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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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Reuters



 말문을 연 아이의 단어만큼이나 많은 수식어, 한여름의 폭염과 비만큼 상반된 생각을 여럿에게서 불러오는 작가. 이름이 브랜드 처럼 여겨지는 작가. 작품만큼이나 이름 하나로 주목받는 작가. 그의 단어, 문장, 이야기를 이제 다시 한 번 들여다 보아야 할 것 같은 작가. 




 평일 낮 대형매장에 독자들이 줄 서서 새로 나온 이 책을 받아들고 돌아갔다. 그보다 먼저 일본에서는 많은 이들이 발매 당일 자정에도 서점에서 직접 책을 사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출간 전, 제목만 알려졌을 뿐 내용 포함해 모든 것은 비밀에 부쳐졌고 출간 즉시 밤새 책을 읽고 쓴 리뷰가 속속 올라왔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읽고, 많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만한 영향력을 가졌다는 뜻일 것이다. 이 작품의 경우 하루에 5700만 부 판매 돌파.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말하는 전작의 세 배에 달하는 예약 판매량. 이런 수치를 거슬러 올라가면 두 작품이 보인다.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와 태엽 감는 새. 각각 한국과 영미권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언급되는 작품이다. 전자는 한국에서, 후자는 영미권에서. 그런데 작가 연보를 찾아보면, 상실의 시대는 1987년, 태엽 감는 새는 1994년 각각 출간되었다. 상실의 시대의 한국 발매 시기는 1989년인데 10만 부 돌파는 1994년이었다. 베토벤과 니체를 알아가며 밀란 쿤데라를 읽고, 운동권에서 모든 것을 이루고 모든 것을 버린 세대에서 재즈와 싱글 몰트 위스키, 미국 문화를 바탕으로 어딘가 층계참에 걸쳐 앉은 세대로 책 읽는 가장 큰 독자층이 바뀌었다는 의미.





 기록. 전언. 집계. 

 무성한 소문에 비해 간결한 이야기, 단단한 뼈대, 인물의 단순한 반응. 

 하루키에 관해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기록과 숫자가 있는데, 정작 하루키 작품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져 펼쳐보게 된 책의 뼈대가 꽤 단단했다. 책을 펴자 작가의 이름 뒤에 있던 작품이 얼굴을 내밀었다. '여유롭고 스타일리쉬한, 쿨한 싱글의 일상', 곧 스타일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잠시, 다른 방향에서 본 그의 단어들은 내게는 조금 달랐다. 




 쓰쿠루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끌어앉은 채 침대를 벗어나 파자마 차림으로 부엌에 갔다. 하이다는 벌써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누워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책에 의식을 집중하고 다른 세계에 가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쓰쿠루가 얼굴을 보이자마자 책을 덮은 후 밝은 미소를 떠올리고, 부엌에서 커피와 오믈렛과 토스트를 만들었다. 신선한 커피향이 풍겼다. 밤과 낮을 가르는 향기이다. 두 사람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낮게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아침을 먹었다. 하이다는 평소처럼 짙게 구운 토스트에 꿀을 살짝 발라 먹었다. -책속에서




 질감. 양감. 촉감. 사람의 손끝과 코끝에서 빚어지는 숨소리. 하루키는 정밀한 시계의 속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이름표, 감정과 사건에 가장 간단하게 써서 박음질한 그의 표식. 

 낱말 카드.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하였는지. 그 '무엇'에 관한 묘사와 설명은 실제로 해보면 예상보다 어려운 것인데 하루키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대상에 저러한 양감을 불어넣는다. 주인공 쓰쿠루가 무척 친한 친구들에게서 버려진 다음, 쓰쿠루에 관해서는 이러한 묘사를 한다.




 죽음의 문턱을 헤매던 반년 가까운 시간 동안 쓰쿠루는 몸무게가 7킬로그램이나 줄었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비교적 통통한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마른 탓에 가느다란 체형이 되고 말았다. 허리띠를 줄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바지를 작은 사이즈로 새로 사야 했다. 벌거벗고 서면 갈비뼈가 불거져 나와 싸구려 새장처럼 보였다. 자세가 눈에 띄게 나빠졌고, 어깨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살이 빠진 두 다리는 가느다란 물새 다리 같았다.-책속에서




 그러니까 쓰쿠루를 독자인 내가 바라볼 때의 인상은 '싸구려 새장'이되 '죽음의 문턱을 헤맨 뒤의 남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그가 만나는 여자 사라에 관한 묘사와 질적으로 다르다. 초반 사라의 얼굴 묘사-광대뼈와 입에 관한 부분을 지나면 나타나는 부분. 사라가 기분 좋게 돈을 치렀음직한 고급스럽고 자연스러운 옷. 그녀가 쓰쿠루에게 건네주는 싱가폴 면세점에서 산 입생 로랑의 넥타이. 자신이 하고 있던 넥타이를 풀고 사라가 준 새 넥타이를 하며 쓰쿠루는 자신이 하던 넥타이가 생각보다 허름해 보였고, 저도 모르게 매일 반복하는 부적절한 습관처럼 보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물, 상표, 묘사는 하루키의 작품에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 책을 펼치기 전에는 쓰쿠루도, 사라도 알 수 없다. 다루고자 하는 실존적 본질은 인물마다 각각 다른 테마에서 비롯된다. 누군가가 다른 이에 관해 제공하는 정보의 양과 질은 곧 그 자신의 관점을 철저히 반영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어떠한 대상도 전부 다 알 수는 없으므로. 

 아주 다른 생김에 관해 일러주는 단어. 그것이 다르다 하여 판에 박혔다든지 생동감이 덜하지는 않다. 인물에 따라 부여되는 생동감은 각각 다른 테마와 종류의 것이니까. 쓰루쿠에 관해 갈비뼈까지 묘사하는 빼기, 사라에 관해 옷자락을 묘사하는 더하기. 그러므로 하루키가 인물에게 다가가는 지점은 그 특정 낱말들까지이다. 마치 이정표와도 같이.


 


 그렇다면 왜 그는 굳이 이런 이정표를 심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하루키가 이 작품 속에서 만든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즉, 세계에 관한 인식이 먼저 필요한 작업이다. 

 

 

 

 신비함. 수수께끼. 알 수 없는 것. 장르 소설이 아님에도 추리 소설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미스터리를 그의 스토리텔링에 사용한다. 하루키가 바라본 세계는 의문이 제기되고 그에 따른 행동이 있는 세계다. 바로 여기에 하루키의 특징이 있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성실하게 표현한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쓰지 않았으나 인간과 인간의 유대에 관심과 공감을 갖고 있다. ...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것은 성장 이야기인데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상처도 크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관계에서 오는 기대와 배반. 절망과 상처.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소설 첫 문장




 상태 후 드러나는 정황. 그 뒤 그가 죽음만을 생각하게 된 계기.

 그러나 그 뒤 도사린 더 큰 궁금증. 

 

 

 

 누구보다도 친한 친구 네 명이 다자키 쓰쿠루와 절교하는데 이유를 모르는 상황.

 죽을 듯 괴로워한 다음 그는 수영장에서 만난 하이다와 무척 친한 친구가 된다. 어느 밤, 하이다는 그의 부친이 겪은 의문을 사건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 쓰쿠루의 인생에서 사라진다.  쓰쿠루가 마침내는 역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사라를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데, 사라는 마침 그에게 묻는다. '왜' 그 네 명이 그렇게 했는지를.

 

 

 



photo by Curtis Brown-literary and talent agency-http://www.curtisbrown.co.uk


 

 

 

 

  매듭 없이는 끈을 묶을 수 없다는 자명한 이치. 수수께끼는 풀려야 하므로 수수께끼이다.  마침내 쓰루쿠는 그들을 만나 대답을 듣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소설 속에는 수수께끼가 그대로 있다. 그가 얻은 것은 대답이 아니라 가능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나누는 바람 소리. 




