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now Child (Paperback)
Eowyn Ivey / Little Brown & Co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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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bel said. "As fantastic as it all sounds, I know the child is real and that she has become a daughter to us. But I can't offer a single bit of evidence. You have no reason to believe me. I know that."

 메이블이 말을 이었다. "듣기엔 이상해 보이겠지만 난 그 애가 진짜라고 생각해요. 그 애는 진짜이고, 우리에겐 딸이나 다름없어요. 물론 그걸 에스더 당신에게 확인시켜줄 방법은 하나도 없어요.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




 지난 세기의 알라스카, 눈과 얼음의 땅, 아이 없는 부부가 눈이 오는 날 밤 눈사람을 만들고 외투와 모자를 씌워준다. 그 다음 부부를 찾아오는 어린 여자아이. 그 여자아이와 함께 다니는 작은 여우. 


 



 환상과 현실이 섞인 이 허구에 앞서 소설은 어떻게 소설 속의 세상을 직조해 내는 것인가, 회의감과 궁금함이 생긴다. 대형서점의 수많은 책 속에서, 헌책과 새 책, 떨이로 파는 책과 신간 속에서, 헌책방의 두툼하고 편안한 쿠션이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서 순간 설핏, 들었던 이천사백 년도 더 된 의문. 소설은 무엇일까.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작은 이야기'라는 정의를 중학교 문학 시간에 들은 이후 이 작은 이야기에 한눈을 파는 나는 드라마 팬과 다름없었다. '걸 온 더 트레인'의 레이첼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망설였고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렇다면 문학 속의 소설이, 이 작은 이야기는 대체 왜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간질거리게 하는 것일까.





 잠시 다시 눈을 돌려 에오윈 아이비의 스노우 차일드를 다시 읽는다. 장마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 '스노우 차일드'의 도입부 내지는 말미가 있다. 그 어느 것도 그저 행복하기만 하거나 그저 슬프기만 하지는 않는다. 눈의 결정처럼 어느 순간 나타났다 어느 순간 사라지는 아이. 동화와 민담에서 출발한 이 이야기는 '사라지는 아이'라는 점에 계속 주목한다. 에오윈 아이비의 이야기하는 입술이 주목하는 것도 그 부분이다. 단어와 단어가 눈 위에 작은 발자국을 찍고, 여우가 그 발자국을 따른다. 에오윈 아이비의 단어와 문장은 지극히 조용하고 고요해서 가장 격동적인 순간, 남편 잭이 눈길에서 크게 다치고 메이블이 집안을 일구어 나가는 장면에서조차 통나무 집 안에서 바깥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눈이 사각사각, 회오리가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남는 것은 다시 거대한 백색의 눈. 





 "frost...and snowflake... turned to flesh and bone."

  "얼음, 눈 속에서 나타난 생생하게 살아있는 아이."





 메이블이 어느 순간 눈 속에서 나타나 봄과 함께 사라지는 아이, 파이나를 이렇게 보며 꿈꾸는 사이 잭은 파이나의 눈 속에서 부모가 죽고 혼자 살아남아 살아가는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이미지는 다시 생생하게, 백조를 사냥하고 죽이는 파이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백만 가지 눈의 결정을 하나씩 보여주듯 에오윈 아이비의 이야기는 파이나의 다른 모습을 조금씩 보여준다.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이 전부가 조금씩 움직여 조용히 켜켜이 쌓인 눈밭을 보기 전까지, 독자의 눈이 보는 것은 사각사각 눈이 밟히는 알래스카의 겨울 풍경이다. 





 그 겨울이 호흡하는 것은 눈의 아이, 파이나의 숨결. 에오윈 아이비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삶의 접점과 맞물린다.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짜 살아있는 삶일까. 알래스카의 몰아치는 눈, 폭풍, 굶주리는 겨울이 빚어내는 풍광은 이상하게도 그곳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 먼 곳이 어느 순간 창문을 열면 성큼 다가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눈과 얼어붙은 강물, 숲과 산, 그리고 야생동물이 빚어내는 리듬감일 것이다. 그 리듬을 느끼다 보면 어느 순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소녀가, 멀리서 울부짖는 야생 곰이, 겨울이 오면 자취를 감추는 야생 딸기가, 오븐에서 겨울을 버티게 하는 파이와 약간 한기가 도는 부엌 식탁 위에 놓인 따뜻한 차 한 잔과 수프가 눈앞에 펼쳐진다.





 읽다 보면 추워지는 이야기, 슬픈 이야기. 어느 순간 현실이 이와 같다고 여기다보면 생각지 못한 순간에 작가는 자신이 직조한 언어의 짜임으로 놀라운 스타카토를 만들어 낸다. 에오윈 아이비는 고요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알래스카의 창밖 묘사를 시작으로 독자의 경계심을 풀어낸다. 민담과 동화가 섞인 눈의 아이 이미지를 곳곳에 넣어 진짜 눈의 아이 파이나를 만들어 낸다. 처음 파이나를 발견하고 자신의 아이로 생각하는 메이블과 나중에 파이나와 사랑에 빠지는 가렛의 파이나를 대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말미, 파이나를 대하는 두 사람의 방식이 다른 방향에서 몰아치는 눈보라 같은 갈등을 일으킬 때조차 두 사람의 반응은 모두 가능케 한다. 메이블은 파이나를 눈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그가 숨 쉴 수 있도록 얼어붙은 겨울 바람 속에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렛은 파이나를 따뜻한 피가 온몸을 돌고 숨결이 조용한 사람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메이블은 파이나를 품는 어머니이며 가렛은 파이나를 객체로 보는 인간인데, 에오윈 아이비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고 독자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애매한 중간을 선택하게끔 종용하지도 않는다. 테리 이글턴의 말처럼, 비극에서 중도가 제공되는 일은 극히 드물어 마땅하다. 





 결국, 이것은 모두 문학의 일이다. 인물을 다루는 작가의 부분적인 방식들이 구조를 이룬다. 독자는 잭, 메이블, 파이나, 에스더, 가렛 등에게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사건을 위에서, 그리고 아래에서 양옆에서 살펴보게 된다. 이야기의 구성은 단순하지만, 작가는 독자에게 쉴 틈이 생기면 눈의 아이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독자는 파이나가 사람을 경계하지만 자연 속에서는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아이이며 메이블이 자기 죽은 아이를 그리면서도 파이나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 잭이 아버지 같은 태도로 파이나를 대하는 것을 쉽게 알아차린다. 이것이 눈의 아이 민담, 동화와 이 소설의 묘한 상충관계를 일으켜낸다. 독자는 눈의 아이 민담에서 어떤 단락이 오든 간에 그것이 비극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에오윈 아이비의 이 소설에서도 그럴 것인가? 소설 끝에서 파이나가 인간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와 함께 생활을 꾸려나갈 때까지도 독자는 살짝 의심을 거듭하게 된다. 그간 작가가 파이나를 묘사할 때마다 사용한 단어는 눈, 서리, 안개, 눈 폭풍우, 차가운 공기 등이며 파이나와의 모든 대화에는 따옴표가 없다. 한마디로 작가는 문학의 많은 언어를 자기의 것으로 활용한다. 





 이 작은 이야기를 읽으며 에오윈 아이비가 성글게 쌓은 눈사람같은 이야기를 읽노라면 앞서 생각했던 의문이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그가 이야기하는 형식을 따른다. 소설의 이야기는, 문학의 내용은 언어와 분리할 수 없는 경험이다. 언어가 도구로 전락하는 가구 조립 설명서 같은 실용문과는 달리 문학에서의 언어는 핵심이자 본질, 실체이다. 파이나, 라고 말할 때의 파열음이 눈의 조각처럼 느껴지고, 내뱉는 숨이 차가운 알래스카의 공기처럼 느껴진다면 실로 묘한 일이다. 그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데 어느 순간 작가는 그 이름 안에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지를 생각하게끔 한다. 동화와 실제가 실재하는 마법같은 이야기. 읽고나면 차가운 겨울, 12월 밤이 생각나는 알래스카의 이야기.



