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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 줄리언 반스의 부엌 사색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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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hrist Mother Mary and Joseph!


우리, 그러니까 조이스와 나는 간단히 뭔가를 만들어 먹고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다. 이것저것 준비하길래 도와줄 것이 없냐고 물은 게 화근이었다. Can you do these onions? 양파 손질 좀 해줄 수 있어? 라길래 뭔지도 모르고 양파를 썰었다. 나는 사과를 깎을 때 감자 껍질 벗기는 칼이 필요한 사람이어서, 하필이면 그날 아침 호박과 새우, 양파를 넣은 된장찌개를 먹은 날이어서.
 내 머릿속에 있는 된장찌개 속의 양파 모양으로 양파 하나를 손질했다. 이윽고 조리대를 본 조이스가 한 말이었고 난 잠깐 이 인간과 절교할까 망설였다. 햄버거를 만들 거란 걸 나한테 말도 안해줬는데 내가 궁예도 아니고 어찌 알았겠는가. 된장찌개 속 양파도 잘 넣으면 되지, 넌 그럼 양파 없이 먹든가! 속 좁고 뒤끝 있고 기억력 좋은 데다 양파 앞에서 망연자실해 본 이가 나 혼자만은 아니란 걸 줄리언 반스의 책은 까칠하게 이야기한다.




 양파와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용어로는 slice와 chop이 있는데, 이 단어들은 논리상 서로 다른 방식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slice는 절반으로 자른 양파를 다시 가로로 얇게 자른다는 말이다. 그러면 반원형 양파가 어수선하게 흩어진다. chop은 절반으로 자른 양파를 세로로, 즉 꼭지에서 뿌리쪽으로 여러 겹 흩어지지 않게 벤 다음 가로로 자른다는 말이다. 그러면 잘게 잘린 양파가 수북이 쌓인다. slice는 finely로, chop은 finely와 roughly로 수식할 수 있다. 따라서 '썰다'라는 말은 다섯 갈래로 나뉘는데, 어느 쪽을 택할까 고민하느라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지 못한다. 물론 거꾸로 생각해서 이런 합리적인 자문을 해볼 수 있다. 즉 "내가 식탁에 음식을 받아놓고 '이 음식은 양파를 다르게 잘랐으면 좋았을 텐데'또는 '그랬어야만 하는데'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던가?"라고 물으면 물론 대답은, "그런 적은 한 번도 없다"이다. 그러나 부엌의 현학자가 내리는 결론은, 양파 자르기가 실패할 수 없는 작업이라기보다는 레시피를 열심히 잘 따랐기에 결과가 좋았으리라는 것이다. 


 

 양파 손질은 채썰기인가 다지기인가 세로 썰기인가 어슷썰기, 깍둑썰기, 혹은.... 이런 생각이 들게 하다가 결국, 책에 나온 조리법을 읽고 그대로 순서대로 따르되 단어 하나하나를 까칠하게 짚고 넘어가는 사람, 바로 줄리언 반스다. 
 1946년생, 영국 중부, 옥스퍼드 대학, 사전 증보판 편찬, 평론가, 작가, 메디치상, 구텐베르크상, 페미나상, 세 번의 슈발리에 훈장, 이외 다수 수상, 그러나 내게는 언제나 '팻에게'라는 헌사와 함께 책을 내는 작가. 이번 책은 '그가 요리를 해주는 그녀에게'라는 헌사가 있다. 책의 첫 번째 속지에는 2003이라는 숫자가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의 아내이자 영국의 전설적인 문학 에이전트, 팻 카바나가 뇌종양으로 쓰러져 숨진 시기는 2008년. 그러니 이 책 출판 당시 줄리언 반스는 주방에서 팻 카바나를 위해 요리하고 팻이 초대한 작가들과 식탁에 앉았을 것이다. 
 그 후 그는 모든 인터뷰를 거절하고 'Levels of Love'를 출간했으니, 시간은 이렇게 사무치고 과거는 이렇게 다르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그곳에서 우리는 모두 다르게 행동한다. 




 그 과거의 주방에서 줄리언 반스는 한 사람의 pedant가 된다. 이 책에서는 현학자라고 불리지만 실제 의미도 다르거니와 부엌에서 움직이는 반스의 느낌도 현학자라기보다는.....요리책 사진과 단어 하나하나에 편집자처럼 집착하면서도 좀 그대로 따라 해 보려고 노력하는 깐깐한 조리사에 가깝다. 이 단어에 대한 역자 주도 책 안에 있고, 조리법도 간혹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번역도 간간이 보인다. 마음에 걸리지 않는 부분이 전혀 없는 역작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손이 가고,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고, '맞아, 나도 이랬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주방에서 요리책을 들추어보는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하되 여전히 까칠하게 1, 2, 4 항으로 구성된 요리책을 보면 '내 요점은 출판사의 실수로 3번이 누락된 게 아니냐는 거고, 그렇다면 그 누락된 내용이 뭐냐는 거에요. 3번이 4번으로 잘못 인쇄된 건지도 모르지만요.'라고 저자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보는 깐깐함을 보인다. 즉, 줄리언 반스의 글에는 요리하는 사람들이 많이들 겪는 상황이 보편적으로 녹아있다. 




바질 페스토를 만들기 위해 말린 바질을 쓰는 경우(조리법 오독), 어쩐지 요리책에 사진이 실린 요리부터 해 보고 싶어 하는 경우(나는 제이미 올리버가 아니다), 어쩐지 자애로운 안주인이 여전히 어디선가 린넨 수건을 표백하고 집안을 어루만질 것 같은 환상(비턴 여사의 살림 교본), 감정이 부엌을 압도하는 경우(줄리언 반스가 요리하는 동안 팻에게 연정을 드러내는 제독의 목소리가 들려버렸다), 'fresh'란 낱말이 들어간 재료가 더 좋을 것 같은 착각(프레쉬 파스타와 슈퍼마켓에 파는 건면 파스타가 용도에 따라 다를 뿐, 어느 한쪽이 낫다는 게 아니다)......이런 환상, 착각, 경우의 수, 오독의 바다를 지나 독자가 마주치는 저녁 식탁의 한 장면.



...그리고 언제든 포미안의 암시대로 애피타이저나 디저트, 또는 둘 다 케이터링 서비스나 제과점에서 쓰면 된다. 프랑스에서는 그런 걸 예사로 여긴다. 이제는 영국에서도 다양한 애피타이저와 그럴듯한 과일 타르트를 사는 게 비교적 용이하므로, 그렇게 안 할 이유가 없다. 이 문제를 이렇게도 논할 수 있다. 손님들이 오기 직전까지 노예처럼 일해서 지친 주인, 그리고 지극히 분별있는 지름길을 택하고 생기 넘치는 주인. 당신이라면 그중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물론 그러려면 우리는 잔존하는 청교도 정신을 극복해야 한다. 상점에서 산 것을 우리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속임수라는 생각을 억제해야 한다. 한편 그걸 우리가 만든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그건 그저 속임수일 뿐이다.