 쓰쿠루의 친구들은 저마다 색채를 띤 사람들이다. 일본어 이름의 한자 속에 깃든 색채. 

 유일하게 이름 속 색채가 아닌 '만들다'는 의미를 지닌 쓰쿠루가 집중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해나가는 일은 얼핏 보면 나아가는 일 같지만 실은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이다. 매일 규칙적으로 하는 수영, 역 설계, 사라를 만나는 일.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쓰쿠루가 만드는 것이 역이라는 점이다. 도착했다 떠나고 만났다 헤어지는 공간. 더하기와 빼기가 이루어지는 공간. 




 살아가는 동안 중요한 어떤 계단 한 칸에서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얻을 것인가가 아니라, 얻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판단해야 할 때가 있다. 막 성장하려는 쓰쿠루는 이유를 모르고 단념하였지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게 된 쓰쿠루는 의외의 결단력을 보여준다. 그는 답을 찾아내고 더해야 할 것과 빼야 할 것을 나눔으로 자신을 다시 바라본다. 아마도 이 소설이 많은 독자에게 밝은, 희망 비슷한 감정을 안겨다 주었다면 아마 그것은 이 층계참에서 하루키가 슬쩍 독자에게 쥐어 주는 것이리라. 


 

 


 그러나 앞서 말한 이 미스터리의 여운은 뜻밖에 오래 그림자를 드리운다. 뒤돌아 보면 안 된다고, 뒤돌아 보면 소금 기둥이나 돌이 된다고 신화와 성경은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일은 뒤돌아 보아야 한다. 훌훌 털어내기 위해서. 끈을 묶고 스스로 정직하게 바라보기 위해서. 그럼에도 미스터리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소설의 풀밭 곳곳에 있는 잔디와 엉겅퀴는 쓰쿠오의 알 수 없는 꿈으로, 하이다의 부친이 남긴 이야기로, 시로가 남긴 사건과 알 수 없는 결과로 여전히 그대로 있다. 질문과 답, 행위와 결과. 이것이 늘 짝으로 존재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간결해질까? 신비롭기까지 한 사람의 시간은 인과와 논리의 뒷걸음질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측면에서의 관계와 세계에 관한 조명을 하루키가 시도했는데, 그의 유명세와 인세, 몇몇 작품에 관한 프리즘으로만 이 작품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행위, 결정, 모험, 연결. 이런 것이야말로 소설의 핵심 중 몇몇 부분일 것이다. 저마다 연결되어 소설을 구성하는 일부. 작품 속 하루키의 자아가 쓰쿠오라면, 그는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끝까지 탐구한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이 따돌려지는 상황을 감내하려다 보다 쉽게 섞이는 것으로 상황을 반전시킨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세상과 좀 더 쉽게 섞이는 도취가 아닐까?

 역설적으로 이 작품 속 어느 누구도 강렬한 도취를 체험하지는 않지만 다자키 쓰쿠오만은, 현실이 아닌 그의 꿈속에서 강렬한 성행위로 도취를 맛본다. 현실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맹렬한 질투를 경험한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그 질투가 작동하는 것은 작가가 숨겨둔 은밀한 꼬리표 같다. 이 꼬리표를 손에 쥐고, 다음 역을 찾아가는 일이 이제 남았다.



 다자키 쓰쿠오의 순례를 함께하는 독자에게 다자키 쓰쿠오는 곧 천천히 읽어야 할 글귀와도 같다. 다자키 쓰쿠오에게 자신의 마음을 이입하고 그가 생각하는 땅콩이나 칵테일을 떠올리며 그와 함께 어느 바에 들어갔다가 마침내는 핀란드까지 떠나게 된다. 그런 다음 그가 연어와 허브를 오븐에 함께 구워 레몬을 뿌리고 포테이토 샐러드를 핀란드에서 먹는 부분에서는 마침내 독자 자신의 마음과 쓰쿠오의 상태에 관한 자료를 종합하여 확인에 이른다.

 쓰쿠오가 직접 옛친구들을 만나 들은 답은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어느 정도까지는 활용할 수는 있는 정보이다. 하루키는 답을 듣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 그 점이 미스터리를 제시하고 이야기를 꾸려 나가며 독자로 하여금 나름의 해석을 할 수 있게 하는 하루키의 힘일 것이다. 

 

 



 그의 힘은 자신이 사용하는 일상의 단어, 여전히 불확실하여 가려진 완전하지 않은 답으로 존재하는 결말에 있다. 세간의 평가처럼, 반하거나 변하는 감성, 혹은 감각적이거나 깔끔해 보이는 특정 사물로 드러나는, 또는 특수 연령층에 어필한다고들 하는 어떤 표현에 관한 판단을 잠시 보류하고, 질문으로 드러난 그의 태도를 들여다본다. 

 

 



 소설 속, 나타났던 모든 미스터리에 관한 답이 1:1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어떨까요? 난 모르죠. 그렇지만 아마도 그때 아버지에게는 믿느냐 안 믿느냐 문제가 아니었을 거에요(118 페이지)." 

 "우리네 인생에는 어떤 언어로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 법이죠(304 페이지)." 

 "그렇지만 지금은 새벽 4시고 새도 아직 눈을 뜨지 않았어. 내 머리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고. 그러니까 앞으로 사흘만 기다려 줄래?(407 페이지)"  




 하루키는 모든 것이 기계처럼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이 설정한 알레고리를 통해 드러내 보인다. 어려운 것을 쉬운 것처럼 말하고자 하는 의지는 소설 속 인물들이 특정한 일에 익숙해져 마침내 일상으로 자리 잡곤 하는 부분에서 슬며시 드러난다. 

 

 



 일상의 정밀함 위에 드러나는 단순한 낱말들. 

 그 말 틈을 비집고 흘려보내는 작은 바람. 

 

 

 

 하루키의 소설 속 이정표와 이름표를 따르다 보면 일상 속의 이야기가 보인다. 그 사이 크고 작은 풀리지 않거나 대답하지 않은 상처가 드러난다. 잠시 작가에 관한 세간의 평가와 열기, 뜨겁거나 차가운 무엇을 내려놓고 천천히, 그리고 태연하게 순례에 동참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순례 끝에 되돌아갈 곳은 스스로 얻는 답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때로는 그것은 터널일 수도, 역일 수도, 생각지도 못한 어느 먼 이국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름이 오거나 겨울이 오니까. 우리는 몇 번의 겪지 못한 여름과 이미 겪은 겨울을 먼 미래처럼 바라보고 오래된 과거처럼 잊기도 하니까.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고 잠들었다. 의식을 꼬리에 매달린 빛이 멀어져 가는 마지막 특급 열차처럼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작아지더니 밤 가운데로 빠져들어 사라졌다. 그리고 자작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만 남았다.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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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말하는 사람들 - 일러스트레이터와의 대화
박선주 지음 / 지콜론북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비둘기떼, 빗소리 자국, 거리, 꽃, 안개, 숲, 텅 빈 어느 곳. 희거나 검은 형체, 바삭한 질감, 구둣굽 소리, 색깔, 냄새, 습기와 건조함. 상상한 그 어떤 것은 내가 보았다고 믿었거나 볼 것으로  생각한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도 했다. 기억한 이것이 맞고 틀림을 떠나 머릿속에서 머리 밖으로 풍선처럼 날아오르는 순간이 있다. 보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걸, '그림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알려주었다. 






 


 

 

 


by Jon McNaught




 일러스트에 관해 말하면 어떨까? 안네 프랑크의 집에 관해서. 버스 정류장의 모습을, 아프로디테상을, 공중전화부스를, 크리스마스 산타의 행렬과 안네 프랑크의 펜 끝을 드러낸 일러스트레이션에 관해서.





