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차 오랜만에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들을 읽다보니 자연스레 포가 건드린 다양한 형태의 미스터리물들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이럴 땐 일차적으로 관련서를 모두 모아놓는 게 상투적으로 하는 일인데 '미국추리작가협회 지음'으로 돼 있는 <미스터리를 쓰는 방법>(모비딕, 2013)도 관련서의 하나다. 아직 '미스터리 걸작선'들에까지 손을 댄 건 아니지만 경험상 '작법'은 언제나 '독법'으로도 유용하기 때문이다.

 

 

곧 <미스터리를 쓰는 방법>은 거꾸로 <미스터리를 읽는 방법>으로 읽을 수 있다. 급수를 맞춘다고 할까. 추리소설 작가에게는 <현대범죄수사> 같은 범죄 수사 교과서나 <법의학, 병리학, 독극물학> 같은 법의학 교과서, 그리고 <범죄학 개론> 같은 경찰학 교과서들이 그것도 최신판으로 필요하다고 하는 대목에선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검색은 해봤다.

 

 

 

'교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의 <한국의 연쇄살인>(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한국의 CSI>(북라이프, 2011)가 많이 팔린 책이고, 전대양의 <범죄수사>(21세기사, 2013)는 거의 안 팔리는 책이지만 두툼한 대학 교재다. 경찰행정학과 같은 곳에서 교과서로 쓰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추리소설 작가들도 이런 류의 책들을 여럿 구비하고 있을 터이다.

 

 

 

검색하다가 알게 된 저자는 독일의 법의곤충학자이자 과학수사 전문가 마크 베네케인데, 의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알마, 2008), <연쇄살인범의 고백>(알마, 2008), <살인본능>(알마, 2009) 등의 책이 눈에 띈다. 이 정도면 추리소설 작가뿐 아니라 독자들도 눈여겨볼 만한 것 같다.

 

 

국내 법의학자가 쓴 책으론 이윤성의 <법의학의 세계>(살림, 2003)이 소개서이고 '대한민국 최초 법의학자' 문국진의 <법의관이 도끼에 맞아죽을 뻔했다>(알마, 2011), <죽은 자의 권리를 말하다>(글로세움, 2012) 등이 읽어볼 만하겠다. 이 역시 독자들에게도.

 

 

범죄학 개론서는 국내서도 좀 나와 있는데, 번역서 가운데서는 Larry J. Siegel의 <범죄학>(Cengage Learning Korea, 2012)이 최신판이다. (그린, 2012)도 무게감이 있는 책인데, 책에 관한 정보는 올라와 있지 않다. 앨런 군의 <범죄수사를 위한 필수 법생물학>(월드사이언스, 2011)도 2판인 걸로 보아 이 분야에서는 읽히는 책인 모양이다. 

 

물론 미스터리를 위해서라면 그밖에 많은 미스터리물에 대한 독서도 필수이겠지만 이런 류의 참고도서도 기본적으로 소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 <미스터리 쓰는 방법>은 이런 충고까지 보탠다.

이미 우리 주변에는 법률, 법의학, 탄도학, 지문과 음성인식 등 범죄와 관련된 분야를 다루는 정보가 엄청나게 많으며, 새로운 과학기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 따라서 항상 가까운 도서관에 가 필요한 책을 찾아보길 권한다.(10쪽)

우리의 '가까운 도서관'에 '필요한 책'이 꽂혀 있을지는 심히 의문스럽지만, 여하튼 미스터리 소설을 쓰기 위해서도, 그리고 읽기 위해서도 우리는 항상 도서관을 애용하도록 해야겠다. 아, '범죄도서관'이라는 게 있다면 딱 좋을 듯하군...

 

13.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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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독도서관에서 열린 벤야민 심포지엄에 들렀다 귀가하는 길에 집어든 주말판 경향신문에서 목수정 작가의 '해외 책' 란을 읽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3081935545&code=900308). 국내엔 <부자들의 대통령>(프리뷰, 2012)이 번역돼 있는 사회학자 팽숑 부부의 신작 <돈, 양심도 법도 없는>(2012)을 소개하고 있는데, 흥미로울 뿐더러 필독할 만한 이유가 충분한 책이다. 언젠가 언급한 바로우파키스의 <글로벌 미노타우로스>(2013)와 함께 번역되면 좋겠다...

