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러비드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그것은 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나쁜 꿈을 잊듯 그녀를 잊었다. 자기들의 이야기를 만들고 다듬고 꾸미고 나자, 그날 현관에서 그녈르 보았던 사람들은 일부러 재빨리 그녀를 잊어버렸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살고 사랑에 빠졌던 사람들은 잊는 데 더 오래 걸렸다. 그러나 그녀가 했던 말을 한마디도 기억하거나 되풀이할 수 없게 되었고, 자기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도 그녀를 잊어버렸다. 기억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어디서, 혹은 어째서 웅크리고 있었는지,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그 물속의 얼굴이 누구의 얼굴이었는지 그들은 영영 알지 못했다. 그녀의 턱밑에 난 미소에 대한 기억이 남았을지도 모르지만 남지 않은 곳, 그곳에는 걸쇠가 걸렸고, 그 금속 걸쇠에는 이끼가 푸른 사과 빛깔의 새순을 붙여놓았다. 빗물이 빗발친 자물쇠를 손톱으로 열 수 있겠다는 새악을 그녀는 대체 어떻게 했을까?


그것은 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 시간을 나누고 쪼개지 않고 사는 여자.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과거의 악몽, 잔인한 미래에의 상상 대신 오늘을 사는 세서의 이야기. 악몽과 상상 중 어느 것도 택할 수 없는 지점에서 쓰임새 없이 노래하는 글자들. 그 글자들은 글씨가 되어 나를 오랫동안 휘감았고 나는 그 무용한 것들이 도리어 유용해지는 물결을 지켜보았다. 강물이라면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을 것이었고 바닷물이라면 그래서 도리어 영원히 달이 이끄는 순환에 몸을 맡겼을 것인데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는 이것이 강물도 파도도 아닌 그 속에 발을 담근 사람의 이야기였다. 강물의 흐름과 파도를 지나쳐 그 안에 발을 담근 사람을 보는 힘. 나는 그것을 토니 모리슨의 도도한 문학적 성취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과 그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





 작가의 상상력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사건으로부터 이러한 들여다보기가 시작되었다.

 1856년, 켄터키 주 노예 마거릿 가너는 도망 끝에 노예 사냥꾼과 보안관에게 붙잡히기 직전, 두 살짜리 딸을 칼로 베고 다른 자식도 죽이려다 실패한다. 체포 후 재판에서 예상 밖으로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형사법과 재산법의 갈등이었다. 마거릿 가너를 인간으로 보고 살인죄를 적용하여 처벌할지, 아니면 도망노예법을 적용해 잃어버린 재산으로 간주, 무죄방면할지를 고민했다는데 마거릿 가너 본인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녀는 끝까지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죽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자유를 찾아주다가 노예의 삶을 피하는 차선으로 아이를 죽이는 마거릿 가너의 이야기는 흑인이 신문지상에 나타날 수 있는 접점, '아무것도 아닌' 것과 '유혈이 철철 넘쳐 차마 눈뜨고는 못 볼' 것의 중간 지대에 있어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는데, 이것이 어쩌면 제도와 권력의 맹점이 아닐까. 이 눈먼 지대에 가장 먼저 있는 것은 제도. 토니 모리슨이 그녀의 인터뷰에서 지적하듯, 노예제는 무척 예측 가능한 무엇이다. 노예제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이 오히려 작가에게는 걸림돌이 된다. 제도가 있었고, 이런 일과 저런 일이 있었고, 이것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토니 모리슨은 무척 진실하게 탐구했던 것이 분명하다. 





작가의 머리와 마음을 거쳐 손끝으로 나온,

그 목소리는 이러한 것들.


죽은 아기들의 원혼으로 가득한 집.

어느 날 돌아온 아는 남자.

그 남자를 맞이하는 도망 노예 여자와 그녀의 딸.

그 여자가 생사를 알 수도 없는 그녀의 남편.

결혼식 없는 그들의 결혼식.

남편이 평생의 돈을 내어주고 자유를 얻어준 그의 어머니.

어느 날 돌아온 그 남자는 몰랐던 그 여자의 살인.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손금도 없이 빛을 뿜는 빌러비드.





 형용사 빌러브드가 명사 빌러비드로 변하는 순간, 이야기는 빛을 발한다. 

 이 빛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세서, 결혼식도 없는 결혼을 하고 여자 흑인 노예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일을 겪고, 즉, 살아남기를 자처하며 딸 덴버를 낳고, 덴버가 어머니와 죽은 아기 언니를 지켜보는 일. 

 하늘이 파랗거나 검은데 피부가 없는 사람이 물 위에서 다리 위에서 왔다가 사라지고 좋은 몇몇 백인이 있으나 나머지가 남은 일. 이 사이를 훑는 것은 토니 모리슨의 열정과 질척거림을 없앤 형용사와 동사, 명사다. 그것은 그저 증오에 차거나 그저 결의에 찬 것이 아니다. 그 안의 모든 단어가 발버둥 치거나 소실점을 향하여 가기만 했다면 이 소설은 하나의 한풀이에 그쳤을 텐데, 마지막까지 그러지 않는다. 





124번지는 한이 서린 곳이었다. 갓난아이의 독기가 집안 가득했다. 그 집 여자들은 그걸 알고 있었고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동안은 각자 나름대로 원혼을 견디며 살았지만, 1873년에 이르자 집에 남은 희생자는 세서와 그녀의 딸 덴버 뿐이었다.





 소설의 첫머리를 여는 것은 124번지. 그 집은 작가의 시선이 열리고 독자의 마음이 머무는 곳인데 하나의 숫자로만 나타난다. 

나는 모르지만, 그녀들은 알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실이 열린다. 

다른 곳에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이곳, 이 특별한 집은 124번지이다. 



 소설의 첫 시작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다. 소설이 집이라면 모두가 드나들고 가장 크고 육중한 대문이 있을 것이다. 곁문이나 뒷문이 따로 있을 수도 있다. 별채가 있을 수도, 헛간이 있을 수도 있다. 독자는 초대장을 들고 그 집 대문을 통해 정원을 걷고, 현관문을 열고 집주인의 얼굴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토니 모리슨은 처음부터 집 대문을 쉽게 열어주지는 않는다. 작가의 시선이 집의 특정 부분을 보여주었다가 감출 때, 독자는 필연적으로 많은 정보를 얻는 쪽을 더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알 수 없는 124번지, 갓난아이의 독기, 그 집 여자들, 세서, 덴버라는 정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 때, 독자는 이 소설을 읽으려면 나름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 어떤 형용사도 없는 124라는 숫자 앞에서 자기 집 주소를 가진 흑인이 가질 당당함, 123번지나 125번지와 다를 무엇을 느끼기도 전에 드러나는 것은 한이 서린, 갓난아이의 독기, 이런 설명이다. 무엇도 아닌 나름의 '특징'을 가진 집. 언어가 가는 그 길을 벗어난 언어로 이루는 문학에는 제도가 아닌 인간이 서 있다. 일상을 느끼고, 그 일상이 깨어지거나 부서지는 것을 보고, 그 혼란을 딛고 일어나려 애쓰고, 어떻게든 무서운 기억을 잊으려 애쓰고, 소중한 것을 지키려고 노력도 해보고, 기억이 가하는 생생한 협박에 무릎을 꿇기도 하는 한 개인의 경험. 통제하면서 놓아주는 일. 노예 생활 이전에 개인의 경험. 그 생각의 생생한 무서움과 두려움, 재갈을 물려도 생생해지는 눈빛, 애써 가져오려 했던 귀고리, 아기에게 불러주는 자장가, 그런 것. 





