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마이페이퍼 당선작

어떤 죽음 - blanca
아무리 살아도 절대 모르는 영역이 있다. 구역이 있다.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이 더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 내가 차마 떠올릴 수 없는 삶의 비의를 가르쳐 줄 때가 있다. "그거 아세요? 미국에서는 하루에 몇 명이 총에 맞아 죽는지... 우리나라 하루 자살자가 몇 명인지... 전쟁으로 죽는 사람들보다 실은 그런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거. 사람들은 전쟁 이야기를 하지만요. 지금 시급한 건 그런 게 아니에요. 대한민국에서는 하루 평균 36명이 목숨을 스스로 끊어요."이런 말을 들었다. 나는...

사상의 조류가 어떻게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무의식속으로 침범할 수 있는가? - scott
'랜섬은 보자마자 방금 그녀가 드러낸 유약함은 금세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다시 몸을 바로 세웠고 황막함 속에서도 꿋꿋했다. 그녀 얼굴의 표정은 영원히 그와 함께 남을 터였다.'-헨리 제임스의 '보스턴 사람들' 중에서미시시피 출신의 변호사로 남북전쟁에 참전한 보수주의자인 베이질 랜섬은 자신의 먼 친척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 올리브 챈슬러의 초대를 받아 보스턴에 온다. 그는 이곳에서 여성의 고난에 대해 연설 하는 보스턴 시 캠브리지의 돌팔이 의사의 연약하면서 매혹적인 노예 폐지론을 주장하는 딸 버리나 타란트에게 한눈에 ...

이 수치를 너희에게 보낸다 - 잠자냥
<수치심은 혁명적인 감정이다>를 읽을 때 자연스레 떠오른 책이 한 권 있다. 지난해 읽은 <수치-방대하지만 단일하지 않은 성폭력의 역사 Disgrace: Global Reflections on Sexual Violence>(디플롯, 2023)이다. <수치>는 부제가 설명하듯이 인류가 저질러온 온갖 강간의 역사를 훑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 말하는 ‘수치Disgrace’란 누구의 수치인가? 물론 책을 읽기 전부터 제목의 <수치>는 이토록 유구한 역사 내내 강간을...

카프카의 개의 연구와 자기애성 인격장애 - 필리아
“개 같군, 내가 죽고 나도 ‘수치’는 살아남을 것 같다.” -프란츠 카프카, 《소송》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그의 저술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에서 ‘장 폴샤르트르’의 ‘우리는 대중 앞에서만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는 빈틈 많은 주장을 인용하면서 “타자는 꼭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인간 내부에 있는 수많은 눈과 같은 무엇이 있음을 지적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사욕으로 똘똘 뭉친 한 인간의 끔찍한 짓, 비열한 짓거리와 그 타락하고 부패한 처신을 보며, “대체 저 인간은 어떻게 수치심도 안 느...

돈이 되지 않는 일 - 미미
"제 옆방에 있는 젊은 교수가 1년에 받는 연구비를 저는 평생 못 받았습니다." 얼마 전까지 R&D 예산 삭감으로 말이 많았는데 최 교수의 연구 분야는 그전 부터도 돈이 되는 연구는 아니었던 것 같다. 곱씹고 싶은 문장들을 가득 담은 책들을 여러 권 써낸 정희진 선생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생각해 보면 이른바 '돈이 되는 일'은 대체로 경쟁적이고 환경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우리가 매일같이 마시는 공기며 물, 나무 같은 필수적인 요소들은 오히려 거의 공짜로 주어진다. 그래서 무시되는 걸까, 마구 남...

시, 마음을 두드리다 - 자목련
매화축제가 시작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꽃대궐이 시작될 모양이다. 봄은 매년 오는데 왜 이리 설레는 걸까. 그런데도 어떤 감정은 해가 바뀌어도 살아나지 않고 메마르다. 연애 세포를 깨워야 한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연애 감각을 깨워야 한다. 직접적으로 누굴 사랑하거나 연애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딱딱하게 굳어 끝내 바스러질지도 모를 감정에 노크하는 시를 만났다. 국내 최초의 시(詩) 큐레이션 앱 ‘시요일’에서 기획한 다섯 번째 시선집 『이 연애에 이름을 붙인다면』에 수록된 시들이다. 목차를 살피며 내가 좋아하는 시인...

우연한 재택근무 - transient-guest
어쩌다 보니 바쁜 와중에 오후는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다. 점심약속이 집 근처였기 때문에 식사 후 잠깐 만난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다시 운전하고 사무실로 갔다가 돌아오기엔 시간이 조금 애매해진 것이다. 운동을 갔다가 집으로 가면 진짜 일 할 시간이 남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냥 돌아와서 메일 몇 개를 쓰고 나니 막상 일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천상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뤄버리는 것으로 결론이 나버렸고 덕분에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시면서 책을 보고 있다. 수많은 명작을 낸 Patricia Hig...

<나의 이탈리아 인문기행>나의 아쉬움을 보충하고도 남을 이탈리아 여행기! - 은하수
요즘 서경식 선생의 <나의 이탈리아 인문기행>을 천천히 읽었다. 그의 저서 중 <나의 서양 미술 순례>에 이어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만났던 미술 작품과 작가의 발자취를 찾아보고 쓴 기행문이다. 여행 지역은 로마, 페라라, 볼로냐, 밀라노, 토리노 등의 북부 지역이다. 서경식 선생이 유럽을 처음 여행한 것은 1983년이라고 한다. 1971년 한국에 들어와 서울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그의 두 형이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고, 그로 인하여 한국 여권을 발급받지 못해 해외로 나갈 수가 없다가 ...

