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베토벤 : 현악 4중주 전곡 [대푸가 포함 8 for 3]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작곡, 베그 사중주단 (Vegh Quart / NAIVE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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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present and time past
Are both perhaps present in time future
And time future contained in time past.
If all time is eternally present
All time is unredeemable.
What might have been is an abstraction
Remaining a perpetual possibility
Only in a world of speculation.
What might have been and what has been
Point to one end, which is always present.
Footfalls echo in the memory
Down the passage which we did not take
Towards the door we never opened
Into the rose-garden. My words echo
Thus, in your mind.


-T.S.Eliot, from Four quartets.(부분발췌)


 




 야론 질버맨의 영화 '마지막 사중주'의 첫머리를 여는 T.S.Elliot의 시, four quartets. 

 마지막 다음 처음, 처음 다음의 마지막. 시간은 지나가면 현재에 존재하고 미래와 맞물린다. 존재의 그 극단에서, 그렇다면 현재란 어디에 있는 걸까? 공간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그간 구하기 어려웠다는, 헝가리 출신 베그 쿼텟의 70년대 녹음을 듣는다. 베토벤 푸가 전곡을 품고 있는데 오래전 녹음이라 음질이 좋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음반의 경우에는 그런 아쉬움 없이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20세기 들어 재평가된 베토벤 후기 현악 사중주, 그중에서도 '대푸가'를 듣는다. 




 우연과 필연, 육체와 영혼, 있음과 없음. 한번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정언명령.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가져온 베토벤의 메모, '그래야만 하는가?-그래야만 한다'. 이 유명한 메모는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사중주인 Grosse Fuge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낱말과 소리, 공기와 바람이 눈앞에서 잠시 빙긋 웃고 지나가는 느낌. 고개를 돌리면 우연히 지나가는 어울리지 않는 음이 바람을 타고 살며시 귀에 닿는 듯하다. 




 귓가에 스치는 음악을 진행하는 단위로 존재하는 시간. 

 먼저 하나의 시간 단위로서 우리 앞에 놓인 무엇. 

 놓여있다가 지나가고 모여서 만드는 단위.

 반복이 모여 이루는 특정한 박자.

 그러는 동안 말 거는 조성.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목소리가 음역과 음색을 달리하여 조성을 이룬다. 그 음은 서로 부딪히거나 스치면서 시간을 이루고 바꾸기도 한다. 

 현악기의 얇은 선과 탄력을 지닌 진동으로서 드러나는 음정. 하나의 음이 다음의 음을 예고하거나 전환을 암시하는 음계. 그리고 그들의 성격으로 드러나는 조성. 이때 음이 하나씩만 울리지 않고 동시에 함께 울리는 것을 화음이라고 한다면, 협화음은 무엇이고 불협화음은 무엇일까? 잠시 호토가 엮은 헤겔의 음악 강의를 참조해 본다. 





...울림이 다를 뿐 아니라 상충되기까지 하는 음이 첨가되기 때문에, 협화와 통일성을 직접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이들을 통해서 차이점이 드러나고, 상충되어 부디지기까지 한다. 본질적으로 상충되면서 날카로움과 파괴 같은 것을 꺼리지 않으므로, 이것으로 인해 심오한 음악이 형성된다. 그 이유는 서로 잘 어울리는 음의 조합에 근본적으로 상충되는 음의 조합이 맞섬으로써 참된 통일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논리학에서 어떤 개념을 주관성으로 전개시킬 때의 예를 보면, 본래의 순수한 주관성은 그에 대립되는 객관성의 존재로 인하여 한층 더 높은 개념으로 격상된다. 

 본시 주관성이란 오로지 이념 그 자체로 보면 단순히 객관성 에 대립되는 것, 즉 객관성에 맞서는 개념이다. 그러나 주관성이 객성과 대립하는 가운데, 그 내부로 잠입하여 객관성을 극복하고 해체시킬 때 참된 주과넝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대립의 고통을 스스로 이겨내고 그리고 이겨낼 능력을 갖추게 됨으로써, 한층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 숭고한 본질인 것이다. 음악은음악 자체의 내부적인 형식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오한 내용 속의 주관적인 느낌까지도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헤겔이 그의 철학에서 말하는 객관이 실재하는 겉모습, 주관은 예술작품에서 느끼는 인간의 정서와 감정, 작가의 표현하고 느끼는 방법과 감상자의 감상을 뜻했던 것을 돌이켜 본 다음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 사중주 대푸가를 들어본다. 어렴풋이나마 느껴지는 주관과 객관이 맞서는 시간의 세계. 주제는 계속 그 모습을 달리하며 변주하고, 이 하나의 대푸가에 변주곡, 소나타, 푸가가 함께 담겨있다. 

 예고 없이 중단되거나 튀어나오는 대립하는 음. 신호 없이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4개 악기가 동시에 맞부딪히기도 한다. 그 불협과 대립의 맞항을 거친 다음 정교하고 경쾌한 끝맺음이 나타난다. 음반 속지의 마지막 악장에 관한 설명을 읽노라면 베토벤의 음악에 관한 고민이 드러난다. 



 

 The last movement is the one tat includes the most gloss. At the top Beethoven wrote : Der schwer gefasste Entschlus(the difficult decision) and beneath this title included on a star the double musical motif for a question and answer, accompanied by these words Muss es seine?-Es muss seine(Must it be?-It must be). The finale is built upon this double motif. The question and more especially the answer were part of those familiar expressions of Beethoven in which his letters and conversation books abound. In April 1826, a few months before the composition of this Quartet, he had even by way of an avenging jest, composed a canon on Es muss seine to compel a musical amateur to pay up a few pence. It was the theme of that canon that he uses again in the finale, perhaps renewing the jest's original intention, although the development afford to the motif confers upon it much greater significance.

 -Brigitte Massin



 


 이러한 베토벤의 고민을 마주할 때, 연주자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예술은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부속물이 아니다. 연주자는 작품에 충실히 원작이 의도하는 바를 읽는 것과 동시에 작곡가의 감정을 읽어내고 자신의 개성을 덧붙이기를 꿈꿀 것이다. 헤겔은 훌륭한 연주자라면 작곡가의 정신세계의 수준까지 도달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남겼다. 깊이를 불어넣고 텍스트처럼 눈앞에 놓은 음표에 생명을 주는 일.  




