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를 말하도록 하자. 니체에 대하여가 아니다.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보다 反니체적인 것이 있을까? 당신에 대한 사랑만큼 우스운 것이 또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할 뿐이다. 우리는 니체를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니체에 대한 사랑은 이만 걷어치우도록! 하여 나는 한편의 시와 그 주석을 니체에게 바치기로 한다.

⁂ ⁂ ⁂

모든 것이 되기 위하여 더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나는 나의 과거는 나의 하루는
미친 척한 찔레나무와 찔레나무 한 그루를 기어
올라가는 벌레 같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건
미친 생각이다 나는 안다

간혹 어깨가 결린다 무거운
돈가방이라도 들고 어디론가 튀고 싶다
꿈이다 아랫배가 고파오고 기온이 떨어진다
모든 것은 꿈과 같다 어젯밤에 본 영화 속의
치킨처럼 목 잘리고 잘 구워진 치킨처럼
잘만 하면 너도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어
나는 결린 사람

나는 꿈에 자주 결석하고 애린에 물들지 않는
다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표백된 영혼
나는 은근히 다리를 절면서
저 온갖 벌레 같은 인간들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척한다
나는

미칠 지경이다
간혹 나는 사랑의 유언이며 시체가 아닐까
나는 벌레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어이
기어오르고 싶다 자작나무 오동나무 오르지 못할 나무
내게 필요한 날들을 돈다발처럼 세어본다
꿈이다
내가 이 지구를 끌어당기는 힘

이걸 끌고 어디로 가나

어쩌면 이보다 편한 것이 없을 것이다
흥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없다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나는 나의 과거는 과거의 한 조각은
기온이 떨어지면 따스한 곳을 찾는 꿈처럼
무말랭이처럼 입을 다문다

미친 척한 찔레나무와 찔레나무 한 그루를 기어
올라가는 벌레와 꽁무니에 고무풍선처럼 매달린 지구에
생각만 미친다 미친 생각이다 그건

왜 간혹 나는 어깨가 결리는 것일까?

⁂ ⁂ ⁂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믿음에서부터 우리의 배움은 시작되어야 하리라. 이것이 나이 서른에 내가 배운 것이며 맨먼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의 몰락(Untergang)은 시작된다.

내가 꿈에 자주 결석하고 애린에 물들지 않는 것은 내가 결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간혹 주체하지 못할 애린에 빠져 어디론가 튀고 싶어하는 것은 내가 결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존재조건을 극복하고 넘어가는 사람(Űber-mensch)이 아니라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Unter-mensch)이다. 이걸 구상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높이뛰기나 허들(장애물) 경기를 떠올리면 된다. 넘어지는 사람도 생의 정점에서는 한순간 넘어가는 사람 못지않은 날렵한 동작을 취한다. 그리고는 거의 넘어갈 뻔한다. 그러나 그게 전부이다. 넘어지는 사람은 여린 마음에 한 뼘만큼 이 지상의 중력에 굴복하는 것이며, 그래서 결국은 넘어가는 일 대신에 걸려 넘어져 주저앉는 일을 자신의 숙명으로 선택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나는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아.”결린, 기어이 걸린 사람.

결린 사람은 기어이 기어오르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기어이 기어오르(려)는 그는 마치 시지프의 운명처럼 그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렇듯 명징한 의식 속에서도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그는 이 헛된 수난에 입문하게 된다. 편안히 나자빠져 있던 그가 문득 기어오르는 일이 혹 자기 생의 소명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이 의문에 걸려들어 걸려 넘어진 이후의 삶은 이미 종친 삶이다. 그는 이미 사랑의 시체인 것이며 고작해야 사랑의 유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와는 다른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또한 위대한 삶이기도 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점은 인간은 다리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이 가진 사랑받을 수 있는 점은, 그가 <과도Űbergang>이며 <몰락Untergang>이라는 점이다. 나는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살 줄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한다.(...) 인식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인이 살 수 있도록 인식하고자 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서 모든 것들이 자기 내부에 들어올 수 있도록 영혼이 넘쳐흐르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것이 그의 몰락이 되는 것이다.”(최승자 옮김)


 

 

 

하여 우리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며, 모든 몰락하는 것들에 연민과 우정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거 말고는 도대체가 더 적을 말도 없는 무능력한 나로서는 그저 두 권의 책을 소개하는 걸로 나의 몰락을 대신하고자 한다. 나는 다리이지 목표가 아니다. 나를 통과해서 읽어야 책은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린비)와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이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니체와의 우정을 제안한다. 해서, 내가 할일은 끝났다. 더는 할만한 일도 없지만...

