보는데 홀로 땅바닥을 내려다보느라 내가 그 풍선에 매달려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그런 때. 





 사만다와의 관계가 힘들어질 때마다 땅바닥에 주저앉거나 거리에서 넘어지고, 계단에 쓰러지듯 몸을 기대던 테오도르는 처음으로 문을 열고 허공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든 빨리 이해하고 모든 데이터베이스를 섭렵하는 사만다는 자신의 비결 중 하나가 '직관'이라고 말합니다. 논리로 얻는 결론이 아닌 실제 체험으로 얻는 결과이 직관이라면, 사만다야말로 직관의 결정체가 아닐까요. 사만다와 그녀를 사랑하는 테오도르를 보노라면, 스파이크 존즈는 사랑과 성장, 관계와 문명의 문제를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내도록 진심이 아닌 마음을 진짜처럼 담아 대필편지를 쓰던 테오도르가 마침내 사만다와 헤어진 다음에서야 진심을 담은 편지를 써서 보낼 때, 다른 SF 영화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인간적인, 욕심내지 않는 이 인간적인 스케일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내려다보던 도심의 스카이라인을 에이미와 함께 문을 열고 나가 눈앞에 두고 바라볼 때, 손편지를 대신 쓰다 자기 편지를 쓸 때, 떠난 사만다를 이야기하며 부재하는 그녀를 존재하게 만들던 그 찰나. 기계가 느끼거나 생각할 수 있는지를 묻기에 앞서, 사만다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인간은 아직 느낄 수 있는 걸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쿠바는 커피벨트 끝자락에 있는 생산국이다. 많은 커피를 생산하는 나라이지만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커피 생산이 줄어든 안타까운 나라이다. 쿠바 크리스털 마운틴.......도미니카 커피가 쿠바 땅에서 자라 크리스털 마운틴이 되었다. 귀한 커피를 마시러 오라는 그 마음이 크리스털 같아 나는 설렌다. 함께 먹을 심심한 먹거리를 조금 싸서 총총 걸어간다. 살아가는 일의 작은 행복, 맛있는 것을 함께 나누는 일.-쿠바 크리스털 마운 틴


 


멀리멀리 다녀오는 길. 다녀온다는 말의 시점이 참 재미있다. 목적지와 출발지를 정하고 요요나 부메랑이 된 것처럼 느슨한 동그라미를 그리기. 어쩌면 나는 지금껏 이곳에 돌아온 게 아니라, 이곳엘 다녀오는 중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동그라미에도 귀퉁이가 생기는 날. 아주 여름이 되기 전. 기온이 조금 올라가다 어떤 곳에서는 더욱 맹렬하고 어떤 곳에서는 주춤. 노랑, 초록, 파랑, 하양. 공기가 얼어붙은 어떤 순간. 켁켁대며 목을 가다듬다가 생각한다. 이런 날 가깝고 먼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가면 파나마 보큐테, 인디아 아티칸, 에티오피아 첼바, 이런 커피를 권해주었으면 좋겠다. 다음날 못 일어날 걱정도 없이 뜨겁고 검은 커피를 조금씩 마실 수 있다면.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금방 들렸던 것도 같은데 그새 사라진 걸까. 부엉이 같은 눈으로 창밖을 본다. 어깨에는 노랑 줄무늬가 들어간 담요. 조용한 바닷가에 온 것 같은 촛불을 밝힌 공간은 밖에서 보아도 부엉이 눈 같을까. 쓰윽 어둠 속을 훑지만, 어둠이 너무 밝다. 다른 날과 다른 어느 저녁. 있지도 않은 사진첩을 보는 늦은 낮. 쓰지도 않은 기억을 떠올려 보는 이른 저녁. 하지 않은 고백을 듣는 아른아른 밤.




 나도 고백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아주 가끔 있는 일이지만 그런 순간이 내게도 오더라. 그 순간은 참으로 간절한데, 잘 생각해 보면 오로지 나만 간절한 것이다. 그 간절한 고백이 혹여라도 이기적인 것일 때 고백한 자는 결국 나무에서 떨어지는 원숭이가 된다. 왜 간절한지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이기 때문에 간절한 것이다. 지금 간절한 이가 내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고 도치해 보면 평범한 일이 된다. 평범한 감정을 고백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고백이란, 말로 는 것이 아니라 일생으로 하는 것이다. 

 



 우연히 커피 볶고 내리는 사람이라는 용윤선의 수필집 '울기 좋은 방'은 참 조용조용하다. 사뿐사뿐은 아니지만 음성이 낮고 진지하다. 조금 붉어지기도 하고 하얘지기도 하지만 조금씩 검어지는 얼굴이 떠오른다. 장마철 머리카락이 조금 푸석거리지만 좀 지나면 가라앉는 낮은 초록 날씨를 닮았다. 

 그 눈빛이 무엇이냐고 묻는 에티오피아 미칠레, 기차를 타고 싶다는 아이리시 커피. 죽어도 난 못하겠다는 커피 루왁. 걱정하지 말라는 카페 오레. 하나부터 일흔여섯까지 짧고 간단한 커피 맛, 쓸쓸하거나 기쁘지만 젊지만은 않은 나날. 