 하나의 음이 등장하고 여럿이서 반복하고 증폭하고 만났다가 헤어지는 이 지점을 바릴리 쿼텟이 차분하고 풍성하게 펼쳐냈다면 베그 쿼텟은 그 깊이를 좀 더 온건하게 강조하는 느낌이다. 어느 한 부분을 너무 날카롭게 날을 세우거나 건조하게 하지 않고 자만에 빠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연주. 원하는 빠르기를 유지하되 느린 부분에 가서는 비브라토로 하여금 재량을 발휘한다. 부담스럽지 않은 범위 안에서 흐트러짐 없이 유지되는 긴장감. 산도르 베그의 개성이 느껴지는 표현은 베그 쿼텟이 어떻게 음색의 밸런스를 유지하는지를 편안하게 느끼게 한다. 바릴리, 린지, 부다페스트 등 많은 이가 권하는 베토벤 현악 사중주의 중요한 한 부분을 만난 날. 쉼표가 아닌 느낌표로 남는 어떤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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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오클레르 - 필립스 협주곡 녹음 [3CD]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외 작곡, 쿠로 (Marcel Co / Decca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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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간 시간.

 사라진 공간.

 묻는다. 기억을. 

 답한다. 들림을.

 쉼표와, 마침표.

 진동과 흔들림.




 레코딩 음질이 더 좋아지고 연주자들의 기법이 향상되는 요즘 문득 한 시대를 생각한다. 

개성이 더 또렷하고 국경이 높았던 때. 서방 연주자들이 러시아 연주자들을 눈이 휘둥그레 쳐다보며 경청하던 때. 

 어떤 연주자의 기법은 더 섬세하고 가녀렸던 때. 

 음질은 지금보다 열악하고 종종 마이너 레이블에서 녹음하여 지금은 찾기 어려운 음반의 소리가 무지개처럼 펼쳐지던 때.



  지금은 희미해졌으나 듣는 순간 귀를 섬세하게 잡아채는 가느다란 우아함의 미셸 오클레르.

 1960년대와 1950년대의 오래된 음악 소리에 귀를 빼앗긴다.

 멀리 갈 것 없이 이 공간의 연주자 소개를 들추어 본다.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1924년 11월 16일 파리에서 태어나 롤라 보베스코, 미쉘 슈발베, 앙리 테미앙카, 크리스티앙 페라스 등의 명인을 길러낸 쥘 부셰리를 사사하고 1943년 롱-티보 콩쿠르와 1946년 제네바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탄탄한 기교를 바탕으로 정열적이면서도 아름답게 연주해 "바이올린의 가수"로 불렸으나, 전성기에 접어든 1960년대 중반 불의의 교통사고로 왼손을 다치면서 독주자 활동을 접고 후학양성에 힘써 많은 녹음을 남기지 않고, 2005년 6월 세상을 떠났다.



 
 음악이나 책이나, 무언가를 접하는 우리는 진공 속에서 숨 쉬지 않는다. 즉, 진공 상태에서 무언가를 듣지 않는 이상 이러한 연결고리가 조금씩 생겨나는 것이 이제는 유쾌해지는 순간이 있다. 아마도 듣는 이에 따라 이런 고리는 조금씩 헐겁거나 조밀하게 들어차서 어느 순간 거대한 지도를 머릿속에 접었다 펼쳤다 하게 되리라. 나에게는 크리스티앙 페라스의 이름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카라얀 60 박스, 그 오십 번째 음반을 오늘 다시 집어들고 듣노라면 뭐랄까, 그 섬세한 감성과 낭만적인 표정의 고리, 쥘 부셰리. 그리하여 연결하는 미셀 오클레르.



 쥘 부셰리는 미셸 오클레르의 파리 음악원 시절의 스승. 자크 티보 보베스코, 슈발베, 페라스 등의 연주자를 길러냈는데 미셸 오클레르의 연주를 듣노라면 내게는 우아하고 선이 가느다란, 지금은 점차 멀어져 가는 지나간 시간의 어떤 페이지를 돌아보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활이 지배할 수 있을 만큼의 가녀림, 감상에 빠지지 않는 우아함, 때로 들려오는 예상 밖의 직설적인 활 놀림을 이번 에디션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에서 들을 수 있다. 이 곡에 관한 하인츠 베커의 설명을 옮겨본다.



초기에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솔로 부분이 유독 연주하기 어려워 쉽게 공연되지 못했다. 제네바 호수 근처 클라랑에서 협주곡을 쓰던 중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코텍의 제안을 수용해 제 1악장을 다시 썼으며 완전히 새로운 안단테 악장으로 교체해서 나중에 따로 출판했다. 하지만 에밀 소레처럼 요제프 코텍 역시 이 작품을 연주하기를 거부했다. 레오폴드 본 아우어 역시 기술적인 부담을 느끼고 동료 연주자들에게도 이 곡의 "무시무시함"을 경고했다. 결국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산더 브로드스키가 1879년 빈에서 초연을 하는데 동의했다. 이 협주곡에서 차이코프스키는 기존 형식에 메이지 않고 고전적인 협주곡 양식에 많은 자유를 부여했다. 따라서 제1주제의 도입부 모티프는 튜티에서 전개되어 솔로의 등장으로 완전한 모습으로 이어진다. 보통 제1악장의 끝부분에 등장하는 카덴차는 주축이 되어 말 그대로 작품의 중심에서 생동감의 요소가 된다. 제2악장에서 마지막 악장으로 바로 넘어가는 부분은 차이코프스키의 서로 다른 성격의 악장을 한데 엮는 뛰어난 즉흥성을 보여준다. 피날레의 주요 주제의 도입부 모티프는 오케스트라에 의해 이어지며 베토벤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전개부 느낌의 진행은 마지막 악장의 완전한 주제가 등장하기에 최상의 기초가 된다. 
-하인츠 베커
 


 능숙하고 객관적이며 정서적으로 숭고한 브람스의 흐름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감정의 폭발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듯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듣는 이로 하여금 작곡가의 다양한 개성이 느껴지는 비등점을 느끼게 하는데, 이번 미셸 오클레르의 필립스 레코딩의 첫 장은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가, 세 번째 장은 브람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가 사이좋게 함께 하고 있다. 차이코프스키에서는 악단과의 긴장이 팽팽한 직설적인 연주를, 브람스에 가서는 단아하고 조용한 울림을 들려준다. 



 연주자가 활용하는 악기가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다양한 음색과 깊이를 개성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속도의 지점이 지적하는 비등점을 그 개성에 덧붙이고 싶다. 곡에는 메이저, 혹은 마이너로 표기한 조성이 있다. 흔히들 처음 클래식을 접하는 이들이 어려워하는 긴 제목에 곧장 나타난 이정표. 또한, 곡 앞에는 알레그로 몰토, 안단테, 알레그레토 논 트로포 등의 작품 성격을 설명하는 단어가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속도란 무엇인가? 명랑한 알레그로와 느린 아다지오의 성격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느리고 빠른, 명랑하고 슬픈 것에는 정답이 없다. 그러므로 연주자는 작곡가가 뜻했던 정확한 속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곡 자체에서 자신이 알아낸 자신의 해석을 연주를 통해 드러내야 한다. 연주자의 음악성을, 개성을 알아낸다는 것은 이 정답 없는 흐름을 어떻게 펼쳐나가는지를 들으려 노력한다는 것이 아닐까.


