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주의 정신분석 저널 엄브라(Umbra)가 또 한 권 번역돼 나왔다. <검은 신>(인간사랑, 2013)으로 연간지인 이 잡지의 2005년호를 옮긴 책이다. 앞서 2003년호 <법은 아무것도 모른다>(인간사랑, 2008)와 2004년호 <전쟁은 없다>(인간사랑, 2011)가 번역됐기에 이번이 세번째 책이다(조금 속도를 내면 번역본도 연간지가 될 듯하다). 4호가 나온다면 2006년호 <불치(Incurable)>가 번역될 차례다. 한국어본의 특징은 1인 번역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1인 번역 잡지라고 할까.

 

 

Umbr(a)란 잡지는 조운 콥젝의 편집으로 1996년에 창간호를 냈고 2012년호로 '테크놀로지', 2013년호로 '대상, 외부, 타자'가 근간 예정이다. 마저 나오면 18호까지 나오는 셈이 된다. 엄브라 홈피(http://www.umbrajournal.org/)에서는 기간호에 대해서 원문 서비스를 제공한다. 번역본 가운데는 <전쟁은 없다>만 유료 서비스다. 각호의 표지는 아래와 같다.

 

<법은 아무것도 모른다>

 

 

<전쟁은 없다>

 

 

<검은 신>

 

 

<검은 신>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옮긴이와 편집자(앤드류 스콤라)의 글을 참조할 수 있는데, 이렇게 소개된다.

프로이트는 어떤 행위가 종교적이려면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절대적인 종교적 행위나 믿음이란 없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어떤 것이 있다면 정신분석에서는 대문자 타자이며 그것의 욕망이다. 라깡은 이를 “검은 신”이라고 부른다. 이번 호의 제목은 라깡에서 빌려 온 것이다. “법은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선언에서처럼 대타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모든 것의 기원은 결여이다. 인간은 신의 기원과 욕망을 알고 따르려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내리신 계명들의 언어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정신분석은 실증주의적 과학과는 달리, 종교적 문제, 즉 기원과, 신, 창조의 문제를 사유한다. 특히 근대 주체구성의 과정에 개입해있는 일신교에 천착한다. 종교를 비판하는 일이 아무리 정당할지라도 실증주의처럼 종교를 허상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제대로 된 비판이 될 수 없다. 창조, 주체의 기원, 믿음, 소외, 희생과 봉사, 예외, 신성성, 사랑 등 종교가 전유하고 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개념이며 철학적 사유에서 피해갈 수 없다. 기왕의 종교비판이나 분석이 혐오와 경외 양극단의 대립을 상정했다면 정신분석은 신이 부재한 자리를 사유한다.

편집자 외 7명의 필자 가운데 국내에도 소개된 저자는 로렌죠 키에자 정도다. 로렌초 키에자란 이름으로 <주체성과 타자성>(난장, 2012)이 번역된 바 있다.

 

 

기독교 신에 대한 라캉주의적 접근과 관련해서는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도 참고할 수 있다. 번역되지 않은 책으로는 지젝이 공저한 <고통받는 신>(2012)도 있다. 앞으로 관련서들이 더 소개될 것으로 안다...

 

13. 0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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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원 행사가 끝나고 다소 늦게 귀가했다. 택배가 몇 개 와 있었는데, 모두 교보에서 온 것이고 오전에 알라딘에 당일 배송으로 주문한 건 하나도 오지 않았다. 들어와 보니 여전히 '상품준비중'이다. 오늘은 '오프 데이'인가. 주문한 책 가운데 하나는 한겨레 구본준 기자의 건축책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서해문집, 2013)이다. 재작년에 화제가 됐던 공저 <두 남자의 집짓기>(마티, 2011)에 이어지는 책인데, '그 집이 내게 들려준 희로애락 건축 이야기'가 부제다.

 

 

맛깔나는 건축 이야기들을 (블로그) 기사로 읽은 적이 있어서 바로 주문한 것인데, 월요일에나 배송될 모양. 어린이용 책까지 포함하면 저자가 세번째로 낸 건축책이다. 사실 집에 대한 욕심도 없는 편이고 건축은 관심분야가 아니었는데, 1-2년 사이에 건축에 관한 책들을 종종 구입하게 된다(음식과 함께. 의식주 가운데 '식'과 '주'에 좀 관심을 갖게 됐달까. 늙어가는 징조일까, 현명해지고 있다는 증표일까). 그렇다고 이 분야의 책들이라면 모두 관심권에 두고 있는 건 아니지만 가령 임석재 교수의 <한국 현대건축의 지평1,2>(인물과사상사, 2013) 같은 타이틀에도 눈에 가는 건 사실이다.

 

 

작년에 나온 <기계가 된 몸과 현대 건축의 탄생>(인물과사상사, 2012)과 함께 세트로 읽어볼 만한 책. 이 책은 따로 '임석재의 인문건축 시리즈'로 분류돼 있는데, 시리즈인 만큼 올해도 몇권은 더 나오지 않을까 싶다(아니면 1년에 한권씩일까?).