 펜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말뜻 탓에 가볍게 보는 이가 많은데, 용윤선의 수필은 바람이 살짝 부는 공원 벤치를 떠올린다. 그 벤치에는 커피 내려 아이 키우겠다는 미혼모도 있고, 종이비행기를 날려 보여주는 스님도 있다. 배고프지? 물어보며 사탕을 손에 쥐어주는 할아버지도 있고 여행지에서 만난 얼굴도 있다. 그리고 숨 쉬는 순간마다 기도하며 살던 글쓴이의 모습이, 그냥 살아가던 어떤 그림자가 있다.







 

 같이 걸어가던 사람이 길을 지나쳤다고 한다. 나는 아니라고 한다. 이 길의 끝이 그곳일 거라고 한다. 그런데 아니라고 한다. 지도를 보니 많 지나쳐 온 것 같다. 그러나 계속 걷기로 한다. 왜냐하면 잘못 들어선 이 길이 내가 걸어야 할 길인 것 같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집 대문 위에는 쪼롬히 붉은 꽈리꽃이 피어있고 왼편 골목길로 들어서니 팽나무가 선 놀이터가 자궁 속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는데 무지갯빛이다. 무지갯빛에 나는 가슴이 내려앉는다. 돌로 만들어진 벤치 위에 오래 앉아 있는다. 다는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오늘 아침 물을 마시는데 창밖의 숲이 내게 쏟아지려 했다. 돌 벤치에 앉아 쏟아지려던 아침 숲을 생각하면서 돌이 되려고 한다. -블랙커피




 네덜란드 상인들이 오가던 언덕길을 찾아 걷다 길을 헤매던 기억 한 귀퉁이. 

 글쓴이는 걷던 가운데 이쯤이 이 길 꼭대기가 아닐, 생각하다 바다와 꽃집을 본다. 꽃집 주인에게 음식을 먹겠다고 우겼으나 너무 이른 아침이라 커피만 마셨다는 날. 그 집 커피의 종류는 단 하나, 블랙 커피. 그런 커피를 마셔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주인의 여러 겹 쌍꺼풀. 내 것이 아닌 아늑하고 따뜻한 펠트 천의 느낌.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서면 머릿속이 차분해지고 몸 속 붉은 물방울이 따뜻해지는 기분. 그런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다 해도 이 평범한 길 위의 파랑 생각 한 방울이 낯설지만은 않다.





더치커피 한 잔 내리기 전까지 방울방울 아주 더디게, 

 망망대해를 건너며 떨어질 듯한 그런 순간, 생각 한 방울.

   하나, 또 하나.

     둘, 다시 하나.

       그 커피 앞에서 다짐하는 얼굴. 

         내일이면 또 엎는다 하여도, 그다음 또 어푸러진다 하여 다시 한 번 더.





 마음을 서랍처럼 여닫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에 내 마음이 열리고 닫힌다. 열릴 때는 빛이 보이고 닫힐 때는 쓰라린 암흑이다. 다시는 서랍을 열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살다가 어느날 스르륵 열리는 것에 그 사람의 긴 손가락과 서랍의 고리를  자르고 싶다. 랍의 고리를 자르는 일은 내 일일 것이다. 그런데 서랍은 고리가 잘려도 열리고 닫힌다. 고리가 잘린 서랍이 열릴 때는 운명 같고 닫힐 때는 피눈물이 난다.

 그러기 어려우므로 그러고 싶은 것. 그것이 마음이다.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십 분밖에 없다. 오 분은 서로 부둥켜안고 오 분은 서로 눈을 바라보는 장면은 사실 목숨이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증명 같은 것이다. 그러니 사랑해야 하고, 그러니 헤어지지 말아야 한다. 얼굴과 목은 함께 늙어가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우두커니 짧은 문자메시지를 보다가 눈동자의 초점을 잃는다. 길을 잃으려 한다. 서랍이 열리려다 닫히고 조금 열렸다가 다시 닫힌다. 겨울은 이미 갔다. 단지 봄이 오지 않았을 뿐이겠지. 계절에 기대어 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서랍을 아무리 당겨보아라. 경계를 지나면 상황은 돌이켜지지 않는다.-핫 코코아


 


 커피 앞에서는 스스로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람. 보일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저자의 말을 가만 쓰다듬어 본다. 커피를 만든 다음에는 잊지 말고 마셔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 보다가 결국, 서랍에 못을 쳐버리겠다는 말을 말줄임표로 하는 어느날. 

 내 서랍을 조용히 열어 본다. 마음이 가난하여 서랍도 가난하다. 그러나 서랍 속에는 무심하고 단단한, 햇빛을 받으면 그러나 바스러질 것 같은 종잇조각. 가끔 휘청이는 글씨. 창밖에 달이 보일 때 즈음, 곱고 어두운 술을 앞에 두거나 검고 밝은 커피를 한 잔 두고 조금씩 써나가던 기록. 나는 도저히 안되던 일. 가늠하기 힘들던 검은 빛. 한 가지도 분명한 것이 없다는 것 하나만 분명한 때. 자정이 다 되어가던 때. 밝은 갈색의 커피를 떠올린다.




