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게이자부로의 <존재와 언어>(민음사, 2002)와 김상환의 "언어에 대하여",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창작과비평사, 2002)를 읽었다. 분량의 차이는 있지만, '언어'에 대한 계발적인 사고를 부추긴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내가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소쉬르가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줄곧 강조하는 '랑그(langue)'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아나그람 연구 등을 통해서 문제화하는 '랑가주(langage)'로서의 언어이다. 딜런 에반스에 따르면, 라캉이 말하는 언어도 랑그가 아니라 랑가주이다.

 

 

 

 

물론 이전에 지적했다시피, 랑그/랑가주의 구별은 불어에만 있다. 우리말로는 '언어/언어할동'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역시나 그 맥락적 의미가 다 전달되지는 않는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소쉬르에게 랑가주는 인간이 가진 상징화 능력과 그 활동들(언어, 행위, 음악, 그림, 조각) 등이며, 넓은 의미의 말에 해당한다."(122쪽) 또 "랑가주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해주는 표지이며, 인간학적 또는 사회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진 능력으로 간주된다."(123) 이것을 마루야마는 촘스키와는 다른 의미에서 심층의 언어라고 부른다. 보다 알기 쉽게 얘기하면, 랑그는 랑가주의 일부로 포함된다. 그래서 랑가주에는 '랑그화된 랑가주'('랑가주1'이라 부르자)가 있고, '랑그화되지 않는 랑가주'('랑가주2'라 부르자)가 있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랑가주가 개별 사회에서 독자적인 구조가 되고, 특정의 공시적인 제도가 된 것을 랑그라고 한다. 랑그는 여러 언어에 공통되는 원리적 기호 체계이며, 개인의 행위를 규제하는 조건과 규칙의 총체인 가치체계이다."(123쪽) 그리고 이 "랑가주는 랑그 이전의 상징성의 활동으로서, 음성언어에 앞서는 원에크리튀르(archiecriture)나 코드 없는 무용인 몸짓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126쪽) 이 랑가주를 적극적으로 체화하고 있는 것이 바로 상징적 언어로서의 시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의 시평에 대해 검토하면서 김상환이 지적하는 것 또한 이 랑가주로서의 시적 언어가 아닐까? 그것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시적 언어는 언어의 안과 밖이 나뉘는 경게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김수영이 말하는 '언어 이전'은 그 자체로 완결된 기의의 질서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접경적 사태를 가리킨다. 언어를 이 접경적 사태 속에서 일어나는 기록의 경제학으로부터 성찰하는 것, 그것이 시적 사유의 영원한 과제이다."(129) 인용문에서 '언어 이전'의 카오스적인 질서란 소쉬르나 마루야마가 얘기하는 랑그화되지 않은 랑가주, 즉 '랑가주2'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랑가주1'과 '랑가주2'는 각각 자연언어와 상징언어에 대응할 것이다.

상징언어로서의 랑가주는 마루야마가 말하는 인간적 과잉의 산물이다. "나의 견해는 인간만이 앞에서 본 것 같은 본능의 도식 이외에 또 하나의 게슈탈트를 과잉물로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차 분절의 결과 생기는 <언어 구분 구조>이며, 그 그물눈은 바로 <상징화 능력과 그 활동>이라는 넓은 의미의 말에 따른 게슈탈트이다."(165-6쪽) 여기서 '상징화 능력과 그 활동'이나 '넓은 의미의 말'은 전부 랑가주에 해당한다. 그러데 이 상징언어라는 과잉, 혹은 괴물은 우리의 일상성에 대한 폭력에 다름아니다. "시어란 일상어에 가해진 조직적인 폭력"이라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주장을 떠올려 보라. 때문에 일상생활속에서의 일상적 자아는 일상적인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일상적 의식의 수준에서 이러한 과잉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 즉 절대적 언어를 상대적 언어화하여 제한할 필요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상대적 언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고 무엇인가를 전제하는 상대적 언어는 그런 절대적 언어가 선물한 의사소통 가능성 안에서, 그러나 그 가능성을 제한하고 왜곡하면서 성립한다. 문맥을 만들고 문법을 수립하면서, 지시관계를 확립하면서 절대적 언어를 상대화한다.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는 것, 그것이 자연언어의 탄생내력이다. 안정성과 도구성을 띤 자연언어는 절대적 언어의 외상적 폭력에 대한 반-폭력에서 유래한다."(김상환, 133쪽)