 

 

 

건축책 가운데 또 자주 손길이 가는 쪽은 '철학'이 같이 붙어 있는 경우다. 최근에 나온 걸로는 브랑코 미트로비치의 <건축을 위한 철학>(컬처그라퍼, 2013)이 있다. "인문학적 건축을 위한 서양 철학의 핵심을 한 권에 담았다. 이 책은 건축가, 건축 실무자,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이 설계 작업에서 맞닥뜨리는 광범위한 철학적 문제들을 인식하도록 돕는 것에 큰 목적을 두고 있다."고 소개된 책이다. 구입은 진작에 했지만 아직 눈여겨 보지는 못했다. 내달에는 짬을 내 읽어보려고 한다. 이 분야의 책으론 장 보드리야르의 <건축과 철학>(동문선, 2003)도 꼽을 수 있는데, 오래 전에 도서관에서 대출했다가 중간에 반납해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국내서로는 건축평론가이기도 한 함성호 시인의 <철학으로 읽는 옛집>(열림원, 2011)이 소장도서다.

 

 

 

사실 '건축과 철학'은 시공문화사의 시리즈 제목이기도 하다. '들뢰즈와 가타리', '하이데거', '이리가라이'를 다룬 첫 세 권이 지난 2010년 봄에 나왔고, '호미 바바'를 다룬 4권에 이어서, 작년 봄에는 벤야민과 데리다 편이 5, 6권으로 출간됐다. 주섬주섬 다 모아놓긴 했는데(하지만 안 보인다) 좀처럼 읽을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기억에 한두 권은 원서까지 구했는데 말이다.

 

암튼, 손에 들지 못하고 마음에만 품고 있는 책들인지라 페이퍼로라도 토해놓는다. 언젠가 건축과 철학이란 주제로도 좀 그럴 듯한 글을 써보고 싶다. 그러자니 또 먼저 읽어야 할 책이 건물 하나쯤을 채울 듯싶지만...

 

13.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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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을 골라놓는다. 관심도서의 분야가 여럿으로 나뉘어 고심하다가 역사분야의 책들을 주로 골랐다. 타이틀은 이정철의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역사비평사, 2013)로 삼았다. 부제는 ;조선을 움직인 4인의 경세가들'. 소개에 따르면 "조선시대 경세가인 이이, 이원익, 조익, 김육의 이야기다. 이들은 민생의 원칙을 안민에 두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부었다. 책은 '조선의 개혁'이라는 큰 주제하에 네 사람의 일대기를 다룬 작은 평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평전 속에서 각각의 삶과 이념, 그 시기의 정치 상황과 사건 전개, 그리고 인물 관계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새정부 출범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무엇보다도 공무원들이 읽어볼 만한 책이 아닌가 한다. 저자의 전작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역사비평사, 2010)과 같이 읽어도 좋겠다.

 

 

두번째 책은 중국사 관련서로 리전더의 <공주의 죽음>(프라하, 2013). '우리가 모르는 3-7세기 중국 법률 이야기'가 부제다(그 시대의 우리 법률에 대해선 우리가 아는가?). "3세기에서 7세기경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기 법률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선비족이 세운 북위 시기 난릉공주의 비극적 죽음을 실마리로 삼아 이 사건의 처리 과정과 판결에 반영된 당시의 법률, 사회, 여성, 민족, 정치 등의 여러 주제를 폭넓게 이야기한다." 얼핏 미시사 스타일의 저작처럼 보이는데, 얼마나 대중적일 수 있느냐는 저자의 이야기 솜씨가 관건이겠다. 세번째 책은 유럽사로 넘어가서 스웨덴의 역사학자 스테판 욘손의 <대중의 역사>(그린비, 2013). '세 번의 혁명 1789, 1889, 1989'가 부제다. 말 그대로 세 번의 혁명과 그 속의 대중 투쟁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미술사를 겸하고 있다는 점. 당대의 미술작품을 통해서 대중을 읽는 독특한 시도가 눈길을 끈다.

 

 