 세서에게 미래는 과거의 접근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그녀와 덴버가 살고 있다고 믿는 '더 나은 삶'이란 단순히 과거의 삶이 아닌 삶이었다.

 폴 디가 바로 '그 과거의 삶'에서 튀어나와 그녀의 잠자리로 기어들어왔다는 것도 더 나아진 일이었다. 그와 함께하는 미래, 혹은 그가 없다 해도 미래라는 생각 자체가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기 시작했다. 덴버를 위해서도, 세서가 해온 대로 여전히 그애를 기다리고 있는 과거부터 그애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했다.





마거릿 가너 사건이 대표하는 역사성에서 출발한 소설가 토니 모리슨은 그 한 여자를 책임감, 자유, 위치, 본질, 의미를 찾아낸다. 세서는 모든 것을 아는 여자, 하나의 열쇠 구멍이었다. 빌러비드라는 열쇠가 매끄럽게 들어가서 여는 잠긴 문이기도 했다. 맞는 열쇠를 찾을 것. 작가의 끈질긴 펜은 변명도 수치도, 당당함 마저 없이 아주 자명하게 모든 것을 고스란히 떠맡는 세서를 보여준다. 자식들에게 같은 삶을 되풀이하게 할 수 없어서 자식의 머리를 붙잡고 톱질을 할 수밖에 없는 엄마. 가너 부인에게 결혼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묻는 노예 여자. 학교 선생이라 불리는 노예 주인에게 수치스러운 취급을 당하는 노예 하나. 폭행, 성폭행, 매질을 당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녀는 커졌다가 줄어들고, 티끌만큼 작게 사라졌으나 없어지지는 않는다. 세서의 생각은 매우 단호했다. 자유가 지금과 같이 너무나도 당연해서 촌스럽게까지 들리는 지금에 와서 판단하건대 세서 이전의 마거릿 가너는 토니 모리슨의 판단처럼 '지성과 잔혹성, 그리고 자유에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불사할 의지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그녀 앞에 빌러비드가 나타난다. 묘석에 디얼리 빌러브드 를 새길 수 없어서, 십 분 동안 몸을 허락하고 빌러브드라고만 새긴 묘석의 주인공이 나타나던 날, 세서는 죽도록 오줌이 마려웠고 양수가 터지듯 오줌 줄기를 뿜던 그때 빌러비드는 사막을 건너온 듯 물을 켠 다음 죽음에 가까운 잠을 잔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만 바라볼 수는 없는 관계. 한쪽이 다른 한쪽을 죽였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파괴적인 관계. 그 관계의 사슬이 마침내 끊어지고 빌러비드가 진짜 빌러비드가 되는 것은, 세서의 얼음송곳이 빌러비드가 아닌 울타리 너머 아른거리는 모자를 향할 때였다. 단 하나, 도무지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이 간절했을 뿐이다. 자식에게 무서운 기억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자식의 목을 향했던 톱이 그 날을 다른 쪽을 겨눌 때, 이것은 기억하기 위해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잊기 위해 들려주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바깥, 뉴욕 타임즈와 1987년 했던 작가 인터뷰를 보면 아래와 같은 회답이 드러난다.





''There are certain emotions that are useful for the construction of a text, and some are too small. Anger is too tiny an emotion to use when you're writing, and compassion is too sloppy. Almost everything that makes you want to write, or feel like writing, is not useful in the act of writing. So it's the mediation between those two states, the compulsion and all those feelings, that make you compelled.''


"소설을 구상할 때 몇가지 유용한 감정이 있지만 어떤 것은 너무 작아요. 분노는 글을 쓸 때 너무 사소해 보이고 연민은 질척거리죠. 사람들이 쓰고자 하거나 아니면 쓰고 싶어하는 거의 대부분은 사실 글을 직접 쓸 때엔 그리 유용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대부분의 느낌과 충동 사이를 잘 조절할 때 글이 나옵니다."

-토니 모리슨, 1987년 8월 26일, 뉴욕 타임스 인터뷰.




 육천만 명 혹은 그 이상. 소설의 앞장에 있는 그 숫자 앞에 생략된 단어는  devoted to 이기도, written by이기도 하지만 그 숫자는 어떠한 단어 없이도 오롯이 혼자서 그 힘을 다한다. 내쫓고 내쫓기지만 요요처럼 돌아오는 역사 앞에서, 그 과거가 미래로 연결되는 것은 오로지 세서가 과거의 정면으로 부딪쳐 자기 힘으로 돌파해 나가는 순간이다. 아기 유령처럼 불쑥불쑥 찾아와서 들여다보기만 해도 거울이 깨지고, 케이크 위에 작디작은 손자국 두 개가 찍히는 과거. 읽고 나면 세서의 텅 빈 눈빛 뒤로 작은 의문이 떠오른다. 

 당신에게는 그런 과거가 없습니까?



 


 이것은 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124번지 뒤로 흐르는 시내 근처에는 그녀의 발자국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 발자국은 아주 친숙하다. 아이든 어른이든 발을 대어보면, 꼭 맞을 것이다. 발을 빼면, 마치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것처럼 발자국은 다시 사라진다. 

 곧 모든 흔적이 사라지고, 발자국뿐 아니라 물과 그 물 아래 있는 것 전부가 잊힌다. 남는 건 날씨뿐이다. 기억에서 지워지고 행방이 묘연한 이들의 숨결이 아니라 처마를 스치는 바람, 혹은 너무 빨리 녹는 봄의 얼음이다. 그저 날씨뿐. 물론 키스를 바라는 아우성도 없다.


Beloved.








따옴표 속 인용은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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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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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나는 망명정부의 라디오 채널 같은 존재로 살았다. 소설가가 원래 그런 직업이라고 믿었다. 국경 밖에서 가끔 전파를 송출해 나의 메시지를 전하면 그것으로 내 할 일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2012년 가을에 이르러 내 생각은 미묘하게 변했다. 제대로 메시지를 송출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사는 사회 안으로 탐침을 깊숙이 찔러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본 것, 듣는 것, 경험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가 김영하의 새 산문집 '보다'는 크고 작은 일, 흘려보내는 순간, 무심한 풍경에 관한 생각.

 

 

 멀리서 바라본 어떤 지점의 먼지 한 톨 같은 이야기들.

 

 

 그 접점의 단어로 마무리된 조심스러우면서도 책임감 있는 생각.

 

 

 시간과 공간의 물리성을 어느 곳보다도 직접 체험하게 되는 순간에서 흘러나온 시선.

 

 

 

 

 

 

 작가의 말에서 그는 이상하게도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한국에서는 굵직한 사건이 터졌노라고 말하는 데서 오는 공감각은 어떤 접점에서 나타난 것일까.

