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 도노휴 지음, 유소영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소설.

 

 현실과 현실의 너머를 보여주던 이야기.

 

 우리가 사는 곳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소설.

 

 아름답고 리얼한 소설.

 

 

 

 엠마 도노휴의 '룸'을 떠올렸다. 잘린 페이지를 끼워 맞춰 읽던 추운 겨울밤을 떠올렸다. 잭의 작은 손이 내 손 속에 들어와 잡힐 것 같아 허공을 두리번거리던 날에 눈이 따뜻해졌다. 마지막까지 견딜 수 있다는 나뭇가지. 낚시를 빠져나가려는 물고기의 움직임과도 같은 좌표.

 

 

 

 이 좌표는 오스트리아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에서 착상한 소설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납치, 감금, 폭행, 그 안에서 아이를 낳고 아이와 함께 탈출하는 사람의 이야기.

 

 

 

 종종 작가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그 바탕을 지워가거나 또렷하게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지워나갔을 것이다. 누구도 그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버지니아 울프는 거꾸로 자기 자신을 또렷하게 그림자까지 아로새겼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녀의 손끝을 따라갈 수 있다. 시선을 돌려 '룸'의 페이지를 넘기노라면 엠마 도노휴는 실제와 실재를 뒤섞었음이 단박에 보인다. 어떤 사건과 현실이 존재할 때에는 현실이 줄 수 있는 중압감, 끝이 정해져 있고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 수 있다. 그 벽에 맞서는 엠마 도노휴의 무기는, 뜻밖에 가벼운 깃털 같은 시선이다.

 

 

 

 "몬테크리스토 백작 기억나?"

 "섬의 지하감옥에 갇혀 있었어."

 "그래, 한데 어떻게 탈출했는지 기억나? 죽은 친구인 척 수의로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경비들이 그를 바다로 던졌지만 물에 빠져 죽지 않고 수의에서 빠져나와서 헤엄쳐 나왔잖아."

 "이야기 끝까지 해줘."

 엄마는 손을 저었다.

 "그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잭, 너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거야."

 "바다에 빠지라고?"

 "아니, 몬테크리스토 백작처럼 탈출하라구."

 다시 혼란스러웠다.

 "나한테는 죽은 친구가 없잖아."

 "죽은 것처럼 흉내 내란 말이야."

 나는 엄마를 쳐다보았다.

 "고등학교 때 엄마가 본 연극이 있어. 줄리엣이라는 소녀는 사랑하는 남자랑 도망치기 위해서 약을 먹고 죽은 척했다가 며칠 뒤 깨어났지."

 "아니, 그건 아기예수야."

 "그렇지 않아."

 엄마는 이마를 문질렀다.

 "예수님은 사흘 동안 진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거야. 넌 진짜로 죽는 게 아니라 연극 속의 소녀처럼 죽은 척하는 거고."

 "난 소녀인 척하는 방법은 몰라."

 "아니, 죽은 척하란 말이야.

-룸, 엠마 도노휴 '대탈주' 부분.

 

 

 

 간단하다.

 가장 복잡한 일에 가장 쉽게 묻기. 질문이 정확해야 답이 명확해지는 법. 엠마 도노휴는 다섯 살 소년 잭의 시선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탈출을 따라 하자는 엄마의 말에 잭이 먼저 떠올리는 것은 바다에 빠져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진짜에 맞서는 진짜를 본 적이 없는 소년과 진짜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엄마의 이야기. 열아홉 살에 납치 감금되어 그 안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엄마와 방 안의 사물이 전부인 아이의 눈.

 

 

 

 맑은 소리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오히려 먼지를 통해 일구어낸 문학의 자그마한 조각이 보인다.

 이 조각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재미있는 두 개의 발자국은, 납치 감금 폭행을 당한 여자의 것과 그 안에 함께 있었던 소년의 것이다. 범죄 현장을 목격한 아이의 눈처럼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조그만 눈이 더듬었던 발자국은 우리가 익히 아는 범죄 현장과 다르지 않다. 이 '다르지 않음'이 다르게 다가오는 데에서 오는 눈과 머리의 불일치. 나는 이것이 문학이 펼쳐낼 수 있는 커다란 날갯짓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이 어떻든 간에, 사건이 어떻게 완결되었든 간에 문학은 픽션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 그 누구도 완결된 글과 종결된 사건을 이길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닫힌 채 우리 앞에 말없이 놓여있다. 바라보면 열리는 그 사건을 뛰어넘을 수 없는, 뒤쫓는 자의 시선이 문학을 열쇠 삼아 오히려 현실을 더욱 현실로 보여주는 마법.

 엠마 도노휴는 엄마와 아이를 동정하지도, 냉대하지도 않는다. 말없이 바라보고 참견 없이 길을 걷는다. 유용함의 갈래로 얼개를 짰다면 이 소설은 르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픽션의 길을 택한 엠마 도나휴의 룸은, 그 자체로 간결하고 명확해서 소설을 쓰는 작가가 바라보아야 할 구심점을 힘있게 드러낸다. 구심점과 소실점. 재료와 기회. 다듬고 쌓아올리기.

 

 

 

 이 간단하고 복잡한, 뜨겁거나 차가운 발자국에 살짝 부는 바람을 맞노라면 작가는 미학적으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책장을 덮는 순간, 독자의 머릿속에 일말의 결심이나 동정심, 혹은 한마디로 정리되는 생각과 느낌이 들지 않게끔 소설을 써야 한다는 단 하나의 명제에 충실한 글. 분명히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취재를 하거나, 소설이 진행되었을 단계에도 있는 그대로를 옮기기를 피하려 노력했음이 분명한 흔적은 작품 전반에 드러난다.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를 옮기는 것은 다큐멘터리의 영역이지 소설이 아닐 터, 핸드헬드의 움직임으로 롱테이크의 시선을 옮기는 듯한 엠마 도나휴의 문체는 아이의 시선을 통해 더욱 깔끔해 보인다. 역설적으로 법을 가장 지키지 않는 이가 오히려 법을 가장 잘 알아야만 하듯, 엠마 도나휴는 있는 그대로의 완결된 사건을 엄마와 아이가 룸에서 나온 후 한꺼번에 햇빛을 보이며 더욱 확장한다. 가장 끔찍한 일을 가장 쉽게 바라보는 잭의 물음과 시선을 따라가 보면, 모든 현실에서의 사건을 하나의 시선으로 조망하게 되는 독법을 체험할 수 있다.

 

 

 

 

 대화의 영역에 말하는 사람과 듣는 이가 있다면, 소설가에게는 소설가 자신과 텅 빈 종이가 있다. 글을 쓸 때 대면해야 하는 자기 자신의 펜과 독자가 이미 알고 있을 사실. 독자가 이미 아는 사실과 작가가 만들어야 할 미학적 구조, 이 사이에서 엠마 도노휴는 작가로서 스스로 성취해야 할 역할을 앞서 말한 잭의 시점과 소설의 구조를 통해 훌륭하게 해냈다. 바로 독자가 책장을 덮는 순간 그 어떠한 윤리적, 현실적 판단도 하기 전에 잠시 진공 상태에 이르러 미학적으로 가치 있는 어떠한 변형된 형태의 픽션을 읽은 후 느낄 수 있는 '리얼'의 세계. 낯설고 새로운 진공의 상태. 소설이되 소설이 아닌 사실의 느낌.

 

 

 

 

 이 느낌은 일부는 소설 전체의 구조로 인한 것이다. '룸'을 읽다 보면 책의 중반부에 이미 잭과 엄마의 탈출이 이루어진다. 중반을 기점으로 앞부분에 펼쳐지는 룸 안에서의 생활, 뒷부분에 펼쳐지는 룸 밖에서의 생활. 르포르타쥬와 다큐멘터리가 지향하는 바가 바로 전반부까지였다면, 오로지 미학의 관점에서 현실을 빌려오는 소설의 지향점이 바로 후반부를 품으며 펼쳐진다. 멈출 법한 지점에서 계속 나아가기. 또한, 그 멈출 법한 지점까지 독자가 눈치채기도 전에 펼쳐지는 것은 잭이라는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세계의 모습이다.

