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
미카엘 엥스트룀 지음, 정지인 옮김 / 낭기열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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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봐라. 고래들은 서로 노래를 불러주고 있지. 바다 깊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무리가 흩어지지 않게 유지하는 거란다. 고래들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지 않고도 한 시간 동안은 물속에 있을 수 있어 가끔가다 질식하는 일도 생기기는 하지만 말이야."

 "익사하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고래들이 잘못 헤어쳐서 육지 위로 올라올 때가 있는데 고래한테는 가슴뼈가 없어서 제 무게를 못 이기고 해안가에서 질식사하기도 한단다. 무리 전체가 같이 해안가로 헤엄쳐 와서 죽는 일도 있고."

 "왜 그러는 건데요?"

 "그건 아무도 몰라. 내 생각에는 지구의 자기장을 나침반으로 이용하는 고래가 자기장을 감지하는 데 문제가 생겨서 혼란을 일으킨 게 아닐까 싶구나."

 고래의 노래가 끝났다.

 미크가 다시 버튼을 누르고는 말했다. "어쩌면 육지가 그리워서 그랬는지도 몰라요."





 사람과 사람의 경계. 바다와 육지의 경계. 물속과 공기 중의 경계. 어디론가 가려는 나룻배의 흔적. 

 그것조차 남지 않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저 건너 어느 편이 있다면, 그곳에 다다른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 세상 모든 경계가, 그 선의 색채가 점점 옅어지고 흐려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었다. '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 속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그 순간은 때로는 무척 아름답고 흐릿하여 더 선명했다. 아름다운 장면이 빛나는 반짝반짝 아이의 이야기. 이를테면 박물관에서 듣는 고래의 노래. 발보다 눈이 더 시린 스웨덴의 밤하늘에 가라앉은 별. 배에 구멍 난 채 가게 안에 잠든 악어. 나무 위에 날아다니는 긴꼬리 올빼미. 그리고 흐려지는 순간에는 뗏목을 타고 급류에 휘말리는 소년. 겁먹어도 용기있는 아이. 공기 중 먼지를 응시할 줄 아 아이. 우리는 시궁창에 있지만 몇몇은 별을 보고 있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 속에 담긴 아이. 미크가 그런 아이다. 





 미크가 보는 색채는 말이 없고 소리는 파랗거나 하얬다. 다른 것을 볼 줄 아는 아이였다. 곱고 소중한 가루를 손에 한 줌 쥔 아이. 가장 불행한 순간이 가치 있는 순간으로 자리를 마법처럼 바꾸는 순간이 있다면 그 비밀을 아는 아이. 만약 불행이 불행하고 아픔이 아프다면, 잠깐, 숨을 고르고. 상처를 없애기 전 그것이 어디 즈음 있는지를 살펴도 좋을 것이다. 불행하다 하여 감싸 안고 아프다 하여 손을 잡는 것은 우리가 보내는 시간이 결국 '행복' 내지는 '안정' 혹은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현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시간과 경험을 직선으로 느끼기에 순간을 살 수가 없다. 미크가 느끼는 불행의 원천을 찾고 손을 잡으려 한다면 그것은 그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시선일 뿐이다. 그러나 손을 잡기 전에 옆에서 나란히 걸으면서 조용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체온을 전하는 것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만큼 단단한 아이다. 듣는 이의 고통을 말하는 자의 입술에 묻히려는 행동은 잠시 그만. 가만히 들어본다.





 "강꼬치고기 잡아본 적 있어?"

 "아뇨."

 "난 천 마리는 잡았을 거다. 콘숨의 라세랑 같이 프랑스로 수출한단다. 프랑스 사람들은 강꼬치고기의 진가를 알지. 맛이 훌륭하거든. 여기 사람들은 이제 강꼬치고기를 안 먹어."

 벵트 할아버지가 돼지고기를 우물우물 씹었다. 

 "강꼬치고기가 커요?"

 벵트 할아버지가 빈 프라이팬을 시크디에 갖다 놓았다.

 "너 나랑 같이 낚시하러 가서 고기 끌어 올리는 것 좀 도와줄래?"

 "네."

 "내일 아침 6시에 내려오너라. 옷 따뜻하게 잘 챙겨 입고."

 나가려던 미크가 문 앞에서 돌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셀레트 호수에 고래가 한 마리 있어요."

 "고래가?"

 벵트 할아버지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고래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네가 들었다는 그 소리는 얼음장 소리야. 얼음장이 생길 때 그렇게 노래를 하지. 장력 때문에 그래."

 "고래도 노래를 해요."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속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시간이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였다.




 그렇지만 불행과 고통, 상처와 기다림 속에서 과연 가치와 의미가 어떤 순간에 드러날까?

 이런 의문에 종종 이 아이에게도 고개를 내미는데, 함께 생각하기 이전에 도와주고 손을 뻗는 것만이 옆에 앉은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삶이 어떤 종류의 목표와 목적을 지닌다고 생각하는 자의 관점이리라. 곧 이것은 불행의 원천을 찾으려는 생각이다. 이것은 신에게 호소하려는 신정론의 갈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살아있는 것이 종종 왜 아프고 고통스럽고 허탈하고 허무한지를 깨닫는 것이 괴롭지는 않다. 오히려 직선으로 나타나는 듯한 시간 속에서 우리가 처음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왜 멀어져가는지, 우리가 왜 비틀거리는지를 알아내는 과정이 더 괴로워야 한다.





 이 괴로운 과정이 이렇게까지 무섭게 느껴졌던 것은 순전히 내가 단단하지 않고 그저 딱딱하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가 말랑말랑한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을 해본다.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늘 만났던 나도 몰랐고 모두는 알고 있었던 아이 미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 아이는 곧바로 모든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 아이는 사자왕의 모험에 나오는 병약한 아이이기도 했고 술주정뱅이 아빠와 언젠가부터 자신을 보살펴 주지 않는 형과 함께 살던 아이이기도 했고 흡혈귀와 관 여행을 하는 아이일 수도 있다. 





어떤 아이가 스웨덴에 살았는데......

-그 아이는 머리카락 색깔이 뭐야?

아마도 눈처럼 빛나는 색일거야.

-눈도 빛이 나?

고양이가 아니니까, 눈에선 빛이 안나와.

-엄마, 아빠는 뭘 해?

엄마 아빠는 없어. 

-그럼 형은? 동생은?

아무도 없어.

-그럼 아무도 없는 곳에 살아?

응. 대신 고래가 노래하는 걸 들어. 

-고래와 밥을 먹어?

아니. 못된 사람들이 그 아이를 가두고 밥도 주지 않아.

-그런데 고래는 뭘 노래하지?







 



미크가 술주정뱅이 아빠와 형과 살다가 어느 순간 형도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 잠시 고모와 살다가 아동학대를 일삼는 가정에 위탁되고 죽을 힘을 다해 그 집에서 나왔을 때, 자신은 지옥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꼭 고통을 겪어야 할 필요는 없다. 더 강해지려면 아픔과 고통이 꼭 필요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러나 모두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시간의 한 형태 역시 눈처럼 녹아 없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굳이 강해지기 위해 그 아픔과 고통 역시 미크가 겪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미크가 반짝인다. 바로 그 이유로 미크가 빛을 내며 생생하게 살아있다. 죽지 않고서야 누구나 겪어야 할 시간,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하여금 우리의 시간은 가치를 갖는다. 미크는 벼랑 끝에서 균형을 잡고 서 있을 때에는 숨 한 번 잘못 쉬어도 굴러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아이다. 그것은 행복해야만 한다는 목적을 달성해야 이루어지는 삶도, 단계를 계단처럼 밟아야 하나씩 이루어지는 삶도 아니다. 그에게 행복은 즐거운 상태가 아니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미크에게는 '기다리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언가를 이겨낸 다음 소중함의 가치를 깨닫는 행위였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한가지 표정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미크가 조금씩 행복을 느끼는 순간도 분명 있다. 