어쩌면 자리를 비울 때마다 하필 굵직한 사건이 터지는 게 아니라 늘 굵직한 사건이 터지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때마다 그렇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상대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 '마침 네 생각 했는데!'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생각의 지속과 연락의 일시성이 만난 것일 뿐, 그 사이에는 어떤 연관도 없다. 이러한 지속성과 일시성이 만나는 지점을 파고들어 본다.

 

쉬운 문제. 아는데 모르는 그 지점에서 사람은 무언가를 본다고 착각하는 것일 게다.

김영하가 스치거나 파고들고 싶었던 부분은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너무나도 무심히 보아넘기는 풍경.

쉴 새 없어서 외려 눈 돌리게 되는 정보.

망명정부에서 추락 우주선으로의 변화.

 

모르는 게 약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북소리는 멀리서 들으면 즐겁지만 가까이서 들으면 시끄럽다. 이러한 잠언과 격언 사이를 오가는 시선.  물리적인 필터를 거쳐 보고 듣는 것에서부터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고 또다시 그에 대한 반응을 추스르는 것으로 정리했다. 

 

 

 다시 말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 우리는 정보와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고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시간. 흐르는 것과 쌓이는 것. 모으는 것과 빼앗기는 것.

목숨의 값. 모두의 목숨이 같지 않은 상황.

상황의 변수. 타인을 연기하기는 그토록 쉬운데 자신을 연기하기는 왜 그리도 어려운지.

자신이 사라진 후의 혼자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정적을 두려워하는 인간.

다시, 시간과 공간. 그 속을 김영하의 눈이, 본다.

 

 

 

 소설가의 눈과 에세이스트의 눈이 다름에서 오는 묘한 격차. 왼쪽 눈과 오른쪽 눈 안압이 달라 펼쳐지는 풍경의 생경함. 소설가의 에세이를 읽노라면 이런 안압 차이가 느껴진다. 무용함과 유용함을 오가는 시선. 김영하가 바라보는 대상은 당시 사람들이 많이 보던 영화이기도 하고, 해외 신문에 오르내린 가십이기도 하고, 택시법과 관련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시아나 항공의 사고를 이야기하다 그는 부자들이 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지, 택시법이 어떤 연유에서 논란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택시 이야기를 잠시 들어본다.

 

 

 

 

 합승이 사라진 것은 단속 때문이 아니라 택시가 흔해졌고 대중교통이 나아졌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의 상대적인 성공으로 위축된 택시업계는 스스로 대중교통이 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런 논리로 정치권을 압박했고 거의 먹혀들 뻔했다.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한 것이다. 그런데 여론조사를 보면 택시를 이용하는 대중 다수가 그 법을 반대했(그 여론을 믿고 이명박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고 국회로 돌아간 법안은 재의결되지 못했다). 그 법의 내용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택시=대중교통'이라는 산법을 대중이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책속에서

 

 

 

 이 높음과 낮음, 오른쪽과 왼쪽의 차이에 관해 그는 소설 '퀴즈쇼'에서 쓴 적이 있다. 돈으로 환산한 이야기. 돈은 가장 명확한 존재임을, 어제 볼 땐 오백 원이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천 원 같기도 하네'가 아니라 오백 원은 오백 원이고 천 원은 천 원이라고 말함으로 관점과 실재하는 실체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면, 이번에는 상황의 변수와 역설을 풀어나간다.

 소설 장르를 빌어 미학적인 판단 말고는 모든 것을 유보하는 입장을 택했다면 이번 에세이에서는 유용한 것을 무용하게 바라보는 소설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형식의 틀에서 내용의 속을 벗겨내는 방식으로 글을 들여다본다. 소설가로서의 김영하가 구름 저 너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지상을 묘사했다면 에세이스트로서 김영하는 그 길을 육로로 건넌다.

 뱃길과 사막길을 건너는 그 시선에서 모래바람이 서걱거린다. 

 

 

 

 

잠시, 그가 인용한 오르한 파묵. 

 

 

 

 

 

  꿈을 꿀 때는 그 꿈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꿈이니까요. 우리는 소설도 진짜라고 생각하며 읽습니다. 하지만 머릿속 한구석에는 그렇지 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모순되는 상황은 소설의 본질에서 옵니다.  소설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

-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멀리서 떨어져서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양식의 글을 씀으로 김영하가 노린 것은 처음 자전거를 탈 때의 그런 느낌일 것이다. 약간은 무섭고 떨리지만 일말의 설렘이 담긴 일. 구태의연한 것, 익숙한 것을 거리를 두고 익숙하지 않게 바라보는 일. 그리하여 존재를 똑바로 바라보는 일. 직면과 통찰. 책임감 있는 시선. 깊은 생각 끝의 결론. 이것을 그는 영화 '그래비티'를 통해 이야기한다. 방금까지 웃고 떠들던 동료와 얼굴 없는 시체 사이의 우주만큼의 간극. 그것을 들여다본 이후에서야 왜 할로윈 축제에 해골바가지 모양의 호박이 나오는지, 중세 수도사들이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을 짝으로 여겼는지, 무엇보다도 유한한 인간이 무한함 앞에서 버틸 수 있는지를 스스로 알 수 있다. 

 

 

 

 일시성과 지속성, 없음과 있음, 다른 것과 같은 것마저도 없는 지금 눈앞의 상황을 제대로 보기를 권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책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러고 나면, 밑줄이 아닌 각주의 책.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심하게 내버려둔 존재, 가장 무지한 존재가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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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신화 - 클래식 음악의 종말과 권력을 추구한 위대한 지휘자들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김재용 옮김 / 펜타그램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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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의 눈은 오케스트라 전체를 응시한다. 모든 연주자는 지휘자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고 느끼고, 여기에 더해 자신의 소리를 듣는다고 느낀다.  ... 지휘자는 연주자 개개인의 마음 속에 있다. 그는 연주자들 각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모든 면에서 살아 있는 법의 화신이다. 그의 손은 명령하고 금지한다. ... 연주가 진행되고 있을 때에는 작품 외에 아무 것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연주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만큼은 지휘자가 세계의 지배자가 된다.-책 속에서, 엘리아스 카네티. 





 연주하지 않고 작곡하지 않으면서 창조에 버금가는 행위를 하는 느낌을 주는 존재. 전제를 통제하고 확장하면서 소리를 만들어 가는 존재. 뭔가를 만든다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존재. 노먼 레브레히트의 거장 신화는 이러한 '지휘자'라는 이야기를 하는 책이다. 읽노라면 황색의 전통을 바탕으로 검은색을 덧칠하려 애썼다는 느낌이다. 