 

 

며칠 전 포브스는 지난해 세계 최고 거부들 리스트를 발표했다. 10억달러 이상을 소유한 갑부들의 수는 27년 전 리스트가 발표되기 시작한 이래 최고치였다. 1426명. 지난해에 비해 200명이 늘었다. 이 1426명의 거부들은 5조4000억달러를 소유하고 있다. 27년 전 거부 숫자는 140명이었고 이들이 소유한 재산은 2950억달러에 불과했다. 반면 세계 인구의 20%는 여전히 하루 1달러도 되지 않는 돈으로 살아간다. 분명 상황은 더 악화되어 간다. 지구촌 거의 모든 곳에서.

 

 

<부자들의 대통령>의 저자이자 부자 전문연구자로 유명한 사회학자 커플인 모니카 팽송과 미셸 팽송은 “과연 돈이 언제부터 이렇게 미쳐 돌아가기 시작했는가”를 새 책 <돈, 양심도 법도 없는>(L‘argent sans foi ni loi·2012)에서 묻고 답한다. 돈은 분명 인간사회를 좀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해 물물교환 대신, 그리고 조개껍데기 대신 생겨난 거 아니었어? 그런데 지금 돈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저자는 돈이 언제부터 유용한 도구의 위치를 넘어 한줌도 안되는 인간들이 나머지 모든 인간들을 지배하는 데 사용하는 ‘무기’가 돼 버렸는지를 쉽고 명확한 언어로 설명한다.

 

(...)

프랑스에서의 최근 상황 악화는 부자들에게 상상을 초월한 혜택을 베풀며 계급전쟁을 지배계급의 완전한 승리로 이끈 사르코지의 영향이 크다. 덕분에 프랑스 부자들이 스위스 계좌에 예치하고 있는 자산은 800억유로에 이르는 반면 이틀에 한 번 이상 단백질이 포함된 식사를 할 수 없는 프랑스 아이들의 숫자는 80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

 

불행하게도 상황은 지구촌 어디나 비슷하고, 다행스러운 점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해법도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금융 천국 스위스에서 기업 간부들이 고액 연봉을 나눠 갖는 것에 제동을 거는 법을 국민투표로 통과시킨 것처럼. 우선 도구여야 할 돈이 도끼가 되어 우리의 목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것을 저자들은 요구한다. 대화로 풀어낸 가벼운 책 속에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게 타락한 돈의 민낯이 담겨 있다. 책장을 덮고 나면 주눅들었던 마음이 왠지 상쾌해진다.

13. 03.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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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의 '3인 1책 전격수다'를 발췌해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308163736§ion=03 참조). 이달에 고른 책은 교사들의 현장 체험담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교육공동체벗, 2013)이다. 월간 <오늘의 교육>에 실렸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프레시안(13. 03. 08) 교실에서 '죽어가는' 교사들…"우리는 개가 아니다!"

 

(...)

 

이현우 : 제가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를 고른 이유는 이번 주가 개학이고 개강이고 해서인데요. 교육이 한국에서 워낙 중요한 이슈다 보니까 현장 교사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보는 게 의미 있겠다 싶어서였습니다.

 

이 책의 부제가 '학교의 배반'인 만큼, 현재 교육 현실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고 비관적으로 보고 있죠. 만일 이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발언하지 않는 대부분 교사들도 어느 정도 공감하고 동조하는 현실이라면, 참 암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제 아이가 중학교 입학한다며 신나게 등교했는데, 뭔가 매치가 안 되는 겁니다. 매번 학년이 올라가고 새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난다며 아이들이 기대를 품는 바에 달리, 이 책에서는 정작 선생님들이 교육 현실에 대해 갖는 생각이 지극히 비관적이고 부정적으로 토로됩니다. 이쯤 되면 대체 교육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거죠.