2003. 0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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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들을 뒤적이다가 10년도 더 전에 쓴 글 중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 놓는다. 오랜만에 읽어보니까 '격세지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1.
바람도 없는데 꽃이 하나 나무에서 떨어진다. 그것을 주워 손바닥에 얹어놓고 바라보면 바르르 꽃이 훈김에 떤다. 화분도 난다. 꽃이여!”라고 내가 부르면, 그것은 내 손바닥에서 어디론지 까마득히 떨어져 간다./ 지금, 한 나무의 변두리에 뭐라고 이름도 없는 것이 와서 가만히 머문다. (김춘수, <꽃2>)

이 시는 김춘수의 다른 초기시들과 마찬가지로 인식행위, 곧 명명행위의 어려움을 주제로 하고 있다. 우리는 함부로 대상을 인식, 혹은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시들에서 꽃은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되고 “얼굴을 가린 신부”(<꽃을 위한 서시>)가 된다. 우리는 이 꽃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이름을 불러주고 싶지만, 사랑하고 싶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신부는 언제라도 “떨어져 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두 행에서 내밀한 고통이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그 고통은 불가능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그 불가능한 사랑을 우리가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2.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의 <남해 금산>. 이 시는 사랑의 운명, 즉 필연적인 결렬과 파국을 간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나의 사랑은 ‘한 여자’를 ‘그 여자’로, 다시 말해 의미있는 존재로 만들지만, 그 의미란 자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코 영속적이지 않다. 이것은 사랑이란 의미관계가 상호주관성에 바탕한 때문이기도 하다. 오롯한 주관성(에고)들의 밀월은 서로의 주관성이 해소․소멸되어 버리지 않는 한 너무나도 뻔한 결말에 봉착하고 만다. 사랑은 결국 ‘나 혼자 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에 귀착되고 마는 것이다.

3.
물론 생존기계로서의 인간은 종족보존이라는 유전적 사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남녀 간의 짝짓기가 가능하려면 이 건장한 두 기계가 제대로 작동해야만 한다. 해서 대뇌에서는 두 기계의 원활한 접촉을 위해 사랑의 감정을 유발하는 호르몬(근래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도파민, PEA 등의 호르몬으로 구성된 ‘암페타민’이라는 중추신경 각성제가 작용한다)을 내보낸다. 여기까지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정작 문제는 필요 이상의 호르몬이 분비되는 경우이다. 이런 류의 사랑은 감정의 질병, 좋게 말해서 감정의 사치임을 면치 못한다. 방법은 자신을 제어하는 수밖에 없다(사실 나는 어떤 류의 바이러스가 이 질병의 주범인지는 언젠가 밝혀지리라 믿는다).

4.
결국 우리의 계산적인 두뇌(지능)를 믿는 도리밖에 없다. 여기서는 모범적인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하기로 한다. ①은 정현종의 <그 여자의 울음은 내 귀를 지나서도 변함없이 울음의 왕국에 있다>이고 ②는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둘째 단락이다.