 오래된 이야기. 그러나 오래지 않은 이야기. 
 이것은 앞으로 올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이야기. 
 사건, 상황, 말, 그리고 소리. 노먼 레브레히트는 데일리 텔레그라프, 이브닝 스탠다드, BBC RADIO 3 등을 거친 음악 평론가이자 소설가. 날카로운 귀와 황색 언론의 뒷말이 어우러진 그의 '거장 신화'를 읽노라면 흡사 주방의 뒷이야기를 다룬 앤서니 보뎅의 '키친 컨피덴셜'을 읽는 듯한 느낌이다. 고전 음악을 듣는 이라면 솔깃, 고전 음악을 듣지 않는 이라면 흘깃, 넘길 수 있는 이야기들. 최초의 지휘자 한스 폰 뵐로가 지휘하다 발등 찍어 괴사로 사망하게 된 이야기부터 나치에 어중간하게 협력하느라 애먹은 푸르트벵글러, 음반 시대의 황제 카라얀을 거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클라이버와 텐슈테트, 현재 베를린 필을 지휘하는 사이먼 래틀까지를 아우른다. 그 사이에는 오로지 자신들만의 이익을 생각하며 그 자체로 움직이는 빈 필하모닉, 아직도 험난한 길을 가는 여성, 흑인 지휘자 이야기가 조금씩 스민다. 그리고는 마침내 지휘의 종말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 도톰한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잔무늬와 큰 물결이 어우러져 어떤 존재를 조망하지만, 명암을 적절히 덧붙여 지루하지 않은 책.




 과장과 축약, 비약과 해명을 듣노라면 그것은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소리의 이미지,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려울 것이라는 추측, 모른다는 편견, 관심 없다는 단정을 벗어나 요즈음 지켜보기 힘든 시간의 흐름을 떠올린다. 오랜 시간 한자리에 앉아 4악장에 이르는 교향곡을 듣는 이들이 줄어든다. 한 장에 이만 원 가량 하는 음반은 이제 박스반으로 바뀌어 장당 몇천 원의 가격에 구할 수 있다. 복각과 리마스터링을 거친 음반 속에는 그러나 몇 년도인지 어디에서, 누가, 누구와 함께했는지 하는 정보가 빼곡하다.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호오의 감정에 그칠 것이니 그만큼 위험한 것이 어디에 있나. 이 책은 그 중에서도 '누가' 했는지에 관한 물음에 답하는 길고 긴 해명 글이다. 그들은 누구이길래 악단의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사이먼 래틀이 지금처럼 유명해진 것은 유명하지 않은 악단에서 최고의 연주를 뽑아냈기 때문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종종 지휘자를 앞에 세워두기만 할 뿐, 자신들 마음대로 연주할 때도 있다. 어떤 이들은 불굴의 논리를 꺾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소리를 매끄럽게 완화한다. 그것은 청중이 사랑하는 소리일 때도 있고, 음반사가 좋아하는 소리일 때도 있다. 노먼 레브레히트가 말하듯 지휘자는 요청을 수락하고, 조건을 받아들이고, 컨디션을 조절한다. 이것은 홀로 만든 것일까, 누군가가 애써 만든 것일까?





 막상 포디움에 섰을 때에는 자신의 작품을 훌륭하게 지휘하지는 못했던 베토벤, 최초의 지휘자 한스 폰 뵐로, 무력에 맞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를 넘는 것에 맞선 토스카니니, 누구보다도 따뜻한 모차르트를 들려주지만 인간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브루노 발터, 나치 행사에서도 연주했지만 유대인 단원들을 구하려는 헛된 노력을 했던 푸르트벵글러, 제왕이 되고 싶었던 카라얀, 'DO YOUR WORST'라고 말하며 오케스트라와 가까워졌던 토머스 비첨, 그 자체로 뉴욕이었던 번스타인. 이들이 만드는 것은 음악이지만 음악은 종종 그 자신만으로 어떤 길을 가는 것은 아니라고 노먼 레브레히트는 평범하고 무난한 어조로 말한다. 거장의 목록은 책 뒤의 색인으로 충분하다. 대신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휘의 속성을 파고들어 지휘자로 은유할 수 있는 사회, 정치, 경제, 문화의 지렛대이다. 그리고 저자 자신이 밝히듯 그 지렛대를 이야기하는 목소리에는 일체의 아첨도, 완곡한 미사여구도, 맹목적인 신격화도 없다. 이를테면 이러한 대목처럼.




로제 문하 중에서 고아가 된 어느 여성 바이올리니스트가 뮌헨의 리허설에 참가하려고 했지만 발터는 말러 친구들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이 여성의 참가를 거절하였다. 발터는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여 유명인에게는 특권을 주었지만, 오만하게도 젊은 음악가나 고생하고 있는 작곡가의 어려운 상황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발터와는 대조적으로 말러는 재능 있는 젊은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했고,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가족이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기도 다. 쇤베르크는 "발터는 훌륭한 지휘자다." 라고 인정했다. 그는 오랫동안 공표되지 않았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하지만 사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는 항상 역겨운 돼지처럼 탐욕스러운 사이었다.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난다." 많은 풍자화에서 발터를 이렇게 돼지에 비유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발터의 예술에 감탄했던 동료들도 그의 성격은 경멸했다. 발터가 친구라고 주장했떤 토스카니니조차도 그를 '감상적인 바보'라고 불렀다. 



 발터는 아름답게 지휘했다. 서정적이고 우아하게 모든 선율적인 요소를 강조했고, 전주곡에서는 중세적 분위기를 확립하였다. 4주 뒤 나는 클렘페러가 이 작품을 쾰른에서 공연하는 것을 들었다. 전주곡의 처음 여덟 마디부터 완전히 달랐다. 클렘페러의 지휘는 매우 엄격했고, 개인적인 억양은 완전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클렘페러의 연주에서는 발터가 이 작품에 불어넣었던 서정적인 표현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마치 이 곡이 조스캔 데프레가 작곡한 곡인 것처럼 연주했다. 발터와 클렘페러의 두 연주는 모두 놀라웠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지휘자가 음악의 사운드와 타일에서 엄청난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베르톨트 골드슈미트






 이 두 상반되는 단락은 훌륭한 지휘자가 반드시 훌륭한 인간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카라얀과 번스타인은 어떤가? 음반사가 좋아하는 매끄러지는 듯한 사운드를 보여주기 직전의 카라얀의 60년대 베를린 필과의 녹음을 들어보면, 카라얀과 오케스트라가 역동적으로 만들어내는 의욕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함께 협력해서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공동의 느낌, 함께 쌓아올린 노련하고도 세련된 느낌. 그 뒤의 약간의 거리감이 점점 더 벌어지기 전까지도 카라얀은 분명 브루노 발터가 보여준 가짜 페르소나를 구축한 것이라고 노먼 레브레히트는 지적한다. 인공적으로 만든 이 느낌은 음악 세계가 진짜와 허상으로 나뉘어 있으나 그 둘이 꼭 일치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또는 카라얀이 떠난 다음 베를린 필하모닉이 그들의 다음 지휘자로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선출한 것을 보노라면, 오케스트라는 자신의 취향과 상황을 무기로 외부에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카라얀의 이전은 푸르트벵글러였고 이후는 아바도였다. 푸르트벵글러와 아바도는 묘하게 닮았음을 노먼 레브레히트는 지적한다. 아바도는 자신의 기호를 내보이지도 않았고 개인의 권리를 존중했다. 한마디로 카라얀과 정반대였으며, 베를린 필하모닉의 차기 지휘자 선출에 가장 놀란 사람은 아바도 자신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예상 밖의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카라얀 사운드가 어떤 것이었던가. 공격성, 균일함, 매끄럽고 고장 없는 독일 자동차 같은 이미지의 카라얀 사운드는 마지막까지 그의 리허설이나 녹음의 세부적인 사항을 관찰한 리카르도 샤이가 남긴 말을 통해 전해진다.