하지만 이렇듯 상대화된 언어, 상대적 언어는 메타-일상적 차원, 즉 초월론적인 사유의 지평에서는 불편하고 불충분한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제기되는 것이 자연언어에 대한 철학적 비판인 바, 그 비판과 극복은 두 갈래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한 갈래는 자연언어가 가진 의미의 모호성을 비판하면서 수학적인 인공언어를 설정하는 방향이고(구조주의나 분석철학), 다른 한 갈래는 자연언어가 가진 의미의 빈곤성을 비판하면서 시적 언어, 비유적 언어, 즉 상징언어를 전면화시키고자 하는 방향이다(니체 이후의 해체론). 전자는 자연언어에 남아있는 시적 언어의 잔재(찌꺼기)조차 말끔하게 제거하고자 하며, 후자는 '닳아빠진 동전'과도 같은 자연언어에 새로운 생명(=은유적 언어, 상징적 언어, 무의식의 언어)을 불어넣고자 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구조주의는 어떤 변형된 이상언어론, 어떤 형식주의적 초월론이다. 구조주의의 핵심은 '시적이거나 사적이거나 모두 수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로 집약된다. 그것은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을 인정하지 앟는, 다만 아폴론적 개방성 안에서만 이해된 언어관에 기초하는 이론이다. 여기서 시적인 것, 그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은 객관적 형식의 질서로 환원되어 버린다."(김상환, 147쪽) 포스트-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구조주의적 사유에서 배제되고 간과된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적 심층에서의 맹목적인 우연과 의미의 모호성을 직시하고 긍정하는 것이다.

 

 

 

 

언어는 우리 존재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동일성도 거부한다. 오직 유일한 것은 영원회귀일 뿐.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이> 회귀하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을 향하여 회귀하는 것도 아니다. <영원회귀>는 반복이며, 반복되는 것만이 생성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바로 삶의 다양한 모습이며, 우연이며, 맹목적이기도 한 반복과 차이에 대한 긍정인 것이다."(마루야마, 257쪽) "이러한 활동에 관여하는 인간의 기쁨은 최고의 힘을 향한 의지에 의해 <생성에 존재의 각인을 찍는 것>, 즉 카오스가 기호화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인데, 동시에 우리는 이것이 <존재자>가 되어 정지하는 것도 항상 부정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시지포스적인 끝없는 운동의 반복이다."(263쪽) 때문에, 리차드 로티의 말을 빌면, 강한 인간 - 그것은 곧 강한 시인(strong poet)에 다름아니다...

03. 0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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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말하도록 하자. 니체에 대하여가 아니다.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보다 反니체적인 것이 있을까? 당신에 대한 사랑만큼 우스운 것이 또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할 뿐이다. 우리는 니체를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니체에 대한 사랑은 이만 걷어치우도록! 하여 나는 한편의 시와 그 주석을 니체에게 바치기로 한다.