 
 미셸 오클레르는 큰 낙차를 지니지도, 거대한 스케일을 품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만들어내는 무지개의 노랑에서 초록으로 흐르는 연두와 노랑의 얇은 끝처리는 흡사 지금 다가오는 봄처럼 가늘지만 분명하게 맥박한다. 음표를 자신의 머릿속에서 읽었던 그대로 명쾌하게 만드는 단정함이, 긴장과 완급을 나직하게 조율하는 그녀의 바이올린. 듣고 있으면 고전음악 애호가들이 종종 그리워하는 '그 시대'가 궁금해진다. 지네트 느뵈, 아르튀르 그뤼미오, 크리스티앙 페라스, 피에르 아모얄, 오귀스탱 뒤메이로 이어지는 프랑스-벨기에 악파의 그 시대. 지금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지난 세기에는 더욱 또렷했을 당시의 국경의 밤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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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
실비아 플라스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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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었다. 전기밥솥에 밥도 넣지 않고 코드를 꽂아둔 채 '보온'을 눌러둔지 까맣게 잊었다. 마지막 취사가 기억나지 않았으니 얼마 동안 부푼 공기를 애써 덥혔는지. 잊지 말아야지. 오랫동안 밥통을 쓰지 않을 때엔 반드시 코드를 뽑아 두자. 그러나 이를 어쩌나. 오늘 아침밥이 한가득 남아있다. 이대로 먹지 않고 잊으면 이제 내리 석 달을 밥통은 신이 나서 제 온기를 돌려댈 것이다. 나는 이렇게 까마득히 잊는 일이 많다. 잊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망각을 이상하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러면 잊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깥에서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고 육화하여 안에 지니는 일이다. 반대로 잊는 것은 무엇인가.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일이다. 내다보아서 내 것이 되지도 않고 단열과 방음이 잘 된 방에서 기껏해야 부러워만 할 뿐이다. 무엇의 안쪽에 있는 내게는 무엇의 안쪽만 보인다. 그러나 아마도 밖에서 들여다 보는 이의 눈에는 슬픔과 기쁨, 고단함과 휴식, 바윗덩이와 자갈이 보일 것이다. 서랍에서 그것을 끄집어내고 싶었으나 내 서랍은 텅 비었다. 잊었기 때문이다.



 

 찬란하게 흐린 아침......지난밤 한 시간의 여유가 주는 달콤한 선물. 매일 이럴 수는 없을까? 자닌, 디나, 제스 마리까지 여자 신입생들은 모두 아침을 먹은 뒤 성경책으로 단단히 무자하고는 예배가 마치 버스라도 되듯 놓치면 안된다고 재잘거리면서 교회로 몰려갔어. 나는 무신론자의 커피를 석 잔째 마시며 친구들을 향해 자애로이 웃어 보이고는 실존주의자의 달걀을 먹었지. 다들 착하지만, 아, 맙소사, 너무 어려. 무 어리다고, 스무 날만 지나면 스물네 해도 끝나고 스물다섯 해를 맞이하겠지. 이렇게 말하면 잔인할 수도 있지만 사실인 걸 어떡해. 사반세기가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말이야. 오, 주님. 나머지 칠십오 년은 해가 뜨건 달이 뜨건 폭풍우가 불건 피바람이 휘몰아치건 주님의 영광으로 복되게 해주시옵시서.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이 나왔다. 책장을 넘겼다. 나의 사랑 테디에게 보내는 1956년 10월 7일의 실비아 플라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육하의 거의 모든 것을 안다. 1956년 10월 7일, 케임브리지 대학교 뉴넘 대학 여자 기숙사에서 실비아 플라스가 테드 휴즈에게 편지를 사랑을 담아 썼다. 그러나 아무리 추측해 보아도 완벽하지 않은 두 가지가 있다. '어떻게' 와 '왜' 이다. 둘 중 하나는 어떻게든 추측했도 나머지 하나는 흐릿하다. '나의 사랑 테디' 이 음절이 주는 잘 막힌 띄우기와 시원하게 뚫린 은근함에서 오는 비는 공간.




 

 아마도


 어느 흐린날,


 어쩌면


 두 사람이 손 맞잡고 건너도 충분한 길을 


 언젠가


 에이리얼의 입김처럼 황홀하게 걷는 걸음으로


 다시, 아마도


 '아마도' 였을 것이다.


 



 일요일은 싫어. 편지가 안 오니까. 편지로 읽는 당신 목소리가 그리워. 얇지만 글이 명쾌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책을 읽어봐. 이 책이 바로 나의 실존이야. 화날 정도로 잘 쓴 책이지. 제발 금요일에 런던으로 오라고 이야기해줘. 일요일까지 같 있을 수 있게 말이야. 칸 로스한테 연락이 오건 안 오건 상관없어. 



 

 '아마도'의 눈길로 책장을 넘기면 테드 휴즈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위와 같은 마무리로 끝을 맺는다. 실이 매듭을 짓듯, 보고 싶다는 말로 시작하여 보고 싶다는 말로 되돌아간다. 책 읽는 손끝. 육하를 다 끼워 맞추었으나 끝끝내 남는 '아마도'. 바다 우뚝 외딴섬처럼 그것이 전달 못 하는 진실.




 느낌이 말한다. 



 들리세요?



 귀기울이면


 



 나의 사랑 테디. 

 운을 떼던 그녀가 '엄마, 사랑하는 우리 엄마에게' 라는 편지로 잠시 옆을 본다. 

 데 듀 콩티노 호텔, 프랑스 파리, 1956년 8월 25일. 그 옆 각주가 따귀처럼 따라붙는다. 플라스는 어머니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증오한다고 밝혔노라고. 이 선명함. 이 불안함. 무지개의 흔들리는 스펙트럼을 무지개 안에서 밖으로 바라본다. 편지는 밝고 경쾌하고 간결하다. 언제 무엇을 했고 어떻게 하고 싶다는 것. 어떤 것을 보았다는 것. 이 수많은 '것'들이 실비아 플라스와 오릴리아 플라스 사이를 오간다. 종이에 펜과 잉크로 호기심 많은 고양이를, 테드 휴즈를, 호텔 전경을 그린다. 앞과 뒤, 오른쪽과 왼쪽을 보면 실비아 플라스가 바라본 고층에서 떨어진 깃털이 보인다. 




You walked in, laughing, tears welling confused, mingling in your throat. How can you be so many women to so many people, oh you strange girl? 