 '그 좁은 세상에서 얼마나 갑갑했을까!' 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필시 독자 본연의 생각일 뿐, 오히려 룸 내부에서 엄마와 아이는 놀이를 하고 글씨를 익히고 이야기를 한다. 단 한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고 완전한 사랑과 지원을 주어진 환경 내에서 주고받는 관계는 잭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는 작은 신세계였다. 이 신세계가 서로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룸 밖으로 탈출한 다음의 상황이다. 아이는 계단을 걸어본 적이 없고 엄마는 납치범이 한 번도 사람 앞에 나가기를 허용하지 않은, 룸에 갇혀 사는 사람에 불과했다.

 

 

Some are in robes the exact as ours and some in pajamas and some in different uniforms. Most are huge and don’t have long of hair like us, they move fast and they’re suddenly on all the sides, even behind. They walk up close and have so many teeth, they smell wrong. A he with a beard all over says, “Well, buddy, you’re some kind of hero.”

-엠마 도노휴 '룸', 원문 발췌

 

 

 파자마, 다른 유니폼, 커다란 몸집, 우리같지 않은.....여기저기서, 뒤에서까지. 이빨도 많고 이상한 냄새가 나고....룸 안에서 분명하고 단정적이었고 질서정연했던 잭의 시선이 갑자기 불안정해지는 것은 오히려 룸 밖에서였다. 룸 안에서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 오로지 둘만의 존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밖에서의 두 사람은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를 아우른다. 이 소설이 현실만을 그대로 그린 평범의 틀에서 비범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간결한 구조로 뛰어난 미학적인 성취를, 사실을 뛰어넘으로써 리얼하게 그릴 수 있었던 작가의 펜에서 나왔다. 잭이 '안녕, 방아.'라고 말하며 룸에 작별을 고할 때 소설은 끝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다음, 잭이 언젠가는 더 많은 것을 엄마에게 물어볼 때가 오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읽을 수 없는 그 세계는 오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사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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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4-01-30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이야기인줄은 알고 샀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간결한 구조, 뛰어난 미학적 성취라는 말씀에.. 그럼. 한 번 읽어볼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이야기는 읽기 힘들어요...

Jeanne_Hebuterne 2014-02-04 08:16   좋아요 0 | URL
dreamout님, 역시 이 책도 갖고 계셨군요! 아무래도 좋은 책들은 dreamout님의 감식안을 피해가지 않나 봅니다 :)

얼마 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한 편 보다 그런 생각을 했었답니다. 그 영화 속 고문 장면이 더더욱 괴롭게 느껴졌던 것은 아무래도 실화가 주는 힘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따지고 보면 그 괴로움, 그 힘든 감정은 잔인함이 아닌 불편함의 힘은 아닐까요? 우리는 바라보기 불편한 슬픈 이야기를 피하고 싶고, 그 도덕적 판단에서 벗어나 의무를 다했다는 편안함을 지양하지만 실제 우리가 지양해야 할 것은 오히려 섣부른 외면과 도피일지도 몰라요. 무엇보다도 엠마 도노휴는 독자가 이 책을 다 읽은 다음 불쌍하다든지, 근처 있는 어린 아이에게 잘 해주어야겠다든지, 이런 다짐이나 결심, 도덕적 판단을 하지 않고 대신 잠시라도 구조와 이야기가 줄 수 있는 현실을 떠나 있으면서도 현실에 굳건히 뿌리를 둔 미학적 리얼함을 추구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있는 그대로는 르포와 다큐의 영역이고, 소설가는 아름다움을 추구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혹여나 읽게 된다면, 꼭 리뷰나 짤막한 감상 남겨주세요! 무척 궁금합니다 :)
 
안나 K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이리나 레인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그래요. 닫혔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고 앞으로도 죽 그럴 겁니다.

-안나 카레니나





 모호하고 불확실한 무엇. 아무리 달콤한 말도 구태의연한 것으로 들리게 하는 재주. 소용돌이 속에서 헛발질하는 개구리 같은 모양새. 남김없이 소진해 버릴 것이라는 헛된 다짐. 왜곡된 시선. 본의와는 무관한 해석. 작가가 전혀 의도지 않은 데에서 홀로 엉뚱하게 감동하는 독자. 단순간 어디론가 뻗어 나가 돌아오지 않는 생각. 안나 케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러시아계 유대인 소설가 이리나 레인이 현대 뉴욕을 무대로 재구성했다. 티파니와 펜디, 나이키, 불가사리 모양의 은 펜던트. 여자의 마음. 첼시와 소호, 소호의 프랑스 레스토랑, 랑그도크 지방의 와인, 그리고 아이오와. 남자의 마음. 세상에 그런 남사스런 일이. 부하라 유대인. 댁의 따님은....세간의 반응. 이 세 가지가 통속적으로 얽혀들어가는 모양새를 보자면 안나 카레리나는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도 또 죽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는 결론이 허망하게 남는다. 굳이 누군가를 꼭 살리라고 할 생각 없이도 이 죽음 앞에서는 또 한 번 무릎을 꿇게 된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시대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주변 환경이 다르고 심지어 안나마저도 메타 소설의 모양 앞에서 달라지지만 안되는 것은 역시 안되는 것일까.




 물론 결말에 집중하고 그에 이르는 흐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그런데 참으로 난처하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거장의 필치 앞에서 대상을 무한대로 확대하거나 축소한 이리나 레인의 렌즈를 들여다보자니 그 길 끝에 이르는 이 책의 지도가 너무 쉽거나 통속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와 농노제, 법률 사회까지 사회 전반에 관한 깊은 생각을 거친 작품이었다. 많은 이들이 소설의 첫 문장과 그 번역본에 그리 관심을 두곤 한다. 그러나 작가 김영하의 말을 빌리자면, 작가들은 의외로 문장의 얕은 술수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문체와 문맥. 조금의 기교를 부린 장식체 문장이 아닌 소설의 주제, 핵심에 도달하는 독자에게 펼쳐지는 세계야말로 문학의 핵심 중 하나다.




 그렇다면 안나 카레리나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것 하나만으로도 괜찮은 논문 몇 개는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안나 카레니나는 넓은 지평을 다룬다. 나뭇잎을 가리키는 손끝이 아닌 나뭇잎을 들여다 보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의 제목과는 달리 안나 없이 시작하여 안나 없이 끝난다. 어떤 이는 이 소설을 가정파탄의 슬픔이라고 읽기도 했고, 어떤 이는 이 소설을 독자를 가르치고자 하는 작가의 끝없는 열망이라 읽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가 같이 읽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른 것만 읽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정확히 톨스토이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이리나 레인이 안나 카레니나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하다 이 소설을 썼다고 확신한다. 




 이리나 레인은 아주 간단한 선택을 했다. 자신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한다. 안나의 외양 묘사에서 알렉스를 만나 하는 연애에서는 탄산이 빠져나간 탄산수의 맛이 느껴진다. 알렉세이 카레닌의 환영이 분명한 알렉스의 청혼을 잠시 살펴보자. 





"사랑하는 안나." 안나가 반지에 묻은 초콜릿을 핥아, 아니 빨아먹어서 다이아몬드 알과 주변 장식은 침 범벅이 됐다. " 당신을 향한 내 마음 알지?"

 "네." 안나는 책을 읽듯이, 어색하고 서투르게 "복선"을 의도한 대화를 읽듯이 대답했다. 자신도 이 일에 가담했다는 걸, 게 그에 따른 피치 못할 결론이라는 걸 간파했다. 아니라고 말할 거였으면 계획을 궁리하고 실행하던 몇 달 전에 했어야 하지 않아?