 커피는 열매 안에 두 개의 생두가 마주보고 있다. 외피를 벗기고 과육을 제거하고 딱딱한 껍질인 파치먼트를 제거하면 미끈미끈한 생두가 마주보고 있다. 과일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연상이 된다. 씨와 껍질을 버리고 과육을 먹는 것이 일반적인 과일 먹는 방법이라면, 커피는 껍질과 과육을 버리고 씨를 건조해 볶아 가루를 내어 물을 부어 먹는 것이다. 

 과육 안에 생두가 하나만 있을 때가 있는데 달팽이 모양의 동글동글한 것이 귀여워 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이런 생두를 사람들은 '피베리'라고 부른다. 두 개의 생두가 흡수하던 성분을 하나의 생두가 흡수할테니 그 향과 맛은 독특하며 여운이 길다. 나는 향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코에 담고 있는 사람에게 피베리를 볶아준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 된다. 다른 커피를 끝없이 볶아주다가 비로소 피베리의 향을 구분할 수 있을 때 피베리를 닿게 한다. 이런 피베리가 증가하면 자연스럽게 세계 커피의 생산량은 감소하게 된다. 그러니 마음껏 볶아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 사람은 몇몇만 있어야 하며 그 몇몇이 내 삶의 전부였으면 한다. -에티오피아 코체르 피베리




 열두 가지와 일곱 가지 모두 다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것도 나, 저것도 나. 수많은 내가 모여서 알 수 없는 나를 만든다고 생각했던 그 날, 나는 정확히 덧셈의 방법으로 사람을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가. 불필요한 이것은 빼자. 간을 더 치려던 손도 내려놓자. 먹을 것이 별로 없어 보여도 접시 이대로 내도록 하자. 빌려온 것도, 심지어는 바라던 것조차 내려놓는 뺄셈의 셈법으로 사람을 바라본다. 커피 열매 안에 마주 보고 있었을 하나의 생두도 없는 피베리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다 셈하고 나면 남는 하이얀 것은 더 분명한 무엇일 것이다. 단정한 가을비의 책과 같은 사람일 것 같다. 아주 여름이 되기 직전 가라앉은 저녁, 용윤선의 책은 조용하고 따뜻한 커피를 떠올린다. 줄 수 없거나 받을 수 없어 괴롭다면 그 괴로움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으로 답하는 것이라 말하며 커피를 내리는 사람. 굳이 간을 치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는 책. 굳이 읽지 않고 곁에 놓고만 있어도 조용히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책. 책이 커피 마시는 시간을 벌어다 주는 책. 간결한 가을비 같지만, 아주 차갑지만도 않은, 혼자 음악을 듣는 것 같은 책. 




밤이 늦었다. 내가 늦었다. 

음악 조금, 책 조금. 
결이 고운 목소리도 조금.

 




색색깔의 글씨는 용윤선의 '울기 좋은 방'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팻 캐바나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남쪽에서 부는, 남서쪽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에식스로 가게 됩니다. 북해를 횡단하려면 바람이 줄곧 서쪽에서 불어줘야 하지요. 하지만 프랑스로 가려면 바람 북쪽에서 불어줘야 하는데, 그런 바람이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다가 변덕스러워서요."



 곧 잃고

 곧 쓰러지고
 다시 잃을 것이었다가
 나는 그러나 이미 잃었음을 깨닫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 줄리언 반스의 작품.



 줄리언 반스의 'levels of life'는 그러한 길에 올라선 여행자의 한숨. 



 영국 맨부커상과 프랑스 메디치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학상을 휩쓴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의 작품을 떠올려 본다. 
 늦가을과 초겨울의 중간 온도의 사랑 이야기. 혹은 세상에 없는 이의 그림자. 모든 것이 허물어진 후 도착한 끝의 시작, 삶과 이 세계가 이끈 교집합과 합집합.

 

 

  

 사랑을 이야기할 때 느끼는 관계의 심연(내 말 좀 들어봐). 글쓰는 사람이 풀어야 하는 숙제(플로베르의 앵무새).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자신의 갈 길을 갈 때 인간이 느끼는 울먹거림의 회한, 그 다양한 층위(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그의 글에는 단어의 분명한 뜻과 장르의 다양한 얼개, 통찰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글 대부분은 '팻에게 바친다.'라는 헌사로 시작했다. 



 헌사의 주인공 팻 카바나가 단 한 번도 등장하 않는, 그녀 뒤에 남겨진 줄리언 반즈의 이야기.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라는 한글 제목으로 나온 'levels of life'는 영국을 대표한 문학 에이전트이자 줄리언 반스의 평생의 문학적 동지인 팻 카바나의 죽음을 읽는 줄리언 반스의 지도이다. 양피지에 쓰인 모르스부호와도 같은 지도. 겪지 않은 이는 볼 수 없다. 알 수 없는 자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내 팻 카바나가 죽은 다음 줄리언 반스가 남긴 자취를 '언젠가 내게도 이런 불상사가 생기면 참조해야겠다'라고 간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나도 검은 양복이 필요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위도와 경도의 자취. 아무런 도움도 주고받을 수 없는 고립된 자의 말소리.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 그러면 세상은 변한다. 사람들이 그 순간을 미처 깨닫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세상은 달라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닥칠 것에의 예언.
 이미 겪은 일의 기록. 
 이야기 세 개가 이 픽션-논픽션에 있다. 