 Jack and Mabel gasping for breath. The moon lit up the entire valley, gleaming off the river ice and glowing on the white mountains.

 Let's keep going, Faina whispered, and Jack, too, wanted to skate on, up the Wolverine River, around the bend, through the gorge, and into the mountains, where spring never comes and the snow never melts.


 잭과 메이블은 숨을 몰아쉬었다. 달빛이 언덕 전체를 뒤덮어 하얀 산과 얼어붙은 강이 어슴푸레 빛났다. 

 계속 가요. 파이나가 속삭였다. 그리고 잭 역시, 스케이트로 계속해서, 울버린 리버를 지나, 옆으로 살짝 꺾어서, 협곡도 지나서, 산 속으로, 봄이 결코 오지 않고 눈이 절대 녹지 않는 곳으로. 그런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읽다 보면 쉼표와 숨표, 녹아버린 따옴표와 공백이 서리처럼 녹아내리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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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서점 주인이 되었습니다 - 빈의 동네 책방 이야기
페트라 하르틀리프 지음, 류동수 옮김 / 솔빛길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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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서점 밖으로 나오니 모든 게 허황된 꿈만 같았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래서?" 남편이 물었다.

 "뭐가 그래서?" 내가 물었다.

 "당신은 어땠어?" 

 "끔찍해. 당신은?"

 "나도 그래."

 "그럼 뭐."

 침묵.

 "그런데 잘만 꾸미면 작품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그래. 하지만 살림집 말이야. 그건 아무래도 안 되겠어."

 "어째서? 크고 멋짐 살림집이 될거야! 생각해봐, 포장실에는 부엌을 들이는 거야. 그리고 책상이 있는 큰 사무실은 밥 먹는 방으로 만들자고. 복사기가 있는 곳은 텔레비전을 보는 작은 방으로 괜찮을 것 같아. 암실은 욕실로 만들고. 그렇게 하고도 우리 침실과 아이들 방으로 쓸 작은 방 몇 개가 남아."

 "말도 안 돼."

 "그렇다는 거지 뭐."





 취미와 직업이 일치하는 것은 일종의 판타지. 노래를 잘 불러 가수가 되고 악기를 잘해 연주자가 되고 책을 좋아해서 책을 쓰거나 팔고, 커피를 좋아해서 커피를 만들어 판다는 이야기는 마치 구운몽의 한 가닥 같다. 그 자락이 어떤 것일까. 밥벌이의 고단함, 입속의 단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일터의 마감 앞에 닥친 막막함 같은 것. 그런 것 한 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이 책을 집어 드는 독자의 절반은 이 책의 장르를 절반 정도는 착각했을거라 생각한다. 회고록 VS  판타지.





 어느 날 빈에 사는 친구네 집에 갔다가 작고 오래된 서점 하나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접한다. 

 폐업하는 작은 서점, 이 말을 듣노라면 가지치기를 하는 많은 낱말이 떠오른다. 인터넷 서점, 수요와 공급, 마감, 매출, 원리금 상환까지.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의 세계에 과감히 발을 들이미는 저자의 모습은 그러나 서점 운영의 길잡이 대신 서점 운영의 재미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내 인생 최대의 실수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해?' 등의 말이 오가지만 서점 운영을 해보지 않았으나 흥미를 느낀 독자 앞에서 저자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우리는 일에 파묻혀 살았다' 였다. 


 



 곧, 이 책은 서점 운영의 ABC 대신 자기 사업을 하고 아이도 키우고 남편을 거느리는 오스트리아 출신 여자의 작은 미소. 자기 서점을 갖고 있다는 자만심이 넘쳐나 '아무리 그들이 열심히 일한다 한들 빵의 성분표를 읊어대는 것 말고 다른 것이 있을까?'라고 말하며 맞은편 베이커리를 얕보기도 하고, 자기는 몰랐던 서점 직원의 또 다른 생활을 얕잡아 보기도 한다. 처음 면접을 했을 당시 자신의 두 번째 정체성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자기도 별로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는 것이 아니라 말할 필요를 못 느꼈으니까. 굳이 필요없이 직함을 나열하는 저자의 글 쓰는 태도를 보아 하면, 이것은 어쩌면 직함 자체에 집착하는 오스트리아인의 국민성일까, 저자 개인의 특성일까, 사뭇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이 책의 태도는 '조금 거만하면서도 즐거운 서점 운영자의 회고록'에 기본을 두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쩌면 이는 사람들의 각기 다른 표정만큼 다르고 또 다른, 책과 서점을 대하는 태도 중 일부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최근 나온 다양한 서점 관련 책들을 보노라면, 어떤 책은 서점을 살짝 홍보하거나 자랑하기도 하고, 어떤 책은 동네 책방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또는 자기가 돌아본 서점 여러 군데를 가이드북처럼 소개하기도 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서점 경영인으로서의 자존심, 자만심, 긍지를 자기 생활 공간에의 소개로 포장해나가는 것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는 갑자기 일터에서 일에 파묻혀 살게 되었다. 서점 뒷방을 우리 주거 공간과 연결해주는 회전 계단은 우리 삶의 중심축이 되었다. 처음에 우리는 그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목이라도 부러지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하지만 우리는 곧 그 철제 구조물을 다람쥐처럼 재빨리 오르락내리락하게 되었다. 아침이면 커피 잔을 손에 든 채로, 낮에는 커피를 새로 끌이거나, 세탁기를 돌리거나, 아니면 점심 식사를 하러 그 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했다. 남편이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거나 딸이 친구네 집에서 잘 때면 나는 한밤이 되도록 바깥 날씨가 어떤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출근하려고 저고리를 입을 필요도, 차를 탈 필요도 없었다. 또 어떨 때에는 신발 신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오븐에서 닭고기가 익어가고 있으면 맛난 냄새가 서점으로까지 퍼지곤 했다. 그러면 손님들은 유난히 행복해 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방사선과 의사 친구네 아이들이 매주 한 번 우리 집에서 잘 때면 아이들 나름의 의례가 있는데, 그때 이 회전계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녁을 먹고 이를 닦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나는 세 아이와 함께 두꺼운 양말을 신고 그 계단을 지나 서점으로 내려갔다. 서점에는 작은 야간용 조명만이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손을 더듬으며 아동도서 코너로 갔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각자 잠자리에서 읽을 책을 한 권씩 골랐다. 나는 아주 조용히 그 책을 아이들에게 읽어준 다음 아침이 되면 다시 서점에 반납하곤 했다. 





 집과 연결된 서점, 집에서 커피를 끓여 서점에 들고 오고 일하는 도중 집안일을 처리하기도 하고, 그러던 중 이웃들이 점심이나 저녁을 요리해서 갖고 오기도 한다. 그러다가 저자의 남편은 서점 일을 함께하다가 빈에 일자리를 잡기도 하고 아이들은 조금씩 자란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종종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남에게 추천하는 것을 즐기곤 하는데, 저자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책을 파는 사람이 하는 추천은 매상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독서를 좋아하는 이의 관점에서 멀리 갈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종종 조심스러워지곤 한다. 이를테면 '읽기가 좀 까다로운 것이 좋은가요, 아니면 재미있는 통속소설이 좋은가요?'라고 묻기도 하고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 분인가요?'라고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산 분들은 oo에도 관심을 보입니다'라고 보여주는 인터넷 서점의 서비스와 차원이 다른지는?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으므로 설득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책을 추천했다가 막상 아니다 싶어 고객에게 밤늦게 '책 계속 읽지 마세요! 모두 다 죽어요. 개까지요!'라고 문자를 보내는 저자의 모습을 보노라면 자만심과 애정은 이렇게 어우러질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밤늦게 술을 마시고 귀가하다가 서점 하얀 차양막 위에 쌓인 눈을 단골손님과 함께 치운다든지, 뭘 좀 드셔야 할 텐데, 라고 말하며 집에서 구운 빵을 갖고 오는 손님을 본다든지, 혹은 '책을 전혀 안 읽는데, 추천해주실 책이 있나요?'라고 말하는 손님에게 책을 한 권, 두 권씩 추천해 주고 책 이야기를 함께 나눈다든지, 이런 경험담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게다가 무대는 성탄절이면 책을 서로에게 선물해서 12월에 매출이 급증한다는 빈, 오스트리아. 치명적인 단점, 자만심과 치명적인 장점, 애정이 두루두루 섞인 서점 주인 이야기.