 귀를 기울이면 안네 프랑크가 썼던 일기장을 펜이 스치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눈으로 덮인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가 만져질 것 같다. 책장을 넘기는 바람 소리가 들려 내 눈이 저절로 저 먼 곳을 볼 수 있는 순간이 있다. 어둠이 내린 거리, 가로등은 빛을 수줍게 밝혔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온 적이 있었다. 눈길이 있었고 손끝에 닿던 머플러의 감촉이 차가웠다. 길가 비둘기가 뭔가를 부리로 쪼고 있었고 노점상은 주름진 손으로 신문이며 과일을 바구니에 넣고 있었을 것이다. 바람이 살짝 불어오면 비둘기떼가 기다렸다는 듯 낙엽처럼 하늘로 오른다. 불빛에 비친 먼지가 함께 하늘거린다. 이것을 놓치며 살아가는데, 이것을 붙드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면, 일러스트레이션은 이 시각적인 작업을 통해 우리에게 잊지 말라고, 감정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손끝이 찌르르해지는 책이다.







by Allessandro Sanna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잠시 들여다본다. 어떤 특정 개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드로잉을 포함한 일체의 시각화 작업, 바로 일러스트레이션. 우리가 줄여 부르는 일러스트라 일컫는 영역. 시각 디자인의 한 분야. 인쇄매체의 영역을 벗어나 이미지를 통한 내용 전달.

 시각 예술 내에서 사진이 있는 그대로 무언가를 보여주어 신뢰감을 심어준다면 일러스트레이션은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반면 사진은 현장에서 일어난 무언가를 생생하게 기록한다. 로모와 DSLR, 노출과 조리개가 바로 사진 일부이다. 기기의 발전과 함께하는 현장성, 기록성 등의 영역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은 사진과 경쟁하지 않는다. 일러스트레이션은 그 영역의 제한을 받지 않음으로 하여 스스로 한계를 벗어난다. 



 


 일러스트레이션은 생각한 것을 마법처럼 보여준다. 재크와 콩나무의 콩나무가 하늘의 구름을 뚫고 올라갈 때, 일러스트레이터는 아마 작은 환성을 지를 것 같다. 그 최초 발생을 동굴벽화라고 해도 될까? 아니, 이집트인의 진흙, 석회석으로 그린 그림, 파라오의 수호자 호루스, 폴리페모스의 눈을 찌르는 오디세우스도 일러스트레이션의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그러다 우리가 지금 흔히 생각하는 단어를 뒤틀어 구름을 잡고 이미지를 끌고 내려와 붉은 풍선을 만들어내는 일러스트레이션의 특징은 18세기 초, 정치 풍자 일러스트레이션이 많이 제작되면서부터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제는 디자인과 광고의 영역을 벗어나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이 일러스트레이션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





 

 


by Heidi Goennel





 알레산드로 산나, 구르부스 도간 엑스이오그루, 이성표, 이케르 스포지오, 세르주 블로크, 블랑카 고메즈, 칼레프 브라운, 마사코 쿠보, 숀 탠, 두르가바이 브얌, 제시 티스, 레아 던컨, 존 맥노트, 조란 퓬게차르, 아오이 후버 코노, 크리스토프 니만, 하이디 고넬, 해리엇 러셀, 사라 파넬리. 





 이 책을 열면 만날 수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질문을 던지고 책을 엮은 박선주의 질문에 답하며 자신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소개한다. '그림으로 만나는 사람들'에 나오는 일러스트레이션은 우리 손아귀 밖에 있는 것들이었다. 내 마음을 끌었으되 내가 그리지 못했던 것들. 내가 무심히 스쳤으되 심방과 심실 어딘가에 남아있던 것들. 내가 가진 풍경의 일부, 내가 겪었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햇볕이 내리쬐던 어느 날. 풍경을 풀어내고 상황을 제시하고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그것이 그들의 일부가 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지점을 아무 것도 없는 공백에 펼쳐나간 이들의 대답과 필치. 





 이들은 박선주의 질문에 답하면서 그림만큼이나 자신을 드러낸다. 현재 이탈리아 만투아에서 작업 중이라는 알레산드로 산나는 아이디어와 콘셉트가 테크닉보다 먼저라는 말을 하며 색은 별로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여백이었고 붓 자국이었다. 작업을 위한 아이디어는 그에게 공짜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밝힌다. 나가서 주변 세상을 보기도 하고, 손이 지쳐 그릴 수 없을 때까지 그리기도 한다는 대목에서는 뉴요커의 커버를 오랫동안 담당했던 장 자끄 상뻬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린다는 것은 보는 것이었으며 대화를 나누는 일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더이상 그릴 수 없을 만큼 그리기도 했다는 점은, 일억 시간 이상을 바쳐도 모자랄 그들의 일러스트레이션에의 애정을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했다. 




 

자신의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세월이 흘러서 그리고 싶은 그림은 어떤 것인가요?

:감정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미지는,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감정을 전해야 합니다. 보는 이가 생각하도록 만들거나, 적어도 보는 이의 기억 속에 남아야 합니다. 제 이미지들이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아주 간단한 이미지라도, 보는 이의 마음에, 그의 머리에 각인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 정신과 마음이 어린이의 것이라면 더 좋을 것입니다. 더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살펴보면, 다른 책, 데이비드 베일즈, 테드 올랜드가 쓴 'art & fear'의 한 부분이 떠오른다. 



 텅 빈 캔버스에 가해지는 처음 몇 번의 붓질은 수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을 주지만, 최후 몇 차례의 붓질은 오로지 그 그림에만 맞는 것으로, 더이상 다른 그림이 존재할 자리는 없게 된다. 상상 속의 자굼을 실제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하나의 가능성만을 현실로 바꾸며, 매 단계는 미래의 선택들을줄여 나가는 과정이다. 그러다 어느 한 시점에 가서 그 작품은 다른 작품으로는 도저히 될 수 없게 되며, 그것이 바로 작품의 완성이다.-데이비드 베일즈, 테드 올랜드

 


 

 결국, 이것은 일러스트레이터 자신이 자기 목소리와 손길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기 뜻대로 펼쳐 보이는 과정이되, 보는 이를 세심히 고려한 작업의 결실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짧은 흥밋거리로, 잠깐의 재미로 여기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알레산드로 산나가 그린 '안네 프랑크의 펜'을 볼 때 어떻게 한 소녀의 갇힌 마음과 그 소녀가 꿈꾸었으나 가보지 못한 세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구르부스 도간 엑스이오그루의 철로 위에 있는 집,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두 군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며 어떻게 전쟁과 전투에서는 누구도 죽음이라는 같은 운명을 가졌음을, 깨닫지 않을 수 있을까? 

 세르주 블로크의 연말연시 런던 투어 관련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며 유쾌한 빼기의 법칙을, 블랑카 고메즈의 심플한 일러스트레이션에서 "단순함이란, 명백한 것을 빼고 의미있는 것을 더하는 것이다."라는 존 마에다의 말과 일치하는 지점을 모르는 척 할 수 있을까? 





by Gürbüz Dogan Eksioglu


 



 '다른 무엇', '새로운 무엇'에의 감동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할 것 같다.

 노란색을 좋아해서 노란색이 들어간 일러스트레이션을 좋아할 수도 있다. 더 선명하고 진짜같이 그린 해바라기 그림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것을 좀 더 다르게 그린 고흐의 해바라기를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보는 것, 생각한 것, 또는 느끼는 것을 새롭게 드러내는 해바라기밭이 있다면, 그 앞에서 어떻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이 세상 하나밖에 없는 사물이 단 하나의 프레임에 담긴다면 그처럼 재미없는 일도 없을 것 같다. 보고 느끼고 듣고 맛보는 모든 것이 그 모든 것의 주체인 '나'의 안팎에서 벌이는 사건도 없을 것이며, 다양한 긴장과 높낮이도 사라질 것이다. 새로움, 다채로운 색감, 의외의 선, 생각지 못한 형태가 일러스트레이터의 눈을 통해 드러난다. 일평생 단 하나의 사과만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책 속 다양한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노라면 하나의 사과에서 벗어난 다양한 형상과 색깔이 눈에 들어온다.