고모와 함께 밤길을 걸을 때. 벵트 할아버지와 이야기할 때. 피아가 용감한 아이라고 말해줄 때. 그것은 분명 미크가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순간이었다. 미크를 바라보노라면 행복은 감정의 형상을 띤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은 존재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춥지만 따뜻할 때. 떨어져 있지만 연결될 때. 물에 빠졌지만 숨을 쉴 때. 두려움과 기쁨, 불행과 행복, 무서움과 용기. 이렇게 짝지어 나타나는 상반된 각각의  모습이 우리가 가치 있다거나 의미 있다고 부르는 순간이 된다. 모든 벽이 허물어질 때 새로운 벽이 나타난다. 한 가지 색깔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삶의 다양한 순간. 괴로워서 행복하거나 불편해서 가치 있는, 감정이 아닌 존재를 깨닫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중요한 것들이 있다. 




바로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 중에 내쉬는 따뜻한 숨소리를 듣는 일. 

괴로움이 가치 있는 것으로 돌변하는 마술 같은 이야기를 듣는 일.

춥고 먼 길이지만 그래서 그 자체로 빛나는 일.

읽고 나면 그 용기가 내게도 전해지는, 그 자체로 힘을 지닌 아이의 이야기.



 


미크는 점점 더 따듯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좋기는 했지만 이상했다. 아까 점퍼도 벗어놓고 달아났는데. 밝아졌다. 빛이 보였다. 그곳에 도착한 걸까? 빛이 보여. 이제는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그런데 누가 나를 끌어올렸지? 누가 내 다리를 잡아당긴 걸까?



*제목은 소설 원제.

*본문은 모두 책 인용문이며, 사진은 영화 각색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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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9-07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이런 소설 읽기가 두려워요.
내 마음이 글의 의도와는 아주 멀어져 폭주할 것 같거든요.

Jeanne_Hebuterne 2013-09-08 10:44   좋아요 0 | URL



dreamout님, 그렇지요? 저도 그런 마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랍니다.
누군가의 어려운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언제나 쉽지만은 않은 일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삶 역시 예쁘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문학이나 예술작품을 접할 때 위안과 치유를 바랄 때도 있지만 현실을 자신만의 독특한 역량으로 바라보려는 작가의 기량이 돋보이는 작품도 종종 있어요.


대상을 직시할 수도, 환원하여 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응시하였는가,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그려냈는가, 이런 부분을 부각시켜 보아야 하는 작품이 있는데, '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가 그런 경우였습니다. 무섭고 아픈 이야기이지만 작가가 하려는 말은 어쩌면 '안아주세요'가 아닌, '들여다 보아 주세요' 였던 것 같습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십시오. 주말에는 좀 더 여유를 갖고 시간을 천천히 흘려보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그는 누구인가? - 카이로스의 시선으로 본 세기의 순간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지음, 정진국 옮김 / 까치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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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때를 기다리는 신경다발이다. 그것은 오르고 또 올라 마침내 터져버린다. 그것은 육체의 기쁨이고, 춤이고, 시간이고 또 얽힌 공간이다. 그래, 그래, 그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의 결말처럼, 보는 것이 전부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어떤 유명인의 초상. 그의 그림자. 지나간 세기의 시선. 35밀리 라이카 카메라. 매그넘 창시자. 포토저널리즘. 카르티에 브레송 가문. 포로생활, 아시아와 서방세계. 간디와 샤넬, 트루먼 카포티와 자코메티. 때로는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필치를 작품으로 남긴다. 그들의 유명세는 벽이 되거나 성곽이 되어 길게 뻗어나가는데, 종종 그 그림자는 때로는 그 분야에 관심이 없는 이의 뇌리에까지 박혀있다. 2004년, 그의 사망 이후 지금에야 그의 종적을 더듬는 것은 너무 늦거나 빠른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진의 역사가 니엡스, 다게르로부터 1800년대 초반에 대중에게 공개된 점을 생각해 보면 이는 오히려 재빠른 순간이기도 하다.



어떤 남자가 물웅덩이를 건너기 위해 뛰는 순간. 자전거가 계단 아래 길을 지나는 순간, 조지 6세의 대관식을 바라보던 영국 국민의 모습. 멕시코에서 뭔가를 생각하는 아이. 창문 너머로 벗겨진 머리를 쓰다듬는 남자, 서독의 사람들. 필시 전쟁에서 다리를 잃었을 남자의 걸음, 레닌그라드의 아이와 아버지. 샤넬의 담배피는 모습. 마티스의 스케치, 포크너의 시선. 자코메티의 걸음과 마르셀 뒤샹의 손길. 스트라빈스키의 얼굴 앞에 원근처럼 어우러진 손. 뉴욕의 거리, 케이프 커내버럴의 사람들. 뉴욕의 사무직 노동자의 순간, 국회의사당의 한 사람. 중국의 노동자, 인도의 간디.


이 책에는 브레송의 모든 초기 사진, 시기별로 분류된 사진, 단행본, 논문, 에세이, 사진집과 그의 데생까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시선이 담겨있다.



전설처럼 굳어진 어떤 위인을 살펴볼 때에는 살짝 시선이 굳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평가를 내리기에는 내 스스로가 부족하다 할지라도 작가가 작품을 통해 남기려 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는 일에 게을러선 안될 거란 생각에 이 사진집을 살피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주치게 되는 그의 시선. 신화적 인물의 등 뒤, 전설의 얼굴, 권위와 고전의 시선. 그 유명한 생 라자르 역의 물웅덩이를 건너뛰는 남자를 찍은 모습을 보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사진을 통해 순간을 영원으로 고정시키려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강렬하고 솔직하다. 그의 사진에 풍경보다 사람이 많다는 것은 생에 대한 찬가를 그가 부르고 싶었을 거란 생각도. 삶에 대한 환희와 경이가 구도와 형식의 완벽함을 타고 전해져 온다. 브레송의 손 안에 꼭 쥐어진 라이카로 표현된 황금의 수는 그가 이십대 초반 머릿속에 소중히 새겨둔 초현실주의, 데생의 섬세함, 로트의 가르침을 따른 구도의 순수함이 그대로 담겨있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 그는 유명인만큼이나 일반인의 얼굴이 더 다양하다는 말을 한 적 있다. 라이카를 들고 시장과 골목,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는 모든 것을 유심히 관찰한 것이 분명하다. 그의 사진에는 사람들이 만든 온갖 행동이 담겨있다. 거리는 사람들로 물들고 생생함과 움직임이 보인다. 워커 에반스의 말처럼,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에는 우리가 이제껏 탐험해본 적이 없는 무언가가 있다.' 에반스에게 그러했듯 브레송에게도 사진은 데생 대신 그에게 주어진 일종의 글쓰기가 아니었을까.



그의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라이카를 통해 우리에게 모습을 나타낸다. 어느 사회나 중심부튼 관습에 장악당한 반면, 참모습은 주변부에 드러나는 것이라는 철학을 고수한 그의 사진은 어쩌면 처음부터 늘 주변에 관심을 두는 그의 반순응주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어떠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현장을 지키되 그 현장 속에는 들어가 있지 않은 시선. 그의 카메라 렌즈를 통해 드러난 사회는 늘 뜻밖의 얼굴을 보여준다.
만리장성이 없는 중국, 피라미드가 없는 이집트, 빅벤이 없는 영국,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프랑스가 그의 사진 속에 담겨 있다. 대신 그의 사진에는 거리, 카페, 상점,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엇갈린 시선으로 다른 곳을 향하는 전직 군인과 현직 군인의 모습을 담는다. 그 마법같은 구도를 잡기 위해 그가 생 라자르 역에서만 하루를 보내며 기다렸다는 일화가 생생하지만, 그보다 더 생생한 것은 의도치 않은 순간 삶이 뜻밖에 우리에게 보여주는 마법같은 황금율이다. 있어야 할 것이 당연히 나타나고 예기치 않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조각조각 파편화된 우연이 만나고 필연적인 스침이 생겨난다. 그 순간을 영원으로 담는 시선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그가 찍은 미국은 빠르게 모든 것이 연소되는 마천루의 도시. 거대함과 폭력이 어우러지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나타난다.