할 일은 끝없이 더 계속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 우리로 하여금 그냥 계속 일을 하도록 추동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다른 모든 것은 지루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서점같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가게에 대해 한 주에 한 번, 서점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이 나오는 이 시대에 계속 서점을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달리 남은 게 없기에. 우리는 더 잘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우리는 다른 것은 차라리 하고 싶지 않기에.




덧-그런데 어쩌나. 난 이 책을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다른 책을 구경하다가 '이 책을 구경하신 분들이 다음 책도 구입하셨습니다.-by 추천마법사' 코너에서 보고 주문하여 읽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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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6-03-2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싫어요. 서점이 없어지는 것이, 손으로 감촉을 느낄 수 있는 책이 없어지는 것이.
이렇게 우리가 편리한 인터넷으로 소통하고 있음에 시공간의 자유를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사라지지 말아야 할 아날로그 중 하나가 - 내게는 책이거든요.

Jeanne_Hebuterne 2016-04-03 09:18   좋아요 0 | URL
L.SHIN님
이 글을 쓰며 저야말로 인터넷 서점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사람 아닌가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저번주에도 헌책방에 가서 이것저것 오만원 상당의 책을 사들였어요. 통로 구석구석 배치된 깨알같은 메모도 재미있고, 직접 책을 손으로 만지며 탐색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제겐 재미있는 경험이어요.
인간은 종종 신기술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오래된 무언가가 금방 사라질거란 생각을 많이 하지만, 정작 우리가 아직도 꾸준히 사용하는 많은 물품은 어제 나온 새로운 것이 아닌 몇천년이 된 무엇임이 분명합니다. 전 아직도 전자책은 읽지 않고 편지를 보내고 종이책을 넘기는 사람이어요.
 
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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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One for sorrow, two for joy, three for a girl... Three for a girl. I'm stuck on three, I just can't get any further. My head is thick with sounds, my mouth thick with blood. Three for a girl. I can hear the magpies-they're laughing mocking me, a raucous cackling. A bidding. Bad tidings. I can see them now, back against the sun Not the birds, something else. Someone's coming. Someone is speaking to me. Now look. Now look what you made me do.-이 책의 여는 글.




 스릴러의 기본에 충직한 이야기, 히치콕의 가스등을 떠올리게 하는 플롯, 판단을 밀고 나가거나 망설이는 사람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의 모든 것은 간단하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인물, 사건, 배경, 이 세 가지를 저자 폴라 호킨스는 그의 첫 작품에서 영리하게 섞는다. 그 손놀림이 능란해서 마치 작은 도시의 카지노에 온 기분이다. 창밖에 보이는 것을 보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한가지가 명확해진다. 확신이 아니라 실수에의, 불확실성에의 가능성. 확신은 쉽다. 내 머릿속의 잣대로 명제를 가늠하는 일. 어려운 것은 불확실함에의 인식이다. 옳고 그름, 관계의 정직성 내지는 부정직, 부드러움과 날카로움, 전직 저널리스트였다는 폴라 호킨스의 소설 '걸 온 더 트레인'은 스릴러의 외피를 둘러쓴 감정의 곡선을 보여준다. 





 2013년 7월 5일 

 기찻길 옆에 옷 뭉치 하나가 버려져 있다. 셔츠처럼 보이는 연한 파란색 천이 더러운 흰색 옷과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다. 아마도 철둑의 작은 덤불숲에 불법으로 버려진 화물에서 빠져나온 쓰레기겠지, 아니면 이 구역 선로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이 남기고 간 것일 수도 있다. 그 사람들은 이곳을 뻔질나게 드나드니까. 어쩌면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고. 어머니는 내가 상상력이 지나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톰도 그렇게 말했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더러운 티셔츠나 신발 한 짝이 버려져 있는 걸 보면, 나머지 한 짝과 그 신발들에 꼭 맞는 발밖에 생각나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인가. 

 기차가 갑자기 덜커덩, 끼익 하고 새된 소리를 내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작은 옷 뭉치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기차는 힘차게 조깅하는 속도로 런던을 향해 달려간다. 내 뒷자레어 앉은 사람이 짜증 섞인 한숨을 힘없이 뱉는다. 아무리 기차 통근에 이골이 난 사람이라도 애시버리에서 유스턴까지 가는 오전 8시 4분 완행열차는 견뎌내기가 그리 쉽지 않다. 원래대로라면 45분 걸리는 구간이지만 제시간에 도착하는 경우가 드물다.-레이첼


 

 걸 온 더 트레인, 이 책의 창문은 바로 레이첼이다. 소설의 문을 여는 것은 레이첼, 2013년 7월 5일 금요일, 그리고 기차 안의 사람들이다. 경쾌한 전화벨 소리, 기찻길 옆에 버려진 옷 뭉치를 보고 공상을 하는 레이첼, 기찻길 옆의 집을 보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 것으로 생각하는 그의 머릿속이 바로 독자가 접하는 첫번째 창문이다. 책장을 넘기면 조금씩 드러나는 몇가지 필터. 그가 직업을 잃었지만 계속해서 런던으로 통근하는 척한다는 것, 톰은 그의 전남편이고 두 사람 사이에는 불임, 알콜 중독의 문제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레이첼은 아직도 알콜 의존이 심각한 수준이며 술을 마시면 자주 정신을 잃고, 기억을 잃는다는 것. 간단하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





 남편과 이혼했는데도 아직 결혼 전 성으로 이름을 바꾸지 않은 여자, 술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마시는 여자, 전남편과 지금 그의 부인이 사는 집을 찾아가기까지 하는 여자, 실직했음에도 아침이면 런던으로 가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 그의 상황을 관통하는 화살은 중독일까 의존일까, 나는 판단을 망설였었다. 중독의 어원은 addicene. 양도, 굴복을 뜻한다. 한마디로 스스로 권리를 다른 어떤 존재에게 내어주는 것. 스스로 노예 상태가 되는 것. 중독 관련 질문지를 접하면 한 가지 반복되는 형용사, 부사가 있다. '과도한'이라는 단어가 계속 등장한다. 동사와 명사를 넘치게 하는, 그 자체로 압도하는 단어. 

 과도하게 화내는가? 과도하게 필요로 하는가? 바로 '과도하게'. 레이첼은 과도하게 술을 마신다. 과도하게 거짓말을 한다. 전남편 톰과 그의 부인인 안나는 그런 레이첼 때문에 과도하게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그러던 와중 이 책의 다른 화자, 메건이 실종된다. 





메건은 제스. 레이첼이 매일 기차로 통근하며 하루에 두 번 지나치는 어떤 집에 사는 여자이다. 통근길에 지나가는 집을 보며 레이첼은 그 집에 사는 부부를 보고 상상한다. 아마도 남자의 이름은 제이슨, 여자의 이름은 제스일 것이다. 그 상상이 너무나도 강력한 토대를 지녀서, 심지어 레이첼은 경찰에게 그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제스는 아마도..'라고 상상의 그 이름을 언급하기까지 한다. 레이첼은 그런 사람이다. 기찻길에 버려진 신 한 짝을 보면 그 신에 꼭 맞던 발을 상상하는 사람. 걸 온 더 트레인이 나아가는 방향은 독자가 가졌던 확신이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독자는  앞서 말했던 감정의 곡선을 만질 수 있다. 알콜 중독, 폭력, 거짓말, 신의, 믿음, 사실, 몸과 마음이 다칠 때 느끼는 절망,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무력감. 





