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교육 관련서로 눈에 띄는 책은 만프레드 슈피처의 <디지털 치매>(북로드, 2013)와 나이토 아사오의 <이지메의 구조>(한얼미디어, 2013)다. 리뷰를 검색해보니 <디지털 치매>에 대해선 기사가 많이 나와 있어서 군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듯하지만, '머리를 쓰지 않는 똑똑한 바보들'을 양산해내는 디지털 시대의 교육에 대해 다시금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언급한다. 

 

 

 

경영컨설턴트인 니콜라스 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청림출판, 2011)에서 비숫한 경고를 해준 바 있는데, <디지털 치매>는 그 연장선상에서 읽어도 좋겠다. '서장'은 "구글은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있는가?"란 기고문 제목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이 기고문의 저자가 바로 '니컬러스 카'다. 독일의 뇌과학자인 슈피처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멍청해지는 것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 뇌과학의 연구 결과, 디지털 미디어에 너무 많이 노출될 경우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속속 입증되고 있다. 우리의 뇌는 지속적인 변화 과정을 겪고 있기 때문에, 디지털 미디어를 날마다 이용할 경우, 그나마 요행이 따른다면 아무런 (나쁜) 영향도 받지 않게 된다.

마지막 문장은 가정으로 읽어야 한다. 뇌가 디지털 미디어에 '적응'하여(자연계에서라면 진화적 시간이 걸린다) 디지털 환경에 맞게 최적화가 된다면 또 별 문제이겠지만(그때의 뇌도 여전히 뇌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뇌의 종말에 더 가깝지 않을까?) 현재로선, 현재의 뇌로선 디지털 환경에 과도하게 노출되는 것이 치명적이라는 얘기다. 학교 교과서를 전자 교과서로 모두 대체하겠다는 발상도 교육 당국에서는 하고 있는 모양인데, 슈피처는 학습용 컴퓨터를 영화에 비유하여 이렇게 경고한다.  

"우리는 이 영화를 사랑했다. 한 시간 동안 생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이 영화를 사랑했다. 한 시간 동안 수업을 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학부모들도 이 영화를 사랑했다.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가 기술적으로 최고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교사나 학부모라면 함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경고다.

 

 

 

이지메 혹은 집단따돌림 현상은 학교폭력과 함께 교육현장의 골칫거리이자 숙제다. '왜 인간은 괴물이 되는가'란 부제를 달고 있는 <이지메의 구조>는 이지메 원산지의 전문가가 쓴 책이란 점에서 눈길을 끄는데, 저자 나이트 아사오는 현재 메이지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사회학자로 <이지메의 사회이론>, <이지메학의 시대>, <이지메와 현대사회>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이지메학' 전문가.

 

저자는 이지메가 학교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 온갖 사회집단에서 관찰되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보며 그 심층적 메커니즘을 추출해내려고 한다. 이를 위해 '중간집단전체주의'란 개념을 제안하는데, 그 정의는 이렇다.

"개개인의 인간 존재가 공동체를 강요하는 집단이나 조직에 전적으로 흡수되어야만 하는 강제적인 경향이 어떤 제도, 정책적인 환경 조건하에서 구조적으로 사회에 번성하고 '긴타로 엿'처럼 사회에 편재되어 있으면, 그 사회를 중간집단전체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긴타로 엿은 일본의 전설적인 영웅 긴타로의 얼굴이 새겨진 엿으로 어디를 잘라도 단면에 그 얼굴이 나타난다고 한다. '천편일률적인 현상'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그런 획일성이 강제되는 사회의 새로운 유형이 중간집단전체주의 사회다. 이러한 분석의 유효성과 한국 사회에 대한 적용 가능성 등은 책을 읽으면서 더 생각해볼 문제다.

 

한 가지 흠을 적자면, 책에서는 3장 제목인 '치유로써의 이지메'도 그렇고 '-로서의'라고 해야 할 대목을 모두 '-로써의'라고 오기하고 있다(그러니 실수가 아니라 신념이다). 편집자의 무지 탓인지, 아니면 무심 탓인지 알 수 없으나 책에 대한 신뢰를 잠식한다. 오탈자 때문에 독서가 방해받지 않도록 신경을 좀 써주었으면 싶다...

