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채기와 상처, 혹은 흉터. 

나도 몰랐던 나의.

살아남은 흔적에 대한 찬사로는 으레 조금 놀랐다는 예의 바른 메아리, 

문득 남겨지는 안타까움.없는 줄 알았던 피부 생채기가 눈에 보이는 날이 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이후로 나아갈 때마다 발에 걸리는 어떤 무엇. 

상처와 피는 늘 흉터로 자리 잡는데, 왜 몰랐을까.




아마도 그것은 문득.




곱게 펼쳤던 트레이싱지를 자르다가, 혹은 무언가를 잘못 밟아서, 발을 헛디뎌서, 손끝을 잘못 놀려서.

순간의 '어느 날'. 

펼친 종이 칼끝으로 스윽 긋던 오후. 

발끝 유리 빠득 소리 낼 것 같던 한밤. 

살짝 튀던 비명. 스윽 혀끝 감촉, 파닥 뛰던 심장. 




울음 끝난 후가 아닌 울음 시작하는 생채기 비밀.

두연, 문득, 홀연. 




암흑이 순백으로 보일 때가 있지. 그럴 땐 흰 바탕에 흰 글씨를 쓰는 하얀 사람이 밤의 모서리에 석고를 바를 때. 우주의 처음과 끝이 약봉지 속에서 떨어져 내린 알록달록한 알약처럼 친밀하게 느껴질 때.









 앤드루 포터의 단편 모음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책장을 펼치면, 헤더의 시선이 조용히 닿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바스러지고 홀연홀몰하고 만다. 갑자기 문득 나타났다가 갑자기 문득 사라진다. 어느 순간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왈칵 거리고 파닥거린다. 아무 자국이 없고 매끈하다 생각하였건만 어느 순간 눈물이 나타나는 순간이 온다. 




 그것이 어떻게 파닥거렸던가. 물리학 기말고사의 방정식의 제출과정을 유일하게 제출한 헤더를 로버트가 자기 집으로 초대해 차를 대접하며 두근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쩌다 왈칵 쏟아졌나. 두 사람이 술집에서 손잡고 술을 마시다 헤더의 애인 콜린에게 들키면서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그것은 어떻게 돌이킬 수 없었던가. 문득, 뜻하지 아니하게 갑자기. 십이월의 어느 날부터 줄곧 로버트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헤더의 고백체 문장은 종이 위 잉크자국과 눈 위의 발자국, 어느 것이었을까. 




 남자친구가 있다는 헤더의 말에 로버트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답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말에 로버트는 기쁘다고 말한다. 이러한 대화에서 보듯, 앤드루 포터의 문장은 쉽게 스민다. 삶이 베일 때 손끝에서 피가 솟아나듯 흥건하게 일어나는 반응을 만든다. 스미는 빛과 정지하거나 움직이는 물체를 떠올리면 우리가 간과하는 진실, 늘 스쳐 지나가는 진심으로부터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도망치는 그물이 보인다. 표제작의 침착하고 조용한 나이 많은 남자친구와 같이 꾸미지 않은 단정한 문장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곧, 단편 소설의 상처와 비밀. 




아파도 절반만이 아프고 누워도 절반쯤 잠을 자는 그런 밤이 올 때가 있지. 그럴 땐 추위도 모르는 때. 북극의 지평선 저만치에 놓인 냉장고가 되는 때. 그땐 소리가 없지. 방 한 칸이 줄 없는 비파처럼 통째로 공명통이 되지. 그럴 땐 울음에 홀리지. 홀린 채로 헐리지.





 헤더는 콜린을 만나기를 기대하지 않는 만큼 로버트를 만나기를 기대한다. 박수소리가 무대를 밝히듯 약속이 서로의 마음을 밝힌다. 서로 만나지 말아 달라는 콜린의 부탁은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외부의 충격이 아닌 내부의 실금. 보통 우리의 삶은 이렇게 무너져 내린다. 변명할까, 하지 말까. 이 남자를 사랑할까, 저 남자를 사랑할까. 이런 문제가 이 짧은 이야기의 맨 앞으로 나왔다면 이것은 오셀로의 재탕이 되었을 것이지만 앤드루 포터는 죄의식과 소유, 진실과 우리가 모르고 지나가는 어떤 것의 상실을 생채기와 함께 보여준다. 아파도 절반만 아픈 날, 누워도 절반쯤 자는 밤. 추위를 모르고 홀로 소리 없이 헐리는 밤. 장편의 진실은 팔짱을 끼고 옆에서 걷는데 단편의 진실은 늘 반걸음 뒤에서 홀연히 나타난다. 없던 것을 잃어버리는 순간, 북극의 지평선 저만치 놓인 냉장고가 소리도 없이 우는 때.





암흑이 비단처럼 보일 때가 있지. 그럴 땐 흑장미와 흑장미 가시와 흑장미에 앉은 벌 한 마리와 흑장미 그림자조차 비단이 되는 때. 가장 시린 한 구석만이라도 잠시만이라도 그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싶어지는 때. 지금은 시린 발을 담그지. 바닷물처럼 그 속에 정강이를 담그고 조금씩 조금씩만 앞으로 나가보는 때. 할 말은 혼자서만 하는 때.





 어떤 순간은 어떤 순간 자체로 남는다. 보면 보이는 것, 읽으면 읽히는 것. 그래야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원하는 일이라는 착각. 고집과 거부가 아닌 자기보다 더 자기를 잘 이해하는 이에게 펼치는 비단. 이해한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 말은 혼자서만 하는 때가 뒤따른다. 죄책감은 고백의 뿌리라고 헤더는 말한다. 헤더가 하는 결정과 늦은 밤 울리는 흔적 없는 전화, 애써 믿고 싶은 무엇과 떠오르는 진실. 헤더는 필수 사항과 불필수 사항 사이에서 훌륭한 균형을 잡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어느날 가끔, 서랍 속 어떤 구석이 헤더의 눈에만 보인다. 일말의 죄의식은 자초하여 있는 모든 상처 처럼 영원하며, 행동 자체만큼이나 생생해진다는 그녀의 생각처럼 홀연히.





파르락, 스윽, 빠득, 토독, 파닥.

종이가 펼쳐지고 칼끝은 스윽 갈 길을 간다. 

빠득 소리 없이 파고들고 둔탁한 발끝으로.

결국, 빨리 뛰는 심장이 위험 신호를 보내는 내일의 기억. 





 우리는 저마다 비슷하게 다치지만 남의 행복에 자신의 행복을 꺾으면서도 남의 불행에 자신의 슬픔을 내려놓지는 못한다. 상실, 상처, 고통, 회한. 기억이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남기지만 그것으로 어쩌면 어제의 예언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기억의 주름은 종종 죄의식과 고백,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누구나 그것을 마음속 서재의 세 번째 서가 다섯 번째 칸 같은 곳에 담아두고 혼자 걸음할 때가 있다. 굳이 애써 페이지를 뜯어내거나 재차 숨은그림찾기를 하지 않아도 그곳에 그대로 있는. 늦은 밤, 옆에 누가 있든 아니면 혼자 소파에 앉아있든 아무도 모르게 지하로 난 계단을 발소리도 없이 내려가 불을 켠다. 기억하고 있는 서가의 그 책장 칸에서 바로 그 책을 꺼내어 들면, 그 날의 내가 눈에 밟힌다. 다시 지상의 공간으로 올라오기 전 책장을 훑는 손끝이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은 문장이나 단어 끝 마침표나 줄임표. 문득 어느 한순간의 강력한 한 방이 아닌 내 안에서 조용히 이어져 온 가느다란 실금의 흔적으로 찍힌.......





해갈을 욕망하고 지내다 보면 어느새 물을 잊게 되지. 사막낙타가 사막낙타가시나무를 우물우물 씹듯 제 입안에 고인 핏물로 목을 축이듯. 이게 내가 식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암흑은 인공위성으로 어제 찍어둔 빙하. 오늘은 사라지고 없을 테지. 





*파란색 글씨는 모두 김소연 시인의 시집 <눈물이라는 뼈>에 수록된 '비밀'의 조각과 전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4-02-23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에서 김소연의 시집을 다 뽑아들고 그중에서 어떤 걸 사야할까 고민했던 날이 있었어요.
<눈물이라는 뼈>라는 시집 제목에서도 보이듯이, <마음사전>이라는 책 내용도 그렇듯이, 김소연 시인은 보통 사람이 흔히 쓰는 단어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새로운 의미를 붙이는데에 탁월한 능력이 있는 시인 같아요. 암흑과 순백, 울음과 공명통, 눈물과 뼈, 알록달록한 알약의 이미지란 또 어떤가요.
너무 일찍 깨어나서 좀 더 자려고 소설가 한강의 목소리를 귀맡에 틀어놓고 한동안 누워있다가 일어난, 그래도 아직 새벽이네요 ^^
윤상의 저 노래는 제목부터 공감입니다. 흔해빠진 사랑, 정말 흔해빠진 사랑 맞아요.

