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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링킹
캐럴라인 냅 지음, 고정아 옮김 / 나무처럼(알펍)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에 빠진 여자가 있었다. 그 사랑은 그녀가 좋아하던 모든 것을 망쳐버렸기에 결국 격정적이고 파괴적인 관계, 스무 해 동안 얽힌 그 관계를 그녀는 끝낸다. 1959년. 미국 보스턴 출생. 화가 어머니와 정신분석가 아버지. 1981년에 브라운 대학 우등 졸업. 보스턴 피닉스, 뉴우먼, 마드무아젤 등의 매체에 객원 편집자, 주간 칼럼니스트로 활동. 그리고 2003년 폐암으로 사망한 캐롤라인 냅의 '드링킹'은 강렬한 사랑의 역사이다. 




 

원래 그런 법이다. 진성 알코올 중독자들은 시도하고 또 실패한다. 약속을 하고, 약속을 지키려고 진심으로 노력하고,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끝까지 외면하고, 석 잔, 아니 넉 잔, 다섯 잔째 술을 마시기 위한 변명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오늘만이야. 오늘은 너무 힘들었어. 위로가 필요해. 내일부터는 잘할 거야.......'

 어머니와 해변을 산책한 지 몇 주일 후, 책을 읽다가 알코올 중독 여부를 알아보는 자가 테스트를 접했다. 그 테스트는 한계 설정과 관련된 것이었다. 여섯 달 동안 하루에 꼭 석 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는 없다. 누군가 죽어도 석 잔 이상은 안 된다. 직장에서 해고되어도 석 잔뿐이다. 결혼식, 장례식, 축하 모임, 갑작스런 불행, 어떤 것도 상관없다. 나는 그 테스트를 몇 번이나 해봤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족히 수십 번은 될 것이다. 뻔히 알면서도 규칙을 어기고 네 번째 잔을 마시거나, 커다란 잔에 술을 따라서 형식적으로는 석 잔이라도 실제로는 여섯 잔을 마신 일을 일일이 헤아리지 못한다. 

 그럴 수 없었다. 알코올은 내게 너무도 중요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마지막 시기에 이르렀을 때, 인생을 통틀어 내게 그보다 중요한 관계는 없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러브스토리다. 

 열정에 대한 이야기고, 감각적 쾌락과 깊은 흡인력, 욕망과 두려움, 타오르는 갈망에 대한 이야기다. 그 강렬함으로 온몸과 마음을 마비시키는 결핍에 관한 이야기다. 도저히 이별을 상상할 수 없는 상대와 작별을 나누는 이야기다. 

... 우리의 첫 만남은 별로 극적이지 않았다. 첫눈에 반한 사이는 아니었다. 처음 술을 마셨을 때 느낌이 어땠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오랜 세월을 두고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면서 천천히 굳어진 사이다. 막연히 품고 있던 좋은 감정이 어느 순간 열렬한 집착으로 돌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그것은 마음 한구석을 조그맣게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우리의 관계는 일변해 있고, 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길은 없어져 버린다. 그것은 내게 너무 간절해지고, 내 인생의 확고한 중심이 되어 버린다. -17 페이지 


 


 관계의 문제, 그 사이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문제에 캐롤라인 냅은 어떤 한 쪽으로 치우친 권위자였다. 오독하고 오인하고 오판했다. 자신의 역량을 몰랐다. 오히려 그녀에게 있어 나쁜 남자였던 줄리안이야말로 '그녀에게는 다앙한 가능성이 있지만 대체 언제 그 가능성이 빛을 발할지 모르겠어요.'라고 상담사에게 말한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잘해주는 존재야말로 나를 망치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고 볼 때 줄리안과 술은 거의 용호상박의 존재이다. 



 일할 때엔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철칙. 일에 영향을 주지 않겠다는 철칙. 그 철칙 덕분에(때문에) 아무도 그녀의 알코올 중독을 알아채지 못한다. 리츠 칼튼에서 한 잔, 회사 건너편 중국 식당에서 조니 워커 블랙 온 더 록스 더블샷 한 잔, 집에 와서 한 잔. 생성되는 도파민, 작동하는 뇌의 보상 시스템. 이렇게 열심히 했으니 이 정도는 괜찮다. 자기 위로는 코냑 두 병으로 대체된다. 전시용은 늘 얌전히, 토스터 뒤의 숨겨둔 코냑은 이삼일 만에 완전히 사라지는 형태로. 게으른 합리화. 어설픈 투사.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마치 자신에게 벌을 내리는 것 같은 모습. 고통과 함께 오는 진실. 늘 미끄러지는 깨달음. 이 느낌은 곰팡이처럼 자존감을 깎아 먹으며 곪아갔을 뿐이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발끝을 내려다보면, 캐롤라인 냅의 '드링킹'에는 뒤틀린 가족관계, 제어할 수 없는 자기 파괴 본능, 자신이 부족하다는 낮은 자존감, 만족스럽지 않은 대인관계가 드러난다. 한 사람의 과거는 곧 그 사람의 미래. 그 미래가 그녀에게 왜 그렇게 다가와야 했나. 스무 살이 넘어서야 자신이 몸담아왔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는 이의 절망. 모든 가정이 걸머진 속죄 같은 숙제. 매일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보라는 요구가 어느 순간 오늘은 어땠냐는 질문으로 바뀐다. '별일 없었어요'라고 말하면 그녀의 아버지는 '그렇다면 새로운 생각도, 느낌도 없었다는 말이냐?'라고 거대하고 직접적이고 포괄적인 무엇으로 대답을 바꾸었다. 치고 들어갈 지점을 찾는 자의 날카로움. 그 속에 깃든 것은 가볍게 즐기는 마티니 한 잔.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그것 없이 그녀는 아버지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배경 없는 블루 스크린 앞에서 절벽에서 낙하하는 연기를 펼쳐 보여야 하는 여배우처럼 느끼던 그녀에게 아버지와 함께하는 술 한 잔. 후에 아버지가 벌였던 일들을 떠올리며 마시던 술 한 잔은 망각의 음료이자 지혜의 음료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겨울이 오면 나뭇가지의 잎이 떨어지듯 아침이 되면 사라졌고 그녀는 겨울나무처럼 헐벗었다. 마음을 채울 무언가를 향해 술잔을 기울였다. 단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을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위로를 구하니까. 그것은 마음속 아득히 깊은 곳의 일이라서 표면에는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허기, 결핍감. 안도감과 위로와 평안을 줄 외부의 무언가를 향한 갈망. 