관계에 만약 성공과 실패라는 것이 있다면,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성공은 무엇이고 실패란 무엇일까. 이 답은 비교적 쉬웠다. 덧셈과 뺄셈의 명확한 공식. 혹은 곱셈과 나눗셈 같은 것일 것 같았다. 도약, 혹은 정확성.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관계. 한마디로 주도성을 잃지 않는 관계. 그러나 그것을 언제 알아챌 수 있을 것인가의 질문에 생겨나자 답하기가 어려웠다. 당장은 내가 좋아하고, 나를 나일 수 있게 해주는 관계라고 생각했건만 돌이켜 보면 아닐 때가 있었다. 이 사람과 있을 때의 나는 이카로스 같다고, 비약 없이 도약하고 햇빛도 머지않다고 생각했으나 바닷물에 풍덩 나자빠질 때는 실패도 그런 실패가 없었다. 그 실패가 도리어 나를 계속 걷게 만들 때도 있었으니, 이것은 주정뱅이의 마지막 한 잔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 마지막이라는 것이 끝이 없을지니.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무력감보다는 몸과 마음이 다칠 때의 절망이 더 클 때가 있다.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 어디서 상처를 입었는지조차 모르는 레이첼을 보며 독자는 그의 기억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심스럽다. 이 스토리 텔러는 어쩌면 마지막에 최후의 진실을 토로하는 최후의 일인이 아닐까? 아니면 모든 것은 술로 만든 강물 아래에 있고, 레이첼은 단지 거짓을 사실이라 주장하는 것인 아닐까? 이 두 가지 상반된 시선 속에서, 조금씩 메건이, 안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I can hear the train coming : I know its rhythem by heart. It picks up speed as it accelerates out of Northcote station and then, after rattling round the bend, it starts to slow down, from a rattle to a rumble, and then sometimes a screech of brakes as it stops at the signal a couple hundred yards from the house. My coffee is cold on the table, but I'm too deliciously warm and lazy to bother getting up to make myself another cup.-Megan.





 빛나던 소녀, 도망자, 아내, 화랑 딜러, 외도, 다시, 어디론가. 그리고 그사이 어딘가 있는 메건. 레이첼이 스스로 투영시켜 상상하던 제스는 기차가 오는 소리를 듣고, 레이첼이 상상하던 커피를 마시고, 레이첼이 상상하던 제이슨과 조용히 포옹한다. 실제 그의 마음 속에서 어떤 폭풍이 몰아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고, 그 폭풍의 세기가 오히려 남들을 화나게 한다면 메건에게는 불합리한 일일 것이다. 폴라 호킨스는 천천히 주저함 없이 메건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창밖에 보이는 것을 다 믿지는 마세요. 어떤 구름 뒤에 해가 있는지, 혹은 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답니다.






 메건이 실종되고 레이첼이 경찰에 증언할 때, 바로 그 구름이 문제가 된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 레이첼의 증언은 믿기가 힘들다. 메건이 실종되던 날 레이첼이 맨정신이었다 해도 믿기 힘들었겠지만 그의 모든 상황은 그의 모든 증언을 반박하기에 충분하다. 그렇지만 누구를 믿을 것인가? 일 년 전, 남편이 있지만 다른 남자와 자기 집 정원에서 포옹을 하던 메건을 믿을 것인가? 전 부인 레이첼이 했던 것 처럼 남편 톰의 가방을 뒤지고, 컴퓨터 비번을 알아내서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고 찾는 안나를 믿을 것인가? 전남편과 그의 부인을 스토킹하며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치 않게 메건 실종사건의 수사에 끼어드는 레이첼을 믿을 것인가? 




 

 이 물음표 속에서조차 확신은 쉽고도 힘든 것, 마음속 잣대가 분명하다면 쉬울 것이고 상황의 개별성을 인지한다면 어려울 것이다. 게으른 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 앞에서 레이첼, 안나, 메건은 각자 숨 쉬는 개별적인 존재가 된다. 





 I feel very cold. Did I know then that he wanted her? Megan was blond and beautiful-she was like me. So yes, I probably knew that he wanted her, just like I know when I walk down the street that there are married men with their wives at their sides and their children in their arms who look at me and think about it. So perhaps I did know. I wanted her, he took her. But not this. He couldn't do this.

 Not Tom. A lover, husband twice over. A father A good father, an uncomplaining provider.

 "You love him," I remind her. "You still love him, don't you?"

 _Anna




 메건은 점점 불행해지고 안나는 혼란스러워한다.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이젠 남자들이 탐내기는커녕 좋아하기 힘든 여자가 되어버렸다. 단순히 살이 쪄서, 혹은 음주와 수면 부족으로 얼굴이 부어서만은 아니다. 내가 잠자코 있을 때나 움직일 때나 내 얼굴에 고스란히 새겨진 상처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는 것 같다.' 레이첼의 이 말을 들을 때면 독자의 혼란은 더 강해진다. 자신의 존재, 혹은 마음에 비쳐 가장 닮은 듯한 어떤 캐릭터를 택하여 그 캐릭터에 이입하려는 독자의 성향을 폴라 호킨스는 십분 활용한다. 술 취한 채 어떤 소리를 층계 위에서 들었는데, 어쩌면 그 소리가 살인의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가장 강력히 어필하는 스릴러 영화의 믿을 수 없는 주인공 같은 레이첼. 독자는 단지 무언가 위험한 일이 레이첼이 본 창문 뒤편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챌 뿐, 그것이 진짜 위험인지 아닌지를 확신하기는 아직 이름을 알고 있다. 알아채기는 했지만 입증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이 상황. 추리와 스릴러는 이렇게 속삭인다. 






심연을 담았으되 닮지는 않은, 스릴러 이전에 사람의 마음 속 열 길 우물을 담은 소설.






 She's buried beneath a silver birch tree, down towards the old train tracks, her grave marked with  cairn. Not more than a little pile of stones, really. I didn't want to draw attention to her resting place, but I couldn't leave her without remembrance. She'll sleep peacefully there, no one to disturb her, no sounds but birdsong and the rumble of passing trains. -이 책의 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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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5-11-13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오자마자 쿠폰이랑 신간세일가격 얹어서 사놓고서는 아직도 못 읽고 있네요.-_-: 기대되는 책인데 말이죠.

Jeanne_Hebuterne 2015-11-14 10:21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은 나오자마자 와락 끌어안았다가 슬쩍 밀쳐두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딱히 호오의 감정이 있는 건 아닌데 그냥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전 정말 오랜만에 알라딘에서 책 주문을 하고 주문과 즉시 오매불망 기다림을 시작했어요. 황지우 시인의 편지가 떠오를 지경입니다 호홋
 
두번째 봄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4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뭔가를 아주 잘 아는데 아무리 애써도 그게 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을 때의 기분을 아는가?



 저 한 마디로 시작하는 소설. 그 앞의 책날개엔 이러한 소개가 있다.




 1890년 영국 데번에서 미국인 프레더릭 밀러와 영국인 클라라 베이머 부부의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어머니의 교육을 받았고 열여섯 살 때 파리로 이주해 학교에서 성악과 피아노를 배웠다. 1912년 영국으로 돌아와 2년 뒤 아치볼드 크리스티 대령과 결혼했고 1차 대전 시기에 쓴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으로 데뷔했다. 1976년 85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ABC 살인사건' 등 80여 편의 추리소설을 집필했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출간 직후 애거사는 어머니의 죽음과 남편의 외도 등에 큰 충격을 받고 스스로 실종 사건을 일으키는 등 방황의 시간을 보내지만, 이때의 사유를 바탕으로 1930년부터 1956년까지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다. 


