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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알렉스가 안나에게 묻는다. 안나는 등을 돌린 채 세차게 머리를 젓는다. 레오(스) 카락스의 사랑의 3부작 중 두 번째 영화 <나쁜 피> 한 장면이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이 문답의 바로 이전 장면, 즉 문밖에서 담배를 물고 서성이던 알렉스가 라디오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모던 러브>가 나오자 거리를 질주하는 장면이다. 처음엔 비틀거리며 걷다가 몇 개의 블록을 마치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질주하던 그는, 음악이 멈추자 그대로 정지하고 다시 안나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리고는 묻는다. "안나,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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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완성되(면서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 그것은 반시간적 사랑이 아닐까? 순간이나 영원이란 것은 시간적인 계기이지만 동시에 반시간적 계기이다. 그것이 반시간적인 것은 시간의 고유한 운동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순간은 영원의 무한수축이고 영원은 순간의 무한팽창이지만 이 수축/팽창의 운동은 자연적 시간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때의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동형론적 형질전환이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이렇듯 반시간적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감성적 사랑이라는 개념적-정념적 테두리 안에서 다 파악될 수 없다. 즉 그것은 감성적 사랑을 초과한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라는 이 초감성적 사랑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이다. 그것을 정념의 형이상학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정념의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의 이념이 그러하듯이 현실이 아닌 오직 가상(이미지) 속에서만 자신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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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 사랑, 즉 미적 가상이 아닌 현실 속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진화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만족할 만한(agreeable) 상태, 즉 행복을 위한 것이다. 행복이란 "정상적으로 생겨 먹은 생물체의 경우 ①자기보존의 본능과 ②종족보존의 본능, 이 두 가지의 충족을 의미한다. 본능 ①의 충족은 개인적인 생존을 뜻하므로 음식과 주거의 문제이다. ②의 충족은 종(족)의 유지와 번영을 뜻하므로 성적 욕구의 문제이다." 여기서 대개의 경우 자기보존의 본능(생존의 욕구)이 종족보존의 본능(생식의 욕구)보다 먼저 고려된다. 즉 생식의 욕구라는 생물학적 기제의 정신적(정서적) 대응(수반)으로서의 감성적 사랑은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는 사랑이다(사랑을 팔고 사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초감성적 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사랑이겠다(사랑에 죽고 못사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은 (한)순간에 자신이 완성되기를 열망한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도망간다(혹은 죽고 만다). 하지만 사랑을 잊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다(귀신이 되어 되돌아온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나쁜 피, 우리의 생-본능을 관장하는 '나쁜 피'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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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사랑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육체를 가진 존재이어서이다. 즉 육체(나쁜 피)는 사랑의 가능조건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육체는 사랑의 걸림돌이 되고 초감성적 사랑의 불가능조건이 된다. 이 육체는 우리를 정념의 공간 속으로 내던져 놓고는 뭔가 이루어질 만하면 다시 잡아당기는 것. 그래서 우리는 어디론가 무한질주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곧 걸음을 되돌려야만 한다. 그래서 이 질주에 대해 "끝없이 몸부림치지만 나아갈 수 없는 삶의 불가해성과 무력함 그리고 이것 자체에 대한 분노 등"을 나타낸다고 한 것은 옳은 지적이다. 다만 여기서 '나아갈 수 없는 삶'이란 걸 나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으로 바꿔 읽고 싶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감성적 사랑, 아름다운 사랑의 끝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숭고하다(죽음을 무릅쓰는 사랑!). 이 숭고한 사랑은 (감성적) 사랑의 이해관계(목적)에 구속받지 않으며 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숭고한 사랑의 맹목적인 운동 앞에서 망연자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간혹 우리가 그러한 사랑에 걸려들기 때문에!). 알렉스의 물음에 대해 안나가 세차게 머리를 젓는 것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그렇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라 두려운 사랑이다. 그것이 두려운 것은 우리의 생-본능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영화 <나쁜 피>의 한 장면을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그런 두려움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내가 다 이해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래서 그것은 두렵다(불쾌하다). 그렇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의 생-본능이라는 인간조건을 일시적으로나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에 우리를 (한)순간 개방한다(우리의 죽음이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우리를 일시적으로나마 자유롭게 한다(머리가 잘린 통닭모양). 숭고한 사랑, 숭고한 예술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아니다, 그건 더 이상 사랑도 예술도 아닌 어떤 것이다. 하여간에 무엇인가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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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이분법을 사용하자면, 아름다움은 생-본능과 연관되어 있고 숭고(함)은 죽음-본능과 연관되어 있다. 생-본능은 사는 것, 잘사는 것, 보다 더 잘사는 것을 지향한다. 이성의 기능이란 것은 이러한 생-본능을 바람직하게 보좌하는 것이다(화이트헤드). 이에 대하여 죽음-본능은 절대적으로 잘사는 것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생-본능에서 발원하지만 곧 그것을 초과하고 만다(그래서 이성-이념의 한계를 표시한다). 절대적으로 잘사는 것이란 결코 삶의 안쪽에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끊임없이 무에 유혹되고 죽음에 도취된다. 마치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처럼(에로티즘 또한 생식의 욕구에서 발원하지만 그것을 초과한다).

죽음이 우리에게 불가해하듯이 숭고한 사랑, 숭고한 예술은 우리에게 불가해하다. 이것들은 모두 절대적인 타자이다. 우리의 이성, 즉 개념적 사태 이해는 이들 안에 정립되어 있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의 뒤치다꺼리에나 바쁠 따름이다. 간혹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우리를 유혹하는가? 그럼 어쩔 텐가? 우리는 안나와 마찬가지로 세차게 머리를 내저으며 알렉스와 마찬가지로 이 또 다른 '나쁜 피'로부터 도망가는 수밖에. 그러다 발병이 나고 덜미를 붙잡히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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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가 주장하는 취미(아름다움) 판단의 무관심성(무사심성)은 숭고에 대해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그것을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한 안나의 부정과 나란히 놓을 수 있을까? 아름다운 대상에 대해 평정한 태도, 무관심한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안락의자에 주저앉는 일로 충분히 가능할 수 있겠지만, 숭고한 대상에 대해서, 가령 어떤 예술작품 속에 정립되어 있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능할까? 어딘가 불편하지 않을까? 만약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이 적극적인 관심의 결과라면 숭고에 대한 무관심은 필사적인 관심이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한 번 알렉스의 질주를 떠올려 보자. 우리의 생-본능은 숭고(죽음)로부터,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주(질주)할 때에만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것. 그런 필사적인 도주를 우리는 '무관심'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 만큼이나 숭고에 대한 무관심 또한 아이러니적이다. 너무 말이 없어서 '떠벌이'란 별명이 붙은 알렉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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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영화가 보여주는 이 모든 특징이 철학에 대해 갖는 관련성은 바로 사유의 무능력에 직면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영화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사유의 무능력을 사유케 하고 무의 형상을 사유하게 하며 사유될 수 있는 전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사유하게 한다. 영화의 이미지가 운동의 교란을 나타내는 순간 그것은 세계를 일정하게 유보시키는 것이며 가시적인 세계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사유는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여 자신의 한계를 사유하게 된다. 이것이 영화가 철학에 대해 갖는 의미이다."(들뢰즈) 이러한 주장은 비단 현대 영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리라.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철학이라는 개념적 사유에 대해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고 우리는 정당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능력을 절감하게 한다. 이것은 마치 데리다가 반 고호의 그림에서 구두끈이 반쯤 풀려/조여 있는 걸 두고 이중의 구속(double bind)을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우리의 잘난 예술은 우리를 (껴)안아주지도 않으면서 공연히 놓아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담배나 (꼬나)물고 그것의 주변만을 서성거릴 뿐이다, 문밖에서. 그러다가 문득 자각한다, 우리 자신의 숭고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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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사랑에 대해 중언부언하는 것은 품위 없는 짓이지만,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 몇 마디만 더 하겠다. 사실, 이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한 물음, 즉 정념론적 과제는 나에게 있어서 칸트 이후에 제기된 인식론적 과제와 결코 다르게 읽히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있어서는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음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이성에 부과되어 있기 때문이요,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인간 이성의 모든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순수이성비판>)라고 말할 때, 이성에 의해 제기되지만 이성의 능력 바깥에 있는 물음들이란 바로 숭고한 물음들이며, 예술적인 물음들이다(가령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라든가, "우주는 팽창하는데 왜 우리는 팽창하지 않는가?"라는 식의 물음들).