언젠가 보나르가 브레송에게 '왜 바로 그 순간 셔터를 눌렀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브레송이 보나르의 미완성 작품 중 하나를 가리키며 '왜 여기를 노란색으로 칠하셨나요?'라고 되물었다는 일화는 재치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진에서도 중요한 것은 시선이라는 것을 간단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잠시, 사진도 예술일까? 사진도 회화와 같은, 예술의 한켠을 차지한다고 보아야 하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쩌면 브레송은 피사체의 내면을 전달하기 위해 그의 삶 속에 들어가서 삶을 함께 숨쉬고 겪은 다음 다시 존재를 잊고 환경에 녹아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예술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브레송의 사진은 예술의 한켠을 차지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잰슨의 말에 다르면, 예술과 기술의 차이는 작품이 '왜' 만들어졌느냐에 따라 판명된다. 사진 한 장이 보여주는 주제, 양식은 사진을 찍는 이가 속한 세계의 안팎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보여주곤 한다. 탐구와 모색, 관찰과 이해. 실현과 평가. 이 모든 것을 한 장에 담으려면 피에르 아술린의 말처럼 송어의 민첩성과 궁수의 부동심을 적절히 배합해야 하는 것이다. 회화와 소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사진의 영역을 바라보노라면, 사진이라는 장르가 가진 특별함과 한계를 동시에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매그넘이 있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자신이 로버트 카파, 다비드 스치민, 조지 로저, 일리엄 밴디버트와 함께 창설했다며 말년에는 비아냥거리는 편지를 보냄으로 자신의 마침표를 찍었던 매그넘. 존재하는 이야기, 우연이 아닌 필연, 전쟁동안 굶주렸던 사람들의 의문에 답할 세계의 눈. 그와 동시에 브레송은 이제 전문 사진가가 되었음을 뜻한다.



시대를 증언하되 증언에만 그치지 않는 사진, 초현실주의라는 딱지를 스스로 떼어내는 일. 그 묘한 역설을 활용하려는 태도는 브레송의 아래와 같은 말에서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작은 차이점들이다. 일반적인 생각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작은 차이점들을 찬양했던 스탕달 만세! 1밀리미터가 바로 차이를 만들어낸다. 증거만을 얻으려는 사람은 진정한 삶을 보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수평 공간 안에, 직각자로 잰 듯 완벽한 수직선을 이루는 두 남자가 있다. 한 사람은 부동자세로 멍한 시선을 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밥그릇을 쳐다보면서 먹고 있다. ... 왼편 구석의 검은 그림자와 오른편이 문이 호응을 한다. 문 위쪽으로 상감된 두번째 사각형이 최면효과를 자아낸다. 왼편 문 너머로 텅 빈 어둠이 들여다보이는데, 열린 공간은 역사각형 형태를 이루고 있어서 멍한 시선의 중국인 사내와 대비를 이루면서 테두리를 형성한다. 사내의 부동자세와 앉아서 먹느라 여념이 없는 또 다른 사내가 호응을 한다. 앉아있는 사내는 정확하게 황금비례가 형성되는 바로 그 자리에 위치한다. 사내는 밥공기를 손에 쥐고 있다. 이는 바닥에 놓인 또다른 밥공기와 대조를 이룬다. 테 없는 검은 모자가 바로 두 밥공기 가운데서 경계를 형성한다. 조각난 그림자가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사선을 그으며 장면의 평온한 수평을 깨뜨린다.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다.
-아비그도르 아리카, 화가.






브레송의 사진은 그가 말한 여섯 범주로 나뉘어 전개된다.
르포, 주제, 구도, 색채, 테크닉, 고객.
브레송이 낸 자신의 사진집 서문을 읽어보노라면 사진에 임하는 그의 시적인 태도가 엿보인다.

"르포르타주란 문제를 표현하고 사건이나 인상을 고정할 목적으로 머리와 눈, 그리고 마음이 동시에 점진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이루어진다. ... 나에게 사진이란, 일 초도 안 되는 찰나의 대상의 의미와 또 이 대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형태들의 엄정한 조직을 동시에 인정하는 행위를 뜻한다. ... 주제란 사실들을 그저 옮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들 그 자체는 아무런 중요성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실들 중에서 선택하는 일이고, 사실의 진면목을 심오한 현실과의 연관성 속에서 포착하는 일이다. 사진에서는 아주 작은 대상도 커다란 주제가 될 수 있고, 사소한 인간적 디테일도 라이트모티프가 될 수 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결정적 순간', 서문.





그의 사진 속에는 아시아를 신비롭게만 바라보는 외부인의 시선이 없다. 이를테면 상하이의 동맹은행 앞에서 찍은 사진에는 아래와 같은 캡션이 달렸다.



"상하이, 1948년 12월. 골드러시. 동맹은행 앞으로 어마어마하게 긴 줄이 형성되어서 이웃 거리로까지 뻗는 바람에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밀고 당기는 소동이 벌어져서 십여 명이 사망했다. 국민당 정부는 일인당 금 40그램씩만 바꿔주기로 정했었다. 지폐를 바꿀 요량으로 24시간 이상 줄을 선 사람들도 있었다. 주변의 경찰은 15년 전부터 중국 땅에 눈독 들이던 잡다한 군대에서 차출된 인원들인 만큼, 치안은 허술했다."






삶을 담되 한박자 늦출 것. 있는 그대로를 담을 것. 황금의 수 안에서 미래주의의 역동성과 다다의 개념까지 활용할 것.

굳이 브레송이 이러한 원칙 아래 사진을 찍은 것은 아닐테지만 그의 사진 속에는 늘 이런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암시적이고 은근하다. 현실의 모습을 다루되 그의 사진의 경이로움은 그가 언제나 되새김질하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다.

스티글리츠가 삶에 관해 진실함을 표명했다면 브레송은 삶에서 느끼는 감정을 표명했으리라. 동작과 의미, 구성과 항금의 비례. 앗제와 만 레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1920년대 후반 입체주의 화가의 아틀리에에서 수업을 받은 그의 사진을 보노라면, 예술가의 시선은 한 가지 성향만으로 대표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삶을 드러내는 형식주의자의 시선은 이런 것이었다.






세월은 어림없이 흘러서, 오직 우리의 죽음만이 붙잡을 수 있을 따름이다.
사진은 영원을 밝혀준 바로 그 순간을 영원히 포획하는 단두대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제목은 브레송의 사진집 제목 결정적 순간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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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8-2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봐도 좋네요. ^^

Jeanne_Hebuterne 2013-08-28 17:55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보셨군요!
브레송의 사진에는 늘 사람이 있어요. 참 좋지요?
dreamout님이 잘 보고 가셨다니 제가 다 기뻐요 :)



dreamout 2013-08-28 22:50   좋아요 0 | URL
정면 사진들이 많죠.

저는 남의 뒷통수 찍기를 좋아하는데..
그러고보면, 옛 사진가들은 참 잘 훔쳤어요. ㅎㅎ

oren 2013-08-26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페이퍼에 올려주신 글로도 브레송의 사진들을 훌륭하게 감상할 수 있군요. 수많은 사진들을 손수 찍고 편집하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덕분에 좋은 사진, 좋은 글 잘 감상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올해가 로버트 카파 100주년이라면서 1년 전부터 '전시회' 준비에 골몰해 오던 친구 녀석('ㄱ신문 사진부 기자)이 '전시회 개관일에 꼭 오라'고 했던 게 벌써 한 달 전 일이네요. 개관일에 공짜로 볼 기회는 놓쳤지만, 그래도 전시회 마감 전까지는 꼭 가보겠노라 약속을 했건만 여태 꾸물거리고 있네요.ㅠㅠ
* * *
《로버트카파 100주년 사진전》2013년 8월2일~10월28일,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사진전을 '널리 알려달라'는 제 친구의 요청 때문에 여기에 '불법광고' 남겼음을 용서하세요..)

Jeanne_Hebuterne 2013-08-28 17:57   좋아요 0 | URL



oren님, 브레송이 찍은 사진을 저야 뭐 가장 단순작업만 하여 올렸을 뿐인걸요, 뭘.
오히려 사진이 하나같이 다 좋아 선별하는 데 애를 먹을 정도였습니다. 좋은 사진에는 다 이유가 있는 모양입니다.

카파 전시회라니, 사진에 관해 여전히 잘 모르는 저도 솔깃해집니다. 갑자기 저도 가고싶어지는걸요! 사진을 좋아하시는, 카파를 좋아하시는 많은 분들이 가셔서 잘 보셨음 좋겠습니다 :)


그나저나 뭐하십니까! 얼른 가신 다음 후기 남기시지 않고!!!



adsl 2013-09-2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오래간만에 브레송 사진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그대에게
류근 지음 / 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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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제 나는 많은 것들과 이별했다. 작정하고 이별했다. 맘먹고 이별했고, 이를 악물고 이별했다. 내가 이별하는 동안 빗방울은 구름의 자세와 이별했고, 우산은 나의 신발장과 이별했고, 사소한 술값은 현금지급기와 이별했다. 몇몇의 벌레들은 영영 목숨과 이별하기도 하였다. 어제는 어제와 이별하였고, 오늘은 또 어제와 이별하였다. 아무런 상처 없이 나는 오늘과 또 오늘의 약속들과 마주쳤으나 또 아무런 상처 없이 그것들과 이별을 결심, 하였다. 

