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었다가, 그 사람이었다가, 그 사람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히는 순간. 

혹은 '여름을 보내고 나는 우네. 가엾은 내 계절이 사라졌네.' 라고 읊조리는 남자. 열정과 열망 사이 엉거주춤하고 자리 잡은 남자. 평범해서 보편적인 이야기. 오백일의 썸머는 모든 케케묵은 해묵은 악감정을 싱싱한 횟감 건지듯 끌어올리는 영화였다.





 나는 여기서 연애 끝에는 결국 bitch(이 단어는 아예 영화 도입부 나레이션 첫머리에 나온다)가 되는 여자에 관한 이미지라든지 너무 소심한 남자의 표정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너무 많이 안과 밖에서 이야기해서 이미 내가 숟가락을 얹을 필요도 없지 않을까. 대신 나는 익숙한 그 집 앞을, 자기연민을, 반성을 생각하고 싶다. 마음이 가난하고 입술이 못생겨 빈집에 사랑을 가두었음을 깨닫는 사람만 할 수 있을지도 모를, 그런 생각을. 





 그 모든 보편성과 그 모든 특별함은 어디로 갔을까. 자신만이 아름답다는 환상, 자신의 사랑은 더없이 빛난다는 착각. 자신은 누구보다도 고운 결을 가졌다는 난데없는 횡포. 이것이 모여 사랑을 만든다면, 진짜 그것은 어디 있을까.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이 없는 영화였다. 이것은 폄하나 곡해의 의견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이다. 뮤지컬 기법, 쇼트 뒤섞기, 그래픽 사용, 음악을 제3의 화자로 빌려 오기 등. 사랑에 들떠(열정) 춤을 추며 거리를 걷는 톰을 보았는데 그다음 순간 만신창이가 되어 발을 질질 끌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짹짹, 새소리가 들리고 분명 거울 속엔 액션 스타의 모습이 나타났는데 좀 더 보면 레지나 스펙터의 <히어로>가 나온다. 노래 가사를 적당한 순간에 잘라 대사로 활용하는 기법이야 워낙 많은 영화에 나왔으니 새로울 것도 없으며 뮤지컬은 아예 바즈 루어만의 특기가 아니던가. 사랑은 질리도록 보았다. 




 

 그런데 이 평범한 내러티브가 개성 없음이 개성인 평범한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주목할 만한 연기를 바탕으로 펼쳐진다. 아우라가 강하지 않아 상대 배역의 틀을 구속하지 않고(이를테면 키아누 리브스가 이 역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백지와도 같아  무엇이든 그 얼굴 표정 위에 쓸 수 있는 배우. 마크 웹 감독은 주이 디샤넬, 조셉 고든 레빗을 투 톱으로 내세우면서 '과연 감독이 원하는 바를 반영할 수 있는 배우란 어떤 얼굴을 지녀야 하는가?'에 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이것은 헐리우드가 지난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찾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이기도 하다. 지난 시대에서 살아남은 어떤 배우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대조가 더욱 극명하다. '레전드', '아웃사이더'와 같은 청춘물을 찍을 때만 해도 그저 그런 청춘스타였으나 지금 유일하게 살아남은 톰 크루즈를 보면 그렇다.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맷 딜런에 기세가 눌렸으나 지금 누가 그들을 주목한단 말인가? 그 극명한 개성이 그를 살렸으나 지금의 조셉 고든 레빗은 완벽히 다른 예를 보여준다. 크리스 파인, 라이언 고슬링, 채닝 테이텀과 같이 개성 또렷한 배우를 뒤로하고 배트맨, 인셉션, 링컨 등의 필모그라피를 기록하는 조셉 고든 레빗을 바라보면, 아마도 그가 다음 세대의 더스틴 호프먼 같이 변화무쌍한 표정을 선보이는 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영화가 쓸모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할 수 없이 지루하다고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톰이 썸머를 바라볼 때엔 스미스의 노래가 흐른다. 내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게 해주세요. 혹은 우리가 어떤 관계냐, 라고 물을 때엔 카롤라 브루니의 'someone told me'가 흐른다. 내러티브의 순차적 구성이라면 클리셰가 되었을 많은 장면은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리듬감을 지닌다. 착각과 현실, 꿈과 이상, 시작과 끝. 그 대조는 조지 버나드 쇼의 말처럼 두 사람 각자가 서로가 얼마나 다른가를 최선을 다해 선보이는 작업일 뿐이다. 이 영화가 67회 골든 글로브 뮤지컬, 코미디 부문 작품상에 올랐다는 것은 로맨틱 코미디의 본분을 다하면서도 마크 웹이 장르의 차용, 사운드트랙의 활용, 장면의 편집과 재배치, 고전 영화 패러디, 화면 분할을 십분 활용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테크놀러지는 무엇을 향한 것인가. 더더군다나 모두나 지나칠 정도로 많이 이야기해 더는 새롭기 어려운 로맨틱 코미디에서.








 시작이 어둡다. 급박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분홍빛이 아니다. 사랑이 시작되리라 기대하는 순간 시작을 여는 시퀀스는 사랑의 위기. 팬케이크를 먹다가 '우리 이제 그만 보자.'라고 말하는 썸머의 얼굴이 보인다. '네 이야기가 아니야. 이 못돼먹은 엑스' 라는 내용의 자막이 깔릴 때부터 알아보았건만 익숙한 그 공식은 뒤틀린 채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이야 사랑의 시작-위기-갈등 해소-행복한 결말이 아니던가. 그 익숙함을 깨뜨릴 때 우리는 건축을 바라보는 듯한 재미까지 느낀다. 극 중 톰이 건축에 관심을 두며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썸머의 팔등에 그릴 때 풍겨오던 달달함이 잿빛 도시로 사그라지고, 여름 다음 가을이 올 때 그것을 맞이하는 그가 미소 짓게 되는 것은 마침내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시간의 틈이 손끝에 만져져서이지, 그 우연성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은,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닌 앞으로 올 어떤 일이었다. 





  그 앞으로 올 일. 복사기 앞에서의 키스, 회식 자리에서의 노래, 서로의 취향을 바라보기, 영화 함께 보기, 썸머의 집에 가서 그녀가 매일 보는 벽과 천장을 보는 일. 

 

 

 이미 지나간 것. 영화 '졸업'을 보고 우는 그녀에게 거절할 만한 제안만 골라서 하기, 다른 곳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스미스 노래를 틀어주고 알아들을 거라 기대하기, 자신만의 관심을 그녀에게 투사하기.






