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한겨레신문의 '책과 사람'에서는 지난해 정년은퇴한 백낙청 교수의 사진과 함께 창비에서 정년기념논총으로 나온 <지구화시대의 영문학>을 소개하고 있다(나는 책을 그제 서점에서 봤지만 그다지 주의하지 않았다). 책은 후학들의 글모음인데, 백교수의 소위 '주체적 영문학 연구'에 대한 권두논문인 윤지관 교수의 "분단체제하에서 영문학하기"가 리뷰에는 잠깐 소개돼 있다. 요컨대, "영문학 연구는 민족문학 운동의 일환"이며, "민족의 구체적 현실, 특히 분단체제 아래서 고통받는 민중의 현실에서 영문학을 연구할 때 새로운 사유전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백 교수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문학관은 민족문학을 지지하는 (영문학뿐만 아니라) 외국문학 연구자들에겐 '중핵'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영문학 연구가 '분단체제하에서 일문학하기"보다 얼마만큼 더 실제적이고 생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민족/민중의 현실'이 걸려 있으므로, 모더니즘이 배격되고 리얼리즘이 맹신되는 것은 당연한 논리인데, 그 리얼리즘은 사실, 문학이 아니어도 고전이 아니어도 무방하며, 아니 오히려 굳이 문학이 아니고 고전이 아닐 때 더욱 생생한 것이지 않을까? 이것은 '위기' 이후에 톨스토이가 러시아민중을 위한 (문학을 넘어선) '문학행위'를 주장할 때 부딪쳤던 것과 마찬가지의 곤경, 곧 아포리아이다.

 

 

 

 



사실, 백교수는 러시아 작가로는 유일하게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도 아니고) <부활>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서양 명작의 주체적 이해를 위하여'란 식의 부제를 달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같은 톨스토이라 하더라도, '문학주의'에 속하는(그래서 톨스토이가 부정하게 되는) <안나 카레니나>는 '주체적'으로 다루기가 힘들 것이다. 이러한 사정이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이라는 시리즈를 통해서, 영문학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비평을 부분적으로 시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영문학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는지. 로렌스 전공자이지만, 아직도 로렌스 문학의 '주체적 읽기'는 미래의 것으로 남아있는 이유가 아닐는지(개별 논문은 있지만, 아직 단행본을 내지는 않았다).

사실 '주체적 영문학 연구'라는 것은 그간에 어떤 이념형으로서 잘 기능해오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실행가능한 일은 아니다. 먼저, 제도적으로. 과연 영미에서 '주체적 영문학 연구'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을까? 한국 민족과 민중을 위한 영문학 연구로 말이다. 하다못해 영미의 노동자/민중이나 피억압 유색인종들이 고통받는 현실 속에서, 그러한 현실을 고려하면서 영문학 작품들을 읽고 이해하고 그에 대한 '논문'을 과연 얼마나 실감나게 쓸 수 있을까? 탈식민주의가 있지 않느냐고?

고작 탈식민주의와 백교수의 문학론을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요한 것은 백교수가 영문학의 작품들을 해체하고 부정하는 탈식민주의적 독해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영문학 작품들이 이루어낸 성과는 성과대로 수용하면서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백교수가 말하는 주체적 독법"이라니까. 사실 이 정도면, 영문학 연구의 끝 아니가? 더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이 뭐가 또 있을까? 이러한 탁월한 안목과 성취가 세계 영문학계에 수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그들의 옹졸하고 편협한 시야 탓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방법으로서의 '독법'은 있지만 '읽기'는 빈곤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건 그럴 수밖에 없다. 작품의 성과는 수용하면서 그 한계는 극복하는 지혜로운 읽기, 그리하여 한 작품을 종결짓는 읽기가 어떻게 현전할 수 있겠는가? 거기서 작품은 '지혜'가 개입하기 위한, 그리고 '지혜'에 의해서 지양되어야 할 어떤 매개로서, 올라간 후에 버려져야 할 사다리로서, 소위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한 읽기의 현전은 그리스도의 재림만큼이나 강렬한 열망과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바, 단적으로 말해서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민족문학론이 이론으로서 질긴 생명력은 유지하며 모든 담론 위의 담론으로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마치 '정의'처럼 도달할 수 없는 이념이기에 그러하다.