 

이권우 : 이 책은 교사들이 교단에서 겪는 잔혹사에 대한 증언록이죠. '우리는 이렇게 당하고 있다, 교사로서의 자율성이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학교 사회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도 교사들이 제도적으로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왜 교사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을 하지 못하는 건지, 또 근본적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그 교육이 진정한 교육인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김용언 : 한국 사회에서 교육과 관련을 맺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잖아요. 학생이거나 교사거나 학부모거나 학생이었거나. 이 책에서는 교사들이 주로 승진과 얽혀있는 학교 내부 시스템과 몇 년마다 바뀌는 교육 정책 때문에 가르치는 일 자체에 혼동을 겪게 되는 내외적 조건들을 이야기합니다.

 

제 느낌으로는 책 전반적으로 학교 내적 문제에 더 치중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은 있었습니다. 침묵의 암묵적인 카르텔이 형성된 상황에서 거기 대해 발화한다는 것 자체가 큰 사건일 순 있겠지만요. 그래도 교사 입장이 아닌 사람이 봤을 때에는 외적 시스템 문제가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더 궁금하긴 했거든요. 정의진 교사의 글 '끊임없이 '달리다' : 집중이수제가 휩쓸고 간 지난 학기 수업 풍경'이 그런 의미에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최근에 교육과정이 얼마나 자주 개정되었는지 이제는 교사들도 헷갈린다. 교육과정 개정 횟수만 보면 가히 '교육혁명'의 시대다. 작년은 그 절정을 보여 주는 한 해였다. 중3(현 고1)은 2007 교육과정, 중2(현 중3)는 2007 개정 교육과정, 중1(현 중2)은 2009 개정 교육과정을 각각 따로 적용받았던 것이다(이 부분은 읽다가 숨 한번 쉬어 줘야 한다).

 

이권우 : 우스갯소리로, 전 이 책을 보면서 댓글 단 국정원 직원이 생각났습니다.(웃음) 뛰어난 실력으로 국정원에 취직했는데, 위에서 요구한 건 인터넷상의 여론을 현 정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특정 댓글을 달라는 거였죠. 교사들이 겪는 고충도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교사가 되는 건 굉장히 치열하고 어렵지요. 아예 교사 T.O가 나지 않아 시험 준비를 못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채용됐는데, 소속 기관이 교사들에게 요구되는 특정 역할에서 갈등이 빚어집니다. 이런 뒷얘기도 있어요. 국정원 직원은 퇴근하면 댓글을 안 달았다면서요.(웃음) 분명 공무 수행이 맞았던 겁니다. 하지만 교사들은 6시 이후에도 퇴근하지 못하고 또 다른 할 일들을 맞닥뜨립니다. 교사는 조직 구성원으로서 지시 사항을 따라야 하지만 동시에 그걸 넘어서야 하는 직업적 특수성이 있습니다.

 

이현우 : 김용언 기자는 학교 내부 사정을 토로하는 부분이 좀 아쉬웠다고 했는데, 전 그게 오히려 인상적이었어요. 이 책은 학교 내 행정 업무와 승진 시스템에 대해 많이 다루고 있죠. 사실 교사는 한국에서 직업 만족도가 가장 높은 직업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만족도를 보이는 게 초등학교 교장입니다.(웃음) 승진을 지향하는 교사들로서는 지금 잘 버티면 나중에 그만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걸 믿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책의 저자들이 토로하는 바, 밖에서 볼 때와 안에서 볼 때의 갭이 굉장히 크다는 거지요.

 

 

승진을 위해, 나는 교장의 개였다

이권우 : 얼마 전에도 장학사 선발시험 문제가 유출된 사건이 터졌던 걸 기억하실 겁니다. 이 책에 담긴 교사들의 잔혹사가 객관적 사실이라는 거죠. 전 이 책을 통해 진정한 교육을 불가능하게 하는 세 가지 문제를 얘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승진 체제, 교사의 정치적 자율성, 마지막으로 비정규직 교사 문제입니다.