 테드 휴즈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사이 끼어드는 그림을 보다 책장을 넘기던 손끝에 걸린 실비아 플라스의 말 한마디. 1952년에 스스로에게 한 말이었으니 이 드로잉북보다 조금 전이다. 그러나 그 후에 끼어든 아빠는 또 다르지 않았나.




At my twenty I tried to die...but they pulled me out of the sack.

And they stuck me together with glue.






 천천히 번지는 어둠과 쉽게 스미는 절망을 섞으려는 시도. 검정과 보라가 1963년 11월 아침에 드러났다. 빛과 밝음이 주는 그림자, 이런 실마리는 그러나 이 드로잉집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이토록 찬란한 흐림을 첫 문장에서부터 느낀 것은 오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 보이지 않는 무지개. 그러나 일부 스펙트럼이 눈 끝에 걸린다. 관찰, 그리고 관찰한 것을 표현하려는 움직임. 펜 끝을 세우거나 눕히고, 짙거나 옅게. 우산과 구두, 정박한 조그마한 어선과 회벽의 공동주택. 이 전체를 지나고도 독자 안에 틀어박힌 무심한 이는 '무엇을 보았나?' 라는 질문에 우산과 구두, 정박한 조그마한 어선과 회벽의 공동주택을 보았어요.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정작 보아야 하는 것은 다 놓친 채.




 나는 왜 기억하지 못하고 모두 잊어서 슬픈가?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해서이다. 지나치고 잘못 알 정확하지 않은 무엇. 정보와 느낌이 섞인 글. 시선이 어긋난 달의 옆모습. 그 옆모습은 무엇인가? 책 속에 길이 있으니 고전을 읽으라는 공허한 말. 어떤 영화가 내게 큰 감동을 주리라고 도리어 내가 벼르고 갔던 나날. 느낌이 그저 '좋으니까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라는 것에 그쳤던 그릇된 감상. 너무 볶아서 나오는 쓴맛을 구수함이라고 느끼던 어느 날.




 그래서 그 맛도 향도 느낌도 감동도 길도 정작 나의 길과 일치하지 않았던 허무함. 




 이 안타까움을 읽지 못하면 실비아 플라스의 드로잉은 습작에 불과한 것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요네하라 마리의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 라는 고양이를 다룬 수필도, 백석의 '가난한 내가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내린다'는 시 구절도, 칸 로스한테 연락이 오건 안 오건 상관없다는 실비아 플라스의 편지도, 결국은 관계에의 애정, 사랑하는 마음, 기다리는 마음을 담았건만 그것을 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 속에 숨은 것을 찾아내고 그 밖에 나타난 것을 거울에 상하 좌우 앞뒤 비추어 본다.

사람이 사람의 입으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지리와 멸렬에서 벗어나려는 작가의 눈길. 그 길을 눈으로, 발끝으로 내딛는다. 실비아 플라스는 그녀의 다른 글에서 "my lusts and my little ideas"라는 어구를 남긴 적이 있다. 작은 생각이라는 부분에서 눈이 멈춘다. 붉음이 옅어지고 흐려져 흰색이 되는 어느 지점, 말할 필요 없는 것은 자르고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그럼에도 언어로 남기려는 노력. 언어를 업으로 삼는 이의 노력은 이런 것이다. 짧고 간결한 편지 속에는 광기도 어둠도 괴로움도 없다. 아빠, 개자식. 이런 외침도 없다. 그러나 나무는 마침내 헐벗고 만다는 시를 노래하는 시인의 또 다른 생활이 그녀가 눈으로 찍은 자신의 시선으로 들어있다. 




 농게가 득실거리는 록하버 만의 진흙 웅덩이에서 괴이한 광경 목격. 바스러질 듯 메마른 습지 풀이 갯가를 에워싸고 간기가 끈끈히 배어나는 황록색 개펄이 저 멀리 펼쳐진, 물 빠진 갯바닥. 한복판으로 갈수록 질척해지는 개흙 밭. 딱딱한 껍데기를 등에 얹은 채 바스락바스락 붅히 움직이는 흑녹색 농게들로 진흙 바닥이 살아서 꿈트랜다. 큼지막한 연녹색 집게발 하나를 쳐들고 옆으로 기어가는 모양새가 마치 거미와 갯가재와 귀뚜라미를 잡종 교배한 듯 사악하다. 둑 가까이 있던 놈들이 우리 발소리를 고는 잽싸게 둑으로 기어오르더니 거무튀튀한 진흙 바닥에 난 구멍으로 쏙 들어가거나 풀뿌리 사이로 몸을 숨긴다. 물 빠져 시커멓게 드러난 질척한 갯바닥 한복판에서는 농게들이 얕은 진흙의 겉켜를 파고들지만 집게발은 여전히 툭 튀어나와 있다. 바싹 마른 풀뿌리와 메말라가는 홍합 껍데기 더미 사이에 난 수억 개의 구멍에서 집게발과 눈알이 밖을 또록 내다본다. 야트막한 둔덕에 게딱지로 만든 전구가 수억 개 박혀 있는 것 같다. 이미지 하나. 게들이 저 아래 덩이진 개흙에서 사락사락 살아가고, 기이한 습성이 지배하는 진흙으로 이어진 별세계, 그곳에 대한 괴이한 이미지.









 나는 앞서 망각과 기억, 안과 밖, 앞과 뒤, 바라보기와 그 속에 숨은 것을 생각했다. 

 실비아 플라스의 습작과 짧은 편지를 보노라면 생각 도중 '아마도'로 뒤덮인 한 구역이, 무엇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선명하게 들리는 것을 느낀다. 그녀가 쓴 글은 이미 완성을 거쳐 우리 앞에 있다. 내 앞에, 당신 앞에. 우리는 끝내 그 글을 이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끝난 채로, 매듭을 가졌으니까. 




 실비아 플라스라는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테드 휴즈의 생일 편지와 실비아 플라스의 시 선집, 일기와 편지, 드로잉으로 실비아 플라스를 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육하원칙을 떠올려도 '아마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어떻게'에서 막히기 때문이다. 보라색이 왜 검정으로 변하는가? 오븐에 머리를 집어넣을 때 어떻게 숨을 쉬었는가? 

 실비아 플라스의 글과 그림을 볼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이 빈 공백을 자기 생각과 상상으로 채워선 안 된다는 것. 언어는 슬프면 슬픈 대로, 비어있으면 비어있는 대로 전달해야 할 그 자체의 역설을 극복하고 결코 말할 수조차 없는 것을 빈약의 비극을 극복해 가며 우리 앞에 드러나는 것이다. 문학은 그런 것이며, 이것은 실비아 플라스의 드로잉집 뿐만 아닌 문학과 언어 전체에 걸쳐 잊지 말아야 하는 것, 



시계가 쉬지 않아 부쩍 많이 쉬게 된다. 


너절하고 비루한 생각과 텅 빈 밥통의 나날.