 알코올 중독자들의 자기 극복 모임인 AA는 실제 대단한 의지가 있어야 성공을 맛볼 수 있는 단체이다. 알코홀릭 어나니머스. 이 단체는 전미 전역에 퍼져 있으며 주로 한 주에 한두 번 열리는 것이 원칙이다. 주로 교회의 예배당이나 지역 공동체의 회관 등을 두세 시간 가량 빌려 정기적 모임을 하고 알코올 중독자든 아니든 누구에게나 모임을 공개한다. 주로 알코올 중독 경험이 있었으나 거의 극복해 나가는 한두 사람이 이삼십 분 가량 발표를 하고(형식 자유), 그 뒤 모임에 모인 사람 전원이 이름과 중독 사항을 돌아가며 말한다. 그 뒤는 개별 자유 토론이 이어지는데, 모임의 모든 것이 자유이며 출결 상항을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되기에 그만큼 구속력이 낮기도 하다. 전미 알코올 소비량의 절반 이상을 알코올 소비자 10퍼센트 내외가 소비하는 미국의 재활 시스템은 눈물겹다. 문제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자신들의 논리로 해결방법을 찾는 이 나라에서 알코올 중독은 위험 수위를 넘어선 것이 분명하다. 모두가 머리에 꽃을 꽂던 마리화나와 술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파티장에서도 페리에를 들고 다니는 것이 더 패셔너블해 보이는 시대가 되며 술꾼들은 길을 잃었다. 물론 캐롤라인 냅도.  AA 보다 효과가 더 큰 것은 개인 스폰서 시스템인데 이는 멘토링 시스템의 일환으로, 1:1 관계가 성립된다. 수시로 상태를 체크, 보고하고 정기적으로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나 지속적인 관찰을 시행하는데 캐롤라인 냅은 재활 기관과  AA만으로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다. 어떻게든 술에서 벗어나 공허의 우물에서 벗어나 보겠다는 의지. 




 마릴린 먼로, 주디 갈란드, 라이자 미넬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명성의 압박, 창조의 열망. 영혼의 치유. 그와 달리 캐롤라인 냅에게 술은 대인관계의 창이자 자신의 위안이었다. 황홀경의 영역, 심리적 비상. 환상이 기거하는 은밀한 장소. 단순한 무엇으로 환원되는 세계. 유대감을 전해주고 사회생활의 불안과 고립에 처한 이에게 놓아주는 다리. 그녀는 그 다리를 건넌 것뿐이었다. 그러나 효율성이 전부인 시대, 도덕적이어야만 한다는 강박감이 지배하는 사회, 부모의 기대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시간에 캐롤라인 냅이 건넌 다리는 쉽게 돌아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재활 모임에서 떠도는 농담처럼 오이는 피클이 될 수 있으나 피클은 오이가 될 수 없는 법. 

 그녀는 알코올 중독의 갈래 가운데 하나인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임을 고백한다. 늘 술에 취해있지도 않다. 빛나는 성과를 낸다. 수많은 이들과 바쁘게 연락한다. 남자를 사귀기도 한다. 그녀가 열네 시간 내리 일할 수도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그러나 '이 기사를 쓰고 집에 가면 냉장고에 넣어둔 백포도주를 마셔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수많은 질문, 그에 따르는 간결한 답. 상황에 따른 책임. 그녀는 책임 회피 여부를 알코올 중독자를 가려내는 간단한 척도라고 말한다. 관계가 꼬였을 때 개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든지 자신의 감정을 타인의 언행이나 사물 탓으로 합리화하는 것. 이 감정의 실루엣은 술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모든 기만자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뜻은 아니다. 단, 알코올 중독자 중에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합리화를 하는 이들이 있을 수가 있다. 관계가 단순하게 느껴지고 연막이 사라지는 듯한 감정의 이탈. 이것을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인 그녀는 술을 마시는 일이라고 불렀고 알코올 중독에서 헤어난 같은 개인인 그녀는 환각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술이 이루어내는 일. 그러나 보통의 우리는 술은 죄가 없으며 그것을 마시는 사람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것은 의지와 도덕의 문제. 그렇다면 중독은 의지의 영역이건만, 실은 알코올 중독은 강력한 물질적 메커니즘 작용의 결과이다. 신경의 보상 회로의 기억 능력을 통해 신경학자들은 알코올 중독에서 상담 위주의 치료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하나의 메시지가 두뇌에 저장되면, 그 메시지는 영구히 아로새겨진다. 약한 것이다. 인간의 의지와 결단과 방어력은. 그 모든 물질적 메커니즘 앞에서 홀로 설 방법을 탐구하기까지 캐롤라인 냅은 이십여 년의 여정을 거쳐야 했다. 술의 강을 노 저어 온갖 희환과 고통, 기만과 환영 끝에 얻은 결론. 스스로 좌절에 대한 내성 없이 충동으로 움직이던 그녀가 마침내 너무 많은 것을 더는 잃지 않겠다고 결심한 다음 그 결심이 굳건히 지켜지는 과정을 써내려간 이야기. 달리 말하자면, 이것은 명명백백히 하나의 사랑 이야기다. 아프고 괴롭고 파행적이어서 누구라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랑 이야기.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는 대다수가 이런 사랑에 심취해 있거나 심취한 적이 있지 않은가? 정도가 다를 뿐. 스스로 눈치 못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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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3-02-13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를 꿰뚫어 보는 듯한 구절이 몇 구절 있어서 카피하려다 말다 그랬어요, 댓글 잘 안 달았는데 오늘은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싶어서요.^^;;;

Jeanne_Hebuterne 2013-02-13 10:03   좋아요 0 | URL
나비님! 나비님을 꿰뚫어 보는 듯한 구절은 어떤 구절이었을까요? 이 책은 저자의 음주에 관한 글이지만 그 배후의 요인을 개인적으로 탐색하는 글이기도 하여 꽤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글이었어요. 읽다가 저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한 구절이 꽤 많았답니다.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2013-02-13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3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3-02-14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뷔테른님 안녕. 언제나 실망할 수 없는 님의 리뷰.
나비님 대신하여 저를 꿰뚫는 구절 고백할게요.
<제어할 수 없는 자기 파괴 본능, 자신이 부족하다는 낮은 자존감, 만족스럽지 않은 대인관계,한 사람의 과거는 곧 그 사람의 미래> - 이런 구절 보면서 뜨끔하지만 그래서 님 글이 더욱 고급스럽게 다가오지요. 아, 이런 리뷰 올리고도 지쳐 쓰러지지 않는지요?
전 이렇게 쓰지도 못하지만 가능하대도 한 이틀은 앓아 누워야 하는 체질이어요ㅠ
굿나잇하시어요...^^*

Jeanne_Hebuterne 2013-02-14 11:28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원문이 워낙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친근하여(이러기가 제겐 무척 어려워요) 읽는 내도록 저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었던 책이었습니다. 특정 문제를 다룰 경우 그 문제를 겪어보지 않은 독자는 작가의 생각을 따라잡기가 힘들 수도 있는데, 캐롤라인 냅의 경우 솔직하고 친근하게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어떤 챕터, 어떤 과정도 덜하거나 더하지 않다는 것이 그 증거일 것입니다.