① 나는 그 여자가 혼자
있을 때도 울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혼자 있을 때 그 여자의
울음을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여자의 울음은 끝까지
자기의 것이고 자기의 왕국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러나 그 여자의 울음을 듣는
내 귀를 사랑한다

②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①에서 “그 여자의 울음”이 나와 무관한, 그래서 적대적일 수 있는 것임은 우리가 줄곧 확인해온 바다. 그럼에도 그 울음의 유혹은 뿌리치기가 힘들다. 이 난국을 시적 화자는 “내 귀”를 사랑하는 것으로 극복해낸다. 귀를 너무 사랑해서 잘라내는 일만 없다면 그럭저럭 무난한 방법이지 싶다. ②는 아름답다. “내 사랑”의 종말을 믿는 것은 비극적이지만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일시적인 사랑의 유혹을 시적 화자는 견고한 “기다림의 자세”로 극복해낸다. 이런 건 배워둬야 한다! 그래도 당신이 입맛을 다시고 있다면, 오호 애재라, 우리는 갈 데까지 가는 수밖에.

5.
너의, 살 속으로 들어간다. 투명한 너의 몸이 나를 감싼다. 나를 보태고도 넘치지 않는 너의 몸! 찢어지는 아픔도 피 흐르는 고통도 없는 너의 몸 속에서 나는 숨이 가쁘다. 호흡이 곤란하다. 내가 나의 몸으로 남아 있으려고 몸부림칠수록 숨은 점점 끊어져 오고 네 몸은 내 몸을 틈없이 너무나도 꼭 맞게 마신다.
  네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너는 내 속으로 들어왔었다. 그걸 알았을 때 내 몸은 네 속에서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나를, 내 몸을 찾을 수 있을까? 너를 다 퍼내고 남은 발라진 생선가시일까? 내 몸은, 네 몸이 증발하고 남은 얼룩일까? 너의 살 속으로 들어갈 때 이미 나는 네 몸에 젖어 있었다. 물 속의 물방울이여.

채호기의 <물 속의 물방울>. 결국 당신은 보게 된다. “발라진 생선가시”로, “얼룩”으로 남은 자신의 모습을!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당신의 생이 ‘지독한 사랑’에 거덜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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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즉 2005년에 개최되는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한국은 주빈국 역할을 하게 된다. 그 준비의 일환으로 얼마전 ‘한국의 책 100권(종)’이 발표되었다. 당초 ‘한국의 명저(베스트) 100권’을 엄선할 예정이었다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냥 100권’이 돼 버렸다. 놀라운 건 이 100권의 책을 1년 안에 번역 출간한다는 것. 선정위원회 황지우 위원장의 표현을 빌면, ‘문화의 삼풍백화점’이 우려되지만, “불가사의한 순발력과 저력에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해서 우리도 더불어 놀라고, 우려하고, 기대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런 류의 호들갑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출판/번역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지원이 배가될 수 있다면,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관심을 갖는 쪽은 시와 철학 분야인데, 먼저 기존에 많이 번역된 시인/작가들을 제외한다는 방침하에 선정된 시집들은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민음사),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오규원의 <사랑의 감옥>(문학과지성사), 이성복의 <남해금산>(문학과지성사), 천상병의 <주막에서>(민음사), 그리고 최승호의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열림원)로서 모두 7권이다.

아쉬운 것은 이들 시집들이 모두 독어(김수영, 신경림, 오규원, 천상병), 스페인어(기형도, 최승호), 프랑스어(이성복)로 번역되기 때문에, 내가 직접 읽어볼 수 없다는 것(나는 김소월, 서정주, 김춘수, 김지하 등의 영역시집과 <님의 침묵>의 체코어역 시집을 갖고 있다). 짐작컨대, 이성복이 직접 번역에 간여할 듯한 <남해금산>이 가장 신뢰할 만하지 않을까 싶은데, 읽어보고 싶은 시집은 스페인어역 <입 속의 검은 잎>이다.

철학쪽으로 선정된 책들은 대개 최근에 나온 책들이다. 김영두의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가 작년에 나온 책이고, 이대출판부에서 나온 <동아시아여성의 기원>도 재작년 연말에 나온 것이며, 이승환 교수의 <유교 담론의 지형학>(푸른숲)은 불과 지난 1월에 나온 책이다. 아마도 내용과 더불어 번역의 용이성이 고려된 선정인 듯하다.하지만, 재미철학자인 이광세 교수의 <동양과 서양, 두 지평선의 융합>(길)에 실린 글들은 대개 영어로 먼저 씌어진 걸로 아는데, 영어로 번역한다고 하니까 좀 어리둥절하다. 역시 영어로 (아마도 먼저) 씌어진 김재권 교수의 <심리철학>(철학과현실사)처럼 독어로 옮겨진다면 모를까.