 
 이쯤 되면 인용과 샘플링의 차이가 주방에서 크로스오버하는 상황이 떠오르는데, 언젠가 생업으로 타르트를 만들던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케이터링 주문을 받았는데, 너무 예쁘게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고. 열 명 분량의 디저트로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제철 과일로 적당히 못생기되 성의 있어 보이는 타르트를 주문하는 마음이 바로 저런 것이리라. 샘플링과 인용을 살짝 접어 나빌레라....줄리언 반스도 그러했다. 그는 직접 애피타이저, 디저트를 만들고 메인 요리는 델리에서 포리치니 라자냐를 본인의 집 식기를 가져다주고 당일 그 식기에 받아온다. 요리사의 스트레스 없는 좋은 저녁을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첫 번째 코스를 두고 뭐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좀 분하다). 디저트도 마찬가지였다(괘씸한 것들). 그러나 라자냐를 말할 때는 모두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이 라자냐 맛이 기가 막힌데!"
 "다행이군." 내 대답에 흔들림은 없었다. 그것으로 무사히 넘어간 듯했다. 




 그러고는 초대로 왔던 한 손님이 그에게 조리법을 묻고는, '실제 해보았는데 자네가 만든 것보다 훨씬 맛이 없더군'이라고 소식을 전한다. 우리 인생의 엑스 팩터는 이런 게 아닐까. 실상과 다른 요리, 디너 파티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저녁 초대, 요리책들이 보여주는 환상, 레스토랑은 집이 될 수 없다는 사실 같은 것.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오늘도 맛집을 찾겠지만, 우리 중 일부는 요리책을 '판타지' 장르로 분류하지 않고 '라이프, 리빙' 장르라고 생각하며 영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 도움을 받기 위해서 뒤적이고, 장을 보고, 주방의 조리대 앞에 설 것이다. 
 그리고는 요리책의 사진과 내가 만든 요리가 런웨이 모델이 입은 옷과 내가 입은 옷 태 만큼이나 다르다 해도 또 요리책을 뒤적일 것이다. 살다보면 자기만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몇가지 요리법 정도는 숙지하고 있는 것, 그리고 주방이 열악하다 해도(난 내 오븐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내다버리고 싶다) 그 또한 아래 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줄리언 반스의 'hand to mouth'. 





꿈이란 원래 다 그렇다. 나는 아마 코르뉘 가스레인지는 커녕 내게 확실히 필요한 보조 오븐도 갖지 못할 것이다. 그가 요리를 해주는 그녀 역시 가끔 열망하는 장작 오븐을 갖지 못할 것이다. 부엌에서는 또 무언가 소소한 문제가 계속 생길 것이다. 싱크대 배수구가 막히고, 그 아주 기발한 듯해도 바보 같은 구석 찬장의 문이 빙 돌아 열릴 때 뒤쪽에 놓인 갖가지 물건들이-다행히 주로 과일 티백이-여전히 계속 떨어져도 몇 달 지나도록 사라진 것도 모를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들을 요리에 들이는 노력에 대한 넓은 의미의 은유로 여기도록 해보겠다. 요리는 있는 것(주방 설비, 재료, 솜씨 수준)을 가지고 때우는 것이다. 그것은 작은 성공 하나하나가 가급적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고 실수도 할 수 있는 하나의 절차다. 만일 실제로 꿈의 부엌을 갖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보자. 우리가 하는 요리는 그런 부엌에 걸맞아야 할 테니, 그 가중되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하겠는가. 요리를 망쳐도 예의 그 모든 확실한 변명거리에 의지할 길이 없는 것이다. 최소한 지금 이 상태라면, 데이비드 여사 덕분에 새로 발견한 변명거리를 활용할 수 있다. "요리가 생각대로 안 나와서 이거 참 어떡하지. 어떤 멍청한 인간이 냉장고를 가스레인지에 딱 붙여놔서 말이야."


 

 자, 이제 이 책을 다 읽었으니 난 오늘도 텃밭의 토마토, 바질, 딸기, 호박, 당근, 옥수수, 양파에 물과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을 것이다. 그러고는 일찍 수확한 꼬마 딸기와 벌꿀 향이 나는 밀맥주를 마시며 저녁 메뉴를 생각해 볼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언젠가 마주했던 쉐프의 어느 레스토랑을 떠올리며 내 부엌에 요리책과 함께 서 보기. 적절한 작업지시가 없어 양파로 하느님을 찾게 만든 사람도 모름지기 먹어야 하니까. 
 이 책은 줄리언 반스가 요리의 신에게 보내는 조그만 쪽지, 요리책을 읽는 독자에게 띄우는 메시지. 다 읽고 나면 부엌의 요리책을 다시 들춰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수필이다. 






그날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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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5-17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싶어 담아놨는데 쥬드님, 벌써 읽었네요!

Jeanne_Hebuterne 2019-05-17 14:26   좋아요 1 | URL
네 다락방님! 줄리언 반스, 앤 타일러, 권여선, 아고타 크리스토프..이런 작가들은 이름만으로도 구매욕을 팔랑팔랑!! 중간에 번역이 왜 이런 것일까 하는 부분이 좀 있지만 그래도 좋았어요!

다락방 2019-05-17 14:27   좋아요 1 | URL
쥬드님, 사진에 와인잔도 너무 좋아요!
 
먼 북쪽
마르셀 서루 지음, 조영학 옮김, 무라카미 하루키 후기 / 사월의책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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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은 나름대로의 힘이 있다. 서쪽 사막에서는 씨앗 상태로 100년 동안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식물들도 많다. 그저 다시 꽃피울 날만 기다리는 것이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비가 100년만에 내렸는데도 바위와 모래가 온통 꽃과 식물로 뒤덮였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책속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여러 갈래를 지녔다. 어떤 글씨는 아름답고 어떤 글씨는 섬세하다. 그런가 하면 마르셀 서루의 글씨는 묵직하다. 형용사와 부사를 뺀 진실, 현실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벗어난 미래. 그 가까운 미래, 씨앗의 파종기한을 보며 종종 린넨을 세탁하는 에반젤린의 메이크피스를 보면 묵직한 거품 같은 안개를 보는 느낌. 거품은 가라앉고 안개는 걷히기 마련이지만 이 슬픈 sf가 꿈꾸는 것은 현재라는 점이 마음을 찌른다.





 sf가 꿈꾸는 것은 언제나 역설적으로 현재. 물론 이 작품이 전적으로 sf는 아니다. 아마도 작가가 특정 장르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대한 장르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었다는 점이 오히려 이야기의 흐름을 돕는다. 







 이 책 속 메이크피스는 에반젤린의 유일한 시민이자 보안관이다. 작가는 체르노빌의 거주 금지 구역에 들어가 혼자 자급자족하는 여인을 취재한 다음 이 소설을 생각했다는데, 체르노빌 금지 구역의 유일한 주민과 메이크피스가 다른 점이라면 고요함의 정도일 것이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메이크피스의 마음이 여행을 함에 따라,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 번씩 요동치는 것을 보면 생각하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 씨앗과 다를 바가 무엇일까.





 시베리아 툰드라 지역, 황량하고 먼지와 적막함이 감돈다. 책장을 넘기고 얼마 안 되어 메이크피스가 만나는 사람이 임신 상태의 핑이라는 것, 그리고 책장을 덮으면서 메이크피스의 이 기록이 '혹시나'라는 기대를 품었다는 것은 인류가 꿈꾸는 세계와 닿았다. 

 세월이 잘 맞물리는 시계처럼 돌아가고 봄이면 작물을 심던 시절. 언제나 옛날은 '좋았던 옛 시절'로 기억되고 윤색되기 쉽다지만, 마르셀 서루의 '현재'는 엄정한 현실을 담았다.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의 사람은 어떻게 될지 품었던 의문. '더 로드'에서 무겁게 그렸으니 '먼 북쪽'이 굳이 필요할까 싶었으나 sf가 꿈꾸는 것은 이제 종말 후의 삶이라는 생각에 다시금 생각의 솜털이 곤두선다. 