 

데리다식으로 말해서 반쯤 풀려 있고 반쯤 조여 있는 이 물음들을 이성의 잉여효과, 혹은 과민반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미친 듯한 질주가 어찌 과민반응이 아닐 수 있을까? 진화사적으로 볼 때도 형이상학적 물음들이 우리의 자기보존 본능이나 종족보존 본능에 유리하게 작용할 만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형이상학적 사유에 필요한 기회비용을 다른 데 투자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의미에서도 인식의 형이상학이나 정념의 형이상학 모두 본래의 프로그램을 초과하고 있다. 그것들은 프로그램의 돌연변이이며 아나그램이다.



9
뒤샹의 경우.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뉴욕에서 리처드 무트(R. Mutt)라는 가명으로 레디메이드 작품 <샘>(변기)을 전시회에 출품하나 거절당한다. 이 미술사의 한 스캔들은 단순한 스캔들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그가 예술작품의 개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오브제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이 경우에는 화장실에서 미술관으로) 옮겨놓았을 때 그것이 예술작품이 된다는 걸 발견(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예술작품의 근원이 더 이상 예술작품이나 예술가 자신의 창조성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일부 작품의 경우에,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자리옮김이라는 일종의 새로운 명명행위이다.



뒤샹의 대표적인 레디메이드 중의 하나인 <자전거 바퀴>(1913)은 자전거 바퀴와 의자를 접붙임한 것이다. 이 바퀴와 의자는 모두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전혀 예술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오브제가 동시적으로 제시됨으로써 거기에 어떤 미감적 효과(뒤샹 효과)가 유발되는 것이다(그래서 자신이 예술작품임을 주장하게 되는 것). 이 새로운 예술, 혹은 '미적 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병치(명명)이고, 자리의 이동이다. 이점은 <샘>의 경우에 보다 극적으로 드러난다.

 

전시회에 예술작품으로 놓인, 그리고 '샘'이라고 새롭게 명명된 이 변기에서 우리는 이미 도구 존재로서의 도구다움을 경험할 수 없다. 이 변기의 "둘레에는 그것이 귀속될 만한 거라곤 아무 것도 없이, 다만 무규정적인 공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기는 안전하고 편리한 배뇨를 위한 기구라는 도구의 도구 존재, 즉 신뢰성을 자신 가운데로 모아놓고 있다. 이를테면 변기라는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 곧 숨어 있지 않음(탈은폐) 가운데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듯 존재자의 진리의-작품-속으로의-자기-정립이 이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준다? 이런 식의 하이데거적인 사유는 그림이 아닌 실제 오브제의 경우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까? 이미지로서의 고호의 구두 그림이 실제의 구두에로 관심을 정향시킨다면, 실제로서의 이 뒤샹의 변기는 오히려 완강하게 자신의 도구로서의 흔적을 지우며 이미지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하여 이 변기는 도구적 존재자로서의 자신의 신뢰성을 철저히 부인하고 망각한 이후에야 예술작품으로서, '샘'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과연 예술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이고, 무엇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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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에서 1997년이 의미있는 해로 기록된다면 그건 단연 복제양 돌리 사건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내지는 치료)라는 것은 생물체의 고유한 유전자 염기배열을 기술적으로 조작할 수 있음에 근거한다. 유전자 염기배열이란 A, C, T, G 네 개의 문자로 표시되는 DNA 염기의 조합('책')이다. 이제까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는 자신이 타고난 유전자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거기에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를 가할 수 있게 된 것. 그런 의미에서 유전자 조작은 일종의 아나그램(철자변환)이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재료(레디메이드)의 배열을 바꾸는 것이고, 자리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이면서 예술이다.

아나그램으로서의 예술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기술과 예술의 비분리를 다시금 경험하게 될 것인지(이에 대한 사유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미래에, 이성의 도움없이도 자기복제를 통한 종족보존이 가능해질 경우(그것이 허용될 경우), (숭고한)사랑은 무엇일 것인지? 레디메이드 이후에 (숭고한)예술은 무엇일 것인지? 그런 물음들 앞에서 사랑과 예술은 자신들의 유사한 운명을 놓고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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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를 정리해서 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모든 단락은 보완을 강요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가볍게 말하는 것이다."(카뮈)라는 권고를 제법 따르려고 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칸트와 하이데거와 데리다를 좋아하는 만큼 더 읽게 되면, 조금은 무겁게 말할 수 있을는지(여전히 사랑하면서)? 끝으로, 이 몇 가지 생각의 꼬투리가 되어준 카락스/알렉스에게 고마움을 전해야겠다. 알렉스 오스카(Alex Oscar)는 레오(스) 카락스(Leos Carax)의 아나그램이다. 예술은 분신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소진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젊은 카락스/알렉스는 내게 말했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다.

12
하여간에 "중요한 것은 구애를 한다는 것이며, 이 구애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계속될 것이다."

97. 12. 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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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3-24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서재질은 수혜자로서의 것입니다. 비를 가둔채 흐린 하늘 아래서 갈증을 느끼면서 나를 완전히 묶을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오래 전 '오아시스'에 대한 의견은 전적으로 동감하는 부분이네요. 종두는 쉽게 이해 받기 힘든 극소수자의 입장입니다. 이 페이퍼는 내가 빠진 무력감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boinda 2009-08-24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지만 인내하면서 정독했습니다/이 글을 건너 진도를 나가고 싶은데.../여기 오는날 마다 한 단락씩 읽어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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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사랑과 가난과 죽음과 언어, 이 네 개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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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를 견뎌내는 일이 삶에서 중요하다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를 견뎌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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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우리 삶의 소중함과 비참함을 동시에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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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이란 무엇인가? 중력은 잡아당기는 힘이다. 이것을 조금 현대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프로그램 pro-gram이다. 즉 우리의 글자들(gram) 앞에 있는(pro) 어떤 것이고, 이 글자들에 무게를 주는 어떤 것이다. 존재 Sein가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라면, 중력은 모든 글자들을 글자들이게끔 하는, 모든 형태들을 그런 형태들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다. 모든 생명체의 DNA 글자들, 유전형 genotype과 표현형 phenotype은 그래서, 중력의 장 속에 놓인다. 그리고 모든 어련하다 싶은 우리의 행동양태나 행동거지들은 중력의 입김 속에 놓인다.

∴ ∴ ∴

시는 포스트그램 post-gram이다. 시는 글자들을 보내는 기획이면서, 동시에 중력 이후의 삶을 묻는 기술이다. 우리의 바탕이 이러이러하고 그래서 우리가 이 모양이란 걸 알게 된 이후의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시는 특권적이다. 시는 삶의 윤리학이 아니라 존재의 윤리학이다.