 


 정원의 여자, 39세의 피부가 희고 꼿꼿한, 부유한 집안의 잘 교육받은 여자. 뭔가를 경험하여 타인에게 보일 동정심이 없는 여자. 일요일에 노래를 부르고 게임을 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페스트리, 수플레, 볼로방. 프랑스어와 상상 속의 친구들. 간결하게 힘을 빼고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밤새 이야기해나가는 여자. 바로 '두번째 봄'의 셀리아의 이야기인 동시에 메리 웨스트매콧의 이야기다. 




 어쩌면 작가에게는 다른 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 다른 이름은 고스트 라이터일 수도 있고,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애거사 크리스티와 메리 웨스트매콧이 될 수도 있다. 이미 굳어진 지문을 피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작가의 자기 이야기. 이 책은 한낮에 읽다 쉬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을 잘 읽기 위해서라면 개와 늑대의 시간에 첫 장을 펼쳐 들어 쉬지 않고 한 번에 쭉 읽어야 할 것이다. 셀리아의 이야기엔 그런 그림자가 있다. 어디까지가 내 엄마이고 어디까지가 아빠의 부인일까? 어느 구름 뒤에 해가 있고 어느 구름 뒤에 폭우가 숨었을까? 




 어떤 일에 있어 한가지 불행이 있다면 우리가 아직 다 살지 않았다는 점. 어떤 일에 있어 한가지 다행이 있다면 우리가 아직 다 살지 않았다는 점. 애거사 크리스티에게는 분명 다른 이름이 필요했다. 자신의 자서전에도 빼놓을 만큼의 일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나는 지금 지구에서 바라보는 달의 앞면과 아무도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을 거울에 비추어보는 독서를 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아는 추리소설의 여왕, 데임 작위의 애거사 크리스티. 직업의 성공, 유복하고 풍요로운 유년, 탄탄한 자기 세계. 숨죽여 울고만 싶고 돌아가고만 싶은 어머니의 품속, 이제 더는 없는 그 온기. 누구보다도 가까이하고 싶었던 세계가 점점 멀어져 가고 급기야는 자신을 아프게 할 때의 탄식. 글 앞에서 한없이 강하다가도 겸손해지는 작가의 자의식. 이 모든 것이 바로 메리 웨스트매콧이었다. 바로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그림자.


 


 단어, 낱말, 문장, 문단, 이야기로 태피스트리를 만들어내는 작가로서의 애거사 크리스티가 있었다면 하나하나 과거를 되짚어가는 메리 웨스트매콧이 있다. 그 계기는 어머니의 죽음일 수도, 남편의 외도일 수도, 이혼, 혹은 자살 시도일 수도 있다. 아니다. 그것은 방아쇠에 불과하다. 이야기 속 셀리아가 반해서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고 너무나도 사랑한 더멋같은 남자는 아무리 부모의 죽음과 배우자의 외도, 이혼과 자살 충동을 겪어도 이렇게 암실에서 필름을 현상하듯 대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셀리아가 지닌 이야기에의 열망, 자신을 돌아보고자 함에서 오는 성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삶에 대한 오만함의 삼위일체가 빚어낸 때늦은 결과물이다. 삶의 상징은 그런 것이랍니다. 라고 말하는 나직한 작가의 목소리. 만약 삶이 우리 앞에 기호로 놓여 있다면, 사는 것은 한결 간단할지도 모른다. 아예 간단함을 넘어서 정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코 1:1로 해석할 수 없는 것.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는 무엇. 상징은 그러한 것이고 사는 것 또한 그런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어떤 여자일까?' 하는 케케묵은 질문일 수도, 핀에 찔린 나비가 너무 불쌍한데 그 나비를 선물한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여자 아이일 수도, 화가의 글로 남은 셀리아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책장을 넘기는 내 손끝에 걸린다. 





 셀리아에게는 친절도 동정도 없었다. 그녀는 모든 감정을 헛되이 소진해버렸던 것이다. 스스로 알았듯 그녀는 그런 점에서 바보 같았다. 그녀는 너무 불행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베풀 동정심이 없었다. 입가에 새겨진 깊은 주름은 그녀가 지금까지 참고 견딘 커다란 고통의 흔적이었다. 그녀는 이내 내게도 '어떤 일이 일어났었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우리는 동등했다. 그녀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았고, 날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내 불행은, 그저 내가 어떻게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는 그녀의 결심을 알아보았는가를 이해하는 근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이의 아픔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타오른 불길과 거친 물결에 투신했던 사람은 길에 버려진 동물에게 품을 동정심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심각한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오히려 커다란 재앙에 효율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감정은 빨리 지나가지만 깊은 통찰은 바뀌지 않는다. 감정을 버리고 사실을 그대로 바라보는 힘.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길을 걸었던가. 탕플 감옥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 직전에, 골든 게이트 브릿지에서 투신자살하는 이들이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그리고 셀리아가 어릴 때부터 보아온 총을 든 남자에게서 도망쳐 다시 자살을 시도하기 직전에. 이들은 다들 모종의 위험 앞에서 마지막으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남은 사력을 다한다. 이때 작품 속에 녹아드는 작가의 목소리. 





 그렇다. 나는 핵심만 기록할 생각이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어찌됐든 그녀가 무너져 항복할 때까지-그녀 곁을 떠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손을 쓸 수 없는 화가가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핵심만 기록할 생각이라는 듣는 이의 결심은 곧 메리 웨스트매콧이 된 애거사 크리스티의 마음이다. 커다란 파도 앞에서 당시에는 정신을 잃었지만, 지금은 더는 잃을 정신이 없다는 이의 마지막 자의식. 남편의 외도 앞에서 셀리아의 모든 정신은 남편에게 가 있다. 남편의 여자에게 가지 않는 그의 놀라운 강인한 자의식 앞에서, 메리 웨스트매콧이 되어야 했던 애거사 크리스티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작가가 늘 앉던 책상 앞이 아닌 다른 곳을 선택했을 때는 이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읽고 싶은 마음. 스스로가 창조한 세계가 아닌, 창조한 세계 속에서 숨 쉬던 자신을 만나고 싶은 마음. 그리하여 어렸을 때, 핀에 찔린 나비를 보고 괴로워하고, 아주 드높이 펼쳐져 있을 거라 생각한 산이 멀찍이 있는 모습이 실망하고, 아빠가 죽었을 때 엄마에게로 가서 '아빠는 천국에 갔어요. 계속 아빠를 불러서 휴식을 방해하고 싶진 않죠, 엄마?'라고 착하게 말하는 여자아이를 만나는 마음. 





 이야기 마지막, 셀리아의 모든 이야기를 들은 그는 '그녀는 서른아홉 살에 돌아갔다....성장하기 위해....'라고 말한다.

 아, 이 한 가닥 자만심이라니! 

 책장을 덮기 전 마지막으로 만나는 이 글귀에서, 이 오만한 추리소설의 여왕이 남긴 채찍질은 너무나도 근엄하여 이야기를 따라가는 내도록 느꼈던 모종의 일체감이 경외심으로 바뀔 지경이었다. 셀리아가 서른아홉 살에 돌아간 것은, 그 목적이 무엇이 되었던 그가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였다. 마지막까지 스스로의 치맛자락을 정리하는 정리된 손길, 삶이 간혹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호가 아닌 상징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 동정심과 상상력, 어머니의 따스함과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지키려는 노력, 힘을 탕진해버릴 수 있는 책임감. 가짜를 가졌을 때는 진짜를 가질 수 없는 법. 