⁂ ⁂ ⁂

모든 것이 되기 위하여 더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나는 나의 과거는 나의 하루는
미친 척한 찔레나무와 찔레나무 한 그루를 기어
올라가는 벌레 같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건
미친 생각이다 나는 안다

간혹 어깨가 결린다 무거운
돈가방이라도 들고 어디론가 튀고 싶다
꿈이다 아랫배가 고파오고 기온이 떨어진다
모든 것은 꿈과 같다 어젯밤에 본 영화 속의
치킨처럼 목 잘리고 잘 구워진 치킨처럼
잘만 하면 너도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어
나는 결린 사람

나는 꿈에 자주 결석하고 애린에 물들지 않는
다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표백된 영혼
나는 은근히 다리를 절면서
저 온갖 벌레 같은 인간들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척한다
나는

미칠 지경이다
간혹 나는 사랑의 유언이며 시체가 아닐까
나는 벌레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어이
기어오르고 싶다 자작나무 오동나무 오르지 못할 나무
내게 필요한 날들을 돈다발처럼 세어본다
꿈이다
내가 이 지구를 끌어당기는 힘

이걸 끌고 어디로 가나

어쩌면 이보다 편한 것이 없을 것이다
흥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없다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나는 나의 과거는 과거의 한 조각은
기온이 떨어지면 따스한 곳을 찾는 꿈처럼
무말랭이처럼 입을 다문다

미친 척한 찔레나무와 찔레나무 한 그루를 기어
올라가는 벌레와 꽁무니에 고무풍선처럼 매달린 지구에
생각만 미친다 미친 생각이다 그건

왜 간혹 나는 어깨가 결리는 것일까?

⁂ ⁂ ⁂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믿음에서부터 우리의 배움은 시작되어야 하리라. 이것이 나이 서른에 내가 배운 것이며 맨먼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의 몰락(Untergang)은 시작된다.

내가 꿈에 자주 결석하고 애린에 물들지 않는 것은 내가 결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간혹 주체하지 못할 애린에 빠져 어디론가 튀고 싶어하는 것은 내가 결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존재조건을 극복하고 넘어가는 사람(Űber-mensch)이 아니라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Unter-mensch)이다. 이걸 구상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높이뛰기나 허들(장애물) 경기를 떠올리면 된다. 넘어지는 사람도 생의 정점에서는 한순간 넘어가는 사람 못지않은 날렵한 동작을 취한다. 그리고는 거의 넘어갈 뻔한다. 그러나 그게 전부이다. 넘어지는 사람은 여린 마음에 한 뼘만큼 이 지상의 중력에 굴복하는 것이며, 그래서 결국은 넘어가는 일 대신에 걸려 넘어져 주저앉는 일을 자신의 숙명으로 선택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나는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아.”결린, 기어이 걸린 사람.

결린 사람은 기어이 기어오르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기어이 기어오르(려)는 그는 마치 시지프의 운명처럼 그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렇듯 명징한 의식 속에서도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그는 이 헛된 수난에 입문하게 된다. 편안히 나자빠져 있던 그가 문득 기어오르는 일이 혹 자기 생의 소명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이 의문에 걸려들어 걸려 넘어진 이후의 삶은 이미 종친 삶이다. 그는 이미 사랑의 시체인 것이며 고작해야 사랑의 유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와는 다른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또한 위대한 삶이기도 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점은 인간은 다리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이 가진 사랑받을 수 있는 점은, 그가 <과도Űbergang>이며 <몰락Untergang>이라는 점이다. 나는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살 줄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한다.(...) 인식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인이 살 수 있도록 인식하고자 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서 모든 것들이 자기 내부에 들어올 수 있도록 영혼이 넘쳐흐르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것이 그의 몰락이 되는 것이다.”(최승자 옮김)


 

 

 

하여 우리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며, 모든 몰락하는 것들에 연민과 우정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거 말고는 도대체가 더 적을 말도 없는 무능력한 나로서는 그저 두 권의 책을 소개하는 걸로 나의 몰락을 대신하고자 한다. 나는 다리이지 목표가 아니다. 나를 통과해서 읽어야 책은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린비)와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이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니체와의 우정을 제안한다. 해서, 내가 할일은 끝났다. 더는 할만한 일도 없지만...