Jeanne_Hebuterne 2014-02-23 20:05   좋아요 0 | URL
hinine님, 김소연 시인은 저도 참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시인이 쓰는 산문은 단어 활용이 소설가가 쓰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가 보여서 <마음사전>을 유심히 읽었지요. 종종 낱말을 가리고 뜻만 보고 그 대상이 어떤 단어인지 알아맞추는 놀이를 혼자 한 적도 있었어요. 설레임, 첫사랑, 이런 것들이 김소연 시인의 필터를 거치면 묘하게 하늘거리는 것 같았어요. 애매할수록 정확해지는 것 같았어요. 세상이 애매하니까요.

hnine님은 그러고 보면 검푸른 새벽과 참 어울리는 분인듯 해요. 단상과 감상을 효율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을 흘려보내시지 않으시니까요. 새벽에 듣는 윤상은 늘, 소리 전체를 울린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일렉트로닉스와 제 3세계 음악을 자신이 원하는 만큼 섞는 재주와 초반 박창학의 가사가 그랬더랬지요. 흔해빠진 사랑인데, 가사 말미에 나오는 남몰래 따라 부르는 서글픈 멜로디, 그 부분에 마음이 홀렸더랬어요. 결국, 남몰래 나도 부를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으로 들렸는데 저역시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을거란 생각에서요. 흔해빠진 것의 위력은 이런 부분에서 나오나 봅니다.

다크아이즈 2014-02-23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이라는 뼈, 저도 관심 있었는데, 여기서 발견하네요.
<암흑이 비단처럼 보일 때가 있지.... 가장 시린 한 구석만이라도 잠시만이라도 그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싶어지는 때. 지금은 시린 발을 담그지. 바닷물처럼 그 속에 정강이를 담그고 조금씩 조금씩만 앞으로 나가보는 때. 할 말은 혼자서만 하는 때.> 이런 구절들의 향연이라면, 제 폐부를 찔러도 사서 보는 수고로움은 마땅하다고 봐요.

생채기, 상처, 흉터 이런 말은 저도 너무 자주 써서 이제 그 말들의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어느새 들여다 보면 그런 낱말이 난무하는 단상들을 보고 확, 정신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그것들을 내가 곱씹어서 얻은 게 뭔데? 이런 오기 같은 게 생기지 뭐예요? 해서 요즘은 그 말들을 안 쓰려고 안간 힘으로 버티는데 그게 잘 안 되지 뭡니까?


에뷔테른님도 휴일 잘 견디시어요^^*

Jeanne_Hebuterne 2014-02-23 20:10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휴일이 다 간 지금 팜므느와르님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약간은 헐렁하고 약간은 묵직한, 늘 '약간의' 시각입니다.

김소연 시인의 시를 접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시를 읽은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단어의 선별, 조사의 사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김소연 시인의 시에서 느끼곤 했습니다. 지금 시린 발을 담근다고 하지 않고 '지금은' 시린 발을 담근다고 할 때, 어제와 오늘은 다른 순간이 되는 것 같아요. 우리 말은 조사로 인해 부정확해지고 도리어 조사로 인해 더 정확해지는 순간이 많은데 시인과 소설가의 글은 조사 사용으로 인하여 그들의 개성을 드러내는 듯합니다.

생채기, 상처, 흉터. 참 슬프고 아련하고 반면 단단하고 굳건한 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어요. 말들의 감옥이라는 표현에 잠시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말들의 감옥에 저마다 갇혀있다면, 저는 종종 그 벽이 점 좁아지는 감옥에 들어 앉아 있는 것 아닌가, 하고요. 그래서 요즈음은 낱말을, 좀 더 곱씹어 보고 소리내어 읽어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종이 위의 글씨와 공기 중의 글씨는 참으로 다른 것 같아서요.

휴일이 다 갔습니다. 이제 새 날이 또 오겠지요. 주말 마무리 잘 하시고, 재미있는 새로운 한 주 되시기를 바랍니다 :)
 

 






 

 어떤 선물, 유일무이한.





 한 남자, 피아노와 성조기를 등지고 관객을 향해 허리를 약간 굽혀 인사한다. 객석은 가득 찼고 사람들은 일어나 있다. 흑백이라 잘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 얼굴에 웃음이, 연주회장일 거라 짐작되는 장소는 박수소리로 가득하였음이 느껴진다. 그들은 그들이 들었을 희로애락에 고마워하는 것이리라. 카네기 홀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1891년부터 카네기 홀은 뉴욕의 클래식 음악 연주회장으로 명성을 높여왔다. 그 명성은 셀 수 없이 많은 오케스트라, 지휘자, 앙상블,  성악가와 독주 악기 연주자들이 거쳐 감으로써 120년 이상,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카네기 홀은 어떻게 가나요?' 라는 여행객들의 질문에 어느 뉴요커가 '연습, 연습, 연습이오!' 라고 답했다는 농담이 아직도 전해지는 곳. 바로 카네기홀 연주회 실황을 엮은 귀중한 박스반을 선물 받았다. 





         







 고마운 마음 한가득에 열린 귀에는 기쁘고 화나고 사랑하고 즐거운 마음. 

 피아니스트가 창조할 수 있는 모든 음악.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음표는 그것이 무엇이건 읽을 수 있는 음악의 모든 것을 품었다. 모차르트의 밝음, 쇼팽의 맑음, 리스트의 기교, 스카를라티의 생동, 스크리아빈의 파괴. 이 희로애락을 듣노라면 세상에 그가 표현하지 못했을 감정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1903년 러시아 태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1925년 베를린 연주를 시작으로 1928년 뉴욕 카네기 홀에서 토머스 비첨 지휘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하룻밤 새 유명해진 연주자가 된다. 




  I played the octaves the loudest, the fastest, they ever heard in their life.




 이 박스의 첫 장은 토머스 비첨과의 카네기홀 데뷔 무대가 아닌 토스카니니와의 협연인데, 그 속도감과 박력에 뒤따르는 서정적인 느낌은 여전하다. 피아니스트의 피아니스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연주가 그 뒤로도 이어지니, 머레이 페라이어(유일무이한 연주), 루빈스타인(나보다 뛰어난 연주자), 라흐마니노프(편집권을 아예 넘겨버림), 클라우디오 아라우(내가 꿈꾸던 세계를 그는 이미 완성했다.)와 같은 연주자와 작곡가들의 찬사가 그의 피아니즘을 보증해준 셈이다. 속지에서 전하는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연주 감상을 잠시 들어보자.




 It was an incredible shock for me because it was more Horowitz than what I thought Horowitz was. Nelson and I were sitting there holding hands, tense. The strength of his expression, the sound, and this incredible violence he has inside which is so strange, weird and frightening. That he can express it. He's like possessed. I've read about this, but this was the first time that I saw on stage someone who has that!




 과연, 연주를 들어보노라면 아르헤리치의 감상과 다른 피아니스트, 작곡가들의 말이 틀림이 없다. 카네기홀의 첫 연주라는 1943년 4월 25일의 연주는 지금과 비교했을 때 열악한 당시 녹음 상태를 참작하더라도 충분히 충격적이다. 저 연주가 정말 70여 년도 더 전에 있었던 연주일까? 음반 자켓을 보면 마치 초대장처럼 이러한 글씨가 보인다.







CARNEIE HALL

presents


Vladimir Horowitz

Pianist


THE HISTORIC BROADCAST 

OF APRIL 25, 1943


Tchaikovsky : PIANO CONCERTO NO.1

NVC Symphony Orchestra

Arturo Toscanini


Sunday afternoon, 3:30 o'clock.







 이 박스반의 특징은 이렇게 새겨진 생생함에서 온다. 또한, 모든 음악이 같을 필요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된다고 말하듯 1943년 토스카니니와 협연할 때의 호로비츠와 1976년 로트로포비치와 협연할 때의 호로비츠는 같지 않다. 협연을 잘 하지 않아 협연이 드문데 이 박스반의 협연을 들어보면 그가 오케스트를 어떻게 압박하지 않고도 압도하는지 알 수 있다. 