 애거사 크리스티는 아마도 이 소설을 쓴 다음에야 자신이 직조한 추리소설로 한결 가볍게 돌아설 수 있었을 것이다. 큰 일과 작은 일. 굵직한 사건과 조그만 느낌. 큰 결심을 뒤로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이가 들려주는 자기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유모가 잠자리에서 입에 넣어주는 달콤한 과자, 아름답고 다정한 어머니와 자상한 아버지. 가족이 함께하는 여행, 아버지의 죽음 이후 좀 이상해 보이는 어머니. 늘 자신만만한 할머니, 사교계! 너무나도 원했기에 손에 쥐기를 오히려 주저하는 겸허한 사랑, 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사랑. 자신의 것을 최대한 지키려는, 모든 것을 잃은 자가 낼 수 있는 당당한 목소리. 자신을 닮지 않아 그가 원하는 것을 내어줄 수 없는 딸. 그 사이를 적시는 것은 어머니의 미소, 아버지의 목소리. 남편의 포옹, 딸의 냉정함. 사람으로 이루어진 관계 속의 셀리아. 혹은 홀로 정원에 앉아 굴렁쇠를 하마라고 상상하는 셀리아. 정원에 나가면 그 어린아이가 앉아 공상하고 있었고, 집안에 들어가면 마호가니 가구 사이를 뛰어다니는 어린 셀리아가 있었다. 열여덟 살의 셀리아, 전쟁 중의 셀리아. 더멋과 결혼하여 그가 원하는 것을 내어다 주려는 셀리아......





 이 모든 것이 당신이에요. 라는 목소리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조금씩 짙어진다. 

 메리 웨스트매콧이, 셀리아가, '나는 바보였어요. 다른 여자들에게는 다 일어나는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죠'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신문을 펼치면 그가 거기에 있다. 책을 읽으면 그가 거기에서 서성인다. 그는 셀리아이기도 하고, 셀리아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모든 것을 부수는 총을 든 남자이기도 하다. 셀리아가 너무나도 사랑해서 결국, 모든 것을 내어주게 된 더멋이기도 하고 죽도록 머리를 쓰며 살아온 셀리아의 엄마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무엇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책장을 덮은 나도, 아가사 크리스티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받아쓴 메리 웨스트매콧도 알 수 없다. 오로지 셀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단 한 사람만이 어렴풋이 짐작할 뿐, 이야기 속의 모든 인물은 우리에게 이렇게 늘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우리의 읽는 눈과 말하는 입이 앞으로도 이야기 속의 그들과 오버랩되는 삶을 살며 무언가를 느낄 것이며, 그 모든 것이 모여 우리 자신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실마리를 조그맣게 남긴 채.






 출발 경적이 울렸고 나는 뛰어야 했다......

 그래서 내게 그런 인상만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인상은 아주 선명했다.

 공포......그리고 안도.

 안도라는 말은 너무 약하다. 그 이상의 것이었다. 구제가 더 적절한 것이다.

 그녀가 본 것은 총을 든 남자였다. 그녀에게 공포를 상징하는......

 긴 세월 동안 그녀를 쫓아다녔던 총을 든 남자......

 그녀는 마침내 그를 똑바로 대면하게 됐던 것이다......

 그는 아주 평범한 인간이었다.

 나 같은...... 




따옴표 속 모든 말은 책속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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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31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01 0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iforte 2015-09-10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노페디, 제 알람음악입니다. 어떤 음악을 알람음으로 써도, 아침마다 그 음악이 `hate`해지던데..ㅋㅋ 유일하게 질리지도, 화가 나지도 않고서 제 잠을 깨웁니다. 신기하죠? ㅋㅋ
오늘도 일 중간에 잠깐 들려 자알 쉬다 갑니다. 잘 계시지요?

iforte 2015-09-10 01:01   좋아요 0 | URL
아.. 근데 개인적으로는 Gnossiennes를 더 좋아합니다. 특히 3번 & 4번. 혹시 Elegy란 영화를 보셨는지. 저 음악이 보다 더 잘 어울리는 장면을 찾지 못하겠다 할 정도로 적절한 장면에서 묘하게 사람 마음을 뒤흔들어놓더군요.

Jeanne_Hebuterne 2015-09-17 14:31   좋아요 0 | URL
iforte님, 제 지인은 짐노페디를 듣더니 대뜸 `마음이 가라앉습니까? 우울함에 젖어드나요?` 이렇게 성우 나레이션 흉내를 내길래 왜 그러냐고 했더니 한때 프로작 광고음악으로 짐노페디를 쓰는 걸 봤다고 하더라고요. 음악에 관한 기억은 이렇게나 다른가 봅니다. 저는 어느 겨울 차가운 공기 속에서 이 음악을 계속 반복해 듣던 겨울날이 떠올라요. 차갑고 청명한 느낌이 들었는데 iforte님은 알람 음악으로 활용하시는군요.

요즘 고양이 꼬리를 따라다니느라 문화생활을 도통 하질 못했는데 iforte님 글을 보니 영화도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imdb를 찾아보니 페넬로페 크루즈 주연의 영화가 뜨는데, 도서관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어이없게도 국수 - 인생의 중심이 흔들릴 때 나를 지켜준 이
강종희 지음 / 비아북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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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식사로는 국수가 좋다

영혼이라는 말을 반찬 삼을 수 있어서 좋다


퉁퉁 부운 눈두덩 부르튼 입술

마른 손바닥으로 훔치며

젓가락을 고쳐 잡으며

국수 가락을 건져 올린다


국수는 뜨겁고 시원하다

바닥에 조금 흘리면

지나가던 개가 먹고

발 없는 비둘기가 먹고


국수가 좋다

빙빙 돌려가며 먹는다

마른 길 축축한 길 부드러운 길

국수를 고백한다


-이근화, '국수' 중에서.



 


 편안한 옷, 오래 걸어도 아프지 않은 신. 선글라스도 없이 선크림도 바르지 않은 맨피부가 햇살에 눈부시게 빛난다. 어디를 가나 바람이 춘삼월 봄바람처럼 부는 곳에 와있다. 골목 모퉁이마다 다른 방향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친다. 언제나 떠났던 곳. 그림자가 또렷했고 커피는 진했고 무지개빛이 선명하다. 햇빛과 바람을 온 피부로 받고 싶다. 이제 이곳에 당분간 뿌리를 내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다이어리를 펼치면 연필 대신 모나미 153으로 볼펜 잉크를 닦아가며 쓴 메모. 꽃노래도 한철이어라. 이제는 몇 번을 들여다본 남의 일기장이 더는 궁금하지도 않을 지경이 되었을 때 들려오는 고백 따위, 무슨 상관이람. 그래서 이곳의 바람을 온 피부로 받으며 스쳐 보내고 싶었나 보다. 




 몇 번 들렀던 편지지와 카드 따위를 파는 가게에 들어간다. 고양이 그림이 있는 카드를 구경하다 문득 집에 있을 고양이들이 생각난다. 궁금함과 그리움이 아니다. 그들이 내게 해주었던 곡진한 위로, 웃음 그 자체의 웃음, 격렬한 감정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온종일 공기만 들이마실 때 내 옆에 종일 누워있던 그 털 뭉치. 맹렬하게 뛰어가다 문에 박치기 하던 슬랩스틱. 조금 전까지 내게 뽀뽀, 골골이, 꾹꾹이를 해대며 애정을 표현하다가 내가 억지로 잡아챌 때 드물게 하던 하악질. 그 작은 털 뭉치가 고양이가 되고 그 작은 비누거 품이 단단한 그림자가 된다. 