2003. 0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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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들을 뒤적이다가 10년도 더 전에 쓴 글 중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 놓는다. 오랜만에 읽어보니까 '격세지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1.
바람도 없는데 꽃이 하나 나무에서 떨어진다. 그것을 주워 손바닥에 얹어놓고 바라보면 바르르 꽃이 훈김에 떤다. 화분도 난다. 꽃이여!”라고 내가 부르면, 그것은 내 손바닥에서 어디론지 까마득히 떨어져 간다./ 지금, 한 나무의 변두리에 뭐라고 이름도 없는 것이 와서 가만히 머문다. (김춘수, <꽃2>)

이 시는 김춘수의 다른 초기시들과 마찬가지로 인식행위, 곧 명명행위의 어려움을 주제로 하고 있다. 우리는 함부로 대상을 인식, 혹은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시들에서 꽃은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되고 “얼굴을 가린 신부”(<꽃을 위한 서시>)가 된다. 우리는 이 꽃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이름을 불러주고 싶지만, 사랑하고 싶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신부는 언제라도 “떨어져 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두 행에서 내밀한 고통이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그 고통은 불가능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그 불가능한 사랑을 우리가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2.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의 <남해 금산>. 이 시는 사랑의 운명, 즉 필연적인 결렬과 파국을 간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나의 사랑은 ‘한 여자’를 ‘그 여자’로, 다시 말해 의미있는 존재로 만들지만, 그 의미란 자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코 영속적이지 않다. 이것은 사랑이란 의미관계가 상호주관성에 바탕한 때문이기도 하다. 오롯한 주관성(에고)들의 밀월은 서로의 주관성이 해소․소멸되어 버리지 않는 한 너무나도 뻔한 결말에 봉착하고 만다. 사랑은 결국 ‘나 혼자 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에 귀착되고 마는 것이다.

3.
물론 생존기계로서의 인간은 종족보존이라는 유전적 사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남녀 간의 짝짓기가 가능하려면 이 건장한 두 기계가 제대로 작동해야만 한다. 해서 대뇌에서는 두 기계의 원활한 접촉을 위해 사랑의 감정을 유발하는 호르몬(근래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도파민, PEA 등의 호르몬으로 구성된 ‘암페타민’이라는 중추신경 각성제가 작용한다)을 내보낸다. 여기까지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정작 문제는 필요 이상의 호르몬이 분비되는 경우이다. 이런 류의 사랑은 감정의 질병, 좋게 말해서 감정의 사치임을 면치 못한다. 방법은 자신을 제어하는 수밖에 없다(사실 나는 어떤 류의 바이러스가 이 질병의 주범인지는 언젠가 밝혀지리라 믿는다).

4.
결국 우리의 계산적인 두뇌(지능)를 믿는 도리밖에 없다. 여기서는 모범적인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하기로 한다. ①은 정현종의 <그 여자의 울음은 내 귀를 지나서도 변함없이 울음의 왕국에 있다>이고 ②는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둘째 단락이다.

① 나는 그 여자가 혼자
있을 때도 울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혼자 있을 때 그 여자의
울음을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여자의 울음은 끝까지
자기의 것이고 자기의 왕국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러나 그 여자의 울음을 듣는
내 귀를 사랑한다

②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①에서 “그 여자의 울음”이 나와 무관한, 그래서 적대적일 수 있는 것임은 우리가 줄곧 확인해온 바다. 그럼에도 그 울음의 유혹은 뿌리치기가 힘들다. 이 난국을 시적 화자는 “내 귀”를 사랑하는 것으로 극복해낸다. 귀를 너무 사랑해서 잘라내는 일만 없다면 그럭저럭 무난한 방법이지 싶다. ②는 아름답다. “내 사랑”의 종말을 믿는 것은 비극적이지만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일시적인 사랑의 유혹을 시적 화자는 견고한 “기다림의 자세”로 극복해낸다. 이런 건 배워둬야 한다! 그래도 당신이 입맛을 다시고 있다면, 오호 애재라, 우리는 갈 데까지 가는 수밖에.