 오케스트라의 음질을 매일같이 탐구하는 그의 모습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상임 지휘자로 30년 가까이 있은 뒤에도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학생처럼 취급하였고, 어떤 구체적인 효과를 성취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다. 그는 오케스트라가 자신들의 고유한 소리를 내는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날 그 날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수정해 가면서 자신이 원했던 효과를 향해 사운드를 조정하고 구체화했다. 그는 왼손의 중지로 허공을 어루만져 부드러, 즉 비단 벨벳의 질감을 얻어 내었다. 그 순간 바로 그만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베토벤의 교향곡 전집을 네 번째로 녹음하던 때 그는 세계 각지에서 이 곡들을 연주한 뒤였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고 활기에 찬 연주를 위해 한 소절 한 절씩 연습시켰다.



 

 이 책의 전반을 덮는 것은 이러한 음악사에 남은 인물들의 평가와 비평, 남겼던 말, 작은 글귀 한 조각들이다. 동료 음악가의 전언이 남겨 줄리니는 성인이 되고 토스카니니는 폭군이 된다. 카라얀은 독재자가 되고 발터는 이중인격이 된다. 그러나 그 큰 흐름에 있어 지휘자가 남기고자 했던 개성 있는 음향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증언하는 날카롭고 예민한 귀가 들려주는 소리는 이 책의 장점이다. 

 음악은 모든 것과 동떨어져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아니다. 지휘자의 출현이 교향악과 맞물렸지만, 그 에움길은 정치, 사회와 떨어져서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 중에는 예외도 있고 필연도 있다. 매끄러운 도치치 사운드를 원하던 나치의 꼬리표를 떼어내려 안간힘을 쓴 카라얀, 쉬운 언어와 화려한 감상을 원하던 뉴욕이 사랑한 번스타인의 오케스트라를 들어보면 시대가 사랑하는 지휘자의 특성이 대표하는 그 시간이 느껴진다. 




 노먼 레브레히트는 이 책을 통해 번스타인은 교향곡을 연주회장에서 지휘하며 익혔고, 해석이 화려하면서도 피상적이었다고 평가한다. 뉴욕타임스의 해럴드 숀버그는 번스타인이 피아노를 치며 지휘할 때 그의 테크닉을 반복해서 비난했고 전통적인 고정 관객은 그가 무대 위에서 펄쩍 뛰는 모습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는 매력적이고 능변이면서도 부유했고, 모범적인 가정을 꾸렸다. 한마디로 그는 미국이 원하던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기술적인 결함을 보완해 가면서 숀버그조차도 '자신의 천성적인 화려함을 잃지 않고도 색채는 물론이고 악구 내에서의 자유는 물론 구조적인 완성도도 갖추고 있다'라고 평가를 바꾸었다고 한다. 그는 말러의 분열된 모습, 어떤 특징도 찾을 수 있고 모든 해석이 가능하며 정반대의 특징도 똑같이 나타난다고 평했는데, 이는 번스타인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지휘는 작은 새 같아서 꼭 쥐면 날아가 버린다는 콜린 데이비스의 말이 사실일 것이다. 꼭 쥐지 않고 자신 그대로 행하는 것이 지휘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대로'라는 것은 그 홀로 존재하기 힘든 것인지도.





노먼 레브레히트는 지휘자의 탄생에서 죽음까지를 짚는다. 지휘가 왜 필요했는지, 어떻게 그 많은 지휘자가 나타났다가 오디오 시대를 형체를 달리하는지, 나치, 뉴욕, 영국 지휘자의 오랜 공백, 다른 세계에서 온 지휘자들을 거쳐 음반 업계의 구조, 지휘자들 연봉과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살림을 꾸려나가는지 까지를 짚는다. 그 뒤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로널드 윌포드와 성장을 억지로 멈추게 된 젊은 지휘자들의 모습도 있다. 줄어든 공급, 높아진 요구 등을 거쳐 노먼 레브레히는 카라얀과 번스타인 이후 지휘자 자신의 이름만으로 5천 장의 음반을 팔거나 티켓을 매진시키는 지휘자는 없음을 이야기한다. 물론 이 책을 썼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어떠한가.




1990년대 말 지휘자들의 이러한 정체성 위기는 리허설 룸에서 녹음 스튜디오까지, 버스턴에서 베를린까지 클래식 공연의 모든 영역을 휩쓸었다. 연주회장은 저반도 차지 않았고, 새로운 음반도 얼마 팔리지 않았고, 정부는 보조금을 삭감했고, 클래식이라는 좋은 음악에 대한 애정은 속물적이고 시대착오적이고 현실과 유리된 것이라며 폄하 당했다. 미국의 한 텔레비전 프로듀서가 호의를 갖고 어느 유명 지휘자를 한산한 시청 시간대에 출연시키려고 하자 방송국 사장은 전화기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 "그따위 놈을 내 방송에 나오게 할 수는 없어! 시청자들은 그런 프로그램 따위는 보지도 않는다고." 그 어떤 미디어의 거물도 토스카니니에 대해서 감히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 지휘계의 위기와 클래식 음악의 쇠퇴 사이의 연관성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20년 전 한스 폰 뷜로와 아르투르 니키슈가 해의 독립을 주장했던 이래, 지휘자는 조직화된 음악 활동의 가시적 상징으로 군림해 왔다. 가시성은 실무적이고 윤리적인 리더십의 책임을 반한다. 미국의 지휘자 건서 슐러는 자신의 풍부한 사상을 담은 책 '완벽한 지휘자'에서 지휘자의 이러한 책임을 '미학적 도덕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즈음이면 책의 앞부분에서 언급한 베르톨트 브레히트 희곡의 한 단락이 다시 떠오른다. 

 영웅이 없는 삶은 불행하다는 대사에 이은 한 단락. "아닙니다. 영웅이 필요한 곳이야말로 불행한 곳이지요."




 이 책은 1991년의 저작이며, 끝에는 한 단락이 더 있다. 그 마지막 단락의 마지막, 마지막의 마지막 말은 솔티의 작별 인사이다. "클래식 음악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지휘자의 출현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를 평범한 언어로 이야기한 야심과 노력의 연대기. 때로는 권력을 위한 개인 욕심의 남용이기도 하고 때로는 미학적 결단이기도 하여 음악에 부쳐 따로 생각해볼 만한 부분. 이 책은 고전 음악을 이해하는 절대 좌표가 될 수도 없고 판단의 근거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을 듣는 행위에 있어 지도는 될 수 없을지언정 작은 쉼표는 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 음악은 저 홀로 있을 수도 있지만, 외따로 떨어져 천상에만 울려 퍼지는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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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7 1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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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글쎄, 녹스는 것보다는 낡아서 못 쓰는 게 낫지! 그리고 난 사실 놀라울 정도로 건깅해. 감사할 따름이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루이틀 아무 일 없이 생각이나 하며 지내는 것도 참 괜찮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블란치가 말했다.

 조앤은 웃음을 터뜨렸다. 구슬이 굴러가듯 작고 유쾌한 소리였다. 

 "생각거리야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조앤이 말했다.

 블란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지은죄에 대해서라면 언제든 생각할 수 있지!"