 

장학사, 교감 혹은 교장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교사 업무보다 잡무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나오지요. 일제의 유산이라고 해야 할 텐데, 한국에선 짧은 기간 내에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사범대를 만들었고, 그 사범대가 아무래도 국립대학 중심이기 때문에 각 지역 거점 대학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라인'이 형성되었고 부조리한 문제가 비합리적으로 해결되는 구조가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먼저 승진을 위해 교사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수행하는 잡무가 지나치게 많다는 문제 제기가 나오지요. 사실 학교 행정 업무는 행정 직원이 맡아줘야 하는데 그런 직원을 채용하지 않고 교사에게 전적으로 떠맡긴다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지요.

 

김용언 : 강아지똥 교사의 글 '내가 겪은 몹쓸 일, 방과후학교'를 읽으면 정말 실감나더라고요.

 

이현우 :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네이스)가 2011년 도입되면서 업무량이 폭증했다고 하죠.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의 글 '슬픈 사람, 안혜영'에 보면 희망에 부풀어 있던 신임 교사 안혜영 씨가 출근 첫날부터 맡은 업무가 바로 학적이었지요. 모두가 패닉 상태에 빠졌던 그 네이스 시스템 앞에서 신임 교사 안혜영 씨도 엄청난 좌절을 느꼈을 테고 결국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한 달 만에 자살하고 맙니다.

업무 때문에 수업 준비할 시간이 너무 없다. 수업 준비도 제대로 못 한 채 아이들 얼굴을 만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

 

이 정도의 고통으로 자살까지 감행했다면 다른 교사들이나 교육 행정 담당자도 모두 이 시스템의 문제점을 알고 있을 텐데, 왜 해결이 안 되고 있는지 수수께끼입니다.

 

이권우 : 일종의 세대 착취 문제 아닐까요. 지금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집단은 여태껏 자기들이 해왔으니까 마땅히 너희들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죠. 거기서 비민주적 권위의식이 발동하고요. 또 새로운 행정 직원을 채용하지 않은 채 교사에게 맡겨버리면 돈이 적게 든다는 편의성도 있을 테고, 이런 방식으로 젊은 교사 길들이기 목적도 있어 보입니다.

 

이현우 : 저도 그 점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또 승진 관련해서 교사 평점을 매기는 부분에 있어 교장이 전권을 갖고 있다는 것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책 속에서 어떤 교감 선생님은 '난 교장의 개였다'라는 자조적인 표현을 쓰지요. 과장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권우 : 승진 점수를 받기 위해 일정 기간 벽지 초등학교에서 근무해야 한다는 조건을 보노라면 그쪽 초등학교 교장이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렇다면 사립학교는 승진 문제에 있어 과연 어떨지 능히 짐작이 가는 상황이죠. 교육을 잘하는 선생님들이 승진하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라 승진하기 위해 교육 업무를 폐기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겁니다. 승진과 교육이 서로 갈등을 일으켜요.

 

이현우 : 승진을 위해 교육청에서 불러주기만을 기다린다는 얘기도 나오잖아요. 이민아 교사의 글 '다시 쓰는 행복 인생, 3막 1장'을 보면 "학교를 퇴근함과 동시에 다시 교육청으로 출근하는 생활"을 하면서 "교육청 행사 추진에서부터 장학 자료 만들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교육청 일을 참 많이도 했다"고 고백합니다.

 

이권우 : 아주 솔직한 대목을 하나 볼까요. 가르치지 않기 위해 승진하려는 교사들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이 수업에 얼마나 집중하지 않고 교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지, 좋은 학교 진학만을 따지는 학부모들의 요구가 얼마나 거친지 잘 압니다. 그 상황에서 교사가 가르치는 자리에 연연하기보다 차라리 편하게 업무를 관장하는 자리로 승진하려는 욕구를 갖는다는 건 실질적으로 이해 가능합니다. 문제는 승진 체제에 있어요. 교육을 잘하고 아이들을 잘 키우는 선생님이 승진하는 게 아니라 승진 자체를 위해 잡무를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아까 언급하신 이민아 교사의 경우 승진 체제에 정신없이 편승하다가 결국 그 안에 휩쓸리기를 거부한 분인데요. 이 대목을 한번 보지요.