좋은 리뷰는 탐정 소설은 탐정처럼, 자기고백 수기는 인터뷰어처럼, 인문학 서적은 구도자처럼 풀어나가 원문과 높낮이의 차이가 나지 않는 리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다른 이의 공감을 이끌어내 내가 감탄하고 감동했던 것을 타인에게도 소개할 수 있을테니까요. 전 아직 많이 멀어서 많이 갈팡질팡하는데,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갈팡질팡하다 보면 어느새 딴짓을 하며 옆길로 새곤 합니다. 팜므 느와르님은 온 힘을 쏟아부으셔서 그런 것일 거에요. 그래서인지 친근하고 겸손하게 조근조근 속삭이시는 것이 느껴져서 살짝 부러워지곤 합니다.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과 커피도 함께. 혹은 핫초코를 마시기에도 좋은 날이에요. 핑계가되니까요!

덧-저 책은 읽는 내도록 뜨끔한 모든 구석구석을 락스로 박박 살균세척을 하는 자기고백과 성찰의 글이었습니다.
 
케빈에 대하여 - 판타스틱 픽션 WHITE 1-1 판타스틱 픽션 화이트 White 1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송정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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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와 아이의 얼굴. 여자의 정면과 아이의 옆 얼굴. 이 얼굴과 이 눈빛을 넘어서 책 표지의 날개를 들추어 보면 미국(그럼 그렇지), 오렌지 상 수상작,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 타임스, 가디언, 저널리스트, 옥스팜, 나이로비, 방콕, 이런 단어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널리스트와 소설가를 병행하는 사람의 글이라. 현재까지 10여 편의 소설을 썼고 예술학을 공부했다 한다. 



 이런 단어의 조합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적어도 맞춤법은 안 틀릴 것이다(저널리스트 후광효과). 감성의 근거를 댈 수 있을지도 모른다(예술학). 이방인이자 현지인일 것이다(나이로비, 방콕, 미국), 여성문학의 무언가를 보여줄지도 모른다(오렌지 상 수상). 해리엇 헤이스팅스가 디렉터로 있는 오렌지 상은 해마다 다섯 명의 여성 비평가 패널이 영국 내 출판물 중 여성 작가의 픽션 중 한 편을 선정하곤 한다. 최근에는 2009년 맨부커 상 수상작가인 Byatt와 마찰이 있었으나 여전히 '우리는 오렌지상이 여성 작가의 픽션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러한 기대에 걸맞게 상대주의와 인류학, 모성과 부성, 부모와 자식, 액션과 리액션, 신호의 전달과 수신에 대한 한글 번역본으로는 육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작품이 바로 이것. 틸다 스윈턴 주연의 영화로 작년 개봉(한국에는 올해 팔월 개봉)하기도 했다.




 이것은 모든 어머니의 악몽이다. 책에서 관찰한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에바는 결코 아이를 환영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는 네가 없었을 때 더 행복했어!'라고 여섯 살이 된 케빈의 기저귀를 갈며(그때까지 대소변을 가리지 않았다) 소리쳤다. 그녀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다. 달리 말하자면,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이를 사랑하기가 어려웠다.

사랑할 수 없는 아이였다.

사랑받을 수 없는 아이였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였다.



 에바의 행동은 케빈의 반응으로 이어진다. 케빈의 반응은 에바의 감정을 건드린다. 두 사람은 그리하여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인 채 서로에게 익숙해져 간다. 사랑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받기를 포기했고 사랑받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사랑하기를 멈추었다. 그러나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끝내 이것을 모성에 관한 이야기만으로 남기지 않으려 애쓴다. 즉 에바 캇차두리안은 동정만 하기에는 복잡한 사람이다. 케빈은 사람을 학교에 가두어 놓고 석궁으로 하나씩 쏘아죽인 다음 제 아버지와 여동생을 죽이지만 에바만은 죽이지 않는다. 왜 그랬냐는 말에는 '이전에는 알았는데 지금은 모르겠다.'라고 답한다. 이 모든 행동은 단 한 사람을 향한 것이다. 그것이 꼭 사랑의 감정은 아닐지라도, 어찌되었든 그것은 강렬한 신호이다. 나 여기 있어요. 여기에. 




"넌 안 그래?" 내가 물었어. "넌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 애가 어깨를 으쓱하더군. "당신은 안전하고 건전한 곳으로 피했잖아, 안 그래? 하나도 긁히지 않고."

 "내가?" 내가 물었어. "그럼 어째서 난 죽이지 않은거지?"

 "진짜 공연에선 관객한테 활을 쏘지 않으니까." 그 애가 술술 말을 꺼냈어. 오른손에 뭔가를 돌리면서.

 "날 죽이지 않은 게 최고의 복수란 말이니?" 이미 우린 무엇을 위한 복수인가라는 주제에서 훌쩍 벗어나 있었어.




 징후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네가 싫어 돌아버릴 지경이다. 라고 말하는 아이의 눈빛. 너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발걸음. '디 오레고니언'은 '우리는 부모를 선택할 권리가 없고, 또 자식을 선택할 권리도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이 책을 선택할 수는 있다.'라고 이 작품에 헌사를 보냈다. 옳은 말이다. 어머니 없이 태어나는 자가 없다고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향수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죽도록 사랑받고 싶어했으나 사랑받지 못한 그루누이에게도 어머니는 있었다. 그 대상이 눈에 보이든 모이지 않든, 한때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있음을 통해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게 뭐야?" 내가 물었지. "뭘 갖고 있는 거야?"

 살짝 교활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 애가 손바닥을 펼쳐 부적을 보여줬어. 마치 어린 남자아이가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구슬들을 수줍지만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것처럼. 내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바닥에 덜커덕거리는 소리를 내고 떨어졌지. 어떤 물체를 볼 때 그것 역시 날 보고 있는 건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야.

 "다신 꺼내지 마." 내가 목쉰 소리로 말했어. "그럼 다신 여기 오지 않을 거야. 절대로. 내 말 듣고 있어?" 




 '너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

 여동생에게 화장실 세제를 부어 얼굴을 태워버리고, 학교 선생님의 경력을 끝장내고, 석궁으로 사람을 죽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

'당신의 아들로 살아간다는 것'

 네가 없었을 때 난 더 행복했다고 말하고 제때 보내는 신호를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 본위로 해석하고 모든 걸 아는 눈으로 꿰뚫어보고 언제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는 엄마의 아이로 살아간다는 것.