 비록 녹음상태가 옛날일수록 좋지 않아 감상에 무리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음질과 무관하게 지나간 어떤 시간을 돌이켜볼 기회라는 것도 흔치 않은 것이 아닐까. 일례로 1966년 연주회에서는 객석의 기침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1949년 연주에서는 희미한 잡음이 짧지 않게 드리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호로비츠의 연주는 진눈깨비, 안개처럼 있으되 있지 않은 것을 펼친다. 더군다나 모든 음반이 다 그런 것도 아니며, 카네기홀에서의 그의 연주를 시간 순서로 모아 조금씩 변하는 레파토리와 연주자의 개성이 점차 다듬어지고 또렷해지는 것이 보인다는 것이 이 박스반의 큰 장점이다. 





 마흔하나의 음반, 마흔하나의 다른 얼굴. 

 연주는 때로는 강렬하고 때로는 나른하고 때로는 천진하기까지 하다.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팔꿈치는 아래에 축, 손가락을 쭉 편 채로 손바닥은 아예 건반 아래에 내려가 있다. 호랑이처럼 포효할 때도 있고 햇빛 아래 이슬처럼 반짝일 때도 있다. 그러나 과장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다. 일례로 '겨울바람'이라는 부제로 유명한 쇼팽의 에튀드 Op.10-4. 리히터의 연주는 2분 3초가 걸리는데 호로비츠의 실황에서는 40여 초가 더 길다. 리히터는 으르렁거리듯 단숨에 한 덩어리의 바람이 되어 귀를 훑는다. 호로비츠는 앞과 뒤의 균형을 조심스레 찾아나가며 음표를 하나씩 쌓아올린다. 전체를 들으면 두 연주자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씩 드러난다. 해석의 차이는 이런 것이 아닐까. 시간이 더, 혹은 덜.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내가 자주 떠올리는, 어떤 이의 말, 음악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 강함과 약함, 좀 더 긴 시간과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만약 어느 것은 강하고 어느 것은 약하게 한다면, 강한 것은 어떻게 강하며 약한 것은 어떻게 약한 것일까? 강하게 한다면 약함과의 대비를 통한 강함일까, 그것 홀로 두드러지는 강렬함일까? 




 그 강렬함 속에서 읽는 어떤 색깔.

 

 

 

우리는 파란색을 안다고 생각한다.우리는 파란색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먼셀 표색계, 혹은 삼원색의 하나라는 국어사전의 설명으로 그 파랑이 완벽한 파랑이 될 수 있을까? 스펙트럼을 통과했을 때 초록과 남색 사이의 어떤 흐름을 파랑이라고 한다면, 초록에 가까운 파랑도, 남색에 가까운 파랑도 파랑일 것이다. 그러나 노랑 위의 파랑과 빨강 위의 파랑이 다르듯, 음악은 마치 시처럼,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자 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내가 호로비츠를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스카를라티, 스크리아빈처럼 호로비츠가 아니면 몰랐을지도 모를 작곡가의 음악. 얼굴을 바꾸는 연주. 하나하나 음표를 공들여 쌓듯 하는 성실한 연주. 말년으로 갈수록 표현력은 점점 증폭되고 강렬해진다. 그를 일컬어 많은 음악평론가와 고전음악 애호가들은 '마지막 낭만주의자'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그가 정말 '마지막 남은' 낭만주의자여서가 아니라, 그만큼 시대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손가락을 쭉 편 채 음표를 하나하나 가다듬듯 어루만지다가 점차로 자신이 쌓아올린 이미지의 정점을 보여줄 때의 호로비츠는, 유일무이하다. 마치 수백 번도 더 해보았다는 듯한 무심한 움직임과 호로비츠 자신이 아니면 보여줄 수 없었을 연주. 멀리서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시선의 이동. 듣는 이의 눈앞에 끌어내는 이미지. 피아니스트가 이해하는 음악의 얼굴. 이것은 어쩌면 훌륭한 연주만이 아닌, 훌륭한 글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특징일 수도 있다. 그의 음악은 글을 닮았다. 그 닮은 얼굴을 보노라면 상하좌우가 바뀐 듣는 이의 마음이 스친다. 호로비츠의 음악이 주는 메세지를 듣다 보면 위대한 연주, 유일무이한 연주란 무엇인가가 보인다. 이것이 바로 내가 호로비츠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이 박스반에는 12년간의 은둔을 끝내고 카네기홀에 다시 선 1965년 5월 9일의 실황이 담겨있다. 속지를 살펴보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It is here I should start again. 



 12년의 쉼이 어떠했을지, 그 쉼 후 다시 시작하는 마음이 어떠했을지 음반 뒤에 감상을 덧붙이며 짐작해 본다. 거침없는 리스트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파괴적인 스크리아빈으로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공연은 음반과는 달라서 청중과 무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 이 분명함에 있어서 호로비츠가 침묵을 걷어내기 위해 생각한 것은 바흐의 토카타였다는 것.  

 

 

 조용하게 퍼지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피아노 소리가 뚜벅뚜벅.

 

 

 

 쉼을 끝내고 어디론가 떠나거나 어디에선가 돌아올 이가 있다면 나는 1965년 5월 9일 일요일 오후 3시 30분, 호로비츠가 연주한 바흐의 토카타를 권하고 싶다. 그 뚜벅뚜벅 발자국을 일러주고 싶다. 언젠가의 네가 나에게, 언젠가의 나를 나에게. 이미 지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무엇을. 그리하여 우리는 계속 흐를 것이며 음악도 계속 흘러, 잡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이렇게 여기에 기억될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oonnight 2014-02-17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잔님께 꼭 맞게 어울리는 선물인 듯. +_+; 너무 예뻐요.>.<
잔님 페이퍼를 읽다보니, 저도 소장하고 싶은(듣고 싶다기보다;;;) 욕구가 마구 끓어오르지만 저같은 막귀인간-_-이 사기에는 음반에게 미안해진다는. ㅜ_ㅜ 그치만 갖고 싶다. ㅠ_ㅠ;;;

Jeanne_Hebuterne 2014-02-17 22:33   좋아요 0 | URL
moonnight님! 늘 한결같은 님 퍼스나콘을 보면 어쩐지 여기가 덜 낯설어 보여 안심이 된답니다. 제가 은근히 든든해 하는 것, 아시지요? 요즈음 이것저것 바뀐 것이 많아 좀체로 껍질에서 나오질 못하고 있었거든요. 이럴때 보이는 반가운 얼굴을 보면,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몰라요!

음반에게 미안해질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여림히 잘 들으면 그 자체로 좋지 않을까요? 저도 아는 것이 없어 몹시 헤매는데, 이 박스반은 가격면에서도 내용면에서도 꽤 알찬듯 싶습니다. 호로비츠 만년의 연주는 많았으나 초기 연주도 많고, 특히 토스카니니와의 협연이 무척 좋아요. 음반을 잘 살펴보니 프라이빗 레코딩도 좀 있어요. 출처를 알 수는 없지만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원은 아닌듯 합니다. 게다가 dvd도 몇 장 있어 호로비츠의 음악을 처음 접하는 이에게도, 팬에게도 꽤 의미있는 선물이 될듯 합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계속 새로운 것이 보여서, 꼭 드라마 보는 재미처럼 매일밤 듣게 되었어요. (실제로 보면 더 이쁘답니다. 문나잇님 취향에도 딱일듯!!!)

moonnight 2014-02-18 13:50   좋아요 0 | URL
잔님... >.< (뭐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팬심ㅜ_ㅜ)


그나저나,

헉 이렇게 부추기시면... 이 손가락은 왜 멋대로 클릭클릭;;;;;
잔님 덕분에 용기내어봅니다. 저도 들어볼래요. 불끈;
예쁘다 예뻐+_+;;; (계속 감탄중 +_+;;;;;;;;;;;;;)

Jeanne_Hebuterne 2014-02-19 15:04   좋아요 0 | URL
즐거운 감상 되시기를 바랍니다, moonnight님!! :)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곳에 자취를 남겨주셔서 제가 더 고마워요!
 

 

 

 사는 것이 치사스러워서였다. 황인숙의 시 ''에 나오는 사람처럼, 강에 가서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사는 것이 비루하고 던적스럽고 종종 갈피를 잃은듯한 느낌이 들 때 찾는 시가 있었다. 메리 올리버는 아니지. 초여름 맥주와 함께 모깃불을 피우며 읽어야 하는데 나는 지금 손발이 꽁꽁 얼었잖아. 박정대는 어떨까. , 그의 시집은 이런 애매하게 추운 겨울의 태평양을 바라보며 읽을 게 아니라 바르셀로나에서 마리화나를 한 대 입에 물고 읽는 게 좋지 않을까. 어줍잖게 알지도 못하는 시인 몇몇 시를 떠올려 보다가 집어든 쉼보르스카의 시였다.