같은 리뷰에서 "백낙청의 사유의 또다른 특징은 평론가 임규찬씨의 말대로 초기에 만들어놓은 이론적 틀이 견고하게 지속되는 보기드문 경우에 속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진단되는데, 당위성의 자리에 놓여 있는 이론이 백전불패일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이미 완벽하기에 변증법적 지양과 자기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보완될 뿐이고, 업그레이드될 뿐이다. 그래서, 1960년대말의 '시민문학론'에서 70년대의 민족문학론, 그리고 90년대의 근대극복론까지 "그의 생각의 근본틀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런 거까지 굳이 나쁘다고 비판할 일은 아닐지 모른다. 보기에 따라선 아주 대단한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러한 당위로서의 ‘주체적 영문학’이나 ‘민족문학론’이 결국엔 ‘말하기에 좋은 것(good to talk)’ 정도가 아닐까라는 의혹을 갖는다. 그리고 그건, 진정한 행위가 아니라 행위를 가장한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한동안 논란거리가 됐지만, 창비는 조선일보와 사이가 나쁘지 않다. 창비 편집위원들이 조선일보와 자연스레 인터뷰도 하고, 조선일보에선 간접 책광고도 해주고 하는 식이다.

이번 논문집 발간을 주도한 영문과 교수들이 주축이 된 영미문학연구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윤지관 교수가 지난번에 번역평가사업 발표와 관련하여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고, 이로 인해서 내부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윤교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것이 한국사회에서의 세상사(the way things go)이다. 그래서, 대학교수들의 ‘진보적 문학이론’과 ‘문학행위’란 건, 내가 보기에, 대학 혹은 학문이라는 사이버공간에서의 ‘오버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강준만이 맨날 하는 얘기지만, 그런 의미에서라도 강단 좌파를 신뢰하는 데에는 대단한 주의가 필요하다(그건 일종의 '모험'이다).

흔히 386세대로 80년대 후반 대학가 시위를 주도했던 많은 ‘친구들’(동창들이 다 친구라면) 가운데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이번에 한나라당 공천을 받기 위해서 줄서 있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지만, 이 액티브한 ‘녀석들’은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는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지혜론’을 주창하는 백낙청 교수에 따르면(그걸 정리한 고명섭 기자에 따르면) “지혜야말로 지식과 과학이 넘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의 전망을 열어줄 수 있으며, 문학과 예술은 그 최고의 수준에 이를 경우, 심미적 쾌락이나 개인적 만족을 넘어 그 진리의 세계를 체험하게 해준다. 그 진리 체험이 현실변혁과 내적으로 연결돼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의 전망’은 꿈도 못 꾸면서 여전히 지식과 과학이나, 그리고 철학이나 넘겨다보는 나로선 그러한 ‘진리의 세계’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는다(나는 ‘상식주의자’이다). 다만, 나도 가끔은 삶의 지혜를 터득하곤 하는데, 행위와 행동과 제스처가 다르다는 것을 터득하는 것은 그런 지혜의 하나이다...

 

 

 

 

덧붙임: 인터넷서점에서 제공하는 목차에 따르면, 책에서는 D. H. '로렌스'를 '로런스'로 표기하고 있다. 이미 창비에선 로렌스의 <목사의 딸들>까지 백낙청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한바 있는데, 웬 난데없는 '로런스'인가? 로렌스에 대한 주체적인 이해의 결실이 '로런스'인가? 혹은 로렌스에 대한 현실변혁의 결과가 '로런스'인가? 인터넷서점에서 잘못 타이핑한 게 아니라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왜 쓸데없는 데 시간낭비들을 하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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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3-04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근래 읽은 글 중 가장 유쾌한 글입니다.

로쟈 2004-03-04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시 읽어보니 유쾌하군요...
 

 

 

 

 

최근에 나온 교양과학서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 스티븐 핀커의 <빈 서판 Blank Slate>(사이언스북스) 이다. 로버트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에 이어서 '사이언스 클래식' 시리즈의 두번째 권이다. 시리즈의 이름이 말해주는 바대로,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이 책은 무려 9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다(원서도 500쪽 가량된다). 