 '비상의 죄'에서는 사진과 비행을 함께 시도하여 땅 위의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본 풍경을 선사했던 나다르의 이야기가, '평지에서'로 페이지를 넘기면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와 모험가이자 군인인 프레드 버나비의 가상의 사랑 이야기가. 그다음 이어지는 '깊이의 상실'에서 반스가 하는 이야기가 팻 카바나의 것이다. 이 마지막 챕터에 이르면 앞서 우리가 바라본 하늘과 땅이 지하로 연결된다. 이 챕터 세 개, 이야기 세 개, 커플 세 쌍이 우연을 되풀이한다. 그림자의 춤이 겹쳐서 줄리언 반스와 팻 카바나의 손을 이끈다.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사라 베른하르트와 프레드 버나비가 언젠가 기구에 올라타듯, 첫 번째 이야기의 나다르가 사라 베른하르트를 사진기에 담듯, 나다르가 헌신적으로 아내를 간호하듯, 반스가 카바나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듯. 




 '팻에게 바친다.'로 시작하여 2012년 10월 20일 런던에서 줄리언 반스'로 끝맺는 기억.
 그 기억 도중, 반스는 여전히 죽은 아내와 장난을 친다. 죽은 아내는 도로 그에게 장난스러운 말을 건넨다. 두 사람은  뭔가를 나누고, 서로의 존재를 이끈다. 죽었으나 여전히 나타나 장난스레 그림자를 잡아채다 사라지고 몇몇 지엽적인 이야기 속에서 여전히 팻은 떠돌고 있다. 그녀는 곧장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반스를 통해 나타난다.
 죽은 그녀의 그림자는 집안 곳곳에, 그가 숨 쉬는 공기에 머문다. 그녀는 죽었으나 죽지 않았고 그는 살았으나 살아있지 않다. 



 살아있는 사람이 먼저 죽은 이를 땅에 묻고 나서 느끼는, 자신도 모를 어느 공간의 이야기. 읽노라면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파스칼 키냐르가 떠오른다. 중심도, 길도, 역사도 존재하지 않는 자기 생을 느끼는 일. 뒤섞인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하나에 흡수되어 어떤 글도 쓸 수 없는 때를 살아가는 일이라고 뒤라스가 말했었다. 저 세상은 여기처럼 견고하지 않아, 당신 나룻배는 이미 썩었지만 바람 말고는 만질 것이 없다고 말했던 마랭 마래의 죽은 아내가 파스칼 키냐르의 손끝에서 슬며시 빠져나왔다. 이 지독한 상실 한 묶음 앞에서 위로는 길 잃고 기억은 더욱 난폭해진다. 견고해서 난폭하고 난폭해서 날카로워지는 미래의 역사. 



우리는 사라 베르나르가 빗방울 사이를 피해 다닌다고 주한 것처럼 총알 사이를 피해 다닌다. 그러나 언제나 느닷없이 목을 찔러오는 창이 있게 마련이다. 모든 사랑의 이야기는 잠재적으로 비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몇 가지 층위가 서로 스며들어서 세 번째 이야기,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에서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들린다. 비탄이 바꾸는 시간의 길이와 공간의 영속성. 반스가 말하는 상실의 사막, 무심의 호수, 황무지가 된 강, 자기연민의 습지, 기억의 (지하)동굴. 반스는 이 지도를 가지고 선 자는 누가 더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내장이 더 많이 파열된 쪽이 누구인지의 문제도 여기서는 중요치 않다고 말한다. 오로지 부조리함 밖에 느껴지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반스가 내세운 메타포는 첫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나다르가 카타콤에서 찍은 사진, 두 번째 이야기의 소파 쿠션을 집어삼켜 총에 맞아 죽은 보아 뱀이었으나 결국, 그 자신은 메타포조차 필요치 않은 경우임을 느낀다. 이전에는 아내의 것이었던 열쇠고리에는 집 현관 열쇠와 묘지 뒷문 열쇠가 있다. 그것을 보며 그는 '이게 내 인생이야.'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꿈속으로 내려가고, 또 기억 속으로 내려간다. 그렇다. 예전의 기억은 과연 돌아온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우리는 두려움을 배우고, 다시 찾은 기억이 원래 그대로인지 확신할 수 없다. 어떻게 똑같을 수 있겠는가. 당시 거기 있었던 사람이 더 이상 확증을 해줄 수 없게 되었는데. 우리가 한 것, 우리가 간 곳, 우리가 만난 사람들, 우리가 느낀 감정을. 우리가 함께하게 된 사연을,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씻겨가고 이제 '나'만 남았다. 쌍안경의 기억은 단안경이 되었다. 