 



 보는 것은 그 속성을 들여다보아야 제대로 이루어지는 어려운 일. 머리 속에서 머리 밖으로, 풍경 속에서 밖으로 선명하고 밝은 빨간 풍선이 살짝, 하늘로 날아오르면 아마도 재크와 콩나무가 있었던 구름 위로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상황의 핵심을 자기 눈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게 되는 이들의 이야기.






by Harrier Russell

 




 인터뷰와 일러스트레이션을 담아 앞으로 일러스트레이션을 하려 하거나 하고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당연한 말 대신, 나는 이 책이 문장부호가 알맞게 쓰인 풍경의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에는 일러스트레이션의 전반적인 형태와 개성이 눈에 들어오지만, 결국 그 모든 특성은 우리가 무심코 보아 넘기는 세상의 풍경에 자리를 양보하기에. 그리고 여기에는 가벼운 깨달음이 뒤따른다. 일러스트레이션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결국, 이 틀 안에 담긴 아이디어는 우리가 지나친 것들의 합산이라는 점. 최초에 공백과 여백이 있었다면 이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제자리에 필요한 순간 있는 여백으로 있는 크리스토프 니만의 쉼표,

 무채색 거리에 점을 하나 찍듯 붉게 타오르는 알레산드로 산나의 마침표. 

 매력적이고 설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담아낸 숀 탠의 느낌표!

 존 맥노트의 버스 정류장에는 통행 허가증 없는 줄임표가 통행 허가증 없이 가지런히......

 사진과 페인팅을 전공하고 양식화된 경향을 보이는 하이디 고넬의 일러스트레이션에는 큰따옴표가,

 블랑카 고메즈의 산뜻하고 경쾌한 일러스트레이션은 작은 따옴표를 노래한다.




 이들의 일러스트는 말을 걸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 공기가 산뜻하여 새롭다. 마치 유월의 마지막 날이 춤을 추듯. 




 

 


by Blanca Góm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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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7-01 0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업을 위한 아이디어는 공짜로 하늘에서 떨어지는게 아니라'는 말씀에 동감해요.
Gürbüz Dogan Eksioglu의 나무가 통째로 하늘을 나는 그림, 여러개의 달 그림, 빨간 주전자 등은 금방 보고 지나치지 못하게 눈길을 붙드네요.
알렉산드로 산나처럼 '아이디어와 콘셉이 테크닉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테크닉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더라고요 ㅠㅠ

Jeanne_Hebuterne 2013-07-04 08:10   좋아요 0 | URL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도, 아마 명필이 되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붓을 써봤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 있답니다. 뭔가를 잘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실력은 기본, 장식은 옵션'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어 의기소침해진 적도요.


최근 일러스트레이션을 담은 책을 두어 권 접했는데, 이 책의 경우 다양한 스타일의 일러스트레이션과 인터뷰가 실려 있어 보편성을 띠는 것 같아요. 이제 본격적인 장맛비가 내린답니다. 하늘에서 일억 개의 물방울이 쏟아질 텐데, hnine님의 장마용 음악과 함께 주말을 보내야겠어요!

다크아이즈 2013-07-04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러스트레이션까지 접수하시는 테른님^^*
풍경처럼 깨달음처럼 또는 배경이거나 물결인 것철럼
님의 안내로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 살짝 들여다 봅니다.
후텁지근하네요. 어서 여름이 지나가길요^^*

Jeanne_Hebuterne 2013-07-19 09:42   좋아요 0 | URL



성실한 접수계 직원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댓글 고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람도, 사람이 만든 그 무엇도 의심하는 늙은이의 고까운 자세로 대하곤 하는데 종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좋은 작품을 접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한낮, 나무 아래서 아이스 카페라테 한 잔을 손에 들고 사진을 찍으면 여기는 캘리포니아라고 우겨도 속아 넘어갈 날씨입니다. 어느 곳은 홍콩 같을 것 같기도 하고요.


무더운 여름, 더워서 좋은 여름, 그래서 여름. 잘 보내요! :)

 
[수입] 브루노 발터 에디션 [39CD LP 사이즈, 독일반]
드보르작 (Antonin Dvorak) 외 작곡, 발터 (Bruno Walter) 지휘 / SONY CLASSICAL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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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누군가를 기다리는데 그 사람이 다가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올 때의 반가움. 브루노 발터는 그런 종류의 따뜻함이 보이는 지휘자다. 그 따스함을 아주 오랜 시간 모르고 살았다. 이것은, 내게 브루노 발터를 소개해준 이에게 남기고 싶었던 작은 고마움. 아직 다 모를 높다란 천정의 빛깔이 따스하다.








박스 속 부클릿의 인덱스에는 베토벤, 브람스 교향곡 전곡, 말러의 1,2,4,5,9번과 대지의 노래, 슈베르트의 일부가 있다. 말러와 모차르트의 교향곡은 브루노 발터를 추천하는 이들이 많은데, 어떤 걸까. 그것은 아마도, 그 지휘자와 작곡가의 특성이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지점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고전 음악을 듣노라면 필연적으로 같은 곡을 여러 지휘자와 악단의 연주로 듣게 되는데, 어느 한 지휘자의 방법이 단 하나의 길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같지 않을 다양한 해석을 더 잘 느끼고 감동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곡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그 곡의 충실한 해설자, 전달자로 존재하는 지휘자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이 박스셋의 부클릿은 브루노 발터에 관한 꽤 상세한 정보를 지루하지 않게 전달한다.


그의 생애, 포디움에서의 경력,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을 지휘하게 된 일, 스튜디오 녹음이 부클릿에 상세히 실려있다. 수입반이라 한글은 없지만 영어와 독일어로 실린 이 글은 모두 삼십여 페이지에 달하는데 쉬엄쉬엄 드문드문 읽어도 꽤 유용할 것 같다. 글 사이를 비집고 참조할 음반 번호가 함께 있어 음반을 한 장씩 꺼내어 들으며 읽으면 더 유용한 글. 잠시 그 안을 보면, 왼쪽부터 브루토 발터, 토스카니니, 클라이버, 클렘페러, 푸르트뱅글러가 함께 찍은 단체 사진, 맨하탄 센터에서의 레코딩 작업 등이 흑백으로 실려있다. 천천히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이 사진을 들여다보면, 포디움에서 불빛의 강하고 약함을 조절하듯 음을 고르는 그의 손길이 들릴 것 같다.










같은 지휘자라도 어느 악단과 함께 연주하는가, 혹은 그 지휘자의 어느 시기에 지휘한 것인가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온다. 이 부클릿에서도 그리 전하듯 브루노 발터 역시 그런 변화를 거친 듯하다. 잠시, 부클릿과 이 박스셋 밖으로 눈을 돌려 다른 이의 말을 들어보자. 전 <객석>편집장 류태형의 글을 옮기자면 아래와 같다.



음반으로 발터의 지휘를 접한 이들은 대부분 발터 최만년의 스테레오 녹음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건강이 쇠퇴하고 있을 때의 기록이며,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하듯 스테레오 음반들은 발터 전성기의 예술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온화한 측면이 너무 부각되고, 청장년 발터의 미덕이기도 했던 경쾌하고 맹렬하며 원기왕성한 특징은 결여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론 만년의 레코딩은 모차르트에서 말러에 걸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도 언급했다시피 발터는 젊은시절 동시대 음악(말러를 포함해서)을 자주 지휘했다. 발터는 말러와 조수이자 제자로서 가까운 거리에서 공동작업을 했다. 말러는 자신의 [대지의 노래]나 [교향곡 9번]이 연주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미망인인 알마 말러는 발터에게 두 곡 모두 초연해줄 것을 요청했다.

발터는 1911년 [대지의 노래]를 뮌헨에서 1912년 [교향곡 9번]을 빈에서 빈 필과 초연했다. 그 뒤 발터와 빈 필(말러의 매부인 아르놀트 로제가 여전히 악장을 맡고 있었다)은 1936년 [대지의 노래]의 최초 레코딩을 녹음했고 1938년 [교향곡 9번]을 녹음했다. 둘 다 실황이었으며, [교향곡 9번] 녹음 두 달 뒤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인해 발터와 로제는 국외로 탈출해야 했다.