5.
너의, 살 속으로 들어간다. 투명한 너의 몸이 나를 감싼다. 나를 보태고도 넘치지 않는 너의 몸! 찢어지는 아픔도 피 흐르는 고통도 없는 너의 몸 속에서 나는 숨이 가쁘다. 호흡이 곤란하다. 내가 나의 몸으로 남아 있으려고 몸부림칠수록 숨은 점점 끊어져 오고 네 몸은 내 몸을 틈없이 너무나도 꼭 맞게 마신다.
  네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너는 내 속으로 들어왔었다. 그걸 알았을 때 내 몸은 네 속에서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나를, 내 몸을 찾을 수 있을까? 너를 다 퍼내고 남은 발라진 생선가시일까? 내 몸은, 네 몸이 증발하고 남은 얼룩일까? 너의 살 속으로 들어갈 때 이미 나는 네 몸에 젖어 있었다. 물 속의 물방울이여.

채호기의 <물 속의 물방울>. 결국 당신은 보게 된다. “발라진 생선가시”로, “얼룩”으로 남은 자신의 모습을!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당신의 생이 ‘지독한 사랑’에 거덜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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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즉 2005년에 개최되는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한국은 주빈국 역할을 하게 된다. 그 준비의 일환으로 얼마전 ‘한국의 책 100권(종)’이 발표되었다. 당초 ‘한국의 명저(베스트) 100권’을 엄선할 예정이었다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냥 100권’이 돼 버렸다. 놀라운 건 이 100권의 책을 1년 안에 번역 출간한다는 것. 선정위원회 황지우 위원장의 표현을 빌면, ‘문화의 삼풍백화점’이 우려되지만, “불가사의한 순발력과 저력에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해서 우리도 더불어 놀라고, 우려하고, 기대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런 류의 호들갑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출판/번역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지원이 배가될 수 있다면,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관심을 갖는 쪽은 시와 철학 분야인데, 먼저 기존에 많이 번역된 시인/작가들을 제외한다는 방침하에 선정된 시집들은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민음사),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오규원의 <사랑의 감옥>(문학과지성사), 이성복의 <남해금산>(문학과지성사), 천상병의 <주막에서>(민음사), 그리고 최승호의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열림원)로서 모두 7권이다.

아쉬운 것은 이들 시집들이 모두 독어(김수영, 신경림, 오규원, 천상병), 스페인어(기형도, 최승호), 프랑스어(이성복)로 번역되기 때문에, 내가 직접 읽어볼 수 없다는 것(나는 김소월, 서정주, 김춘수, 김지하 등의 영역시집과 <님의 침묵>의 체코어역 시집을 갖고 있다). 짐작컨대, 이성복이 직접 번역에 간여할 듯한 <남해금산>이 가장 신뢰할 만하지 않을까 싶은데, 읽어보고 싶은 시집은 스페인어역 <입 속의 검은 잎>이다.

철학쪽으로 선정된 책들은 대개 최근에 나온 책들이다. 김영두의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가 작년에 나온 책이고, 이대출판부에서 나온 <동아시아여성의 기원>도 재작년 연말에 나온 것이며, 이승환 교수의 <유교 담론의 지형학>(푸른숲)은 불과 지난 1월에 나온 책이다. 아마도 내용과 더불어 번역의 용이성이 고려된 선정인 듯하다.하지만, 재미철학자인 이광세 교수의 <동양과 서양, 두 지평선의 융합>(길)에 실린 글들은 대개 영어로 먼저 씌어진 걸로 아는데, 영어로 번역한다고 하니까 좀 어리둥절하다. 역시 영어로 (아마도 먼저) 씌어진 김재권 교수의 <심리철학>(철학과현실사)처럼 독어로 옮겨진다면 모를까.