그러나 그래도 다행은, 


아마도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 

현실과 실제에 뿌리내린 삶의 복된 이면과 윤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에 실린 편지글 발췌)


그러니 많이 기억하고 꺼내어 보자. 





*영어 인용은 책 밖에서 가져온 실비아 플라스의 시와 일기.

*한글 인용은 책 안에서 가져온 실비아 플라스의 글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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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2-17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탐나는 책이네요 ㅅ

Jeanne_Hebuterne 2014-02-17 22:2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 하늘바람님. 퍼스나콘이 정말 화사하니 따뜻합니다 :)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은 나왔을 때 바로 샀는데 리뷰를 조금 늦게 올리게 되었답니다. 책 두께가 얇고 펜으로 그린 연습작품이 많아요. 타이핑한 시 원문, 습작 드로잉, 어머니와 테드 휴즈에게 쓴 편지. 이중에서도 습작이 가장 많아 쉬엄쉬엄 넘기기에 좋은 책인듯 합니다. 보노라면 실비아 플라스는 애정을 듬뿍 담아 테드 휴즈를 그리고(실제보다 미남으로 그렸어요), 일상의 사물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그리는 등 좀더 다른 시선을 원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해봅니다. 그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펜끝이 그리는 어떤 관찰과 노력이 엿보입니다. 이제 곧 봄, 퍼스나콘과도 같은 봄 되길 바랍니다.
 

엠마 도노휴 지음, 유소영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소설.

 

 현실과 현실의 너머를 보여주던 이야기.

 

 우리가 사는 곳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소설.

 

 아름답고 리얼한 소설.

 

 

 

 엠마 도노휴의 '룸'을 떠올렸다. 잘린 페이지를 끼워 맞춰 읽던 추운 겨울밤을 떠올렸다. 잭의 작은 손이 내 손 속에 들어와 잡힐 것 같아 허공을 두리번거리던 날에 눈이 따뜻해졌다. 마지막까지 견딜 수 있다는 나뭇가지. 낚시를 빠져나가려는 물고기의 움직임과도 같은 좌표.

 

 

 

 이 좌표는 오스트리아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에서 착상한 소설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납치, 감금, 폭행, 그 안에서 아이를 낳고 아이와 함께 탈출하는 사람의 이야기.

 

 

 

 종종 작가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그 바탕을 지워가거나 또렷하게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지워나갔을 것이다. 누구도 그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버지니아 울프는 거꾸로 자기 자신을 또렷하게 그림자까지 아로새겼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녀의 손끝을 따라갈 수 있다. 시선을 돌려 '룸'의 페이지를 넘기노라면 엠마 도노휴는 실제와 실재를 뒤섞었음이 단박에 보인다. 어떤 사건과 현실이 존재할 때에는 현실이 줄 수 있는 중압감, 끝이 정해져 있고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 수 있다. 그 벽에 맞서는 엠마 도노휴의 무기는, 뜻밖에 가벼운 깃털 같은 시선이다.

 

 

 

 "몬테크리스토 백작 기억나?"

 "섬의 지하감옥에 갇혀 있었어."

 "그래, 한데 어떻게 탈출했는지 기억나? 죽은 친구인 척 수의로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경비들이 그를 바다로 던졌지만 물에 빠져 죽지 않고 수의에서 빠져나와서 헤엄쳐 나왔잖아."

 "이야기 끝까지 해줘."

 엄마는 손을 저었다.

 "그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잭, 너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거야."

 "바다에 빠지라고?"

 "아니, 몬테크리스토 백작처럼 탈출하라구."

 다시 혼란스러웠다.

 "나한테는 죽은 친구가 없잖아."

 "죽은 것처럼 흉내 내란 말이야."

 나는 엄마를 쳐다보았다.

 "고등학교 때 엄마가 본 연극이 있어. 줄리엣이라는 소녀는 사랑하는 남자랑 도망치기 위해서 약을 먹고 죽은 척했다가 며칠 뒤 깨어났지."

 "아니, 그건 아기예수야."

 "그렇지 않아."

 엄마는 이마를 문질렀다.

 "예수님은 사흘 동안 진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거야. 넌 진짜로 죽는 게 아니라 연극 속의 소녀처럼 죽은 척하는 거고."

 "난 소녀인 척하는 방법은 몰라."

 "아니, 죽은 척하란 말이야.

-룸, 엠마 도노휴 '대탈주' 부분.

 

 

 

 간단하다.

 가장 복잡한 일에 가장 쉽게 묻기. 질문이 정확해야 답이 명확해지는 법. 엠마 도노휴는 다섯 살 소년 잭의 시선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탈출을 따라 하자는 엄마의 말에 잭이 먼저 떠올리는 것은 바다에 빠져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진짜에 맞서는 진짜를 본 적이 없는 소년과 진짜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엄마의 이야기. 열아홉 살에 납치 감금되어 그 안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엄마와 방 안의 사물이 전부인 아이의 눈.

 

 

 

 맑은 소리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오히려 먼지를 통해 일구어낸 문학의 자그마한 조각이 보인다.

 이 조각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재미있는 두 개의 발자국은, 납치 감금 폭행을 당한 여자의 것과 그 안에 함께 있었던 소년의 것이다. 범죄 현장을 목격한 아이의 눈처럼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조그만 눈이 더듬었던 발자국은 우리가 익히 아는 범죄 현장과 다르지 않다. 이 '다르지 않음'이 다르게 다가오는 데에서 오는 눈과 머리의 불일치. 나는 이것이 문학이 펼쳐낼 수 있는 커다란 날갯짓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이 어떻든 간에, 사건이 어떻게 완결되었든 간에 문학은 픽션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 그 누구도 완결된 글과 종결된 사건을 이길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닫힌 채 우리 앞에 말없이 놓여있다. 바라보면 열리는 그 사건을 뛰어넘을 수 없는, 뒤쫓는 자의 시선이 문학을 열쇠 삼아 오히려 현실을 더욱 현실로 보여주는 마법.

 엠마 도노휴는 엄마와 아이를 동정하지도, 냉대하지도 않는다. 말없이 바라보고 참견 없이 길을 걷는다. 유용함의 갈래로 얼개를 짰다면 이 소설은 르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픽션의 길을 택한 엠마 도나휴의 룸은, 그 자체로 간결하고 명확해서 소설을 쓰는 작가가 바라보아야 할 구심점을 힘있게 드러낸다. 구심점과 소실점. 재료와 기회. 다듬고 쌓아올리기.