 아주 오랜 옛날 해저 이만리와 달세계 여행을 꿈꾸던 인류가 이제 와서 그리는 미래가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라니. 

 이 저릿한 슬픔 이후, '이 없음'에 던져진 것이 여자 두 명과 태아 하나라는 설정은 이상하게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어쩌면'하고 생각해 본다. 남자는 유전자 전달 이후에도 너무 오래 살아남아 문제이고 여자는 생명 잉태 이후에도 또한 너무 오래 살아남아 문제라면,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까. 30년을 살 수 있는 생명체가 2년 후 도살되고 30년이 전부인 생명체가 100년을 산다면 이것은 생명의 이상한 진행이다. 이 나선세계의 행진이 도착하는 곳이 설사 오염된 세계,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쓸모없는 플라스틱 조각이라 해도 기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 플라스틱 조각에라도 희망을 품게 되는 때가 있다. '드디어'와 '혹시나' 사이를 가파르게 오가는 사람의 마음. 메이크피스라는 화자가 일인칭으로 모든 것을 서술하는 이 모든 사건에 독자는 필연적으로 그의 일을 자기 일처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택한 방법은 지극히 단순하다. 일인칭 화자를 내세우고 시제는 현재로 제한할 것.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다 죽고 여자만 살아남아야 한다'라든지 '남자는 다 불안한 존재다', 혹은 '여자만 완전하다'라는 느낌은 없다. 메이크피스가 살아남은 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강한 생명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작품 속 여성성과 남성성은 극도로 제한된다. 메이크피스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그가 가녀려 보이거나 행동이 독자에게 다르게 보이지는 않는다. 'like a girl'을 뒤집은 'like myself'의 느낌이 이야기를 장악한다. 



 


 끝이 없는 한계를 그리는 마르셀 서루의 스타일은 모호하지 않다. 오히려 그의 문체는 분명한 형식에 간단한 수단을 고의로 심어놓는 것인데, 이 자체가 아름다움을 일구어 낸다. 여성성도 남성성도 사라진 인간성을 그리기 위해 이보다도 더 명확한 입장이 있을까. 허구 없는 진실은 이런 것. 메이크피스가 마지막으로 접하는 것은 어느 소녀의 기록. 메이크피스 역시 '언젠가 내 글을 볼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남겨둔다'라는 대목을 접하노라면, 인간의 읽는 행위 자체의 숨은 뜻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작가가 인터뷰에서 언급하는 '마음과 마음이 겹쳐지는 신비로운 행위'로서의 읽기.



 


아버지는 일이 작못되면 '서쪽으로 빠진다'라는 표현을 썼다. 하지만 서쪽은 나한테 항상 좋은 느낌이었다. 결국 서향은 태양의 길이 아닌다. 더욱이 내가 아는 어떤 역사에서도 사람들은 자유와 거처를 찾아 서쪽으로 이동했다. 반대로 우리 세상은 '북쪽으로 빠진' 셈이다 정말로 북쪽으로 빠졌다. 그것도 얼마나 먼 북쪽인지 나도 이제 막 배우려는 참이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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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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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One for sorrow, two for joy, three for a girl... Three for a girl. I'm stuck on three, I just can't get any further. My head is thick with sounds, my mouth thick with blood. Three for a girl. I can hear the magpies-they're laughing mocking me, a raucous cackling. A bidding. Bad tidings. I can see them now, back against the sun Not the birds, something else. Someone's coming. Someone is speaking to me. Now look. Now look what you made me do.-이 책의 여는 글.




 스릴러의 기본에 충직한 이야기, 히치콕의 가스등을 떠올리게 하는 플롯, 판단을 밀고 나가거나 망설이는 사람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의 모든 것은 간단하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인물, 사건, 배경, 이 세 가지를 저자 폴라 호킨스는 그의 첫 작품에서 영리하게 섞는다. 그 손놀림이 능란해서 마치 작은 도시의 카지노에 온 기분이다. 창밖에 보이는 것을 보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한가지가 명확해진다. 확신이 아니라 실수에의, 불확실성에의 가능성. 확신은 쉽다. 내 머릿속의 잣대로 명제를 가늠하는 일. 어려운 것은 불확실함에의 인식이다. 옳고 그름, 관계의 정직성 내지는 부정직, 부드러움과 날카로움, 전직 저널리스트였다는 폴라 호킨스의 소설 '걸 온 더 트레인'은 스릴러의 외피를 둘러쓴 감정의 곡선을 보여준다. 





 2013년 7월 5일 

 기찻길 옆에 옷 뭉치 하나가 버려져 있다. 셔츠처럼 보이는 연한 파란색 천이 더러운 흰색 옷과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다. 아마도 철둑의 작은 덤불숲에 불법으로 버려진 화물에서 빠져나온 쓰레기겠지, 아니면 이 구역 선로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이 남기고 간 것일 수도 있다. 그 사람들은 이곳을 뻔질나게 드나드니까. 어쩌면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고. 어머니는 내가 상상력이 지나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톰도 그렇게 말했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더러운 티셔츠나 신발 한 짝이 버려져 있는 걸 보면, 나머지 한 짝과 그 신발들에 꼭 맞는 발밖에 생각나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인가. 

 기차가 갑자기 덜커덩, 끼익 하고 새된 소리를 내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작은 옷 뭉치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기차는 힘차게 조깅하는 속도로 런던을 향해 달려간다. 내 뒷자레어 앉은 사람이 짜증 섞인 한숨을 힘없이 뱉는다. 아무리 기차 통근에 이골이 난 사람이라도 애시버리에서 유스턴까지 가는 오전 8시 4분 완행열차는 견뎌내기가 그리 쉽지 않다. 원래대로라면 45분 걸리는 구간이지만 제시간에 도착하는 경우가 드물다.-레이첼


 

 걸 온 더 트레인, 이 책의 창문은 바로 레이첼이다. 소설의 문을 여는 것은 레이첼, 2013년 7월 5일 금요일, 그리고 기차 안의 사람들이다. 경쾌한 전화벨 소리, 기찻길 옆에 버려진 옷 뭉치를 보고 공상을 하는 레이첼, 기찻길 옆의 집을 보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 것으로 생각하는 그의 머릿속이 바로 독자가 접하는 첫번째 창문이다. 책장을 넘기면 조금씩 드러나는 몇가지 필터. 그가 직업을 잃었지만 계속해서 런던으로 통근하는 척한다는 것, 톰은 그의 전남편이고 두 사람 사이에는 불임, 알콜 중독의 문제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레이첼은 아직도 알콜 의존이 심각한 수준이며 술을 마시면 자주 정신을 잃고, 기억을 잃는다는 것. 간단하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





 남편과 이혼했는데도 아직 결혼 전 성으로 이름을 바꾸지 않은 여자, 술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마시는 여자, 전남편과 지금 그의 부인이 사는 집을 찾아가기까지 하는 여자, 실직했음에도 아침이면 런던으로 가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 그의 상황을 관통하는 화살은 중독일까 의존일까, 나는 판단을 망설였었다. 중독의 어원은 addicene. 양도, 굴복을 뜻한다. 한마디로 스스로 권리를 다른 어떤 존재에게 내어주는 것. 스스로 노예 상태가 되는 것. 중독 관련 질문지를 접하면 한 가지 반복되는 형용사, 부사가 있다. '과도한'이라는 단어가 계속 등장한다. 동사와 명사를 넘치게 하는, 그 자체로 압도하는 단어. 