 

 

 

 

 

 

 

<가장 이상한 세 단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의 첫째 음절은 이미 과거를 향해 출발한다.

내가 "고요"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나는 이미 정적을 깨고 있다.

내가 "아무것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를 창조하게 된다.

결코 무에 귀속될 수 없는

실재하는 그 무엇인가를.

 

 

  봄에 쓰기 시작한 시를 가을에 완성하는 때도 있다고 말하는, 다작을 꺼리는, 199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그녀의 시를 읽노라면 일상의 언어가 이렇게도 웅장해지고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시를 읽는 내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시를 쓴 시인이 가장 어려운 말을 가장 쉽게 하는 것을 바라보는 신기한 경험. 긴 이야기를 짧게, 깊은 이야기를 간단하게. 전체에 앞선 개인을, 형식에 앞선 내용을 이보다 효율적으로 힘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굳이 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하여도 핵심은 더 명확해지는 쉼보르스카의 시어는 모든 것이 조용히 사그라지는 새벽 네 시의 언어이다. 그녀의 시 '새벽 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밤에서 낮으로 가는 시간.

옆에서 옆으로 도는 시간.

삼십대를 위한 시간.

 

 

 시간의 반복. 밤과 낮, 옆과 옆. 늙어간다는 착각을 하는 시기. 가고, 돌고, 위하는 시간. 생명이 없음에도 무언가를 품는 무심한 무엇. 작은 무언가를 보는 눈, 그녀의 눈은 그것이 양파이든 모래 알갱이든 이름도 모르는 무엇이든, 혹은 911의 사진이든, 아기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이든, 테러리스트이든, 그녀의 눈은 대상의 진짜를 파악하고 있다. 진짜가 무엇이며 허울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아마 쉼보르스카의 시집을 권하고 싶어질 것 같다. 고문을 당하는 이의 말랑말랑한 연약한 피부 아래 관절과 살결, 포르노 배우의 교태로운 단순함과 기묘한 체위, 시체로 가득 찬 수레를 밀고 지나가는 끝과 시작. 일상과 전쟁, 돈과 상품, 테러와 죽음, 1 다음에 2, 3, 4를 건너뛴 5. 쉼보르스카의 시에서 느껴지는 긴장, 순간의 도약, 일상의 언어로 빚어낸 형식미 속의 진실을 보노라면 내가 알고 있었던 세계가 한 꺼풀 얇은 막을 벗는 것 같다. 긴장과 반전, 때로는 열정과 냉소가 함께 품은 언어. 때로는 슬퍼서 냉담하고 우스워서 슬픈 일.

 

 

 

 외국어 낱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La Pologne(폴란드)? La Pologne(폴란드)? 거기는 지독하게 춥다면서요? 정말인가요?

이렇게 물으며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지구촌 방방곡곡 분쟁이 끊이질 않는 요즘, 날씨 이야기만큼 적절한 화제도 없었으므로.

 

", 부인!"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내 조국에서는 시인들이 장갑을 낀 채 시를 쓴답니다. 물론 이십사 시간 내내 장갑을 끼고 사는 건 아니지만. 예를 들어 포근한 달빛이 방 안을 따뜻하게 데워주면, 그때는 비로소 장갑을 벗지요. 그들이 쓴 시구에는 부엉이의 황량하고 구슬픈 울음소리가 담겨 있답니다. 이따금 사나운 광풍이 으르렁대며 그 틈바구니를 파고들기도 하죠. 시인들은 바다표범을 기르는 어부들의 소박한 삶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답니다. 고전주의자들은 바람에 쌓인 눈 더미를 발로 꾹꾹 누른 뒤에, 그 위에다 잉크를 묻힌 고드름으로 서정시를 새겨넣지요. 나머지, 우리 데카당파 작가들은 흩날리는 눈송이의 덧없는 운명을 보고 비탄에 잠기곤 하죠. 물에 뛰어들고 싶은 사람은 자기가 직접 도끼를 가지고 호수 위에 바람구멍을 만들어야 한답니다. 친애하는 부인이여!"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프랑스어로 '바다표범'이 무엇인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고드름''바람구멍'도 확실치 않았다.

 

"La Pologne? La Pologne? 거기는 지독하게 춥다면서요? 정말인가요?"

 

"Pas du tout(, 대체로 그렇죠)"

 

나는 얼음처럼 냉랭한 목소리로 짤막하게 대답하고 만다. 

 

 

 

  마음 속 하고 싶은 말이 저리도 많은데 단어를 제대로 찾지 못해 이상한 표정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 마치 생을 몇 초밖에 남기지 않은 사형수 머릿속처럼 지나간다. 에트랑제의 서글픔, 나는 속이 어떻게 아프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소화제 대신 두통약을 잘못 집어 먹던 날. Dead end라는 교통표지판을 보며 혼자 기이한 상상을 했던 순간. 농담으로 끝나면 다행일 온갖 실수들. 말을 하지 못해 바보가 되는 건 어릴 때나 귀여운 일인데, 나는 어른이 되고서야 그 짓을 반복한다 

 

 

 

  사는 것이 고단하거나 억울하고, 피곤한 발끝을 녹일 때 떠오르던 어떤 노래, 어떤 시, 어떤 책. 사람은 위안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어서 기억을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활용하곤 한다. 정작 문학의 목적인 미학적인 완성도일 텐데, 어떨 때는 '이렇게 멍청했던 게, 이렇게 피곤했던 게, 이렇게 비루했던 게 나 혼자만이 아니었어.' 라는 제멋대로 위안도 얻는 것이다. 이를테면 앨리스 먼로의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 나오는 첫 번째 단편, '작업실'이 그렇다.

 

 

 

 내 삶을 해결할 방법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어느 날 저녁 셔츠를 다림질하고 있을 때였다. 그것은 간단하지만 뻔뻔해져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거실로 들어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작업실을 얻어야겠어요."

 

내가 듣기에도 허황한 소리였다. 구태여 작업실을 얻어야 할 까닭이 뭔가. 집이 있잖은가. 쾌적하고 널찍하고 바다가 훤히 보이니 전망도 좋고, 맞춤한 식당과 침실과 욕실에다 친구들과 담소를 즐길 공간도 있다. 게다가 정원까지 있으니 공간이 없어서 작업을 못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맞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나로서는 쉽지 않은 말을 털어놓아야겠다. 나는 작가다. 하고 보니 당찮다. 너무 주제넘은 소리다. 잔뜩 겉멋이 든, 아니 누구에게도 먹혀들지 않을 소리다. 다시 해보자. 나는 글을 쓴다. 조금 나은가? 나는 습작을 한다. 이건 안 하니만 못하다. 겸손을 가장한 위선으로 들리니까. 그러면?

 

-앨리스 먼로, '작업실' 앞부분

       

 

 

 

 

 

 

  2013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앨리스 먼로의 단편 한 부분. 단편 소설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노벨 문학상의 권위가 아무리 예전만 못하고 한편의 쇼처럼 보인다 하여도 여전히 어떤 작가를 소개할 때 이 후광은 무시 못할 음영을 드리운다. 하다못해 위안을 받는 소설집을 펼쳐볼 때에도 이제는 노벨상이라는 글씨가 당당히 자리 잡고 있으니.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당당한 글씨보다 더 당당하게, 앨리스 먼로가 소시민의 서러움과 비애와 애수를 자신의 작품 전반에 잔잔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집값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며 한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가정주부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작업실을 얻고 싶다는 말을 하기 전조차 개미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여자가 만나는 괴물 같은 숙적. 어느 순간 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가늠하기 어려운, 끝끝내 알 길이 없이 바뀌어버리는 풍경'이 되는 순간. 앨리스 먼로는 그날그날, 하루하루를 사는 작디 작은 사람이 내는 여리디여린 목소리를 흘려듣지 않는다. 물론, 신발 밑바닥에 천 원짜리 지폐 하나 몰래 숨긴듯한 희망을 살짝 비추는 것을 표제작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살포시 드러내지만, 정작 내가 종종 위안을 받으면서도 조마조마하게 읽었던 것은 '작업실'이었다

 

 

 

  작업실, 작품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역시 복병은 꼭 없어야 할 곳에서 나타나는 법. 처음에는 소파나 커튼을 권하더니 화초와 주전자를 들이밀며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남자가 나온다. 작가들은 모두의 인생에 관심을 가진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작가들의 관심은 '소설이 될법한 인생 이야기'가 아니던가. 적당한 환멸, 적당한 참담함과 배신, 생명의 위협까지, 이 모든 것을 한 번도 당해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작업실을 얻은 그녀와 작업실을 방해하는 그의 모습은 소설 속의 ''를 괴롭히는 타자로 등장한다. 이 타자의 모습으로 새롭게 조명되는 관계의 갈등으로 말미암은 뒤끝은 뜻밖에 분노가 아닌 잔잔한 우울이다. 마치 밀물이 빠지고 썰물이 들어차듯, 관계의 피로도, 구조에서 들어차는 갈등도, 사람의 속마음에 비할 바가 아닐 때가 있으니까. 그럼에도 지우지 못해 한숨이 나오는 것은 왜일까.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주는 기묘한 힘의 세계가 앨리스 먼로의 단편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 기묘한 힘의 방향이 종종 의도치 않은 곳으로 가는 것을 보노라면 마치 저 스스로 생명을 가진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그 힘의 여파를 겪는 것은 역시나 평범(하거나 평범하지 않거나, 여하튼).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포착한 단편을 보며 위안을 받거나 놀라던 시간. 앨리스 먼로와 쉼보르스카는 간섭이 아닌 시선을 보낸다. 그것은 때로는 조용한 위로이기도 했고, 때로는 진중한 고백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둘 다, 강요하지 않는 깊이를 지녔다. 이 정도 되면 문학에서 받는 위안을 넘어, 훌륭한 예술적 경험을 했다는 느낌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보통의 책 읽는 사람일 뿐이니까.