 운명과 판타지를 착각하는 일이었으니, 그 모든 실수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 모든 이미지와 유사성을 지닌 어떤 것들을 바라보노라면 이 영화의 시작부터 감독이 원했던 것이 분명해진다. 삐걱대는 문과 덜컹대는 깨어진 유리조각이 살인을 암시하듯 이케아 매장을 구경하는 톰과 썸머의 모습, 복사기 앞에서 우스꽝스런 노래를 부르는 썸머와 그것을 들으며 킥킥대는 톰의 모습 등은 분명 행복한 연인의 모습을 암시한다. 이것은 이 영화를 구성하는 기본 뼈대이자 동시에 뒤트는 디스크의 통증과도 같은 조각 모음이다. 장르 영화의 공식, 관습, 도상.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 관습, 도상. 즉, 톰과 썸머의 공식, 관습, 도상. 이 세 가지가 500일의 썸머를 겪는 동안 다른 모습으로 드러났다. 처음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 것은 즉 그 과정을 겪는 한 사람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지 그 감정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가 있었고, 사람이 있었고, 고백과 토로가 있었다. 그것을 아우르는 것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오백일의 시간이었다. 연애란 어차피 사람이 맺는 가장 강렬한 대인관계의 일종이다. 아마 복사기 앞에서 키스한 다음 톰의 몸속에서는 도파민, 노레피네프린, 세로토닌이 분비되었을 것이다. 이케아에서 썸머와 함께 가구를 구경할 때엔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었을 것이다. 온갖 호르몬의 폭발을 겪으며 생각하고, 꿈꾸고, 착각한다. 여름이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은 때가 되어서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톰이 썸머를 몰랐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처음부터 몰랐음에도 마지막까지 몰랐다는 것조차 몰랐던 것. 줄리언 반즈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나왔던 말, '너 끝까지 감을 못잡는구나. 아예 그냥 그렇게 살지그래'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지는 찰나, 뒤따르는 고백이 있었다. 자신이 몰랐다는 것을 시인하는 목소리.






 관계 대부분은 다 시작과 끝이 있기 마련이지만 시작도 끝도 없는, 그 결정이 남지 않는 관계도 있을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자기 자신과의 로맨스야말로 일생의 로맨스'라고 했던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자신이 몰랐다는 것을 시인하는 톰의 목소리가 진지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으로 들리는 것은 바로 그런 흐름에서다. 오해로 끝나는 관계에는 타인이 남지만, 이해로 끝나는 관계에는 자기 자신이 남는다. 










 환상과 착각, 오해와 등 돌림. 생각과 분석, 돌이킴과 목마름. 사랑했던 그 이유로 미워하거나 증오하고 마침내는 무관심하게 된 다음 어여삐 어루만지게 되는 대상. 기억의 윤색과 보정을 거치면, 사람 마음속에서는 모든 관계가 어떤 자국을 남기게 될 것이다. 터널이나 동굴을 통과할 때 뒤돌아보는 자와 뒤돌아보지 않는 자의 귓가엔 아마 다른 소리가 들릴 것이다. 어떤 한 시기가 끝나고 사람이 조금이라도 자라는 것은 마침내는 돌아보지 않을 때일 것이다. 모든 것에의 이유가 결국, 같은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 누군가를 위한 속이 빈 인사가 아닌 자기 자신을 이해한 다음 스스로 건네는 악수 같은 것이 가능한 순간. 종종 사람은 문을 잘 닫기 위해 문을 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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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여태천


두 손을 높이 들고

불안은 고드름처럼 자란다.


당신은 맨발이었고

나는 유령처럼 당신을 안았다.


굴뚝과 굴뚝처럼 우리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불안. 고드름. 맨발. 유령. 굴뚝. 꽁꽁.

 행복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때 제목을 통해 시인이 완성한 본문.

 저 시를 읽으면 펄펄 내리는 눈이 떠오른다. 뽀드득, 눈을 밟으면 펑펑 내리지 않고 펄펄 서럽게 내리는 눈 위로 어떤 흡혈귀 소녀의 피가 떨어질 것 같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일컬은 '피와 눈물의 연금술'. 

 세상 모든 열두 살이 따스하거나 연민이 따스함의 외피를 쓴 것은 아니다.




 스웨덴 영화 '렛 미 인'은 열두 살 소년 오스카와 열두 살 그 언저리 즈음 되었다고 말하는 흡혈귀 이엘리의 이야기다. 영화 전에 스웨덴 원작 소설 렛 미 인이 있었다. 영화 후에 미국 버전 렛 미 인도 있었고 그 뒷이야기도 언젠가는 나올지도 모른다. 모리씨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수많은 세상의 렛 미 인을 떠올려 본다.






 

LET THE RIGHT ONE SLIP IN-MORRISEY


Let the right one in 

Let the old dreams die 
Let the wrong ones go 
They cannot 
They cannot 
They cannot do what you want them to do
Oh ... 

Let the right one in 
Let the old dreams die 





 


















들어가도 되니?






 소설 속 이엘리와 소설 밖 이엘리가 물어볼 때.

 글씨가 그것을 읽는 내 머릿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영상이 그것을 보는 내 눈 밖에서 스프레이처럼 퍼져 나갔다. 아닌게 아니라 씨네 21의 이화정 기자가 쓴 스페셜 기사를 보면 촬영감독은 스프레이 라이트로 이 촉촉한 아날로그를 만들어 냈다 전한다.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의 풍경은 순간과 영원, 동화와 호러, 혈관 속 피가 흐르는 아이와 피를 마시는 아이 사이 내리는 하얀 눈으로 남아 그곳을 지켰다.












 먹기 위해 죽여야 하고 자신의 사랑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우는 존재. 여기에 숭고미를 덧입힐 수도, 로맨티시즘을 깔아줄 수도, 호러를 장착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이 이미지가 찰나를 살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꽤 매력적인 존재라는 것.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보덴부르크의 꼬마 흡혈귀 시리즈, 아벨 페라라의 영화, 박찬욱의 박쥐, 앤 라이스의 연작 등, 이 계보는 앞으로도 다양한 표정으로 나타날 것이나 그 어느 것도 이만큼 부옇게 슬프기는 어려울 것 같다. 수많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가장 간단히 답해야 하는 경우의 난처한 표정. 추운 것을 잊어버린 아이와 하얀 입김을 더 하얀 눈 속에 내뿜는 아이의 이야기.





 용기 대신 연민, 동정 대신 동조.






 어떤 엇갈림은 설명을 생략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래서'와 같은 부사를 뺀다. 형용사와 부사를 제외하고 남은 것은 명사와 동사다. 영화의 강점이 그 간결한 압축과 보여주기에 있다면 소설의 강점은 서사를 덮는 깊이의 공간이다. 영화와 소설이 이렇게 만날 때, 종종 글씨와 영상 중 어느 것을 먼저 보아야 할까 고민하는 때도 있는데, 어느 것을 먼저 보아도 무관한 경우가 '렛 미 인'일 것이다. 같은 나무가 설원에 서 있는데, 그 나뭇가지 끝 맺힌 눈송이의 모양이 약간 다르다. 영화 '렛 미 인'의 눈송이의 모양은 그것을 둘러싼 촉촉한 어둠, 쏟아지는 피에 따라 달라진다. 소설 '렛 미 인'의 눈송이의 모양은 그 아래 먼저 기다리고 있던 쏟아지는 눈빛에 따라 더 분명해진다. 