철학분야 선정 14권의 책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고미숙의 <열하일기 -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와 <니체가 뒤흔든 철학 100년>(민음사)이다. 얼마전 ‘회사원’ 강유원씨로부터 모욕에 가까운 비난을 받은바 있는 <열하일기>는 프랑스어로 번역되는데, ‘들뢰즈의 언어’로 번역된다고 하니까 현지인들에게 좀 흥미를 끌지도 모르겠다(‘박지원의 언어’는 누가 번역할는지 궁금하지만). <니체>는 당당하게 독어로 번역되는데, 현단계 한국의 서양철학 연구수준을 대표할 만한 책으로 선정된 듯하다(이 대표성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론도 없지 않지만). 번역에는 아마도 독일철학 박사들이 여럿 동원되어야 할 듯하다...

비록 관료적인 ‘한건주의’식의 번역사업이긴 하지만, 우려보다는 기대를 충족시켜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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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3-16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할 수 있을지 정말 우려되는군요. 번역의 질이 좋다고 해도, 몇몇 책들은 그 내용으로 비아냥이냐 받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4-03-17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기대할 건, '불가사의한 저력'인 것이죠. '비아냥' 정도의 반응도 '반응'아닐까요? 제 짐작엔, 그냥 정적 속에 파묻힐 것 같은데...

포월 2004-03-28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야 보다 철학 분야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공 탓보다 어이없는 탓이 크겠습니다. [열하일기..]는 사실 굳이 경직된 태도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철학적인 것(?)으로 봐줄만한 것인지 언제나 의심스러웠습니다. [니체] 역시 실린 논문들의 수준이 매우 고르지 않아 부적절해 보입니다. 이런 책이 포함되었다는게 아무리 학문과 현실의 논리가 얼마간은 분리되어있다고 하더라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모욕감을 줄 수도 있는 듯 합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어떤 반응이 나오건 상관없이...
 

 

 

  

 

오늘자(2003.11.1) 한겨레의 <책과사람>란에 고정칼럼인 '김재기의 책읽기'는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를 다루고 있다. 모리스는 영국의 저명한 동물행동학자로서(그는 노벨상 수상자인 니코 틴버겐의 제자이다) 인간을 대상으로한 대중적인 동물행동학 저서들로 유명하다. 물론 우리에게도 꽤 많은 책들이 번역 소개돼 있다(한 가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재미있는 그의 자서전이 절판된 지 오래됐다는 점이다. 김석희 번역이니까 번역도 날림이 아닌데. 기본 부수 이상은 팔릴 만한 책이 사장돼 있다는 건 좀 안타까운 일이다. 내 기억에 원제는 '동물들과의 나날'인데, 우리말 제목은 촌스럽게도 '옷을 입은 원숭이'였다. *<나의 유쾌한 동물 이야기>로 재출간됐다).

칼럼의 필자는 철학자로서 '동물+알파'로서의 인간 공식에서 동물(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동물행동학이나 이후의 사회생물학(그리고 진화심리학)에 대해서 불편한 심정을 숨기지 않는데(그 불편함을 가중시키는 것이 이러한 책들의 '재미'이다), 칼럼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돼 있다.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인문학적 담론들을 실증적인 생물학적 탐구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생물학의 오만은 유전자의 해독이 모든 수수께끼를 풀어줄 것이라는 망상처럼 해롭고 위험하다. 또 그것은 성경의 자구가 모든 지적 탐구를 대신해야 한다고 믿었던 낡은 신학의 강요만큼이나 폭력적이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탐구는 자기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 어떤 진리도 한계를 벗어나면 오류가 된다는 변증법의 지침이 여기서도 필요하지 않을까?"