 

 

 

 나는 아직 다른 작업실을 구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다시 찾아볼 생각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마음속에 또렷이 떠오르는 그 그림-멜리 씨가 걸레와 솔과 비눗물이 든 물통을 들고 어설프게, 일부러 어설픈 동작으로 화장실 벽 앞에 구부정하게 서서 낑낑거리며 문질러 닦고 서러운 한숨을 토해 내며, 이미 기이하기 짝이 없는데도 웬일인지 절대 성에 차지 않는, 믿음을 배반하는 또다른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짜내고 있는-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는 적어도 기다릴 참이다. 원고를 다듬으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 남자를 지워 없애는 것은 내 권리라고.

 

-앨리스 먼로, '작업실' 마지막 부분.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reamout 2014-01-3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끝과 시작. 이라는 시집 제목의 의미를 몰랐는데,

내가 "아무것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를 창조하게 된다.

이 시구에서 무언가를 잡은 기분이 들어요.

Jeanne_Hebuterne 2014-02-02 13:54   좋아요 0 | URL
시를 잘 모르지만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으면 우리가 즐겨 쓰는 쉽고 편한 낱말이 이렇게 깊을 수가 있다는 것에 놀라곤 합니다. 아마도 dreamout님에게 이 시가 어떤 의미로든 와닿았다면, 어떤 의미에서였을지가 궁금해요. 결국, 사람은 모순에 모순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고 나조차도 나를 모르겠지만 쉼보르스카는 그 모순까지 물끄러미 들여다 보려 했을거란 추측을 조심스레 해봅니다. 저역시 다는 모르는 이 시집의 의미가 dreamout님에게는 더욱 명쾌하고 분명한 것이기를 바라요!

다크아이즈 2014-02-02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리스 먼로와 쉼보르스카는 간섭이 아닌 시선을 보낸다. 그것은 때로는 조용한 위로이기도 했고, 때로는 진중한 고백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둘 다, 강요하지 않는 깊이를 지녔다. 이 정도 되면 문학에서 받는 위안을 넘어, 훌륭한 예술적 경험을 했다는 느낌이다.>

제가 에뷔테른 님을 주목하는 이유가 저런 문장들 때문이에요.
비스와바 쉼보르카도, 앨리스 먼로도 다 제겐 눈물 나는 작가들.
쉼 여사사의 외국어 낱말, 나물 꼭꼭 씹어 먹듯 암독할 땐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이다.
에뷔님 여여하신지요?

Jeanne_Hebuterne 2014-02-02 13:59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잘 지내셨지요? 2013년이 가고 1월이 가고 2월이 되었어요. 날은 흐리고 빗방울이 떨어지고 봄날같은 겨울날인데, 무엇 하고 지내시는지요? 여전히 열심히 읽고 좋은 글들 남기고 계신데, 오랜만에 뵙게 되니 더욱 반갑습니다. 아는 얼굴이 점점 줄어들어 안그래도 서재 지형도가 잘 떠오르지 않는데 팜므느와르님의 퍼스타콘을 보면 뭔가 든든한 기분이 들어요 :)

저 외국어 낱말이란 시, 참 좋지요? 저 하나하나 낱말을 떠올리며 고국의 공기, 숨결, 시인의 펜끝을 떠올리며 그것을 전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결국 낱말들 하나하나에 부딪혀 에뜨랑제의 입끝에서 터져나오지 못하는 것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어요. 모국어든 외국어든 말하는 사람의 혀끝은 늘 완전하지가 못하고 마음의 온도가 혀끝의 온도와 같지가 않다는 점 때문에요.

앨리스 먼로를 읽으면서는 어쩌면 이 작가는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의 등불같은 작품을 남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설핏 했더랬습니다. 아마추어같다든지 남는 시간에 쓴 것 같다는 뜻이 아니라, 평범 속의 비범함을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의 목소리를 빌려 읽기 쉽게 써내려갔다는 뜻에서요. 모름지기 읽기 쉽다는 것은 그만큼 작가가 독자를 많이 배려했다는 뜻이고, 동시에 많은 것을 생각했다는 뜻일테니까요. 팜므 느와르님과 저 두 작가는 무척 잘 어울릴듯 싶습니다.

봄날같은 겨울날, 감기 조심하셔요 :)

2014-02-02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2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4-02-04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쉼보르스카, 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지만 작품은 제게 아주 낯섭니다. 이름에서 주는 이질적인 느낌 때문에 시도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 지레 겁을 먹은 탓이지요. 단 한 번도 들춰볼 생각도 안했어요. 그런데 올리신 시, <가장 이상한 세 단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해서, 방금 시집을 검색해 미리보기로 몇 편을 보았어요. 그러다 이런 시를 읽게 됩니다. <열쇠>라는 시의 일부에요.


열쇠가 갑자기 없어졌다.
어떻게 집으로 들어갈까?
누군가 내 잃어버린 열쇠를 주워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리라-아무짝에도 소용없을 텐데.
걸어가다 그 쓸모없는 쇠붙이를
휙 던져버리는 게 고작이겠지.


나는 그게 없으면 집에도 못들어가는데, 누군가에게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쇠붙이에 불과할 뿐이라는 이 시를 읽으니 '좋다'는 말로는 표현 못할 무언가 있는 것 같아요. 바람이 차도 곧 봄이 올텐데, 저는 봄이 올 때를 대비해서 이 시집을 준비해두어야 겠어요. 봄바람이 불때면 꼭 미친년처럼 날뛰게 되는데, 그 때마다 한 편씩 가만히 앉아 읽으며 진정해야겠어요.


Jeanne_Hebuterne 2014-02-05 12:1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내가 좋아하는 다락방님. 전 요즘 저 스스로가 '그 쓸모없는 쇠붙이'가 된 기분이어요. 그래서 다락방님이 인용해주신 시가 슬퍼요.(스스로 제 무덤 파는 자선사업 중이라 오늘은 여기까지 댓글도 다락방님을 향한 사랑으로 겨우겨우 섰다능...킄ㅜㅜ)

다락방 2014-02-05 14:05   좋아요 0 | URL
저 이 시집 주문했습니다. 제게 오고 있어요.

2014-02-05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5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5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봄 ; ____.



정초의 중얼거림이 연말의 복선이 될 줄은 나 일찍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찍 일어나 꼬리뼈까지 의자 깊숙이 붙이고 책상에는 진하고 검고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두고 천천히 조금씩 마시며 창밖을 보았다. 병 아래까지 숨어있던 인스턴트 커피 알갱이들은 굳이 스틱으로 젓지 않아도, 뜨거운 물을 붓고 머그컵을 좌우로 흔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스르륵 녹았다. 잔을 꼭 잡으면 뜨거운 기운에 손 전체가 싸르르해지는데, 종종 그걸 어떻게 잡느냐고 신기하게 보던 이가 가끔 생각나기도 한다. 그런 날들이 누구에게나 있겠지. 하얀 백지는 떠오르는 태양같이 눈 부신데 떠오르는 태양은 도리어 커피처럼 캄캄했다.

-일월




 저렇게 정월, 혼잣말하였는데 동짓달, 꼬리뼈를 다치고서야 그 존재를 다시 알게 되었으니 그 까닭은 다쳐서, 아파서, 신경이 쓰인 까닭입니다. 신경은 내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 길 없이 열심 걷고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나중을 아껴두었다고 착각하는 자의 오만함과 무지함, 그 합의 가장 총명한 상태였습니다.