 

13.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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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을 미리 골라놓는다. 타이틀은 니시오카 쓰네카즈의 <나무에게 배운다>(상추쌈, 2013)에서 가져왔다. 발행일이 4월 5일로 돼 있는데, 물론 '식목일'을 염두에 둔 것이겠다. 이주의 책을 고르면서 나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예전에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1996)이란 제목으로 나왔었다 한다. 일본 목수 장인의 지혜와 성찰을 담은 책.

 

 

두번째 책은 도쿠무라 아키라의 <숲에서 배우다>(고인돌, 2013). 저자가 "에서 새롭게 살며 도시의 기계 문명으로 망가진 몸을 치유하면서 배우고 깨우친 이야기들"이다. 세번째 책은 일본 철학자 이즈쓰 도시히코의 <의식과 본질>(위즈덤하우스, 2013). <의미의 깊이>(민음사, 2004)의 저자가 쓴 책이라 관심이 가서 바로 주문했다. 저자는 "불교·선불교·노장사상·공맹사상·신유학·힌두교·탄트라·이슬람·카발라 등 동양철학에 속해 있는 갖가지 종교와 민족의 수많은 사상의식을 ‘본질’이라는 서양철학의 키워드를 빌려 동양철학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을 제시한다."

 

 

네번째 책은 하버드대학 교수이면서 동서양 비교의학사의 최고 권위자라는 시게히사 구리야마의 <몸의 노래>(이음, 2013). "대 그리스 의학과 한의학이 구축한 몸과 의료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다룬 연구서"다. 동서양 비교의학사라는 게 어떤 분야인지 궁금하다. 다섯번째 책은 요네하라 마리 여사의 <언어 감각 기르기>(마음산책, 2013). 일본의 명사 11인과 나눈 대화를 담았다. 언제나처럼 유쾌한 지식과 감각의 성찬이 벌어지지 않을까 한다. 이번주에는 일본인(일본계) 저자의 책만으로도 다섯 권을 거뜬히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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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게 배운다- 비틀린 문명과 삶, 교육을 비추는 니시오카 쓰네카즈의 깊은 지혜와 성찰
니시오카 쓰네카즈 구술, 시오노 요네마쓰 엮음, 최성현 옮김 / 상추쌈 / 2013년 4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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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배우다- 숲 문화와 숲 속 학교
도쿠무라 아키라 지음, 소진열 옮김 / 고인돌 / 2013년 4월
14,500원 → 13,050원(10%할인) / 마일리지 72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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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본질
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박석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4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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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몸의 노래- 동양의 몸과 서양의 몸
구리야마 시게히사 지음, 정우진 외 옮김 / 이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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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주말판에 실린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이 연재는 대략 5주에 한번씩 게재된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에 대한 간략한 소감을 적었다. 인용한 대목 번역은 내가 갖고 있는 예닐곱 권의 책을 모두 참고했는데, 대동소이한 걸 제외하고 몇 개만 나열한 것이다. 기사에서는 K를 '케이'라고 음역했는데, 독어식으로 하면 '카'라고 읽어주어야 한다. 아예 '요제프 카'라고 옮긴 번역본들도 있다... 

 

 

 

한겨레(13. 04. 06) 인간이란 사실이 죄가 될 수 없다면 나도 무죄다

 

“누군가 케이(K)를 중상모략한 게 분명했다.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이날 아침 느닷없이 그가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세계 문학사의 유명한 서두 가운데 하나일 <소송>의 서두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체포되는 ‘케이’(K)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잘못도 없는 독자도 작품을 손에 드는 순간 케이의 부조리한 ‘소송 이야기’에 휘말리게 된다. 흥미로운 건 미완성 소설임에도 카프카가 마지막 장 ‘종말’을 ‘체포’라고 제목을 붙인 첫 장과 함께 써두었다는 점. 서른한번째 생일 전날 밤에 찾아온 두 남자에 의해 채석장으로 이끌려간 케이는 순순히 칼에 찔려 죽는다. “개 같군!”이란 말을 내뱉지만 그가 죽어도 치욕은 남을 것만 같았다는 게 마지막 문장이다.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은 케이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 중상모략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숙부의 권유에 따라 변호사도 선임해보지만 소송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된다. 그러다 도움을 얻기 위해 만난 화가는 케이가 법원에 대해 잘 모른다고 꼬집으면서 석방의 세 가지 가능성을 설명해준다. 실제적 무죄 판결, 외견상의 무죄 판결, 그리고 판결 지연이 그것이다. 이 중 실제적 무죄 판결은 유례가 없기에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남은 건 외견상의 무죄 판결을 받거나 판결을 지연시키는 것뿐인데, 이를 위해서는 피고인이나 그 조력자가 법원과 끊임없이 사적으로 접촉해야만 한다.