네번째 책은 다시 중앙아시아로 넘어와서 제임스 밀워드가 쓴 <신장의 역사>(사계절, 2013)다. 역사책에서 '서역'이라고 나오는 곳이 신장이고, 보다 중립적인 용어로는 '동투르키스탄' 혹은 '중국령 투르키스탄'이라고. 부제대로 '유라시아의 교차로'에 해당하는 이 지역의 역사를 소개한다. <중국의 서진 - 청의 유라시아정복사>(청, 2012)의 저자인 예일대 중국사학과 피터 퍼듀 교수도 "독자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의 역사를 매우 탁월하게 서술한 책"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마지막 책은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말리노브스키)의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전남대출판부, 2013). 전혀 예기치 않은, 이주에 나온 가장 놀라운 책인데,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도서출판b, 2012)에 일역본이 언급된 걸 보고 부러워했던지라 더욱 반갑다. 두께와 가격이 만만찮지만, 말리노프스키의 대표작이자 20세기 인류학의 주요한 저작에 한번 도전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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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조선을 움직인 4인의 경세가들
이정철 지음 / 역사비평사 / 2013년 2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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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죽음- 우리가 모르는 3-7세기 중국 법률 이야기
리전더 지음, 최해별 옮김 / 프라하 / 2013년 2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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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중의 역사- 세 번의 혁명 1789, 1889, 1989
스테판 욘손 지음, 양진비 옮김 / 그린비 / 2013년 2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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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의 역사- 유라시아의 교차로
제임스 A. 밀워드 지음, 김찬영.이광태 옮김 / 사계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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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책과 지식'란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토머스 프랭크의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갈라파고스, 2013)에 대한 것이다. 2009년 이후 미국 사회에서 벌어진 일들(티파티 운동과 함께 보수주의가 득세한 일)에 대한 자세한 보고와 함께 신랄한 비평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중앙일보(13. 02. 16) 좌파는 모르고, 우파는 알았던 것

 

197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섬 원전에서 사고가 났다. 핵연료봉이 녹아 내리고 방사성 물질이 유출돼 주민 10만 명이 대피해야 했다. 86년 구(舊) 소련에서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사고 전까지 스리마일은 최악의 원전사고였다. 원자력의 안전 신화가 무너졌다. 그런데 그런 재앙이 일어난 지 불과 며칠 뒤에 더 많은 원전을 지어달라고 요구한다면 제 정신일까.

이 책 (원제 Pity the Billionaire·억만장자를 동정하라)에서 토머스 프랭크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바로 그와 같은 일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국 저명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그의 문제의식이다. 세계경제를 침체로 몰아넣은 금융위기는 자유시장이라는 이상을 우리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으며, 이에 대처하는 공화당의 무능력과 도덕적 가식을 폭로했음에도 2009년 초부터 붐을 타기 시작한 미국의 보수주의 운동은 상황을 역전시켰다.

2010년 공화당은 미국 의회 선거 역사상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고, 정부로부터 규제받지 않는 자유시장이 곧 자유의 본질이라는 주장이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저자가 보기엔 이것이 1929년의 경제공황과 현 경제위기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나는 지금의 경기불황 이전까지, 불경기의 희생양이 된 대다수가 신고전주의적 경제학에 박수를 치거나 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업적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난 적대감을 드러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1929년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진 대공황기에는 사정이 달랐다. 이 ‘어려운 시절’에 먼저 사고의 전환이 일어났다. 자유방임주의 대신에 정부의 적자지출이라는 케인스 경제학이 받아들여졌다. 현대 산업자본주의의 탐욕적 개인주의에 반대해 공동체와 나눔의 삶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에 대한 반대 여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36년 미국자유연맹의장은 라디오연설에서 “뉴딜은 미국에 전체주의 정부를 만들려는 시도”라고 공박했다. 하지만 대중은 이들 보수주의자들을 조롱하면서 루스벨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당시 민주당은 하원의 4분의 3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것이 프랭크가 소환하는 1930년대식 포퓰리즘의 기억이다.

뉴욕 증권시장의 대폭락이 있은 지 79년 만에 들이닥친 2008년의 금융위기는 얼핏 1929년의 ‘시즌2’처럼 보였다. 제너럴 모터스·크라이슬러가 파산을 선언했고, 리먼브라더스·인디맥·베어스턴스 등이 사라졌다. 기업만이 아니다. 퇴직금은 날아갔으며 동료들은 직장에서 쫓겨났고 제조업 공장은 작동을 멈췄다. 대출담보금은 집값을 훨씬 웃돌았고 중산층은 폭삭 내려앉았다. 재앙이 닥치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골드만삭스는 직원들에게 165억 달러가량을 보너스로 나눠주며 사치와 방종을 부추겼다. 신자유주의 혹은 ‘자유방임주의의 황금시대’에 정부의 규제완화를 틈타 현란한 파생금융상품을 만들어낸 트레이더들은 승승장구했고 전용기를 쇼핑하러 다녔다. 대신에 시간당 급여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팍팍해졌다. 그러다가 터진 금융위기였기에 경제부실과 실패의 책임을 물었어야 했다. 그것이 ‘금융질서’이자 최소한의 경제정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금융시장이 공황상태에 빠지기 시작하자 긴급 구제금융이 이뤄졌고 ‘금융산업계의 망나니들’은 살아남았다. “정부는 월가 지배자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게 구제금융이 던진 메시지였다. 대중들은 분노했으나 시간이 흐르자 월가의 탐욕과 도덕적 해이는 잊혀졌다. 대중의 분노가 향한 곳은 월가에서 워싱턴으로 바뀌었고, 자유시장이 아니라 정부와 세금이 도마에 올랐다. 정부의 적자지출과 구제금융에 대한 분노는 “실패한 자들은 실패하도록 내버려 두라”는 구호로 모아졌다. 그리고 놀라운 바꿔치기가 일어났다. 분노의 표적이 긴급구제를 받은 은행들에서 ‘헤픈 이웃’들로, 곧 담보대출을 받고는 결국 길거리에 나앉아버린 방종한 사람들로 바뀐 것이다.