 이 작품의 장르를 무엇이라 해야 할까. 영화를 살펴보자면 이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장르에 취미를 지닌 감독도 아니며 현란한 그래픽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도 없는 듯 하다. 대신 에로티시즘과 장르적 습성을 제거하고 이야기의 핵심인 두 아이를 그저 바라볼 뿐.

 피를 마시지 못해 꼬르륵 소리가 나고 이상한 냄새가 나도 오스카를 앞에 두고 침만 꼴깍 삼키고 스스로를 노려보는 이엘리. '내가 만약 초대 안 하면 어떻게 되는데?'라고 묻다가도 '들어와, 들어와, 들어와도 돼'라고 말하는 오스카. 이 두 아이를 보고 있으면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눈송이가 허공에서 잠시 엇갈리는 것 같다. 







 또렷하게 손끝에 앉았던 눈송이가 몇 년도 지난 지금, 유월의 끝자락에 녹는다. 고드름처럼 자라던 불안은 이제 싹을 틔웠나. 살아있는 아이의 순간과 그렇지 않은 아이의 영원은 만나서 '가벼운 키스'라는 모르스부호를 똑똑, 보냈는데 어떤 이의 터널과 어떤 이의 영원은 어떤 생채기를 남겼을까. 삼 초 만에 녹든, 삼 년 만에 녹든,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거기서 거기일 뿐. 영화 올드 보이에서 나온 말과 같이, 모래알이든 돌덩이든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이엘리의 맨발이 밟던 눈송이. 오스카의 언 손이 만지던 루빅 큐브. 

 한 존재의 위장을 채울 피, 한 존재의 혈관을 채울 피. 

 그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Oskar: Who are you?

Eli: I'm like you.

Oskar: What do you mean?

Eli: What are you staring at? Well?

Eli: Are you looking at me?

Eli: So scream! Squeal!

Eli: Those were the first words I heard you say.

Oskar: I don't kill people.

Eli: No, but you'd like to. If you could... To get revenge. Right?

Oskar: Yes.

Eli: Oskar, I do it because I have to.

Eli: Be me, for a while.

[pause]

Eli: Please Oskar... Be me, for a little while.






 상대가 된다는 건 어떤 걸까. 나도 너와 같아. 해야 하니까 하는 거야. 라고 말하는 건 어떤 걸까. 말해주어야 안다는 건, 하루키가 1Q84에서 덴고의 아버지를 통해 들려주었듯이 설명해 주어도 모른다는 것일 수도 있다. 가장 온전한 대화는 침묵이었고 가장 잘 된 이해는 모르스부호였다.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던 물안개 같은 빛. 쏟아지는 어둠. 내리는 눈조차 소리를 삼가고 그 동세만 남길 것 같은 눈부신 어둠. 영하 삼십도, 낮은 불과 다섯 시간. 오스카가 지르는 비명은 이상할 만치 괴괴하게 퍼졌다. 세상에 없을 듯한 일과 한계 서로 부딪히는 순간, 세상의 모든 다채로운 색상에 덧입히는 작가와 감독의 무채색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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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6-24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뷔테른님은 왜 갑자기 렛미인을 다시(?) 보았을까요?

여태천의 크리스마스 - 그 서늘함을 알게 되어서 감사하고,
제가 좋아하는 님 식 단상 이를테면
<가장 온전한 대화는 침묵이었고 가장 잘 된 이해는 모르스부호였다.>
뭐, 이런 걸 발견할 때 어쩔 수 없이 전 님이 부럽습니다. ^^*

Jeanne_Hebuterne 2013-06-25 12:27   좋아요 0 | URL



닿아도 다다를 수 없는 관계, 불러도 온전히 부를 수 없는 관계, 한 쪽이 그렇다고 말해도 한쪽이 답할 수 없는 관계가 있을까, 생각하던 중 이 작품이 떠올랐어요. 소설과 영화, 양쪽 모두 제가 꽤 흥미롭게 감상했던 작품이기도 하고, 몇 년 전 책 출간 당시 리뷰를 썼는데 지금은 없는 그 리뷰와 제가 지금 다시 응축시키려 노력한 감상이 어떻게 다르게 나올지가 궁금하기도 했고요. 아무리 춥고 서늘하다 해도 저 두 아이가 내뿜는 하이얀 입김과 눈을 따르지는 못할 것 같기도 합니다.


시를 잘 읽지 못했는데 요즘 추천을 받아 읽고 있어요. 잘못 읽거나 옮기지 않았는지 조바심이 나는데, 팜므 느와르 님의 섬세한 감성이 부럽기만 합니다. 제가 은근히 무뚝뚝하고 직선적이며 눈에 보이는 것만 보려는 경향이 있어서요. 그 와중에 팜므 느와르 님께서 예쁘게 봐주시는 저런 생각이 비집고 나오는 것은, 이 작품이 워낙 훌륭해서겠지요!


여행 잘 다녀오셨으니 이제 하나하나 이야기를 풀어주셔야지요? 그곳의 건조함과 이곳의 습기를 열네 시간 비행을 사이에 두고 어떻게 잘 섞어 풀어주실지 벌써 궁금합니다. :)

 

 


<Lufthansa, Boeing 747-400. D-ABVX 1:500 SCALE>

 


 짐을 잘 꾸릴 것 깨어질 수 있는 물건은 굳게 다물고 열 몇 시간 동안은 모두와 끊어진다는 안도감을 넣을 것 10킬로그램짜리 핸드 캐리는 그것으로 끝. 짐을 잘 풀 것 낯선 호텔 낯익은 언제나 똑같은 침대 속 지문은 피부에 내 피부는 ICN에서 AMS까지 혹은 LHR, WAW. 프리데릭 쇼팽 공항에 닿았을 때에는 건조하고 기온 낮은 여름밤 길을 잃고 걸었던 밤 길을 찾은 한낮 23킬로그램짜리 위탁 수하물은 이것으로 끝. 바디스캔 입국심사 출국심사 낯선 외국어 그러다 보면 속삭이는 동체. 


 


 중력에 매달린 상상은 육중한 동체가 랜딩 기어를 올릴 때 살짝 따뜻해졌다. 건조하고 추운 밤에는 비행기 창을 들어올려도 감감무소식. 달도 해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들리는 엔진 소리 항공성 치매 콕핏 턴오버 퀵턴 비상구 그러나 지금의 비상구 앞좌석의 다행 발에는 보드라운 슬리퍼 소리를 막는 귀마개 기억력을 되살리는 외교통상부 문자 런웨이의 불빛 쓸 일 없기를 바라는 슬라이딩 보드 그리고 먼 곳의 공기. 달의 언저리까지 갈 수 있을 것만 같던 긴 시간.