-책 속에서





'내가 세상에 와서 한 일이라곤 오로지 울고 싶을 때 그 울음을 참은 것이 전부였다.'로 시작하는 산문집을 읽었다. 이 더위에, 혹은 이 추위에, 라고 슬쩍 펄펄 끓거나 얼어붙은 시간 한 톨을 붙이고 싶은 책. 

 말끝마다 싱그럽게 교화된 욕설이 따귀처럼 따라붙고 좀 억울한 표정의 글자가 헤엄치는  책.  '소설가이자 탁월한 신화학자로 잘 알려진 이윤기 선생님은 생전에 나와 마주치면 절대로 류근과는 노래방에 가지 않겠다, 라고 힘주어 결심의 일단을 외치곤 하셨다.'로 글머리를 열더니 마침내는 북방에서 온 아주머니가 어서 나가라 문 두드리고 천장엔 쥐오줌 있는 위독한 풍경이 펼쳐진다. 시래깃국도 못 먹은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는데 하숙집 아주머니는 시래깃국을 못 먹어 죽을 뻔했다는 말로 들었는지 날마다 시래깃국을 주는 나날. 

 





 가난한 마음. 

 꼭 헤드라이트 하나가 나갔는데 그걸로 더듬더듬 밤길을 거슬러 어디론가 가는 느낌. 





 이 어둠 속 좌절과 자학의 암중모색 가운데 떠오르는 대책 없는 젊음의 이미지를 어쩌면 좋을까, 생각했었다. 헤어짐과 실연, 게다가 헤드라이트는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 불에 차라리 타서 없어져 버리면 좋을 것 같은 집 이야기를 담은 노래 가사 같은 글귀. 라인과 공백이 어둡지 않은 리듬을 만들어주는 이 책 책장을 넘기면 내도록 갈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시쳇말로 류 근이 그리도 매 페이지 마다 즐겨 부르는 옛 애인조차 없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하는 생각.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 영화 보러 가는 술집 여자조차 못기다리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하는 한탄. 세 편의 시를 썼고, 스무 통의 연애편지를 썼고, 열한 명의 애인을 만났고, 아흔 명의 애인을 떠났다는 작가가 차라리 부러워지면 지는 거란 말인가, 하는 자조. 책의 전반에 드리워진 자학의 암중모색이 가는 길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자기 자신을 이야기할 때조차 우습게 일컫는 류 근의 글에는 절제, 공백, 여백, 은유, 축약이 없다. 유용하거나 즐거워야 하거나, 쾌락을 가르치거나 주거나, 혹은 이 둘을 겸하여야 하거나,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어야 한다거나, '상상력의 표현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어야 한다거나, 감정의 자생적인 분출이어야 한다거나, 시는 곳 체험이거나 아름다움의 운율적 창조이거나....... 호레이스, 부알로, 시드니, 셸리, 워즈워스, 릴케, 포의 시에 관한 정의를 잠시 생각해 본 다음 류 근의 시나 산문을 읽노라면 이렇게도 직설적일 수가 있다니, 하고 화들짝 놀라게 된다. 자기풍자를 술마시듯 하는 시인의 산문은 통속적이어서 담장이 낮다. 





 소나기 전의 구름도, 아침저녁으로 제법 차가워지는 바람도, 조금씩 기우는 달도, 그의 글 속에서는 라면과 키우는 강아지와 옛날 애인이 입고 지나가던 빨간 옷으로 바뀌어 모습을 보인다. 이쯤 되면 묻고 싶어질 지경이다. 지금 애인은 어디서 뭘 하냐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끄는 정서는, 월플라워즈의 노래에서처럼 단 하나의 헤드라이트, 혹은 파이스트의 노래에 나오는 어느 저녁날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가 주는 결핍이 둘을 부른다면, 그는 차라리 셋을 외칠 사람이다. 글이 흐르는 곳과 닿는 곳은 자신이되 언어는 그 자체이길 바라는 글. 책속에는 물론 옛애인과 술이 가장 많이 등장하지만(그냥 '애인'도 많이 등장한다), 종종 그는 언어의 그릇이 머무는 세상을 맨눈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아직도 '언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는 명제에 동의한다. 그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가 곧 그 사람의 '내용'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단 두어 문장의 글을 보고도 그 사람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그가 내뱉는 말의 높이에 따라 그 사람의 품격을 짐작할 수 있다.

 어느 당 인수위원회의 첫 인선의 수석 대변인이라는 자의 '언어'를 나는 몇 번 목도한 적이 있다. 이제 그의 언어가 그 당의 입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언어가 곧 그 당의 내용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놀랍다. 국민의 수준을 딱 그 정도 언격으로 판단한 것이다.

-책 속에서





 그러니, 이러한 그릇으로 대접받는 시대에는 사금파리같이 반짝이는 것이라고 모조리 수집하려 들지 말 것. 오늘 창피하다고 내일도 계속 창피해하지 말 것. 말만 남았다 하더라도 빈말은 하지 말 것. 혼자 살든 함께 살든, 가장 혼자가 될 것. 갈 곳이 없어진 류 근이 혼자 기울이는 술잔은 결국 자기 자신을 들먹이기 위한 술잔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추측이 판단보다 더 많은 것은, 그만큼 이 산문집의 결에 공백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든, 류 근의 산문을 읽고 나면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것들' 같은 메모를 남기지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사람은 결국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결핍이며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으니,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늘 바뀌고 지금도 바뀌고 앞으로도 바뀔 것인데, 그 사이 빙점을 마침표로 잘못 읽는 것은 읽는 자의 착각이다. 그 끝도 없는 자유에서 울 수도 없을 때 하필 류 근의 이런 글이 나타난다.





 불안을 극복하고, 공포를 극복하고 오늘날 바야흐로 새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람들 보면 킥, 웃음이 난다. 우울을 극복하고, 절망을 극복하고 날마다 바야흐로 새 삶을 살고 있다는 사람들 보면 캑, 목이 막힌다.

 그들이 극복한 것은 불안도 공포도 우울도 절망도 뭣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가벼운 핑계들을 잠시 알고 있었을 뿐이다. 가벼운 느낌들을 잠시 붙들고 있었을 뿐이다. 

 불안과 공포, 우울과 절망 같은 것들은 극복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불안을 느끼는 것과 불안을 깨닫는 것은 다르다. 공포를 느끼는 것과 공포를 깨닫는 것은 다르다. 

 우울과 절망이 느낌이라면 그것은 곧 지나간다. 하지만 불안을, 공포를, 우울을, 절망을 깨달아버린 거라면 그것들은 절대 지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불안과 공포, 진정한 우울과 절망은 깨달음의 세계다. 가벼운 느낌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한 번 깨달은 것이 무슨 수로 극복될 수 있겠는가.

 극복된 깨달음은 가짜다.

-책 속에서.




 그렇단 말이지, 하고 읽고 있는데 저 말끝에 앙큼한 한 마디가 따라붙는다. '사랑도 그와 같다, 시바.' 그러니까 책 앞머리가 시작하기도 전에 나온 문구, '이 책에 표기된 비속어, 문법 파괴 등의 표현은 원문을 쓸 당시의 격렬한 파토스와 문맥을 살리기 위해 저자와의 협의 아래 최소한의 범위에서 의도적으로 허용한 것임을 밝힙니다.'라는 글귀는 그러니까 '지나친 흡연은 폐암의 위험을 가져오며......'와도 같은 경고 문구였다. 마침 따라붙은 된소리가 제거된 욕설에서 시인이 표현하고 싶었던, 원문을 쓸 당시의 격한 파토스와 글의 결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가까이서 보면 희극인 일이 멀리 떨어지면서 비극이 되어가는 과정. 수족관에 들어간 물고기가 자신은 원래 더 깊고 넓은 물속에 있어야 했다는 것을 잊는 나날. 열차 안에서 태어나서 땅을 밟아본 적 없는 트레인 베이비가 흙을 만지는 역설. 