∴ ∴ ∴

아주 어렸을 때 일로, 나는 기억에 없지만 어머니가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밖에 나가서 동생이 다른 아이와 싸움이 붙어도 나는 멀거니 옆에서 구경만 했다고 한다. 다 끝나고 나서야 둘이 손을 붙잡고 울면서 돌아왔다고. 이제 와서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럴 만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이라고 해서 내가 달리 처신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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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관심한 태도 dis-interestedness가 나에게서 삶에 대한 무능력을 낳고 무성의를 낳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로부터 멀리 있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이나 영화 속의 멀리 있는 사람들이나 좋아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단지 너무 소심하고 겁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경우든지, 그런 태도가 전제하고 또 확보하는 거리 dis-tance가 나의 의미론적 생존의 조건이 된다. 나를 생각하게 하고 글을 쓰게 한다. 문학이라거나 철학이라거나 하는 등속의 구분은 여기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문체일 따름이다. 문체란 언어의 한 묶음의 변주 variation이고, 어떤 변조 modulation이며, 자신의 바깥을 향한 언어적 긴장이다.(들뢰즈) 문체는 언제나 이질적인 heterogenous 언어 속에다 전위차를 일으켜 그 사이로 무엇인가가 지나가게,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S]tyle carves differences of potential between which things can pass, come to pass...)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바로 그러한 작업이다. 자주 다른 이들의 이런 글들을 읽으며 감전되었던 경험을 다시 되돌려주고 싶은 것이다.

∴ ∴ ∴

나는 울고 싶은데 神은 내게 계속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빈들거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내 처는 줄곧 울고 있다. 나 역시 운다. 나는 의사가 와서 내가 쓰고 있는 동안 아내가 울고 있다고 말할까봐 불안하다. 나는 그녀에게 가지 않겠다. 내게 책임이 있는 건 아니니까. 내 어린것은 온갖 것을 보고 듣는다. 그 애가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키라를 사랑한다. 내 어린 키라는 자기에 대한 나의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그 애 역시 내가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애는 내게 내가 잘 잤는지의 여부를 묻는다. 그러면 나는 내가 언제나 잘 잔다고 말해준다. 나는 무얼 써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神은 내게 쓰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결함을 지녔다. 나는 인간이다. 神이 아니다. 나는 神이 되고자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춤을 추고 싶고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를 치고 시를 쓰고 싶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이것이야말로 내 생의 목표이다.(니진스키, <고백>)

∴ ∴ ∴

드디어 관에 뚜껑이 덮였다. 못이 꽝꽝 박히고 짐마차에 실렸다. 마차는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거리가 끝나는 데까지밖엔 전송하지 않았다.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다. 말은 속보로 달리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 뒤를 쫓아가면서 어이어이 소리를 내어 울었다. 뛰어서 쫓아가느라고 그 울음소리는 몹시 떨렸고 가끔 끊어지기도 했다. 가엾은 노인은 모자를 떨어뜨렸지만 그것을 집으려고 멈추어서지도 않았다. 비가 그의 맨머리를 적셨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런 것쯤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어 울며 마차의 이쪽저쪽을 겅중겅중 뛰어서 왔다갔다했다. 낡아빠진 프록코트의 옷자락은 날개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호주머니란 호주머니에서는 책들이 비죽이 기어나오고 무슨 책인지 커다란 것이 한 권 소중하게 쥐어져 있었다. 길가는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었다. 어떤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이 가련한 노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책들은 쉴새없이 호주머니에서 진창으로 굴러떨어졌다. 사람들이 그를 불러 세워 물건을 떨어뜨렸다고 가르쳐주었다. 노인은 그것을 집어들고는 다시 마차 뒤를 쫓아갔다. 길모퉁이에서 어떤 거지 노파가 그에게 손을 내밀며 들러붙더니 함께 관 뒤를 따라갔다. 드디어 마차는 모퉁이를 돌아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

∴ ∴ ∴

능글맞기도 하지만 괜히 잘 우는 사람들이란 고정관념을 나는 러시아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이 두 러시아인 댄서/작가에게 힘입은 것이라는 걸 부인하지 않겠다. 사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런 그들의 정서가 나에게 맞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다지 잘 우는 편은 아니지만,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력에 대한 고백으로서의 울음이 우리 생의 첫 발성(언어)이었다는 사실에 언제나 감동받는다. 외롭고 힘들어 지칠 때마다, 우리가 이 근원의 장소를 찾아가고 이 원초적 정념에 호소한다는 사실에 언제나 고무받는다. 예컨대, <파리, 텍사스>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가정이 파탄나자 트래비스는 자신이 잉태되었던 바로 그 근원의 장소로서 '파리'(프랑스 파리가 아니다)를 찾아 사진 한 장을 들고 황량한 텍사스 사막을 헤맨다. 그의 그런 행위에 의해 물리적으로 동질적인 어떤 공간이 파리 Paris/텍사스 Texas로 분절된다. 이 분절은 성(聖)/속(俗)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미론적이고 구제론적인 것이다. 이 고질적인 의미론/구제론은 아주 인간적이고 너무도 인간적이다. 우리는 그리 돼먹은 듯하다.

∴ ∴ ∴

"나는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눈물들은 생각들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들은 눈물과 마찬가지로 쓰라리지 않을까?" 이것은 루마니아의 작가 에밀 시오랑(E. M. Cioran, 1911-1995)의 말이다. 철학을 공부하다가 그만둔 그는 1937년 파리로 건너가서 이후 죽을 때까지 인근의 창녀들이 야밤에도 소란을 피우는 싸구려 호텔 다락방에 은둔하며 살았다. 그가 철학을 그만둔 데에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칸트와 피히테, 쇼펜하우어, 베르그송을 읽으면서 철학을 제외하곤 시에도 무관심했던 그는 남들처럼 논문을 쓰기로 결정하고 어떤 주제를 고를까 고심했다. 그리고는 진부하면서 뭔가 독특한 주제를 찾았다고 생각해서 지도교수에게 달려갔다. "'눈물의 일반이론'이 어떻겠습니까? 그건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가능이야 하겠지. 하지만 참고문헌을 찾는 게 어렵지 않겠나." 이에 "그건 문제가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 전체가 논문의 근거가 되니까요." 그는 자신에 차서 말했다. 그러자 지도교수는 경멸에 찬 시선을 보냈고, 그는 그 순간 철학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한다.

그의 말: "나는 철학이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철학은 인간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결국은 인간을 각자의 운명속으로 내팽개치고 마는 것이다."

∴ ∴ ∴

나는 언젠가 나 자신이 그런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오랑이 포기한 '눈물의 일반이론'이란 것. 현재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의 대부분은 이 눈물의 일반이론을 위한 연습이고 밑그림이라는 생각도 한다. 거꾸로 철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에 근거한다.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는 철학의 무능력 자체는 바로 우리의 무능력을 닮은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무엇을? 내던져지고 내팽개쳐진 각자의 운명(시오랑은 해체de-composition라고 부른다. 이 해체가 그의 글쓰기 양식을 규정한다.) 속에서, 각자의 눈물 속에서 의미있는 일반이론, 즉 연대 solidarity를 끌어내는 일 말이다. 개인의 울음을 집단의 통곡으로 바꿔놓는 일 말이다. 언젠가는.