 상실의 슬픔 앞에서 아니 에르노는 애간장이 끓는다, 마음이 벼랑에 내몰린 것 같다, 이런 표현을 떠올린다. 줄리언 반스는 프랑스어로 이미 죽은 팻의 안부를 묻는 이에게 답하면서 '내가 이걸 이제 프랑스어로까지 말해야 한다니.' 라고 생각한다. 지독한 아픔을 느낀 이가 혼자가 아님을 떠올리는 아니 에르노와 이런 상황에서조차 유머 감각을 발휘하는 줄리언 반스 중 누가 더 낫다고 할 것인가. 앞서 말한 비교가 쓸데없이 지는 지도인데. 위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어제가 오늘인가, 내일이 어제였던가. 휘청이고 들끓다가 땅속으로 푹 꺼지는 이 지도를 들여다보면 언젠가 바람이 내 속에서 멈추었던 날이 있기나 했었나 의아해진다. 한 사람이 겪는 고통의 깊이가 궁금해진다. 곧, 무엇이든 알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건만 막상 알고 나면 고개를 젓는 존재 역시 인간이 아니었던가.




 균형, 속살, 끝. 놓치지 않는 기억 한 자락.

 

 

 

 이 책의 감정적인 중심이면서도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천칭 같은 무게중심을 잡는 챕터가 가장 마지막 챕터임을 마지막 장에 이르른 독자라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앞서 하는 이야기 두 개는 물론 어떤 이들의 앞선 경험은 기름과 물처럼 겉도는 것이 아니라 수채화의 덧칠처럼 함께 어우러지고 스미는 것임을, 반스의 나지막한 음성이 이야기한다. 반스는 애도와 슬픔의 위험한 매혹까지 붙잡는다. 신중하게 선별해서 조심스레 드러나는 명확한 감정과 또렷한 표현. 이 책이 술자리 돌림노래 같은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 제 나름의 의미를 드러내는 힘은 바로 이런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우주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는 우주가 그렇게 끝낸 일의 부산물이다. 어쩌면 비탄 또한 그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그 아픔과 싸웠고,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슬픔을 극복했고, 우리의 영혼에서 녹을 긁어냈다고 생각하지만, 그 모든 일이 일어난 때는 비탄이 다른 곳으로 떠났을 때, 자신의 관심사를 다른 데로 돌린 때이다. 우리 쪽에서 먼저 구름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며, 우리에겐 구름을 흩어지게 할 힘도 없다. 그 모든 건 어디선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예기치 못한 산들바람이 갑자기 불면서 일어난 일일 뿐이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이끌려가고 있는가? 에식스로? 북해로? 만약 이 바람이 북풍이라면, 그래서 운이 좋으면, 우리는 프랑스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따옴표 글은 책 속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uett

Album: Vapen och Ammunition
Lyrics: Joakim Berg
Music: Joakim Berg

I got mail
A real letter with a stamp
A postcard from long ago
When the future was ours


And as you wrote
About your search for freedom
Words with wings like a butterfly
And I think I understand

That slowly, slowly, oh so slowly
You won your nights back
Slowly, slowly, oh so slowly
We slid into oblivion where the light is weak
Into what we were

I wrote a letter
About living with the curse
I gave you my version of the truth
To make you understand

That slowly, slowly, oh so slowly
So we won our nights back
Slowly, slowly, oh so slowly
So we slid into memories, hidden far behind
That was what we were

Slowly, slowly, oh so slowly
We won our nights back
Slowly, slowly, oh so slowly
We slid into oblivion where the light is weak
What we were

(kentfans.com)





 책 몇 권, 음반 몇 장, 어떤 목소리,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어떤 말. 계절이 바뀌기 전. 계절이 다가오기 전. 매일 아직 살아있음을 깨달을 때. 어떤 시간은 멈추고,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일깨워준다. 그것은 그냥 떠오르는 수도 있지만, 종종 어떤 사물이나 종잇조각, 먼 곳의 기차표, 트램 티켓이나 심지어는 초콜릿 포장지를 타고 오기도 한다. 마치 아기 거미들이 바람을 타고 이동하듯이. 그러다가 종종 공기가 맑게 들뜨거나 비구름 아래 가라앉고, 좋아하는 계절이 사그라지고 나면 어느덧 내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의 계절맞이를 했다는 것이 떠오른다. 커피가 식어버릴 때, 내 앞에 놓인 허망한 스테이크 한 접시를 바라볼 때, 사우어 크림을 얹은 감자를 바라볼 때 나는 종종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뚱보'를 떠올린다. 




 나는 다른 테이블의 시중도 들어야 했어. 요구가 많은 사업가 네 명이 앉은 테이블하고 남자 세 명과 여자 한 명이 앉은 테이블, 그리고 노부부의 테이블이었지. 리앤더가 그 뚱뚱한 남자에게 물을 따라주었고, 나는 그 남자가 결정할 시간을 충분히 준 다음 그 테이블로 갔어.

 안녕하세요? 주문 받을까요? 내가 말했지.

 리타, 그 남자는 덩치가 컸어. 정말 크더라구.

 안녕하세요, 좋은 저녁이네요, 우리 이제 주문할 준비가 된 것 같은데요. 하고 그가 말했지.