 

 

 

 

촘스키만큼 유명한 이 언어학자 혹은 인지과학자의 책들은 <언어 본능>(그린비, 1998)이 번역돼 있지만, 더 많이 번역소개될 필요가 있다. 다니엘 데넷과 함께 '핀커의 모든 책'이라 할 만큼 그의 책들은 수준있는 지식과 교양, 그리고 유익한 문제의식으로 넘쳐난다. 이런 교양서들은 우리를 똑똑하게 만들거나, 적어도 똑똑해진 것 같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러니 읽을 도리밖에(물론 분량에 대해선 할말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책이 번역중이라는 소식을 접한바 있기 때문에 책의 출간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출간소식이 반갑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좀 찜찜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건 책값(40,000원)보다는 책제목 때문이다. 물론 책값이 원서보다 두배 가까이 비싼 건 부담스럽지만(원서의 경우 핀커의 모든 책은 염가본이 나와 있고, 또 중고로는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로크의 tabula rasa를 의역했다는 blank slate를 꼭 '빈 서판'으로 옮겨야 했는지는 아쉬움이 남는다(제목은 책의 얼굴이거늘).

잘 아는 바대로, 타불라 라사(혹은 창비식 표기로 '타불라 라싸')는 '백지(상태)'란 뜻이고, 모든 철학교양서 및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 있다. 그러니 그냥 '타불라 라사'라고 하든가(이게 차라리 '서판'이란 말보다는 친숙하다), '백지(상태)'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서판'은 글씨를 쓰는 판이 아니라, 글씨를 쓸 종이를 깔아놓기 위한 판을 말한다. 이게 원의에 맞는 것인지도 좀 의심스럽지만, 그럴 경우에라도 '글씨판' 같은 말 대신에, 잘 쓰지 않는 '서판'을 번역어로 선택한 것은 아쉽다.

영한사전에 slate는 글쓰기용 '석판'으로 돼 있는데, 이럴 경우 이 '석판'은 '서판'과는 다른 것이다(전자는 글씨를 쓰는 판이고, 후자는 글씨를 쓰기 위한 판이다). 요컨대, 오역의 범주에 들어갈 소지가 있다. 이것이 내가 이 제목에 대해 찜찜해 하며 유감스러워하는 이유이다. 앞으로 이 책을 거명할 때 매번 '빈 서판'이라고 해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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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용어 중 jouissance는 그간에 '향락' '희열' 등이 사용됐지만, 홍준기의주장 이후(<라캉의 재탄생>, 102-3쪽) '향유'를 선호하는 이들도 많아진 듯하다(jouissance는 바르트도 사용하는 용어인데, 라캉과 바르트 중 누구에게 우선권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연배로 봐선 바르트가 빌어온 거 같기도 하고. 영어로 라캉의 jouissnace는 보통 enjoyment로 번역하며, 바르트의 jouissance는 enjoyment도 쓰지만, 더 자주 눈에 띄는 건 bliss이다.)

 

 

 


물론 최근에는 상식적인 '쾌락'을 번역어로 사용하는 이들도 있지만(라캉에 대해서 좀 안다는 이들로부터 욕을 먹기 십상이다), 기본적으론 그것이 pleasure와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쾌락'이 pleasure의 번역어로서 거의 굳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지 jouissance의 번역어로 불가능한 건 아니다. 여기서 jouissance의 번역어가 갖춰야 할 최소조건을 추출할 수 있는바, 첫째는 pleasure(쾌락)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쾌락원칙을 넘어선 '과도한' 쾌락이란 의미를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홍준기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주이상스의 번역어는 (1)고통 속의 쾌락 (2)죽음의 충동과 결합된 쾌락 (3)법적 개념인 용익권과의 연관성이 드러나야 한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그가 제안/고집하는 것이 '향유'이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데, 홍준기는 (3)번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1), (2)번은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말 '향유(享有)'는 '누려서 가짐'이란 뜻으로 원래 성적인 뉘앙스가 거의 없는 말이다. '자유와 풍요를 향유하다'라고 할 때처럼, 그것은 보통 어떤 긍정적인 가치를 풍족하게 소유하여 즐긴다란 의미를 갖는다. 즉, 거기에는 '고통'이나 '죽음'과의 의미론적 연관성이 희박하다. 만약에 그런 뉘앙스를 담고 있다면, '모든 국민이 자유와 풍요를 향유하는 사회'와 같은 '국가적' 캐치프레이즈는 넌센스가 될 것이다.