 "지난 일 년 반 동안 우리가 너무 잘 어울린다는 걸 확인했어." 알렉스는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웅얼웅얼 둘이 거쳐온 지난 날들을 훑었다. 와인 두 병을 마시며 밤이 깊도록 이어진 첫 데이트, 그녀가 발을 접질렸ㅇㄹ 때 그가 의사를 불러왔던 버몬트 스키 여행, 그녀가 로댕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로댕 전시회, 처음으로 함께 보냈던 애틋한 밤 등.  ...

 "안나, 나랑 결혼해 줄래?" 시간, 그녀는 시간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책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가장 무미건조하게 지나간다. 

 안나와 알렉스의 모든 것이 잘 깔린 대리석 바닥처럼 평탄하다. 

 그에 반해 안나와 데이비드의 모든 것은 낙차를 지닌다.




 문자가 왔다. "뭐해요?"

 "당신 생가해요." 알렉스가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친정 부모님까지 앞에 계셨다. 가슴은 쿵쾅거리는데 자판을 누르는 엄지는 둔해서 급하게 서두르다 맞춤법이 틀렸다. '전송'을 누르고 자리로 돌아와 알렉스의 팔짱을 꼈다. 너무 행복해 보이는구나. 엄마는 딸의 뺨을 가볍게 꼬집으며 말했다. -책속에서





 이리나 레인의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로 가득하다. 물론 키티와 레빈이 나타난다. 모든 것은 똑같이 재현된다. 다름이 없어서 독자는 이리나 레인의 안나를 읽을 때마다 모든 것이 닫혔다고 말하던 톨스토이의 안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리나 레인의 안나를 읽으면 안나 카레니나가 떠오르건만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도 안나 케이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오리지널의 위세. 이것이 원본과 샘플링의 차이라면, 역사상 이런 시도는 무수히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진대 무엇이 다른 것인가. 어떤 글이 좋다고 말하면 물론 작가는 기뻐할 일이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하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좋아? 좋다고? 좋다는 것은 일차원적인 일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다른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리나 레인의 안나 케이는 어쩌면 참 좋은 소설일 것이다. 끝없이 소설 속에서 안나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어한다. 남편 알렉스에게 이혼해 달라는 말을 하고 한달음에 데이비드에게 택시를 타고 간 다음 처음 그녀가 하는 말도 이제는 자신을 가지고 소설을 써달라는 말이었다. 알렉스가 낯선 곳,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지는 아이오와에 가자고 말할 때 하는 말도 '당신을 주인공으로 써낸 소설을 좀 더 살려볼 수 있을지도 몰라.' 였다. 픽션 속의 픽션이 피카레스크식 구성으로 펼쳐지지는 않는다. 그 이상 작가가 나아가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 소설은 안나 카레니나의 직업에 집중한다. 바로 그녀의 삶이라는 직업. 




 

이상한 꿈, 배에서 꾸게 되는 꿈. 끈적끈적해서 헤어나올 수 없는 꿈. 곤경에 빠진 안나를 죽음으로 돌아가는 불길하고 모호한 상황들. 좀처럼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일들. 어떤 색깔, 갈색이 도는 엷은 자주색 립스틱을 찾는다면. 양배추 잎 뒤에 숨은 새끼 고양이를 발견한다면. 배를 벗어나 뭍에 오르는 길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여러 남자들의 조합. 얼굴과 정체가 뒤섞인 남자들이 안나의 몸을 위협했다. 주머니칼로 그녀를 으르며 인적이 없는 뒷골목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앞으로 닥칠 재앙을 경고했다. 그리고 그녀의 꿈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덜컹덜컹 흔들리는 기차.-책속에서




 

 이리나 레인이 사용하는 단어는 안나를 향할 때는 혼란스럽게 좌초되는 배처럼, 알렉스에게 가해질 때는 공무원이 꾸민 공문의 첫 페이지처럼, 데비드를 향할 때는 답답한 짐꾼을 볼 때 짜증 나는 회초리처럼, 카티아를 그릴 때는 순진무구한 시절의 지젤처럼, 레프를 묘사할 때는 적당히 타협하는 한강 이남의 회사원처럼 독자에게 다가온다. 

 서서히 베일을 들어 올리지 않고 단번에 확연히 모습을 드러내어 독자를 사로잡는 안나의 모습처럼, 이리나 레인은 독자들의 호기심과 이미 알려진 플롯의 재구성을 통해 안나 카레니나에 관한 가치판단을 다시 한 번 미룬다. 이 소설 전체를 통해 독자는 자신이 만나보지도 않은 안나를 들여다보게 되는데, 처음에 안나는 창백하도록 흰 피부에 검은색 모피 코트를 입고 발끝을 살짝 밖으로 틀고 흐트러짐 없이 우아하게 걸으며 무대에 등장한다. 물론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눈빛을 하고서. 




 그러다가 나중에는 관자놀이가 쿵쿵 울리고, 심플함을 드러내기 위해 늘 점점 더 힘들어하고, 조심하라는 말에 조금 물러나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혈색과 걸음걸이, 몸매와 눈빛이 등장하다가 언젠가부터 우리가 보는 안나는 실루엣이 아닌 형체로 굳어진다. 

 정지된 것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가려는 시도. 이것은 이리나 레인의 안나가 소설작법에 관심을 두었고, 계속 데이비드에게 자신을 소설 속에서 숨쉬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일치한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너무 멀리 나가지 말자고 다짐한 다음 이 소설을 다시 들여다 보면, 이리나 레인의 안나 카레니나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톨스토이의 그것과는 다른 양상을 강조한다.




 이리나 레인의 안나 케이는 안나가 행하는 행동, 안나가 하는 말에서 그 모든 의미를 끝맺지 않는다. 외려 안나가 겪는 사건을 읽는 이가 마음속에서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현대 뉴욕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 나를 비롯한 다른 이가 낱말 하나하나를 읽어나갈 때마다 새로운 의미가 있다. 그리고 살짝 생기는 기대와 예측, 호기심. 안나 카레니나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었는데 여기서도 그럴까? 하고 생각하다가도 '그녀는 오일릴리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시간과 공간이 달라졌음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막힌 벽, 여전히 높은 천장, 여전히 낮은 바닥에 안나가 부딪힐 때마다 작가는 닫힌 문장이 아닌 허물어진 기대감을 의도했을 것이다. 




 어떤 종류의 글이든 읽을 때의 기대감과 읽은 후의 실망이 반복되는 리비도의 곡선이 그려질 때, 독자에게 어떻게 작품을 읽어야 할지, 더 나아가서 작가의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관찰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리나 레인의 안나 케이를 읽노라면 독자는 좀 더 확실한 지식을, 명확한 진실을 원하지만 읽기 경험을 통해 늘 기대는 좌절되고 희망은 꺾이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모든 읽기가 쓸모없는 것일까? 오히려 독자 앞에 조용히 놓인 문장은 그 어느 것도 명확하거나 법률처럼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쌓아나갈 읽기에 관한 경험이 더 값진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오독, 읽기에 따르는 여러 가지 어려움, 해석을 해나가는 데에 생겨나는 여러 과정, 이런 모든 것이 독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리나 레인은 안나 케이를 통해, 다시 쓰기를 통한 읽기의 방법을 제시한다. 독자의 안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경험을 살짝 보여줌으로써 톨스토이의 아난 카레니나는 완전무결하거나 이미 원작에 존재하는 것과 같이 유일무이하지는 않아도, 다양한 방법으로 읽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롭지 않다 하여도 읽기의 한 갈래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보면 아주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한 조각. 

그리하여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다른 누군가의 안나 카레니나의 자리를 비워둔다. 







 "대단하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삼십 분도 넘게 기다렸네."