 물론 서로는 서로에게 아무 것도, 아무리 보아도 잘못한 것이 없다. 단지 에바는 에바대로, 케빈은 케빈대로 가장 자신에게 걸맞은 모습으로 살아있을 뿐이다. 찬찬히 살펴보면 케빈의 행동은 어떤 마음의 가장 강력한 표현이다. 물론 그는 반사회성 인격장애자이기는 하지만 그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늘 에바였다. 사건사고가 있으면 그곳으로 늘 에바가 다가온다. 그녀는 그가 꿰뚫어본 단 하나의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의 얼굴조차 알지 못했다. 어긋나는 관계의 핵심은 이것이다. '너 그거 했지?','너 그런 마음이지?' 라고 단정 짓는 것. 부정적인 상황에서의 단정 짓기는 늘 위험하다. 틀렸을 때에도 맞추었을 때에도 그 행동 자체가 관계의 종말을 불러일으킨다. 그 후 아무리 `아니야,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괜찮아. 알 것 같아.'라고 말한들 무엇을 어찌한단 말인가. 이미 부정은 긍정의 모든 속내를 꿰뚫어버렸다.





내가 진심으로 말하는 걸 그애도 알았던 것 같아. 내 말은 그 애한테 표면상 지독하게 성가신 '아줌마'의 방문을 떼어낼 수 있는 부적을 제공한 셈이었는데, 그날 이후 셀리아의 유리 눈이 내 눈 앞에 단 한 번도 보이지 않게 된 건 내 생각에, 모든 것을 감안할 때, 내가 온다 걸 그 애가 좋아한다는 의미로밖에 해석할 수 없어.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어떤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옹졸하고 비겁한 일이다. 에바 캇차두리안의 모든 행동은 그런 의미에서 빈틈을 자주 보인다. 이것은 모성이야말로 그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이에게 지쳐서 욕을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아이는 그저 가장 그 아이 자신답게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수백 번 반복되는 상황에 지친 엄마가 욕을 하면 그것은 아동학대가 된다. 뚱뚱해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걸 두려워하면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언제부터 모든 사람이 타인을 위해 이렇게 헌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파괴해야만 정상인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게 되었나. 




 에바 캇차두리안은 처음부터 지는 싸움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지느냐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이유가 중요한 일이 타인에게는 결과가 중요한 일로 탈바꿈한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는지는 중요하지도 않다고 스스로 말한다. ('내가 발견했던 내 모성애에 대한 대중의 옹호는 내게 아무 의미도 없었으니까. 설사 있다 해도 그건 날 화나게 만들 뿐이었지."-609 페이지)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머릿속 내재율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필터를 거쳐 보는 케빈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육백여 페이지에 걸쳐 읽었으나 케빈이 아닌 에바 캇차두리안의 아들이 그녀의 어떤 행동에 고마워할지조차 의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에바의 머릿속에 있는 불문율이었다. 손을 뻗어 겨우 닿을 것 같은 옷자락을 여미며 가는 듯한 케빈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아주 조금은, 추측할 수도 있다. 그의 어머니를 향한 태초부터 지속하여 온 적대감은 그녀의 마음의 모든 평화를 깨뜨린다. 이때 독자는 '왜'냐고 물어야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라고 물어야 옳을 것이다. 제대로 된 이야기는' A는 B이다.' 라는 식의 단정을 피한다. 당연해 보이는 모든 사실로 감정과 판단에 힘을 실어준다. 생각을 흔들리게 하고 의심하게 하고 호흡을 끊어놓는다. '케빈에 대하여'는 앞서 말하였듯이 어머니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가장 튼튼한 관계의 견고한 벽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직 모성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엄마가 아이를 어떤 방식으로 키웠다.

엄마가 아이를 이렇게 길렀다.

그래서 아이가 이렇게 자랐다.



 결국,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 이런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신체를 아주 대단하게 생각하는 듯하지만 사실 저 말에서 신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여전히 모든 정신의학자가 줄기차게 물고 늘어지는 문제, '어머니와의 관계가 어땠는가'는 이런 슬픈 사실을 담고 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아이를 담는 그릇일 뿐이니까. 




 몰락과 화해, 가능성의 이야기. 부엌에서 아이의 간식을 만들었는데 '난 피망 안먹어'라고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던 에바 캇차두리안의 이야기. 어긋난 대화의 원류를 바로잡으려 무척 힘겹게 강 위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 독자는 결국 이 엇갈리는 소통에서 구토와 복통,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날씨를 겪고 난 기분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아름답고 드라마틱하다. 케빈 그 자신과도 같이 그 사건이 너무나도 거대하여 할 말을 잃게 되고 모든 희망과 절망이 스며든다. 이 상실감은 결국 상대를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케빈에 관해 이야기해 보아야만 한다. 이것은 자신이 가장 마주치기 두려운 자기 자신의 다른 모습, 자신의 자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므로. 자신과도 같으면서도 너무나도 다른 모르는 사람. 그 모습을 직시할 때에야 화해는 가능할 것이다. 

 

 

 

화해를 하고 나면 그 끝에 무엇이 있을까.

 알 수 있을까. 모를 수 있을까. 그들은 그렇게 속삭였다.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다) 이지만 케빈이 없는 에바는 있을 수 없고 에바가 없는 케빈은 있을 수 없다. 아이 없는 엄마가 있을 수 없고 엄마 없는 아이가 있을 수 없듯 두 사람은 서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발췌:케빈에 대하여 602~60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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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심리학 - 마음과 행동을 탐구하는 새로운 과학
데이비드 버스 지음, 이충호 옮김, 최재천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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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모가 고모보다 가깝게 느껴질까? 첫 데이트에서는 왜 대부분 남자가 돈을 낼까? 남자들은 왜 어린 여자를 좋아할까? 여자들은 왜 상대적으로 키가 크고 근육질에 상체가 V자형으로 발달한 남자를 더 좋아할까? 남자의 질투와 여자의 질투는 어떻게 다를까? 무엇보다도, 마음이 대체 무엇일까.



 데이비드 버스가 소개하는 진화 심리학은 여타 다른 학문에서 그 원인과 과정을 끌어내어 인간의 생존과 마음과 행동을 설명한다. 거슬러 올라가 보자. 변이, 유전, 선택. 이는 생명의 수수께끼에 대한 다윈의 답이다. 생존과 생식을 위해 모든 종은 점진적이며 무계획적으로 변화를 꾀한다. 다윈에게 보낸 논문에서 멘델은 콩의 교배를 통해 유전이 혼합이 아닌 입자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을 밝혔다. 그 후 동물행동학의 창시자 로렌츠는 조류에게서 나타난 각인 현상(새끼 오리는 가장 먼저 본 물체를 어미로 각인한다)을 발견하는데, 이는 진화생물학에서 나타난 새로운 물결이었다. 이후 사회 생물학을 계승하되 방향은 달리 한 진화 심리학은 인간의 적응, 모듈화된 마음, 인지능력, 정신 기관에 집중한다. 심리학은 새로운 토대 위에 세워질 것이라던 다윈의 예언이 적중하는 부분이다. 