캐슬린 페리어, 줄리어스 파착, 빈 필과 함께한 유명한 데카반 [대지의 노래]는 1952년 5월 녹음됐다. 그리고 발터는 1960년 뉴욕필과 스튜디오에서 이 곡을 재녹음했다. 1957년 뉴욕 필을 지휘해 말러 [교향곡 2번] 스테레오 레코딩을 만들었던 그는 1961년 말러 [교향곡 9번]을 스테레오로 녹음했다.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LP로 발매된 이 음반들은 나중에 소니에서 CD로 발매됐다. [교향곡 9번]과 [대지의 노래]는 말러가 연주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논외로 하더라도 발터의 말러 연주는 독보적이다. 발터는 스승 말러 생전의 연주를 똑똑히 목격한 제자이기 때문이다. 말러 이외에 발터 하면 떠오르는 연주는 모차르트, 브람스를 꼽겠다.
-출처:네이버 캐스트 [클래식 ABC]








박스셋의 녹음은 콜롬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한 것인데, 녹음을 듣노라면 그 현장에서 그가 원했을지도 모를 어떤 목표 지점을 직접 듣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지금의 녹음 기술이 발전을 거듭하여 음반에 담긴 음악의 어떤 자취를 따르는 것이 내 일이건만,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어서 음반에 담긴 레코딩은 현장의 그 미묘한 공기를 다 잡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차르트 29번의 경우 어쩌면 카라얀의 레코딩이 브루노 발터와 비교했을 때, 깔끔하고 명확하게 들릴 수도 있다. 다르다는 것은 스테레오와 모노의 차이, 시기의 차이, 녹음 당시 여러 정황의 차이, 그리고 내가 생각지 못했던 어느 지점에서 오는 것일지도. 이 무수한 차이를 다 알아차리지 못하였지만 어느 것 단 하나가 절대적인 정답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거란 생각을 해본다.








브루노 발터가 거쳐간 곳을 잠시 살펴보자. 1896년 브레슬라우 오페라, 왕립 바이에른 오페라, 뮌헨, 베를린 라이프치히, 그 독일의 전역을 그가 떠나게 된 계기는 히틀러 집권이었다. 브루크너와 바그너를 좋아했으며 '히틀러 독일군을 보내기 음악을 먼저 보낸다'라는 말이 유럽에 떠돌 정도로 자신이 생각한 '독일인의, 독일적인 정통 음악'을 만들기에 집중했던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오히려 수많은 예술가들이 독일을, 혹은 아예 유럽을 떠나야 했던 것은 후세에도 널리 알려진 일이다. 브루노 발터의 원래 이름은 브루노 슐레징어. 슐레지엔의 사람이란 뜻이 담긴 그 이름 개명 전까지는 이 이름을 계속 쓰다가 개명 후 브루노 발터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나치를 피해 오스트리아로, 그 훗날엔 미국으로까지 이주한 다음 그가 선 포디움은 콜롬비아 심포니. 나치를 피해 온 그들의 음악이 서른아홉 장 중 절반을 차지한다. 베토벤과 슈만, 멘델스존, 바그너에 이르기까지.



부클릿을 들여다보면 그는 일생에 걸쳐 shellac records, mono long-playing records, stereo LP 등 다양한 종류의 녹음작업을 하였는데 지금 브루노 발터의 음악을 듣는 내게 말을 건네듯, 말러의 교향곡 녹음에 관하여 이런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We must not forget that mono records can only reproduce the extreme contrasts in dynamics characteristics of Mahler's scores to a limited extent. Even on compact disc, a on hundred piece symphony orchestra cannot be transferred into a private living room as one would wish.
-Götz Thieme








그의 따스한 모차르트, 여운을 남기는 브람스, 역사적인 말러를 듣는다. 생전에 그는 베토벤, 슈베르트, 바그너,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는 모차르트를 자신이 관심을 둔 작곡가로 꼽았다고 한다. 모차르트를 가장 마지막에 언급한 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숙해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모차르트의 작품을 얼마나 특별히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다. 부클릿에서 브루노 발터가 언급하는 모차르트는 섬세한 그의 이해 끝에 구축된 세계였다.




"it took me quite a long time to completely abandon my picture of "the composer of the 18th century" or "the Rococo" of "the composer of smiles". in other words, to abandon the image of Mozart as a light-hearted imposer(I would never have had a problem with the 'dry classicist') in order to discover behind the facade of playful charm the unyieling earnest, the sharp characterisation and the creative wealth of Mozart the dramatist. Only when did I finally realise tha Mozart was the Shakespare of opera."-Bruno Walter




수록된 음반 중에는 1956년 3월 녹음한 주피터가 있다. 지금 스테레오를 당연한듯 즐겨듣는 나에게는 오히려 생소했던 모노 녹음인데, 음질 문제는 뒤로 하고 오히려 더 적당한 균형, 감성의 강약이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모습이 드러난다. 중압감을 떨친 자유로움은 이런 것일까? Götz Thieme는 같은 해 녹음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Irmgard Seefried, Jennie Tourel, Léopold Simoneau, William Warfield 등의 훌륭한 솔리이스트들의 모차르트 레퀴엠보다 주피터를 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연주로 꼽는다. 브루노 발터의 모차르트에 대한 이해는 그러나 이미 짤츠부르크 페스티벌 때에 이루어졌다는 본인의 고백을 생각한다면, 예술가에게는 어떤 중요한 시기와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지휘를 들으면 악보의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핵심을 유려하게 풀어내는 듯하다. 물론 그것은 측정하기 어려운 것이나 혹자가 말하는 부드러운 멜랑콜리, 따뜻한 여운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독재자처럼 악단을 장악하지 않고 처음 모인 콜롬비아 심포니 단원들에게 '서로 더 깊이 사귈 수 있는 계기로군요. 좋은 가족으로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을 건넨 온화한 지휘자. 장악하지 않고 스며드는 조용한 음악을 떠올릴 때 많은 이들이 브루노 발터를 떠올리는 것은 그저 괜한 느낌에서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거장의 지휘를 시간이 흐른 지금 들으며, 이 박스셋 안에 실린 Frantz Werfel의 시를 다시 읽는다. 브루노 발터의 생각 한 자락이 조용히 미소 짓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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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은단수란걸명심해! 2013-07-01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루노 발터의 이번 에디션을 볼 때 마다 연이어 생각나는 음반은
알라딘에서 The Klemperer Legacy로 소개하고 있는 오토 클렘페러의 음반 세트입니다.
한정반이니 결정반이니 소개하고 있지만 10개 이상되는 세트로 나누어 발매되다보니
오히려 구매하기가 무척이나 애매하더군요.
그간 낱장으로 소장하면서 언젠가 한방에 몰아 발매하겠지 내심 기다렸는데
많은 클렘페러 연주 애호가들이 기대를 EMI Classics는 나누어 발매하는 것으로 배반(?)한 셈입니다.
브루노 발터하면 오토 클렘페러가 함께 연상되는 것이 저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이상은 Jeanne_Hebuterne 님의 좋은 리뷰를 보며 떠오는 단상이었습니다.^^
 
알프레트 브렌델 피아노를 듣는 시간
알프레트 브렌델 지음, 홍은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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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 감은 눈을 더듬어 소리를 듣는다. 멀리서 무언가를 실어 나르는 엔진 소리, 구름 밑 어디선가 지저귀는 새 소리, 길을 걷는 사람 목소리, 무언가를 옮기는 소리, 그리고 바람결을 타고 흐르는 음악 소리.