 안나는 노란 선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그 위에 섰다. <데일리 뉴스> 1면에 나오면 어떻게 될까? 신문을 읽는 데이비드, 비통에 잠긴 레프의 모습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갔다. 신문에서는 제일 아름다운 사진, 알렉스를 만나기 전, 어쩌면 서른다섯 번째 생일 케이크 앞에서 촛불을 끄는 사진을 쓸지도 모른다. 길쭉한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머리를 귀 뒤로 넘긴 그 사진. 무심결에 찍힌 사진이었는데, 물이 올라 봉오리를 터트리기 직전의 튤립 한 단을 몸 속에 품은 것처럼 눈동자가 반짝였다. 카티아의 소개로 데이비드를 만났던 신년 파티의 사진이라면 더 좋겠다. 악수를 나눌 때 데이비드의 눈 속에서 봤던 그 여자, 그의 잔에 비쳤던 그 여자, 검은 옷에 부드러운 홍조를 띤 그 여자의 사진이면 좋을 텐데.

 터널 안에서 불빛 두 개 어렴풋이 빛났다. 이렇게 쉽다니, 제대로 한 발만 디디면. 선택, 결정, 도약. 그런데 정말 할 수 있을까? 승강장 밖으로 오른발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터널을 막 벗어나려는 6번 노선의 녹색 동그라미가 깜빡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조심하세요, 부인." 조금 전에 옆에서 말을 하던 남자였다. "너무 앞으로 나가셨네요."

 그래서 조금 물러났다. 그녀의 몸은 지시를 따르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그랬다가 다시 끌린 듯 그 자리로 돌아갔다. 전철은 빠른 속도로 진입하면서 두 개의 흰 전조등으로 그녀를 강렬하게 비췄다. 생가갈 시간, 가능성을 타진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늘 따지기만 했고 자기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에 지쳐버렸다.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닌, 영원한 연옥. 좀 솔직해지자. 퀸스에 가면 뭐가 될까? 아이오와에서는? 지금은 뭐지? 필요한 것은 찰나의 선택, 근육을 움츠렸다가 스스로 뛰어올라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것.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옳은 선택을 할 거야.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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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의 여행 - 모로코, 프랑스, 스페인 스케치 여행기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크레이그 톰슨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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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행의 현실이 우리가 기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하다. 물론 비관주의자들은 현실이 반드시 실망스럽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단 현실은 기대와는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진실에 좀더 가까울 수 있고, 또 좀더 보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 내가 상상한 대로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말에 놀라기 전에, 그동안 내가 무엇을 상상했는지 먼저 생각해보아야만 한다. 지난 몇 주일 동안 이 섬에 대한 나의 생각은 광고 팸플릿과 비행 시간표를 읽는 동안에 짜맞추어진 세 가지 고정된 이미지의 주위만 맴돌고 있었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를 특별한 것으로 만들고 일상의 이미지를 한 어촌에 살던 작달막한 거북의 기록으로 만들던 작가. 사막, 하렘, 현대 산업화의 흔적 사이로 스민 서사시를 만드는 그래픽 노블의 크레이그 톰슨이 '만화가의 여행'으로 펜 끝으로 여닫은 자신의 여행 일기를 공개한다. '만화가의 여행'은 그 책의 첫 장, 마지막 장에서 여행 일기를 쓰는 동안 카메라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눈과 펜을 사용했다는 것을 밝힌다. 단 두 가지의 예외는 그가 만난 이들의 옛날 사진을 활용한 두 컷이니, 여행하는 자의 기록 수단에 따른 다른 이야기가 슬며시 엿보이는 책인 것이다.




2004년 3월 5일부터 5월 14일까지, 유럽, 모로코. 엄마와 떨어져 앉은 아이에게 좌석을 바꿔준 답례로 항공사에서 제공한 샴페인을 누구와 함께 마실까 생각하며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 낯선 곳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 혹은 낯익은 얼굴이 주는 안정감. 덧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빵, 버터, 꿀, 그리고 캐러멜 차로 만든 아침 앞에서 그가 아는 간단한 프랑스어로 완벽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만화 가게에서 여는 사인회에 참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속삭속삭 걸치는 것은 그의 펜촉이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바람이 머리카락과 귓등을 스쳐 코끝을 지나갈 때, 조금 차갑거나 뜨거운 공기가 입술에 닿을 때. 낯선 곳에서 만나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이미지. 마치 영화 니키타 같다고 그가 생각한 광경은 그의 머릿속에 있던 이미지와 만난 낯선 현실의 결과였다. 전혀 상관없는 두 점이 만날 때 열리는 풍경. 비밀 조직에 킬러로 양성되는 주인공의 이야기와 파리에서 열리는 사인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 출판사 카스테르만에서 나온 직원이 안내해준 아파트, 휴대전화 등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 다른 것을 한 점으로 연결하는 여행자의 시선은 아직도 생생하고 활기차다. 지치지 않은 여행자의 들뜬 공기. 나중에 지칠 것을 예상치 못하는 사람의 홍조.




낯선 풍경을 만날 때 남기는 사진, 기록, 메모, 영수증. 혹은 핸드폰 문자, 현지에서 얻은 기념품. 크레이그 톰이 종종 여행에서 주목하는 것은 자신과 비슷한 누군가이기도 하다.
낯선 풍경을 감싸는 나뭇가지, 커다란 나무. 더 거대한 건축물. 그 속에서 어떤 이가 앉아 그림 그리는 모습을 역시 자신의 스케치북에 남긴다.




3월의 모로코. 크레이그 톰슨의 모로코는 온통 검정과 흰색의 세계였다. 건조한 공기. 오후 다섯 시의 기도문 낭독. 서쪽에서 들려오는 찬송가. 그가 살피는 북쪽의 제마엘프나 광장은 혼돈 상태의 커다란 고래 뱃속 같은 곳. 사람들이 파스티야를 먹고 어스름 밖에서 등불을 걸쳤다. 여행자의 등 뒤에서 뭔가를 슬쩍 하는 꼬마 아이가 있고 술잔을 기울이는 남자들, 뭔가를 요리하는 여자들이 있다. 그는 비록 자신이 너무 지쳐 살펴보기 커녕 식사도 겨우 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것을 남기는 열의가 수증기처럼 퍼져있음이 느껴진다.




동그랗게 몸을 말거나 무심하게 어딘가에 기대어 자는 고양이. 뭔가를 씹어먹는 노새. 여성을 그리기는 금지되어있었고 남자는 거절했으며 아이들은 돈을 달라고 했다. 어쩌면 그런 상황에서는 슬쩍 그리고 찰칵으로 끝나는 카메라가 더 편했을 수도 있으나 대신 그는 고양이, 사람들의 뒷모습, 풍경, 궁전의 문양, 소화제 겸 설사약의 여행을 그린다. 이 개인적인 시선을 만드는 펜촉이 나는 늘 궁금했다. 무심하거나 개인적이어서 이타적인 행위. 나로서는 발돋움 해도 들여다볼 수 없는 세계라고 느꼈던 것은, 어쩌면 내가 그 펜촉을 이해하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마조히스트가 사디스트를 알아볼 수는 있을지라도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과 같이, 소리와 빛이 다르듯이, 가는 지점이 같을지라도 가는 방법이 다른 지도를 크레이그 톰슨은 펼쳐 보인다. 어떠했다고 말하면서(그래픽 노블이라니까) 이런 것이다, 라고 그려 보인다.





낙타, 모래, 사막의 밤, 여성의 다양한 옷차림, 흐릿해져 가는 시야, 고향에 있는 친구들이 어른거릴 때. 잠시 다른 여행자의 기록을 머릿속에서 들추어 본다. 박완서는 미국 여행 도중 몸이 아플 때 그 말을 한국말로 하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인다. 들큰하게, 눅진하게, 싸아하게, 이런 소리 같은 단어를 그릴 때 여행자는 집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낯선 것과 낯익은 것의 조야한 차이와 당연한 귀결. 무엇을 말해도 구태의연해지는 순간. 크레이그 톰슨의 여행은 이러한 순간을 서서히 드러낸다. 낙타를 보거나 사막을 건너기. 친구들을 그리워함. 평화와 위안을 찾고 풍경에도 놀라지 않고 익숙한 기억의 카펫을 펼쳐보기도 한다. 그러다 자신의 영웅 레너드 코헨이 묵었다는 호텔을 찾아 호화롭고 평안한 개인적 랜드마크를 찾아낸다. 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심사를 열없이, 조금은 계면쩍다는 듯이 그려내도 이상스럽지 않은 것은 그가 순전히 여행자라는 이유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 더 큰 이유일 거라 생각한다. 아, 이러한 말조차 오히려 사람을 너무 대단한 존재로 본다는 뜻일지도.