 왜 특별한 어떤 아가씨가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까?

-윌리엄 제임스, 1890.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정신 기관'이라고 부른다. 심리철학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스위스 나이프처럼 각각의 기능을 담당하는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조적으로 작용하여 준 독립적으로 활동한다고 본다. 이는 곧 진화심리학의 입장이기도 하다. 연애, 결혼, 육아, 양육, 질투, 친밀감, 형제관계, 부모와 자식 관계에 이르기까지 진화심리학은 언어, 심리, 철학, 역사, 그리고 인류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에 자체를 연결해 인간의 생존과 진화를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남자는 왜 결혼을 하는가? 이는 곧 올드 보이의 잘못된 질문과도 같다. 왜 나를 가두었느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왜 나를 풀어주었느냐고 물어야 옳은 것이었듯, 문제는 답에 있고 답은 문제에서 비롯된다. 즉, 남자의 결혼은 여자가 만든 규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의 번식, 유전자 복제에 더 큰 비용을 부담하는 쪽은 여자이다. 진화심리학의 입장에서 본 결혼은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여자에게는 자신과 아이에게 헌신적으로 투자할 배우자가 필요하다. 뫼비우스의 띠는 이 문제가 곧 우리의 남자 조상이 자손을 성공적으로 만들려면 아이를 낳을 능력이 있는 여자와 결혼해야 했고, 결혼이라는 제도로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는 것을 방지하며, 여자의 친족과 동맹 관계를 맺게 되었음을 뜻한다. '예쁜 여자'라고 쓰고 '자신의 유전자를 성공적으로 복제할 수 있는 여자'라고 읽는다. 젊고 허리가 가늘고 머리카락과 살결이 곱고 다리가 예쁜 여자. 순서대로 번역하자면 앞으로 더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고 아직 출산 경험이 없으며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건강하고 생체역할 효율성을 지닌 여자. 



 문 닫는 시간 현상이라는 실험이 있다. 술집에서 남자 137명과 여자 8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인데 각각 다가가 술집에 있는 이성들의 매력을 평가하도록 한 것. 그 결과 문 닫을 시간이 다가올수록 남자들은 여자들을 더 매력적인 것으로 평가했다. '시간이 없다, 얼른얼른 선택해야 한다!'하는 긴박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는 여자들이 시간대별로 큰 변화가 없는 점수를 매긴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술에 취할수록 여자가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비어 고글 효과와 마찬가지로, 이는 앞서 이야기한 장기적 짝짓기와 상반되는 단기적 짝짓기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수요가 없으면 공급도 없는 법. 어떻게 이러한 단기적 짝짓기가 일어나는 것일까? 단기적 짝짓기를 남자가 할 수 있다는 뜻은 마찬가지로 단기적 짝짓기를 원하는 여자가 있다는 뜻이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여자가 단기적 짝짓기(이 책에서는 캐주얼 섹스라고도 일컫는다)를 통해 친부의 혼란을 통한 투자, 즉각적인 경제적 지원, 지위 상승, 다양한 유전자, 배우자 축출이나 대체, 배우자의 선호 분명히 하기, 복수(!), 장기적 배우자의 헌신 증가시키기 등을 얻는다. 결국, 인간의 '짝'이라는 개념은 분명하고 또렷한 목적을 가진 행동이다. 




어머니는 그 사람이 내 아버지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자신을 낳은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중에서.


 

 여자는 필연적으로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자는 어떤가? 위험한 말이지만 남자는 믿는 것이 약이다. 분명 자신의 아이일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여자는 임신과 출산을 통해 자신의 몸을 통해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알지만 남자는 자신의 신체가 아닌 여자의 신체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가 다시 태어나는 것을 바라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부성 불확실성이라고 한다. 곧, 수컷의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수컷이 암컷의 난자를 수정시켰을 가능성이 항상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의 보살핌이라는 진화한 기제는 '이 아이가 정말 내 자식일까?(자식의 유전적 근연도)', '내가 쏟아붓는 투자가 자식의 생존과 번식에 어떤 차이를 빚어낼까?(부모의 보살핌을 적합도로 전환하는 자식의 능력)', '투자를 자식에게 쓸까, 아니면 다른 활동에 쓸까?(자식에게 투자할 자원의 대체 용도)'와 같은 세 가지 맥락에서 민감하게 드러난다. 태어난 아이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여러 번 이야기하면 남자는 아기에게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2005년의 연구결과). 아이가 자신과 닮지 않았거나 자신의 아이가 아닐 때 아이는 극단적으로는 살해의 위협에까지 노출된다는 점은 아버지의 투자가 자식의 생존에 밀접한 영향을 행사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인간은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하는 순간 투자를 하기 시작한다. 돈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가고 마음이 가는 곳으로 발걸음이 움직인다는 말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일부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조지 오웰


 

 움직이는 그 걸음이 의식되는 것은 그러나 왜일까? 왜 우리는 지위, 명성, 위신, 명예, 존경, 계급에 제각각 다르게, 그러나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로버트 프랭크의 말처럼, 우리는 계급에 신경 쓰는 신경계가 있는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이를테면 우리는 위험에 처한 친구를 도와준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자비로움을 세상에 알리며(익명보다 실명 기부가 더 많다)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원을 저축하는 것이다. 어떤 집단이든 아무리 느려도 5분 내로 서열이 결정되는데, 이때 나타나는 지배성은 우리의 시각적 기억까지 다르게 인식시킨다. 똑같은 남자를 청중에게 인식시키며 교수, 학생으로 다르게 소개했을 때 청중은 지위가 높을수록 심상에서 그의 키를 더 큰 것으로 인식했다. 육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에서 그치지 않고 정신을 발현시키는 틀이기도 했다.




진화심리학의 가장 흥미진진한 측면은 사람의 행동을 통합적으로 기술하려는 노력에서 생물학, 인류학, 심리학과 그 밖의 행동과학 분야들에서 증거와 설명을 통합하는 틀을 약속한다는 데 있다. 

-보이어, 헥하우젠. 2000.