 "맞아, 그래." 조앤은 내키지 않았지만 예의상 맞장구쳤다.

 블란치는 그녀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너라면 그 일을 오래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러고는 인상을 쓰면서 불쑥 말을 이었다. 

 "그러다 선행에 대한 생각으로 넘어가겠지. 그리고 네 인생에 주어진 축복들을 생각할 테고! 흠......모르겠다. 좀 지루하지 않을까. 궁금하네......" 블란치는 잠깐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



 사람이 사는 시간이 모여 한 채의 집으로 눈에 보인다고 상상해 본다. 바닥을 반듯하게 만들고 고른 막을 입힌다. 철근과 콘크리트로 뼈대를 세우고 벽을 세운다. 어떤 벽은 외벽이 되고 어떤 벽은 칸막이가 될 것이다. 지붕은 안전하게 머리 위에 있고 바닥은 발아래. 그러나 그 외의 것. 이를테면 창문이라든지 커튼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집에는 굴뚝이 있나? 페치카가 있을까? 빅토리아 시대의 구조인가, 혹은 바우하우스의 입김이 서렸나? 무엇보다도, 사람의 삶이 한 채의 집이라면 모든 집에 다른 색을 입히는 특별한 개성, 영혼의 울림 같은 창의 위치와 크기는 어떻게 이렇게 제각각일까? 그 창문을 우리는  옳고 그름의 영역에서 볼까, 아니면 아름답고 추함의 영역에서 바라볼까? 




 애거서 크리스티가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여섯 편의 소설 중 한 편, '봄에 나는 없었다'를 읽노라면 이런 두 가지 영역이 조용히 서로 스미는 것이 느껴진다. 소설의 구조라는 측면에서 만나는 미추의 미학적 구조와 영역, 주제라는 측면에서는 가치판단의 영역. '타인을 자신의 잣대로 넘보지 말지어다'하는 명상과도 같은 잠언을 넘어서는 소설의 주제. 물론 작가가 빠른 속도로 쌓아올린 이 메시지를 책장을 덮고 나서는 머리에 보관할지 마음에 보관할지 손끝에 보관할지는 읽는 이의 몫으로 남겨두었으니, 이는 소설가가 꿈꾸는 최후의 마침표가 아닐까. 그 마침표는 주인공 조앤이 기차에서 만나는 동창 블란치와의 대화로, 그녀가 회상하는 어떤 사건으로, 낯선 곳에서 쓰는 편지로 마침표 이전의 안개로 조용히 쌓이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바버라에게

 이번 여행에는 별로 운이 따르지 않는구나. 월요일 저녁 기차를 놓쳤고, 여기서 며칠 발이 묶일 것 같다. 하지만 평화롭게 햇볕이 좋아서 난 무척 행복하단다.


조앤은 손을 멈췄다. 이제 무슨 말을 쓰지? 아기? 아니면 윌리엄의 안부? 바버라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던 블란치의 말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그래! 블란치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블란치는 바버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척 이상하게 굴었다.

 마치 바버라의 엄마인 조앤이 딸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바버라는 걱정하지 마. 이제 괜찮을 거야."이 말은 바버라가 그때까지 괜찮지 않았다는 뜻일까?




 기차를 기다리며 낯선 곳에서 발이 묶인 중년의 여성 조앤의 생각이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구불구불한 비단길처럼 사막을 헤엄치다가 어느 순간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일평생 하지 않던 일, 뒤돌아보기를 거쳐 마침내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까지 알아가는 길을 애거서 크리스티는 속도감 있게 드러낸다. 쓰는 이의 펜 끝에서 이루어졌던 속도감이 읽는 이의 눈 끝에서 기분 좋게 겹치는 순간. 추리 소설이 아닌 서정 소설의 외피를 썼지만 추리 소설 작가로서 발휘하는 겹겹 쌓인 단어가, 이 책은 애거서 크리스티였던 여자 메리 웨스트매콧의 책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앞서 나온 어떤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앞서 나타났던 징조가 끝부분에 다시 나타나니, 독자는 서둘러 책장을 넘기다가도 앞으로 다시 돌아가 그 낱말, 그 단어, 그 목소리를 마침내는 다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독자가 경험하기 전 이미 조앤이 경험했던 일. 즉 그 생각의 구불구불한 길에서 언뜻 마주치는 첫모습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런던에서 멀지 않은 한적한 타운, 성공한 변호사의 아내 조앤. 정원을 잘 가꾸고 봉사활동을 하며 삼남매를 둔 중년의 여자. 성공한 변호사인 남편 로드니, 일찍 결혼한 에이버릴, 최근 중병에 걸렸으나 조앤의 간호를 받았던 바버라, 변호사가 되지 않은 것이 좀 아쉽지만 하고 싶은 농장 일을 하는 토니. 




 그렇다면 이런 대화는 어떨까. 

 





 "빌어먹을 사무소!" 로드니가 투덜거렸다. 

 "아, 로드니, 당신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무소를 싫어하지 않아요."

 "아니, 난 싫어해. 오 년 동안 거기서 일했다. 내 마음이 어떤지는 내가 똑똑히 잘 알아."

 "적응할 거에요. 게다가 이제 사정이 다르잖아. 아주 달라요. 파트너 변호사가 되는 거니까요. 그리고 결국은 업무에-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관심을 갖게 될 거에요. 두고봐요, 로드니. 결국에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질 테니까."

 


 타인의 감정을 멋대로 판단하는 이상한 대화라고만 보기에는 더 많은 무엇을 담은 단락이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속단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읽는 이의 머릿속에는 분명, 다른 정체가 불명확한 어떤 도마뱀이 드나들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조앤이 애써 막고자 했던 생각의 어떤 흐름이 독자에게도 스며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부분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어둠 속을 빛이 가로지른다면, 그 빛이 우리의 삶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어둠이 곧 우리의 진짜 모습은 아닐까? 이러한 의문을 품다 보면 마주치는 길 끝. 결국, 문제는 나머지 밝혀지지 않은 어둠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가 아닐까? 




 미궁에 갇힌 이가 손끝에 잡은 가느다란 실 처럼 애거서 크리스티가 내미는 실낱같은 의혹을 따라 이 책을 읽어내려가 보면, 공간과 사유가 어우러진 미묘한 이중주가 드러난다. 그러나 이 이중주는 짝수가 아닌 홀수이며 협화음이 아닌 불협화음이다. 또한, 피아노와 목소리로만 허공을 떠돌다가 어느 순간 목소리만 남아 물방울처럼 귀를 조심스레 두드린다. 