∴ ∴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 ∴

이 시의 1연은 나(화자)의 사랑-이야기의 전조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는 건 현실에서는 잘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이다. 이때 푹푹 나리는 눈은 이 사랑의 축복과 고난을 동시에 표시한다.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는 나는 눈이 푹푹 나리는 날 밤주막에서 소주를 마시며 그녀를 기다린다. 이런 나의 현실을 이 시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토로하고 있는 부분은 2연의 전반부이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여기서 '사랑하고' 대신에 쓰인 '사랑은 하고'란 표현은 은근하게 나의 사랑을 특수화, 주제화하고 있다. '은'이라는 조사에 의해서 한정되어 있는, 나의 사랑은 혼자만의 사랑이고 외로된 사랑이다. 즉 나는 그녀, 나타샤가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오지 않을 그녀는 눈 나리는 밤에 내가 불러낸 일종의 미적 가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상상 속에서만 현실화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님'이란 말 대신에 이 시에 이색적으로 쓰인, 러시아 여성의 이름 '나타샤'도 나와 그녀와의 거리를 더욱 분명하게 표시하며, '푹푹'(한숨소리!) 날리는 눈발 또한 혼자 소주를 마시는 그의 쓸쓸한 정조를 부추긴다.

그렇지만 이런 그의 정조는 곧 반전된다. 후반부의 내용은 어느 정도 술이 오른 나의 소망사항이다. 나는 이렇듯 눈이 푹푹 나리고 쌓이는 밤에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타고 깊은 산골 마가리(오막살이)에 가서 살고 싶다. 그것이 나의 소망이고 꿈이다. 여기서 아마도 도회(혹은 읍내)와 대립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산골은 현재의 현실과 대립되어 있는 소망스런 미래의 공간이다. 나는 (현재의)도회/(미래의)산골, (현재의)현실/(미래의)소망이라는 구도를 떠올리면서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을 자신에게 독려한다. 나의 환유로서의 흰 당나귀는 이 이행의 매개자이며 보조자가 될 것이다.

3연은 소주 기운과 자신의 소망에 더욱 고조된 나의 자신감을 보여준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2연)와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3연)의 도치된 문형은 그런 정조의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그의 자신감은 사랑의 주체로서의 나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후로 나에게서 푹푹 나리는 눈은 나와 나타샤의 사랑에 대한 따뜻하고 여유로운 축복의 뜻을 강하게 갖는다. 이윽고 마지막 5연에서 나의 기쁜 마음은 절정에 이른다. 이제 아름다운 나타샤는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라는 표현은 나타샤와의 사랑을 통한 나의 신생(新生)을 말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 ∴ ∴

 

 

 

 


시에 대한 감상을 대강 적어보았다.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1938)는 60년 전의 시이다. 그렇지만 응앙응앙 하는 신생의 울음소리는 아직도 생생함을 잃지 않고 있다. 나는 그런 것이 시로 변한 눈물들, 생각으로 변한 눈물들, 빈들거리지 않는 눈물들의 힘이라고 생각한다(당신은 소주의 힘이라고 말하려는가?). 사실 우리가 "더러워 버리는 것"이기는 해도, 우리는 매번 세상한테 (넘어)진다. 그래서 넘어가는 사람 Uber-mensch이 되기 위한 바쁜 이행 Uber-gang의 와중에도 넘어지는 사람 Unter-mensch으로서 우리는 매번 몰락 Unter-gang하기를 잊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세상이 본래 그리 돼먹은 거라면. 우리가, 가난한 우리가 참는 수밖에. 우리가 이 운명을 사랑하는 수밖에. 이러한 운명이 너무 좋아서 응앙응앙 오늘도 우는 수밖에!

∴ ∴ ∴

간혹 돈가방이라도 들고 어디론가 튀고 싶다!..


98. 8.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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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문헌 목록입니다. 3년전에 작성된 것이라 업그레이드돼야 하지만(그간에도 수십 종의 문헌이 추가됐기에) 다음으로 미루고, 데리다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올립니다. 제가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불어 원전은 생략했습니다.(제가 갖고 있거나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문헌들로 국한했고, 자세한 출판서지는 생략했습니다.)

1차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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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gins of Philosophy(1972/1982)
- Dissemination(1972/1981)
- Positions(1972/1981); {입장들}(솔, 1992)
- Glas(1974/1986)
- Spurs: Nietzsche's Styles(1978/French-English1979): {에쁘롱}(동문선, 1998)
- The Truth in Painting(1978/1987)
- The Post Card(1980/1987)
- Raising the tone of philosophy(1983/1993)
- Memories for Paul de Man(1986)
- Of spirit(1987/1989)
- Sineponge(1988); {시네퐁주}(민음사, 1998)
- Limited Inc(1988)
- L'Autre cap(1991); {다른 곶}(동문선, 1997)
- The Gift of Death(1992/1995)
- Points...: Interviews, 1974-1994(1992/1995)
- Aporias(1993/1993)
- Spectre of Marx(1993/1994): {마르크스의 유령들}(한뜻, 1996)
- Politics of Friendship(1994/1997)
- Archive Fever: a Freudian impression(1995/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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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troduction: Desistance, in Typography by Lacoue-Labarthe(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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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rce of Law: the "Mystical Foundation of Authority", in 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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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비평과 이론}(1992, 봄호) 데리다 번역논문 특집
* 루소의 언어학과 제네바 언어학파({철학의 여백})
* 문체의 문제점({에쁘롱})
* 잔혹극과 재현의 폐쇄성(잔혹성)({글쓰기와 차이})
* 일본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프시케})
- 이진우 편역,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이해}(서광사, 1993)([인간의 종말] 번역)
- {현대문학비평론}(한신문화사, 1994)
* [인간 과학 중심의 담론에 있어서의 구조와 기호와 놀이] 번역({글쓰기와 차이})
(* 김성곤 편, {탈구조주의의 이해})
- 김보현 편역, {해체}(문예출판사, 1996)
* 언어학과 문자학({그라마톨로지})
* 차연({철학의 여백})
* 백색신화({철학의 여백})
*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 의미와 표상({목소리와 현상})
* 하이데거의 정신이란 무엇인가({정신에 관하여})
* 프로이트와 심리의 전경화({글쓰기와 차이})
* 라캉의 음성중심 형이상학({우편엽서})
* 파레르곤({회화 안의 진리})
* 조이스의(에게 하고 싶은) 두 마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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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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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도, [데리다의 소쉬르 읽기], {현대 기호학 강의}(민음사,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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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효, {데리다와 老莊의 독법}(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 서양철학사연구회 편, {反철학으로서의 철학}(지성의 샘,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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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효녕, [데리다: 형이상학 비판과 해체적 주체 개념], {주체 개념의 비판}(서울대출판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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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효, [말 중심주의와 소리 중심주의]
* 이성원, [해체의 철학과 문학 비평]
* 유홍림, [타자성에의 개방]
* 김상환, [데리다와 은유]
* 뉴턴 가버·이승종,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본 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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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철, [리쾨르와 데리다의 메타포 논쟁], {현대 프랑스철학과 해석학}(철학과현실사, 1999)
- 한상철, [하이데거와 데리다], {하이데거와 철학자들}(철학과현실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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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에 북매거진 <텍스트>의 청탁으로 쓴 글로 인문 번역서의 오역 실태를 점검해본 것입니다. 절반 정도는 이미 쓴 글들에서 따온 것인데, 분량(원고지 50매) 제한 때문에(청탁받은 분량은 40매) <천개의 고원> 등 몇몇 책이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기회는 또 있겠지요...