 

판사나 법원 관계자들과의 사적인 연줄이 중요하기에 변호사는 의뢰인보다도 우월하게 행세한다. 케이는 지지부진한 소송 진행에 책임을 물어 변호사를 해임하러 간 자리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상인이 변호사의 환심을 사려고 구차하게 행동하는 걸 본다. ‘변호사의 개’나 다를 바 없었다. 영문을 모르더라도 일단 체포된 상황이라면 결국 두 갈래 선택지만 남는다. 외견상의 무죄 판결이나 판결 지연을 위해 힘을 써주겠다는 변호사의 ‘개’가 되거나, 그런 변호를 포기하고 개 같은 죽음을 죽거나. 분명 부조리해 보이지만 이 부조리가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데 이 작품의 문제성이 있다. 부조리의 보편성이라고 할까.

 

 

 

<소송>의 클라이맥스는 ‘법 앞에서’라는 우화가 포함된 ‘대성당에서’ 장이다. 교도소 전속 신부는 케이와 자리를 마련하고 소송의 경과가 좋지 않다고 일러준다. 사람들은 케이의 죄가 이미 입증된 걸로 생각하기에 상급 법원으로 넘어가지도 않을 거라면서. 케이는 한번 더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항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어떻게 인간이 무죄일 수 있을까요?”(홍성광 옮김·펭귄클래식) 이 대목은 보통 다르게 번역된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권혁준 옮김·문학동네)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겠습니까?”(김재혁 옮김·열린책들)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이주동 옮김·솔)

 

무죄를 주장하는 케이의 논거는 특이하게도 자신이 ‘인간’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며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가 죄가 될 수 없다면 자신도 무죄라는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케이가 유죄라면 인간도 유죄라는 뜻도 된다. 그런 점에서 케이는 ‘단독적 보편성’을 체현하는 인물이다. <소송>을 읽으며 아무래도 좋지 않은 소송에 말려든 느낌이다.

 

13. 04.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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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교양과학서들이 떼지어 출간됐다. 박문호 박사의 <그림으로 읽는 뇌과학의 모든 것>(휴머니스트, 2013)부터 하버드대학의 이론물리학자 리사 랜들의 <이것이 힉스다>(사이언스북스, 2013)까지 주목할 만한 과학서들을 한데 모아 '주중의 책'으로 묶어놓는다. 단골 저자인 필립 볼의 '색의 과학사' <브라이트 어스>(살림, 2013)도 눈길을 끄는 책이다. 눈이 환하게 하는 책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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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뇌과학의 모든 것- 뇌과학 전문가 박문호 박사의 통합 뇌과학 특강
박문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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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수학이다- 우주의 은밀한 숫자들
제임스 D. 스타인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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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트 어스- 수천 년간 지구를 빛낸 색의 과학사
필립 볼 지음, 서동춘 옮김 / 살림 / 2013년 3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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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처 사이언스- 첨단 과학자들이 들려주는 미래 과학 이야기
맥스 브로크먼 엮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3월
14,000원 → 13,300원(5%할인) / 마일리지 420원(3%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5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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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020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영장류 학자 다이로 마에스트리피에리의 <영장류 게임>(책읽는수요일, 2013)을 읽고 적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잘 쓰인, 흥미로운 책이라는 게 독후감이다. 저자의 또다른 책으로 <마카키아벨리의 지능>도 번역되면 좋겠다...

 

 

주간경향(13. 04. 09) 엘리베이터에 낯선 두 사람이 거리를 두는 까닭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던질 수 있는 근본물음은 무엇일까? ‘생명이란 무엇인가’도 가능한 후보이지만, 보통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일 것이다. 동물도 아니고 신도 아닌 중간적 존재로서 자신을 규정하는 게 우리의 통상적인 이해, 혹은 지극히 ‘인간적인’ 자기 이해다. 하지만 영장류 학자들의 생각은 다른 듯하다. 영장류 및 인간행동에 관한 연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는 진화생물학자 다리오 마에스트리피에리의 <영장류 게임>(책읽는수요일)에서 초점은 ‘우리 안의 영장류 본성’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영장류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기에 영장류 본성의 특수한 변형일 따름이다. 우리의 사회적 게임이 영장류 게임인 이유이고, 영장류 본성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자기 이해인 이유다.