그러다 그가 돌아와 그리는 아르장티에의 샬레.





여행자의 전환된 흐름. 물결이 줄기를 바꿀 때의 유쾌한 소리. 놀라움, 피곤함, 지침, 놀라움, 피곤함, 지침. 이 사이를 조금씩 오갈 때 쉼표를 찍는 것은 마치 도서관 서고의 장서 표를 구경하는 일과 같다. 자신에게 익숙한 분류기호를 발견할 때의 관심, 익숙하지 않은 숫자 앞에서의 경계. 여행자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만 파고들면 얼마나 구태의연한 것이던가. 결국, 모든 것은 사람, 음식, 잠자리, 건물, 자연환경, 풍경, 상점, 사고파는 물건, 음악 등등이다. 모든 같음을 모든 다름으로 환산하는데, 자신에게 익숙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붉은색 혹은 푸른색으로 분류한다. 이 색상의 명도와 채도는 순전히 여행자 자신의 머릿속 어느 작은 구름에서 시작하여 혀끝에서, 손끝에서 완성된다. 다녀와서 연인의 손을 잡을 수도, 손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수도 있다. 펜으로 남겼던 흔적을 어루만질 수도 있고 기념품을 생각할 수도 있다. 여행지에서 만났던 어떤 혀끝 감촉을 다시 느끼겠다는 이유 하나로 훨씬 비싼 가격으로 들어온 음료와 음식을 위장 속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 그럴 때사물에는 어떤 그림자가 비친다.



아무도 손을 댈 수는 없는,

있는 그대로의 무엇.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것.





마음만 동한다면 찹잘한 감촉을 볼 수도 있으나,

그 열없는 객쩍은 웃음 끝에,

마음을 내는 그 사물만이 사물이 된다는 생각.

또르르 굴러가는 그림자, 똘똘 또아리를 튼 시간.

비추는 그림자를 황홀이 바라보면, 마침내는 어떤 풍경이 펼쳐진다.

크레이그 톰슨이 발견해 나가는 것은 이 무심한 파장과 황홀한 심사이다.



그새 만나는 사람들에 관한 기록. 그는 그가 무척 존경하던 이를 만나기도 하고, 뜻하지 않게 만나는 여자를 그리기도 한다. 옛 여자친구가 보낸 시로 하루를 시작하기도 한다. 수양버들과 비교하는 가지 잘린 플라타너스. 수양버들을 여유로움으로, 플라타너스를 마음아픔으로 치환하는 것은 순전히 그의 심사에 달린 것이니, 이 주관적인 시각을 재미있어할지 미심쩍어할지는 순전히 독자의 마음이다. 그러나 이해와 공감이 다른 것이듯 읽는 내가 절대적으로 옳으며 나의 판단이 전부라고 착각해서는 안 될 일.



잠자코 크레이그 톰슨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예상외로 이 작가가 비우고 그려내며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충실히 기록하고자 했음이 보인다.







책 밖에서 찾은 이미지, 아이엠러브 속의 다른 곳 같은 느낌. 또다른 수평과 수직.




우연히 만난 여자가 있다.
사진에서 수없이 보아온 건축이 보인다.
나는 스페인의 구조 앞에서 내가 이전에 보았던 어지러이 아름다웠던 영화 '아이 엠 러브'를 떠올린다. 색상의 빛나는 조합과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의 수직 수평으로 어우러진 구조. 그 광경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긴장. 그는 그 앞에서 '저녁에는 라우레아노를 다시 만났는데, 우연히도 그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밤하늘과 뚜렷이 대조를 이룬 그 모습을 다시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을 뻔했다. 라우레아노는 말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같은 무언가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살다 보면,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잊어버리게 됩니다. 매일 보기 때문이죠.





제발 내가 잊어버리지 않게 해줘.




망각을 거부하는 인간의 마음을 내세우는 크레이그 톰슨은 이 여행일기의 뒷장에서 고백하듯 행복할 때 무언가를 더 잘 그리는 사람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랍을 열고, 옛날에 먹었던 오렌지의 신맛과 그 포들한 속살을 떠올리는 사람이다. 이 여러 개의 서랍 중, 이번에 잠시 열었다 닫은 여행 일기을 여닫게 한 손가락은 왜, 무엇 때문에 움직였던 것일까. 좀 계면쩍게도 크레이그 톰슨은 이 여행일기를 마감하게 된 까닭을 이렇게 밝힌다.



내가 이 책을 마무리하는 것은 내가 행복하기 때문일까?
아니, 사실은 훨씬 더 따분하고 한심한 이유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마감이라는 것이다. 나와 게약한 출판사에서는 앞으로 2주 안에 이걸 인쇄해서, 그로부터 2개월 안에 이걸 판매할 계획이라고 한다. 게다가 출판사에서 내게 요구한 분량은 딱 224페이지였다.



마지막까지 그가 매 순간 마주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비가 내릴 때 유리창에 생기는 진흙탕 길.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창턱. 옷 가방의 화물 표시. 점심으로 먹은 것이 엉킨 뱃속. 여자의 스커트 자락, 먼지로 뒤덮인 모자. 그새 모니터 뒤에 숨은 옛 모습도, 자전거를 타고 있는 새로움도, 결국 크레이그 톰슨 자신이었다.



아쉬운 것은 이 모든 것이 '사랑해!'라는 외침 속에 사그라질 뿐,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미래의 독자인 그 자신을 염두에 둔 일기가 꼭 어떤 결론을 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 아니다. 무용하기 때문에 유용한 무엇을 통해 환원하는 세계의 모습. 그 몸체가 그리 육중하거나 촘촘하지는 않다. 오히려 구멍이 많은 이야기라서 위험한 구석도 있고, 그 위험한 구석에서 비롯되는 매력도 있다. 개인적이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글씨와 그림이 빚어내는 구멍과 들쑥날쑥함으로 만드는 개성이 이런 것이다. 결국,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고 어떤 방식으로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고 생각하느냐는 작가의 몫이 아닌 독자의 몫 아닐까, 하고 약간 능청스레 웃는 펜촉의 소리가 들린다. 이 하루하루 수많은 독자 중의 하나인 내가 보내야 하는 여행의 도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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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
테렌스 데 프레 지음, 차미례 옮김 / 서해문집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악몽과 꿈. 피하고 싶은 모든 것. 마음 전체를 지배하는 절망. 과거와 단절된 현재, 집착이 존재를 넘어서는 순간. 단 하나의 구멍도 없는 이야기. 증언.

 


 


그의 운명은 비록 삶의 정도로부터 탈선해 버리고 말았지만, 아직도 그는 수천 명의 운명을 자신이 여기까지 짊어지고 헤쳐 나왔다고 여기고 있다. 그는 결코 그 모든 고통을 '돌처럼 무감각하게' 견디어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희생자들의 피가 언제나 그 자신의 피 속에 섞여 흘렀으며, 그들의 많은 아픔이 그의 피를 더 붉고 진하게 만들어 왔던 것이다. "우리들을 잊어버리지 말라!" 이것이 그들의 소리 없는 절규였다.

 "우리들을 기억하라!"

 "우리를 구해다오!"

 "우리를 잊어버리지 말라!"

 아니, 그는 절대로 그들을 잊을 수 없었다.