 일월, 당신은 내게 늘 불친절했습니다. 남들보다 특히 더. 나는 방망이 다듬는 노인처럼 몸을 옹송그린 채 앉아 고집을 부렸습니다. 갑각류가 된 모양 앉았지만 진주 하나 품지 못한 조개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이것저것 내다 버렸습니다. 사전과 개론서 몇 권만 남기고 책은 모조리 처분하고서야 머릿속 남은 것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요. 자고로 사람은 제 것이 아닌 것을 가까이하기만 하여도 제 것인 양 착각하는 버릇이 있나 봅니다. 원근감에 잠시 속았던 봄이었습니다. 가까이 있다 하여 고통스러웠고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덜 아픈 것이라고 거스러미 하나에, 그렇게 깜박.




 스웨이드를 들었고 실버라이닝플레이북을 읽고 보고, 하릴없이 거리를 걷기도 하고 감정의 뒤를 넓은 보폭으로 착각하여 한숨이 덜거덕거렸지요. 열심 궁리하였으나 들어가는 것은 들숨, 나오는 것은 날숨, 그것들의 총합을 한숨이라 불렀습니다. 봄의 결론은 위에서 중언부언 말하였듯 피곤과 한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을 이제 깨닫습니다. 불안한 마음의 답답한 상태, 덧없음의 도취. 내가 당신을 그리 맞이하였기에 당신이 나를 그리 찾았다는 것을.







              여름 ; 마음의 상태


 


 나처럼 당신도 남아있었구나, 하고 아스라이 바라보던 순간.

 당신이 내게 건넨 티끌 하나, 마음의 상태.


<state of mind, those who stay> 

Umberto Boccioni


 과거와의 단절, 새로운 재료 사용, 다이나믹한 형태와 기계에의 찬양, 장식의 배제, 폭력의 미화. 움베르토 보초니가 속한 미래주의에 관한 위키피디아의 정의입니다. 질주하는 자동차의 움직임은 사모트라케의 니케보다 더 아름답다는 미래주의 선언문의 구절을 '공간에서의 독특한 형태의 영속성이라는, 속도감 넘치는 조각으로 표현해낸 보초니의 서정적인 작품입니다. 떠나는 존재가 보여주는 속도를 찬양했던 보초니가 바라본 남아있는 자의 도사림은 저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감성적인 것에 반대하는 보초니의 작품, 마음의 상태를 뜯어보면 떠나지 못하는 자들이 보입니다. 그 그림자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고 청록의 우울함과 자각을 통해 올바른 근거를 찾아낸 후회의 울림이 들립니다. 녹색의 울렁임과 흐물거리는 헤어진 휴짓조각같은 사람들. 떠나지 못한 자들의 흐느낌은 저런 색조일 것입니다. 


 







가을 ; 추억할 수 없음








내 청춘이 지나가네


                               박정대



내 청춘이 지나가네

말라붙은 물고기랑 염전 가득 쏟아지는 햇살들

그렁그렁 바람을 타고 마음의 소금 사막을 지나

당나귀 안장 위에 한 짐 가득 연애편지만을 싣고

내 청춘이 지나가네, 손 흔들면 닿을 듯한

애틋한 기억들을 옛 마을처럼 스쳐 지나며

아무렇게나 흙먼지를 일으키는 부주의한 발굽처럼

무너진 토담에 히이힝 짧은 울음만을 던져둔 채

내 청춘이 지나가네, 하늘엔

바람에 펄럭이며 빛나는 빨래들

하얗게 빛바랜 마음들이 처음처럼 가득한데

세월의 작은 도랑을 건너 첨벙첨벙

철 지난 마른 풀들과 함께 철없이

내 청춘이 지나가네, 다시 한 번 부르면

뒤돌아볼 듯 뒤돌아볼 듯 기우뚱거리며

저 멀리, 

내 청춘이 가고 있네




 바람 말고는 만질 게 하나도 없다는 글귀에 설레던 가을이었습니다. 

 말라 비틀어진 염전 가득 쏟아지는 햇살, 천사가 지나간 흔적. 존재의 독성에 뉘우치던 당신이었습니다. 



 당신은 늘 조금 매캐한 공기처럼, 근거를 제대로 찾은 후회처럼 찾아오곤 했습니다. 설렘의 뒷면에 남은 뉘우침. 코끝에 살짝 떨어지는 벚꽃잎 같달까요. 그것이 설렘의 마음이라면 코끝의 벚꽃잎이 시드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것이 쓸쓸함일 테지만, 나는 단 하나, 아직도 당신을 추억하는 법은 잘 모릅니다. 내일의 기억이 없고 추억할 어제가 없다는 나를 벚꽃처럼 낙엽 흩날리는 당신은, 나를 머릿속 뇌수를 뜯어보듯 쳐다보았지요. 쳐다보고, 살펴보고, 뜯어보는 것 중 하나의 목적어라도 되기를 바랐습니다. 




 어쩌면 추억하는 법을 모르는 것은 관조할 만한 거리가 없기 때문일 거예요. 늘 배를 곯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적당한 물러섬 끝, 최고로 멀고 최고로 가까운 그 거리, 예상하였다는 듯, 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일 만한 거리가 내게는 없습니다. 욕망의 가장 솔직한 순간이자 한숨의 가장 위태로운 조각. 굳이 나무라자면 내 허기와 영양분 없음을 나무랄 뿐. 내게는 아직  추억할 수 있게끔 알맞게 확보된 거리가 없습니다. 바짝 맞닿으려는 내게 당신은 언제나 들쥐처럼 찾아오고 고양이처럼 옷자락을 들고 일어섭니다. 마음이 사라지는 거리를 영화 그래비티를 보며 느꼈습니다. 가을은 공기였고 잡을 수 없는 바람이라는 것을 알고서야 내가 이제 가을에 내어줄 수 있는 것이 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겨울 ; farewell













 전혀 그럴듯하지 않은 간증, 티끌만치도 아름답지 않은 물체의 위치, 덜그럭거리며 운반한 시체는 묘지가 아닌 구덩이 속에 툭 던져넣은 까닭에 비석조차 제대로 없는 당신. 이렇게 당신을 푸대접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아차, 하는 마음이 꼭 빈 탁자위에 잘못 남겨둔 장식처럼 빈집에서 그림자만 녹아내립니다. 




 내가 살아있는 시간의 속옷은 이렇게 누추하게 펄럭거리는데 당신은 늘 가장 순진하게 연필 끝의 각을 세워 종이에 사각댑니다. 그 소리가 천천히 자라고 잦아들어 문이 철컹 소리로 먼저 닫히려는 순간. 혹은 거리로 나가 비둘기가 양지를 찾아 무언가 콕콕 쪼아대며 꾸룩거리는 보던 때. 포만감에 가득 찬 사람들의 입술. 겨우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창백하게 책상 위에 정물처럼 굳어졌을 때. 사람들 사이 외따로 서 있던 때. 많은 사람이 본 유령이 공기 중을 떠돌고 나는 욕망과 능력, 욕심과 욕망이 짝 없이 돌아다니는 빈집에 딴에는 할 일도 없으면서 들어앉았습니다. 일어나지 않고 자리에 앉은 채 바라보는 창밖의 무심함. 당신은 일말의 호기심조차 남겨두지 않고 이제 나를 치우겠지요. 그러고서는 다시 불친절한 다른 숫자를 내게 보낼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알 수 없는 상태를 존중하려는 마음, 

 무언가의 시작이 이제는 태어나기 전 죽은 상태. 



 나와 당신, 2013이라는 다정하고 매몰찬 숫자가 힘겹게 맞잡았던 손바닥 사이 

 그 어떤 공기도 들어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맞닿은 그림자 뒤 아무도 뒤따르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당신과 나를 그 어떤 이도 다시 잡지 않기를. 

 그래서 이제 안녕이라고 하지 않고 farewell 이라고 말합니다. 

 늘 이 목소리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휘청일 뿐입니다. 

 그 위를 아무도 걷지 말기를.


 





 그리고 2014, 새로운 당신.



 내게 멀미와 꿈, 몰입과 첫사랑을 보내주시기를.

 간극과 격차에서 오는 아찔함, 무엇이든 잊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 

 조금으로라도 포만감을 이제는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무엇을. 