사회생물학이란 사회성 동물들에 대한 진화론적 행동과학이다. 그리고 인간이 사회성 동물의 일종인 이상, 그 사회적 행동의 많은 부분이 사회생물학에 의해 해명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창시자인 에드워드 윌슨도 강조하고 있듯이,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이며, 그것은 환경에 대한 다양한 적응기제의 산물이다. 때문에 리처드 도킨스 같은 경우도 인간에게서 생물학적 유전자(Gene)과 대비되는 문화적 유전자(Meme)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칼럼 필자의 오류는 사회생물학을 몇몇 테제적 주장으로 단순화시켜서, 그것을 모든 인문학적 담론과 모든 지적 탐구를 대체하고자 하는 오만한 주장으로 환원시킨 데 있다. '동물+알파'에서 알파는 동물성에 부가된 것이지, 결코 그것과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바람직한 철학적 태도는, 칸트가 뉴턴의 물리학에 대해서 그랬듯이, 현대 생물학의이론과 주장들을 이해/소화해서 그것이 갖는 철학적 함의를 반성하는 일이다.

그건 분자생물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사회생물학과 분자생물학을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사실 둘의 전제는 많이 다르며 사이가 그다지 좋은 것도 아니다. 물론 몇몇 유전학자들은 유전자결정론식의 주장들을 하지만,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오늘날의 분자생물학은 인간이 유전자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더 지지하는 듯하다(게놈 프로젝트 결과가 말해주듯이, 유전자의 위치정보는 그 복잡한 '기능작용'에 비하면 사소하다). 따라서 '낡은 신학' 어쩌구 하는 논리는 매카시즘적인 배제의 논리일 따름이다.

모든 지적 탐구에 대해서 폭력적인 전횡을 일삼아온 것은 사실 철학적 담론이었다. 물리학과 심리학에서의 '혁명' 이후에 철학이 차츰 분수에 맞게 '언어' 분석에나 몰두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따라서 그러한 자기 자리지킴에의 요구가 향해야 하는 것은 생물학 '혁명' 이후의 철학이지 생물학이 아니다.

이번에 방한했던 지젝의 강연문 중 "유전공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를 읽고 감화를 받은 적이 있는데, 지젝은 유전공학과 인지과학의 최신 성과들과 쟁점들을 섭렵하면서 그것이 정신분석과 어떻게 접속될 수 있는지, 정신분석학적으로 어떻게 재독해될 수 있는지를 다루었다(덕분에 나는 스티븐 핀커의 책을 여러 권 샀다, 살 수밖에 없었다). 철학의 '낡은 경전들'에 대한 자구풀이로 철학을 대신하면서 "그 어떤 진리도 한계를 벗어나면 오류"가 된다고 변명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해야 할 일들과 읽어야 할 책들은 산더미이다.

도전은 거부되거나 회피되어서는 곤란하다. 사회생물학(진화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은 철학에 대한, 인간학적 담론에 있어서 철학의 권위와 우선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라캉은 정신분석학을 통해서 철학을 해소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이 도전에 제대로 맞서는 일은 '적'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제자리에 있을 테니까, 너도 제자리에 있어라"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복지부동의 자세이다. 그러한 자세로는 동물성이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침식하는지, 우리는 왜 맨날 이 모양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제 필요한 것은 '영혼의 담론'만으로 인간을 논의해왔던,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논의만으로 사회적 기득권을 향유해 왔던 이들이(철학교수들은 그런 점에서 목사들과 상통한다) 물정을 좀 알고, 정신을 차리는 일이다. 게으른 것은 자유이지만, 그것을 현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보기에 흉하다...

03.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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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26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유쾌한 동물 이야기'를 읽다가 하도 재미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나 보려고 들어왔더니, 역시나 '로쟈와 나귀'(나귀를 몰고다니는 로쟈의 모습, 아니면 로쟈를 끌고다니는 나귀의 그림이 연상된다는, 하여간 제 이미지-세계 속에서는 짝을 이룰 법한 두 대상)의 글들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벌써 몇년 지난 글인데도 관점이 뚜렷해서 '감화'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젝한테도 고마워해야겠군요)

아마도, 철학하는 사람들이 과학을 섭렵하는 속도보다 과학하는 사람들이 철학을 흡수하는 속도가 더 빠를 듯 합니다.
 