 그들에게는 완벽한 일체의 감정이 없다. 좋아 죽겠는 순간에조차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다. 너는 너의 일을 했고, 나는 나의 일을 했어. 이 말이 이렇게 완벽히 성립하는 관계가 오랜만이다. 그간 얼마나 이 선을 등신처럼 못 그어서 전전긍긍, 많은 검은색을 희게 칠했나. 사실은 아직도 등신이고 앞으로도 바보 천치일지도 모른다. 속을 알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 속이 내 속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이것은 죽은 정자와 죽은 난자가 만나 죽은 아이를 잉태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에의 열망이다. 최선을 다하여 미쳤던 시절 찾아낸 최선의 미친 모습을 아직도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니. 결코,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으로 고리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지쳤고 나의 사랑은 늙었다. 지침과 늙음을 상쇄하기 위해 이렇게도 거리를 없애려 기를 쓰고 또 쓰다가, 결국, 그것은 내 마음이 아니라 내 사랑이 제멋대로 가는 것임을 깨달았다. 아니,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려 애쓴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나는 나의 사랑이 지닌 것 이외의 모든 것이다. 나는 흰 피부로 햇빛과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다. 삶에 대한 비관적인 낙관이 가득하다. 그럴 리가 없다는 불신, 닫고 절대 열지 않는 서랍을 가진 주제에 다른 서랍을 넘본다. 사랑 그 뒤의 쓸쓸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뒷모습까지 알아챘을 때 나는 더 무섭고 대담해졌다.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헤더가 그리 말했듯, 비밀을 고백하는 것은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이다. 나는 결코, 내 비밀을 고백하지 않을 것이다. 좀 더 걸어서 이번엔 다른 가게를 찾는다. 





 작은 골목 안에 숨은 더 작은 골목에 그 국숫집이 있었다. 벽에 붙은 메뉴에는 그저 2인분, 3인분, 4인분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식당 안에는 휠체어를 탄 여인을 데려온 가족 한 팀이 있었고, 외국인 노동자 한 명이 어색하게 낀, 아마도 고용주인듯한 남녀 일행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테이블 네 개가 고작인 작은 식당이 꽉 찼다. 다들 막걸리에 소주까지 반주를 하는 눈치였다. 나도 그때는 정말 술 생각이 났다. 아쉽지만 아이를 데리고 몸을 못 가누는 형편이 될 수는 없으니......사이다와 2인분을 주문했다.

 10여분을 기다린 끝에 커다란 양푼에 담긴 국수와 김치 한 보시기가 나왔다. 마그마처럼 붉고 뜨겁게 끓어오르는 국물을 훌훌 저어가며 국수를 양껏 대접에 퍼 담았다. 한눈에도 매운탕이나 어탕 국수에 더 가깝지 않을 까 싶게 걸쭉한 국물과 제법 튼실한 생선 토막들이 눈에 띄었다.

-책속에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이지만 분위기가 길마다 많이 다르다. 아무렴 그 국숫집은 명품샵이나 고급스러운 호텔 옆에 있지 않았다. 좀 많이 허름한 간판, 들어가면 와글와글 각국어로 외치는 소리. 강한 타이 억양은 목소리를 한층 더 높게 만든다. 한 명, 먹고 갈 거에요. 이렇게 말하면 주로 바 자리를 내어준다. 벽을 마주하거나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창밖의 한무리 사람들이 보인다. 구중 구월 생활처럼 그들은 자주 오는 사람을 보고도 아는 체하지 않아 좋다. 후덥지근한 공기를 달구는 것은 온갖 해산물 볶음, 생숙주의 향, 고수, 향신료 냄새. 내 왼편의 여자는 내 그릇을 흘깃 보더니 뭔가를 길게 이야기한다. 채식주의자가 먹을만한 국수를 주문한다. 오른편의 여자는 자기 앞에 놓인 국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찰칵, 소리를 내고는 한 입 후후 불어먹기 시작한다. 오늘은 뭐 먹느냐는 문자에 가끔 나도 사진을 보내기도 했고, 국수를 먹는다고 말하기도 했다만 주로 이 가게에 와서는 이제 그러지 않는다. 책도 잘 읽지 않고 그저 내 앞에 나온 국수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국물을 삼킬 뿐. 






 




 언젠가는 잔치국수를 해먹고 싶어 애호박, 표고, 국물용 멸치, 시금치, 당근, 양파, 새우, 오이 등을 사 온 적이 있었다. 때마침 집에 새로 냉장고와 냉동고 기능을 겸한 기기를 장만했다. 사용설명서가 없었고 다이얼을 2로 맞추어 놓았더니 당근이 야구 방망이로 변했다. 다이얼을 5로 하자 이번엔 포도주병이 터졌다. 그 뒤로 다시 장을 봐와서 국수를 삶아 먹으면 그만이었겠으나 나는 대장금처럼 경합과 역경을 딛고 스스로 재창조해나가는 인간이 아니었던지라 그때 냉장고에 기분 상한 그 마음은 아직도 회복되질 않고 있다. 대신 내게 위로를 건네고 싶거나 따뜻하게 내가 나를 안아주고 싶다......싶을 때. 정신 차리고 보면 나는 그 국숫집에 가서 앉아있다. 이 따끈한 국물을 삼키고 면을 훌훌 불어 젓가락으로 감아 입에 밀어 넣는다. 국수는 참 바쁘고도 고즈넉한 음식이다. 뜨거운 국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더더욱. 국물이 뜨거울 때 삼키고 싶어 국물을 마시다 보면 면이 불어난다. 쫄깃한 면을 먹다 보면 국물이 조금씩 식는다. 혀를 델 만큼 뜨거운 통각, 몸을 녹이는 샤워, 그 뒤 머리카락을 말리며 마시는 따끈한 검은 커피. 살다 보면 이런 것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콩나물, 그 날 들여온 생선, 기계로 뽑은 납작한 칼국수 면을 고춧가루 듬뿍 풀어 끓여낸 모리국수는 원래 고된 뱃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부들을 위해 만들어주던 음식이었다. 국물이 시뻘개지도록 투하한 고춧가루도 그렇지만 마늘이 듬뿍 들어간 데다 생선과 국수의 전분으로 걸쭉해진 국물이 칼칼하고 든든했다. 거기에 2인분이 웬만한 3~4인분에 해당할 만큼 그 양이 푸짐했다. 마늘이 잔뜩 들어간 김치는 생선을 넣은 개성 강한 칼국수와 함께 먹기에 적당한 맛이 들었다. 

-책속에서




 스물아홉 개의 국수 이야기를 담은 책.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많이 흘려 국수 국물이 넘치는 느낌이 좀 아쉽지만, 그런대로 국수를 먹고 싶어서 국수 대신 흘깃거린 책. 야근의 밤을 넘어가며 동료와 함께 들이키는 두부 국수. 아이와 함께 먹는 모리 국수. 엄마와 함께하는 명동 칼국수. 





 미각은 기억이며 음식은 추억이다. 박찬일의 요리 이야기는 쉐프의 부엌을 보여준다. 용윤선의 커피는 눈물을 삼킨다. 카모메 식당이 품은 따뜻한 마음, 바베트의 만찬이 펼치는 우정. 강종희의 국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인간은 생존을 위해 먹다가, 막상 생존을 위해 먹는다는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각종 조미료를 뿌리고 더 많은 재료를 찾고 다른 맛을 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장면의 달콤한 캐러멜 소스가 주는 기억. 누군가 내게 차려준 스파게티의 느낌. 애써 품고 온 팟타이의 아삭한 숙주의 식감. 오빠와 동생이 같이 먹는 한밤의 라면, 지글지글 불판 위의 고기를 구우며 원시 부족처럼 동지애를 다진 다음 먹는 열무 냉국수. 계속된 야근의 끝에 고기를 불판에 굽다가 마지막 순간, '밥 할래, 냉면 할래?'라는 물음을 받고, 총무는 밥은 몇 명, 냉면은 몇 명...되내이며 주문을 하던 밤. 그 와중에 '소주 하나 더요'라는 목소리가 옆에서 새어 나오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그렇게까지 갉아먹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 길게 살다 보면 다 거기서 거기일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든다. 천만의 말씀. 불판의 열기를 느낄 때가 있고, 냉면의 냉기를 속에 들일 때가 있다. 