 나는 이제 이 벽을 천천히 훑으며 손자국 하나 없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2013, 당신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내 삶을 죽은 사람들의 묘지 위에 세우고 싶지 않다. 왜 어떤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렸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무엇에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죽음의 문제는 하잘 것 없을 뿐만 아니라, 고통은 무익하고 빈약하며, 열정은 불순하고, 삶은 합리적이며, 삶의 변증법은 악마적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절망은 부분적이고 사소한 것이며, 영원이란 텅 비어 있는 단어이고, 허무의 경험은 환상이며, 운명이란 농담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왜 의문을 가지는가? 왜 답을 찾으려 하는가? 왜 불확실한 것을 받아들이려 하는가? 절대 고독 속에서 눈물을 바닷가 모래에 묻어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눈물은 항상 그 눈물만큼 쓰디쓴 생각이 되었다.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아주 가끔, 보는 것을 넘어 무언가를 겪어내게 만드는 영화를 만나는 때가 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는 그런 이유에서 제목 하나만으로도 자취를 남기는 그런 영화였다. 내용과 형식, 대화와 침묵, 질문과 대답, 현실과 철학이 SF와 드라마의 경계에서 만나는 놀라운 지점. 그 자체가 하나의 경이가 되는 체험.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재미있는 몇 가지 오류와 광활한 우주, 간단한 이야기에서 나오는 힘을 오래도록 이야기할 것 같다. 존재 하나에서 제각각 다른 것들을 끄집어내는 재미있는 상황. 그리고 나는 그에 하나 보태어, 우리가 왜 영화를 사랑하는지를 찾는다.
 

 

 

 

 

 

 

 

 라이언과 맷, 두 우주인과 나사 스탶의 대화로 문을 열어 물속에서 재생하는 듯한 중력으로 문을 닫는 영화. 알폰소 쿠아론이 전작에 비해 달라진 것은 최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만들어 그 원형에 도달하고자 한 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롱테이크는 그대로 남았다. 아들을 원했기 때문에 여자아이의 이름을 라이언으로 지은 아버지 이야기. 아무 이유 없이 죽은 네 살짜리 딸에 관한 라이언의 이야기. 우주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변호사와 바람나서 떠났다는 맷의 이야기. 그리고 어떤 곳에서 친구 여동생을 찾으러 가보니 그녀가 어떤 털복숭이 손을 잡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그 털복숭이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는데-여기에서 이야기가 끊어진다-, 라고 말하는 맷. 그러고 보면 천일야화도, 레 미제라블도, 하다못해 마지막 잎새까지, 우리는 종종 '하루만 더'라는 속삭임을 듣는다. 왜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대화해야 하는가? 왜 소통해야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관한 답이 SF의 외피와 드라마의 내피 안에서 이루어진다. 역설적으로 SF가 가장 현실적인 장르가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담겨있다. 인간은 끝없이 우주를 들여다보고 밝히고 설명하고 싶어 한다. 왜냐고 묻는 것이 인간의 몫, 묵묵히 있는 것이 우주의 몫. 왜 우주는 그곳에 있는가? 왜 인간은 여기에 있는가? 이 넓은 우주에서, 인간은 무엇이며 왜 숨 쉬는가? 숨쉬기를 멈추면 어떻게 되는가? 때로는 상상과 모험으로 끝날지라도 SF 영화는 드라마와 액션을 빌려 이 질문을 던지거나 답을 해오려 노력한 것이 분명하다. 모르는 것을 통해 아는 것을 정리하고 광활함을 통해 티끌을 본다.
 

 

 

 

 

나는 죽도록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나간 영혼의 과거가 무한한 긴장으로 퍼덕일 떄가 있다. 파묻혀 있던 경험이 현재로 온전히 되살아올 때가 있다. 리듬이 획일성과 균형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그때는 고통스러운 강박관념에 으레 따르는 공포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죽음이 떠오르며 삶의 절정에서 추락한다.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잠시 에밀 시오랑의 책을 들여다본다. 영화 속의 어떤 시퀀스는 불면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루마니아 출신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문장과 만난다. 조용히, 어둡게. 그러나 그 접점을 밝히는 빛은 우주에서 본 지구의 엷은 막을 닮았다. 불면증과 프랑스어의 철학자.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자식에게 라틴어 이름을 지어주었던 사람. 육체의 불면으로 하여금 육신 없는 정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던 사람. 시오랑에게 있어 삶은 객관적이고 질서정연한 것이 아닌, 그 자체가 혼돈이고 무질서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나타나는 또 한 번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와 질서로 체계를 부여하는 대신 시오랑은 자기 스스로, 자기만의 답을 찾기를 원한다. 삶은 분명 파편화된 비논리적인 무엇이다. 주관적 경험의 진실로도 그는 삶의 허무와 권태의 구멍을 굳이 꿰매고자 하지 않는다. 알폰소 쿠아론이 그저 광활한 우주와 멀리 있는 지구를 보여주듯 에밀 시오랑도 죽음, 허무, 절망, 고독의 찬 공기를 그대로 우리에게 들이민다. 자신의 힘으로 이 무섭고 어둡고 광활한 곳을 침묵으로, 혹은 광활함으로 느끼게 하는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노라면 오히려 그 끝에 해뜨기 전의 풍경이 보인다. 하늘 아래 없는 새로움을 찾으려면 하늘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지구에서는 지구를 볼 수 없듯이. 여닫음조차 느낄 수 없듯이.
 
 

 

 

 다시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그래비티'로 눈을 돌리자면, 이 영화의 제목 '그래비티'는 오프닝이 아닌 엔딩에 등장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제목 대신 영화를 여는 것은 초반 이십여 분에 이르는 롱테이크. 광활한 우주를 보여주고 태양이 빛을 비추는 지구의 나일강을 보여준다. 그런 다음 초보 우주인 라이언(산드라 블록)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그녀의 눈, 코, 입을 바로 앞에서 들여다본 다음 다시 우주가 우리 시야에 들어올 때, 우리는 알 수 있다. 지켜보는 것이 겪어내는 것의 범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강요된 몰입이 아닌 효율적인 이입을 알폰소 쿠아론은 지나치지 않는 선 안에서 카메라 처리 하나로 해냈다. 그리하여 광활한 곳에서 티끌과도 같은 존재가 겪는 질문의 이야기를 형식과 내용의 합일점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때때로 슬며시 등장하려는 자기 고백과 도취, 독백의 감상과 허무주의마저 걷어내는 우주의 객관적인 시선을 바라보자면, 종종 내용과 형식이 무관하게 뒤섞여 형식이 내용의 시녀가 되거나 잘못 군림하는 예술 작품의 무의미함을 우리가 왜 경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야기하는 자의 필연과도 같은 자아도취를 막고 '무엇'의 핵심에 닿으려면 예술가는 종종 철저한 형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넓음과 좁음. 거대함과 하찮음. 버팀과 흔들림.

 

 

 

 

 이런 것들의 대비와 반전이 알폰소 쿠아론의 형식 안에서 끝없이 충돌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숏 안에서의 움직임이지, 숏과 숏의 연결이 아니었을 것이다. 광활한 우주 안에서 끊김 없는 필사의 움직임이 보인다. 배경은 우주이건만 지구의 모습이 매 순간 의식된다. 중력이 없는 공간에서 결국, 라이언이 닿고자 하는 곳은 중력이었다. 그녀를 죽게 하는 것도 중력이었고 살게 하는 것도 중력. 이 변치 않는 존재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기술적 성취와 인간 내면의 드라마가 만나는 순간, 카메라는 계속해서 공간을 강조한다. 어느 존재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밖에서 안을 보게 되는 객관화의 능력은 영화 전체와 닮았다. 기술이 인간 내면의 잎사귀, 가지, 줄기를 거쳐 뿌리까지 연결될 때, 우리는 이것을 영화라고 부른다.

 

 

 

 

 
절망의 끝에서는 부조리에 대한 정열만이 혼돈을 악마 같은 광채로 치장한다. 어떻게 삶을 허무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영화를 닫는 것은 그 육중한 제목이다. 시작이 아닌 끝에 나타나는 제목. 라이언의 오디세이. 그래비티는 라이언이 도달해야 할 지점의 핵심이었다. 드러나지 않음으로 나타나는 거대한 무엇. 결국, 라이언을 살리는 것도 중력이고 죽이는 것도 중력이었을 것이다. 끌어당기고 위태롭게 함으로써 인간을 흔들리게 하고 죽고 싶게 만드는 존재. 인간은 내면의 깊이만큼 흔들린다. 그러나 진동과 진폭의 그래프가 늘 제 1 사분면만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살고 싶음과 죽고 싶음의 시소와도 같은 움직임 사이의 균형을 생각해 보면, 흔들림이야말로 인간을 버티게 만드는 힘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약함이 강함이 되고 흔들림이 동력이 된다.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의 반비례 속에서, 라이언은 우주의 고요함을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우주를 싫어한다고까지 말하게 된다.
 