 

 

 


 음량, 음정, 음색, 이 세 가지가 소리의 요소라면 음악의 세 가지 요소는 리듬(rhythm), 선율(melody), 화성(harmony)이다. 음과 음이 시작되어 부딪히고, 파생되거나 새로이 생겨난다. 이 때 생겨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에 우리가 듣는 무언가가 음악의 '계'를 이루어 나간다면, 우리는 필시 이 다양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드러나는 은유와 치환, 숨김과 드러냄, 작거나 큰 울림. 이를 만드는 연주자들 중에서도 알프레드 브렌델은 드러내지 않음으로 드러내는 겸손한 피아니스트였다.

 

 

 

 

 


 여든도 넘은 이 오스트리아 출신 피아니스트는(실제는 현재 체코 소도시인 모라비아 태생이나, 오스트리아로 각종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됨) 2008년 '이제는 은퇴할 때가 되었다'며 조용히 피아노 앞에서 물러났다. 데카에서 그의 고별 연주회 실황을 출시했으며 최근 나는 그가 짧게, 조용히 갈무리한 '피아노를 듣는 시간'이란 책에서 그의 자취를 더듬는다. 알파벳 순서대로 어림잡아 단상마다 길어도 한 페이지 남짓한 생각 조각. 겸허하고 성실한 전달자.

 

 


 잠시, 브렌델이 평생토록 연주했던 악기인 피아노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공간의 부분으로 있었던 악기. 반복을 기점으로 기초를 배우고 기교를 조금씩 내 것으로 익히는 재미. 뭔가 다른 소리를 낼 것만 같아 마음이 딸꾹질 하던 때. 혼자 쇼팽과 베토벤,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들여다 보거나 포기하거나, 이 두 갈래를 오르락내리락하던 순간의 음악. 글렌 굴드는 오른손이 왼손에, 손가락 하나는 나머지 아홉 개에, 전체는 그 깊은 곳의 영혼에 답하는 것이 피아노 연주라 칭한 적이 있다. 브렌델의 연주에 귀를 기울인다. 조용하고 간결하다. 다른 연주자와 비교하면 조금 그 개성이 덜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입자가 조밀한 성실한 대화.

 

 

 

 

텍스트에의 충실성


연주란, 과연 뭘까요? 가능한 다 보여 주기.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가능한' 이란 말입니다. 때로는 텍스트에 대한 충실성이 지나칠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음악을 악보로 옮기거나 악보를 출판하는 과정에서 부정확하거나 잘못된 부분이 생기기도 하지요. 우리는 항상 '작곡가가 무엇을 기록하고자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또 '작곡가가 음악적으로 의도했던 바는 무엇일까?', '나는 어떻게 작품이 요구하는 대로 연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도 필요하지요. 텍스트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답니다. 

-책 속에서

 

 


 브렌델은 텍스트, 원전에 충실할 것을 이야기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가 악보의 엄격한 해석만을 강조하는 원전주의자라든가, 시대 악기만으로 곡을 연주해야 한다는 정격주의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원래 있던 텍스트, 작곡가의 의도 위에 연주자의 지나치도록 강한 개성을 덧입혀 잘못된 엉터리 감동이나 해석이 퍼져 나가는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닐까.

 

 

 

 

 객석을 지키는 이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작곡가에 관한 연주자의 의견이 궁금한데, 이 책에서 브렌델은 간결하게나마 모차르트, 쇼팽, 베토벤 등의 음악에 관한 그의 피아니즘을 털어놓는다. 이를테면 슈베르트에 관련하여 브렌델은 오히려 작곡가의 심경을 추측하여 더할 나위 없이 감성적인 연주를 들려주기도 한다. 이는 이 연주자가 원전주의자, 정격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슈베르트와 관련해서는 아래와 같은 단락이 눈에 들어온다.

 

 


 

 

 

 

슈베르트


 슈베르트는 흔히 순수한 서정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드라마틱한 음악 전개를 보면 이를 충분히 반박할 수 있을 겁니다. <방랑자 환상곡>에서 피아노는 오케스트라로, 아니 그 이상으로 철저하게 변신합니다. 기교가 뛰어난 피아니스트도 아닌 작곡가 피아노의 소리, 형식에 대한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후기이 소나타들도 오케스트라풍으로 작곡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오케스트라처럼 울려야겠지요. 현악 5중주에 가까운 마지막 세 개의 소나타는 예외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사실 피아노 음악에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첨가하지는 않았답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아우라, 이것이 그의 스타일이지요. 그의 피아노곡들은 페달을 섬세하게 써야 비로소 제 맛을 살릴 수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기보는 적힌 그대로만 표현되거나 혹은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책 속에서


 

 

 

 

 

 브렌델에게 있어 피아노란, 연주자가 전체를 지배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악기.

 

 

 

 피아니스트는 다른 연주자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으므로 즉, 자기 자신을 지휘하는 지휘자이자 가수인 셈이다. 그러나 음악 없는 피아노는 그에게는 악기가 아닌 검고 흰 조각이 맞물린 가구일 뿐이라고까지 말한다. 이 엇갈림으로 드러나는 음악의 조각이 꽤 날카롭다. 자신의 연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연주자가 보인다. 닫혀 있고 보이지 않는데 걸어야 하는 길이 나타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이러한 사진을 떠올려 본다. 연관되어 일순 정지하였으나 다시 이어질 찰나의 세계. 그 자락을 들여다보며 브렌델의 글과 음악을 들으면, 음악이란 가장 말이 없는 것, 가장 닫힌 것, 가장 논하기 어려운 분야로 존재하는 예술이라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감동이란 무엇일까?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음악이 있고, 얼마나 많은 갈래 속에 여러 가지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움이 숨은 것일까?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슈베르트, 이런 작곡가들이 이룬 작품을 접하며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 잠시 다른 분야의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이 세상 누군가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감동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에 감동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 비틀즈를 들을 수도, 베토벤을 들을 수도 있다. 또한 같은 베토벤을 듣더라도 파워풀한 연주자 길렐스를 떠올릴 수도, 정갈하고 간결한 연주자 브렌델을 떠올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쪽만이 정답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브렌델이 이야기하는 균형, 조화, 절제는 이러한 맥락에서 드러난다.


 

 

 

감동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스스로 감동할 수 있는 음악가만이 다른 이들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디드로와 부소니는 반대 입장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싶은 배우나 음악가는 스스로 감동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자기 자신이 감정에 빠져 버리면 예술적 매체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우리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두 입장을 동시에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책 속에서


 

 

 

 

 


 그의 글을 읽다 고개를 들면, 지금껏 여기까지 오면서 잃어버리거나 놓친 것이 있을 거란 생각이 뜬금없이 든다. 여러 가지 일, 사람, 상황, 사건, 바쁘거나 지치거나 적막한 극단 사이를 시소를 탄 마냥 하늘을 나는 비행기나 조용히 바닥에 깔리는 노을을 바라보기도 하며 보낸 시간. 지금까지 감동한 부분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사람들.

 

 

 

 

 

 쓰고, 만들고, 듣는다. 다양한 연주와 해석, 갈래에 따른 생각과 느낌이 이루는 체계, 작은 오솔길. 크레센도, 레가토, 음향, 해석자, 맥박, 앙상블, 단순, 극단, 감동을 따라가면 어느새 이 연주자의 고요한 숨결이 옆에서 느껴지는 듯하다. 그리고 그 숨결은 귀를 기울이는 정도에 따라 달리 들린다는 내 느낌을 조용히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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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은단수란걸명심해! 2013-06-23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프레트 브렌델의 <피아노를 듣는 시간>에 대한
Jeanne_Hebuterne님의 아름다운 리뷰 잘 들었습니다.
마치 브렌델의 피아노 소리를 듣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도 알프레트 브렌델이 연주하는 베토벤, 모짜르트, 슈베르트,
하이든의 피아노소나타를 즐겨 듣습니다. 가끔 바흐의 피아노 연주곡도요.
최근에는 브렌델과 레파토리가 많이 겹치는 빌헬름 캠프의 연주를 더 자주 듣지만요.