이렇듯 분노의 방향을 돌리는 데 일조한 인물이 폭스뉴스의 진행자였던 글렌 벡이다. 그는 경기침체와 불황이 자유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 음모라는 시나리오를 전파했다. 오바마 정부의 의료보험 개혁안에 대해서도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그것은 미국을 끝장내는 것입니다”라며 종말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부추겼다. 또 이러한 종말과 ‘사회주의자 오바마’로부터 미국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자유시장이라는 신이라고 반복적으로 주장했다. 자유시장이야말로 지고의 가치이고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적이라는 소위 ‘시장 포퓰리즘’은 한낱 CEO들의 믿음이었지만 이제는 수백 만의 믿음이 됐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믿음을 기치로 내건 티파티 운동이 ‘좌파 따라하기’의 모양새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퇴직 국제정치학 교수인 안젤로 코데빌라는 미국사회에 ‘지배계급’과 ‘국민계급’, 두 계급이 존재한다고 여긴다.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마르크스주의 사관의 뒤집힌 재림이라고 할까. 지은이는 민주당의 실패가 이러한 ‘부흥 우파’의 득세를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2008년 위기와 재난에 대해서 그들은 납득할 만한 설명을 분노한 국민에게 해주지 않았다. 그 틈새를 파고든 것이 우파 이상주의자와 기회주의자였다.

2008년 금융위기를 분석하고 현 경제위기에 대한 진단과 전망을 제시한 책은 그간에 무수히 출간됐다. 이 책도 그런 범주에 포함될 수 있지만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증세에 반대하는지를 분석한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에 이어 ‘대중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우파는 그것을 읽었고, 진보를 자처하는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을 읽지 못했다.

 

그 결과 실패한 우파가 승자가 된 나라가 미국만은 아닐 것이기에 저자의 분석을 한국적 상황에 그대로 대입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지만, 이 책의 용도는 그 이상이다. 좌파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가장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고, 반면 가장 악한 자들은 격정에 차 있다’라는 영국 시인 예이츠의 시구를 빌려 우파 포퓰리즘의 득세를 설명한 적이 있다. 탈정치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무기력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격정에 찬 우파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파야말로 오늘날 유일한 ‘정치세력’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그런 연유를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뭔가 달라지기 위해선 무엇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다.

 

13. 02. 16.

 

P.S. '더 읽을 만한 책들'도 골랐는데, 모두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에서 언급되고 있는 책들이다. 특히 에인 랜드의 <아틀라스>(민음사, 2003)에 대해선 자세한 소개와 비평을 제시하고 있어서 유익한데, 한국어판은 절판된 상태다.

 

 

 

'부흥 우파'의 생각

저자 토머스 프랭크는 ‘부흥 우파’를 ‘새로운 십자군전쟁’이라고 부른다. 자유시장이라는 옛 종교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입장에서다. ‘부흥 우파’의 생각을 대변하는 책으로는 글렌 백의 『글렌 벡의 상식』(부글북스·2010)과 스티브 포브스의 『자본주의는 어떻게 우리를 구할 것인가』(아라크네·2011)가 있다. 이들은 2008년 경제위기를 자본주의의 실패가 아닌 정부개입의 실패로 본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티파티 보수주의의 경전 역할을 하는 책은 자유주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에인 랜드의 『아틀라스』(민음사, 2003)다. 에인 랜드는 앨런 그리스펀의 정신적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1957년 발표된 이 ‘1000 페이지짜리 소설’의 주된 내용은 기업가 집단이 큰 정부의 탄압에 맞서 싸운다는 이야기다. 전기작가에 따르면 에인 랜드는 ‘우파 진영의 존 스타인벡’이 되고 싶어 했다. 좌파에게 『분노의 포도』가 있다면 우파에게는 『아틀라스』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프랭크는 이 방대한 소설을 읽은 독자가 정작 얼마나 될지 의문스럽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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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의 '3인 1책 전격수다'를 발췌해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215134151§ion=04). 이달의 수다 거리는 권보드래, 천정환 두 국문학자의 <1960년을 묻다>(천년의상상, 2012)이다. 부제는 '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인데, 60년대를 다룬 책이니까 초점은 주로 '박정희 시대'의 전반기이다.

 

 

 

프레시안(13. 02. 15) 2013 대한민국, 우리는 모두 '박정희'의 유산이다!

 

(...)

 

사상의 선택은 곧 체제의 선택

 

이권우 : <1960년을 묻다>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은 사상 전향을 다루는 부분입니다.

 

이현우 : 여기서 두 인물을 대비시킵니다. 먼저 동백림 사건의 발단이 된 임석진 교수를 거론하는데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테오도르 아도르노 밑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던 국내 헤겔 연구의 거두지요. 두 번째 인물은 잡지 <청맥>의 주간이었던 엘리트 김질락입니다. 전자는 박정희와 일대일 독대를 통해 자기 과오를 해명하고 사법적으로 용서받은 뒤 대학 교수로서 정년을 마쳤지만, 후자는 자기 과오를 공개적으로 고백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희생되었지요.