 


 공기 속 여행의 실제는 사라짐이 아니라 돌아옴이었다.




 34인치의 피치 안에 도사린 여행, 들뜨거나 가라앉은 하늘은 늘 그곳에 있었을 것이고 나는 잠시 스쳤을 뿐이다. 그때 내가 디뎠던 발밑의 내가 걸었던 구름 온도는 꽤 차갑거나 뜨거웠다. 사뿐히 들어 올리던 생각과 차분히 놓아두던 마음의 위치는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반짝, 불빛을 보여주며 어두운 밤을 오르던 그 공간에 있었다.




 잠시 이 육중하고 건조하고 오래된 미래의 공간을 그린 책을 들여다본다.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을 펼쳐보면 런던 히드로 공항의 풍경과 비행기의 모습이 데생이 아닌 스케치 밑그림으로 펼쳐진다.




 




 터미널 옆의 관제실에는 위성들이 추적한, 영국항공의 모든 비행기들의 실시간 위치를 보여주는 거대한 세계지도가 있다. 지구 전역에 약 180대의 비행기가 떠있으며, 이들은 약 10만 명의 승객을 태우고 있다. 여남은 대는 북대서양을 가로지르고 있고, 다섯 대는 허리케인을 에둘러 버뮤다 서쪽으로 가고 있고, 한 대는 파푸아뉴기니 상공의 항로를 타고 가는 것이 보인다. 이 지도는 가슴 뭉클한 불침번을 상징한다. 각 비행기가 고향의 비행장에서 아무리 멀리 떠나 있다 해도, 아무리 속박에서 벗어나 유능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도, 런던 관제실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음에서 결코 멀리 떠나보낸 적이 없다. 그들은 자식 걱정을 하는 부모처럼 자신이 책임지는 비행기 한대 한대가 무사히 착륙하기 전에는 마음을 놓지 않는다. 


 매일 밤 비행기 몇 대가 게이트에서 거대한 격납고로 끌려가곤 한다. 그곳에 가면 건널판과 크레인들이 일련의 수갑인 양 그 유기체처럼 생긴 몸을 둘러싼다. 항공기는 자신은 그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수줍어 하는 경향이 있다. 로스앤젤레스나 홍콩에서부터 먼 여행을 하고서도 자신에게 허용된 비행시간인 9000 시간의 끝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점검은 그들이 개별성을 드러낼 기회를 준다. 승객들에게는 747기가 모두 똑같아 서로 구별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점검과정에서는 별도의 이름과 병력을 가진 하나의 기계로 드러난다. 예를 들면 G-BNLH는 1990년부터 날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대서양 상공에서 유압장치가 세 번 샜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타이어가 한 번 터졌으며, 바로 지난주에는 케이프타운에서 날개의 중요해 보이지 않는 부품 하나가 떨어졌다. 이제 격납고에 들어온 이 비행기는 다른 병과 더불어 고장난 좌석 12 개, 벽 패널에 커다란 자주색 매니큐어 자국, 옆에 있는 세면대를 이용할 때마다 저절로 점화되는 뒤쪽 취사실의 고집 센 마이크로웨이브 오븐 등 다른 증상도 있었다. 


 30명이 밤새도록 이 비행기를 붙들고 일을 한다.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비행기는 대개의 경우 매우 관대하지만, 밸브 같은아주 작은 것에 생긴 고장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건이 비행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에 그때까지의 경력 전체가 박살나고, 직경이 1 밀리미터도 안되는 혈전 때문에 사람이 죽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느 비행기의 몸통을 둘러싼 건널판을 따라 비행기 외부를 구경하다가 코의 원뿔에 손을 대보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층층이 쌓여 꼼짝도 않는 적운을 가르고 길을 내던 코였다. 






 세 자리 코드와 두 자리 기호도, 위도와 경도도 달라지지만 모든 것이 달라져도 흔들리지 않을 무엇. 바닥에 가라앉았다가도 또다시 떠오르는 마음. 때로 그것은 크게 보이거나 작게 보이곤 했다. 사람들은 작은 창문을 통해 구름과 바다와 하늘, 마을과 도시와 밤과 낮을 바라보고 안으로, 밖으로, 위로, 아래로 이동한다. 50톤의 747, 10킬로미터의 고도와 0.7기압 안에서 밤은 낮이 되고 낮은 밤이 되어 시간은 더해지거나 덜어진다. 이 덧셈과 뺄셈은 이전에는 오로지 새들의 것이었을 것이다. 




 쉬었다 갈 수 없는 고단함, 돌아가야 한다는 두고 온 가방.

 떠남과 돌아옴은 완성하거나 끝내기에는 버거운 것이어서, 

 사람들은 이렇게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몸을 실을 수 있는 것을 만들었나 보다.

 공항과 비행기 같은 것을.





 알랭 드 보통은 공항과 항공기를 여행의 설렘과 작업의 고단함과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생활로 바라본다. 공항 한구석에 책상과 의자를 두고 공항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며 일하거나 여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었는데, 그는 이 책의 마지막을 여행자들을 생각하며 매듭짓는다. 여행자가, 그리고 우리가 곧 모든 것을 잊을 것임을. 이국의 모든 것. 보딩 전까지 서는 긴 줄. 대륙을 몇 개 문장으로 줄이고 다시 누군가와 말다툼을 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곧 다시 새로움을, '지금' 눈앞에 없는 무언가를 다시 찾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덧붙인다. 우리의 삶은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 사이를 오가는 추와도 같다.




쉬운 것은 앞에 있는 것을 떠올리는 일.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에는 작은 사람들. 그 먹색을, 무지갯빛을, 장미향과 카레의 냄새를 만지기 위해 가끔 사람들은 열 몇 시간을 그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곳에서 보낸 다음 다시 애써 닿으려 애쓰는 것이 아닐까.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잊은 옛날 동전, 벼룩시장에서 산 레코드판, 약간 쌀쌀한 늦가을 목에 둘렀던 머플러. 그리고 그것을 둘러주었던 누군가 내쉬었던 반 박자 늦은 숨 같은 것을 찾으려고. 




뒤에 있는 것은 보이지 않고 발밑의 중력이 사리지면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떠올랐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잠시, 이 1:500 스케일의 정교한 수집가용 모델을 만져본다. 꼭 스르르 커진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 다시 어디론가 가볍게 내가 되는 꿈을 꿀 수 있을 것도 같다. 우리가 여행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것이 아닐까? 내가 어느날 다시 무언가를 찾고 싶어 오백배 더 몸집을 부풀린 이 구조물에 몸을 싣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초여름 저녁. 돌아오거나 떠날 때, 내 손끝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대신 입술 끝에 조용히 닿아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함께.