물론 인간의 사회적 행동, 곧 사회적 게임이 벌어지는 ‘경기장’은 바뀌었다. 영장류가 진화해온 과거의 환경조건과는 너무도 판이하기에 우리는 자신의 영장류 본성에 대해서 간과하기 쉽다. 하지만 이렇게 바뀐 조건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영장류 게임의 플레이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가령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사람과 함께 타게 됐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엘리베이터는 분명 근래에 발명된 것이지만, 좁은 공간에서 타인과 매우 가까이 있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낯선 것은 아니다. 과거에 서로 모르는 두 원시인이 좁은 동굴에서 조우하는 것은 흔하게 일어날 법한 일이다. 그때 보통은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머리를 몽둥이로 후려치는 것으로 상황은 종료된다.


하지만 언제나 상황이 만만한 것은 아니며 상대를 공격하는 중에 자신이 입을 수 있는 상해도 고려해야만 한다. 좁은 공간에서 타인과 함께 있을 때 싸울 것인가, 싸우지 말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우리는 매우 높은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영장류가 싸움을 피하는 동물은 아니지만 갇힌 공간에서의 싸움에서는 양쪽 모두 큰 손해를 볼 확률이 높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면 보통은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저자의 실험에 따르면 이런 행동은 원숭이들에게서도 나타난다. 두 마리의 붉은털원숭이가 작은 우리 안에 갇히게 되면 그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싸움을 피하려고 한다. 상대를 빤히 쳐다보는 것은 위협 신호이기 때문에 이들은 허공이나 땅을 쳐다보기도 하고 우리 밖 가상의 지점을 응시하기도 한다. 그렇게 무관심한 척하는 것으로도 긴장이 누그러지지 않으면 이빨을 드러냄으로써 친하게 지내자는 의사를 전달하고 서로의 몸을 손질해준다. 그렇다고 엘리베이터에 동승한 두 사람이 서로 몸을 손질해주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인간은 대화를 시도함으로써 몸손질을 대신한다.


엘리베이터 문제에서도 시사를 얻을 수 있지만 영장류의 행동은 언제나 비용이 덜 드는 해결책을 모색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저자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 또한 그러한 적응의 산물로 본다.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할 때 이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둘이 싸우는 것이고, 또 다른 방법은 협상을 통해 타협에 이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전략 모두 비효율적일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반면에 서로 지배-복종 관계가 형성되면 의견이 불일치할 때마다 싸우거나 협상할 필요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지배관계가 분명한 경우에는 분쟁의 소지가 없어지는 것이다.


연인이나 부부 간의 다툼을 이런 시각에서 보게 되면, 가장 안정적인 커플은 비대칭적인 지배관계가 형성된 커플이다. 즉 둘 중 한 사람이 양보하게 되면 저녁 메뉴나 리모컨을 두고 파국적인 분쟁으로까지 치닫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이나 영장류 동물에게서 지배 욕망은 매우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지배가 개입되지 않은 인간관계는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모든 지배에는 책임이 따르며 또한 지배는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도 직시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밖에도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서 우리의 영장류 본성에 대해 되짚어보도록 해주는 유익한 책이다.

 

13. 04. 02.

 

 

P.S.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저자는 이탈리아 출신인데 로마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시카고대학에서 진화생물학과 행동신경과학 등을 강의한다. 매 장이 흥미로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지만 저자는 3장 '마파아 본능'에서 자신이 왜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 대학에서 일자리를 찾아볼 수밖에 없었는지를 털어놓는다. 이탈리아 족벌주의의 생생한 사례와 체험담이 마피아 영화 뺨친다.

 

 

책은 내용뿐만 아니라 번역도 만족스러운데, 옥에 티가 있다면 같은 책명이 다르게 번역돼 있다는 점이다. 로버트 프랭크의 같은 책이 <이성 내의 열정 Passions Within Reason>(221쪽), <이성 속의 열정 Passions Within Reason>(229쪽)이라고 두 가지로 옮겨진 것인데, 제목도 통일하는 게 낫겠고 병기된 원서명도 한 번 제시하는 것으로 족하다. 편집자가 체크했어야 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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