 

출근하면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판만 두드리고 있을 때가 많았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어떤 날은 수업 시간에 모니터 옆에 교과서를 펴 놓고 일을 하면서 아이들에겐 대충 설명으로 시간을 때워 버리기도 했다. 차라리 교사가 아니라 회사원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 적어도 교실에서 아이들 없이 마음껏 일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현우 : 대학에선 총장을 퇴직하고도 평교수로 다시 강단에 설 수 있잖아요? 하지만 초·중·고등학교에선 교장이 마지막 보직이고, 거기서 정년퇴직합니다. 교사는 평교사로 퇴직하느냐 교장으로 퇴직하느냐 두 갈래 길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후자를 선택한다면, 승진을 위해 굉장히 많은 '관리'를 해야 하죠. 아이들에게 충실하기보다 상급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러 과도한 업무를 견뎌내야 하는데, 그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이런 전근대적 관행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가슴 아픈 딜레마도 있죠. 아이들이 나이든 교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보직보다는 교사로서의 업무에 더 큰 만족감과 사명감을 느끼는 분들이 계실 텐데, 평생 성실하게 교직을 수행해온 이분들이 교단에서 실패한 자, 낙오한 자 대접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평교사-실패한 자, 교장-성공한 자로 나뉘는 교단 문화 자체가 달라지지 않으면 교사들의 절망이 상당 부분 해소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

 

13. 03.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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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을 골라놓는다. 내주 월요일이면 3.11, 동일본 대지진과 함께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한 지 2주년이다.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이와 관련한 책들이 몇 권 나왔는데, 타이틀은 한일 지식인 3인, 서경식과 한홍구, 그리고 다카하시 데쓰야의 좌담집 <후쿠시마 이후의 삶>(반비, 2013)에서 가져왔다. '역사, 철학, 예술로 3.11 이후를 성찰하다'가 부제.  

 

 

두번째 책은 사사키 다카시의 <원전의 재앙속에서 살다>(돌베개, 2013). "스페인 사상사 교수였던 사사키 다카시가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당시 정부의 행정 편의주의적인 피난 지시를 거부하고 치매에 걸린 아내와 함께 자택 농성을 벌이며 하루하루 써내려간 치열한 고투의 기록이다." 세번째 책으로 고른 오오타 야스스케의 <후쿠시마에 남겨진 동물들>(책공장더불어, 2013)도 마찬가지로 후쿠시마 관련서다. 제목 그대로 '죽음의 땅'에 남겨진 동물들의 비참함을 사진과 글에 담았다. 

 

 

나머지 두 권은 방향을 좀 틀어서 생각/발상의 전환, 그리고 교육과 관련한 책을 골랐다. 존 브록만이 엮은 <우리는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책읽는수요일, 2013)는 ‘생각thinking’이란 주제에 대해 150명의 지성이 답한 것을 모았다. 생각에 대한 생각들이 우리의 생각을 자극할지 모른다. 제시카 호프만 데이비스의 <왜 학교는 예술이 필요한가>(열린책들, 2013)는 제목 그대로 학교에서의 예술 교육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책. 아니 더 나아가 예술이 학교 교육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몇년 전에 나온 책 가운데 커트 스펠마이어의 <인문학의 즐거움>(휴먼앤북스, 2008)을 떠올리게 해주는 책이다(흠, <인문학의 즐거움>은 그새 절판됐군!)...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후쿠시마 이후의 삶- 역사, 철학, 예술로 3.11 이후를 성찰하다
한홍구.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대담, 이령경 옮김 / 반비 / 2013년 3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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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원전의 재앙속에서 살다
사사키 다카시 지음, 형진의 옮김 / 돌베개 / 2013년 3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3년 03월 08일에 저장
절판

후쿠시마에 남겨진 동물들- 죽음의 땅 일본원전사고 20킬로미터 이내의 기록
오오타 야스스케 지음, 하상련 옮김 / 책공장더불어 / 2013년 3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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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150명의 지성에게 물었다
존 브록만 엮음, 최완규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3년 3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2013년 03월 08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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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경향아티클(20호)에 실은 가상인터뷰를 옮겨놓는다. 기획특집이 철학자들과의 가상인터뷰인데, 12명의 철학자가 인터뷰이로 선택됐고 내게 맡겨진 것이 지젝과의 인터뷰였다. 지젝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염두에 두고 진행했다. '로쟈가 묻고 지젝이 답하다'.