 

흔히 전향이라고 하면 과거 문제로만 생각했습니다. 1930~40년대 일본 공산주의자들의 전향 문제, 혹은 한국 계급문학 작가들과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전향 문제만을 떠올렸지요. 하지만 1960년대 임석진과 김질락 사건을 통해 전향이 현재진행형의 문제라는 게 만천하에 밝혀졌지요. 이에 대해 연구자들이 더 주목해야 한다는 저자들의 지적에도 공감했어요.

 

이권우 : 두 저자가 분명 김윤식 교수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김윤식 교수는 식민지 시기 일본의 진보주의자와 우리 문인들의 전향 연구를 했잖아요. 그 연구 성과를 60년대에 도입하여 분석한 시도는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고 봅니다.

 

김용언 : 극단의 변화를 겪은 사람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이를테면 '강철' 김영환이라든가 김문수 경기도 도지사처럼 사상적인 극단을 겪은 사람들이요. 안 그래도 얼마 전 쓰루미 슌스케의 <전향>(최영호 옮김, 논형 펴냄)을 구입했었는데, <1960년을 묻다>의 저자들도 <전향>을 언급하면서 한국에서의 전향이 일본의 경우에 그대로 대입될 수 없다, 전혀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고 써서 흥미로웠습니다.

 

 

이현우 : 한국식 전향의 가장 큰 특수성은 사상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 체제 선택까지 아우른다는 데 있지요. 자기 내면의 문제만이 아니라, 남이냐 북이냐를 선택한다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 말입니다. 거꾸로 얘기하면 전향이란 문제에 대해 한국이 일본보다 더 깊이, 더 멀리 나갈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분석하는 간첩 부분도 굉장히 흥미로워요. 1967년 귀순한 북한 지식인 이수근 사건은 대단하죠. 전 <1960년을 묻다>를 보던 중 이수근 부분에서 완전히 몰두해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프로그램도 찾아보고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인물과사상사 펴냄)도 뒤적거리고 그랬습니다.(웃음) 최인훈의 <광장>(문학과지성사 펴냄) 주인공 이명준이 그대로 현실화한 것 같은 인물이죠.

 

 

북한에선 조선 통신사 부사장까지 지냈던 고위 임원이었고, 남한에서도 중앙정보부에서 요구하는 대로 적당히 맞췄더라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중간첩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당합니다. 당시 남북 대립 상황 속에서 자유를 찾고 싶어했던 지식인이, 적당히 타협하면 잘 살 수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놓아버릴 수 없었던 양심을 지키고자 했을 때 불가피하게 어디에서도 존재할 수 없게 되어버렸지요. 이수근의 사형 직후부터 박정희의 유신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권우 : 사상 전향에 대한 집요한 강제가 자기 검열에 이르면서 생긴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였지요. 이는 통일과 중립의 가능성이 좌절되는 과정에서도 잘 드러나는데요. 4·19 직후 한때 냉전을 넘어선 중립화 통일론이 지식인층에서 주류 담론으로 부상했다가 1960년대 후반 들어 남북이 각각 유신과 주체사상 체제로 전환하면서 그 꿈은 바로 사라집니다. 이런 측면에서 작가 최인훈 역시 저자들의 새로운 해석의 대상이 됩니다.

 

 

 

저자들은 질문합니다. "미국은 변함없는 실체였으며, 한국은 언제나 친미에 의존해서만 생존할 수 있었던가?"(232쪽) 중립의 꿈은 일본 식민지 시절 이전부터, 한국이 열강의 구도 속에서 다각도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부터,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전쟁이 다가온다는 파국 의식 속에서 중요한 대안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냉전 체제에 접어들며 이 선택은 불가능해졌고, <광장>의 이명준이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됩니다. 최인훈 작가가 1970년대 침묵을 지키며 절필했다가 냉전 종식 후인 1994년 <화두>를 다시 발표했다는 것을 분석하는 부분은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한 작가에 대한 애정, 그 작가가 놓여있던 시대에 대한 예민한 촉수가 드러난 부분이라 의미 있게 읽혔습니다.

 

이현우 : 1950년대는 미국 없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수 없는 시기였지요. 하필이면 그 당시 미국은 매카시즘 광풍으로 이한 반공주의가 득세하던 시절입니다. 한국 역시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요. 그 상황에서 중립화의 공간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치명적인 위험이기 때문에, 최인훈 작가의 절필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고요. 말 그대로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그런 작가가 우리에게 있었다는 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교양은 국력이다!