  

  

  



얼마전 <한겨레>에 “다시 불붙은 화두 ‘번역은 반역이다’”란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의 내용은 불문학 전문번역가 이세욱씨의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문학세계사)에 대해서 동료 번역가인 백선희씨가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인데, 쟁점은 과연 번역가는 원작에 얼마만큼 개입할 수 있는가로 읽혔다. 예컨대, “나는 면이 알맞게 익었는지 씹어 보다가 혀를 데었다.”라고 한 이씨의 번역에 대해서 백씨는 “면이 알맞게 익었는지 씹어보다가”는 원작에 없는 내용이며 역자가 불필요하게 첨언함으로써 단문 중심의 원작을 훼손했다고 주장한다. 번역가의 역할에 대해 두 사람은 상반된 의견을 갖고 있는 셈인데, 최근에 나온 인문서들의 오역문제를 다루는 자리에서 소설 번역 얘기를 먼저 꺼낸 건, 그나마 그 정도의 쟁점이라면 ‘사치’에 가깝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원작을 읽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짐작에 이세욱씨가 역자로서 지나친 친절을 베푼 것이 아닌가 싶은데, 사실 그러한 친절이 아쉬운 쪽은 소설이 아니라 인문서 번역이다. ‘번역은 반역이다’란 말이 결코 비유가 아닌, 그리고 절대로 과장이 아닌 배신, 배반형 번역서들이 넘쳐나는 마당에 사실 그러한 (과잉)친절은 오히려 과분하다.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문학작품들의 번역이 기대에 못미친다는 일전의 (놀랄 것도 없는) 조사결과가 보여주듯이, 우리의 일반적인 번역환경과 수준은 아주 열악하며 한참 뒤떨어져 있다. 하지만, 정확하기 이전에 최소한 ‘말이 되는’ ‘논리가 닿는’ 정보만 전달해도 나쁘지 않은 번역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문서 번역에서 제대로 된 번역을 가물에 콩나듯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소극이다(여기에 비극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웃기는’ 번역들이 너무 많다.

 


 

  

 

인문서 번역의 경우 우리말이 어색하거나/이상하거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경우는 거의 대부분 오역이라고 보면 된다. 소설의 경우라면, 도대체 면이 알맞게 익었는지 말았는지 하는 내용이 오역인가 아닌가는 원작을 대조해 보아야만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소설 등 문학작품의 오역은 웬만큼 눈썰미가 좋지 않고서는 찾아내기 어렵다. 예외적인 경우라면, 논리에 맞지 않는 내용이 나올 때인데, 가령 시중에 나온 번역본 중에 가장 많이 팔린 걸로 돼 있는 <걸리버 여행기>(문학수첩)의 첫쪽에는 걸리버가 긴 항해를 준비하기 위해 2년 7개월 동안 ‘물리학’을 공부한 걸로 나온다. 물리학이라니? 뭔가 이상해서 원작을 대조해봤는데, 물리학이라고 옮긴 단어는 'Physick', 즉 ‘의학’이었다(다른 번역본에서는 ‘의학’이라고 제대로 옮겼다). 역자는 그걸 ‘물리학Physics'으로 착각한 것인데, 아쉬운 것은 그렇게 옮기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는 점. 걸리버가 항해중에 의사 노릇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오역을 눈치채지 못한 역자의 무신경을 탓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번역이 아무리 경쾌하고 유려해 보여도 역자에 대한 신뢰는 팍팍 떨어진다.

또 다른 사례로는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민음사)의 맨마지막쪽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거의 행복한’ 하루를 뒤따라온 독자의 머리를 한대 치는 결말인데, 안타깝지만 여기에도 오역이 있다. 10년이면 날수로 삼천육백십삼일이 아니라 삼천육백오십삼일이어야지 맞다. 어쩌다가 십단위의 ‘오’가 빠졌는지 모르겠지만(교정중의 실수일 수 있다), 덕분에 독자는 감동을 받기 이전에 날짜수를 계산하도록 요구받는다. 문제는 사례로 든 두 작품의 경우 계속 판을 찍으면서도 오역이 교정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제부터 검토해 볼 인문 번역서들은 이 정도의 오역들을 오역으로서 정말 무색하게 만든다. 예컨대, 현대 사상의 원조로 꼽히는 언어학자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민음사)부터가 전혀 미덥지 못한 번역이다. 다음을 보라. "언어적 물체는 쓰여진 낱말과 발음된 낱말의 결합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후자 하나만으로써도 이 물체를 구성한다."(35-6쪽) 언젠가 이차문헌의 내용을 확인해 보기 위해 이 대목을 읽다가 경악을 한 기억이 있다. '언어학의 대상'을 정말 황당하게도 '언어적 물체'라고 번역해놓고 있는 것이다!(이게 물리학책인가?) 절판된 옛날 번역본을 인용하자면, 이 대목은 적어도 “언어학의 대상은 쓰여진 낱말과 말해진 낱말의 결합인 것으로는 정의되지 않는다. 말해진 낱말만이 그것의 대상이다."(형설출판사, 41쪽) 쯤으로 옮겨져야 한다. 사실 확인해보지 않은 다른 대목들의 번역은 훌륭할 수도 있지만, 이 한 대목에서 일단 번역에 대한 기대는 접어두게 된다.

 

 

 

 

이런 사정은 소쉬르 언어학에 근거를 둔 <구조주의의 역사2>(동문선)에 가서도 반복된다. ""하나의 모음이 움직일 때 그것은 전체 체계를 끌고간다는 의미에서 구조주의적인 보어"임을 알게 해주었다."(14쪽)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구조주의적인 '보어'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역자는 무슨 말인지 알고 번역했을까? 물론 아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 부분의 영역은 이렇다(불어본과 대조해보면 더 확실하겠지만). "completely structualist insofar as when each vowel moves, the whole system moves with it."(물론 앞에 좀 길게 나오는 부분이 있지만, 생략했다.) 역자가 보어라고 번역한 건 무엇일까? 바로 영어로는 ‘completely’이다. 짐작에 불어로 '꽁쁠리뜨망completement'이란 단어를 '꽁쁠리망complement'(보어)으로 착각한 듯싶다. 비슷한 단어이기 때문에 혼동할 수 있다고 해도 ‘완전히 구조주의적’이란 뜻을 ‘구조주의적인 보어’라고 옮기고 태연하게 넘어갈 수 있었던 역자의 배포가 놀라울 따름이다(말이 안되면 다시 봐야 할 것 아닌가?).

소쉬르 이후 현대철학의 수난이라고 할 만한 번역에는 <현대유럽철학의 흐름>(한울)도 빼놓을 수 없다. 92년에 초판이 나온 이후에 제법 많이 팔려나가고 있는데다가 대학 교재로도 자주 쓰이는 책이지만(강사의 양식이 의심스럽다), (좀 자세하게 뜯어본) ‘구조주의’ 장의 번역은 오역의 연속이다. 가장 원초적인 문제는 역자가 기표/기의 혹은 능기/소기라는 기본적인 개념쌍부터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 “새로운 언어학을 형성시키는 과정에서, 소쉬르는... 소기(le signifie; signifier)와 능기(le significant; signified)... 등의 일련의 차이를 제시한다.”(274쪽)를 보자. 우선 역자는 리처드 커니의 원저에도 없는 불어를 병기하는 (과잉)친절을 베풀었는데(시니피앙le signifiant은 철자도 틀렸다), 그것이 도리어 사단이 됐다. 불어의 시니피에(le signifié)와 발음상/형태상 유사한 영어의 signifier를 같은 뜻으로 착각하고 ‘소기’라 옮긴 것이다. 이 문장은 일단 “소쉬르는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 등의 일련의 구별(distinction)을 제시한다.”로 옮겨져야 한다.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역자는 이후에 능기/소기(기표/기의)를 뒤죽박죽으로 옮겼다(그나마 오역에 일관성이라도 있으면 나으련만).