선물해 주신 ㄱ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멀리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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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6-0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밤. 7분여 동안 잠시 떠날 수 있었어요. 덕분에.

Jeanne_Hebuterne 2013-06-02 00:38   좋아요 0 | URL


dreamout 님께서 떠나셨던 곳은 어디였을까요? dreamout 님의 말씀에 생각하니 드뷔쉬의 음악과 항공기 안에서의 일들, 어디론가 잠시라도 떠나는 일은 밤에 생각하면 더 조용하고 넓게 머릿속에서 퍼지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고단한 일상과 누군가의 설렘이 만나는데 그 범위가 우리에게 일상의 영역을 벗어난 경험을 안겨주는 것 같습니다. 이 저녁과 밤에 생각하니 더 떠나고 싶어지기도 해요. 당장 그러지 못할 때의 이러한 글과 음악이 진통제 역할을 해주는 것 같아 반가워요.

덧-오랜만이에요, dreamout 님. 잘 지내셨지요? 곧 무덥고 습한 계절이 닥치면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해보아야겠지요? 그러지 않는다면 책과 음악으로 적당히 잠시 떠났다 돌아오기도 하겠지요.
 

 









Can't repeat the past? 

Why, of course you can.

-the Great Gatsby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랑이 아니었다. 피츠제럴드가 그리고 바즈 루어만이 꿈꾸고 디카프리오가 발현하고 김영하가 옮기고 가장 잘된 오해를 근사하게 내놓는 무엇에 관한 이야기. 사랑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였으나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개츠비의 이야기였으나 데이지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처음, 온전히 뻗어 나가는 야심이었으나 결국, 스스로 빈집에 갇히는 마음이었다. 




 그 빈집에 이르르기까지, 원하던 바를 얻으면 그다음의 선택이 도사리고 있다. 원하던 바를 얻지 못하면 원하던 것은 여전히 반짝거리며 손에 잡히지 않는 별빛처럼 남아있다. 그 별은 바즈 루어만의 '스타'라는 화려함으로 색색들이 윤색되고 오해되었다. 디카프리오의 개츠비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개츠비보다 장르적이었고 캐리 멀리건의 데이지는 피츠제럴드의 데이지보다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순수와 타락, 뉴 머니와 올드 머니, 바다와 맞닿은 대저택 등으로 서로 대립하던 모든 개념을 멜팅 팟에 섞어 만든 바즈 루어만의 개츠비를 구경하고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필연적으로 눈이 어지럽고 귀가 쿵쾅거렸다. 완벽의 반대말은 과잉이다.




 넘쳐흐르는 것이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넘쳐흘러야 확신이 생기는 때도 있다. 물랑 루즈가 그랬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랬다. 아예 다른 감독의 영화, 블랙 스완이 그랬다. 그러나 버즈 루어만의 위대한 개츠비는 재즈와 마천루의 공허함을 제거한 그랑 멜로 판타지가 되었다. 3D 입체 촬영과 비욘세, 제이 지, 티파니, 프라다, 브룩스 브루더스, 뷰익과 쿠페를 통해 감독이 뜻한 바는 개츠비의 이루지 못한 허망한 사랑이었다. 더군다나 화면을 떠돌아다니다 강력히 모습을 드러내는 활자는 닉 캐러웨이의 나래이션을 원치 않는 순간에 확성기로 외치는 듯한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 1920년대 흥청망청 타락한 밀주와 재즈의 시대, 파티 피플과 화려한 저택을 말하기 위한 작업이었음이 분명하지만, 혼란을 보기 위해 꼭 그 안에 들어가야 할 필요는 없다. 재즈와 힙합, 1920년과 2013년은 다른 명제이다. 닉 캐러웨이의 출발과 결말은 개츠비에게 발이 묶였으며 개츠비의 위태로운 헛발질은 데이지의 손을 놓지 못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점에서는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캐릭터 이해가 가장 탁월하다.



 


 


 



개츠비는 데이지라는, 오래된 유적과 같은 신기루를 놓지 못하고 집착하는 길잃은 캐릭터다. 이 작품은 기존의 러브 스토리와는 많이 다르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란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단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는 '소유해야만 하는 물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를 소유하고 지워버려야만 자신의 가난하고 보잘것 없었던 과거도 깨끗이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디카프리오, 인터뷰에서 발췌




 

 

 버즈 루어만의 개츠비가 어느 한 부분에 과도하게 집중하여 이를 랑글랑 소매처럼 부풀린, 설명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감독 본인만의 생각을 보여준다면, 피츠제럴드의 원작 소설 개츠비는 훨씬 다채로운 측면을 보인다. 이것은 장르의 차이가 아닌 관점과 창작자 본연의 기본적인 자세의 다름에서 오는 차이로 보인다. 



 소설은 소설가가 허구의 인물을 필터 삼아 현실의 사건을 가상의 시나리오로 그려낸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피츠제럴드가 겪은 1920년대의 미국은 개츠비의 데이지였을지도 모른다. 데이지는 어떤 여자였을까. 배우 디카프리오가 말한 오래된 유적과 같은 신기루,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는 소유해야 할 물건 같은 여자. 실제 사람의 모습은 여러 사건을 통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의외로 그녀는 또렷하고 단층적인 인물이다. 데이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오히려 개츠비다. 그녀의 조각을 그녀의 전체로 바라보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이라 믿는 데서 비극을 불러일으키는 인물. 피츠제럴드는 이런 다층적인 단어의 구조, 이항대립과 양가적 특성을 통해 어떤 문제에 답을 하는 듯하면서도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겉과 속이 같지 않고 그 안의 숨겨진 세계, 1920년의 뉴욕을 고스란히 겪은 인물로서의 개츠비를 보여줄 뿐이다.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는 이야기. 개츠비의 불행한 청춘, 데이지의 파행적 결혼생활, 부부의 관계를 공고히 함에 필요한 노리개에 불과한 개츠비와 머틀의 죽음이 있을 뿐, 실제 데이지와 개츠비가 무엇을 느꼈든 둘 사이의 감정은 다른 이들이 겪어야 할 모든 상황에 있어야 할 수단의 톱니바퀴가 될 뿐이다. 불길이 타오르는데 불구경을 할 뿐 모인 이들의 머리가 텅 빈 상황이다. 또한, 생활을 관통하는 물질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온전치 못한 방법으로 막대한 부를 개츠비가 이루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돌아서는 데이지가 그 모습을 증명한다. 저택과 셔츠에 감동하는 눈물이 또한 그렇다. 개츠비 역시 신분과 돈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공고히 하고자 노르망디 신 시청의 철문을 떼어와 오래된 것 같이 보이는 저택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다른 관점에서, 텍스트 그 자체를 바라보면 이 작품 속에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갈망'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독자와 작가는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가 무언가를 원하고 갈망하며 만족과 충족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종이와 스크린의 주인공은 욕망과 갈망 그 자체이다. 개츠비는 범죄자이면서도 영웅이며 불사신이면서 인간이다. 공기를 채우는 모든 사건은 닉 캐러웨이라는 필터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우리가 읽고 보고 듣는 텍스트와 영상은 주관적인 경험의 해석을 거쳐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의미가 된다. 실제 우리가 접하는 모든 작품은, 그리고 그 중 하나인 위대한 개츠비는 상상 그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많은 경험, 해석, 환상을 거쳐 보편적인 무언가를 이끌어낸다. 