 

 

 

 이 간단하고 복잡한, 뜨겁거나 차가운 발자국에 살짝 부는 바람을 맞노라면 작가는 미학적으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책장을 덮는 순간, 독자의 머릿속에 일말의 결심이나 동정심, 혹은 한마디로 정리되는 생각과 느낌이 들지 않게끔 소설을 써야 한다는 단 하나의 명제에 충실한 글. 분명히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취재를 하거나, 소설이 진행되었을 단계에도 있는 그대로를 옮기기를 피하려 노력했음이 분명한 흔적은 작품 전반에 드러난다.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를 옮기는 것은 다큐멘터리의 영역이지 소설이 아닐 터, 핸드헬드의 움직임으로 롱테이크의 시선을 옮기는 듯한 엠마 도나휴의 문체는 아이의 시선을 통해 더욱 깔끔해 보인다. 역설적으로 법을 가장 지키지 않는 이가 오히려 법을 가장 잘 알아야만 하듯, 엠마 도나휴는 있는 그대로의 완결된 사건을 엄마와 아이가 룸에서 나온 후 한꺼번에 햇빛을 보이며 더욱 확장한다. 가장 끔찍한 일을 가장 쉽게 바라보는 잭의 물음과 시선을 따라가 보면, 모든 현실에서의 사건을 하나의 시선으로 조망하게 되는 독법을 체험할 수 있다.

 

 

 

 

 대화의 영역에 말하는 사람과 듣는 이가 있다면, 소설가에게는 소설가 자신과 텅 빈 종이가 있다. 글을 쓸 때 대면해야 하는 자기 자신의 펜과 독자가 이미 알고 있을 사실. 독자가 이미 아는 사실과 작가가 만들어야 할 미학적 구조, 이 사이에서 엠마 도노휴는 작가로서 스스로 성취해야 할 역할을 앞서 말한 잭의 시점과 소설의 구조를 통해 훌륭하게 해냈다. 바로 독자가 책장을 덮는 순간 그 어떠한 윤리적, 현실적 판단도 하기 전에 잠시 진공 상태에 이르러 미학적으로 가치 있는 어떠한 변형된 형태의 픽션을 읽은 후 느낄 수 있는 '리얼'의 세계. 낯설고 새로운 진공의 상태. 소설이되 소설이 아닌 사실의 느낌.

 

 

 

 

 이 느낌은 일부는 소설 전체의 구조로 인한 것이다. '룸'을 읽다 보면 책의 중반부에 이미 잭과 엄마의 탈출이 이루어진다. 중반을 기점으로 앞부분에 펼쳐지는 룸 안에서의 생활, 뒷부분에 펼쳐지는 룸 밖에서의 생활. 르포르타쥬와 다큐멘터리가 지향하는 바가 바로 전반부까지였다면, 오로지 미학의 관점에서 현실을 빌려오는 소설의 지향점이 바로 후반부를 품으며 펼쳐진다. 멈출 법한 지점에서 계속 나아가기. 또한, 그 멈출 법한 지점까지 독자가 눈치채기도 전에 펼쳐지는 것은 잭이라는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세계의 모습이다.

 '그 좁은 세상에서 얼마나 갑갑했을까!' 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필시 독자 본연의 생각일 뿐, 오히려 룸 내부에서 엄마와 아이는 놀이를 하고 글씨를 익히고 이야기를 한다. 단 한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고 완전한 사랑과 지원을 주어진 환경 내에서 주고받는 관계는 잭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는 작은 신세계였다. 이 신세계가 서로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룸 밖으로 탈출한 다음의 상황이다. 아이는 계단을 걸어본 적이 없고 엄마는 납치범이 한 번도 사람 앞에 나가기를 허용하지 않은, 룸에 갇혀 사는 사람에 불과했다.

 

 

Some are in robes the exact as ours and some in pajamas and some in different uniforms. Most are huge and don’t have long of hair like us, they move fast and they’re suddenly on all the sides, even behind. They walk up close and have so many teeth, they smell wrong. A he with a beard all over says, “Well, buddy, you’re some kind of hero.”

-엠마 도노휴 '룸', 원문 발췌

 

 

 파자마, 다른 유니폼, 커다란 몸집, 우리같지 않은.....여기저기서, 뒤에서까지. 이빨도 많고 이상한 냄새가 나고....룸 안에서 분명하고 단정적이었고 질서정연했던 잭의 시선이 갑자기 불안정해지는 것은 오히려 룸 밖에서였다. 룸 안에서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 오로지 둘만의 존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밖에서의 두 사람은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를 아우른다. 이 소설이 현실만을 그대로 그린 평범의 틀에서 비범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간결한 구조로 뛰어난 미학적인 성취를, 사실을 뛰어넘으로써 리얼하게 그릴 수 있었던 작가의 펜에서 나왔다. 잭이 '안녕, 방아.'라고 말하며 룸에 작별을 고할 때 소설은 끝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다음, 잭이 언젠가는 더 많은 것을 엄마에게 물어볼 때가 오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읽을 수 없는 그 세계는 오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사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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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4-01-30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이야기인줄은 알고 샀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간결한 구조, 뛰어난 미학적 성취라는 말씀에.. 그럼. 한 번 읽어볼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이야기는 읽기 힘들어요...

Jeanne_Hebuterne 2014-02-04 08:16   좋아요 0 | URL
dreamout님, 역시 이 책도 갖고 계셨군요! 아무래도 좋은 책들은 dreamout님의 감식안을 피해가지 않나 봅니다 :)

얼마 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한 편 보다 그런 생각을 했었답니다. 그 영화 속 고문 장면이 더더욱 괴롭게 느껴졌던 것은 아무래도 실화가 주는 힘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따지고 보면 그 괴로움, 그 힘든 감정은 잔인함이 아닌 불편함의 힘은 아닐까요? 우리는 바라보기 불편한 슬픈 이야기를 피하고 싶고, 그 도덕적 판단에서 벗어나 의무를 다했다는 편안함을 지양하지만 실제 우리가 지양해야 할 것은 오히려 섣부른 외면과 도피일지도 몰라요. 무엇보다도 엠마 도노휴는 독자가 이 책을 다 읽은 다음 불쌍하다든지, 근처 있는 어린 아이에게 잘 해주어야겠다든지, 이런 다짐이나 결심, 도덕적 판단을 하지 않고 대신 잠시라도 구조와 이야기가 줄 수 있는 현실을 떠나 있으면서도 현실에 굳건히 뿌리를 둔 미학적 리얼함을 추구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있는 그대로는 르포와 다큐의 영역이고, 소설가는 아름다움을 추구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혹여나 읽게 된다면, 꼭 리뷰나 짤막한 감상 남겨주세요! 무척 궁금합니다 :)
 
안나 K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이리나 레인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그래요. 닫혔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고 앞으로도 죽 그럴 겁니다.