전혀 엉뚱하게 번역한 한 대목만 더 보도록 하자. “랑그에 대한 연구는 구조적 기호체계를 위한 지향적 전언내용을 일괄적으로 다룸으로써 언어학의 확실한 과학적 정초를 다지게 하는 것이다.”(276쪽) 원문은 이렇다. “In short, by bracketing the intentional message for the sake of the structural code, Saussure resolves to set linguistics on a firmly scientific footing.” 문제가 되는 건 “전언내용을 일괄적으로 다룸으로써”란 말인데, 그것은 “전언의 내용을 괄호침으로써”로 고쳐져야 한다. 요점만 말하면, 소쉬르는 코드(code)를 위해서 메시지(message)에는 괄호를 쳤다는 것이고, 이것이 소쉬르 계보 구조주의의 핵심이다. 일괄적으로 다룬다는 게 그런 뜻인가? 그나마 소쉬르가 이 정도이다. 하물며 라캉에 대해선 무얼 더 기대하랴. 신기한 것은 이런 책이 아무런 교정 없이도 판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구조주의 사회학자로 분류되는 부르디외도 불운하긴 마찬가지이다. 그의 책들 중에서 가장 얇은 <강의에 대한 강의>(동문선)를 보자. 얇지만, 오역은 충만하다. '강의에 대한 강의'란 제목이 뜻하는 건 자신의 사회학 강의에 대해 사회학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것이다. 시작부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학에 대해 말하는 부분: "사회학이 표명하는 모든 명제들은 과학의 주제에 적용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10쪽) 하지만, 이 문장을 어느 누가 "사회학이 표명하는 모든 명제들은 이 학문[사회학]을 실행하는 주체[사회학자]에 적용될 수 있고, 적용되어야 합니다."는 뜻으로 읽겠는가? 우리말 번역만 가지고는 부르디외가 과학사회학 강의를 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핵심이 빗나갔으니 나머지 대목들이 끼워맞추기식 번역일 거라는 건 안봐도 뻔한 얘기이다. 제대로 읽히는 대목이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긍정문/부정문을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행위가 왜 일어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45쪽)는 문맥상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그것은 "결코 자명하지 않은 어떤 행위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쯤으로 옮겨야 한다. 여기서 부르디외가 말하는 행위는 사회적 행위이고, 그것은 결코 자연스럽거나 자명한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 관계[게임]속에 행위자는 그것을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 가관인 사례. "사실상 뒤르켐이 말한 바, '사회는 신이다'까지 인용할 필요 없이, 저는 "신은 전혀 사회가 아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신에게 기대하는 것은 사회에서 전혀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유일하게 인정하는 힘, 인위성 우연성 부조리를 제거하는 힘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50쪽) 이 또한 역자가 사회학자가 맞는지 의심케 하는 오역이다. 첫문장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신에게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사회를 통해서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직 사회만이 여러분을[여러분의 존재를] 정당화시켜주며 사실성, 우연성, 부조리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쯤으로 옮겨야 한다. 그나마 양심적인 건 역자의 말이다. "번역 수준에 대해 역자 자신은 아직도 불만족스럽다. 이 번역판을 읽는 데에 독자의 각별한 인내심과 양해를 구한다."(65쪽) 사실 더 양심적이었다면, 책을 내지 말았어야 했다.

부르디외의 책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그런 만큼 가장 많이 팔린 <텔레비전에 대하여>(동문선)도 오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서문에서 저자가 매스미디어들의 부추김 때문에 일전을 불사할 뻔했던 터기와 그리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 “그리스 병사의 섬 상륙, 함대의 이동, 그리고 전쟁은 정의를 피했을 뿐이었습니다.”(12쪽) 여기서 “전쟁은 정의를 피했을 뿐”이라는 게 무슨 말인가? 영역본이 “war was only just avoided."(전쟁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인 걸로 봐서 역자는 불어의 justesse(혹은 justice)가 들어가는 숙어(‘가까스로’)를 잘못 옮긴 것이다. 문제는 왜 그런 오역/실수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 역자는 그렇다 쳐도(역자의 실력이 그렇다면) 교정자는 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 단순한 오역을 놓친다면, 다음과 같은 대목은 어떻게 읽고 이해할 수 있을는지? “저는 말하자면 과거의 온정주의 교육적 텔레비전을 바라는 향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향수가 대중의 취향과 대규모 방송 수단의 민주적인 이용을 위한, 대중의 자발적 혁명과 선동 정치적 복종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48족) 읽으면 읽을수록 머리가 아파오는데, 이유는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역자는 아무런 고통없이 번역했을까?). 두번째 문장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다. “과거의 가족주의적-교육적 텔레비전이야말로 제가 보기엔 (로자 룩셈부르크식의) 대중적 자발주의나 대중적 취향에 대한 선동적인 투항 못지않게 대중매체의 진정한 민주(주의)적 사용에 대립됩니다.” 즉 부르디외는 매중매체에 대한 순응이나 전면적인 부정이 아닌, 민주적인/비판적인 활용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문제의 번역문을 그런 뜻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인지? 



 

 

  


이렇듯 넘쳐나는 오역의 사례들에서 유턴하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고 지나가야 할 지점은 최근에 마구 뜨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이다. 지젝의 자리에서는 또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올가을에 방한할 예정이기도 한 지젝으로서 불행한 것은 그 번역서들이 대부분 오역의 진창이라는 사실이다. 비교적 읽을 만한 그의 ‘영화책’들을 제외하고 그나마 가장 상태가 좋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을 먼저 보자.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은, 그 통일성을 깨트리며 그 허위성을 드러내는 어떤 특별한 경우를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이상(理想) 또는 ‘허구’이다.”(49쪽)

축약하면, “모든 이데올로기는 이상 또는 허구이다”라는 것인데, 너무도 자연스러운 이 오역은 사실 역자의 것이라기보다는 교정자의 것이다(역자가 이런 정신나간 짓을 했을 리는 만무하다). 이상(ideal)으로 번역돼 있는 것은 사실 영어의 ‘so far as’(-인 한에서)이다. 짐작에, “모든 이데올로기는 ...포함하고 있는 이상, ‘허구’이다”라는 번역문에 교정자의 (과잉)친절욕이 개칠을 한 것이다. 바로 다음 문단에 ‘시장의 이상(理想)’(이때는 ideal을 번역한 ‘이상’이다)이란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심증을 굳게 한다. 이 정도의 오역은 사실 어처구니없기는 해도 분통을 터뜨리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개역판까지 나온 <향락의 전이>(인간사랑)는 사정이 다르다.

역자 자신이 개역판의 서문에서 시인하고 있듯이 초판은 '몇 군데 오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역자가 말하는 '몇 군데'라는 건 주로 대중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영화감독과 제목명의 오역인데(거의 맞는 게 없었다), 개역판에서는 이를 상당 부분 바로 잡았고, 그 점에 대해서는 (비록 기본이라 하더라도) 역자의 노고를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거의 전부이다. 영화명과 주인공에 대해서도 '시라노'를 여전히 '키라노'로, 그의 여인 '록산느'는 '로잔느'라고 옮기고 있다. 그래도 이건 영어가 병기돼 있어서 눈치껏 읽으면 된다. 하지만, 멀쩡한 유고의 영화감독 '쿠스투리차'는 왜 '쿤스투리카'로 개명해놓고, 거기에 'Kunsturica'(406쪽)라고 병기까지 해놓는가?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런 것들이 아니다. 역자는 본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의미있는 교정을 하지 않았다.