 

 데이비드 버스는 사람들은 늘 진화의 문제에 어느 정도의 저항감을 가진다고 말하며 진화심리학은 심리학의 영역에서 과학적 진화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새로운 토대 위에 세워진 심리학, 생물학과 교집합을 이루는 사회과학을 지나 여타의 학문 분과를 아우르거나 충돌하는(부모 자식 이론에서는 프로이트의 이론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 학문이 앞으로 진화 윤리학, 진화 심리학, 진화 사회학으로 더 세분될지 심리학으로 종결될지는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그만큼 이 분야는 총체적이다. 어쩌면 인간의 가족 구성, 종교, 관습이 모두 성행위, 종족 번식, 배우자 선택과 직결된다는 것은 참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다. '짝짓기'라는 단어에서 오는 묘한 느낌만 보아도 그렇다. 이것은 자원과 유전자를 두고 작동하는 마음에의 문제이다. 투사할 것인가 합리화할 것인가. 매력, 사랑, 배우자 선택, 결혼에서 유전자가 그 스스로 독단적인 판단을 언제나 끌어내지는 않는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마음은 아무 때나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진화 심리학의 관심은 정신기관으로서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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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2-07-17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두꺼운 책을 읽으셨군요. 흥미롭지만 읽을 시간이 없을 거 같아서 과감히 포기했어요. 단지 책장에 꽂아두기 위해 없는 가뜩이나 돈을 쓰는 일을 하지 않을 뿐인데, 그걸 포기라고 하다니 좀 웃기네요. 아무려나, 두껍고 비싼 책을 다 읽은 듯한 리뷰 잘 보았습니다.

Jeanne_Hebuterne 2012-07-18 10:06   좋아요 0 | URL
네, 이 두껍고 비싼 책은 알라딘의 알사탕과 중고샵 제도, 저의 시간 남아 돔의 삼위일체의 결과물이어요. 선물받은 책을 제외한 책 대부분은 친구에게 주거나 중고샵에 방출하곤 합니다. 보관하며 참조하기 위해 종종 다시 펼쳐보는 책이 아닌, 그저 꽂아두는 책의 운명이 참 서글퍼서요. 결국 책이 생명을 얻는 것은 어떻게든 읽히는 경우인데, 아무도 원치 않으면 도서관 기증이라도 하곤 해요. 그런 의미에서 poptrash님보다 제가 더 빨리 자주 많이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저역시 이걸 포기라고 하다니 웃기지만요.
 
Olive Kitteridge (Paperback)
Strout, Elizabeth 지음 / Random House Inc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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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결함에 결함을 보탠 존재이건만 동시에 사물에 깃든 이치, 사물끼리의 연관을 얻기 위해 그 자체에 내재한 모순을 이겨내고 관계를 통해 의미를 얻는 존재이기도 하다. 타인을, 자기 자신을 이해할 줄 아는 아량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기 힘들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인간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인 동시에 최악의 조건인 셈이다. 


 여기 그 관계를 통해 사람에 대한 이해를 조명한 소설이 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퀼트를 짜내듯 열세 개의 이야기를 직조했다. 산뜻하고 찬란하다. 미숙함에서 믿음을, 균형에서 가치를 이끌어내는 작품이다. 문장은 섬세하고 깔끔하여 생생하다. 미국 메인 주의 해안 마을에 사는 7학년 수학 교사 올리브 키터리지. 남편과 아들. 아들의 부인. 이웃. 미화되지 않은 묘사와 정직한 시선으로 이들의 관계와 일상에 집중한다. 



 'Olive is a big person. ...  It's true she always been tall and frequently felt clumsy, but the business of being big showed up with age; her ankles puffed out, her shoulders rolled up behind her neck, and her wrists and hands seemed to become the size of a man's.'(p.62)


'올리브는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 그녀는 원래 키가 컸고 좀 투박해 보였는데 나이 들면서 그 큰 체구가 더욱 부각되었다. 발목을 움직일 땐 숨이 찼고 어깨는 목 뒤로 튀어나왔다. 손목과 손은 남자 손목, 손과 비슷한 크기로까지 보였다.'


 또한 올리브 키터리지는 사과를 하지 않고 단호하며 때로는 심술궂기도 하다. 올리브의 아들 크리스는 말한다. 'You can make people feel terrible(엄마는 사람 기분을 망쳐버려요)."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는 편지의 답장에 올리브는 'Don't be sorry. ... We all know this stuff is bound to happen. There's not a damn thing to be sorry about.(별 유감도 아닌 일입니다. ... 이런 일이야 일어나기 마련이에요. 유감이라고 말할 그런 망할 일 따위 없어요.)라고 답장을 쓴다. 친구에게 'Always nice to hear other people's problem(다른 사람들 문제를 듣는 건 늘 재미있어)'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이런 올리브의 다른 면이 드러난다.


 "It kills me. Like the devil. And it must be my fault, too, though I don't understand it. I don't remember things the way he seems to remember them. He sees a psychiatrist named Arthur, and I think Arthur has done this." She paused a long time, clicked on Send, then immediately wrote, "P.S. But it has to be my fault, too. Henry said I never apologized for anything, ever, and maybe he was right" She clicked on Send. Then she wrote: "P.S. AGAIN. He was right."-(p.267)

 

 "끔찍해요. 악마처럼. 난 이해 못하겠지만 어쩌면 내 잘못일 수도 있지요. 그 애의 기억과 나의 기억은 달라요. 아서라는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는다던데 그쪽에서 그랬을 거에요." 그녀는 좀 오랜 시간 편지 쓰기를 멈추었다가 보내기 버튼을 클릭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다시 썼다. "추신.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에요. 헨리는 내가 그 어떤 일에도 결코 사과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마 그가 옳은 것 같아요." 그녀는 보내기 버튼을 클릭했다. 그런 다음 썼다. "추신. 한 번 더. 그가 옳았어요."


 바깥에서 안으로. 안에서 바깥으로. 짧은 이야기를 통해 가족, 작은 마을의 소소한 사건이 연결된다. 그 고리를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타인과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다. 


 "What can I do for you, Christopher?" she'd ask, meaning Do Something for me! "Shall I fly out and visit you?"(p.149)


 "뭘 도와줄까, 크리스토퍼?" 그녀는 묻곤 했다. 실은 그 말은 '나한테 뭔가 좀 해 줘!" 라는 뜻이었다. "비행기로 너한테 갈까?"


 그러나 아들은 '아니오.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답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순간이다. 각자의 생각은 다르고 감정과 기억마저 다르지만, 그 모든 것이 모이는 지점은 비슷하다. 헨리와 올리브의 행복은 다르게 만져질지언정 비슷하게 떠오른다.

 

 The year that followed-was it the happiest year of his own life? He often thought so, even knowing that such a thing was foolish to claim about any year of one's life; but in his memory, that particular year held the sweetness of a time that contained no thoughts of a beginning and no thoughts of an end, and when he drove to the pharmacy in the early morning darkness of winter, then later in the breaking light of spring, the full-throated summer opening before him, it was the small pleasure of his work that seemed in their simplicities to fill him to the brim.(p.10)

 

 이듬해, 아마 그때가 헨리의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해였을까? 일생 중 어떤 때가 되었든 간에 그렇게 우기는 것이 어리석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이따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는 어느 특정한 해가 감칠맛 있게 단 느낌과 함께 존재했다. 그가 차를 운전하여 겨울 새벽어둠 속에, 그다음엔 봄빛을 받으며, 한여름에도 약국으로 출근할 때에 그를 소박한 충만함으로 채워준 것은 그가 하는 일에서 느꼈던 작은 기쁨이었다.