누군가가 그랬다. 생선은 낯설고 잔인하다고. 육지의 생명인 나와 다른 세계, 비밀의 바다에서 온 생명을 먹는 나라는 존재의 생존을 직시하는 행위다. 낯설과 원초적인 바다의 존재, 생선이 그득한 국수 냄비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했던가.

 버텨.' 불과 수시간 전에도 넘치는 생명력으로 바다를 헤엄쳤을 아귀가 소근, 내게 던진 귓속말은 이랬다. '날 먹고 버텨봐. 길게 가늘게 이어지는 국숫발처럼 그렇게 버텨. 괜찮을 거야.'

-책속에서




 강종희의 기억과 인물이 화려한 만큼 국숫집의 정보는 맛 기행 블로그를 넘지 않을 정도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책이 어느 한쪽으로 더 나아가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함이 슬쩍 스민다. 웃음이나 눈물을 더 채웠더라면. 혹은 지도나 좌표를 더 찍었더라면. 어떤 책은 스스로 위치를 더없이 확실하게 해주어 명쾌함을 더한다. 론리 플래닛의 여행 시리즈가 그렇고 이케아 카탈로그가 그렇다. 반대의 명쾌함을 주는 경우는 김영하와 김연수의 에세이가 그렇다. 여기서 적당한 타협을 찾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일 거란 짐작을 다시 한 번. 임원직을 맡은 워킹맘의 고단하고 치열한 마음이라는 개인의 경험이 국숫발에 그대로 녹아들기는 조금 힘들었나 보다. 

 모름지기 햇빛을 향해 줄기차게 뻗어 나간 나뭇가지를 자르기란 힘든 노릇. 쓰는 자와 읽는 자의 틈, 벽은 이럴 때 조금씩 자라난다. 쓰는 자는 하나이지만 읽는 자는 여럿이므로. 읽는 이가 걷는 평행우주, 이해하면서도 비교하고 추억하는 저울질을 감당하기에 저자의 목소리 힘이 조금 강하고 높게 느껴진다. 재료 하나를 두고 떠올리는 깊은 통찰과 보편성 대신 야트막한 언덕과 누군가의 다이어리를 잠시 엿보는 느낌을 대신 택한 책. 제목만큼은 그러나 분명하고 당연하며 지당하다. 어이없게도 나를 지탱시켜준 국수. 국물과 면발을 홀홀 들이키고 싶은 날 불현듯 생각난 책.



 





끝이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우린 이미 알고 있었지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이라는 걸
이것이 마지막 잔이라는 걸

눈빛을 나누고 건배를 하고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내 마음 속에 버려두었던 사진기를 꺼내 찍는다

'찰칵' 울림이 없는 소리,
그 소리를 따라서 얼마나 걸었던가
'찰칵' 이제는 무엇을 따라
또 얼마나 걸어가야 할까

마시자 마시자 마시자
서라벌 호프에 우린 사라지겠지만
서울의 꿈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마시자 마시자 마시자
서라벌 호프는 다시 오지 않겠지만
서울의 꿈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마시자 마시자 마시자
서라벌 호프에 우린 잊혀지겠지만
서울의 꿈은 이제부터,
우리들의 꿈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아립, 서라벌 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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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1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2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몬스터 2015-07-21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Jeanne Hebuterne님, 저도 지난 달에 아기 고양이 입양해서 함께 살고 있는데 고양이는 처음이라 여러가지로 낯설고, 예쁘고 , 신기하고 그래요. 개와는 정말 많이 다른 생명체더라구요. 에너지가 많은 건지 , 제가 많이 놀아주지 못해서 그런건지,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제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늘 후다닥 후다닥이거나, 뭔가를 가지고 혼자 놀거나 그래요. 퇴근하고 집에 가면 잠깐 반겨주고 , 식사때 되면 가까이와서 살살 비벼대는 것이 전부인 너무나 독립적인 녀석과 살고 있어요. 제가 일하는 동안 필요한 잠을 다 자는 듯 해요. 세 녀석을 들이기 쉽지 않으셨을 듯 싶은데 , 녀석들 행운이네요.

Jeanne_Hebuterne 2015-07-22 09:10   좋아요 0 | URL
몬스터님

어므낫, 냥이 집사시로군요! 저도 냥이 셋을 지켜보다 보니 정말 정말 정말 신기한 생명체 같아요. 소설가 김영하도 그러더라구요. 고양이는 인간보다 훨씬 작고, 약하고, 빨리 죽는데 한없이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낯설고 예쁘고 신기하다는 말 정말 동의해요. 그 많은 이들이 집사가 되고나서 자신의 프로필 사진을 냥이로 도배하는 것도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했고, 2년 전 죽은 고양이 이야기를 하며 우는 친구도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고.

식사 때 살살 비벼대는 것이 전부, 잠깐 반겨주는 것이 전부. 그 구분이 명확한 이 생명체가 참 좋습니다. 사람이 제각각이듯 고양이도 제각각이어요. 제 곁에 있는 님부스는 제가 다른 고양이들 등을 만져주면 꼭 `냥!` 하고 소리를 내며 빤히 쳐다보고서는 천천히 다가와요 셜록은 슬랩스틱의 대가죠. 칼리는 얼마나 새침한지요. 다들 사료 앞에서 야옹거리며 펄쩍거리는데 칼리는 늘 물그러미 바라보며 자리에 앉아있어요. 칼리가 사료 앞에서 우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죠. 지금은 셋이서 챔피언스 리그 나간 것처럼 소리지르며 뛰어다니고 있습니다만, 고참 집사들에게 물어보니 이 우다다는 성묘가 되면 그리 많지 않을거라고들 하더라구요.

캣닙 줄까? 하고 물어봤을 때에도 `그 당시는 여러가지로 미친 시기이므로 좀 더 커서 늘 식빵굽기만 할 때 주어도 된다`라는 답변도...

코코 잘 있죠? 아, 이제 다른 고양이들도 궁금해지는 시기!

덧-냥이는 넷이었는데 차마 넷은 감당 못하고 한 마리는 입양 보냈어요ㅠㅠ

아무개 2015-07-22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잔치국수, 비빔국수, 칼국수. 짬뽕, 우동, 라면 등등
면 요리를 정말 좋아해요.
그래서 이 책을 보관함에 넣어 두었었는데,
쟌님의 페이퍼로 읽은 셈 치렵니다. ㅎㅎㅎ

Jeanne_Hebuterne 2015-07-22 09:16   좋아요 0 | URL
아무개 님
면 요리 정말 좋죠! 밀면, 잔치국수, 막국수, 평양냉면, 자장면, 짬뽕, 우동, 라면, 비빔면! 비빔면은 하나는 약간 부족한 것 같고 늘 두 개는 좀 많은 것 같고..아, 그러고 보니 간짜장도 떠오르고..제가 살던 곳에서는 꼭 간짜장에 계란을 같이 얹어서 줬는데 다른 지역에서 시켜먹을 때 계란이 없어 놀랐던...문화충격이 떠오릅니다. 뭐! 간짜장에 계란이 없어! 뭐! 순대에 장이 안나오고 소금만 나온다고! 뭐! 소고기전을 안해먹는다고!! 종종 어떤 문화충격은 먹는 것으로 더 격하게 다가와요.

사실 이 책은 기대가 꽤 컸는데, 저자의 화려한 경력과 바쁜 일상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공감할까, 하는 의문이 살짝 들었습니다. 물론 모든 이의 이야기는 개인적인 것이고 특수성을 띠지요. 그가 백수든, 학생이든, 사장이든, 의사이든 자기 일상에 대해 깊이 이야기할 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전문성으로 치자면 막상막하일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견문록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훨씬 낯설고 생명스러운 러시아 이야기, 통역하며 일어난 일들이 오히려 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쪽으로 펼쳐졌던 것을 떠올려 보면, 이 일말의 차이는 글쓴이가 얼마나 상대를 덜 의식하고 쓰는가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