덧)
그런데 올리신 글 가운데
"또한 같은 베토벤을 듣더라도 독일 출신의 파워풀한 연주자 길렐스를 떠올릴 수도, 정갈하고 간결한 연주자 브렌델을 떠올릴 수도 있다."에서
길렐스는 아마도 에밀 길렐스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의 조국은 러시아 아닌가요.^^

Jeanne_Hebuterne 2013-06-23 00:49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인데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틀린 점 일러주셔서 고맙습니다 . 저는 왜 길렐스가 독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군요(재빨리 수정!!)!!

브렌델이 연주한 하이든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는데, 댓글을 보니 궁금해집니다.
빌헬름 캠프도! 찾아서 듣도록 해야겠어요 :)
 
제이슨 브룩스의 파리 스케치북
제이슨 브룩스 지음, 이동섭 옮김 / 원더박스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날마다 축제인 곳이라고 헤밍웨이가 말하고 모두가 배우가 되는 곳, 누구도 관객으로 남지는 못하는 곳이라고 장 콕토가 말한 곳, 그곳을 오늘 떠올렸습니다. 봄날 집에서 맡는 저녁같은 냄새의 도시. 에펠탑과 보주 광장, 마카롱과 카페 드 플로르, 디올의 부티크, 툴르즈 로트렉과 모딜리아니, 에콜 드 파리, 인상파와 아르 누보, 기마르 헥토르의 메트로폴리탄, 개선문의 도시, 파리.











P,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겪습니다. 그걸 당신은 그저 보여 주곤 해요. 들려주고 보여주고 드러냅니다. 그래서 당신은 '뒷모습'이라는 사진집에는 에펠탑 뒷골목 쓰레기를 가득 안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고다르 감독의 영화에서는 흑백의 봄날 냄새를 풍기기도 해요. 나는 당신의 꽤 다양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디자이너 브랜드, 카페, 서점, 마카롱, 그곳에 사는 사람의 옷과 향수, 미술품과 생활양식까지. 그리고 당신이 너무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에펠탑까지도.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고도 다시 당신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라고 투덜대는 당신의 잔뜩 찌푸린 낮은 구름 표정이 떠오르지만, 오늘 저는 당신에 관한 또 한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세계 3대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제이슨 브룩스가 스케치한 당신 모습이었습니다. 건축, 거리, 카페, 패션, 쇼핑, 예술, 이동, 밤. 이 챕터로 당신 얼굴이 200여 컷도 넘게 있었어요. 종종 당신은 그 안에서 냉담하거나 서늘했습니다. 이를테면 저 컷이 그랬습니다. 보주 광장인데 그 날은 추웠나 봅니다. 제이슨 브룩스는 당신에게 이렇게 썼어요.

'보주 광장은 17세기 초에 조성되었다. 나는 건물 회랑 앞에 올곧게 서 있는 잘 손질된 나무들을 그렸는데, 잎이 다 떨어진 한겨울의 삭막한 나뭇가지들이 서로 얽혀서 길게 이어져 있다.'










당신에 대해 다 알지는 못해요. 그러나 이 일러스트레이터가 바라본 당신은 아주 화려한 화장을 벗고 오랜만에 무표정한 무채색 옷을 입었습니다.



카페 테이블에서 웃고있는 연인은 얼핏 브라사이의 사진같기도 하고, 도로 뒤편에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은 핫젯의 사진처럼 절반 정도만 보인다. 만약 당신이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를 피해 따뜻한 카페 안으로 뛰어들었다면, 스스로 헤밍웨이 소설 속 인물이라도 된 듯 느껴질 것이다. 이렇듯 과거와 현재의 조화로운 공존이야말로 파리가 품은 마법과도 같은 매력이다. ... 파리는 세느 강을 기준으로 좌안과 우안으로 나뉜다. 그리고 중앙의 1구부터 동쪽의 20구까지 시계 방향으로 나선형을 이루며 20개의 구로 분할되어 있다. 물론 모든 지역은 각각 고유한 특징과 거리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있어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다. 그래서인지 많은 차들이 오가는 파리 외곽 순환도로 한가운데 서 있자니 파리 자체가 하나의 우주로 느껴졌다.-책 속에서















아마 저 가로등 앞을 지날 때 비가 온다면 당신은 가느다란 은빛 빗살무늬를 만들겠지요. 거미가 줄을 타고 올라가듯 거꾸로 보는 그 빗방울은 하늘로 올라가는 듯 보일 거에요. 제이슨 브룩스는 종종 거리의 사람들, 가로등, 각종 현관문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얼굴은 늘 달라요. 그것은 가볍거나 무겁고, 담배 연기 같거나 구름 같고, 두부같은 질감으로 입안에 들어오다가도 마카롱처럼 녹아버려요. 입안에 가만히 당신을 품고 있으면 알 수 없게 녹아버리는데 그 맛을 사람들은 '파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지요.











잠시 제이슨 브룩스의 눈으로 마카롱을 한 번 볼까요. 똑같은 마카롱인데 그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그렸습니다. 마카롱. 먹기 전에 한번쯤은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었던 걸까요? 원래 이 과자는 카트린느 드 메디치가 앙리 2세와 결혼하면서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과자였다지요. 설탕, 아몬드, 코코넛, 호두 등 분말을 메렝게로 섞고 구워 크림을 바른 과자. 밀가루를 쓰지 않아 쿠키와 질감이 달랐어요. 그런데 이 오랜 역사를 가진 과자가 지금 제가 있는 곳에서는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이 꽤 즐겨 먹는 과자가 되었지요. 그것은 초콜릿 볼케이노의 뒤를 잇는 사람들의 반응이었다는 마케터의 말을 듣고서야 이해가 갔습니다.



초콜릿 볼케이노, 이름만 들어도 느낌이 대충 오지요? 초콜릿 화산 케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진득하고 진한 초콜릿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는 케잌이었습니다. 이 케잌이 파리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지요. 스펀지 케잌과 초콜릿 크림, 설탕 시럽, 커피 에센스가 주재료인데 마카롱의 담백한 재료와 꽤 많이 달랐습니다. 이 진한 케잌의 인기가 시들해진 다음 유행한 것이 마카롱이었어요. 사람들은 생각지 못한 폭발적인 인기 이후 슬그머니 눈을 돌리는 성향이 있나 봅니다. 강력한 엔진의 사륜구동을 팔고 하이브리드를 사듯 강한 맛의 초콜릿 볼케이노 다음에 가벼운 느낌의 마카롱을 찾다니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당신 얼굴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세기를 방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여행이라면, 당신을 보는 일은 곧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보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코르셋 다음의 샤넬이 그랬고 박물관 앞의 유리 피라미드가 그랬습니다. 길을 걷다 들어가는 카페 드 플로르의 커피잔에는 헤밍웨이가 보았을 비슷한 디자인의 커피잔에 여전히 카페 드 플로르 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겠지요.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럴 때의 당신은 참 달라요. 눈, 코, 입이 눈, 코, 잎으로 보인달까요. 자세히 보면 브룩스가 그린 당신의 모습은 꽤 여러 갈래입니다. 샹젤리제 거리의 일방통행로, 몽테뉴 거리의 명품 숍, 엘리제궁에서 시작해 브랜드의 끝장을 보여주는 포브르 생 토노레 거리, 주얼리 샵의 집대성인 방돔 광장까지, 이 일러스트레이터는 자신의 개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런던 세인트 마틴 에술학교를 다닐 때부터 보그 주관의 Vogue Sotheby’s Cecil Beaton Award에서 패션 일러스트 부문 수상, 영국 보그의 패션 일러스트 담당. 영국왕립예술학교의 일러스트 석사 등의 학력과 경력을 뽐냅니다. 그런데 지금은 비저네어, 인디펜던트, 엘르를 오간 다음 칸디 음반사의 비주얼 작업, 버진 애틀랜틱 항공사의 광고를 맡았다니 이 작가는 필시 자신의 주력 무기를 당신의 가장 화려한 모습에서 찾은 것이 분명합니다. 거리, 미술관, 밤, 카페의 당신은 곧잘 민얼굴에 느슨한 셔츠를 입었지만, 패션 부분에서만큼은 샤넬의 검은색과 방돔 광장에서 구입한 듯한 보석, 빈티지를 적당히 섞기도 했지만 자신의 얼굴 개성을 그대로 드러낸 표정을 드러냈어요. 당신은 오 트 쿠튀르와 기성복, 스파 브랜드와 빈티지를 조화롭게 섞을 줄 알아요. 주목받는 패션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모습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일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당신에게 샤넬과 라거펠트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당신에게는 이미 로트렉, 드가, 마티스, 모딜리아니가 있었지요. 지금 이곳에는 당신의 모습 중 인상파의 일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꽤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달라지는 빛의 움직임, 그 질감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에 중심을 둔 인상파 화가들은 19세기 후반부터 찰나의 순간을 관찰했고 그 거친 터치와 흐트러진 선이 고흐와 고갱, 쇠라와 세잔의 다른 화풍을 가진 후기 인상파로까지 남았더지요. 무엇인가를 이어가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입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접하는 전체 흐름 속에서 낙숫물처럼 똑똑 떨어지는 그 지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당신은 회화에서 특히 잘 보여 주곤 했어요. 크고 도도한 흐름 속, 종종 사람들이 주목하는 지점도 또한 있겠지요. 고흐나 모딜리아니처럼 작가주의 특성이 아주 강한 화가도 있을 것이고 마티스처럼 또렷한 지점을 드러낸 화가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드로잉을 “특별한 손재주가 있어서 하는 활동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마음속 느낌과 기분을 표현하는 수단이다.”라고 말했다는데 마티스의 작품을 아마도 브룩스도 유심히 본 모양입니다. 마티스는 또한 “비평가들이나 동료들이 내 말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은 나를 이해시킬 만큼 내가 분명치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지요. 저는 마티스의 이 말을 실반 바넷의 ‘미술품 분석과 서술의 기초’에서 읽었습니다. 이럴 때의 당신 목소리와 표정은 떨림이 없고 확신에 차 분명하다는 느낌입니다.