 그 '무언가'는 개츠비를 통해 만질 수 있는, 우리가 처한 삶의 비극과 허무함에 관한 이야기다. 어찌 되었든 결국, 호구가 된 남자의 이야기다. 자신의 삶과 모든 노력을 다 바쳐 얻고자 한 것을 허망하게 잃고 마는 결말. 돌이킬 수 없다는 회한, 그에서 오는 무력감은 인간의 숙명으로 떠돌아다닌다. 이 작품이 멜로의 외피를 뒤집어썼을지언정 인간이 본디 지니고 태어나 어쩔 수 없는 시간과 삶의 비극을 그대로 보여준다. 닥칠 것을 알면서도 그 직전에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채는 데에서 오는 인간의 무력감.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었음에도 사실 자신의 손아귀에 든 것은 원하던 에메랄드빛의 불빛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는 그 순간 오는 허무함. 설령 거의 확신하게 된다 하여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느끼는 절망.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끝까지 멈추지 않고 뻗어 나가려는, 그 길이 무엇이든 길의 끝까지 가고야 마는 힘. 




 피츠제럴드는 전혀 위대하지 않은 존재의 허망함을 역설적으로 설파하여 독자에게 '혹시나' 하는 희망을 쥐어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무언가를 위해 노력해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무너지면서도 마천루처럼 위로, 위로, 계속해 나가는 개츠비는 인간 삶의 원형이기도 하다. 그 모습은 앞으로도 다양한 각색으로 새로이 탄생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심각한 오독이 될 수는 있어도 지루한 도돌이표는 아닐 것이라 믿는다. 지쳐도 계속되는 확신. 사랑할 가치가 없는 무언가에 쓰러질 때에도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엔 이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 다음 멀찍이 떨어져 거리를 두었을 때 우리는 누구나 글자와 영상을 떠나 각자의 경험과 뒤섞인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낼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독서와 영화감상을 넘어선 우리 각자의 삶의 방식이니까. 








Gatsby believed in the green light, the orgastic future that year by year recedes before us. It eluded us then, but that's no matter - tomorrow we will run faster, stretch out our arms farther... And one fine morning -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the Great Gat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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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3 2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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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3 2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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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3 2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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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3 2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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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5-24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카프리오가 저런 인터뷰를 했어요? 와- 디카프리오가 좋았는데 저 발췌문 보고 더 좋아졌어요. 말씀하신대로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한 것 같아요. 저 발췌문을 보니 저는 디카프리오가 읽는 책들이 궁금해졌어요. 어떤 책을 읽을까, 그는? 하고 말이죠. 전 아직 이 영화 보기전인데, 보고 싶은 마음이 점차 시들해져요, 쟌님.

Jeanne_Hebuterne 2013-05-24 13:40   좋아요 0 | URL
네, 다락방님! 저런 인터뷰를 보면 디카프리오는 참 열심히 하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품 전체를 보려고 하고 그것을 어떻게 반영할까를 많이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보입니다. 원작과 영화 각색에서 강조한 개츠비에 관한 묘사를 때론 뒤로 넘김으로, 때론 정신없이 떨어지는 것으로 달라지는 머리 모양새, 입가에 머물거나 지팡이를 움켜쥔 손 매무새, 어깨를 펴거나 허리를 숙이는 등 자세를 활용해서까지 무척 섬세하게 표현해요. 활자가 영상으로 변할 때 새로이 추가하여 보여줄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는 디카프리오를 보노라면 비록 그 연기가 자연스러움과는 약간 거리를 둔 장르적이라는 특색이 있지만, 그 점까지도 버즈 루어만의 과장된 해석을 덮어주는 장점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가 읽는 책은 알 수 없지만(검색해봤지요!) 자신의 의견을 자제하고 작품의 배경까지 자세히 탐구하는 데에서 그 이해력의 힘이 나온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시들해지기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제 경우엔, 버즈 루어만이야 원래 침소봉대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고 거기다 액자 구성, 그래픽, 화려한 음악 및 화면 구성을 십분 활용하려는 의지를 늘상 보여주었기에 영화를 보지 않고도 영화가 눈앞에서 이미 보이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기 때문이었어요. 보고나니 제 예상이 틀리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데이지를 좀 많이 다르게 그려버렸기에 아쉬웠더랍니다. 피츠제럴드의 원작으로 이 작품을 접할 때, 데이지가 셔츠를 보고 우는 대목에서 그녀의 인품을 추측할 수 있는데 버즈 루어만은 거기다 다른 설명을 집어넣어서 작품의 기본 얼개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 버려요. 필요 이상으로 능력을 과시한 흔적 탓에 초반 한 시간은 정신이 없고 후반 한 시간은 집중력이 확 떨어지거든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에 대한 알라딘 서재의 반응이 뜨거워서,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화제성과 대중성의 힘을 느끼는 중입니다. 만약 다락방님이 이 영화를 보시면 어떤 리뷰가 나올지 몹시 궁금해요. 요즘 이 작품만큼 알라딘 서재 분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작품이 드물기도 하고, 그만큼 다양한 생각이 엿보이기도 해서요.

2013-05-24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4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4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5 0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답은 얻을 수 없었다. 가장 착잡하고 풀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삶이 주는 일반적인 해답 이외에는. 그 해답이란 이렇다. 사람은 그날그날의 요구에 따라 살아야 한다. 말하자면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꿈을 꾸어 잊는다는 것은 적어도 밤이 되기 전까지는 바랄 수 없다. 이제 목이 긴 병의 여인들이 부르던 그 노래가 있는 곳으로는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는 현실에서의 꿈으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안나 카레니나





 


 

 

 