 그리운 것이 무어 그리 많은지, 추억으로 간직할 것이 무엇 그리 많은지 '추억의 힘과 그리움의 힘은 같은 높이의 음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내 노래는 언제나 길 없는 허공에 발이 묶인다.' 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 음계의 색상이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이 직접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높낮이일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은, 그 열망의 정도일 뿐 그 정확도의 깊이는 아닐 것이다. 상처와 허무, 절망과 헤어짐, 그 사이를 연애와 담배와 술과 부조리로 가득 채우는 류 근의 시는 아마 앞으로도 작가의 바람처럼, 지붕이 낮을 것 같다. 높고 차갑고 엄정한 음계 가운데, 이렇게 하나 정도 속된 낮은 양철 지붕 하나 정도를 가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저녁, 까닭없이 무엇이 불쑥 떠오를 때.







*제목은 책 끝에 실린 시 제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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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8-19 0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서점에 갔다가 이 책을 보고 만지작만지작 하다가 왔는데 바로 이 리뷰를 보게 되다니.
김광석의 저 노래 가사만으로도 마음이 무장해제되는데, 그 가사를 쓴 사람의 책을 통째로 읽으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부제의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그대에게라는 문장을 보니, 맞다,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면 다 그런거지, 라는 생각에 오히려 위안을 받아요. 그러면서 다 살아가는거지 라고 생각하먄서요.

이 책도 읽어보고 싶어지는데 그럼 아마 저를 에뷔테른님 따라쟁이라고 놀리시지 않을까...^^

Jeanne_Hebuterne 2013-08-23 08:33   좋아요 0 | URL
hnine님, 저는 김광석을 잘 알지 못했지만, 류 근에 관해서는 통속시인이라고 부르는 말들을 많이 들었어요. 저자의 다양한 경험도 신기한듯 하였고, 글도 접근하기 쉬웠던 것 같아요. 이 책은 일정 기간, 지면 발표하지 않은 그의 개인적인 글모음이라 깔끔하게 정리된 맛은 없지만 어떤 이의 수첩을 몰래 들여다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아주 깊숙하지도, 내밀하지도 않지만 이런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구나, 정도의 느낌이었습니다. 모든 페이지마다 (옛)애인이 끈질기게 등장하여 이 사람의 머리는 엄청난 구심력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요.

한마디로, 달 보며 함께 술마시기 좋은 책이었어요.

덧-저야말로 hnine님 따라쟁이인데요! 그보다는 풴 정도인지도! 히힛
 
이게 다예요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고종석 옮김 / 문학동네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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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1일 오후, 생브누아 거리


Y.A. 당신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하겠어요?

M.D.뒤라스라고.

Y.A.나에 대해선 뭐라고 하겠어요?

Y.A.알 수 없다고.




(서울=연합)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3일 파리 자택에서 82년의 생애에 종지부를 찍었다. 소설, 영화, 연극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알콜중독으로 일찍부터 여러차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들어선 바 있으며 특히 88년 이후에는 자주 혼수상태에 빠져 그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었다. 작가도 물론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 이미 문학적 유서라 할 수 있는 작품 '이게 다예요'를 최근 내놓은 바 있다. 이 작품은 뒤라스가 "죽을 때까지 사랑할" 인생의 마지막 동반자였던 35세 연하의 동성연애자 얀 앙드레아를 위해 94년 11월부터 95년 8월 초까지 쓴 일기를 묶은 것이다. (후략)

-연합뉴스 발췌.






http://www.vuededuras.com/marguerite-duras.html




1996년의 이 기사가 떠돌기 전 나는 '스카프'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그녀의 소설을 읽었다. 육 년이 더 흘러 히로시마 내 사랑을 스크린으로 보았고 뒤늦게 애도했다. 그 전에 카뮈의 페스트를,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이 모든 것을 내 십대에 읽었고 이 모든 것을 내 이십대에는 뒤돌아보지 못했다. 그림자는 너무 짧았고 석양은 너무 빨리 찾아왔으며 눈동자는 너무 자주 깜박였던 때였고 나는 이 공백을 이해하기엔 아직도 아는 것이 없다.






 그 이십대, 낯선 거리에서 길을 찾노라면 손에 지도를 들고 있어야 했지만 나는 자주 지도를 접어두었다. 대신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려는데요, 라고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는데 그때에 특별히 친절하거나 선량해 보이는 사람을 점찍은 것은 아니었다. 목적지가 있었던 내게 그들은 그저 내 옆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내 길잡이가 되었다. 명백한 이유가 없는 우연의 일이었다. 그 책방이 직원할인이 된다는 이유로 나를 그곳에 데려간 어머니가 지금도 내 어머니라는 것도, 그 책방에서 은근슬쩍 뒤라스와 쥐스킨트를 문제집 사이에 끼워넣은 것도 우연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는 이럴 때면 구름 사이 지나가는 달을 보고 싶어진다. 혹은 비행기가 남긴 비행운을 보고 싶어진다. 있었던 어떤 것과 사라진 어떤 것. 기억에 남은 어떤 것. 그러면서 작게 눈 흘기고 싶다. 




1996년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부모를 따라 인도차이나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공산당원이었던 적 있었지만 1950년에는 제명되었다. 법대를 다녔으며 공무원 생활을 하였고 퇴직 후 자유로운 글쓰기를 했다고 전한다. 1950년대에 쓴 그녀의 소설을 누보로망에 넣기도 하지만 실제 그녀의 글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워 어떤 장르에 넣기는 약간 어렵다. 특성이 있다면 단 하나, 뒤라스적이라는 것. 리듬을 다르게 하고 이펙터를 쓰거나 편집을 하여도 뒤라스는 뒤라스다. 




 살아있는 사람, 죽은 사람, 나무가 없는 곳에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 울듯이 맞는 남자, 너무 행복해 입술을 깨무는 순간, 커피잔을 내려놓는 순간의 정적, 신에게 봉헌되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옆을 바라볼 수 없다고 되내이며 똑바로 길을 걸으려 안간힘을 쓰는 여자의 하이힐 소리가 모데라토 칸타빌레에 드러났고 연인에서 그녀의 늙음이 예고되었다면, '이게 다예요'에는 그녀의 모든 것이 있다. 가쁜 숨, 한숨, 웃음, 몰아쉬는 숨, 속삭이는 숨, 거친 숨, 그리고 그 사이의 주름과 그늘, 모든 것이 그저 조용히 '이게 다예요'라고 말한다. 발걸음이 멈춘 조용한 거리, 그 너머 이어지는 실내의 고즈넉한 미온의 침실.







Y.A. 당신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겠어요?

M.D. 내가 누군지 이제는 잘 모르겠어. 

       나는 내 애인과 함께 있지. 

       그 이름은 몰라.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마치 애인과 함께 있듯이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났으면 하고 바랐지. 애인과 함께 있는 것 말이야.





불가능을 떠올리는 꿈. 가능성을 탐하는 희망. 

늙음에의 고단함과 매끈함이 사라지고 공백을 채우는 주름. 

뒤라스는 힘들다고도, 슬프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불안하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녀가 이름표를 붙이는 낱말은 늘 지도의 표시 같았다. 그 단어 사이를 헤매다 보면 저 위에 방위표가 보인다. 등고선이 보이고 높고 낮은 곳이 드러난다. 그늘의 적막함, 무너뜨리고 다시 만드는 열망.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지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요. 그게 다예요.'라는 어느 오후, 그녀가 남긴 기록을 따라간다. 바람이 흔드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어느 날 저 나뭇잎도 바람에 떨어지고 시들겠지. 하나하나 떨어졌다가 나는 것은 결국, 새로운 나뭇잎이겠지. 얀 앙드레아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짧은 글을 보노라면 그 공백과 그림자가 잔향으로 남는다. '우리는 이걸로 살 수 있어. 웃고 뒤이어 우는 걸로.'라고 그녀가 말할 때엔 한밤중 발작하듯 울며 그의 어린 애인 이름을 부르는 늙은 울음이 들린다. 목적을 향해 차근차근 걸어가는 어린 여자아이 대신 한 번에 담요 자락을 놓지 않으려는 노인이 보인다. '나는 땅에서 솟아나는 시간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거야'라고 그녀가 말하면 이제 그녀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때, 그녀는 그랬을 것이다. 이미 지나치게 어릴 때 확 늙어버린 것처럼, 그녀는 지금도 다시 시시포스처럼 간을 떼어먹히려 내어놓는 것이다.