조금 늦게 출근해서 점심을 먹고 나서야 인터넷을 둘러보는데(*이 글은 2003년말에 씌어졌다), 미디어다음의 메인 뉴스가 “여배우 매염방 암으로 사망”이다. 그녀가 암투병중이라는 얘기는 오래전에 흘깃 지나가면서 들은 거 같은데, 그럼에도 2003년을 불과 이틀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까 갑작스럽다. 지난번 장국영의 자살에 이은 매염방(Anita Mui)의 죽음으로 이들 홍콩의 가수이자 배우들을 좋아했던 이들에게 올해는 ‘최악의 해’로 기억될 모양이다.

 

 

 

 

장국영이나 매염방의 열혈팬은 아니지만, 나는 그들의 음악, 특히 영화주제가들을 좋아한다. 자신이 주연도 맡았던 영화의 주제가로 장국영이 부른 <천녀유혼>과 <영웅본색3>의 주제가로 매염방이 부른 <석양의 노래(夕陽之歌)>가 그것들이다(나는 그 노래들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주연으로 출연했던 관금붕의 <인지구>를 빼놓을 수 없다(이 영화로 매염방은 대만의 금마장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에 장국영이 <아비정전> <동사서독> <해피 투게더> 등 왕가위 감독의 영화 여러 편에서 최고의 연기를 선보인데 반해, 매염방은 몇몇 무협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지만(그녀는 연기력에 비해서 좋은 영화를 만나지 못했다), 재주 많은 두 사람이 홍콩 연예계의 한 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흔히 386이라고 부르는)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



나에게 매염방은 개인적으로 한 친구에 대한 기억과 연결돼 있다. 그 친구는 사실상 나에게 매염방이란 배우의 존재 자체를 각인시켜준바, 언젠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가 (나로선 이외였지만) 매염방이라고 했다(그때 나는 아마도 임청하를 좋아하는 배우로 들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입 밖에 내진 않았는지도). 그러면서 그 친구가 내세운 이유는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었다(나는 턱이 야무진 배우를 좋아한다. 임청하나 애슐리 주드처럼).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매염방 음반(테입)은 1989년에 나온 <브라질>이고, 커버에는 예의 게슴츠레한 눈빛과 도톰한 입술의 그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금은 음반을 사는 일이 아주 드물지만, 그때만 해도 한번 산 테입은 거의 닳을 정도로 들었고, 매염방의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음반은 A면(The Bright Side)과 B면(The Blues Side)이 각기 다른 주제로 돼 있는데, A면의 첫곡이 <여름날의 사랑(夏日戀人/ Summer Lover)>이고, B면의 첫곡이 바로 <석양의 노래(Sunset Melody)>이다. 매염방과 더불어, 어느덧 우리 인생의 여름날들은 다 저물어 간 듯하다. 하지만, 그녀가 부르는 <석양의 노래>는 얼마나 박력 있고 장쾌한가! 나는 그녀가 암과의 사투 속에서도 그러한 의연함을 지켜갔으리라고 믿고 싶다.

매염방을 좋아했던 친구는 이후에 입술이 도톰하지는 않아도 매염방만큼 훤칠한 미인을 만나서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감쪽같이 숨겨왔던 자신의 배우자감을 처음 내게 소개하면서 의기양양해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그가 지난봄 끄트머리에 세상을 버렸다.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고, 우울해 하던 그를, 한동안 자주 보지 못하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내가 그를 다시 찾았을 때, 그는 더 이상 같은 하늘 아래 있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고통스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때, (나를 포함하여) 세상 그 무엇도/누구도 그의 의지가 되어줄 수 없었다는 것이 슬프고 안타깝고 아쉽다. 그는 의연했던 것일까, 어리석었던 것일까?..