 

이권우 : 자유교양운동은 말하자면 권력과 문화의 이중주이자, 그 협음과 불협화음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춘천에 살았는데, 자유교양운동의 끝물을 맛본 케이스입니다.(웃음) 3학년 때 학교에서 책 읽고 독후감 쓰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해서 무척 신나게 참여했던 기억이 생생해요. 권력층의 야망은 국가적 차원에서 교양을 보급하는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력을 키울 수 있다는 데 있었다지만, 거기서 파생된 혜택으로 제가 좀 더 나은 인문 교육을 받았다는 점에서 권력이반의 사례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웃음)

 

이현우 : 1968년에 제1회 '대통령기쟁탈전국자유교양대회'가 시작됐지요. 1975년이 마지막 대회였는데 전 그 해 초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체험하진 못했어요.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부작용이 속출하여 결국 폐지됐다고 하는데요, 그 과정에서 132종 800만 부의 '고전'이 보급됐고 총 7회에 걸친 대회에 연인원 1900만 명이 참가했다는 건 굉장한 '문화혁명'이라고 보입니다.(웃음) 최근 한국 대학들에서 인문 고전 읽기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잖아요. 오래된 미래인 겁니다. 공통점은 미국식 자유교양교육, 즉 리버럴 아츠 교육을 수입했다는 점이고요.

 

이권우 : 맞습니다. 지금의 교양 교육도 그때의 시카고 대학 모델을 여전히 따르고 있죠.

 

김용언 : 거칠게 정리하자면 짧은 기간에 효율적으로 책을 읽히는 제도인데요.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강제적인 방법으로나마 중고등학교 때 이런 책들을 읽힌다는 게, 부작용이 이만큼이었다면 장점도 분명 조금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현우 : 아, 저는 거꾸로입니다. 부작용이 조금이고 장점이 더 많을 수 있다고 봐요.(웃음) 한 학생 사례를 보면 학업 시간 외에 독서를 하루에 4시간씩 했다고 나오잖아요. 지금 한국에서도 그런 교육은 못하고 있지요.

 

김용언 : 그 학생이 제일 좋아하는 책이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향연>이라는 대목도 나오지요.

이현우 : 네. 그 학생은 실업계 학교를 다녔는데 자유교양대회를 준비하면서 소크라테스를 읽혔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획기적입니다.

 

김용언 : 저는 수능과 본고사, 논술 시험을 다 치른 세대인데요. 대학 입시를 위해 고등학교 때 '초치기'로 그런 인문 교양 공부를 해야 했어요. <독서평설>이라는 교재를 정기 구독했는데 일종의 세계명작 다이제스트였습니다. 한국 단편소설 등은 전문을 싣되 장편은 축약해서 소개하며 수능과 본고사에 나올 '예상치 못한' 지문들을 예습시키는 격이었죠.

 

또 저희 집에 일본 작가가 쓴 희한한 단행본도 있었어요. 일종의 '세계명작 100권 읽기' 개념인데, 모든 명작 소설들을 죄다 2페이지 내에 축약해서 소개해요. 전 그 책을 읽으면서 <안나 카레니나>나 <전쟁과 평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의 줄거리를 다 외웠어요. 그런데 정작 원작 소설을 읽진 않았단 말이죠. 책 제목과 작가 이름, 줄거리를 외우되, 그게 책 자체에 대한 교양의 차원이 아니라 수능과 본고사에 유용한 부분만 획득하는 식으로 학습하는 게 몸에 뱄던 거예요.

 

아주 한참 후에서야 그 원작들을 읽기 시작했어요. 소위 인문 교양이라는 부분을, 대학 입학 후에야 혼자서 더듬거리며 찾아가야 했어요. 때늦은 복습인 거죠. 그래서 항상 그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유교양운동 부분을 읽을 때 심지어 그 학생들이 부러운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웃음)

 

이권우 : 문제는 교양이 교양 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동원 체제 속에서 공유되었다는 점이죠. 현재 한국 대학들이 왜 다시 고전과 교양의 가치를 중요시하느냐고 물었을 때, 돈이 되는 걸 찾기 위한 부분이 분명 크거든요. 이 책에서도 1960년대 자유교양운동의 목적에 대해 교양과 국력을 일치시켰다는 정도의 언급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왜곡된 자유주의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싶어요. 미국적인 것, 서구적인 것, 무조건 새로운 것을 한국사회에 적용하려던 지식인들의 무비판적 문제의식이 과도하게 현실 교육과 접목되면서 벌어진 일이 아닐까 추측하게 됩니다.

 

교양이라는 건 사회적 맥락 내에서 당장 뚜렷한 효과를 보여주진 못하죠. 그냥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건데, 현재의 인문학 붐은 아주 천박하게 얘기하자면 스티브 잡스 때문인 겁니다.(웃음) 교양 교육의 본래 가치를 공유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1960년대 자유교양운동이 사라졌듯 현재의 고전 교육도 쉽게 무너지지 않겠냐는 걱정이 들더라고요.