 

 

경향아티클(13년 3월호) "바보야, 문제는 정치경제학이야"


로쟈: 슬라보예 지젝 선생님, 안녕하세요? 가상 인터뷰 자리이지만 작년 여름 방한 강연 때 뵙고, 다시 뵙습니다. 작년에 ‘번역자’라고만 소개를 드렸는데, 선생님의 책을 몇 권 공역하고 또 여러 곳에서 선생님에 관한 강의도 꽤 하고 다니는 로쟈입니다. 멋쩍지만 ‘지젝 전도사’라고도 불립니다.(웃음) 그래서 이런 인터뷰 자리도 뿌리치지 못하고 나오게 됐습니다. 늘 배우는 입장에서 오늘도 여러 궁금한 점을 질문 드리고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작년에 오셨을 때는 옆에서 뵙기에도 건강이 안 좋아 보였는데, 요즘은 어떠신지요? 선생님의 방한 강연과 인터뷰를 수록한 <임박한 파국>(꾸리에, 2012)가 작년 말에 나왔는데, 경희대학교의 석좌교수직도 맡으셨던데요. 한국에는 자주 오시게 되는 건가요?    

 

 


지젝: 네, 건강이 허락하면 일 년에 한 번씩은 들러서 특강도 하려고 합니다. 한국에는 지난 2003년 가을에 석학초청강좌에 초빙돼 처음 왔었고 작년 여름 방한은 두 차례 강연을 하긴 했지만 사적인 방문이었죠. 아직 남북한이 분단 상태에 있는 한반도는 여러 모로 흥미로운 지역입니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말하지만 그 이데올로기 대립이 눈앞에 현전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지난해 방한 시에 비무장지대도 방문하고 북한이 판 땅굴에도 가보았습니다. 저는 남한의 대중영화들뿐만 아니라 북한의 선전영화들도 많이 보고 있어요. 김정일의 영화론도 흥미롭게 읽었지요. 간혹 언급한 적이 있지만 앞으로 제 책에 한국에 관한 내용이 더 자주 나오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쟈: 한국뿐 아니라 한국인과의 인연도 없지 않으시죠? 인디고연구소의 젊은 친구들이 류블랴나 자택까지 선생님을 찾아가서 인터뷰를 나눈 적이 있으니까요. 물론 잘 아시겠지만 그 인터뷰가 작년초에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궁리, 2012)이란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올해는 그 책의 영어판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박용준 편집장이 귀띔해주더군요. 거기에서도 나온 질문이지만 예전에 선생님은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비밀’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공산주의가 승리할 것이다’라고 답하셨어요. 선생님은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간주하시나요? 영어권 언론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고도 선생님을 지칭하는데, 그에 대해선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신가요?


지젝: 제가 공산주의자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공산주의에 대해 새롭게 정의하는 게 필요합니다. 사실 철학이란 어떤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답은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게 철학자의 역할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공산주의 국가 슬로베니아 출신이기에 현실 공산주의에 대해서 아무런 환상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가 궁극적으로 파국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더 나은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도 저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공동의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공산주의는 바로 그 문제의 다른 이름입니다. 만일 제가 공산주의자라고 한다면 해답으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문제로서의 공산주의를 사유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는 말이 불쾌하진 않습니다. ‘백치’는 아니라는 얘기니까요. 물론 지난해 방한 강연 때 한 청중의 질문대로 아무리 위험한 철학이라 하더라도 지적 교양으로, 혹은 지적 액세서리로 소비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소비되는 걸 두고 ‘스타벅스 철학자’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2011년 6월 총선이 있던 그리스에서 시리자(급진좌파연합)의 ‘비밀스런 멘토’로 지목돼 공격받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저는 위험하기도 하고 위험하지 않기도 합니다. 철학에 대한 이해 역시 주관적 개입을 필요로 하는 것이죠.