 과도하게 화내는가? 과도하게 필요로 하는가? 바로 '과도하게'. 레이첼은 과도하게 술을 마신다. 과도하게 거짓말을 한다. 전남편 톰과 그의 부인인 안나는 그런 레이첼 때문에 과도하게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그러던 와중 이 책의 다른 화자, 메건이 실종된다. 





메건은 제스. 레이첼이 매일 기차로 통근하며 하루에 두 번 지나치는 어떤 집에 사는 여자이다. 통근길에 지나가는 집을 보며 레이첼은 그 집에 사는 부부를 보고 상상한다. 아마도 남자의 이름은 제이슨, 여자의 이름은 제스일 것이다. 그 상상이 너무나도 강력한 토대를 지녀서, 심지어 레이첼은 경찰에게 그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제스는 아마도..'라고 상상의 그 이름을 언급하기까지 한다. 레이첼은 그런 사람이다. 기찻길에 버려진 신 한 짝을 보면 그 신에 꼭 맞던 발을 상상하는 사람. 걸 온 더 트레인이 나아가는 방향은 독자가 가졌던 확신이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독자는  앞서 말했던 감정의 곡선을 만질 수 있다. 알콜 중독, 폭력, 거짓말, 신의, 믿음, 사실, 몸과 마음이 다칠 때 느끼는 절망,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무력감. 





관계에 만약 성공과 실패라는 것이 있다면,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성공은 무엇이고 실패란 무엇일까. 이 답은 비교적 쉬웠다. 덧셈과 뺄셈의 명확한 공식. 혹은 곱셈과 나눗셈 같은 것일 것 같았다. 도약, 혹은 정확성.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관계. 한마디로 주도성을 잃지 않는 관계. 그러나 그것을 언제 알아챌 수 있을 것인가의 질문에 생겨나자 답하기가 어려웠다. 당장은 내가 좋아하고, 나를 나일 수 있게 해주는 관계라고 생각했건만 돌이켜 보면 아닐 때가 있었다. 이 사람과 있을 때의 나는 이카로스 같다고, 비약 없이 도약하고 햇빛도 머지않다고 생각했으나 바닷물에 풍덩 나자빠질 때는 실패도 그런 실패가 없었다. 그 실패가 도리어 나를 계속 걷게 만들 때도 있었으니, 이것은 주정뱅이의 마지막 한 잔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 마지막이라는 것이 끝이 없을지니.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무력감보다는 몸과 마음이 다칠 때의 절망이 더 클 때가 있다.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 어디서 상처를 입었는지조차 모르는 레이첼을 보며 독자는 그의 기억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심스럽다. 이 스토리 텔러는 어쩌면 마지막에 최후의 진실을 토로하는 최후의 일인이 아닐까? 아니면 모든 것은 술로 만든 강물 아래에 있고, 레이첼은 단지 거짓을 사실이라 주장하는 것인 아닐까? 이 두 가지 상반된 시선 속에서, 조금씩 메건이, 안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I can hear the train coming : I know its rhythem by heart. It picks up speed as it accelerates out of Northcote station and then, after rattling round the bend, it starts to slow down, from a rattle to a rumble, and then sometimes a screech of brakes as it stops at the signal a couple hundred yards from the house. My coffee is cold on the table, but I'm too deliciously warm and lazy to bother getting up to make myself another cup.-Megan.





 빛나던 소녀, 도망자, 아내, 화랑 딜러, 외도, 다시, 어디론가. 그리고 그사이 어딘가 있는 메건. 레이첼이 스스로 투영시켜 상상하던 제스는 기차가 오는 소리를 듣고, 레이첼이 상상하던 커피를 마시고, 레이첼이 상상하던 제이슨과 조용히 포옹한다. 실제 그의 마음 속에서 어떤 폭풍이 몰아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고, 그 폭풍의 세기가 오히려 남들을 화나게 한다면 메건에게는 불합리한 일일 것이다. 폴라 호킨스는 천천히 주저함 없이 메건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창밖에 보이는 것을 다 믿지는 마세요. 어떤 구름 뒤에 해가 있는지, 혹은 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답니다.






 메건이 실종되고 레이첼이 경찰에 증언할 때, 바로 그 구름이 문제가 된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 레이첼의 증언은 믿기가 힘들다. 메건이 실종되던 날 레이첼이 맨정신이었다 해도 믿기 힘들었겠지만 그의 모든 상황은 그의 모든 증언을 반박하기에 충분하다. 그렇지만 누구를 믿을 것인가? 일 년 전, 남편이 있지만 다른 남자와 자기 집 정원에서 포옹을 하던 메건을 믿을 것인가? 전 부인 레이첼이 했던 것 처럼 남편 톰의 가방을 뒤지고, 컴퓨터 비번을 알아내서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고 찾는 안나를 믿을 것인가? 전남편과 그의 부인을 스토킹하며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치 않게 메건 실종사건의 수사에 끼어드는 레이첼을 믿을 것인가? 




 

 이 물음표 속에서조차 확신은 쉽고도 힘든 것, 마음속 잣대가 분명하다면 쉬울 것이고 상황의 개별성을 인지한다면 어려울 것이다. 게으른 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 앞에서 레이첼, 안나, 메건은 각자 숨 쉬는 개별적인 존재가 된다. 





 I feel very cold. Did I know then that he wanted her? Megan was blond and beautiful-she was like me. So yes, I probably knew that he wanted her, just like I know when I walk down the street that there are married men with their wives at their sides and their children in their arms who look at me and think about it. So perhaps I did know. I wanted her, he took her. But not this. He couldn't do this.

 Not Tom. A lover, husband twice over. A father A good father, an uncomplaining provider.

 "You love him," I remind her. "You still love him, don't you?"

 _Anna




 메건은 점점 불행해지고 안나는 혼란스러워한다.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이젠 남자들이 탐내기는커녕 좋아하기 힘든 여자가 되어버렸다. 단순히 살이 쪄서, 혹은 음주와 수면 부족으로 얼굴이 부어서만은 아니다. 내가 잠자코 있을 때나 움직일 때나 내 얼굴에 고스란히 새겨진 상처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는 것 같다.' 레이첼의 이 말을 들을 때면 독자의 혼란은 더 강해진다. 자신의 존재, 혹은 마음에 비쳐 가장 닮은 듯한 어떤 캐릭터를 택하여 그 캐릭터에 이입하려는 독자의 성향을 폴라 호킨스는 십분 활용한다. 술 취한 채 어떤 소리를 층계 위에서 들었는데, 어쩌면 그 소리가 살인의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가장 강력히 어필하는 스릴러 영화의 믿을 수 없는 주인공 같은 레이첼. 독자는 단지 무언가 위험한 일이 레이첼이 본 창문 뒤편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챌 뿐, 그것이 진짜 위험인지 아닌지를 확신하기는 아직 이름을 알고 있다. 알아채기는 했지만 입증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이 상황. 추리와 스릴러는 이렇게 속삭인다. 






심연을 담았으되 닮지는 않은, 스릴러 이전에 사람의 마음 속 열 길 우물을 담은 소설.






 She's buried beneath a silver birch tree, down towards the old train tracks, her grave marked with  cairn. Not more than a little pile of stones, really. I didn't want to draw attention to her resting place, but I couldn't leave her without remembrance. She'll sleep peacefully there, no one to disturb her, no sounds but birdsong and the rumble of passing trains. -이 책의 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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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5-11-13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오자마자 쿠폰이랑 신간세일가격 얹어서 사놓고서는 아직도 못 읽고 있네요.-_-: 기대되는 책인데 말이죠.