 그는 이런 식으로 말했어-이상하지 않니? 그리고 때때로 조금씩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더라.

 시저 샐러드로 시작하는 게 좋겠어요. 그러고 나서 괜찮으시다면 수프에 빵과 버터를 곁들이구요.양고기 요리가 좋을 것 같군요. 사워크림 얹은 구운 감자하고요. 디저트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합시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메뉴를 건넸어.

 세상에, 리타. 그 손가락이라니.

 나는 서둘러 주방으로 가서 루디에게 주문서를 내밀었어. 그는 인상을 쓰면서 그것을 받았어. 너도 알잖아. 그 사람 일할 때면 늘 그런 얼굴이지. 

 주방을 나오는데 마고가-마고 이야기 한 적 있지? 루디 쫓아다닌다는 애-그애가 묻는거야. 저 뚱땡이 누구니? 라고. 그 사람 진짜 뚱보야.



 여자는 몹시 뚱뚱한 남자의 식사 시중을 한다. 덩치가 큰 뚱뚱한 남자. 그는 시저 샐러드, 빵과 버터, 사워크림을 듬뿍 끼얹은 감자, 양고기 요리, 그리고 초콜릿 시럽을 한 방울 떨어뜨린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소스를 얹은 푸딩 케이크를 모두 먹어치운다.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그러나 레이먼드 카버의 묘한 필치는 거리와 관계를 급하지 않게 조절한다. 처음 시저 샐러드를 준비하던 그녀는 실수로 컵의 물을 엎지르고, 얼른 치운다. 뚱뚱한 그 남자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 사우어 크림을 더 많이 얹은 감자를 그에게 가져다준다. 주방으로 가서 직접 디저트를 챙기는데 그녀의 남자친구가 '서커스단의 뚱보를 받았다며?' 라고 묻자 그녀는 '루디, 저 사람은 뚱뚱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라고 대답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뚱보가 이 단편소설에서 사라지기 전, 그러니까 여자가 뚱보의 테이블에 스페셜 디저트와 아이스크림을 놓을 때 두 사람은 간단한 대화를 하게 된다.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서 살이 좀 찌면 좋겠다는 여자의 말에 뚱뚱한 그 남자는 '안 돼요. 선택할 수 있다면 찌지 않는 게 좋아요.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지요.'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그것이 끝이다. 뚱보는 식사를 마쳤고, 여자는 집으로 가고, 여자의 남자친구와 침대에 누운 그 순간, 그러나 그 순간 여자는 자신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스스로 뚱뚱해졌다고 느낀다. 이 이야기를 듣는 이에게도 다 털어놓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며 '벌써 그녀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변할 것이라고 느낀다. 




 그의 다른 단편과 마찬가지로 '뚱보'에서도 풍경은 늘 말없이 흘러간다. 이야기는 간단하고 짧고, 어찌 보면 커다란 갈등도 없이 지나간다. 그러나 그 간결한 한두 가지 색채를 바탕으로 허기와 절망, 다툼과 쇠락, 슬픔과 고독, 감정의 연대가 무늬를 만든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잠시 빠져나와, 옆 사람의 심장 소리, 다른 이들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삶이 어떻게 변할까? 아이를 잃고 생일 케이크를 가지러 가서 밤새 갓구운 빵을 먹던 젊은 부부는 집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할까? 사랑이 무엇인가에 관해 저녁 내도록 약간은 목소리를 높이던 그 남자와 여자는 앞으로도 계속 손을 잡을까? 나뒹굴던 청구서를 아예 청소기로 빨아들여 없애 버렸건만, 청구서는 또다시 오면 그만 아닐까? 고장이 나 버린 냉장고는 다시 멀쩡해질까? 아니면 새것을 살 때까지, 그 속의 음식물을 다 어찌한단 말인가? 




 이야기는 짧고 우리는 그다음을 알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단편 소설의 특징. 한국에서는 '단편 소설'이라고 하지만 영미 문학권에서는 장편 소설은 노블, 중간 정도의 인간의 어떤 단면을 담은, 한국의 중장편 정도를 노벨레,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와 앨리스 먼로, 줌파 라히리, 오스카 와일드가 곧잘 쓰던 단편소설은 숏 스토리로 구분한다. 장르의 다른 특징을 생각해본 다음 다시 읽어본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은 이미 지나가 버린 어떤 것의 순간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보는 저너머의 풍경 같았다. 