또 하나 '향유'란 말은 '소유'와의 연관성 때문에 계급적인 뉘앙스를 갖는 말이다. '향유'란 말에서 내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대리석 욕조에서 거품목욕하거나 명품쇼핑에 나선 여피족들인데, 거기에 어떤 '고통 속의 쾌락'이 있는 것인지(정말 비명을 지르며 목욕하고, 아주 괴로워하며 '이거 얼마나 하나?'라고 묻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법적인 뉘앙스를 살려서 우리가 '삶을 향유할 권리'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자기 삶을 망치고 패가망신할 권리'란 뜻으로 새기는 것인지?

원래 법학을 전공했던 홍준기로선 '법적 개념'과의 연관성 운운하며, '향유'를 제시할 때,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 자신을 위치시키며 자신의 기득권을 얼마나 '향유'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향유에는 어떠한 '고통'도 부재하다는 점에서, 나는 '향유'라는 번역어가 내키지 않는다. 그리고 번역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부족한 건 법학이나 정신분석학 공부가 아니라 국어 공부이다.

주이상스의 번역어로 내가 선호하는 것은 '향락'인데, 물론 그것이 완벽한 번역어이기 때문은 아니다(거듭 말하지만, 번역의 조건은 번역의 불가능성이다). 하지만, 내가 앞에서 내세운 두 가지 최소조건을 향락은 충족시킨다. 즉 (소유를 연상시키는) 향유와는 달리, (쾌락과 운을 맞추는) 향락은 쾌락과 구별되는 짝개념으로서 유용하다(나는 사실 '희열'에도 반대하진 않는다. 다만, '향락'이 더 편리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향락'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고통 속의 쾌락' '죽음 충동과 결합된 쾌락'의 의미를 여러 후보들 가운데 가장 잘 전달한다는 것이다.'향락산업'이란 말에도 암시되어 있듯이('향유산업'이나 '희열산업'은 없지만), 그것은 어떤 지나친/과도한 쾌락 추구라는 '부정적' 뉘앙스를 담고 있다. 즉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과도한 쾌락으로서의 향락을 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삶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나는 '향유'가 그런 뉘앙스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오역을 향유하는 번역서 <향락의 전이>의 최대 기여는 '향락'이란 번역어를 보다 익숙하게 만든 거라고 나는 생각하며, 주이상스의 번역어로 '향락'을 지지한다. '향유'를 고집하는 이들이 어떤 반론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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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2-25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서평이나 글을 볼때마다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번역의 오류를 집어내는 데는 일가견이 있음! 로쟈님의 글이 출판사에 흘러들어가서 앞으로 나오는 책에 반영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이다.
아니면 직접 번역계로 투신한다면, 로쟈님의 번역서는 다 사서 볼 용의가 있다.

로쟈 2004-02-25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른 번역서들을 내야겠네요^^ 사실 제가 오역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데 좀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건 분통이 터져서입니다. 보통 1-2만원 이상하는 고가의 인문 번역서들을 사서 읽는데, 전혀 이해할 수 없고, 게다가 그 원인이 엉터리 번역에 있다고 하면 정말 분통터질 일이지요(책은 환불도 안되고!). 우리식 출판관행이 단기간에 바뀔 리는 없겠지만, 하여간에 싸울 건 싸우고 얻을 건 얻어야겠습니다. 독자의 제몫찾기 차원에서!...
 

지난 12월초에 미국의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D. Rumsfeld)가 영국의 한 시민단체인 PEC(바른 영어쓰기 캠페인)로부터 ‘올해의 횡설수설상(Foot in Mouth)’을 받았다. 수상의 빌미가 되었던 2003년 3월의 한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There are known knowns. These are things we know that we know. We also know there are known unknowns. That is to say, there are things that we know that we don't know. But there are also unknown unknowns. There are things we don't know we don't know."