 

 

 

 

지난주말에 산 정현종의 산문집 <날아라 버스야>에 실린 ‘숨막히는 진정성의 시: 바예호 읽기’를 읽으며, 오래 잊고 있었던 이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1892-1938)를 다시 떠올렸다. 그의 시선집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문학과지성사)가 바로 5년 전인 1998년 12월에 나왔었고, 나는 그해 겨울을 레바나스를 읽으며, 바예호를 읊조리며 보냈다(나는 스페인어권 시인들 가운데 미겔 에르난데스와 바예호를 좋아한다). 평생을 경제적 고통과 병마로 시달리다가 죽은 시인 바예호는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고 정의하는 그의 시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이다. “호이 메 구스타 라 비다 무초 메노스(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
항상 산다는 것이 좋았었는데, 늘 그렇게 말해왔는데.
내 전신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내 말 뒤에 숨어 있는
혀에 한 방을 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엎어져서라도 어쨌든 산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그리도 많이 살았건만 결코 살지 않았다니! 그리도 많은
세월이었건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세월이 기다린다니!”
이렇게 나는 늘 말해왔고 지금도 말하니 말이다.

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pero siempre me gusta vivir: ya lo decía.
Casi toqué la parte de mi todo y me contuve
con un tiro en la lengua detrás de mi palabra.

Hoy me palpo el mentón en retirada
y en estos momentáneos pantalones yo me digo:
¡Tánta vida y jamás!
¡Tántos años y siempre mis semanas!...
Mis padres enterrados con su piedra
y su triste estirón que no ha acabado;
de cuerpo entero hermanos, mis hermanos,
y, en fin, mi ser parado y en chaleco.

Me gusta la vida enormemente
pero, desde luego,
con mi muerte querida y mi café
y viendo los castaños frondosos de París
y diciendo:
Es un ojo éste, aquél; una frente ésta, aquélla... Y repitiendo:
¡Tánta vida y jamás me falla la tonada!
¡Tántos años y siempre, siempre, siempre!

Dije chaleco, dije
todo, parte, ansia, dije casi, por no llorar.
Que es verdad que sufrí en aquel hospital que queda al lado
y está bien y está mal haber mirado
de abajo para arriba mi organismo.

Me gustará vivir siempre, así fuese de barriga,
porque, como iba diciendo y lo repito,
¡tánta vida y jamás! ¡Y tántos años,
y siempre, mucho siempre, siempre, siempre!



한때 인생이 아주 싫었던 날들에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버텼다. 에밀 시오랑의 말대로, 자살에 대한 관념은 자살을 유예시킨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고 투덜거리면, 어느새 삶은 그럭저럭 살 만한 것이 된다. 그래서 말하게 된다. “엎어져서라도 어쨌든 산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내가 지난봄에 그 친구에게 바예호를 읽어주었더라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한해가 가고 있다. 하지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또 다른 한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건 산 자들의 몫이다. 저무는 해에 삶을 놓음으로써 자유를 얻은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 내 친구의 명복을 빌고, 매염방의 명복을 빈다(이 도톰한 여가수 덕분에 그 친구가 좀 덜 심심할까?).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죽은 어린 남매의 명복을 빈다. 전철에 몸을 던져 우리가 한국인임을 부끄럽게 한, 한 외국인 노동자의 명복을 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지진으로 숨진 수만의 이란 사람들...

바예호의 사후에 발표된 시들 가운데 한편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전투가 끝나고,
한 사람이 죽은 전사에게 다가왔습니다.
“죽지 말아!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두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를 두고 가지마! 힘을 내! 다시 살아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스물, 백, 천, 오십만의 사람들이 와서 절규합니다.
“이렇게도 많은 사랑도 죽음 앞에서는 힘이 없구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수백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애원했습니다.
“형제여, 여기 있어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그러자, 전세계 만민이 몰려와 그를 에워쌌습니다.
슬픈 시신은 감동이 되어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맨 처음에 온 사람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걸어갔습니다.

-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멀리해다오.12>

200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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