발칙한 상상력 - Heath
리처드 도킨스의 『신, 만들어진 위험』의 리뷰를 작성하다가 너무 곁가지로 뻗어나가는 듯한 내용은 따로 정리해서 쓰기로 했다. 스티븐 그린블랫의 저작 『1417년, 근대의 탄생』은 르네상스 시대 초입 당시, 포초 브라촐리니라는 휴머니스트이자 책사냥꾼이 우연히 한 수도원에서 고대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을 발견하고 그 후 일어난 일을 다루는 책이다. 저자는 루크레티우스의 사상 이면에 존재한, 헬레니즘 철학 사조 중 하나인 에피쿠로스 학파의 유물론이, 중세 동안 잊혀졌다가 포초의 손을 통해 부활하여 마침...

No one knows me. - 단발머리
알리 헤이즐우드의 책이다. 가장 강력한 뱀파이어 의원의 무남독녀와 늑대인간 무리 알파와의 사랑 이야기인데, 로미오와 줄리엣, 계약 결혼 중 사랑에 빠지는 설정 등이 스토리의 바탕이다. 아무리 그래도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냐. 여남이 이리도 다르고, 이리도 서로를 모른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부자연스럽다. 나는 초인적 능력의 늑대인간보다 어리숙한 인간 애덤이 더 맘에 든다. 헤이즐우드 책을 딱 한 권만 읽으시겠다면, 당연히 <The Love Hypothesis>(사랑의 가설)를 권하고 싶다. 아니...

민중인가? 군중인가? - 그레이스
『인간희극』에서 「정치생활의 정경」에 포함되어 있는 이 소설은 당시 역사에 등장했던 많은 정치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실재 사건·인물이 창조된 인물과 각색된 사건과 직조되어 있다. 그는 프랑스의 1789년 혁명으로부터 왕정복고 시대를 재창조함으로 대치시키고 고발한다. 『고리오 영감』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인물의 외형, 성격, 사회적 지위, 삶 등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전반부의 많은 양을 차지한다. 만들어진 인물들 역시 실존 인물들의 캐릭터를 반영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푸셰와 말랭이다. 말랭은 푸셰의 그림자다. 말랭은 1...

죽은 자는 말이 많다(Dead man talking) - cyrus
가까이서 보면 희곡, 멀리서 보면 연극No. 2『죽음의 집』극단 폼(form) - 2024 제3회 더파란 연극제(대구, 3월 22일~29일) 참가작윤영선, 윤성호 지음김소희 연출김민우 조연출액팅 코치 조영근홍보 정명훈 [주] [출연진]이영찬 (황상호 역)이혜림 (이은희 역, 원작자가 쓴 대본에 나온 이름은 ‘이동욱’)박지훈 (박영권 역)곽수민 (강문실 역) 우전 소극장3월 22일 금요일 저녁 7시 40분경 관람잠깐만, 이 글을 보는 사람(단 한 사람도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은 본인 스스로 누군지 잘 생각해 본 후에...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를 위해 - 바스티안
'답사'라고 하면 수백 년, 수천 년의 역사를 품은 유적지가 떠오른다. 30여 년 동안 스테디셀러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 때문에 이런 인식이 더 강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한국 답사기'라는 제목대로, 이 책의 저자가 찾아간 곳은 근대 이전에 조성된 유적이 아니다. 나라에서 문화재로 지정한 곳이 아니라,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평범한 거리 구석구석이다. 저자는 왜 이름난 유적이 아닌 일상적인 장소를 답사하는 걸까?​ 그곳에 우리,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궁궐...

책탑 대신... 오랫만에 <모비 딕> 가족사진 - 초란공
<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2024)퇴근 후, 저의 네 번째 <모비 딕> 번역 판본이 ‘전면 개역판’이라는 글자가 찍힌 띠지를 두른 채 도착해 있었습니다. 오래간만에 소장하고 있는 각 출판사 판본을 모두 꺼내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자칭 ’모비덕‘(모비 딕 덕후)라서 ’구매‘ 버튼을 누르지 않을 수 없었네요. 오랜만에 팝업북 <모비 딕>을 들쳐보았구요, <그래픽노블 모비 딕>과 <그래픽 모비 딕> 3권을 더 찾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작...

미스터 스토너 & 순례 씨 - 페넬로페
산책을 하다보면 유모차에 누워있는 갓난아기나, 엄마 아빠와 놀러 나온 아이들을 만난다. 얼마 전에 아기를 낳은 조카가 가족 단톡 방에 아기의 동영상을 자주 올려준다. 아기는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고 옹알이를 하며 잘 웃는다. 아이들을 보면 예쁘고 귀여워 저절로 마음이 환해지는 미소가 지어지지만, 한편으로 왠지 슬프기도, 씁쓸하기도 하다. 저 아이들이 헤쳐 나갈 세상이 아득해 보여서이다. 별것도 없는 세상에서 버티고,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이 쓸모없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지켜내야 하는지 그들은 아직 모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