 


로쟈: 지난해 방한 때 아드님과 강남대로를 걷고 있는 걸 보고 누군가 트위터에 올린 글이 생각납니다. ‘가장 위험한 철학자’가 버젓이 서울 한복판을 활보하고 있는데 한국 경찰은 뭐하고 있는 거냐고요.(웃음) 그러고 보니 위험한 철학도 위험한 기계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접속될 때만 작동하는 기계 말이죠.


지젝: 맞아요. 한데 위험한 철학자가 아니라 그냥 위험한 남자로 비칠 때도 있습니다. 언젠가 뉴욕지하철을 탔더니 한 중년여성이 제 시선이 폭력적이라고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었죠. 유쾌하지 않은 경험인데, 제 인상이 위협적으로 보였나 봅니다. 여기에도 시차(視差)가 있는 것이죠.(웃음)

 

 


로쟈: 선생님은 1989년에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2)이란 제목으로 번역됨)을 발표하면서 영어권 지식사회에 데뷔하셨습니다. 이후에 정말 놀랄 만큼 많은 저작을 펴내시면서 정력적인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저는 선생님의 저작을 편의상 철학책, 영화책, 시사책, 크게 셋으로 분류하는데요, 한국에는 할리우드 영화를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으로 읽는 영화책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1995)가 처음 소개된 이후에 다수의 저작이 번역됐습니다. 공저까지 포함하면 50여 권이 넘는 책이 소개됐어요. 물론 한국에만 이런 ‘지젝 붐’이 있는 건 아니고, 아스트라 테일러가 찍은 다큐영화 <지젝!>(2005)을 보니까 세계 곳곳에서, 특히 남미 쪽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고 계시더군요. <지젝!>에서는 직접 선생님의 주저를 꼽기도 하셨죠?

 

 

 
지젝: 기억납니다.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을 펴내려고 할 때인데 영국 버소출판사의 편집자를 만나는 자리에서 대표작을 꼽아 보았지요. 제 철학적 주저라고 할 만한 것은 <시차적 관점>을 포함해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 네 권이라고 했지요. 주로 헤겔과 독일 관념론을 주로 다룬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제 철학은 라캉 정신분석을 통해서 헤겔 철학을 새롭게 독해하는 것입니다. 또 거꾸로 헤겔 철학으로 라캉을 읽고요. 그렇게 서로 엇갈려 읽을 때 헤겔철학의 파워가 더 잘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시차적 관점> 이후에도 책을 여러 권 더 펴냈고, 그 가운데서는 작년에 낸 <레스 댄 낫씽(Less Than Nothing)>은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겔과 변븡법적 유물론의 그림자’가 부제에요. 1000쪽이 넘으니만큼 가장 무거운 책이기도 합니다.(웃음)

 

 


로쟈: 말씀하신 네 권의 책은 모두 한국어로 번역돼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절판됐는데, 아마 다시 나오는 걸로 알고요. <레스 댄 낫씽>, 제가 제목을 정한다면 <헤겔의 유산>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 대작도 올봄에는 한국어판이 나오는 걸로 압니다. 아마 2013년에도 선생님의 책이 서너 권은 더 번역되지 않을까 싶어요. 작년에 펴내신 <가장 위험하게 꿈꾼 해(The Year of Dreaming Dangerously)>(2012)도 <멈춰라, 생각하라>(와이즈베리, 2012)란 제목으로 번역돼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제가 감수의 글을 덧붙이기도 한 책입니다. 편집자가 책 소개하기 위해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라는 문구를 집어넣었는데, 선생님의 문제의식을 그렇게 정리해도 될까요?