 어떤 사람들은 전체를 아우르는 힘,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성, 그 하나하나가 갖는 밀도가 아우러져 이루는 전체를 조망하려는 욕심을 비춥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개개인이 갖는 감정과 상황, 각자의 개별성을 찬찬히 다루는 데 더 집중하곤 합니다. 후자가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전자는 톨스토이입니다. 톨스토이는 단편에서조차 비교, 대조를 통해 전체를 아우르곤 하지요. 그것은 집의 안팎을 한번에 쓱 훑고 지나가는 카메라와도 같은 것이어서 그가 관심을 두는 어떤 주제에 관한 응축물을 만들어내기에 가장 좋은 방법일 겁니다. 이때 전체와 총합은 다릅니다. 어떠한 요소가 한데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영향을 주고받아 마침내는 한데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결과가 전체라면,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 전체란 19세기 말 러시아 상류층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와 소설은 그 걸음을 늘 함께 해온 것은 아닙니다. 드물게 영화 이후 소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노희경 작가, 김형경 작가가 그런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소설이 먼저, 그다음이 영화입니다. 이때의 주제와 변주는 종종 창의적인 결과를 만드는데, 조 라이트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는 그 전형이나 모범은 아닐지라도 하나의 재미있는 시도를 보여줍니다. 한국에서는 작년 겨울 개봉 레 미제라블, 봄 개봉작인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조금 더 기다리면 위대한 개츠비가 개봉하지요. 물론 웜 바디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도 있지만 여기서는 일단 굵직한 작품, 그중에서도 안나 카레니나가 흥미로운 각색을 시도했습니다

 

 

 

 각색에 참여한 인물을 살펴볼까요. 키라 나이틀리, 아론 테일러 존슨, 주드 로. 장소는 런던 근교 셰퍼튼 스튜디오이며 의상은 재클린 듀란입니다. 영국 감독과 영국 배우들이 영국에서 발렌시아가와 샤넬, 디올 풍의 의상을 입고 만든 영화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 영화가 시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대충 알 수 있습니다. , 그레타 가르보, 비비안 리, 소피 마르소의 안나 카레니나에 이어 키라 나이틀리가 그 이름을 올렸는데 어떤 점에서 키라 나이틀리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전과는 다릅니다. 먼저 그레타 가르보가 있습니다. 1935년 클라렌스 브라운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스타덤의 그레타 가르보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이었는지 영화 속 의상은 우왕좌왕 정신이 없어 가르보의 안나 카레니나는 종종 미국 켄터키주의 여자 같아 보이기도 했어요. 사람들은 종종 1967년의 러시아판을 이야기하곤 하는데 이 영화 속에서는 레빈의 역할이 무척 사소했을지언정 인상적이었다는 평을 합니다. 이는 감독이 레빈에도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인데, 소설에서는 레빈이 더 비중이 높지만, 영화의 기본 캐릭터는 안나라는 점을 볼 때 감독으로써는 이례적인 선택이 분명합니다. 1948년에는 비비안 리가 가냘프고 우아한 안나 카레니나를 만들었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쾌활한 남부 아가씨와는 달리 신경쇠약 직전의 안나였어요. 키라 나이틀리의 안나가 나오기 직전에는 1997년 소피 마르소의 안나가 있습니다. 실제 러시아인들이 상상하는 안나 카레니나와 너무 다른데다 국적도 러시아가 아니라는 이유로 러시아 평단의 호평은 얻어내지 못했다는데 국적 보다는 페르소나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Ivan Nikolaevich Kramskoi, , 1883, Oil on canvase

;러시아인의 안나 카레니나 이미지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안나 카레니나는 19세기 말 러시아 상류층, 페테르부르크에서 그 상류층에 맞설 힘이 없는 개인이 우연한 사건을 만나 파국에 이르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사회나 다른 이들에 비해 주인공의 개성이 특출하기는 하나, 환경에 비해 크게 우위를 점하지는 않습니다. 안나의 경우 행복을 꿈꾸지만 행복해지지 못하고 파국을 피하려 하지만 파국에 부딪힙니다. 그녀는 일반 독자, 혹은 관객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녀는 브론스키를 원합니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꿈꾸듯 구하게 되지요. 그런 다음 브론스키를 얻습니다. 결국은 브론스키를 잃는 과정입니다. 키라 나이틀리의 안나는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하는 최소한의 거짓말을 하지 못해 그 파장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양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정직함이 죄가 되는 과정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도 보여주지요. 영화의 관심 역시 '브론스키와 춤을 춘 그날과 안나가 기차에 뛰어들던 날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하는 과정입니다

 

 

 

 이 평이한 토대의 서사가 이렇게도 자주 영화화된 것은 무엇보다도 틈이 많기 때문입니다. 독자로서는 안나 카레니나의 마음이 어떤지 추측할 수가 없습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가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할 뿐, '어떻게' 그리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은 안나도, 레빈도 아닌 19세기 러시아 상류층 사회입니다. 비중이 조금 큰 인물은 레빈, 그리고 키티 정도입니다. 안나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 안나가 죽은 다음에도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 모든 것은 안나와는 무관하게 진행됩니다. 레빈, 키티, 오블론스키, 브론스키, 안나의 남편 카레닌, 이 모두를 사회라는 관점에서 조금씩 들여다보기에 안나 카레니나 한 사람의 이야기만 다루는 것도 효율적인 각색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톨스토이는 안나를 처음에는 키티의 눈으로, 그 다음에는 브론스키의 눈으로, 그런 다음에는 카레닌의 눈으로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무대에 올라선 배우를 보듯이요. 소설에서 자살 직전 안나의 내면 독백은 아주 이례적인 일일 정도입니다. , 안나 카레니나의 영화화는 만들기 쉽기 때문에 자주 가능한 일입니다

 




Keira Knightley in Joe Wright's Anna Karenina




 

 

 

 조 라이트는 이전의 '오만과 편견', '속죄'에서와는 다른 시도를 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 전의 두 작품도 각각 제인 오스틴, 이언 매튜언의 작품으로 소설을 각색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더 과감해지기로 한 듯 아예 무대를 연극 무대로 만들었습니다. 러시아에 촬영지를 예약과 취소를 몇 번이나 뒤집고 촬영 전에도 몇 번을 방문한 끝에 촬영을 석 달 앞두고 조 라이트는 런던 근교의 세퍼튼 스튜디오로 장소를 결정합니다. 프러덕션 디자이너 사라 그린우드와 세트 디자이너 케이티 스펜서는 '오만과 편견', '속죄'에서도 조 라이트와 함께 일했으며 그들의 경력을 연극무대에서 시작했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여러 해 함께 일했기에 안나 카레니나의 무대 배경에 있어 균열이 덜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소설의 작가와 편집자의 역할 그 이상으로 공동 작업에 기반을 둔 매체이니까요

 

 

 