 

이런 측면도 있습니다. "교양은 지배의 기제이면서 동시에 지배와 대립하는 것을 생산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461쪽) 이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에요. 말하자면 1960년대 박정희 정권 당시 교양 세대가 출현했고, 1970년대에 그들이 대학생이 되면서 체제 저항 세력으로 급부상했기 때문에 교양 교육을 접었을 수도 있는 겁니다. 현재 대학의 고전 교육이 결과적으로 저항적 세대를 탄생시킨다면 우리는 과연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고전을 통해 저항의 의미와 방식을 알게 된 세대가 현 체제에 대한 도전 세력이 될 수도 있는데, 이 점에 대한 이해가 배제된 교양 교육이 한시적으로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드는 거죠.

 

이현우 : 전 좀 더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요. 소위 국민 독서 시대, 동원된 독서의 시대지만 그게 1970년대 조세희, 이문구, 황석영 같은 본격문학을 즐기는 독자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까. 1950년대만 해도 문맹률이 70퍼센트였는데 1960년대 들어와서 10퍼센트 대로 줄어들었다고 하고요. 그런 상황에서 대대적인 국민 독서 운동을 추진했고, 결과적으로 1970년대의 두터운 독자층을 만들어냈으며,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까지 작용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박정희식 국가 체제에 동원하기 위해 국민의 문화적 역량을 높이고 했지만, 양가적인 결과를 낳은 거죠. 동시에 비판적 문제의식도 고양되었으니까요.

 

1968년부터 1975년까지라는 1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수백만 권의 고전이 보급되고 전국적인 독서 붐이 가능했다는 건 새롭게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1970년대 시민의식의 성장이 지금까지는 경제성장과 맞물려서 중산층의 형성 차원에서만 주로 이해되었지요. 문학전집 유를 사들이는 것도 중산층의 과시적인 속물적인 교양 취미가 발현된 걸로 이야기됐고요.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보단 좀 더 적극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0년대 이후의 질문들

 

이권우 : 이야기를 나눌수록 1960년대가 오늘의 우리를 빚어낸 원형이라는 생각이 강해지는데요.(웃음) 이 책은 매우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고, 지금 우리가 미처 얘기하지 못한 부분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정리 차원에서 한 명씩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덧붙인다면요?

 

 

 

이현우: 이 자리에서 미처 얘기하지 못한 주제 중 하나가 잡지 <사상계>입니다.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 이전의 한국에는 <사상계>가 있었지요. 1953년 장준하 선생이 창간한 종합교양지이자 지적 운동의 중심이었습니다. 이 잡지의 흥미로운 배경은 '문화자유회의'라는 조직입니다. 1950년 창립되어 세계 35개국에 지부를 건설했던, '자유세계' 진영 지식인들의 대대적 연대인데요. CIA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던 전력도 있지요. 또 문화자유회의의 가장 대표적인 잡지라고 할 수 있었던 영국의 잡지 <엔카운터>를 열렬하게 수용했던 잡지가 <사상계>고요. 결국 박정희 정권의 탄압 때문에 흐지부지 종간되었지만, 그런 외부적인 이유 말고도 <사상계>의 자체적인 한계를 지적하는 부분은 흥미롭습니다.

 

지식인들의 친미 성향의 시발점이 1960년대에 있다는 걸 잘 보여준 사례기도 합니다. 일본 식민주의 유산을 극복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압도적으로 미국 학문의 영향권 하에 놓이게 되었잖아요. 1만 명 이상의 유학생들이 미국으로 갔고, 그들이 지금도 여전히 대한민국 엘리트 지위를 차지하고 있어요.

 

권보드래 선생과 천정환 선생은 국문학계의 '문학' 연구에서 '문화'연구로 방향을 전환한 첫 세대인데요. <1960년을 묻다>가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성과의 최대치는 아니겠지만 앞으로 더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잘 예시한 책입니다. 기존의 문학사와 다른 차원에서 맥락을 새롭게 보여주지요. 맥락 속에 놓고 보니까 전혀 다르게 보이고 새롭게 인지되는 부분들이 이 책의 큰 미덕입니다.

 

김용언 : 저는 두 가지 부분을 꼽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아프레 걸(après girl)' 이후를 다룬 챕터입니다. 전후 1950년대, 개인의 자유를 매우 활발하게 모색하던 시기에 실존주의의 맥락 속에서 자유분방한 아프레 걸이 남성들을 두렵게 만드는 존재로 급부상하지요. 1930년대 '모던 걸'보다 훨씬 예외적인 존재로 부각되었지만 그녀들은 4·19 이후에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젊은 사자들'이라 불렸던 '남성' 대학생으로 순식간에 사회적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여성은 가정으로"라는 건전한 목소리가 사회에 울려퍼졌다는 것, 저로서는 어떻게 갑자기 여성에 대해서만 급속하게 보수화될 수 있었는지가 이해가 잘 가지 않을 만큼 놀라웠습니다. 결과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의 정치 세력화의 가능성이 돌이킬 수 없이 수그러들었지요. 우리가 68혁명 얘기할 때 항상 60년대가 끝나고 보수반동의 70년대가 시작됐다는 레토릭을 많이 쓰잖아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미 그 '혁명'의 60년대에 여성이 끼어들 자리가 차단이 되어있었고 그 자리를 '젊은 가부장'이 채웠다는 게 충격적이었습니다.