 Olive's private view view is that life depends on what she thinks of as "big bursts" and "little bursts." Big bursts are things like marriage or children, intimacies that keep you afloat, but these bursts hold dangerous, unseen currents. Which is why you need the little bursts as well: a friendly clerk at Bradlee's, let's say, or the waitress at Dunkin Donuts who now how you like our coffee. Tricky business, really.(p.68)

 

 올리브는 속으로 인생이 "큰 기쁨" 과 "작은 기쁨"이라고 그녀가 분류하는 것들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 아이들과 같은 것과 같이 삶을 지탱해 주는 것들이지만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위험한 구석이 있다. 이 점 때문에 "작은 기쁨"이 있어야 한다. : 브래들리의 친절한 점원, 커피 취향을 알아주는 던킨 도넛의 웨이트리스 같은 존재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올리브는 사람들은 등만 돌리면 남의 험담을 한다고 말하며 그들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있기에 아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그녀는 이제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들이 상처받을 때는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각자의 생각과 마음이 서로의 삶을 아우른다. 사람들의 이해가 만났다가 어긋나서 모퉁이에서 부딪히는 풍경을 그렸다가 지우기를 거듭하여 공감과 존중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마음이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돌아서는 순간이 있다. 생각과 느낌이 궁금하여 묻고 싶어지고 잠시 숨을 고르게 되는 순간. 그 도중 느끼는 실망. 비롯되는 기대. 이 사이사이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귀 기울여 목소리를 듣고 싶어한다. 관심 없이는 감정도 없다. 살아가면서 스치는 바람과 기대는 다이아몬드처럼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단단해서 부서지지 않지만 동시에 그 단단함으로 다른 보석에 상처를 주는 것이 다이아몬드라면 다른 한편으로 마모되고 상처받는 돌들이 있다. 삶에는 마찰 부분이 닳아서 없어진 그 돌들이 만드는 빛이 찬란한 순간이 있다. 대상을 확실히 이해하여 아는 일은 상황과 사건이, 어떠한 사람이 사람의 삶의 조각조각이 왜 중요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사람을 결국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하여주는 일이다. 그 길은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해 완성된다. 해야 하는 일. 사는 동안 어우러져 나타나는 풍경.

 

마치 이 한 편의 시처럼.



저물녘, 변산

  권정우


바닷가에 와서 보니

해는 매일 아름답게 지고 있었다


우리의 하루와

한 생도 

몸을 낮출수록

더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조금 닳은 듯 한 조약돌을 손을 내밀어 처음 보는 것인 양 어루만질 때의 촉각. 읽고 나면 다시 다짐하게 된다. 나는 올리브 키터리지와 같은 소설작품을 통해 스스로 얼마나 쉽게 판단을 내리고 추측을 하는지, 뉘우치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일이 왜 필요한지를 깨닫는다. 그리하여 읽기와 쓰기는 오락에 그치지 않고 해봄 직한 가치를 지닌 일이 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힘들어도 다시 해야 할 일. 사람이 가진 가장 유리한 조건과 가장 불리한 조건을 끄집어내어 파도를 겪어내고 다른 사람과 악수를 하는 일.






일러두기-본문은 링크한 random house trade paperbacks에서 발췌하였으며 원문 번역은 한국어판 발췌가 아닌 잔 에뷔테른의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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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2-06-25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버 키터리지]를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Jeanne_Hebuterne 2012-06-25 19:17   좋아요 0 | URL
처음에는 몇몇 구절에 감탄하며 기억하려 애썼습니다만 어제 다시 읽으니 당시에 모른 체 지나갔던 부분들이 들어왔어요. 올리브의 고집스러운 외모, 암담한 대화, 거기에서 읽을 수 있는 삶에 지친 사람의 모습. '에브리맨'이 굳건하게 버티고 서기를 손을 꼭 잡고 당부했다면 올리브 키터리지는 '알면서 왜 그래, 이 사람아' 라고 슬쩍 웃으며 옆에 함께 앉아 있는 작품 같아요. 굳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대조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문체가 슬쩍 그렇게 일러줍니다. 레와 님은 무엇을 발견하실지 궁금해요.

hnine 2012-06-25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을 읽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 글을 읽고 little bursts, 즉 인생의 대소사 중 '소소한 사건'들이 왜 가치있고 중요한지 깨닫고 가네요.
권정우님의 저 시에도 참 깊은 뜻이 담겨 있군요.

Jeanne_Hebuterne 2012-06-25 20:03   좋아요 0 | URL
어떤 것이 가치있고 소중한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작품이었어요. 소소하고 별 일 없어도 낙담하지 말아라. 큰 일이 생겨도 별 일 아닐 것이다. 라고 속삭여주는 느낌과 함께.작은 조각들을 그러모아 큰 그림을 그린달까요.

큰 기쁨과 작은 기쁨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았는지 인용을 꽤 많이 하더군요. 아마 이 책을 읽게 되신다면 저 부분을 앞뒤 문맥과 관련하여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궁금해요. 저 인용 단락만으로도 좋지만 앞뒤 글과 함께 읽으면 또 기분이 다르거든요.

무심하게 지나치는 단어와 문장이 새롭게 느껴지고 그 뜻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시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읽는 사람을 긴장시키기도 하구요.

blanca 2012-06-26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쥬드님이 인용해 주신 원문을 떠듬떠듬 읽으니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었던 그 기억들이 다시 돌아오네요. 삶 전체를 이렇게나 섬세하게 아름답게 슬프게 잘 이야기한 책이 있을까요? 큰 기쁨, 작은 기쁨. 요새는 작은 기쁨이 얼마나 삶에 있어 유용한 것들인지를 깨달아 가는 중입니다. 살수록 배워야 할 것 투성입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Jeanne_Hebuterne 2012-06-26 12:36   좋아요 0 | URL
허망한 삶, 생의 작은 승리. 이러한 글귀를 블랑카 님의 올리브 키터리지 관련 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영광도 좌절도 없는 삶. 어제, 오늘, 내일이 비슷한 삶이 평범하고 밋밋하다 생각하던 순간이 있었어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라는 걸 속삭여 줍니다. 블랑카 님도 비슷하게 느끼셨을까요?
살아있는 순간들이 굵직하니 큰 기쁨만으로 채워지기는 어렵겠지요. 보통의 사람들은 그것을 원하겠으나 배울 점은 뜻밖에 작은 기쁨과 작은 슬픔에서 필연적으로 더 빈번하게 나올 거란 생각이 듭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모든 날이 소중하다 - 한 뉴요커의 일기
대니 그레고리 지음, 서동수 옮김 / 세미콜론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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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디미 쇼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미란다는 '결혼은 행복한 결말(해피 엔딩)이 아니라 그냥 결말(엔딩)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쩌면 사는 일에도 적용시킬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부친이 숨을 거두며 결론을 말한다. '삶은 하나의 오렌지였다' 