-비헤르트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는 증언이 갖는 힘을 보여준다. 침잠해 들어가는 고통 끝에 그래도 인간이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이유. 절망과 좌절의 모퉁이에서 만나는 한줄기 외침. 그래도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손잡을 수 있는 까닭. 이런 것들이 밑바닥에 깔린, '실제로 있었던 인간의 깊이를 보여준다. 이 외침이 테렌스 데 프레의 펜을 빌려 다른 색채를 띠는 까닭은 생존자의 좌표를 영웅도, 희생자도 아닌 인간 그 자체에 두었기 때문이다.

 부득이하게 찬란하지도, 부조리하게 속쓰리지도 않은 사람 그 자체의 피와 뼈.

 


 

 그러한 사람의 색채가 갖는 그림자. 피와 뼈와 머리카락은 이미 많이 있다. 소피의 선택, 안네의 일기, 더 리더, 수용소군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병동, 페스트. 이것은 모두 생존자가 직접 썼거나, 혹은 어떠한 절망 속의 생존자를 생각하며 썼거나. 그리하여 드러나는 살아남은 어떤 이들의 면면이다. 저자는 먼저 문학작품 속에서의 생존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것으로 독자가 느끼는 공기를 전환한다. 그곳은 카뮈의 페스트 속 오랑 시이기도 했고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이기도 했다.

 

 

 

 앞을 알 수 없는 인간이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영웅의 죽음보다 자신의 생존이 더 흐릿하게 보일 때.

 사람이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는다는 것은 숙명, 혹은 운명에 대한 태도를 돌아보는 데에서 시작한다.

 

 

 

 굳이 존엄성이라고 쓸 필요도 없다. 무너지지 않고 살아있는 것. 그 이상을 넘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이상을 대비하는 일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를테면 페스트가 창궐한 오랑시에서 죽음에 맞선 것은 살아남겠다는 각오 같은 것. 병든 이를 돌보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끝까지 죽은 자를 치우는 사람들의 모습. 끝이 보이지 않아도, 살아남겠다는 목표 하나에 기대어 살아남는 이야기를 통해 테렌스 데 프레는 문학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힘을 거울에 비추듯 바라본다.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을 때, 오로지 삶을 선택함으로써 생존하는 인간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실제로 일어난 일'을 들을 준비가 어느새 되어 있을 것이다. 조용히 따라갈 것. 좌표 그대로를 볼 것. 그것이 독자의 몫이다.

 


 

 테렌스 데 프레가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개인이 겪은 일을 개인이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다. 거대한 전체 중일부로 살아남은 한 사람이 전체를 이야기했음을 테렌스 데 프레는 지적한다. 소비에트의 어느 수용소 변소 벽에는 '자유의 몸이 된 후에 입을 다물고 있는 놈은 어느 놈이고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는 낙서가 있었다고 한다. 살아서 나가는 자, 누구든지 우리 모두가 남긴 기록을 한 덩어리로 기술할 것. 죽음이라는 절대성 앞에서 한 명이라도 살아나가는 것이야말로 죽음을 허물고 굴복하지 않는 최소한의 저항의 방편이었으리라. 죽음의 절대성. 그 절대성은 아마도 처음에는 어느 순간 느닷없이 시작된 총질, 친위대원들의 모욕적인 행위, 혹은 가슴팍에 달아야 하는 다윗의 별 등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여타의 다른 책들과 다르게 그 모든 것의 문을 열 때 오물과 역겨운 냄새도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왜 그래야 했을까. 그에 관한 명쾌한 답이 아래의 증언으로 드러난다. 수많은 이들이 기차에서 선 채로 용변을 처리하고 서로의 얼굴에 토악질하고 인간이 아닌듯한 몰골로 있어야 했던 이유. 죽어야 했던 이는 죽여야 했던 이의 반대편에 있어왔다는 것이 아래의 증언에서 더욱 명확하게 보인다.


 

 

 나는 슈탄글에게 질문했다.

 "저 사람들을 죽일 예정이면서 왜 모욕을 가하는 것입니까? 왜 저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슈탄글은 말했다.

 "정책을 일선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여건을 마련해 주려는 것이지요. 그들이 할 일을 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입니다."-책속에서

 


 한나 아렌트는 1974년 뉴욕의 강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개를 죽이기가 쉽고, 개보다는 쥐나 개구리를 죽이는 것이 쉬우며, 벌레 같은 것을 죽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즉 문제는 시선, 눈동자이다." 라고 말했다. 인간의 모습을 허물어버리는 일. 소용소에는 몇천 명의 인원이 있는데 변소는 고작 하나였다. 강제수용소 생존자들이 누구나 오물 냄새를 잊을 수 없다고, 몇 미터 밖에서도 그 냄새가 냤고 그곳에서는 새조차 날지 않았음을 증언한 것은 그저 후각에 관한 기억이 기억의 여러 갈래 중 가장 우직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모습을 사람에게서 벗겨 내 수용소 내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혐오감을 키우고, SS 대원들의 입장에서는 작업이 더욱 쉬워지는 상황을 빚어낸 정점에 그 오물 냄새가 있기 때문이다. 

 

 

 

 증언의 힘은 그 원형을 한층 더 강력하게 만든다. 한 명이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일을 그중 하나인 생존자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련의 증언 문학, 혹은 생존자를 다룬 영화나 희곡 등이 한편으로 그 드라마틱함을 과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 속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감고 그 광경을 상상하노라면, 어쩌면 상황의 극대화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덩이를 파던 중 옆에 있던 이들이 갑자기 뒤에서 빗발치는 총알을 맞고 쓰러진다. 혹은 아이들의 사진을 모두 내놓으라고 한 다음 그 위를 진흙 묻은 신을 신고 걸어가는 대원도 있었다. 이러한 사건을 문학의 영역에서 다룰 때, 우리는 문학성과 사실을 분리하기가 어렵다. 상황은 극적이고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일 만큼 모든 이미지는 상징적으로 구현된다.

 

 

 


       <Battle field>, by Kathe Kollwitz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경험의 깊이와 넓이는 이러한 극적인 상황에 직면하면 언제나 육체와 정신을 서로 연결하곤 했다. 밀턴의 지옥,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한 지하 세계, 리어 왕에 나타나는 폐허, 단테의 지옥도. 즉, 노스럽 프라이가 지적하는 '전적으로 거부하기를 바라는 세계'의 원형과도 같은 집단 수용소는 이제 하나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오물과 악취, 가난과 배고픔, 모든 친숙한 것들과의 이별, 구덩이와 하수구, 무지개 저 너머 있을 거라 상상도 못 했던 쓰레기장, 시련의 객관적 상관관계. 죽기와 살기, 그리하여 마침내 전략적 망각과 과거 속에서 살기. 



 


 

...우리들은 그곳으로 달려가서 아직 채 파묻지도 않은 발가벗은 시체들이 산처럼 쌓인 커다란 네모진 구덩이를 보았어. 우리가 아는 사람들도 많았고, 엄마도 거기서 찾았어. 온통 피투성이였어. 그리고 내 약혼자 헤네코, 내가 목숨보다 사랑했던 그도 거기 있었단다.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어. 내 마음이 죽어 버렸을 뿐이야. 무슨 얘긴지 알겠니? 그들이 내일 다시 와서 아버지를 죽여도 난 까딱도 안할거야. 울지도 않을 거야. 아버지를 위해서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할 거야. 그들이 나를 죽여 주었으면 좋겠어. 이제부터 나는 유태인 금지 구역으로 아무 데나 막 걸어다닐 테야. 그들에게 붙잡히고 싶어. 나는 죽었으면 좋겠어. 그래도 난 아무렇지도 않을거야.-클라인



 


 인간이 완전히 빈털터리로 벗겨지고 나면 과거는 마치 이미 죽은 자의 미래와도 같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과거 속에서 살기 시작하는 즉시 현재에 집착하지 않게 되며, 점점 모든 일에 소홀해져 마침내는 죽어도 상관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현재에 집착하는 순서가 따른다. 헬링은 이를 가리며 '철조망 안에서 몇 년을 살고 난 다음, 타고난 능력 이상으로 과거의 기억을 훨씬 더 잘 조절할 수 있게 된 인간이 존재할 뿐이다.' 라고 지적한다.