4월 19일, 15시, 생브누아 거리


우연히 내겐 천재가 있었지.

나는 거기에 이제 익숙해져 있어.


침묵, 그러고 나서


난 하얀 목재 토막이죠. 

그리고 당신도 그렇지요.

다른 빛깔의.






 어떤 작가는 지금 있는 자리가 아닌 앞으로 가고 싶은 자리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뒤라스에게는 공간이 겹쳐지고 시간은 중첩된다. 그 순간 그녀의 손가락 끝은 아마 중력과 탄성을 거부하고 높은 곳으로 도약했을 것이다. 나는 하얀 목재 토막이며 당신도 그래. 그런데 당신은 다른 빛깔이야. 얼굴이 희기만 한 사람들이 나오는 지루한 모범을 벗어난 정말 자유로운 글쓰기란 이런 것이 아닐까. 







L’homme assis dans le couloir, a play from Marguerite Duras

directed by Razerka Lavant

 22.8.2011.

 http://www.act-design.com/





 글쓰기와 삶이 연결되어 있다면, 그녀에게도 삶이 어려웠을 것이다. '당신의 글은 왜 이리 어려운가?'라는 질문에 그녀는 '그럼 삶은 쉬운가?'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삶은 가볍거나 무거워야 했다. 전체가 몰락했다가 그 다음을 숨죽이고 기다리듯, 백 년을 단위로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은 우연히 앉은 옆자리의 먼지에 얼마나 쉽게 마음 아파하거나 옷장의 좀벌레에 격렬하게 짜증을 내거나 미쳐버리곤 하는가. 그 모든 화르륵 하는 손쉬운 불길 사이를 가라앉혀 우연과 필연을 오가는 회로 사이, 다른 빛깔을 읽는 그녀는 며칠 뒤 일기에 쓴다.





6월 11일


당신은 당신 됨됨이 그대로예요, 난 그게 기뻐요.






 나는 여기서 누구에게나 있는 나의 지난 사랑을 토로할 생각이 없다. 모두가 자신의 것이라고 외치던 지리멸렬한 폭우와 찬란한 태양, 풍랑과 격투, 파도를 가르는 마음, 방파제에 부딪히는 절망에 관해서도 입을 다물 것이다. 케케묵은 연애사, 우연을 필연이라고 소중히 메모하거나 애인의 편지를 간직하는 그런 짓은 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대신 나는 저 짧은 문장이 세상의 모든 것이구나, 느낄 뿐. 꼭꼭 삼켜야 하는 목소리. 언젠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시가 슬픕니다. 느껴지세요?'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는데 그 짧고 당연한 말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던 것처럼 이 짧은 메모에서도 더 덧붙일 말을 찾지 못한다.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말도 찾을 수 없었다. 





 주의 깊게 듣는다 하여 그것이 진실하다는 착각은 그만. 허용한다 하여 깊다는 오해도 그만. 격렬하다 하여 열정적이라는 허구도 그만. 지나갈 것이라 하여 아름답다는 굴절도 그만. 

 이 모든 그만인 것들을 지나고 나서 숨 쉬듯 흘러나오는 저 목소리 앞에 얼어붙지 않을 자, 누구인가.






시간. 침묵, 그러고 나서


당신이 뭔가를 할 시간인 듯합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는 없어요. 아마도 쓰는 것이겠죠.


침묵,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하나, 좀더 살기 위해서. 또 좀더 살기 위해서.

이게 다야.

그건 내가 아니야. 더는 알지 못하는 그 누구일 뿐.






 모든 일에 시작과 끝이 있다면, 사랑이 시작되는 것은 우연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나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사랑과 죽음이라고 애인을 불렀던 뒤라스는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역치가 마주치는 순간을 글로 남긴다. 기억이 흐릿해지거나 손에 힘이 풀릴 그 직전에도 아마도 당신은 쓸 것, 이라고 말하는 얀 앙드레아에게 자신의 시간을 토로하는 나이 든 손이 보인다. 이게 다라고 말할 때, 그 음성은 앞선 것과 달랐을 것이다. 거울 속 모습이 낯설 때, 사람은 이렇게 느낄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알지 못하던 누군가 불쑥 옆구리를 찌를 때. 끝났다. 페이지를 닫아야 한다. 이제 가야 할 것이다.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고 우연이 모여 이유가 될 때. 그녀는 끝까지 썼을 것이다. 





침묵


나는 광기로 얼어 있어요.


Y.A. 뭔가를 덧붙이고 싶나요?

M.D. 난 덧붙일 줄 몰라. 난 다만 창조할 수 있을 뿐이지. 단지 그것 뿐이야.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말. 쉬운 말이 어려울 때 뒤라스의 기록을 보면 흐렸던 물속이 맑아지는 느낌. 머릿속에서 거대한 우물을 만들었을 그녀의 마음이 보인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저 스스로 숨 쉰다손 치더라도 이 둘을 완전한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작품이 있다. 여성 작가의 경우 자전적 요소가 더 짙게 깔리는 경향이 있다. 가장 쉬운 고백, 스스로 하는 반성. 남성 작가보다 좀 톤 다운된 우울함, 옅은 촉감. 


 


 그러나 뒤라스는 자신의 존재를 얼굴에 내세우는 작가다. 그녀가 생득적으로 가진 모든 조건은 그녀가 이룩한 성취 아래 가려진다. 이 얇은 책에 그 무거운 마음을 눕게 했을 손끝이 서늘하다. 외침과 독백. 드러냄과 숨김. '너처럼 될 수 없다는 것, 그게 내가 아쉬워하는 그 무엇이지.' 이보다 더 서늘하고 뜨거운 속삭임을 내가 반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자 고종석이 후기에서도 밝히듯, 이것은 작가의 문학적 유서다. 차가워서 뜨거운 김을 허공에 흩어내고 나서 남는 것은 작가 그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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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3-08-18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조위가 아니라 양가휘요. 저도 이름이 기억 안나서 검색했네요 ㅎㅎ 정말 책에서 상상한것보다 너무 근사하죠. 책에선 유약한 이미지인데 양가휘는 몸이 너무 좋아서 ..ㅎㅎㅎ

Jeanne_Hebuterne 2013-08-18 20:19   좋아요 0 | URL
LAYLA님, 아, 양가휘였군요! 전 영화는 보지 못했는데 뒤라스는 캐스팅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몸이 너무 좋은 건 어떤 것일지... 더 궁금하게 만드는 재주 ^^

다크아이즈 2013-08-18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면서 쿨하게, 담백하게 '쎄 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뒤라스는 멋있게(?!) 산 여인이에요.
대개 보통 사람에겐 일상이 던적스럽고, 구질구질하고, 요즘 같아선 더워서 짜증나고 뭐 그런 거잖아요. 그게 모여 삶이 되는 건데 쿨하게 그게 다야, 라고 말할 수 있으면 누가 뭐래도 인생 잘 산 거죠. 뭐. 저도 연습할래요. - 인생 뭐 별 거 있어? 그래 그게 다야. 그래서 어쨌다구? ~~~

Jeanne_Hebuterne 2013-08-18 20:23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저렇게 간단한 말이 더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팜므느와르님도 그런 생각 하셨군요! 뒤라스처럼 저렇게 확신있고 당당하게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득한 나날들이었어요. 작가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 보아도 확신이 가득하고 아무에게도 아쉽지 않을 것 같은 그림자가 느껴져서 저 짧은 글모음이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이 길어질수록 구질구질해지고 더 먼 길을 둘러간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래서, 그게...... 이런 접속어 사이에서 더 길 잃는 느낌.
오늘따라 제 속에 들어왔다 나가신 건지 왜 이렇게 콕콕 짚어내시는 거에요! 안그래도 던적스럽다 구질구질하다 다 소용없다 더우니까 짜증까지 치솟는데 왜 이모양이냐, 싶웠는데ㅜㅜ

저도 같이 연습할랍니다. 우리 같이 연습해요ㅜㅜ

다락방 2013-08-18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을 때까지 사랑할" 인생의 마지막 동반자였던 35세 연하의 동성연애자 얀 앙드레아를 위해 94년 11월부터 95년 8월 초까지 쓴 일기를 묶은 것이다.