-안나 카레니나





 모호하고 불확실한 무엇. 아무리 달콤한 말도 구태의연한 것으로 들리게 하는 재주. 소용돌이 속에서 헛발질하는 개구리 같은 모양새. 남김없이 소진해 버릴 것이라는 헛된 다짐. 왜곡된 시선. 본의와는 무관한 해석. 작가가 전혀 의도지 않은 데에서 홀로 엉뚱하게 감동하는 독자. 단순간 어디론가 뻗어 나가 돌아오지 않는 생각. 안나 케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러시아계 유대인 소설가 이리나 레인이 현대 뉴욕을 무대로 재구성했다. 티파니와 펜디, 나이키, 불가사리 모양의 은 펜던트. 여자의 마음. 첼시와 소호, 소호의 프랑스 레스토랑, 랑그도크 지방의 와인, 그리고 아이오와. 남자의 마음. 세상에 그런 남사스런 일이. 부하라 유대인. 댁의 따님은....세간의 반응. 이 세 가지가 통속적으로 얽혀들어가는 모양새를 보자면 안나 카레리나는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도 또 죽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는 결론이 허망하게 남는다. 굳이 누군가를 꼭 살리라고 할 생각 없이도 이 죽음 앞에서는 또 한 번 무릎을 꿇게 된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시대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주변 환경이 다르고 심지어 안나마저도 메타 소설의 모양 앞에서 달라지지만 안되는 것은 역시 안되는 것일까.




 물론 결말에 집중하고 그에 이르는 흐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그런데 참으로 난처하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거장의 필치 앞에서 대상을 무한대로 확대하거나 축소한 이리나 레인의 렌즈를 들여다보자니 그 길 끝에 이르는 이 책의 지도가 너무 쉽거나 통속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와 농노제, 법률 사회까지 사회 전반에 관한 깊은 생각을 거친 작품이었다. 많은 이들이 소설의 첫 문장과 그 번역본에 그리 관심을 두곤 한다. 그러나 작가 김영하의 말을 빌리자면, 작가들은 의외로 문장의 얕은 술수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문체와 문맥. 조금의 기교를 부린 장식체 문장이 아닌 소설의 주제, 핵심에 도달하는 독자에게 펼쳐지는 세계야말로 문학의 핵심 중 하나다.




 그렇다면 안나 카레리나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것 하나만으로도 괜찮은 논문 몇 개는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안나 카레니나는 넓은 지평을 다룬다. 나뭇잎을 가리키는 손끝이 아닌 나뭇잎을 들여다 보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의 제목과는 달리 안나 없이 시작하여 안나 없이 끝난다. 어떤 이는 이 소설을 가정파탄의 슬픔이라고 읽기도 했고, 어떤 이는 이 소설을 독자를 가르치고자 하는 작가의 끝없는 열망이라 읽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가 같이 읽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른 것만 읽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정확히 톨스토이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이리나 레인이 안나 카레니나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하다 이 소설을 썼다고 확신한다. 




 이리나 레인은 아주 간단한 선택을 했다. 자신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한다. 안나의 외양 묘사에서 알렉스를 만나 하는 연애에서는 탄산이 빠져나간 탄산수의 맛이 느껴진다. 알렉세이 카레닌의 환영이 분명한 알렉스의 청혼을 잠시 살펴보자. 





"사랑하는 안나." 안나가 반지에 묻은 초콜릿을 핥아, 아니 빨아먹어서 다이아몬드 알과 주변 장식은 침 범벅이 됐다. " 당신을 향한 내 마음 알지?"

 "네." 안나는 책을 읽듯이, 어색하고 서투르게 "복선"을 의도한 대화를 읽듯이 대답했다. 자신도 이 일에 가담했다는 걸, 게 그에 따른 피치 못할 결론이라는 걸 간파했다. 아니라고 말할 거였으면 계획을 궁리하고 실행하던 몇 달 전에 했어야 하지 않아?

 "지난 일 년 반 동안 우리가 너무 잘 어울린다는 걸 확인했어." 알렉스는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웅얼웅얼 둘이 거쳐온 지난 날들을 훑었다. 와인 두 병을 마시며 밤이 깊도록 이어진 첫 데이트, 그녀가 발을 접질렸ㅇㄹ 때 그가 의사를 불러왔던 버몬트 스키 여행, 그녀가 로댕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로댕 전시회, 처음으로 함께 보냈던 애틋한 밤 등.  ...

 "안나, 나랑 결혼해 줄래?" 시간, 그녀는 시간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책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가장 무미건조하게 지나간다. 

 안나와 알렉스의 모든 것이 잘 깔린 대리석 바닥처럼 평탄하다. 

 그에 반해 안나와 데이비드의 모든 것은 낙차를 지닌다.




 문자가 왔다. "뭐해요?"

 "당신 생가해요." 알렉스가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친정 부모님까지 앞에 계셨다. 가슴은 쿵쾅거리는데 자판을 누르는 엄지는 둔해서 급하게 서두르다 맞춤법이 틀렸다. '전송'을 누르고 자리로 돌아와 알렉스의 팔짱을 꼈다. 너무 행복해 보이는구나. 엄마는 딸의 뺨을 가볍게 꼬집으며 말했다. -책속에서





 이리나 레인의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로 가득하다. 물론 키티와 레빈이 나타난다. 모든 것은 똑같이 재현된다. 다름이 없어서 독자는 이리나 레인의 안나를 읽을 때마다 모든 것이 닫혔다고 말하던 톨스토이의 안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리나 레인의 안나를 읽으면 안나 카레니나가 떠오르건만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도 안나 케이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오리지널의 위세. 이것이 원본과 샘플링의 차이라면, 역사상 이런 시도는 무수히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진대 무엇이 다른 것인가. 어떤 글이 좋다고 말하면 물론 작가는 기뻐할 일이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하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좋아? 좋다고? 좋다는 것은 일차원적인 일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다른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리나 레인의 안나 케이는 어쩌면 참 좋은 소설일 것이다. 끝없이 소설 속에서 안나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어한다. 남편 알렉스에게 이혼해 달라는 말을 하고 한달음에 데이비드에게 택시를 타고 간 다음 처음 그녀가 하는 말도 이제는 자신을 가지고 소설을 써달라는 말이었다. 알렉스가 낯선 곳,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지는 아이오와에 가자고 말할 때 하는 말도 '당신을 주인공으로 써낸 소설을 좀 더 살려볼 수 있을지도 몰라.' 였다. 픽션 속의 픽션이 피카레스크식 구성으로 펼쳐지지는 않는다. 그 이상 작가가 나아가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 소설은 안나 카레니나의 직업에 집중한다. 바로 그녀의 삶이라는 직업. 