 

 

 

 
 사랑하는 존재가 좌절케 하는 존재로 돌변한다지만 이때마저 그 존재 자체의 본질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우주는 그대로, 파편도 그대로, 지구도 그대로. 오직 인간만이 그들의 당연한 움직임 사이에서 희로애락을 맛본다. 에밀 시오랑의 말처럼, 행복할 때는 인간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만, 불행할 때는 모든 것이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는다. 라이언의 딸이 죽었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인지를 묻게 되고 그 아이를 만나거든 어떤 말을 전해달라는 말을 라이언이 할 때, 그것은 결국, 생명이 왜 생명인지를 묻는 것과 같다. 그래비티에서 이 물음이 그저 모험으로 끝나지 않는 것은 그래비티가 나름의 해답을 스스로 찾아내기 때문이다. 십 분 안에 타죽거나 살아 귀환하거나 둘 중 하나. 이유가 없고 선택이 있을 뿐인 무수한 갈림길에서 생명은 그 자체로 살고자 하는 당위를 지닌다.
 

 

 

 

 생각을 처음으로 거슬러 가면 이 생명의 당위와 영화의 당위가 만난다. 우리는 왜 영화를 보는가? 이 질문은 곧 '왜 영화가 있어야 하는가?' 하는 역설적 질문이 되기도 한다. 그래비티는 기술적 성취, 우주의 서사, 내면의 드라마, 질문과 답이 만나는 황금 비율을 과장 없이 잡아냄으로써 자신만의 답을 찾는다. 형식과 내용, 주제의 예술적 성취를 제목으로 갈무리하는 한편의 시. 그래비티는 영화가 있어야 할 지점을 정확하게 알게 하는 영화다.

 

 

 

 
 
 
 
 
 
 
 

 

 

 

You have to learn to let go.

 

영화 속 맷 코왈스키의 대사 한 줌이 영화 포스터 속 숨소리와 묘하게 어우러진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ren 2013-11-01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뭇 감동적인 영화에 감탄스러운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저 또한 시종일관 또는 시시각각으로 피부에 와닿는 우리에게 가장 본질적 문제인 '삶과 죽음'에 대해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에 놀라고, 또 그런 진지한 주제를 SF 영화가 그토록 절박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 더더욱 놀랐어요.

더군다나 이 영화의 무대가 '우주'인 이상 '삶과 죽음'을 넘어선 '세계의 본질'까지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에도 놀라게 되는데, 사실 '중력'이라는 영화 제목 자체가 굉장히 무거운 철학적 주제인 것도 그런 경향에 한 몫 거드는 게 아닌가 싶더군요.

이 영화를 보고 리뷰를 읽고 나니 '목표도 한계도 없는 무한한 노력'을 가장 간단명료하게 나타내는 것이 '중력'이라고 말한 어느 철학자의 말도 떠오릅니다. 그 철학자의 말마따나 '그 궁극적인 목표가 분명히 불가능한 데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노력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중력'인데, 스톤박사가 죽기살기로 애쓰며 '무중력 공간'에서 탈출해서 다시 되돌아온 곳이 결국 '중력'이 지배하는 지구임을 떠올리면 '존재'의 궁극적 한계를 떠올리게도 되고, 결국 에밀 시오랑의 말처럼 더이상 '왜'라고 물을 수도 없는 '지점'까지도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참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영화가 '중력'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는 것도 재미있구요.

* * *

실제로 목표와 한계가 없다는 것이 무한의 노력인 의지의 본질이다. 앞서 원심력을 언급했을 때에 말했지만, 그것은 의지의 객관성 가운데 최저 단계, 즉 중력에서 가장 간단명료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며, 그 궁극적인 목표가 분명히 불가능한 데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중력의 노력을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중력의 의지에 따라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 한 덩어리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덩어리 내부에서 중력은 여전히 중심점으로 향하려고 하면서, 강성 혹은 타성인 불가입성과 투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질의 노력은 언제나 저지당하기만 할 뿐, 절대로 채워지거나 완수되는 일은 없다. 모든 의지 현상의 노력은 이것과 똑같다. 목표가 달성되면 또다시 새로운 진로의 기초가 되고, 이렇게 한없이 계속된다. 식물은 자기의 현상을 싹으로 시작하여 줄기와 잎을 거쳐 꽃과 열매로까지 높이지만, 열매는 또다시 새로운 싹, 즉 새로운 개체의 시작에 불과하며, 이것이 또 처음부터 경로를 따라서 자라며, 한없이 계속된다. 동물의 생활 과정도 이와 마찬가지다. 생식이 동물 생활 과정의 정점이고 이 정점에 도달한 후에는 그 처음 개체의 생명은 급속하게 혹은 서서히 쇠퇴하지만, 그 대신 새로운 개체가 자연에 대해 종의 유지를 보증하며 같은 현상을 되풀이한다. 뿐만 아니라 각 생물체의 끊임없는 갱신까지도 이 영구적인 충동과 변화의 단순한 현상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 쇼펜하우어

Jeanne_Hebuterne 2013-11-18 09:01   좋아요 0 | URL
oren님, 영화 참 좋았지요? 이렇게 단순한 토대로 이렇게 직접적으로 핵심에 달하는 군더더기 없는 영화를 만난 것이 오랜만인지라 더 그랬나 봐요. 그러고 보면 가장 감동적인 작품은 필연적으로 객관적이어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구석을 최대한 많이 확보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마지막 단락에서 오렌 님이 지적하신 중력도 그렇지요. 제목 자체가 no gravity가 아닌 gravity인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제목을 덧붙여 이야기를 완결하는 이런 방식이 참 재미있었어요.

겨울 초입, 잘 지내고 계시지요? 앞으로도 좋은 영화, 음악, 책으로 겨울을 가득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

paviana 2013-11-01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아직 못봤어요. 솔직히 극장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극장에서 본 마지막 영화가 무엇이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냥 인사하고 싶었어요.
이 가을 잘 지내고 계신가요?

Jeanne_Hebuterne 2013-11-18 08:24   좋아요 0 | URL
댓글을 확인한 지금, 늦가을과 초겨울의 문턱입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나이도 계속 먹게 되는군요. 친근한 퍼스나콘을 보니 마음이 포근해지기도 하고요. 그냥 인사, 정말 고마워요, 파비아나님. 잘 지내시기를 바라요.

다크아이즈 2013-12-05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뷔님 잘 계시지요?
저도 봤어요. 그런데 이런 리뷰는 꿈도 못 꾸지요.
저도 그냥 안부 전하고 싶었어요.
변함 없는 님....^^*

Jeanne_Hebuterne 2013-12-07 18:06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오랜만이어요. 팜므느와르님의 폭넓은 독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지난 11월에는 한 권도 읽지 않은 저를 반성했답니다. 아마 알라딘 서재 활동하시는 분 중 가장 책 안읽는 사람이 저일 것 같아요. 어설픈 재주로 아무것도 안하고 놀기만 한 것을 숨기려 했는데, 좋게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셔야 해요!

나무그늘 2014-03-30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비티를 보고 나서 에밀 시오랑의 글과 관련해서 글을 하나 쓸까 생각했는데,
님이 먼저 생각하셨네요. ㅎㅎ

근데, 님의 서재와 와서는 내게 맞는 제대로 된 클래식 음반 뭐 살까 자극 받고 갑니다. ㅎ

그래비티가 극장에 상연할 때 이 서재를 알고 들리다가 이제야 글 남겨요.

Jeanne_Hebuterne 2014-04-02 11:44   좋아요 0 | URL
나무그늘님, 그래비티와 에밀 시오랑, 둘 다를 잘 보셨군요?
누가 먼저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분명 같으면서도 아주 다른 것을 생각했을텐데요. 나무그늘님의 단상도 무척 궁금한걸요!

그래비티는 정말, 제대로 잘 구운 스테이크 같았습니다. 장식 없이 한가지로 정면승부하는 간단한 영화의 힘을 느꼈어요. 잔재주도 없이, 꾸밈도 없이 카메라와 연기, 간결한 주제로 말하는 영화를 아주 오랜만에 보았기에 더 좋았습니다.

클래식 음반, 참 많지요? 저도 종종 이 많은 음반 중에 내가 어떤 것을 들어야할지를 잘 몰라 주변에 조언을 구해보고, 고민도 많이 해보고 몇가지 구입하곤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영화와 책, 음악이 있어서 숨쉬는 것이 종종 더 견딜만한 것이 되기도 해요. 조금이라도 의미있는 것을 찾는 것이 인간이라서요.

종종 소식 남겨주세요. 나무그늘님의 재미있는 생각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