이 연설은 지난 10월에 방한했던 슬라보예 지젝의 한 강연문(<생물유전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에서도 인용된바 있는데, 지젝의 분석에 따를 때, 럼스펠드는 여기서 일종의 지식의 유형학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그에 따르면, 우리에겐 (ⅰ) known knowns(이미 알고 있는 걸 아는 것) (ⅱ) known unknowns(아직 모르고 있는 걸 아는 것) (ⅲ) unknown unknowns(아직 모르고 있는 걸 모르는 것)이라는 3가지 종류의 지식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분류에서 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최강국의 국방장관이 (무)의식적으로 억압/배제하고 있는 마지막 한 종류의 앎이 있는바, 그것이 바로 (ⅳ) unknown knowns(이미 알고 있는 걸 모르는 것)이다. 지젝은 바로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지식(knowledge which doesn't know itself)”으로서의 프로이트적인 무의식이라고 말한다. 즉, 그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부인된 믿음과 가정들이다.

 

2003년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라크전쟁’(이런 중립적 표현은 사실 부적절하다. ‘이라크공격’ 혹은 ‘이라크침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의 해로 기억될 것인바, 그 전쟁을 주도했던 부시행정부(와 미국인들)에 의해서 간과된 이 타자적 앎으로서의 ‘무의식’은 최강국의 이성, 혹은 초자아가 놓치고 있는 어떤 앎이자, 실재의 중핵이다. 9.11과 이후의 국제정세를 다룬 책들은 제법 나와 있지만, 이러한 중핵을 건드리고 있는 책이 지젝의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Verso, 2002)이다.  

그리고, 9.11 1주년을 맞이하여 그와 관련된 다섯 편의 에세이를 묶은 이 책의 국역본이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란 제목으로 지난 10월에 나온바 있다. 하지만, 이 우리말 번역본은 대개의 지젝 번역서들과 마찬가지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책이어서, 유감스럽게도 지젝의 고뇌와 만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책읽기의 고난 속에서 허우적거리게만 할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원저가 좋은 책이라 한들 이 번역본을 추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내가 바라는 바는 제대로 된 번역본이 다시 나오는 것이다).

대신에 여기서는 이 책에서의 인상적인 주장 하나만을 뭉뚱그려서(약간은 번안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이후의 ‘그저 그런 삶(mere life)’을 ‘진정한 삶(real life)’과 대비시킨다. ‘그저 그런 삶’은 자신의 삶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며, 자신의 기득권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자자손손) 보존되기를 매주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자유민주주의인바, 지젝이 보기에, 자유민주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는 일이다(미국의 대통령은 한달씩 여름휴가를 떠난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이다”(Liberal democracy is the party of non-Event).

그러한 ‘그저 그런 삶’의 경제적 버전은 ‘아무일 없는 삶’(흔히 ‘여유로운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열심히 일했다고 저 혼자 ‘떠나는 삶’이며, 무료한 삶을 명품 브랜드들로 치장하느라 등골이 빠지는 ‘럭셔리한 삶(luxurious life)’이다(이상은 지젝의 용어들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본질적으로 아무런 이벤트도 없는 삶을 끊임없이 이벤트화하고 스펙터클화하기 위해 난리법석을 떠는 것이 포스트모던한 후기 자본주의의 삶이다.

사실, 지난 한해 우리사회에서 유행어가 되었던 ‘10억’은 이 ‘럭셔리한 삶’에 진입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을 지시하는바, 어느 사이에 ‘진정한 삶’에 대한 기대나 열망 대신에 우리 삶의 풍경이 된 것은 여기저기서 억! 억! 하는 ‘10억의 삶’, ‘럭셔리한 삶’에 대한 집요한 탐욕이다(물론 여기서의 ‘10억의 삶’은 지극히 서민적인 레벨에서의 목표치이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호사스럽다 하더라도 ‘럭셔리한 삶’의 본모습은 아무일 없는, 더불어 의미도 없는 ‘그저 그런 삶’일 뿐이며, 그것은 살아 있지만 이미 죽어 있는, 산송장(living dead)들의 적극적인 가장(假裝)이자 자기연출에 불과하다.