철학분야 선정 14권의 책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고미숙의 <열하일기 -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와 <니체가 뒤흔든 철학 100년>(민음사)이다. 얼마전 ‘회사원’ 강유원씨로부터 모욕에 가까운 비난을 받은바 있는 <열하일기>는 프랑스어로 번역되는데, ‘들뢰즈의 언어’로 번역된다고 하니까 현지인들에게 좀 흥미를 끌지도 모르겠다(‘박지원의 언어’는 누가 번역할는지 궁금하지만). <니체>는 당당하게 독어로 번역되는데, 현단계 한국의 서양철학 연구수준을 대표할 만한 책으로 선정된 듯하다(이 대표성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론도 없지 않지만). 번역에는 아마도 독일철학 박사들이 여럿 동원되어야 할 듯하다...

비록 관료적인 ‘한건주의’식의 번역사업이긴 하지만, 우려보다는 기대를 충족시켜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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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3-16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할 수 있을지 정말 우려되는군요. 번역의 질이 좋다고 해도, 몇몇 책들은 그 내용으로 비아냥이냐 받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4-03-17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기대할 건, '불가사의한 저력'인 것이죠. '비아냥' 정도의 반응도 '반응'아닐까요? 제 짐작엔, 그냥 정적 속에 파묻힐 것 같은데...

포월 2004-03-28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야 보다 철학 분야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공 탓보다 어이없는 탓이 크겠습니다. [열하일기..]는 사실 굳이 경직된 태도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철학적인 것(?)으로 봐줄만한 것인지 언제나 의심스러웠습니다. [니체] 역시 실린 논문들의 수준이 매우 고르지 않아 부적절해 보입니다. 이런 책이 포함되었다는게 아무리 학문과 현실의 논리가 얼마간은 분리되어있다고 하더라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모욕감을 줄 수도 있는 듯 합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어떤 반응이 나오건 상관없이...
 

 

 

  

 

오늘자(2003.11.1) 한겨레의 <책과사람>란에 고정칼럼인 '김재기의 책읽기'는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를 다루고 있다. 모리스는 영국의 저명한 동물행동학자로서(그는 노벨상 수상자인 니코 틴버겐의 제자이다) 인간을 대상으로한 대중적인 동물행동학 저서들로 유명하다. 물론 우리에게도 꽤 많은 책들이 번역 소개돼 있다(한 가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재미있는 그의 자서전이 절판된 지 오래됐다는 점이다. 김석희 번역이니까 번역도 날림이 아닌데. 기본 부수 이상은 팔릴 만한 책이 사장돼 있다는 건 좀 안타까운 일이다. 내 기억에 원제는 '동물들과의 나날'인데, 우리말 제목은 촌스럽게도 '옷을 입은 원숭이'였다. *<나의 유쾌한 동물 이야기>로 재출간됐다).

칼럼의 필자는 철학자로서 '동물+알파'로서의 인간 공식에서 동물(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동물행동학이나 이후의 사회생물학(그리고 진화심리학)에 대해서 불편한 심정을 숨기지 않는데(그 불편함을 가중시키는 것이 이러한 책들의 '재미'이다), 칼럼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돼 있다.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인문학적 담론들을 실증적인 생물학적 탐구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생물학의 오만은 유전자의 해독이 모든 수수께끼를 풀어줄 것이라는 망상처럼 해롭고 위험하다. 또 그것은 성경의 자구가 모든 지적 탐구를 대신해야 한다고 믿었던 낡은 신학의 강요만큼이나 폭력적이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탐구는 자기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 어떤 진리도 한계를 벗어나면 오류가 된다는 변증법의 지침이 여기서도 필요하지 않을까?"