위의 사진은 이 책이 아닌 인터넷을 검색하다 얻은 것입니다. 헥토르 기마르가 디자인한 화려한 곡선이 제이슨 브룩스의 펜을 거치면서 좀 더 조용한 것이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미술품 분석과 서술의 기초에서 소개하는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물 평가의 기준을 아래와 같이 제시했다고 합니다.

기능 Utilitas : 목적과 일치, 실용성
견고함 Firmitas : 구조적으로 단단함
아름다움 Venustas : 디자인

또한 존 러스킨은 “모든 건축은 인간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고자 하며 단순히 인간의 몸체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지요.

지하철은 당시 꽤 새로운 교통수단이었을 겁니다. 근대의 새로운 탈 것, 사람들의 움직임을 더 빠르게 해주는 기구. 새롭고 또 새로워야 했을 겁니다. 헥토르 기마르가 선택한 재료는 철과 유리이며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은 곡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직선 사용을 거부하고 시대 감각을 나타내며 새로운 재료의 가능성.Jugendstill, Style Guimard, Stile Liberty,그리고 당신은 이것을 Art Nouveau 라고 불렀지요. 저는 제이슨 브룩스가 스케치한 이 메트로폴리탄을 보며 잠시 곡선으로 짜인 느린 움직임의 아름다움을 엿보았습니다. 언뜻 보면 느슨한 스케치이지만, 아마 이 일러스트레이터도 그것을 포착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잠시 지하철이 아닌 차를 타고 어디론가 당신의 다른 구석을 떠올려 볼까요. ‘아주 쌩쌩 빠르게’가 아니라 ‘교통체증에 잠시 시달리며 느리게’여도 좋은 것은, 진 세버그가 나왔던 영화 'breathless'가 떠올라서일 겁니다. 제이슨 브룩스는 그들이 함께 차를 타고 가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하여 그렸습니다. 이 그림의 중심축에는 개선문이 보입니다. Arc de triomphe de l'Étoile이 정식 명칭이며 에투알 개선문이라고도 부릅니다. 샹젤리제 거리 서쪽, 샤를 드골 광장에 있지요. 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열두 개의 거리가 방사형으로 퍼져 있습니다. 잠시 위키 백과의 설명을 들여다보니, 이런 글귀가 보입니다.


파리의 상징적인 건축물의 하나로, 단순히 개선문이라고 말하면, 파리의 이 개선문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아 세계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샹젤리제 거리를 시작, 12개의 거리가 부채꼴 모양으로 뻗어 있어 그 모양이 지도 위에서 빛나는 "성 = étoile"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광장은 "별의 광장 (la place de l' Etoile, 에투알 광장)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에투알 광장의 개선문”의 정식 명칭은 'Arc de triomphe de l' Etoile 이다. 그러나 현재 이 광장은 샤를 드골 광장(la place de Charles de Gaulle)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승리의 아치’(Arc de triomphe)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개선문 자체는 전승 기념비이다. 따라서 개선문은 파리 시내에도 카르제르 문, 셍 드니 문, 셍 마땅 문 등 다수 존재한다.―위키 대백과

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파리를 점령할 때 이곳에는 하켄크로이츠가 휘날렸고 히틀러가 전차로 이곳을 지나기도 했다는군요. 당신은 당신 신체 곳곳에 얼굴 곳곳에 당신의 역사를 숨겨두었어요. 제이슨 브룩스가 스케치한 당신의 모습은 얼핏 보면 꽤 단선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것이 보입니다. 이 책은 당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없습니다. 아주 자세한 설명도 없지요. 백과사전파의 지식은 전혀 없고 그림에 관한 글은 간단한 생각이나 느낌 한두 줄이 대신합니다. 140여 페이지가 조금 넘는 이 책은 패션 일러스트를 중심으로 당신의 여러 측면을 쉬엄쉬엄, 짧은 시간 안에 쉬어가며 간단히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었습니다.











화려하거나 소박하고 똑같은 것은 없으며 개성이 강하면서도 맥락을 이어가고, 다른 무엇에 영향을 주는 살아있는 그 구석구석은 당신, 곧 ‘파리’라는 도시의 느낌을 살려줍니다. 보통 제가 당신에 대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직도 당신의 역사, 문화, 사람들, 사건에 관해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저보다 많이 아는 사람도, 저보다 조금 아는 사람도 있겠지요. 제이슨 브룩스의 이 책으로 당신에 관한 모든 사실, 혹은 어떤 새로운 정보를 얻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만큼 이 일러스트레이터는 당신, 즉 ‘파리’의 일상과 거리, 느낌의 스케치를 보여주는 데 힘을 쏟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스치는 시선은 어쩌면 당신을 동경하거나 혹은 당신을 만났던 많은 이들에게는 또 다른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내가 본 이 거리가 이런 모습이었구나.’ 내지는, ‘나는 이 부분이 궁금했는데 이 그림 속 장소에 가면 어떤 느낌일까.’ 이것이 아마도 일러스트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요? 다른 이의 눈을 통해 같은 것을 체험하기. 다른 이의 개성을 필터 삼아 비슷한 감정을 확인하기. 패션 부분을 보면 아주 노련하고 개성 있는 패션 일러스트레이터의 손끝이 보입니다. 펜으로 한 거리 스케치는 그곳을 사랑하는 이의 애정이 보입니다. 일러스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P, Paris, 당신을 뵙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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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6-18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쟌님은 포토리뷰도 정말 근사하게 쓰네요.

Jeanne_Hebuterne 2013-06-18 15:16   좋아요 0 | URL


포토 리뷰를 쓰려고 사진을 찍을 때 다시 한 번 그린 이가 파리의 구석구석을 자세히 관찰했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저는 그림을 잘 모릅니다만 무언가를 그리는 이의 눈은 그러지 않는 이의 눈과 다르다는 생각도요.

칭찬 고맙습니다. 저도 다락방님의 근사한 리뷰 기대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