이러한 풍경을 두고, 지젝은 그가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묻고자 한다. “당신은 진정 살아있습니까?” “(유복한 나라의 국민들이여!) 9.11 이후에도 진정 당신들은 살아있습니까?” 그러한 물음이 전제하는 것은 ‘그저 그런 삶’과 ‘진정한 삶’의 존재론적 차이 혹은 거리이다. 단순히 ‘그저 있는 것들’(=얼빠진 것들) 혹은 ‘좀 있다고 하는 것들'(well-being족들)은 ‘정말로 있는 것’이 아니며, 멀쩡히 숨쉬고 두발로 걸어 다닌다고 해서 정말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열린책들)의 러시아 작가 자먀찐의 표현을 빌면, 인간 중에는 ‘살아있고-죽어있는’ 인간과 ‘살아있고-살아있는’ 인간이 있다. 그는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고 기계처럼 행동하는 ‘살아있고-죽어있는’ 인간과 달리 실수와 탐구와 질문과 고통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을 ‘살아있고-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분류한다. 이 차이에 대한 예민한 의식, 자신이 자리잡고 있는 곳에 안주하며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로 있어야 할 곳에 나는 있지 않구나라는 의식에서부터 ‘진정한 삶’으로의 이행을 위한 준비는 마련될 수 있다.

 

 ‘진정한 삶’이란 사건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살아있고-살아있는’ 인간들의 실수와 탐구와 질문과 고통을 대가로 얻어지는 사건이란 러시아말로 ‘싸브이찌에(sobytie)’, 곧 ‘함께-있음(being-together)’이란 뜻이다. 때문에 그것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력공격과 같은 유사-행위와는 가장 거리가 멀다. 진정한 행위(action)란 ‘그저 그런 삶’에서 ‘진정한 삶’으로 나아가는 결단을 담지하고 있는 행위이다.

그러한 이행의 길(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초자아의 길(the way of superego)과 행위의 길(the way of the act). 제국주의의 압제에 대항하기 위한 9.11의 테러리스트들의 행위나 <죄와 벌>에서 19세기 러시아의 전제주의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라스콜리니코프의 노파 살해가 (부정적이면서도 불가피한) 초자아의 길을 보여준다면(‘살아있는 삶’(zhivaja zhizn')은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핵심적인 주제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진정한 행위의 길이며, 함께-있음의 윤리이다. 이것이 9.11의 교훈으로서 우리가 깊이 새겨두어야 할 ‘unknown knowns’이다.


하지만, 럼스펠드의 사례에서 보듯이, 이 ‘unknown knowns’가 국제사회에서 진지하게 공유될 가능성은 아직 희박해 보인다. 불운하고도 유감스럽게도, 9.11이라는 실재의 충격에 의해서 ‘진정한 삶’으로의 이행이 촉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저 그런 삶’에 대한 집착이 더 강화되고 미국의 패권주의만 더 심화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한 패권주의에 동참하기 위해서, 아니 그러한 패권주의에 한 대 얻어맞지 않기 위해서, 새봄엔 이라크에 한국군이 파병된다고 한다. 이건 좀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살아있지만-죽어지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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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4-10-20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오역에 관한 따끔한 질책들을 보다가 로쟈님의 서재를 즐겨찾게 되었습니다.
지젝이 제시했다는 '그저그런 삶'과 '진정한 삶'에 관한 부분이 제 온몸을 때리네요.
평소에 무언가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내가 '그저그런 삶'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지젝의 그 책을 읽고 싶은데 지금으로서는 원서를 읽을 수밖에 없는 것 같군요. 철학적 배경지식 없이 지젝의 원서 읽기가 가능할까요? (참, 이 글 퍼가도 될까요?)

로쟈 2004-10-20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적 배경지식 없이 지젝의 원서 읽기가 가능할까요?" Yes, if you read(struggle with) him, you can get 철학적 배경지식 from him. "참, 이 글 퍼가도 될까요?" Why not?
 

지젝의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를 읽고 있다. 이미 지젝의 책들은 오역으로 악명이 높은바, 이 책 또한 예외는 아니며, 차라리 나오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책이다. 그렇게도 재미있으며 도발적인 책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엉터리로 무책임하게 번역되는 것인지 의아스럽다. 역자는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몇몇 주요 인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나르시시즘이 엉터리 독해력과 결합해서 빚어내고 있는 이 '오역의 모험'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그걸 독자는 언제까지 견뎌내야 하는 것인지. 지겨운 지젝! 물론 지겨운 건 지젝이 아니라 그 불성실한 번역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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