 


 뉴요커 픽션에서 데이비드 민즈가 말하였듯, 레이먼드 카버는 여전히 몇 가지 이유에서 오해받고 있으나 실제로는 고등교육까지를 마친 작가 자신이 자신의 문제에서 한 발짝 떨어져 모든 문제에서 피하려고 할 때 빚어진 특징이 아닐까. 특징을 가장 간결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스타일이라고 본다면, 카버의 모든 특징은 간결함에 있을 것이다. 짧은 분량으로 보는 긴 시간과 불협화음. 우리의 인생을 상징하는 온갖 사물이 내는 잡음. 멈추어 버린 냉장고,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차. 짧은 두세 문장에 스미는 괴로움. 별로 사랑하지 않게 된 남자와 여자, 억지로 오래 끌어오려고 안간힘을 써온 관계, 우리가 몇십 년을 지나야 겨우 인정하는 어떤 사실이 몇 개의 문장 속에 담겨있다. 어떤 여자의 눈을 통해, 혹은 어떤 남자의 목소리로 펼쳐진다. 너무 많은 것을 한 번에 집어넣지 않으면서도 간결하게 조금씩 공개하는 솜씨는 분명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작가의 능력.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뚱보의 말처럼, 과연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 신자유주의자들은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이라 하지만 우리는 진공 상태에서 외따로 떨어져 숨 쉬는 이들이 아니다. 관계를 맺고 거리를 좁히거나 늘리고, 더 단단해지거나 더 허물어지기를 스스로 반복해서 마침내는 지금의 자신이 되었으나, 이마저도 점점 다시 변할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을 읽노라면 이런 관계의 유령이 보인다. 지금 내가 보는 너의 모습은 유령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순간. 언제나 나 역시 내가 아니었듯 너도 네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 느낌과 생각이 십자로 만나서 다른 무늬를 만들 때, 소설을 쓰는 힘과 소설을 읽는 눈이 어떻게 만나는지가 조용히 들린다. 듣는 눈과 보는 귀. 이런 겉치레 없는 상황에만 우리는 진정한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 올바른 대답을 하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때. 별로 복잡하지 않은 간단한 것을 가장 쉽게 알아내는 순간. 이럴 때만 나는 유령이 아닌 내가 된다. 그 밖 순간에는, 오늘과 어제가 겹치고 내일과 오늘이 엇갈려 스치는 그림자로 남는 사람일 뿐. 



 




 작가와 독자는 내 말에 과연 고개를 끄덕일까. 아니면 가로저을까. 나는 과연 소설을 이해하고 있을까? 혹은 하찮은 위로와 혼자가 아니라는 알량한 관심만을 목격한 것일까. 

 작가란 어쩌면, 누군가를 구할 수도, 세상을 읽어낼 수도, 사물을 만들 수도 없는 무능한 존재일 것이다. 효용의 척도는 유용함이라는 의미에서 바라본다면 소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용한 존재. 작가는 이 무용함을 굳이 부정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남긴다. 이 순간 빚어지는, 무엇도 창조하지 못했지만, 저너머 무지개 너머 아련히 보일 듯한 무엇인가를 향한 동작. 가진 기억과 없는 능력을 한몸에 지니고서도 그 부조화를 자랑으로 삼는 움직임. 작가는 그 때 보이는 것과 만져지는 것을 남김으로써 사라지는 존재, 그럼으로써 더욱 가벼워지고 간결해지는 사람. 눈먼 사람에게 조심해요(watch out!)라고 말하고 멈칫, 하는 목소리 다음 펼쳐지는 대성당처럼.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04-23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08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3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입] 베토벤 : 현악 4중주 전곡 [대푸가 포함 8 for 3]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작곡, 베그 사중주단 (Vegh Quart / NAIVE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Time present and time past
Are both perhaps present in time future
And time future contained in time past.
If all time is eternally present
All time is unredeemable.
What might have been is an abstraction
Remaining a perpetual possibility
Only in a world of speculation.
What might have been and what has been
Point to one end, which is always present.
Footfalls echo in the memory
Down the passage which we did not take
Towards the door we never opened
Into the rose-garden. My words echo
Thus, in your mind.


-T.S.Eliot, from Four quartets.(부분발췌)


 




 야론 질버맨의 영화 '마지막 사중주'의 첫머리를 여는 T.S.Elliot의 시, four quartets. 

 마지막 다음 처음, 처음 다음의 마지막. 시간은 지나가면 현재에 존재하고 미래와 맞물린다. 존재의 그 극단에서, 그렇다면 현재란 어디에 있는 걸까? 공간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그간 구하기 어려웠다는, 헝가리 출신 베그 쿼텟의 70년대 녹음을 듣는다. 베토벤 푸가 전곡을 품고 있는데 오래전 녹음이라 음질이 좋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음반의 경우에는 그런 아쉬움 없이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20세기 들어 재평가된 베토벤 후기 현악 사중주, 그중에서도 '대푸가'를 듣는다. 




 우연과 필연, 육체와 영혼, 있음과 없음. 한번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정언명령.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가져온 베토벤의 메모, '그래야만 하는가?-그래야만 한다'. 이 유명한 메모는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사중주인 Grosse Fuge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낱말과 소리, 공기와 바람이 눈앞에서 잠시 빙긋 웃고 지나가는 느낌. 고개를 돌리면 우연히 지나가는 어울리지 않는 음이 바람을 타고 살며시 귀에 닿는 듯하다. 




 귓가에 스치는 음악을 진행하는 단위로 존재하는 시간. 

 먼저 하나의 시간 단위로서 우리 앞에 놓인 무엇. 

 놓여있다가 지나가고 모여서 만드는 단위.

 반복이 모여 이루는 특정한 박자.