사회생물학이란 사회성 동물들에 대한 진화론적 행동과학이다. 그리고 인간이 사회성 동물의 일종인 이상, 그 사회적 행동의 많은 부분이 사회생물학에 의해 해명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창시자인 에드워드 윌슨도 강조하고 있듯이,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이며, 그것은 환경에 대한 다양한 적응기제의 산물이다. 때문에 리처드 도킨스 같은 경우도 인간에게서 생물학적 유전자(Gene)과 대비되는 문화적 유전자(Meme)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칼럼 필자의 오류는 사회생물학을 몇몇 테제적 주장으로 단순화시켜서, 그것을 모든 인문학적 담론과 모든 지적 탐구를 대체하고자 하는 오만한 주장으로 환원시킨 데 있다. '동물+알파'에서 알파는 동물성에 부가된 것이지, 결코 그것과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바람직한 철학적 태도는, 칸트가 뉴턴의 물리학에 대해서 그랬듯이, 현대 생물학의이론과 주장들을 이해/소화해서 그것이 갖는 철학적 함의를 반성하는 일이다.

그건 분자생물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사회생물학과 분자생물학을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사실 둘의 전제는 많이 다르며 사이가 그다지 좋은 것도 아니다. 물론 몇몇 유전학자들은 유전자결정론식의 주장들을 하지만,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오늘날의 분자생물학은 인간이 유전자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더 지지하는 듯하다(게놈 프로젝트 결과가 말해주듯이, 유전자의 위치정보는 그 복잡한 '기능작용'에 비하면 사소하다). 따라서 '낡은 신학' 어쩌구 하는 논리는 매카시즘적인 배제의 논리일 따름이다.

모든 지적 탐구에 대해서 폭력적인 전횡을 일삼아온 것은 사실 철학적 담론이었다. 물리학과 심리학에서의 '혁명' 이후에 철학이 차츰 분수에 맞게 '언어' 분석에나 몰두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따라서 그러한 자기 자리지킴에의 요구가 향해야 하는 것은 생물학 '혁명' 이후의 철학이지 생물학이 아니다.

이번에 방한했던 지젝의 강연문 중 "유전공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를 읽고 감화를 받은 적이 있는데, 지젝은 유전공학과 인지과학의 최신 성과들과 쟁점들을 섭렵하면서 그것이 정신분석과 어떻게 접속될 수 있는지, 정신분석학적으로 어떻게 재독해될 수 있는지를 다루었다(덕분에 나는 스티븐 핀커의 책을 여러 권 샀다, 살 수밖에 없었다). 철학의 '낡은 경전들'에 대한 자구풀이로 철학을 대신하면서 "그 어떤 진리도 한계를 벗어나면 오류"가 된다고 변명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해야 할 일들과 읽어야 할 책들은 산더미이다.

도전은 거부되거나 회피되어서는 곤란하다. 사회생물학(진화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은 철학에 대한, 인간학적 담론에 있어서 철학의 권위와 우선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라캉은 정신분석학을 통해서 철학을 해소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이 도전에 제대로 맞서는 일은 '적'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제자리에 있을 테니까, 너도 제자리에 있어라"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복지부동의 자세이다. 그러한 자세로는 동물성이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침식하는지, 우리는 왜 맨날 이 모양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제 필요한 것은 '영혼의 담론'만으로 인간을 논의해왔던,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논의만으로 사회적 기득권을 향유해 왔던 이들이(철학교수들은 그런 점에서 목사들과 상통한다) 물정을 좀 알고, 정신을 차리는 일이다. 게으른 것은 자유이지만, 그것을 현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보기에 흉하다...

03.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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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26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유쾌한 동물 이야기'를 읽다가 하도 재미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나 보려고 들어왔더니, 역시나 '로쟈와 나귀'(나귀를 몰고다니는 로쟈의 모습, 아니면 로쟈를 끌고다니는 나귀의 그림이 연상된다는, 하여간 제 이미지-세계 속에서는 짝을 이룰 법한 두 대상)의 글들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벌써 몇년 지난 글인데도 관점이 뚜렷해서 '감화'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젝한테도 고마워해야겠군요)

아마도, 철학하는 사람들이 과학을 섭렵하는 속도보다 과학하는 사람들이 철학을 흡수하는 속도가 더 빠를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