 

이상한 꿈, 배에서 꾸게 되는 꿈. 끈적끈적해서 헤어나올 수 없는 꿈. 곤경에 빠진 안나를 죽음으로 돌아가는 불길하고 모호한 상황들. 좀처럼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일들. 어떤 색깔, 갈색이 도는 엷은 자주색 립스틱을 찾는다면. 양배추 잎 뒤에 숨은 새끼 고양이를 발견한다면. 배를 벗어나 뭍에 오르는 길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여러 남자들의 조합. 얼굴과 정체가 뒤섞인 남자들이 안나의 몸을 위협했다. 주머니칼로 그녀를 으르며 인적이 없는 뒷골목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앞으로 닥칠 재앙을 경고했다. 그리고 그녀의 꿈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덜컹덜컹 흔들리는 기차.-책속에서




 

 이리나 레인이 사용하는 단어는 안나를 향할 때는 혼란스럽게 좌초되는 배처럼, 알렉스에게 가해질 때는 공무원이 꾸민 공문의 첫 페이지처럼, 데비드를 향할 때는 답답한 짐꾼을 볼 때 짜증 나는 회초리처럼, 카티아를 그릴 때는 순진무구한 시절의 지젤처럼, 레프를 묘사할 때는 적당히 타협하는 한강 이남의 회사원처럼 독자에게 다가온다. 

 서서히 베일을 들어 올리지 않고 단번에 확연히 모습을 드러내어 독자를 사로잡는 안나의 모습처럼, 이리나 레인은 독자들의 호기심과 이미 알려진 플롯의 재구성을 통해 안나 카레니나에 관한 가치판단을 다시 한 번 미룬다. 이 소설 전체를 통해 독자는 자신이 만나보지도 않은 안나를 들여다보게 되는데, 처음에 안나는 창백하도록 흰 피부에 검은색 모피 코트를 입고 발끝을 살짝 밖으로 틀고 흐트러짐 없이 우아하게 걸으며 무대에 등장한다. 물론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눈빛을 하고서. 




 그러다가 나중에는 관자놀이가 쿵쿵 울리고, 심플함을 드러내기 위해 늘 점점 더 힘들어하고, 조심하라는 말에 조금 물러나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혈색과 걸음걸이, 몸매와 눈빛이 등장하다가 언젠가부터 우리가 보는 안나는 실루엣이 아닌 형체로 굳어진다. 

 정지된 것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가려는 시도. 이것은 이리나 레인의 안나가 소설작법에 관심을 두었고, 계속 데이비드에게 자신을 소설 속에서 숨쉬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일치한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너무 멀리 나가지 말자고 다짐한 다음 이 소설을 다시 들여다 보면, 이리나 레인의 안나 카레니나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톨스토이의 그것과는 다른 양상을 강조한다.




 이리나 레인의 안나 케이는 안나가 행하는 행동, 안나가 하는 말에서 그 모든 의미를 끝맺지 않는다. 외려 안나가 겪는 사건을 읽는 이가 마음속에서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현대 뉴욕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 나를 비롯한 다른 이가 낱말 하나하나를 읽어나갈 때마다 새로운 의미가 있다. 그리고 살짝 생기는 기대와 예측, 호기심. 안나 카레니나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었는데 여기서도 그럴까? 하고 생각하다가도 '그녀는 오일릴리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시간과 공간이 달라졌음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막힌 벽, 여전히 높은 천장, 여전히 낮은 바닥에 안나가 부딪힐 때마다 작가는 닫힌 문장이 아닌 허물어진 기대감을 의도했을 것이다. 




 어떤 종류의 글이든 읽을 때의 기대감과 읽은 후의 실망이 반복되는 리비도의 곡선이 그려질 때, 독자에게 어떻게 작품을 읽어야 할지, 더 나아가서 작가의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관찰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리나 레인의 안나 케이를 읽노라면 독자는 좀 더 확실한 지식을, 명확한 진실을 원하지만 읽기 경험을 통해 늘 기대는 좌절되고 희망은 꺾이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모든 읽기가 쓸모없는 것일까? 오히려 독자 앞에 조용히 놓인 문장은 그 어느 것도 명확하거나 법률처럼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쌓아나갈 읽기에 관한 경험이 더 값진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오독, 읽기에 따르는 여러 가지 어려움, 해석을 해나가는 데에 생겨나는 여러 과정, 이런 모든 것이 독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리나 레인은 안나 케이를 통해, 다시 쓰기를 통한 읽기의 방법을 제시한다. 독자의 안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경험을 살짝 보여줌으로써 톨스토이의 아난 카레니나는 완전무결하거나 이미 원작에 존재하는 것과 같이 유일무이하지는 않아도, 다양한 방법으로 읽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롭지 않다 하여도 읽기의 한 갈래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보면 아주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한 조각. 

그리하여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다른 누군가의 안나 카레니나의 자리를 비워둔다. 







 "대단하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삼십 분도 넘게 기다렸네."

 안나는 노란 선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그 위에 섰다. <데일리 뉴스> 1면에 나오면 어떻게 될까? 신문을 읽는 데이비드, 비통에 잠긴 레프의 모습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갔다. 신문에서는 제일 아름다운 사진, 알렉스를 만나기 전, 어쩌면 서른다섯 번째 생일 케이크 앞에서 촛불을 끄는 사진을 쓸지도 모른다. 길쭉한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머리를 귀 뒤로 넘긴 그 사진. 무심결에 찍힌 사진이었는데, 물이 올라 봉오리를 터트리기 직전의 튤립 한 단을 몸 속에 품은 것처럼 눈동자가 반짝였다. 카티아의 소개로 데이비드를 만났던 신년 파티의 사진이라면 더 좋겠다. 악수를 나눌 때 데이비드의 눈 속에서 봤던 그 여자, 그의 잔에 비쳤던 그 여자, 검은 옷에 부드러운 홍조를 띤 그 여자의 사진이면 좋을 텐데.

 터널 안에서 불빛 두 개 어렴풋이 빛났다. 이렇게 쉽다니, 제대로 한 발만 디디면. 선택, 결정, 도약. 그런데 정말 할 수 있을까? 승강장 밖으로 오른발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터널을 막 벗어나려는 6번 노선의 녹색 동그라미가 깜빡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조심하세요, 부인." 조금 전에 옆에서 말을 하던 남자였다. "너무 앞으로 나가셨네요."

 그래서 조금 물러났다. 그녀의 몸은 지시를 따르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그랬다가 다시 끌린 듯 그 자리로 돌아갔다. 전철은 빠른 속도로 진입하면서 두 개의 흰 전조등으로 그녀를 강렬하게 비췄다. 생가갈 시간, 가능성을 타진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늘 따지기만 했고 자기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에 지쳐버렸다.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닌, 영원한 연옥. 좀 솔직해지자. 퀸스에 가면 뭐가 될까? 아이오와에서는? 지금은 뭐지? 필요한 것은 찰나의 선택, 근육을 움츠렸다가 스스로 뛰어올라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것.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옳은 선택을 할 거야.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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