Jeanne_Hebuterne 2015-11-14 10:21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은 나오자마자 와락 끌어안았다가 슬쩍 밀쳐두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딱히 호오의 감정이 있는 건 아닌데 그냥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전 정말 오랜만에 알라딘에서 책 주문을 하고 주문과 즉시 오매불망 기다림을 시작했어요. 황지우 시인의 편지가 떠오를 지경입니다 호홋
 
두번째 봄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4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뭔가를 아주 잘 아는데 아무리 애써도 그게 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을 때의 기분을 아는가?



 저 한 마디로 시작하는 소설. 그 앞의 책날개엔 이러한 소개가 있다.




 1890년 영국 데번에서 미국인 프레더릭 밀러와 영국인 클라라 베이머 부부의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어머니의 교육을 받았고 열여섯 살 때 파리로 이주해 학교에서 성악과 피아노를 배웠다. 1912년 영국으로 돌아와 2년 뒤 아치볼드 크리스티 대령과 결혼했고 1차 대전 시기에 쓴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으로 데뷔했다. 1976년 85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ABC 살인사건' 등 80여 편의 추리소설을 집필했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출간 직후 애거사는 어머니의 죽음과 남편의 외도 등에 큰 충격을 받고 스스로 실종 사건을 일으키는 등 방황의 시간을 보내지만, 이때의 사유를 바탕으로 1930년부터 1956년까지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다. 


 


 정원의 여자, 39세의 피부가 희고 꼿꼿한, 부유한 집안의 잘 교육받은 여자. 뭔가를 경험하여 타인에게 보일 동정심이 없는 여자. 일요일에 노래를 부르고 게임을 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페스트리, 수플레, 볼로방. 프랑스어와 상상 속의 친구들. 간결하게 힘을 빼고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밤새 이야기해나가는 여자. 바로 '두번째 봄'의 셀리아의 이야기인 동시에 메리 웨스트매콧의 이야기다. 




 어쩌면 작가에게는 다른 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 다른 이름은 고스트 라이터일 수도 있고,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애거사 크리스티와 메리 웨스트매콧이 될 수도 있다. 이미 굳어진 지문을 피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작가의 자기 이야기. 이 책은 한낮에 읽다 쉬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을 잘 읽기 위해서라면 개와 늑대의 시간에 첫 장을 펼쳐 들어 쉬지 않고 한 번에 쭉 읽어야 할 것이다. 셀리아의 이야기엔 그런 그림자가 있다. 어디까지가 내 엄마이고 어디까지가 아빠의 부인일까? 어느 구름 뒤에 해가 있고 어느 구름 뒤에 폭우가 숨었을까? 




 어떤 일에 있어 한가지 불행이 있다면 우리가 아직 다 살지 않았다는 점. 어떤 일에 있어 한가지 다행이 있다면 우리가 아직 다 살지 않았다는 점. 애거사 크리스티에게는 분명 다른 이름이 필요했다. 자신의 자서전에도 빼놓을 만큼의 일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나는 지금 지구에서 바라보는 달의 앞면과 아무도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을 거울에 비추어보는 독서를 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아는 추리소설의 여왕, 데임 작위의 애거사 크리스티. 직업의 성공, 유복하고 풍요로운 유년, 탄탄한 자기 세계. 숨죽여 울고만 싶고 돌아가고만 싶은 어머니의 품속, 이제 더는 없는 그 온기. 누구보다도 가까이하고 싶었던 세계가 점점 멀어져 가고 급기야는 자신을 아프게 할 때의 탄식. 글 앞에서 한없이 강하다가도 겸손해지는 작가의 자의식. 이 모든 것이 바로 메리 웨스트매콧이었다. 바로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그림자.


 


 단어, 낱말, 문장, 문단, 이야기로 태피스트리를 만들어내는 작가로서의 애거사 크리스티가 있었다면 하나하나 과거를 되짚어가는 메리 웨스트매콧이 있다. 그 계기는 어머니의 죽음일 수도, 남편의 외도일 수도, 이혼, 혹은 자살 시도일 수도 있다. 아니다. 그것은 방아쇠에 불과하다. 이야기 속 셀리아가 반해서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고 너무나도 사랑한 더멋같은 남자는 아무리 부모의 죽음과 배우자의 외도, 이혼과 자살 충동을 겪어도 이렇게 암실에서 필름을 현상하듯 대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셀리아가 지닌 이야기에의 열망, 자신을 돌아보고자 함에서 오는 성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삶에 대한 오만함의 삼위일체가 빚어낸 때늦은 결과물이다. 삶의 상징은 그런 것이랍니다. 라고 말하는 나직한 작가의 목소리. 만약 삶이 우리 앞에 기호로 놓여 있다면, 사는 것은 한결 간단할지도 모른다. 아예 간단함을 넘어서 정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코 1:1로 해석할 수 없는 것.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는 무엇. 상징은 그러한 것이고 사는 것 또한 그런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어떤 여자일까?' 하는 케케묵은 질문일 수도, 핀에 찔린 나비가 너무 불쌍한데 그 나비를 선물한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여자 아이일 수도, 화가의 글로 남은 셀리아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책장을 넘기는 내 손끝에 걸린다. 





 셀리아에게는 친절도 동정도 없었다. 그녀는 모든 감정을 헛되이 소진해버렸던 것이다. 스스로 알았듯 그녀는 그런 점에서 바보 같았다. 그녀는 너무 불행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베풀 동정심이 없었다. 입가에 새겨진 깊은 주름은 그녀가 지금까지 참고 견딘 커다란 고통의 흔적이었다. 그녀는 이내 내게도 '어떤 일이 일어났었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우리는 동등했다. 그녀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았고, 날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내 불행은, 그저 내가 어떻게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는 그녀의 결심을 알아보았는가를 이해하는 근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이의 아픔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타오른 불길과 거친 물결에 투신했던 사람은 길에 버려진 동물에게 품을 동정심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심각한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오히려 커다란 재앙에 효율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감정은 빨리 지나가지만 깊은 통찰은 바뀌지 않는다. 감정을 버리고 사실을 그대로 바라보는 힘.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길을 걸었던가. 탕플 감옥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 직전에, 골든 게이트 브릿지에서 투신자살하는 이들이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그리고 셀리아가 어릴 때부터 보아온 총을 든 남자에게서 도망쳐 다시 자살을 시도하기 직전에. 이들은 다들 모종의 위험 앞에서 마지막으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남은 사력을 다한다. 이때 작품 속에 녹아드는 작가의 목소리. 





 그렇다. 나는 핵심만 기록할 생각이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어찌됐든 그녀가 무너져 항복할 때까지-그녀 곁을 떠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손을 쓸 수 없는 화가가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핵심만 기록할 생각이라는 듣는 이의 결심은 곧 메리 웨스트매콧이 된 애거사 크리스티의 마음이다. 커다란 파도 앞에서 당시에는 정신을 잃었지만, 지금은 더는 잃을 정신이 없다는 이의 마지막 자의식. 남편의 외도 앞에서 셀리아의 모든 정신은 남편에게 가 있다. 남편의 여자에게 가지 않는 그의 놀라운 강인한 자의식 앞에서, 메리 웨스트매콧이 되어야 했던 애거사 크리스티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작가가 늘 앉던 책상 앞이 아닌 다른 곳을 선택했을 때는 이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읽고 싶은 마음. 스스로가 창조한 세계가 아닌, 창조한 세계 속에서 숨 쉬던 자신을 만나고 싶은 마음. 그리하여 어렸을 때, 핀에 찔린 나비를 보고 괴로워하고, 아주 드높이 펼쳐져 있을 거라 생각한 산이 멀찍이 있는 모습이 실망하고, 아빠가 죽었을 때 엄마에게로 가서 '아빠는 천국에 갔어요. 계속 아빠를 불러서 휴식을 방해하고 싶진 않죠, 엄마?'라고 착하게 말하는 여자아이를 만나는 마음. 