 

 

 

 협력과 저항,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생존 자체를 목적으로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모습을 유지하려는 이 노력 아래, 그런 마음이 있었다. 가스실에 가는 이의 명단을 이미 죽은 이름을 올려 바꿔치기하고, 카포(나치에 협력하는 유대인)로는 필요 분야의 비전문가를 보내는 일. 기기를 수리하는 척하면서 친위대가 흘리는 정보를 수집하여 저항조직에 전달하고, 라디오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소식이 있으면 수용소 전체에 소문을 퍼뜨리기.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생존자들은 가만 앉아 죽음을 기다리던 이들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생명 자체에 아로새겨진 생존에의 속성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 역시 하나의 화석이다.'라는 자크 모노의 말로 다시한번 증명된다. 누군가 살아남았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누군가가 그를 도왔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종의 전체적인 틀에서 볼 때, 몰살과 멸종의 위협 앞에서 수용소 사람들이 만든 연대와 협동, 하나를 살리기 위해 전체가 함께 행동하는 행동이 인간의 역사를 만들었다. 절망이 지배하는 곳에서 절망에 무릎 꿇지 않기.  이때 절망에 대한 최선의 보호책은 바로 희망을 품지 않는 것. 현실을 살되 과거를 끊고 조금씩 미래로 나아가되 희망을 버리는 일. 버림으로 하여 가지고, 가짐으로 하여 버리는 뫼비우스의 굴레 속. 전쟁이 끝나갈 무렵, 사면 소식이 수용소 내에 퍼질 때에도 절망에 대비해 희망을 품지 말아야 했음을 이 책에서는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그러한 환희 작약의 뒤에는 으레, 예정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데서 비롯되는 깊고깊은 절망의 늪이 도사리고 있었다. 만약 희망에서 절망으로의 엄청난 반전을 겪고도 정신이상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정신적 평형감각을 보존할 수 있는 특수한 테크닉을 스스로 개발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구제받을 길 없는 비관론자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골비체르

 


 


수용소 안에서는 아름다운 꿈을 꾸는 것보다 악몽을 꾸는 것이 낫다. 스마글레브스카 라는 생존자의 증언을 들으면, 수용소에 있는 이는 단 한 순간이라도 자신이 집단 강제수용소에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악몽을 꾸며 비명 지르는 이를 깨우지 않는 곳. 아름다운 꿈을 꾸고 깨어나면 더욱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곳이 아닌가. 그곳에서 그들의 투쟁과 저항은 결코 희망을 품었기에 했던 일이 아니었다. 정신이상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했으며 비참한 수용소에 자신의 모습을 바위처럼 박아두어야 했다. 그들은 실제 이 세 가지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첫째, 성공할지도 모른다. 둘째,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그래도 계속해서 시도하겠다.





이 거대한 폐허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나는 종종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분노에 떨게 되는 순간, 내가 희망을 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세수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을 만큼 자신 속의 모든 것이 빠져나가 껍데기조차 거리에 뒹구는 것같이 느껴질 때에는 먼저 씻은 사람만이 생존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는 옮긴 이의 말이 있다. 가족이 사라졌을 때에는 그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수용소 사람들을 떠올렸다는 말도 그 옆에 나란히 있다.

 

 

 

 이 덧입혀지거나 살짝 걸쳐진 생각, 무겁거나 딱딱하고 육중한 형체 앞에서 나는 나 역시도 지금까지 죽은 이들의 화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기적처럼 대꾸해 줄지도 모른다. 내가 누군가의 생존을 돕듯 누군가도 나의 생존을 도울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속에서 아주 작게, 기대어서는 안 될 희망이 살짝 피어오른다. 그러면 안 되겠지만, 하고 작게 중얼거리면서도 아마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기억날 책 한 권. 11월이 다가오는 가을, 낮 기온이 점점 밤 기온에 다가서려는 추운 날 읽노라면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귀해 보이는 귀중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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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10-24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같이 읽었어요. 살아남아 증언하는 일. 삶의 무게에 대한 일. 삶이라는 게 때로 너무 비루하고 잔혹하지만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 일.

쟌느님의 독서 궤적은 신기하게 저랑 닮아 반가워요. 잘 읽고 가요.

Jeanne_Hebuterne 2013-10-27 12:29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어요, blanca님 :) 여전히 부지런히 읽고 쓰시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프리모 레비를 읽으셨군요. 참 신기한 것은, '소피의 선택'을 썼던 슈타이런도, '주기율표'의 프리모 레비도, 그리고 이 책을 쓴 테렌스 데 프레도, 책표지의 말과는 달리 제가 들은 어떤 말로는 자살을 했다 하더군요. 온전히 살아남은 이들도 물론 많지만(로고테라피의 창시자 빅터 프랑클), 종종 이런 이들의 궤적은 사람의 마음에 어떤 그림자를 남기곤 해요.

정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 - 일상을 깨우는 바로 그 순간의 기록들
조던 매터 지음, 이선혜.김은주 옮김 / 시공아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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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것은 화가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사진이다.
현실에서 시간이 정지되는 일은 없으므로.
-로댕






현실에서의 시간이 정지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 사진은 시간과 시간, 분과 분, 초와 초, 찰나를 늘 열어두는 매체다. 밀물과 썰물, 들숨과 날숨처럼 수없이 쌓이고 부딪혀 제 흔적을 만든다. 열렸다가 닫히는 순간. 그 순간과 찰나를 포착하고자 하는 노력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했다면, 그의 사진에 감동하여 야구선수에서 포토그래퍼로 전향한 조던 매터는 '움직임’에서 ‘멈춤’으로 향하는 기억을 잡으려고 노력한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니콘 D3S, 1/320의 셔터 속도, 연속 촬영이 아닌 한 컷의 사진, 어도비 브릿지, 폴 테일러 댄스 컴퍼니,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 시어터, 아스펜 산타페 발레단, 애틀랜타 발레단, 발레 이스파니코, 휴스턴 발레단, 노블모션 댄스단, 퍼시픽 노스웨스트 발레단, 파슨스 댄스 컴퍼니, 새러소타 발레단, 테이크 댄스단, 조던 매터, 그리고 사람이 사는 일상의 어떤 움직임. 이 책이 나오기까지의 어떤 것들. 시간은 늘 흐르고 사람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가 화를 내기도, 움츠러들기도, 슬퍼하거나 기뻐하기도 한다. 그 자체로 문학이 되는 날씨, 몇 장으로 한숨을 내쉬게 하는 영수증, ‘예스’라는 말에 뛸 듯 기뻐지는 사랑의 설렘, 자기 자신에게 거는 기대.








사람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존재이고 좀처럼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동적인 자세, 열렸다가 닫히는 존재.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한 번의 심호흡이건만 정작 우리의 삶을 이루는 것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셀 수 없이 많은 들숨과 날숨이다. 인생을 이루는 모든 중요한 요소는 이렇게 기억 속에서 잠시 잊혔다가 결정적 순간에 모습을 나타낸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어떤 부분을 포착하려는 시선.








본다는 것은 곧 지각하는 것. 무언가를 보려면 어둠 속이라 하여도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의 빛과 굴절이 필요하다. 사람의 신체를 타고 흐르는 빛, 피부를 둘러싼 공기의 흐름. 이 책에서 포착한 모습에는 긴장된 근육, 극대화된 움직임이 정지된 공간 안에서 점, 선, 면 없이 그 형체를 드러낸다. 회화와는 달리 사진은 시간을 이렇게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드러내려는 노력을 숨기지 않는다. 이 사진들을 보는 순간 우리는 ‘보는 것은 곧 만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깊이와 빛, 움직임에서 정지된 것으로 가는 때를 잡는 시선. 끊이지 않는 것을 포착하였을 때 느끼는 경이로움.