 그 물방울은 불쑥 왈칵 조앤의 마음을 두드린다. 도마뱀은 물방울이 만든 구멍을 드나든다. 사막에 고립되어 생각 말고는 할 것이 없는 조앤은 머릿속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허물었다가 세우고, 그림자를 바라보고 그 허무한 그림자 속을 걷게 된다. 생각은 물살처럼 흔들리고 특별한 것이 없어도 묘한 느낌을 준다. 자신이 기억한다고 믿었던 사건과 실제 있었던 사건이 다르다는 것을, 애거서 크리스티는 조앤이 바라보는 신기루를 통해 가장 간단하고 단순한 비유로 읽는 이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소설 중반에서 조앤이 신기루를 보며 신기루 하면 나무나 마을이 떠올랐지만, 지평선 너머 물살이 묘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훨씬 더 구체이고 생생한 무엇이라고 깨닫는 장면을 이야기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블란치가 했던 말이 허공을 떠돈다.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




 다시금 떠오르는 이 말은 인간이 얼마나 얄팍한지, 그리고 사람이 제각각 얼마나 다른 생각의 층위를 지녔는지를 말하는 중요한 실마리이기도 하다. 조앤과 같이 세상을 규정한 바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지닌 규율, 의무, 가치, 판단, 소속감이 세상 한 부분의 지축을 지탱한다면 블란치와 같은 이가 어느 순간 갑자기 드러내는 삶의 다양한 층위, 드러나지 않았던 어두운 부분이 다른 한 부분을 떠받치고 있을 것이다. 혹은 조앤의 남편 로드니가 드러내는 삶의 진실, 존중, 통찰력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제대로 바라보는가 하는 것인데,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 문제에 관해서는 무척 비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바위섬이 모래의 성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구조를 레고 블럭처럼 하나씩 쌓아올려 조앤이 만든 것이 실은 커다란 허무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겪었던 사건을 하나하나 해체하면서 보여준다. 스러지면서 일으켜 세우는 한 사람의 어떤 집.




 그리고 마침내는 그녀의 변화를 독자가 기대하는 찰나 로드니의 슬픈 혼잣말이 들린다. 꼭 그래야 한다는 필연, 인간이 자기 삶을 온갖 변수로부터 보호하려는 통제력, 자신의 삶을 안전함으로 도배하려는 오만함.

그 이전에 의식 밑바닥에 깔린, '판타지'로 분류하는 빛이 비치지 않아 보이지 않는 부분이 조앤에게는 안전한 삶으로 존재한다. 타인의 겉을 보고 속을 판단하려는 자의 치기 어림을 이야기하려 했다면 이 이야기는 조앤이 마침내 성찰 끝에 다시 기차를 타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왜 하필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런 대화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일까?




 에이버릴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영국과 독일이 전쟁을 벌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조앤은 정신을 차렸다.

 "기차에서 만난 부인도 그런 말을 하더구나.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어. 아주 지체 높은 부인인데,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아는 듯했어. 난 믿기지가 않는구나. 히틀러는 감히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거야."

 "글쎄요, 모르죠......" 에이버릴이 생각에 잠겨 대꾸했다.

 "아무도 전쟁을 바라지 않는단다, 얘야."

 "네, 하지만 사람은 때로 바라지 않던 일을 당하기도 해요."

 "나는 이런 대화가 몹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을 집어넣거든." 조앤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에이버릴은 미소만 지었다. 



 소설 속에서 남편 로드니가 세익스피어의 소네트 구절을 물어볼 때 머뭇거림 없이 전 소절을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암송하던 것도 조앤, 에이버릴이 유부남 의사와 사랑에 빠졌을 때 어른의 단순한 지혜로 에이버릴을 뜯어말리던 사람도 조앤, 로드니가 레슬리를 잘 도와주는 것에 흡족해하던 것도 조앤.

 소네트를 그렇게 암송하고 시와 소설을 탐독하면서도 작가가 숨긴 뜻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던 것도 조앤, 에이버릴이 그토록 탐닉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 실체에 관해서는 조금의 통찰력도 발휘하지 못했던 사람도 조, 실은 로드니가 레슬리를 그토록 사랑했으며 자신에게는 넌더리가 났다는 사실에서 도망치던 것도 조앤.




 이 끝에 드러나는 얕은 한숨이 로드니의 것이라는 것이 독자로서 슬프다면, 아, 다시 탄식. 




 어떤 이에게 성찰은 공간을 옮겨가거나 상황을 급반전시켜야만 가능해지기도 한다. 조앤이 사막에 가서야 자기가 도망쳐왔던 진실을 마주할 때 변화를 감지했건만 집에 돌아가서는 다시 밝고 유능하며 분주한, 성공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조앤을 볼 때 나오는 로드니의 중얼거림은 곧 독자를 향한 것이었다. 책장 속의 조앤은 그렇게 특출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당신을 닮은 사람입니다.' 라고 애거서 크리스티가 펜을 내려놓으며 하는 혼잣말이 들리기에 독자는 다시금 의심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진실과 감당할 수 있는 허울이 만나는 지점이 어디인지 우리는 잘 판단해야만 하지만, 이것 역시 관성의 테두리를 벗어나기가 힘들다.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그는 행복한 사람이리라. 







-따옴표는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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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팻 캐바나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남쪽에서 부는, 남서쪽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에식스로 가게 됩니다. 북해를 횡단하려면 바람이 줄곧 서쪽에서 불어줘야 하지요. 하지만 프랑스로 가려면 바람 북쪽에서 불어줘야 하는데, 그런 바람이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다가 변덕스러워서요."



 곧 잃고

 곧 쓰러지고
 다시 잃을 것이었다가
 나는 그러나 이미 잃었음을 깨닫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 줄리언 반스의 작품.



 줄리언 반스의 'levels of life'는 그러한 길에 올라선 여행자의 한숨. 



 영국 맨부커상과 프랑스 메디치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학상을 휩쓴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의 작품을 떠올려 본다. 
 늦가을과 초겨울의 중간 온도의 사랑 이야기. 혹은 세상에 없는 이의 그림자. 모든 것이 허물어진 후 도착한 끝의 시작, 삶과 이 세계가 이끈 교집합과 합집합.

 

 

  

 사랑을 이야기할 때 느끼는 관계의 심연(내 말 좀 들어봐). 글쓰는 사람이 풀어야 하는 숙제(플로베르의 앵무새).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자신의 갈 길을 갈 때 인간이 느끼는 울먹거림의 회한, 그 다양한 층위(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그의 글에는 단어의 분명한 뜻과 장르의 다양한 얼개, 통찰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글 대부분은 '팻에게 바친다.'라는 헌사로 시작했다. 



 헌사의 주인공 팻 카바나가 단 한 번도 등장하 않는, 그녀 뒤에 남겨진 줄리언 반즈의 이야기.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라는 한글 제목으로 나온 'levels of life'는 영국을 대표한 문학 에이전트이자 줄리언 반스의 평생의 문학적 동지인 팻 카바나의 죽음을 읽는 줄리언 반스의 지도이다. 양피지에 쓰인 모르스부호와도 같은 지도. 겪지 않은 이는 볼 수 없다. 알 수 없는 자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내 팻 카바나가 죽은 다음 줄리언 반스가 남긴 자취를 '언젠가 내게도 이런 불상사가 생기면 참조해야겠다'라고 간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나도 검은 양복이 필요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위도와 경도의 자취. 아무런 도움도 주고받을 수 없는 고립된 자의 말소리.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 그러면 세상은 변한다. 사람들이 그 순간을 미처 깨닫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세상은 달라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닥칠 것에의 예언.
 이미 겪은 일의 기록. 
 이야기 세 개가 이 픽션-논픽션에 있다. 