 그리하여 탄생한 안나 카레니나의 배경은 정교하고 역동적인 세트, 연극 무대의 형식을 빌려 온 구성입니다. 오프닝에서부터 연극의 막이 오릅니다. 카메라는 무대 앞, , , , , 우를 훑습니다. 레빈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대로 문을 열고 러시아의 설원을 보여주지요. 이렇게 해서 얻는 것은 빛과 그림자의 강렬한 대조입니다. 러닝 타임이 마감 시간처럼 존재하는 영화에서는 초반부터 이 무대 효과를 통해 시간을 절약했기에 키티와 레빈의 이야기를 할 여유가 있습니다레빈의 이야기를 할 때엔 될 수 있으면 낮은 기둥, 무너질 것 같은 대들보, 어두컴컴한 조명을 씁니다. 역광으로 인물을 비추다 광활한 초원 위에 선 레빈을 보여주는 식으로 마치 생쥐와 인간을 보여주는 느낌이에요. 그러다 카레닌의 침실에 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대리석, 높은 기둥, 그의 자기 과시적 품성, 딱딱함, 좁은 시야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그 침실과 무대를 배경으로 안나는 검은 옷을, 붉은 옷을, 키티는 흰 옷과 파스텔톤의 크림색 옷을, 카레닌은 회색의 제목을 입고 오갑니다. 아마도 가장 많이 각색이 허용되고 창의적으로 차용된 부분이 의상 부분일 겁니다. 코코 샤넬이 태어나기도 전인 시점에 안나 카레니나는 동백꽃 모티브의 코코 샤넬 주얼리를 하고 나옵니다. 그녀가 입은 옷은 지방시, 발렌시아가, 샤넬풍입니다. 자신의 외도를 처음으로 인정하게 될 때에 그녀는 붉은색 드레스를, 다른 이들은 모두가 옅고 밝은색의 드레스를 입은 무도회에서 브론스키와 처음 춤을 출 때엔 검은 드레스를 입습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는 대사는 인물의 허울만 비출 뿐,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대사보다는 종으로 횡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카메라,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각자의 집, 그들의 감정을 보여주는 의상, 대사보다 직접적인 움직임과 춤입니다

 

 


 



 

Yi-Lin Cheng for Focus Features

 


 

 매체의 특성을 잠시 생각해보자면, 소설의 독자, 영화의 관객은 무엇을 할까요. 행간을 읽고 단어를 파악하고 문단에 따라 호흡을 달리하는 이들이 독자입니다. 꾸며낸 이야기, 그럴싸한 무언가에 호기심을 느끼고 책장을 넘기는 이들이지요. 아무 곳에서 쓸 데가 없어서 오히려 독자는 자유롭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영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학의 독자가 책장을 넘길 때 영화의 관객은 시퀀스를 따라갑니다. 카메라가 눈이 되어주고 음향은 귀가 됩니다. 의상이 색채를 덧입히고 빛이 이 모두를 아우르지요. 관객은 카메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순수의 시대'에서 롤랜드 아처가 수많은 중절모 무리 사이로 걸어 들어가 마침내는 보이지 않게 될 때, 대부에서 마피아 보스가 어두컴컴한 실내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으며 무언가를 지시할 때, 그리고 안나 카레리나에서 안나가 정신 나간 듯 정원을 헤매거나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보며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해 마침내는 낯선 자신에게 침잠해 들어갈 때, 관객은 종이 위 활자가 마침내는 누군가의 의도를 투영한 꽃으로 피어나는 과정을 목격합니다. 물론 문학과 영화, 이 두 장르를 상하로 파악해서는 안 되지요. 예술의 장르가 기능 올림픽의 종목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 이 두 장르가 종종 서로 대화를 나눌 때 그 묘한 접점과 발화를 바라보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입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분명 인간이 헤맬 수 있는 가장 넓은 평원을 보여줍니다. 모르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을 성공 혹은 실패를 맛보며 앞으로 한 걸음, 뒤로 두 걸음을 내딛다 농노제 폐지를 생각하는 레빈에게 그가 더 큰 비중을 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장치로서의 문학을 아마도 톨스토이는 선택했을 것입니다. 글은 모두 다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글은 누구나 읽을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어떤 글을 읽는가에의 문제라고 본다면, 대문호와 그저 글을 쓰는 이의 차이는, 인간의 한계를 조망하고 생각의 깊이를 하나의 축으로 전개해나가는 데에 있습니다. 독자는 이 모든 글 사이에서 끝없이 길을 찾는 사람들이지요. 영화는, 그것이 이미 있는 소설을 기반으로 각색한 것이든 시나리오에서 출발한 것이든 그 형식 본연의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 라이트의 안나 카레니나가 모든 안나 카레니나에 앞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조 라이트는 형식과 주제의 연관성을 깊이 생각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습니다. 연극을 차용해 그 폭을 넓게 하고 요점은 카메라, 의상, 세트로 간결하게 전달합니다. 그리하여 멜로에 집중하면서도 당시 사회의 부조리함, 개인이 이런 사회와 부딪혔을 때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비극, 떨어질 때의 낙차에서 발생하는 허무함, 그럼에도 계속되는 타인의 삶을 보여줄 수 있지요. 작가가 문장을 고민하듯 감독은 형식을 고민합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재미있는 실험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과 영화의 대화를 통해 독자와 관객은 각자의 의미를 찾아내겠지요. 사회를 생각하고 개인의 한계를 인식하고 계단의 아래를 돌아보는 일, 그런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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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04-21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꼭 보고 싶었는데 저희 집 근처 극장에서 너무 어이없게 빨리 막을 내려버리더라고요. 시간 텀도 너무 어중간했고요. 참, 아쉬웠는데 쟌느님 덕택에 영화 전체적인 분위기, 그리고 세세한 부분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톨스토이는 정말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이 대단한 것 같아요. 조금 더 살아서 더 많은 작품을 남겨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Jeanne_Hebuterne 2013-04-22 11:25   좋아요 0 | URL
이럴 땐 멀티플렉스가 참 야속하지요. 옛날에는 한 달까지도 영화 상영을 지속할지를 두고 봤는데, 요즘은 개봉일에서 사나흘이면 상영 여부가 판가름난다고 하더군요. 상영한다 하여도 조금이라도 인기가 없으면 상영시간대가 영화를 보기 어려운 시간대로 변경되어버리고요. 이 영화가 참신해서 그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는데 블랑카님께서 잘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실제 영화를 보면 음악, 의상, 조명, 세트, 그리고 제가 여기에는 설명하지 못하고 대신 동영상을 링크하기는 했지만, 안무가 대사 이상으로 발언권을 얻어서 굉장한 파급력을 보여줍니다. 조 라이트 감독은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형식의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는 느낌도 듭니다. 아마 이대로 계속한다면 오 년 후에는 더 재미있는 작품을 선보일 것 같아요. 의상은 보디스가 분리되어 있어서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엄밀히 말하면 투피스의 형상이고 무척 현대적이기까지 한데, 영화에서 인물들의 감정을 대신 말해주더군요. 조 라이트의 안나 카레니나는 전체를 조망하려 한 톨스토이의 원작 전부를 담지는 못했지만(그건 어느 영화도 불가능하겠지요!)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면 시간을 절약한 덕분에 안나와 브론스키 이외에도 많은 인물을 둘러볼 여유를 갖습니다.

톨스토이는, 그렇지요. 집나가서 객사하시지만 않으셨더라도......늘 천재의 작품을 보노라면 그들에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