지젝: 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 오랫동안 해온 작업이기도 하지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현재의 지배적 체제입니다. <시차적 관점>에서 얘기한 거지만, 정치와 경제는 분리해서 다룰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의 핵심 통찰은 바로 그것이에요.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동시에 보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예컨대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해요. 이렇게 보면 두 옆얼굴이 보이고, 저렇게 보면 꽃병만 보이고 하는 식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치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가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경제를 바꾸고자 한다면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합니다. 반대로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토대를 건드려야 하구요. 따라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슬로건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일면적이기 때문이에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유산을 문제 삼지 않고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이에요. 가령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나 <인사이더>처럼 무자비한 이윤추구에 몰두하는 대기업을 비판하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죠. 대기업의 음모에 맞서는 정직한 미국인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자본주의는 비판하더라도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는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래서 제 친구이기도 한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아예 “오늘날의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불린다.”라고 말했죠. 물론 자본주의는 대단히 유동적인 체제입니다.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닌 권위주의 정치체제와 결합하고 있어요. 서구식 발전모델과는 다른 모델입니다. 월가 점령시위 때 즉흥연설에서도 언급한 부분인데, 오늘날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고 있는 중국은 미국보다도 훨씬 더 역동적인 자본주의를 운영하고 있어요. 하지만 민주주의는 배제하죠. 성장이라는 척도만 갖고 얘기하자면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의 성공이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이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민주주의와 결혼한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이혼한 자본주의’까지도 상대해야 하는데 오늘날 좌파의 과제라고 할까요. 


로쟈: 두 가지 자본주의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 한편으로 이 둘은 서로 연결돼 있기도 하지요. 글로벌 자본주의란 말이 함축하듯이 말이죠. 지난해 강연에도 말씀하신 폭스콘의 사례도 대표적이고요.


지젝: 정말 흥미로운 사례죠. 폭스콘은 중국에 있는 아이패드 제조업체죠. 군대식 기숙사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등 스트레스가 심한 노동조건 때문에 노동자들이 연이어 자살하자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입사할 때 각서를 쓰게 했어요. 나는 자살하지 않겠다, 동료가 우울해보이면 신고하겠다,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정신병원에 가겠다, 등등. 2011년 연말에 폭스콘의 모기업인 대만의 홍하이그룹 회장이 종무식 자리에서 “백만 마리의 동물을 관리하려니 골치가 아프다”며 대만동물원 원장을 초빙해 강연을 듣겠다고 하더니 실제로 그렇게 했다지요. 스티브 잡스의 애플은 자본주의적 혁신의 상징이지만 폭스콘 없는 애플은 상상하기 어렵죠. 자본주의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란 건 그 이면 또한 직시하는 걸 말합니다.

 

 


로쟈: 바로 그런 맥락에서 선생님은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 2011)에서도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과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을 구분하셨죠. 폭력이란 말이 즉각적으로 떠올려주는 상투적 ‘이미지’에서 한걸음 물러날 때만, 우리가 폭력에 대해서 비로소 사유하고 성찰할 수 있다는 게 선생님의 주장이셨습니다.


지젝: 거기에 니체의 구분법을 대입해보자면, 능동적 폭력과 수동적 폭력이란 구분도 가능합니다. 진정한 폭력 대 반응적 폭력이라고 할까요. 사건으로서의 폭력이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 지속돼서는 안 되는 것을 중단하는 힘입니다. 그런 점에서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이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보다는 더 폭력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변화에 대한 요구를 가로막기 위한 폭력이 바로 수동적‧반응적 폭력입니다.


로쟈: 제가 덧붙이자면 선생님의 사유야말로 대단히 폭력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더 이상 고정관념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발길질을 해대니까요.(웃음) 지면이 한정돼 있어서 아쉽지만 선생님과의 인터뷰는 여기서 마쳐야 할 거 같습니다. 끝으로 <경향아티클>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지젝: 이 가상 인터뷰의 독자도 가상 독자는 아닌가요?(웃음) 여러 번 당부한 것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생각’입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현실이라고 착각하는 가상공간(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입니다. 비록 그것이 고통스럽다 하더라도요. <매트릭스>의 질문을 반복하자면, 당신은 빨간약과 파란약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13. 03.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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