 '비상의 죄'에서는 사진과 비행을 함께 시도하여 땅 위의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본 풍경을 선사했던 나다르의 이야기가, '평지에서'로 페이지를 넘기면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와 모험가이자 군인인 프레드 버나비의 가상의 사랑 이야기가. 그다음 이어지는 '깊이의 상실'에서 반스가 하는 이야기가 팻 카바나의 것이다. 이 마지막 챕터에 이르면 앞서 우리가 바라본 하늘과 땅이 지하로 연결된다. 이 챕터 세 개, 이야기 세 개, 커플 세 쌍이 우연을 되풀이한다. 그림자의 춤이 겹쳐서 줄리언 반스와 팻 카바나의 손을 이끈다.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사라 베른하르트와 프레드 버나비가 언젠가 기구에 올라타듯, 첫 번째 이야기의 나다르가 사라 베른하르트를 사진기에 담듯, 나다르가 헌신적으로 아내를 간호하듯, 반스가 카바나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듯. 




 '팻에게 바친다.'로 시작하여 2012년 10월 20일 런던에서 줄리언 반스'로 끝맺는 기억.
 그 기억 도중, 반스는 여전히 죽은 아내와 장난을 친다. 죽은 아내는 도로 그에게 장난스러운 말을 건넨다. 두 사람은  뭔가를 나누고, 서로의 존재를 이끈다. 죽었으나 여전히 나타나 장난스레 그림자를 잡아채다 사라지고 몇몇 지엽적인 이야기 속에서 여전히 팻은 떠돌고 있다. 그녀는 곧장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반스를 통해 나타난다.
 죽은 그녀의 그림자는 집안 곳곳에, 그가 숨 쉬는 공기에 머문다. 그녀는 죽었으나 죽지 않았고 그는 살았으나 살아있지 않다. 



 살아있는 사람이 먼저 죽은 이를 땅에 묻고 나서 느끼는, 자신도 모를 어느 공간의 이야기. 읽노라면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파스칼 키냐르가 떠오른다. 중심도, 길도, 역사도 존재하지 않는 자기 생을 느끼는 일. 뒤섞인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하나에 흡수되어 어떤 글도 쓸 수 없는 때를 살아가는 일이라고 뒤라스가 말했었다. 저 세상은 여기처럼 견고하지 않아, 당신 나룻배는 이미 썩었지만 바람 말고는 만질 것이 없다고 말했던 마랭 마래의 죽은 아내가 파스칼 키냐르의 손끝에서 슬며시 빠져나왔다. 이 지독한 상실 한 묶음 앞에서 위로는 길 잃고 기억은 더욱 난폭해진다. 견고해서 난폭하고 난폭해서 날카로워지는 미래의 역사. 



우리는 사라 베르나르가 빗방울 사이를 피해 다닌다고 주한 것처럼 총알 사이를 피해 다닌다. 그러나 언제나 느닷없이 목을 찔러오는 창이 있게 마련이다. 모든 사랑의 이야기는 잠재적으로 비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몇 가지 층위가 서로 스며들어서 세 번째 이야기,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에서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들린다. 비탄이 바꾸는 시간의 길이와 공간의 영속성. 반스가 말하는 상실의 사막, 무심의 호수, 황무지가 된 강, 자기연민의 습지, 기억의 (지하)동굴. 반스는 이 지도를 가지고 선 자는 누가 더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내장이 더 많이 파열된 쪽이 누구인지의 문제도 여기서는 중요치 않다고 말한다. 오로지 부조리함 밖에 느껴지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반스가 내세운 메타포는 첫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나다르가 카타콤에서 찍은 사진, 두 번째 이야기의 소파 쿠션을 집어삼켜 총에 맞아 죽은 보아 뱀이었으나 결국, 그 자신은 메타포조차 필요치 않은 경우임을 느낀다. 이전에는 아내의 것이었던 열쇠고리에는 집 현관 열쇠와 묘지 뒷문 열쇠가 있다. 그것을 보며 그는 '이게 내 인생이야.'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꿈속으로 내려가고, 또 기억 속으로 내려간다. 그렇다. 예전의 기억은 과연 돌아온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우리는 두려움을 배우고, 다시 찾은 기억이 원래 그대로인지 확신할 수 없다. 어떻게 똑같을 수 있겠는가. 당시 거기 있었던 사람이 더 이상 확증을 해줄 수 없게 되었는데. 우리가 한 것, 우리가 간 곳, 우리가 만난 사람들, 우리가 느낀 감정을. 우리가 함께하게 된 사연을,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씻겨가고 이제 '나'만 남았다. 쌍안경의 기억은 단안경이 되었다. 



 상실의 슬픔 앞에서 아니 에르노는 애간장이 끓는다, 마음이 벼랑에 내몰린 것 같다, 이런 표현을 떠올린다. 줄리언 반스는 프랑스어로 이미 죽은 팻의 안부를 묻는 이에게 답하면서 '내가 이걸 이제 프랑스어로까지 말해야 한다니.' 라고 생각한다. 지독한 아픔을 느낀 이가 혼자가 아님을 떠올리는 아니 에르노와 이런 상황에서조차 유머 감각을 발휘하는 줄리언 반스 중 누가 더 낫다고 할 것인가. 앞서 말한 비교가 쓸데없이 지는 지도인데. 위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어제가 오늘인가, 내일이 어제였던가. 휘청이고 들끓다가 땅속으로 푹 꺼지는 이 지도를 들여다보면 언젠가 바람이 내 속에서 멈추었던 날이 있기나 했었나 의아해진다. 한 사람이 겪는 고통의 깊이가 궁금해진다. 곧, 무엇이든 알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건만 막상 알고 나면 고개를 젓는 존재 역시 인간이 아니었던가.




 균형, 속살, 끝. 놓치지 않는 기억 한 자락.

 

 

 

 이 책의 감정적인 중심이면서도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천칭 같은 무게중심을 잡는 챕터가 가장 마지막 챕터임을 마지막 장에 이르른 독자라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앞서 하는 이야기 두 개는 물론 어떤 이들의 앞선 경험은 기름과 물처럼 겉도는 것이 아니라 수채화의 덧칠처럼 함께 어우러지고 스미는 것임을, 반스의 나지막한 음성이 이야기한다. 반스는 애도와 슬픔의 위험한 매혹까지 붙잡는다. 신중하게 선별해서 조심스레 드러나는 명확한 감정과 또렷한 표현. 이 책이 술자리 돌림노래 같은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 제 나름의 의미를 드러내는 힘은 바로 이런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우주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는 우주가 그렇게 끝낸 일의 부산물이다. 어쩌면 비탄 또한 그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그 아픔과 싸웠고,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슬픔을 극복했고, 우리의 영혼에서 녹을 긁어냈다고 생각하지만, 그 모든 일이 일어난 때는 비탄이 다른 곳으로 떠났을 때, 자신의 관심사를 다른 데로 돌린 때이다. 우리 쪽에서 먼저 구름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며, 우리에겐 구름을 흩어지게 할 힘도 없다. 그 모든 건 어디선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예기치 못한 산들바람이 갑자기 불면서 일어난 일일 뿐이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이끌려가고 있는가? 에식스로? 북해로? 만약 이 바람이 북풍이라면, 그래서 운이 좋으면, 우리는 프랑스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따옴표 글은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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