실은 이 문장에는 오렌지 대신 사과, 파인애플, 책상, 그리고 그 클리셰 초콜렛 상자까지 무엇이 들어가도 문장이 성립된다는 것이 포인트다.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단락이 없다. 단원의 구분이 없다. 단지 쉼표, 마침표, 울림이 있을 뿐이다. 이 일이 끝나면 모든 것이 결말을 맞이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주로 그것들은 삶의 중대한 일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은 하나의 행사에 불과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유학을 가든 이직을 하든 사표를 내든 무엇을 하든 일의 성격은 달라질 것이나 그것을 겪는 사람은 결국 한 사람이며 그 혹은 그녀의 고유한 특성대로 움직이는 것이 분명한데 달라지긴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여기, 아내가 사고로 장애인이 된 남자가 그리고 쓴 그림과 글 모음이 있다. 뉴요커, 스타일리스트, 어느날 승강장에서 추락, 척추뼈 마비, 반신불수, 휠체어, 그리고 그 다음의 생활. 여기에는 그 일을 굳이 겪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는(그러나 상상하고 싶지 않은) 모든 일들이 있다. 그녀의 남편 대니 그레고리는 단 한 번도 장애인의 남편으로 사는 것을 꿈꾸어본 적이 없는 남자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조용히 묻고 싶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모든 생활은 당신이 꿈꾸어왔던 어떤 것이었는지를. 

결국 하늘 아래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비교해 보면 거기서 거기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성서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라는 글귀를 떠올리지 않아도 새로운 것은 기껏해야 배반 정도인지 모르겠다. 살아있는 사람이 가장 놀라는 모든 일들이 결국은 이 배반이 아닐까. 상상하지 못했던 것.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예측하지 못했떤 어떤 일은 사람을 그 현상으로부터 튕겨낸다. 균형, 견제, 파악, 생각, 행동, 이 모든 것들을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진짜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하여 무조건 모두 지하철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겪거나 그런 이의 배우자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 이라는 부사구가 들어가는 순간 사람의 삶은 여지없이 전체주의의 전제에 압사당하기 마련이니까.

여름철 산들바람이 부는 순간 같은 책. 그래서 살짝 이마에 맺힌 땀. 그 송글송글 맺힌 형체가 더 드러나도록 만들어주는 글과 그림들. 표지의 밝은 노란색의 건물과 푸른 하늘색의 하늘 같은 책. 그리고 그 앞의 애완견 같은 흑색의 글씨들의 글귀들. 대니 그레고리는(둘 다 어째 이름 같다. 이름과 성이 아니라 이름과 이름) 종종 가장 그림을 그리기에 힘든 자세를 찾기도 하고 자신의 그림이 마음에 든다 했다가 안든다 했다가 뭔가 새로운 것을 그려보기도 한다. 그림이 제대로 안될 때엔 꼭 삶이 제대로 안되는 기분이라는 말은, 아니, 혹시 그 반대인가 하는 이 사람의 부가의문문을 보며 더욱 명확해진다. 그림의 붓이 가는, 펜이 가는 길은 개인의 서명과도 같다. 어떤 이의 필체를 흉내내야 할 때에는(나는 왜 이런 것을 체득했나) 모양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 펜이 흐르는 선을 흉내내야 한다. 비슷한 모양이 만들어지는 것은 펜 선이 가는 그 길을 흉내낸 다음의 일이다. 이것은 그러니까 잘 그린 그림일 수도 있고 못 그린 그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에는 반기를 들 수가 없게 만드는 그림이다. 그림에서 나오는 이 사람의 마음. 이 사람의 눈이 흐르는 길. 이 사람의 생각의 흐름. 시선의 고정과 흑백을 그대로 보여준다. 단적인 것이 자신의 아내의 얼굴을 여러 각도에서 그린 부분이다. 아름다운, 지혜로운, 글래머(이건 아마 글래머러스-의 번역이지 싶은데 그렇다면 멋있는, 멋을 부린, 쿨한, 차라리 쉬크한, 이렇게 번역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지만 어디까지나 원문을 못본 독자의 의견일 뿐), 섹시한 패티를 그렸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얼굴이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그러다 덧붙인다.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한 사람에게는 내가 알지 못하는 아주 많은 역사가 담겨 있다. 그것을 모두 알아서는 안될 일. 가만히 보면 사물이 말을 거는 일이 생긴다고 대니 그레고리는 말한다. 결국 이 사람의 그림 그리기, 일기 쓰기는 모든 생활의 총합이다. 어느 순간은 더하고 어느 순간은 빼게 된다. 이 이합집산에서 남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자신의 아내가 휠체어를 평생 타야 했을 때 이 남자는 머뭇거리고 주저한다. 그리 책에 쓰진 않았지만 독자는 누구나 그것을 느낄 수가 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 앞으로의 생활. 그리고 무엇보다 대니 그레고리는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 패티를 보고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쩌면, 이 두 문장 아래 갈등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누구나 갈등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I love my wife. I am in love with her.
I love my wife. but I am not in love with her.

글쎄, 한국 말로는 러브가 무조건 사랑인지라 무엇이라 옮길 수 없지만 이 미묘한 차이를 무엇이라 설명해야 했을까.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더이상 마음이 간질간질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 묘한 중앙분리대. 이 때 결국 이 두 사람을 여전히 함께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존경, 신뢰, 고마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이런 중요한 요소들은 개인에 따라 다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돈, 신체, 가정형편, 뭐 이런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너무 속된 것인가? 그렇다면 대체 아름다움은 껍데기일 뿐이라면, 아름다운 췌장이라도 보여주어야 가능한 것일까? 성과 속은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것일까? 하지만 그보다도, 이런 것은 어떤가.

나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내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헛된 생각들이다. 몽테뉴가 말한 것 처럼, "나의 삶은 지독한 불행으로 가득한데, 그 대부분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이다." 중요한 것은 앞날을 예측하며 상념에 잠기는 것이 아니다. 이론을 세워 미래를 내다보는 것도 아니다. 이러면 어떡하지, 저러면 어떡하지, 하고 궁리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이다. 내 삶의 충만함을 있는 그대로 360도 모든 방향에서 바라보는 것 말이다. 병원 대기실에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나는 보았다. 장례 치르는 집에도 묘지에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나는 보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수많은 일들이 내게 일어났다. 하지만 내가 두려워하던 그 흉한 일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삶은 당신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당신에게 하지 못한다. 
-책속에서

결국 모든 흉터는 살아남은 자의 훈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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