이 책이 그런 책이었군요. 오늘 류근 산문집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남의 일기를 읽는 것은 정말이지 재미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뒤라스의 책은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쉰이 되고 일흔넷이 되어도 여전히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며 그 감정들 속에서 뒤죽박죽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 사람이라 그런걸까요, 죽을 때까지 사랑하며 살다 간 뒤라스의 일기는 궁금해져요.

Jeanne_Hebuterne 2013-08-23 08:38   좋아요 0 | URL
멋지죠. 멋지죠. 전 정말 뒤라스같이 사는 것에 너무나도 큰 감흥을 느껴서(팬이 되면 논리를 잃는다, 정도로 여겨주셔요. 흐흨) 이 책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작품 모두를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단상이 모여 그녀의 어떤 부분을 이루는 과정을 볼 수 있었어요. 너무 힘들고 괴로울 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있다는 것도, 쓰러져 갈 때 옆에서 일으켜 세워줄 존재가 있다는 것도. 무엇보다도 저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세계를 일구어냈다는 것이 가장 부러웠는지도 몰라요. 이 책은 사랑에 관한 가장 완벽한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럴 수 있었던 건 그녀가 타인을 사랑하기 이전에 자신의 세계를 완전히 구축했기 때문일거란 생각도 했습니다. 얀 앙드레아를 생각하면 뒤라스가 떠오르지만 뒤라스를 생각하면 얀 앙드레아가 생각나지는 않거든요.

전 그래서 지금도 밤중에 홀로 깨어나면, `얀, 얀!' 하고 부르는 와인에 취한 삐걱대는 그녀의 목소리가 떠오릅니다.
 
영국 장식미술 기행
최지혜 지음 / 호미 / 201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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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샤를 불의 서랍장 코모, 페트워스 하우스 수집품>



말없이 자리잡은 도자기, 태피스트리, 창틀, 의자, 테이블, 이런 것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할까?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영국의 어느 곳에 깃든 그 흔적을 찾으면, 무엇이 손에 잡힐까? 장식 미술은 무엇일까? 너무 멀리 있는 것을 섣불리 궁금해한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집어들기 전 내 머릿속에 스친 생각. 장식 미술은 차치하더라도 그 단어의 묘한 조합, 장식+미술이라는 개념조차 의문스러웠던 상황. 이 책은 1800년대 영국의 저택을 답사하며 사진과 간단한 설명으로 마치 여행지 안내자를 옆에 둔 것 마냥 술술 책장이 넘어갔다. 처음의 의문은 아마 저자도 가졌던 듯, 책 앞머리에서 발견된다.



"순수와 장식의 차이가 무엇인가?" 이 애매한 선 긋기를 확실하게 정하는 것이 가능할까마는, 굳이 그것을 나눈다면 가장 중요한 잣대는 '아름다움'외에 '쓰임'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아름다움 그 자체의 자율성, 미적 가치의 산출이 목적이면 순수미술이고, 쓰임이라는 효용 가치가 목적이면 장식미술이라고 나눌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두부 모 자르듯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처음부터 감상하기 위해서 만든 도기 접시는 순수미술품인가 아니면 자식미술품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본디 목적으로 보면 순수미술품인데 실생활에서 쓰일 수도 있는 그릇이니 말이다.-책속에서


순수와 장식, 혹은 일상에 스며든 그 흔적을 이야기하는 책. '그 너머' 혹은 '이곳에' 있는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는 저자의 노력은 런던과 런던 외곽의 박물관과 컬렉션, 하우스, 홀을 둘러보며 남긴 곳곳의 사진과 디테일에서 드러난다. 400년간 영국 중산층의 삶을 한눈에 보여주는 제프리 박물관, 프랑스 장식미술품의 메카 월리스 컬렉션. 자기 인형 컬렉션이 있는 펜튼 하우스. 화가 레이튼의 집 레이튼 하우스, 모더니즘 건축의 윌로우 로드 2번지 하우스 2, 여러 번의 결혼을 통해 신분의 사다리를 오르며 유리성을 지은 베스 오브 하드윅의 하드윅 홀. 신고전주의 디자인의 절정을 보여주는 오스털리 하우스, 미술공예운동으로 러스킨과 그 이름을 함께 하는 윌리엄 모리스의 레드 하우스까지, 저자가 다녀간 곳곳에는 건축, 공예, 회화, 작가, 정치의 흔적이 있다.



기록, 쓰임, 감상, 소통, 가치, 효용. 이런 단어들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오가도 책장은 잘만 넘어갔다. 쉬엄쉬엄 구경하게 만드는 사진과 설명. 구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머리 후 드러나는 흔적. 기능을 버리지 않은 아름다움, 아름다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무엇, 무엇보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아름다움에 관한 생각. 아름다움은 계속 그 그림자를 바꾼다. 심지어 개념도 그 그림자를 숨겼다 드러내기를 반복한다. 달라지는 경계, 그를 기점으로 드러난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이 이 책을 펼치면서 시작된다.



<제프리 박물관, 1745년 거실>


제프리 하우스는 400년간 영국 중산층 가정의 거실을 한눈에 보여준다.
참나무 식탁과 의자가 있는 1630년대의 홀. 바닥에는 골풀을 엮어 만든 자리가 있고 수납장과 벽난로가 있다.
시간을 건너뛰어 1745년의 거실에는 중국 명나라의 영향이 보인다. 참나무는 마호가니로 바뀌었고 중국식 찻잔과 주전자가 있다.




<제프리 박물관, 1910년 거실>


이로부터 45년을 더 나아가면 이제 벽에 나무판 대신 벽지가 보인다.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판화 액자, 치펀데일 스타일의 책상. 소박한 느낌을 주는 가구의 1910년의 거실, 이케아의 조언을 받아들였는지 마침내 꽃무늬가 사라진 현대의 거실이 차례로 등장한다.



<제프리 박물관, 1998년 다락방을 개조한 거실>


어느 소박한 가족의 일상이, 어쩌면 돈에는 쪼들리지는 않았을 듯한, 당대의 분위기가 녹아든 생활 공간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제프리 하우스를 둘러보면 생각보다 다양한 흐름이 보인다. 델프트 도기, 본차이나, 치펜데일, 신고전주의, 그리스 양식, 영국 전통의 느낌. 시간의 흐름이 눈에 보인다. 앞으로 이 책에서 속속 드러날 흐름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제프리 하우스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보여주는 이 책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맨체스터 스퀘어의 월리스 컬렉션, 큰 거실 전경>




<월리스 컬렉션의 일부, 코담배 갑>



화려한 호사스러움은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프랑스 장식 미술의 메카라는 소제목을 붙인 이 챕터를 들여다보면 내도록 눈이 호사를 누린다. 금을 입힌 청동 장식, 프랑스 루이 15세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이 후원하던 세브르 고앙의 자기, 또한 그녀가 직접 부셰에게 주문한 그림, 붉은 색에서 초록색으로 색감이 달라지고 직각에서 타원형으로 형상이 바뀐다. 칠기, 크리스탈, 조개, 귀갑, 대리석, 도자기. 이 다양하고 값비싼 재료가 작은 코담배 갑 스너프 박스에 담겨 있다. 바라보노라면 영국 하트퍼드 가문이 소집한 후 국가에 헌납한 이 컬렉션 속에 있으면 아마도 시간과 공간을 혼동할 것만 같다. 이런 것이 로코코인가. 감미롭고 달콤한 저녁의 시간. 자그마한 은밀함, 경쾌한 향수의 잔향. 이 화려함이 이후 계몽주의와 신고전주의의 등장으로 막을 내린 것이 잠시 아쉬워지기까지 하는 순간.




<치즈윅 하우스>


치즈윅 저택에는 일체의 허세가 없다. 서양미술사-잰슨의 설명을 잠시 참조하자면 밀집된 기하학적인 구성으로, 이 건축 양식이 이전의 고전주의 양식과 다른 점은 건물의 외형이 아닌 설계의 동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 결과 바로크 양식과 비교하면 훨씬 편안해 보이고 평면적이고 균일하다. 저택 안을 들여다 보면 로마 신전을 본뜬 듯한 장식이 보인다.
당시의 고전을 되살리려는 복고의 경향이 계몽주의와 결합하는 순간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귀족과 왕족의 화려한 로코코에의 반발. 자연과 이성으로의 회귀. 독일의 미술사학자 빙켈만이 제시한 그리스의 고결한 단순성, 조용한 위대함. 치즈윅 하우스의 구석을 훑는 사진을 들여다 보면 이런 것들이 보인다. 어느 장식 하나도 저 홀로가 아니며 전체가 하나를 이룬다. 저택을 나오면 깍거나 다듬지 않은 자연으로 돌아간 듯한 영국식 정원이 펼쳐진다고 한다. 당시 벌링턴 경과 윌리엄 켄트가 치즈윅 저택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장식과 표현을 넘어선 그들의 생각이었을 듯하다.