 이야기 마지막, 셀리아의 모든 이야기를 들은 그는 '그녀는 서른아홉 살에 돌아갔다....성장하기 위해....'라고 말한다.

 아, 이 한 가닥 자만심이라니! 

 책장을 덮기 전 마지막으로 만나는 이 글귀에서, 이 오만한 추리소설의 여왕이 남긴 채찍질은 너무나도 근엄하여 이야기를 따라가는 내도록 느꼈던 모종의 일체감이 경외심으로 바뀔 지경이었다. 셀리아가 서른아홉 살에 돌아간 것은, 그 목적이 무엇이 되었던 그가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였다. 마지막까지 스스로의 치맛자락을 정리하는 정리된 손길, 삶이 간혹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호가 아닌 상징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 동정심과 상상력, 어머니의 따스함과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지키려는 노력, 힘을 탕진해버릴 수 있는 책임감. 가짜를 가졌을 때는 진짜를 가질 수 없는 법. 




 애거사 크리스티는 아마도 이 소설을 쓴 다음에야 자신이 직조한 추리소설로 한결 가볍게 돌아설 수 있었을 것이다. 큰 일과 작은 일. 굵직한 사건과 조그만 느낌. 큰 결심을 뒤로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이가 들려주는 자기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유모가 잠자리에서 입에 넣어주는 달콤한 과자, 아름답고 다정한 어머니와 자상한 아버지. 가족이 함께하는 여행, 아버지의 죽음 이후 좀 이상해 보이는 어머니. 늘 자신만만한 할머니, 사교계! 너무나도 원했기에 손에 쥐기를 오히려 주저하는 겸허한 사랑, 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사랑. 자신의 것을 최대한 지키려는, 모든 것을 잃은 자가 낼 수 있는 당당한 목소리. 자신을 닮지 않아 그가 원하는 것을 내어줄 수 없는 딸. 그 사이를 적시는 것은 어머니의 미소, 아버지의 목소리. 남편의 포옹, 딸의 냉정함. 사람으로 이루어진 관계 속의 셀리아. 혹은 홀로 정원에 앉아 굴렁쇠를 하마라고 상상하는 셀리아. 정원에 나가면 그 어린아이가 앉아 공상하고 있었고, 집안에 들어가면 마호가니 가구 사이를 뛰어다니는 어린 셀리아가 있었다. 열여덟 살의 셀리아, 전쟁 중의 셀리아. 더멋과 결혼하여 그가 원하는 것을 내어다 주려는 셀리아......





 이 모든 것이 당신이에요. 라는 목소리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조금씩 짙어진다. 

 메리 웨스트매콧이, 셀리아가, '나는 바보였어요. 다른 여자들에게는 다 일어나는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죠'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신문을 펼치면 그가 거기에 있다. 책을 읽으면 그가 거기에서 서성인다. 그는 셀리아이기도 하고, 셀리아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모든 것을 부수는 총을 든 남자이기도 하다. 셀리아가 너무나도 사랑해서 결국, 모든 것을 내어주게 된 더멋이기도 하고 죽도록 머리를 쓰며 살아온 셀리아의 엄마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무엇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책장을 덮은 나도, 아가사 크리스티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받아쓴 메리 웨스트매콧도 알 수 없다. 오로지 셀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단 한 사람만이 어렴풋이 짐작할 뿐, 이야기 속의 모든 인물은 우리에게 이렇게 늘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우리의 읽는 눈과 말하는 입이 앞으로도 이야기 속의 그들과 오버랩되는 삶을 살며 무언가를 느낄 것이며, 그 모든 것이 모여 우리 자신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실마리를 조그맣게 남긴 채.






 출발 경적이 울렸고 나는 뛰어야 했다......

 그래서 내게 그런 인상만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인상은 아주 선명했다.

 공포......그리고 안도.

 안도라는 말은 너무 약하다. 그 이상의 것이었다. 구제가 더 적절한 것이다.

 그녀가 본 것은 총을 든 남자였다. 그녀에게 공포를 상징하는......

 긴 세월 동안 그녀를 쫓아다녔던 총을 든 남자......

 그녀는 마침내 그를 똑바로 대면하게 됐던 것이다......

 그는 아주 평범한 인간이었다.

 나 같은...... 




따옴표 속 모든 말은 책속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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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31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01 0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iforte 2015-09-10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노페디, 제 알람음악입니다. 어떤 음악을 알람음으로 써도, 아침마다 그 음악이 `hate`해지던데..ㅋㅋ 유일하게 질리지도, 화가 나지도 않고서 제 잠을 깨웁니다. 신기하죠? ㅋㅋ
오늘도 일 중간에 잠깐 들려 자알 쉬다 갑니다. 잘 계시지요?

iforte 2015-09-10 01:01   좋아요 0 | URL
아.. 근데 개인적으로는 Gnossiennes를 더 좋아합니다. 특히 3번 & 4번. 혹시 Elegy란 영화를 보셨는지. 저 음악이 보다 더 잘 어울리는 장면을 찾지 못하겠다 할 정도로 적절한 장면에서 묘하게 사람 마음을 뒤흔들어놓더군요.

Jeanne_Hebuterne 2015-09-17 14:31   좋아요 0 | URL
iforte님, 제 지인은 짐노페디를 듣더니 대뜸 `마음이 가라앉습니까? 우울함에 젖어드나요?` 이렇게 성우 나레이션 흉내를 내길래 왜 그러냐고 했더니 한때 프로작 광고음악으로 짐노페디를 쓰는 걸 봤다고 하더라고요. 음악에 관한 기억은 이렇게나 다른가 봅니다. 저는 어느 겨울 차가운 공기 속에서 이 음악을 계속 반복해 듣던 겨울날이 떠올라요. 차갑고 청명한 느낌이 들었는데 iforte님은 알람 음악으로 활용하시는군요.

요즘 고양이 꼬리를 따라다니느라 문화생활을 도통 하질 못했는데 iforte님 글을 보니 영화도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imdb를 찾아보니 페넬로페 크루즈 주연의 영화가 뜨는데, 도서관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거장 신화 - 클래식 음악의 종말과 권력을 추구한 위대한 지휘자들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김재용 옮김 / 펜타그램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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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의 눈은 오케스트라 전체를 응시한다. 모든 연주자는 지휘자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고 느끼고, 여기에 더해 자신의 소리를 듣는다고 느낀다.  ... 지휘자는 연주자 개개인의 마음 속에 있다. 그는 연주자들 각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모든 면에서 살아 있는 법의 화신이다. 그의 손은 명령하고 금지한다. ... 연주가 진행되고 있을 때에는 작품 외에 아무 것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연주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만큼은 지휘자가 세계의 지배자가 된다.-책 속에서, 엘리아스 카네티. 