 

이현우 : 이 주제에 대한 단행본도 나와 있죠?

 

김용언 : 네, 저자 권보드래 선생님이 <아프레걸, 사상계를 읽다>(동국대학교출판부 펴냄)를 쓰셨더라고요.

 

이현우 : 해방 이후 50년대까지 여성 권익에 대한 의식이 급격하게 신장하다가 60년대 중반 들어와서 갑자기 보수화되는 과정을 겪는 건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이를테면 아프레걸 챕터 말미에는 1960년대 중반부터 신사임당의 표상이 선동되었다는 구절이 나오지요. 저도 70년대 초등학교 시절, 여학생들의 장래 꿈이 죄다 현모양처였던 게 기억납니다.(웃음) 책에서는 당시 최고의 여성잡지였던 <여원>이 1965년 신사임당 특집기사를 냈다는 것도 조명하잖아요. '현모양처=신사임당'이라는 공식이 이 시기에 만들어져서 80년대 초반까지 계속 이어졌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됐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60년대가 또 다른 기원이 된 거죠.

 

 

 

김용언 : 두 번째로 관심 있게 읽었던 부분은 교양의 구성입니다. 특히 전혜린을 설명하는 부분이요. 책에서는 전혜린을 두고 지성과 표현양식을 갖춘 "새로운 유형의 인간-여성"이라는 표현을 쓰지요. 그녀를 양육한 건 "식민지근대성과 그 시대의 교양주의"였고 "식민지 최상층 엘리트가 가진 돈과 문화자본에 의해 (길러진) 예외성과 천재성의 사회적·가정적 토대"였음을 지적하고요.(408~409쪽)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혜린이 일종의 '가당치 않은 문학소녀'의 느낌으로 놀림 받기도 합니다.(웃음) 전 중학교 때 우연한 기회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혜린 지음, 민서출판사 펴냄)의 삼중당 문고판을 읽으면서 컬처 쇼크를 받았거든요. 이 사람은 60년대 초반에, 90년대의 내가 여전히 가닿지 못하는 세계를 이미 성취했고 불과 내 나이 또래부터 비범한 교양을 쌓았다는 것에서 엄청난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저한테는 전혜린이 롤모델이었단 말이죠!(웃음)

 

그런데 <1960년을 묻다>를 통해 교양의 구성에 필요한 계급적 토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고, 60년대 근대화를 열망하는 제3세계 국민의 '자기계발'로서의 교양에 대해서도 좀 더 파고들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전혜린으로 대표되는 당시 지식인에 대해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현우 : 하다못해 <이방인>이나 <데미안> 등의 작품이 지금도 가장 많이 읽히는 고전이며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라고 강조되지요. 이게 한국에서만 유독 권장되는 도서 목록의 일부분입니다. 그 분위기의 뿌리가 60년대에 있다는 거지요. 그 주입된 교양의 뿌리가 불과 50여 전에 연원하고 있다는 점, 교양에 대한 혹은 독서나 고전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의 많은 부분이 이 시기에 형성되어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일깨워주었어요.

 

이권우 : 한국 현대사에서 특정한 세대로 명명된 것은 4·19세대와 386세대밖에 없어요. 그리고 '세대'라는 이름 앞에 국가정체성에 도전하는 혁명에 준하는 사건이 있지요. 즉 4월 혁명과 광주민주화항쟁을 말하는 겁니다. 전 이번 대선 결과가 386세대의 역사적 역할이 끝났다고 선언하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젊은 세대가 386세대의 꿈과 좌절, 이상을 분석하고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열어갈 때가 된 듯합니다. 소위 '88만원 세대'라는 치욕적인 이름을 부여받은 젊은 분들이 이 책을 보면서 조금 더 정치적 각성, 문화적으로 새로운 도전이 활발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을 통해 386세대가 4·19세대에게 도전하듯, 이제 젊은 세대가 386세대에게 답을 요구할 시점인 겁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386세대 역시 <1960년을 묻다>를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386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백기완, 송건호, 임헌영 외 지음, 한길사 펴냄)을 읽고 자랐지요. 해방 공간에서 벌어진 남북한의 역사를 읽으면 콤플렉스를 느낀 세대지요. 그런데 <1960년을 묻다>를 보면, 남북한 두 체제가 동일한 파국으로 향하고 있지 않았나라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됩니다. 1960년대에 대한 이 386들의 문화사적인 접근을 읽는다면,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으면서 느낀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제 바람은 <1940년대를 묻다>라는 책이 나오는 겁니다.(웃음) 이전 성과를 바탕으로 일제 말기와 해방,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문화사를 정리해준다면 더 중요한 대목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현우 : 저로서는 <1970년대를 묻다>를 기다리는 쪽입니다.(웃음) 저자들이 60년대를 정리한 다음 할 얘기가 더 많이 있을 것 같은데, 그 후행 연구가 70년대로 이어지길 개인적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13.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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