<페트워스 하우스, 화가 터너가 작업실로 사용한 서재>



런던 근교로 나가면 페트워스 하우스가 있다.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 필사본이 있는 곳. 1250여 권의 방대한 개인 소장 도서가 있는 곳. 페트워스 가문의 10대 공작은 궁정 초상화과 반 다이크를 후원했으며 11대 공작 다음의 엘리자베스 퍼시는 치정 살인을 주도하기도 했다. 프라우드 공작이라고도 불린 6대 서머싯 공작은 어린 딸이 자신이 잠든 새 건방지게 의자에 앉았다는 이유로 우산 2만 파운드를 깎았으며......이 책에는 이러한 뒷이야기가 있다.
배경이 안개처럼 자욱이 깔린 다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저택, 건축가, 후원자와 후원을 받던 예술가이다. 컨스터블, 게인즈버러, 터너 등의 예술가들의 이름이 저자의 설명에 등장한다. 이 곳에 아직도 보존 터너의 작업실과 벽에 걸린 그의 풍경화를 보노라면 귀족의 예술품 수집, 예술가 후원 등의 활동이 눈에 보인다. 아마 이곳은 건축 양식, 가구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조각과 회화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방문하는 이도 많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윌리엄 모리스의 레드 하우스>


라파엘 전파의 화가였다가 실용을 위한 예술로 관심 분야를 바꾼 문학가이자 광고전문가, 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그 이름을 남긴 윌리엄 모리스. 그의 신혼집은 건물 외관에서부터 커튼, 소파의 천 등 실내 장식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을 그대로 드러낸다.



'모리스는 기계의 사용을 철저히 배제했고, 중세의 장인정신을 이어받아 손으로 정성껏 깎고 다듬었다. 아름답고 실용적인 디자인이 널리 쓰이길 바랐던 모리스의 희망과는 달리,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진 그의 제품은 서민에게는 부담스런 가격이 되고 말았다. ... '나는 아름답거나 유용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곁에 둘 이유가 없다'고 강조한 그의 '아름다움'과 '유용함'의 원칙은 마음에 새겨둘 만 하다.'-책속에서.



<윌리엄 모리스의 레드 하우스, 현관에서 바라본 복도>


'Art for use'를 외친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즉 실제 사용하는 벽지, 가구, 의자, 장식장 등이다. 차분하고 친근하며 부담스럽지 않다. 그의 레드 하우스는 불순물을 걸러낸 담백하고 순수한 형상이지만 윤곽선에 준 변화가 느껴진다. 식물무늬 커튼, 대담하고 풍성한 문양의 균형감 있는 배치.
이 책에 따르면 그는 이러한 디자인을 전통적인 염료, 염색 방법으로 제작할 것을 고집하여 더욱 섬세한 색조를 만들었다고 한다. 필요한 요소는 숨기지 않아 오히려 드러나는 장식 효과는 나무 막대기를 이어 뼈대를 삼고 골풀로 엉덩이 받침을 만든, 손으로 깎고 다듬은 단순한 선의 의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서식스 의자, by 윌리엄 모리스>



이러한 러스킨의 유기적인 일관성의 구석구석을 훑다 보면 디자인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닌 생활 속의 모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산업화 이전의 수공예품을 부활시키고 천박한 생산품을 대체하려 했던 그의 작품은 하나같이 환상을 배제한 단순함, 평면성, 따스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대중을 위해 대중이 만든 미술로서 제작자와 사용자에게 동시에 행복감을 주는 미술을 추구했으나 역설적으로 돈이 없는 사람은 살 수 없는 상품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쩌면, 어떤 사물과 어떤 형상은 저 홀로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시대와 호흡하고 답장을 보내고 응답하다가 꽃을 피우기도 하고 저물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가 접하는 유용성과 탐미를 아우르는 아름다움의 자취 중 한 가닥이 아닐까.



<윌로우 로드 2번지>


햄스테드의 윌로우 로드 2번지. 잠시 고개를 갸웃,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지 왕조 시대, 빅토리아 시대의 집이 죽 늘어선 햄스테드에 골드핑거의 현대 건축이라니! 예상대로, 지역 신문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고 골드핑거는 디자인을 여러 번 수정했다 한다. 오죽하면 007 시리즈의 작가 이언 플레밍은 골드핑거의 디자인이 못마땅한 나머지 악당의 이름을 골드핑거라고 지었다고 한다. 007 골드핑거. 가십, 이야깃거리는 그러나 역설적으로 화제성을 불러일으키며 한 번 더 대상을 바라보게 하는 파급효과를 지녔다. 아니, 파급효과를 지녔기에 이야깃거리가 되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것인지도.




<윌로우 로드 2번지, 벽난로가 설치된 오목한 흰 벽이 있는 거실 전경>


저택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구조를 최대한 활용한 합리주의, 기하학적인 형태가 눈에 들어온다. 윌로우 로드 2번지의 경우 주변 환경과의 이질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벽돌을 사용했다고 한다. 계단은 철제이고 지그재그로 엮였으며 막힘과 트임을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흰 벽면과 검은색 벽난로. 사각 액자. 저자의 설명으로는 이러한 액자 속의 액자 장치는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즐겨 사용하던 방식이라고 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처럼, 그림 안과 밖이 헛갈리는 구분. 경계의 이러한 구분은 때로는 경쾌한 유머로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윌로우 로드 2번지, 3층의 침실>



지금 보아도 전혀 이질감이 없는 이 집이 1939년 완공되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르 코르브지에와 함께 가구를 제작한 샬롯 페리앙, 미스 반 데 로에, 알바 알토와 같은 유명한 디자인 가구를 떠올리게 하는 골드핑거의 디자인은 공간의 확장,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보여주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지은 다른 복합 사무용 빌딩은 '영혼이 빠진 건물'로 불리기도 했다니 사람이 인지하는 아름다움은 저마다 다를 수가 있으며 어느 것도 정답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보게 한다.




이렇게 다양한 공간을 저자의 설명을 들으며 따라가다 보면 각각의 공간이 당시 아름답다고 생각한 개념을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집의 외관. 구조. 벽. 창틀. 커튼. 장식품. 가구. 큰 것에서 작은 것까지.
바깥에서 안으로. 안에서 바깥으로. 천천히 마음을 비우고 구경하다 보면 슬며시 따라오는 당시의 생각. 각기 다른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 정치, 철학과 떼어 생각할 수 없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생각들.



만약 이곳으로 휴가를 떠난다면 챕터마다 저자가 실어둔 주소와 전화번호를 활용해서 몇몇 곳을 방문해도 좋지 않을까? 그만큼 현장감이 있는 책이다. 물론, 방대한 미술사, 건축사 등등을 모두 다 다룬 것은 아니며 미술 사조에 관한 설명이나 찾아보기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아 그야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아쉬운 점도 조금은 있다. 찾아보기 부록이 별도로 없어 한 번 지나치면 애써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 또한, 직접 관여한 제작자, 건축가, 예술가의 일화와 간략한 설명은 본문에 몇몇 각주로 표기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자세한 사항은 읽는 자의 부지런함에 달려 있다는 점도 조금 아쉽지만, 어쩌면 이것은 나의 게으름 혹은 무지 탓인지도 모르겠다. 찾는 것은 금방이고 망각 역시 금방이니까.


다 읽고 난 다음 한 번 책장을 스르륵 바람에 넘기니 내가 보았다고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다채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영국 장식미술을 다루었지만 다양한 수집품과 영향을 받은 작품을 함께 다루어서 이 책에서 다룬 면면은 영국의 장식미술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이 이 책의 장점일 것이다. 다양한 관점을 부분부분 때로는 돋보기로, 때로는 안경으로 보여주는, 건축과 일상에 관심이 많은 어떤 이의 여름철 휴가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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