 연주하지 않고 작곡하지 않으면서 창조에 버금가는 행위를 하는 느낌을 주는 존재. 전제를 통제하고 확장하면서 소리를 만들어 가는 존재. 뭔가를 만든다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존재. 노먼 레브레히트의 거장 신화는 이러한 '지휘자'라는 이야기를 하는 책이다. 읽노라면 황색의 전통을 바탕으로 검은색을 덧칠하려 애썼다는 느낌이다. 





 오래된 이야기. 그러나 오래지 않은 이야기. 
 이것은 앞으로 올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이야기. 
 사건, 상황, 말, 그리고 소리. 노먼 레브레히트는 데일리 텔레그라프, 이브닝 스탠다드, BBC RADIO 3 등을 거친 음악 평론가이자 소설가. 날카로운 귀와 황색 언론의 뒷말이 어우러진 그의 '거장 신화'를 읽노라면 흡사 주방의 뒷이야기를 다룬 앤서니 보뎅의 '키친 컨피덴셜'을 읽는 듯한 느낌이다. 고전 음악을 듣는 이라면 솔깃, 고전 음악을 듣지 않는 이라면 흘깃, 넘길 수 있는 이야기들. 최초의 지휘자 한스 폰 뵐로가 지휘하다 발등 찍어 괴사로 사망하게 된 이야기부터 나치에 어중간하게 협력하느라 애먹은 푸르트벵글러, 음반 시대의 황제 카라얀을 거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클라이버와 텐슈테트, 현재 베를린 필을 지휘하는 사이먼 래틀까지를 아우른다. 그 사이에는 오로지 자신들만의 이익을 생각하며 그 자체로 움직이는 빈 필하모닉, 아직도 험난한 길을 가는 여성, 흑인 지휘자 이야기가 조금씩 스민다. 그리고는 마침내 지휘의 종말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 도톰한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잔무늬와 큰 물결이 어우러져 어떤 존재를 조망하지만, 명암을 적절히 덧붙여 지루하지 않은 책.




 과장과 축약, 비약과 해명을 듣노라면 그것은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소리의 이미지,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려울 것이라는 추측, 모른다는 편견, 관심 없다는 단정을 벗어나 요즈음 지켜보기 힘든 시간의 흐름을 떠올린다. 오랜 시간 한자리에 앉아 4악장에 이르는 교향곡을 듣는 이들이 줄어든다. 한 장에 이만 원 가량 하는 음반은 이제 박스반으로 바뀌어 장당 몇천 원의 가격에 구할 수 있다. 복각과 리마스터링을 거친 음반 속에는 그러나 몇 년도인지 어디에서, 누가, 누구와 함께했는지 하는 정보가 빼곡하다.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호오의 감정에 그칠 것이니 그만큼 위험한 것이 어디에 있나. 이 책은 그 중에서도 '누가' 했는지에 관한 물음에 답하는 길고 긴 해명 글이다. 그들은 누구이길래 악단의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사이먼 래틀이 지금처럼 유명해진 것은 유명하지 않은 악단에서 최고의 연주를 뽑아냈기 때문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종종 지휘자를 앞에 세워두기만 할 뿐, 자신들 마음대로 연주할 때도 있다. 어떤 이들은 불굴의 논리를 꺾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소리를 매끄럽게 완화한다. 그것은 청중이 사랑하는 소리일 때도 있고, 음반사가 좋아하는 소리일 때도 있다. 노먼 레브레히트가 말하듯 지휘자는 요청을 수락하고, 조건을 받아들이고, 컨디션을 조절한다. 이것은 홀로 만든 것일까, 누군가가 애써 만든 것일까?





 막상 포디움에 섰을 때에는 자신의 작품을 훌륭하게 지휘하지는 못했던 베토벤, 최초의 지휘자 한스 폰 뵐로, 무력에 맞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를 넘는 것에 맞선 토스카니니, 누구보다도 따뜻한 모차르트를 들려주지만 인간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브루노 발터, 나치 행사에서도 연주했지만 유대인 단원들을 구하려는 헛된 노력을 했던 푸르트벵글러, 제왕이 되고 싶었던 카라얀, 'DO YOUR WORST'라고 말하며 오케스트라와 가까워졌던 토머스 비첨, 그 자체로 뉴욕이었던 번스타인. 이들이 만드는 것은 음악이지만 음악은 종종 그 자신만으로 어떤 길을 가는 것은 아니라고 노먼 레브레히트는 평범하고 무난한 어조로 말한다. 거장의 목록은 책 뒤의 색인으로 충분하다. 대신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휘의 속성을 파고들어 지휘자로 은유할 수 있는 사회, 정치, 경제, 문화의 지렛대이다. 그리고 저자 자신이 밝히듯 그 지렛대를 이야기하는 목소리에는 일체의 아첨도, 완곡한 미사여구도, 맹목적인 신격화도 없다. 이를테면 이러한 대목처럼.




로제 문하 중에서 고아가 된 어느 여성 바이올리니스트가 뮌헨의 리허설에 참가하려고 했지만 발터는 말러 친구들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이 여성의 참가를 거절하였다. 발터는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여 유명인에게는 특권을 주었지만, 오만하게도 젊은 음악가나 고생하고 있는 작곡가의 어려운 상황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발터와는 대조적으로 말러는 재능 있는 젊은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했고,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가족이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기도 다. 쇤베르크는 "발터는 훌륭한 지휘자다." 라고 인정했다. 그는 오랫동안 공표되지 않았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하지만 사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는 항상 역겨운 돼지처럼 탐욕스러운 사이었다.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난다." 많은 풍자화에서 발터를 이렇게 돼지에 비유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발터의 예술에 감탄했던 동료들도 그의 성격은 경멸했다. 발터가 친구라고 주장했떤 토스카니니조차도 그를 '감상적인 바보'라고 불렀다. 



 발터는 아름답게 지휘했다. 서정적이고 우아하게 모든 선율적인 요소를 강조했고, 전주곡에서는 중세적 분위기를 확립하였다. 4주 뒤 나는 클렘페러가 이 작품을 쾰른에서 공연하는 것을 들었다. 전주곡의 처음 여덟 마디부터 완전히 달랐다. 클렘페러의 지휘는 매우 엄격했고, 개인적인 억양은 완전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클렘페러의 연주에서는 발터가 이 작품에 불어넣었던 서정적인 표현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마치 이 곡이 조스캔 데프레가 작곡한 곡인 것처럼 연주했다. 발터와 클렘페러의 두 연주는 모두 놀라웠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지휘자가 음악의 사운드와 타일에서 엄청난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베르톨트 골드슈미트






 이 두 상반되는 단락은 훌륭한 지휘자가 반드시 훌륭한 인간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카라얀과 번스타인은 어떤가? 음반사가 좋아하는 매끄러지는 듯한 사운드를 보여주기 직전의 카라얀의 60년대 베를린 필과의 녹음을 들어보면, 카라얀과 오케스트라가 역동적으로 만들어내는 의욕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함께 협력해서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공동의 느낌, 함께 쌓아올린 노련하고도 세련된 느낌. 그 뒤의 약간의 거리감이 점점 더 벌어지기 전까지도 카라얀은 분명 브루노 발터가 보여준 가짜 페르소나를 구축한 것이라고 노먼 레브레히트는 지적한다. 인공적으로 만든 이 느낌은 음악 세계가 진짜와 허상으로 나뉘어 있으나 그 둘이 꼭 일치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또는 카라얀이 떠난 다음 베를린 필하모닉이 그들의 다음 지휘자로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선출한 것을 보노라면, 오케스트라는 자신의 취향과 상황을 무기로 외부에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카라얀의 이전은 푸르트벵글러였고 이후는 아바도였다. 푸르트벵글러와 아바도는 묘하게 닮았음을 노먼 레브레히트는 지적한다. 아바도는 자신의 기호를 내보이지도 않았고 개인의 권리를 존중했다. 한마디로 카라얀과 정반대였으며, 베를린 필하모닉의 차기 지휘자 선출에 가장 놀란 사람은 아바도 자신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예상 밖의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카라얀 사운드가 어떤 것이었던가. 공격성, 균일함, 매끄럽고 고장 없는 독일 자동차 같은 이미지의 카라얀 사운드는 마지막까지 그의 리허설이나 녹음의 세부적인 사항을 관찰한 리카르도 샤이가 남긴 말을 통해 전해진다.