거리를 걷노라면 사람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무언가에 바쁘게 길을 걷는다. 그 사이를 묵묵히 걸으며 시간을 조금씩 조금씩 꺼내어 쓰다 보면 종종 궁금해질 때가 있다. ‘다들 무슨 생각으로, 무슨 재미로 살지?’ 이 책은 그 질문에 참으로 깜찍하고 긍정적인 대답을 한다. 빗속에서 춤을 추는 댄서의 모습. 전부를 던져야 사랑을 얻는다는 바디 서퍼의 멈춤. 혹은 이런 질문을 하게 될 때도 있다. ‘나만 힘든가?’ 그에 관해서는 전철이 오고 있는데도 핸드폰을 바라보는 여자의 정지된 순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맹위를 떨치고 지나간 집에서 몸을 구부리고 있는 여자의 어로. 잠든 순간 꾸는 꿈속에 머물고 싶어하는 듯한 묘지 위에서 애도하는 자의 침묵으로 등을 토닥인다. ‘사는 거 무섭다.’라고 중얼거릴 때면 이 책은 또 이렇게 답할 것이다. 계산서 속에서 할 말 잃은 여자의 빚더미. 지하철을 갈아타는 남자의 바쁜 뜀박질. 사랑이 꼭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말하는 남자와 여자의 저녁 식탁으로 우리를 초대한다.‘이렇게 무섭고 힘들어서 어디 제대로 살겠어?’라는 자조와 한탄에는 그러나 이 책은 또 다른 말을 건넨다. 건강하게 죽은 시체는 없으므로 가능성도 희박한 전기충격기를 든 수호천사의 손길. 이렇게 힘들어도 카스트로 디스트릭트에서 나누는 남자들의 키스와 달빛 아래서의 소나타로.






고단하고 슬프고 기쁘고 지루한, 그와 동시에 긴박하거나 산만하고 길거나 짧은 하루하루 그날그날은 우리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나누고 모르는 것의 감정과 느낌을 극대화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이고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눈으로 보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보았다고 믿는 것, 느꼈다고 자부하는 것.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잠깐 교류할 수 있는 찰나의 가장 완벽한 맞닿음. 인간 육체의 경이로움을 넘어서 완벽한 자기절제를 뽐내는 무용수들은 우리 일상의 구태의연함을 찬란하게 잡아냈다.






이 책에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깊이라든지 미셸 푸르니에의 산문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단지 훨씬 더 극화되고 화려해서 조금은 균형이 맞지 않는 것 같은, 처음 날갯짓을 하는 듯한 커다란 새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기획의 참신함과 일상의 포커스가 세련된 무용수의 근육을 만났을 때 느낄 수 있는 재미와 다채로움, 감각. 앞으로 조던 매터에게 깊이가 더해지기를 기대하는 바가 아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화사하게 정지되어 일 초 전에 움직였음을, 일 초 후에 움직일 것임을 잠시 잊게 하는 흥밋거리도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볼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짧은 시간이나마 쉬엄쉬엄 누군가의 뷰파인더 너머로 우리의 일상 그 자체를 넘겨다 볼 수 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숨 내쉬기는 이렇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







덧붙이기-책의 서문에는 그가 사진을 하게 된 동기, 가족 이야기 등이 있다면 연속하는 사진의 말미에는 짤막한 사진 뒷이야기가 실려있다. 모든 뒷이야기가 다 실린 것은 아니지만 주로 사진을 찍을 때 느낌, 찍게 된 경위, 연출의 변 등을 참여 인원과 함께 소개하는데, 그의 홈페이지에도 이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 중이며, 연출과정을 보면 와이어, 이미지 수정 없이 이런 사진을 선보이게 된 과정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http://www.dancersamong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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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4-27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책 대박이네요!
어쩜 저렇게 역동적이면서 화려하고 또 멋질까.
절묘하게도 사진을 잘 찍었군요.

Jeanne_Hebuterne 2013-04-29 20:12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참 감각적이고 쾌활하지요?

심지어는 슬픈 사진마저도 쾌활하게 찍어내는 재주는 아마 이 사진작가의 천성인 듯 싶어요. 야구선수에서 사진작가로 전향했다는데, 그의 경력이 사진에 미친 영향도 어느정도 있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책 안을 보면 더 화려해요. 영문판과는 달리 한국판에는 기억할 만한 말 몇 마디를 덧붙이기도 했고, 사진의 영어 원제를 살짝 비틀기도 했거든요. 저 사진을 찍던 순간을 동영상으로 웹 상에 올려두었던데, 그것을 보면 흐르는 시간을 포착하는 시선이 더욱 절묘하답니다.

다락방 2013-04-28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사진들이 정말 좋으네요, 정말. 저도 어서 빨리 이 책을 봐야겠어요!

Jeanne_Hebuterne 2013-04-29 20:1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다락방님께서 읽으신다면 어떤 리뷰가 나올지 몹시 궁금합니다.

정작 이 책의 리뷰는 많지 않아 다들 어떻게 읽으셨나, 리뷰를 쓰기 전에 조금 궁금하기도 했거든요. 사람마다 감상이 무척 다르겠지만 제목과 사진의 분위기가 이 책의 경우에는 어느정도 비슷비슷하지 않을까 추측하기도 했답니다. 포토그래퍼는 제목으로 또 다른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이들이니까요. 그럴 때의 제목은 부연설명이라기 보다는 주제의 또다른 표현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보시면 시선을 잡는 몇몇 사진이 있을 거에요.

망고 2013-05-0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에 유머가 있네요. 헤헷 사진이 재밌어서 기분 좋아져요^^

Jeanne_Hebuterne 2013-05-02 08:13   좋아요 0 | URL
미래님, 카페인 하이 같은 첫 번째 사진을 보면 정말 그렇지요?
경쾌하고 밝은 핫핑크 같은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모든 사진이 다 밝기만 한 것은 아니고, 꽤 묵직한 사진들도 많았어요.
즐거운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

다크아이즈 2013-05-01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번 시도 만에 겨우 사진 구경합니다. 멋지구리하옵니다.
근데 테른님은 이런 책 어디서 정보를 얻고 구할까요?
전 고리타분한 책만 눈에 띄는데 글 쓰는 안목이나, 책 고르는 안목이나
그 감각적인 면은 테른님을 따라갈 자 없사옵니다. 크~~


설마, 설마 엄마와 아그 사진은 합성이겠지요?
괜한 생각 ㅠ

Jeanne_Hebuterne 2013-05-02 08:29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팜므느와르님!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모쪼록 이 봄, 이제 안 아프셨으면 좋겠어요!
사진이 꽤 괜찮지요? 그냥 쓱 훑기에도 나쁘지 않은데, 작가는 '현실과의 연결'에 꽤 큰 의미를 둔 듯합니다. 나오는 모든 이들이 '현장'에 있는 이들이거든요. 말인즉, 엄마와 아기는 실제 혈연관계이고 레스토랑의 으르렁대는 연인은 실제 커플이어요. 물론 인간의 이야기는 사진과는 달리 늘 진행형이어서 아기는 더 자랐을 테고 레스토랑의 연인은 지금은 헤어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체의 와이어, 보정작업, 그래픽을 사용하지 않았다니 팜므 느와르님이 말씀하신 저 사진은 실제 찍은 것일 겁니다.

이 책은 알라딘 매체에서 꽤 적극 홍보해서 알게 되었어요. 제가 선호하는 매체가 몇 군데 있는데(외국 작가들의 경우, 해외 언론에서 먼저 접할 때도 잦습니다), 매체와 지인의 추천, 알라딘 서재의 선호도를 보면 꽤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은 듯합니다. 그럼 이 봄, 팜므 느와르님의 리뷰와 페이퍼 기다립니다!

덧-제 안목은 평균인데, 책이 워낙 다들 훌륭해서 이런 칭찬 글 남겨주신 것이겠지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