예컨대, 1장 시작부터 '부모의 성적 착취'(parental sexual abuse)를 역자는 '아버지의 성적 남용'(28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욕동이론과... 해석의 이중성'을 '욕동이론의 이중성'(29쪽)으로 옮기고, 정신분석에서의 '수정주의'를 줄곧 '개량주의'(30쪽 이하)로 옮겼다. '제2의 본성'(second nature)은 '이차적 자연'(33쪽)으로 옮기고, '억압의 모든 장벽을 제거하려는 요구'는 계속 '억압의 모든 장벽을 벗기려는 요구'로 옮겼다. '한순간이라도 멈춰서 생각해본다면'을 '한순간이라도 생각하기를 멈춘다면'(44쪽)으로 옮기고, '반계몽주의'는 '계몽주의'(170쪽)으로 옮겼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부분적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러한 부분들이 역자에게는 '몇 군데 오역'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해서 한 일간지 서평자는 “지젝은 라캉 정신분석학 이론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이고 ‘재미있게’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이미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독자들은 지젝의 이 책을 통해 인간의 비밀인 향유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무책임한 소리를 늘어놓은 바 있다(서평자들이 한심하게도 자주 잊어먹는 일은 서평의 대상이 원저가 아니라 번역본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을 읽는 일은 분명 모험이긴 하지만(그것도 굉장히 고된), 그 모험은 오역의 진창에서 허우적거리기이다. 물론 이 허우적거리기에서 일반 독자가 뭔가 '교양'을 얻어낼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말 그대로 당신들의 향락인 셈이다.



 

 

  


믿지 못하겠지만, 그보다 더한 ‘향락’을 선보이는 책이 지젝의 신간 <믿음에 대하여>(동문선)이다. 책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오역으로 가득 차 있다. '모세의 형상'을 '모자이크한 모습'으로 옮기기 시작하더니 '인도'를 전부 '인디언'으로 탈바꿈시키고,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난데없이 '실존성'으로, '뉴에이지'는 '신시대'로 옮겼다(뉴에이지는 신시대가 아니다!). '진리의 정치'를 전부 '진실의 정치'로 옮기고, '대상 a'는 ‘대상’ ‘물질’ ‘사물’ 등 갈피를 못잡고 옮긴 걸로 봐서 역자는 라캉/지젝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으며 읽어본 적도 없어 보인다(무슨 사명감으로 번역에 나선 것인지?). 정말 경악스러운 대목. “라캉의 관심은 지배자에 관한 강좌로부터 당시 사회에서 주도적 논의 대상이었던 우주에 대한 강좌로의 이전에 있었다. 논점이 우주로 바뀐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38쪽)

전후좌우가 다 오역으로 도배돼 있지만, 이 대목은 정말 하이라이트이다. 믿기지 않을까봐 원서를 인용한다. “Lacan's interest is focused on the passage from the discourse of the Master to the discourse of University as the hegemonic discourse in contemporary society. No wonder that the revolt was located in the universities.”(30쪽) 중학생도 해독할 수 있는 단순한 구문이다. 라캉의 네 가지 (강의가 아니라) 담론(discourse)에 대한 약간의 배경지식만 갖고 있다면 말이다(라캉 입문서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해서 다시 옮기면, “라캉의 관심은 주인의 담론에서 현대 사회의 지배적 담론인 대학의 담론으로의 이동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 반란이 대학에서 일어났던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여기서 ‘반란’은 아마도 68혁명을 가리키는 듯하다.) 역자는 무슨 생각에서인지(대문자라서?) ‘대학(University)’을 ‘우주’로 옮긴다. 라캉이 천문학자였단 말인가? ‘대학’이 ‘우주’로 바뀐 것이 역자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몰라도 우리로선 놀라 자빠질 일이다. 게다가 이 놀라운 번역서에서 역자는 엄청난 누락도 서슴지 않는다. 번역서 52쪽(원서 45쪽) 밑에서 6행 ‘그러나’ 앞에는 2/3쪽(20행)이 누락돼 있다. 정말 집어던지고 싶은 책이다!

이런 식의 오역뒤지기는 아마도 한동안(어쩌면 끝없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끝내기로 하자(내게 주어진 분량을 이미 훨씬 넘어섰다). 좋은 번역서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좋은 번역자/번역가가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시대가 온다면, 물론 사정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다. 부르디외가 매번 강조하듯이 오역의 문제도 어쩌면 사회구조적인 문제일는지 모른다. 그 구조는 아마 금방 바뀌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지/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오역들을 양산해내는 현재의 번역/출판관행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결론적인 제안은 이렇다. 자기가 이해한 것을 이해한 만큼 번역할 것.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번역에 대해서는 두눈 부릅뜨고 따져볼 것. 오역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지적할/수정할 것. 이런 행위자들의 노력에 대해서 구조도 언젠가는 감복할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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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3-12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 인문서 보기가 겁나요...

로쟈 2004-03-12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값은 더 겁납니다!..

lastmarx 2004-04-02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시고 계시는군요. 번역하시는 분들이 이런 지적을 받고 고쳐나가면 좋겠습니다. 서평쓰기도 그러하지만 결국 번역도 전체 내용을 파악해야지만 오역을 피할 수 있겠군요.

로쟈 2004-04-02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anks for your comment, and I'm sorry for my English. I can't use hangul until now, here in Moscow...
 

지난 설연휴 끝에 쓴 글을 여기에 옮겨둔다... 연휴가 끝나고 연 사흘째 이삿짐을 싸고 있다. 모레부터 3주 동안 지난 1년간 몸담았던 연구소의 천정과 바닥 공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연구소 비품도 챙겨야 하고 그동안 쌓아두었던 책들을 몽땅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저것 해서 30박스쯤 정리하는 일이니까 일이야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짐을 챙기는 손은 더디고 마음은 심란하다. 2월에 해야 할 일들이 빽빽한 터에, 벌써(!) '이삿짐'이나 챙기고 있다니!..

 

 

 

 


잠시 기분풀이로 올해에 나올 책들과 영화들을 꼽아본다. 영화잡지들을 그다지 챙겨보지 않기 때문에, 현재 제작중인 영화들이 어떤 것들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올해 어떤 영화들이 개봉된다 하더라도 내가 보고싶은 영화로 첫손가락에 꼽을 건 이미 정해져 있다. 그건 홍상수의 다섯번째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이다. 지난주 <씨네21>에 실린 촬영장 취재기를 보면, 벌써 지난 10일에 모든 촬영이 마무리되고, 편집 등의 후반부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돼 있다(5월초 개봉예정). 그의 모든 영화를 개봉관이나 시사회장에서 보았었는데(<강원도의 힘>은 시사회장에서 허진호 감독 바로 앞자리에서 보았다), 아쉽게도 이번만은 그러지 못할 거 같다. 예정대로 개봉될 때쯤이면 나는 다른 나라에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이 생각을 하니까 외국에 나가는 일이 싫어진다!).(*그로부터 1년도 더 지났다. 나는 얼마전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비디오를 '떨이'매장에서 2,000원 주고 샀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말을 빌면, 나는 매번 홍상수의 영화가 '뒈지게' 기다려진다. 사실 데뷔작이었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가 문제적이었는데, 나는 그 영화가 개봉되기 일주일 전에 (잘못알고) 개봉관에 가서 왜 영화를 하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홍상수는 '한국영화의 발견'이다(나는 개봉관에서 연거푸 그의 데뷔작을 보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아직은 임권택을 꼽지만, 그건 노장에 대한 예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대학에 들어와서 나중에야 그의 전환점이 된 <만다라>나 <길소뜸>을 봤지만(나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맘에 든다), 아무런 유보없이 '임권택 만세!'를 부르기엔 나는 너무 젊었다.