 오케스트라의 음질을 매일같이 탐구하는 그의 모습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상임 지휘자로 30년 가까이 있은 뒤에도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학생처럼 취급하였고, 어떤 구체적인 효과를 성취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다. 그는 오케스트라가 자신들의 고유한 소리를 내는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날 그 날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수정해 가면서 자신이 원했던 효과를 향해 사운드를 조정하고 구체화했다. 그는 왼손의 중지로 허공을 어루만져 부드러, 즉 비단 벨벳의 질감을 얻어 내었다. 그 순간 바로 그만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베토벤의 교향곡 전집을 네 번째로 녹음하던 때 그는 세계 각지에서 이 곡들을 연주한 뒤였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고 활기에 찬 연주를 위해 한 소절 한 절씩 연습시켰다.



 

 이 책의 전반을 덮는 것은 이러한 음악사에 남은 인물들의 평가와 비평, 남겼던 말, 작은 글귀 한 조각들이다. 동료 음악가의 전언이 남겨 줄리니는 성인이 되고 토스카니니는 폭군이 된다. 카라얀은 독재자가 되고 발터는 이중인격이 된다. 그러나 그 큰 흐름에 있어 지휘자가 남기고자 했던 개성 있는 음향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증언하는 날카롭고 예민한 귀가 들려주는 소리는 이 책의 장점이다. 

 음악은 모든 것과 동떨어져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아니다. 지휘자의 출현이 교향악과 맞물렸지만, 그 에움길은 정치, 사회와 떨어져서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 중에는 예외도 있고 필연도 있다. 매끄러운 도치치 사운드를 원하던 나치의 꼬리표를 떼어내려 안간힘을 쓴 카라얀, 쉬운 언어와 화려한 감상을 원하던 뉴욕이 사랑한 번스타인의 오케스트라를 들어보면 시대가 사랑하는 지휘자의 특성이 대표하는 그 시간이 느껴진다. 




 노먼 레브레히트는 이 책을 통해 번스타인은 교향곡을 연주회장에서 지휘하며 익혔고, 해석이 화려하면서도 피상적이었다고 평가한다. 뉴욕타임스의 해럴드 숀버그는 번스타인이 피아노를 치며 지휘할 때 그의 테크닉을 반복해서 비난했고 전통적인 고정 관객은 그가 무대 위에서 펄쩍 뛰는 모습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는 매력적이고 능변이면서도 부유했고, 모범적인 가정을 꾸렸다. 한마디로 그는 미국이 원하던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기술적인 결함을 보완해 가면서 숀버그조차도 '자신의 천성적인 화려함을 잃지 않고도 색채는 물론이고 악구 내에서의 자유는 물론 구조적인 완성도도 갖추고 있다'라고 평가를 바꾸었다고 한다. 그는 말러의 분열된 모습, 어떤 특징도 찾을 수 있고 모든 해석이 가능하며 정반대의 특징도 똑같이 나타난다고 평했는데, 이는 번스타인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지휘는 작은 새 같아서 꼭 쥐면 날아가 버린다는 콜린 데이비스의 말이 사실일 것이다. 꼭 쥐지 않고 자신 그대로 행하는 것이 지휘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대로'라는 것은 그 홀로 존재하기 힘든 것인지도.





노먼 레브레히트는 지휘자의 탄생에서 죽음까지를 짚는다. 지휘가 왜 필요했는지, 어떻게 그 많은 지휘자가 나타났다가 오디오 시대를 형체를 달리하는지, 나치, 뉴욕, 영국 지휘자의 오랜 공백, 다른 세계에서 온 지휘자들을 거쳐 음반 업계의 구조, 지휘자들 연봉과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살림을 꾸려나가는지 까지를 짚는다. 그 뒤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로널드 윌포드와 성장을 억지로 멈추게 된 젊은 지휘자들의 모습도 있다. 줄어든 공급, 높아진 요구 등을 거쳐 노먼 레브레히는 카라얀과 번스타인 이후 지휘자 자신의 이름만으로 5천 장의 음반을 팔거나 티켓을 매진시키는 지휘자는 없음을 이야기한다. 물론 이 책을 썼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어떠한가.




1990년대 말 지휘자들의 이러한 정체성 위기는 리허설 룸에서 녹음 스튜디오까지, 버스턴에서 베를린까지 클래식 공연의 모든 영역을 휩쓸었다. 연주회장은 저반도 차지 않았고, 새로운 음반도 얼마 팔리지 않았고, 정부는 보조금을 삭감했고, 클래식이라는 좋은 음악에 대한 애정은 속물적이고 시대착오적이고 현실과 유리된 것이라며 폄하 당했다. 미국의 한 텔레비전 프로듀서가 호의를 갖고 어느 유명 지휘자를 한산한 시청 시간대에 출연시키려고 하자 방송국 사장은 전화기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 "그따위 놈을 내 방송에 나오게 할 수는 없어! 시청자들은 그런 프로그램 따위는 보지도 않는다고." 그 어떤 미디어의 거물도 토스카니니에 대해서 감히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 지휘계의 위기와 클래식 음악의 쇠퇴 사이의 연관성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20년 전 한스 폰 뷜로와 아르투르 니키슈가 해의 독립을 주장했던 이래, 지휘자는 조직화된 음악 활동의 가시적 상징으로 군림해 왔다. 가시성은 실무적이고 윤리적인 리더십의 책임을 반한다. 미국의 지휘자 건서 슐러는 자신의 풍부한 사상을 담은 책 '완벽한 지휘자'에서 지휘자의 이러한 책임을 '미학적 도덕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즈음이면 책의 앞부분에서 언급한 베르톨트 브레히트 희곡의 한 단락이 다시 떠오른다. 

 영웅이 없는 삶은 불행하다는 대사에 이은 한 단락. "아닙니다. 영웅이 필요한 곳이야말로 불행한 곳이지요."




 이 책은 1991년의 저작이며, 끝에는 한 단락이 더 있다. 그 마지막 단락의 마지막, 마지막의 마지막 말은 솔티의 작별 인사이다. "클래식 음악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지휘자의 출현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를 평범한 언어로 이야기한 야심과 노력의 연대기. 때로는 권력을 위한 개인 욕심의 남용이기도 하고 때로는 미학적 결단이기도 하여 음악에 부쳐 따로 생각해볼 만한 부분. 이 책은 고전 음악을 이해하는 절대 좌표가 될 수도 없고 판단의 근거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을 듣는 행위에 있어 지도는 될 수 없을지언정 작은 쉼표는 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 음악은 저 홀로 있을 수도 있지만, 외따로 떨어져 천상에만 울려 퍼지는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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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7 1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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