 그러는 동안 말 거는 조성.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목소리가 음역과 음색을 달리하여 조성을 이룬다. 그 음은 서로 부딪히거나 스치면서 시간을 이루고 바꾸기도 한다. 

 현악기의 얇은 선과 탄력을 지닌 진동으로서 드러나는 음정. 하나의 음이 다음의 음을 예고하거나 전환을 암시하는 음계. 그리고 그들의 성격으로 드러나는 조성. 이때 음이 하나씩만 울리지 않고 동시에 함께 울리는 것을 화음이라고 한다면, 협화음은 무엇이고 불협화음은 무엇일까? 잠시 호토가 엮은 헤겔의 음악 강의를 참조해 본다. 





...울림이 다를 뿐 아니라 상충되기까지 하는 음이 첨가되기 때문에, 협화와 통일성을 직접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이들을 통해서 차이점이 드러나고, 상충되어 부디지기까지 한다. 본질적으로 상충되면서 날카로움과 파괴 같은 것을 꺼리지 않으므로, 이것으로 인해 심오한 음악이 형성된다. 그 이유는 서로 잘 어울리는 음의 조합에 근본적으로 상충되는 음의 조합이 맞섬으로써 참된 통일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논리학에서 어떤 개념을 주관성으로 전개시킬 때의 예를 보면, 본래의 순수한 주관성은 그에 대립되는 객관성의 존재로 인하여 한층 더 높은 개념으로 격상된다. 

 본시 주관성이란 오로지 이념 그 자체로 보면 단순히 객관성 에 대립되는 것, 즉 객관성에 맞서는 개념이다. 그러나 주관성이 객성과 대립하는 가운데, 그 내부로 잠입하여 객관성을 극복하고 해체시킬 때 참된 주과넝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대립의 고통을 스스로 이겨내고 그리고 이겨낼 능력을 갖추게 됨으로써, 한층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 숭고한 본질인 것이다. 음악은음악 자체의 내부적인 형식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오한 내용 속의 주관적인 느낌까지도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헤겔이 그의 철학에서 말하는 객관이 실재하는 겉모습, 주관은 예술작품에서 느끼는 인간의 정서와 감정, 작가의 표현하고 느끼는 방법과 감상자의 감상을 뜻했던 것을 돌이켜 본 다음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 사중주 대푸가를 들어본다. 어렴풋이나마 느껴지는 주관과 객관이 맞서는 시간의 세계. 주제는 계속 그 모습을 달리하며 변주하고, 이 하나의 대푸가에 변주곡, 소나타, 푸가가 함께 담겨있다. 

 예고 없이 중단되거나 튀어나오는 대립하는 음. 신호 없이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4개 악기가 동시에 맞부딪히기도 한다. 그 불협과 대립의 맞항을 거친 다음 정교하고 경쾌한 끝맺음이 나타난다. 음반 속지의 마지막 악장에 관한 설명을 읽노라면 베토벤의 음악에 관한 고민이 드러난다. 



 

 The last movement is the one tat includes the most gloss. At the top Beethoven wrote : Der schwer gefasste Entschlus(the difficult decision) and beneath this title included on a star the double musical motif for a question and answer, accompanied by these words Muss es seine?-Es muss seine(Must it be?-It must be). The finale is built upon this double motif. The question and more especially the answer were part of those familiar expressions of Beethoven in which his letters and conversation books abound. In April 1826, a few months before the composition of this Quartet, he had even by way of an avenging jest, composed a canon on Es muss seine to compel a musical amateur to pay up a few pence. It was the theme of that canon that he uses again in the finale, perhaps renewing the jest's original intention, although the development afford to the motif confers upon it much greater significance.

 -Brigitte Massin



 


 이러한 베토벤의 고민을 마주할 때, 연주자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예술은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부속물이 아니다. 연주자는 작품에 충실히 원작이 의도하는 바를 읽는 것과 동시에 작곡가의 감정을 읽어내고 자신의 개성을 덧붙이기를 꿈꿀 것이다. 헤겔은 훌륭한 연주자라면 작곡가의 정신세계의 수준까지 도달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남겼다. 깊이를 불어넣고 텍스트처럼 눈앞에 놓은 음표에 생명을 주는 일.  




 하나의 음이 등장하고 여럿이서 반복하고 증폭하고 만났다가 헤어지는 이 지점을 바릴리 쿼텟이 차분하고 풍성하게 펼쳐냈다면 베그 쿼텟은 그 깊이를 좀 더 온건하게 강조하는 느낌이다. 어느 한 부분을 너무 날카롭게 날을 세우거나 건조하게 하지 않고 자만에 빠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연주. 원하는 빠르기를 유지하되 느린 부분에 가서는 비브라토로 하여금 재량을 발휘한다. 부담스럽지 않은 범위 안에서 흐트러짐 없이 유지되는 긴장감. 산도르 베그의 개성이 느껴지는 표현은 베그 쿼텟이 어떻게 음색의 밸런스를 유지하는지를 편안하게 느끼게 한다. 바릴리, 린지, 부다페스트 등 많은 이가 권하는 베토벤 현악 사중주의 중요한 한 부분을 만난 날. 쉼표가 아닌 느낌표로 남는 어떤 순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