 

 

 

 

아마도 내가 극장에서 최초로 본 임권택 영화는 <씨받이>였던 거 같다. 그 전에 그해 아카데미작품상 수상작인 <아웃 오브 아프리카>란 영화를 볼 때 <씨받이>의 예고편이 나왔고 관객들이 다 웃음을 터뜨린 기억이 있다. 비록 강수연이 베니스에서 여우주연상을 타고선 그 영화에 대한 평가가 다소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모습이 한국영화에 대한 당시 관객들의 일반적인 시선이었다. 80년대 중반의 한국영화는 주윤발의 홍콩 느와르보다도 못한 평가를 받았고, 한국영화를 (공개적으로) 보러 가는 대학생은 아주 드물었다.

가히 한국영화의 몰락이라고 할 만한데, 그러한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감독이 이장호이다. 그의 80년대 필모그라피는 <바람불어 좋은 날>(그의 가장 좋은 영화)에서 <바보선언>(그나마 객기가 문제의식처럼 보인 영화)을 거쳐서 <어우동>으로 빠진다(혹은 <무릎과 무릎 사이>에서 익사한다). 그나마 퇴행적으로라도 80년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영화가 이장호의 조감독 출신인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 시리즈이다(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답답한 청춘들!) 하지만, 이 배창호도 흥행몰이에 우쭐하여 장미희에 대한 오마주로 <황진이>를 만들면서 하향안정세로 접어든다.


 

 

 


 

그리고, 80년대 후반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이 당시 히트 연극을 영화화한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1988)부터이다. 장선우의 <성공시대>나 이명세의 <개그맨> 등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면서 이른바 한국영화의 새로운 젊은 감독 3인방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후 박광수는 <그들도 우리처럼>에서 좀 일찍 정점을 보여주더니(그 이상을 기대했지만, 지나고 나니까 그게 정점이었다) <베를린 리포트>부터 곧바로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해서 아직 돌아온다는 소식이 없고(복고풍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잠시 재기하는 듯했지만 <이재수의 난>으로 완전히 찍혀 버렸다), 장선우는 세속세계(그가 잘 만드는 쪽이다)와 화엄 세계(그가 죽을 쑤는 쪽이다)를 왔다리갔다리하면서 들쭉날쭉 영화를 만들다가(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우묵배미의 사랑>이다) <성냥팔이소녀의 재림> 이후에 잠적중이고(이번에 재기한다는 소문도 있다. 시집 한권 내고서), 그나마 엘리트의식 없이 이장호-배창호 사단의 적자로서 꾸준히 진화하고 있는 감독이 이명세인데(<인정사정 볼것없다>로 드디어 대중적인 인정을 받았다), 현재는 도미중이다.


 

 

 

 


한국영화에서 이들 3총사를 잇는 차세대의 대표적인 감독이 1996년에 데뷔한 홍상수이다. 시작은 아주 미미했지만, 요즘들어 서서히 대가급으로 인정받는 박찬욱 감독과 나이는 박광수, 장선우 세대이지만 (박광수 조감독 출신의) 한국영화감독이 맞나 싶게, 영화를 잘 만드는 이창동 감독(겸 장관)이 같은 세대이고(새로운 3인방이라고나 할까?),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나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이 한국영화의 미래이다(물론 확실한 자기 스타일을 먼저 보여준 건 장준환이고, 봉준호는 감독 자신의 고백대로 아직은 암중모색단계이다).

거기에, 아직은 홍상수의 그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허준호나 박찬옥 감독까지 곁들이면, 강우석-김상진 계보나 강제규 감독 등과 대비되는, 한국영화에서의 작가주의 진영이 대략 갖춰진다(여기서, 작가주의라는 건, 관객의 코드보다는 감독 자신이나 영화에 대한 고려가 우선적인 영화만들기를 통칭한다). 참, 가장 과대평가된 '속죄양' 혹은 영화판의 '장정일' 김기덕이 빠졌다. 지젝이 잘 쓰는 표현에 따르면, 김기덕은 홍상수식 작가주의 영화의 외설적인 이면처럼 보인다.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게 아닌데, 뜬금없이 한국영화사 얘기가 돼 버렸다. 어쨌든 한국영화라는 장 속에서 홍상수의 자리가 어디인가를 간단히 짚어보고 싶었을 뿐이고, 가까운 장래에(한 10년쯤 후에)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임권택 대신에) 우리는 그의 이름을 꼽을 수 있을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사실 이러한 평가는 국외에서나 평단에선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데, 아직은 대중적인 인지도가 그에 못미칠 따름이다. 잠시 이번 신작의 촬영장을 훔쳐본 기자에 의하면, 이번 영화는 이전보다 더 많은 유머들로 넘쳐난다고 하고, 또 성현아가 주연을 맡았기 때문에 그의 영화들 중 역대 관객동원 기록을 갱신할 가능성이 높다. 그 관객에 내가 빠지더라도.

하니, 바라건대, "우물에 빠진 돼지가 강원도에서 수정을 만나서 발견한 것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우스개도 있는 만큼 가급적이면 그의 영화들을 두루 섭렵하신 다음에 올봄에 개봉박두인 영화를 기대해 보심이 어떠실지? 이 정도면 나도 홍상수에 대한 애정을 충분히 표시한 셈인가? 나는 받은 만큼 갚는다(이게 비평의 기본 자세이다). 그렇다면, 제목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무슨 뜻인가? 제목 풀이는 <씨네21>의 기사를 참조하시길(그래야 감독의 육성을 직접 읽을 수 있다)...

참, 올해에 나올 책 얘기를 빠뜨릴 뻔했다. 올해 나올 책으로 내가 가장 기대하는 건 데리다의 <법의 힘>이다. 역자는 진태원씨이고(그는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다시 번역중이라고 한다. 국내에도 데리다 전문 번역자가 탄생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 교정중이라고 하니까, 올봄엔 책이 나올 거 같다. 비로소 데리다가 한국어로 번역되는 '사건'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어쩌면 올해 그의 부고를 들을지도 모르고). 유감스럽게도, 이 책 역시 내가 뜨끈한 책을 읽어보긴 힘들 거 같군. 그리고 아마도 지젝의 주저 두 권이 올해 안에 나올 것이다. 두 권 모두 기대반 우려반이다. 데리다보다도 수준이 떨어지는 지젝 번역서라면?

라캉의 <에크리>는 판권을 갖고 있는 새물결이 연말에 나온 사진집으로 떼돈을 벌었다고 해도 올해를 넘길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번역의 질이기 때문이다. 올해 안에 나온다면, 2% 정도 기대해 봄직하다(98%는 아마도 우리말이 아닐 확률이다). 나는 그의 문장들이 어떻게 우리말로 변환될 수 있는지, 그 번역의 연금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지만, 연금술은 '연금술'에 그칠 거라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이다. 해서, 라캉과의 조우라는 사건은 아직은 미래형이다. 적임자가 곧 도래하기를 바란다.

또, 무슨 책들이 나올 것인가? 간혹 나이 먹는 일이 덜 유감스러운 것은 순전히 이러한 기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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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inda 2009-08-24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워낙 소심해서 읽으면서 조마조마 했습니다/ㅎ/참 삼천포라는 단어도 포함해서/요즘 명예도 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훼손했다고 야단법석이라서...../하지만 여기에 거론되지 않은 가독은 서운해 할지 모르겠습니다/한 시대를 순간 읽어내리면서 동의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한국사람은 세계 1등 좋아하는데/세월이 지난 지금도 김기덕과 홍상수는 알아주지 않습니다/세계에서 알아주는데 말입니다/저는 외국에서 유명하다고 그래서 더 좋아할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음.......데리다/이 번에도 데리다가 발목을 잡네요/지금쯤 다른 항목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