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마지막 주말이지만 날씨는 이미 5월 중순을 넘어서 치달리고 있는 듯하다. 초록이 무성하고 꽃들이 만발하다. 하지만 이런 날도 '무능한'(요즘은 '뻔뻔하다'는 소리도 자주 듣는다) 가장은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고 학교에 나와 있다. 책상엔 읽어야 할 책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고 머릿속에 조만간 쏟아내야 할 글자들이 웅성거린다(제대로 잘 뽑아내야지 그나마 쫓겨나지 않을 텐데). 나도 그렇지만, 주말까지 쉬지 못하는 책들도 안쓰럽긴 마찬가지이다.

 

 

 

 

지난주에 나온 책 중에는 <일의 발견>(다우)이란 것도 있는데(원제는 'The Working Life'), 책 소개 중에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다. "지금 세계는 두 부류의 인간종으로 나뉘고 있다. 그들은 바로 노동자와 실업자다. 노동하는 인간은 마치 '인간기계'처럼 괴로워하고, 실업자는 인간축에도 들지 못하는 형편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대체 왜 일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도 사라졌다. 인간이라면 일을 해야하고, 일을 하는 인간은 그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실업자가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단지 낙오자의 푸념일 뿐이다."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듯 아주 직설적으로 일에 대해서 까발려놓고 있다. 게다가 너무도 선명한 구도. 노동자냐, 실업자냐. 무엇이든 따져묻는 못된 습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자신의 '신분' 자체의 애매성 때문에 그 이분법에 동의하기 어렵다(법적으로 나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애매성? 공부도 노동이라면 나도 노동자이긴 한데, 주변에서는 실업자 대우를 받는다. 그러니까 주변에서 보기엔 (준)실업상태에 있으면서 나 혼자 '노동'한다고 피곤해 하는 꼴이다. 그러면서도 '대체 왜 일을 하는가?'란 고민도 끼고 다니는 걸 보면 '일을 하는 인간'으로서의 자격 조건에도 미달한다(그이들은 그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다고 하니까).

해서 나의 '생각'은 나의 '푸념'인바, 나의 공부 또한 곧 나의 푸념이다. 이건 상호 교차적이어서, 나의 공부는 범주상 '실업자의 노동'이면서 '노동자의 푸념'이다. 소개에 다르면 <일의 발견>이란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노동철학에서부터 피터 드러커의 경영이론까지를 다룬다고 하는데, 거기서 살짝 암시되는 것이지만, 현대사회에서의 일이란 '비즈니스'이고 '돈버는 일'를 뜻한다. 이게 일에 대한 아주 노골적인 정의이다. 현대인들에게 일이란 돈버는 것이면서 거꾸로 돈버는 게 일이다. 돈되는 일이 아닌 것은, 돈 안되는 일은 일도 아니다.(어느 시에서는 "지나간 일은 일도 아니다"라고 노래되지만).

 

 

 

 

그렇다면, 일로부터의 해방, 곧 노동해방은 돈으로부터의 해방과 사뭇 긴밀한 연관을 갖지 않을까? 화폐(돈)에 대한 사고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 아닐까?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정신의 기원>(이매진, 2003)의 한 장을 바로 그 문제에 할애한다. 지역통화로서의 시민통화를 자본주의 화폐경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혹은 그걸 좀 제어하기 위한 원리이자 장치로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 재무적인 사고가 좀 빈곤한 나로서는 그러한 주장을 본격적으로 논평할 형편이 안되지만, 적어도 그런 통화를 도입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조금 바꿔보자는 아이디어가 '도덕적 자본주의'에 대한 기대/요구보다는 '현실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한다.  

지난 4월 19일 한겨레에는 홍세화 위원과 김수행 교수와의 대담이 실렸는데, 신자유주의를 비판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 대담의 후반부에 김 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유럽에서는 실업문제도 제대로 해결 못하고 사회복지도 후퇴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선진국 쪽에서 먼저 무너질 것입니다. 그 다음에 후진국으로 신자유주의 해체가 넘어오겠죠... 후진국에서는 선진국보다 더 빈부격차가 심하고, 실업자는 많고, 외국 자본의 횡포는 심해서, 반발이 거세질 것이고요. 결국 세계적인 민중연대가 상당히 진척될 가능성이 큽니다. 선진국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가 터져나오고, 후진국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시작되면, 신자유주의는 수년내에 막을 내릴 것이라고 봐요."

 

 

 

 

마지막 문장의 전망에서 방점이 (반대가 터져나오고 움직임이 시작되면, 이라는) '조건'에 놓여 있는 건지, (수년내에, 라는) '시점'에 놓여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의 진단과 전망은 아주 단순명쾌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홍 위원의 질문은 비록 그에 맞장구치는 것이지만 한술 더뜬다. "신자유주의가 무너지고 난 뒤의 대안은 무엇입니까?" 그에 대한 김 교수의 대답: "자본 쪽에서도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갈 것입니다... 자본 이동을 너무 자유롭게 해서 금융공황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규제하는 방법을 연구할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평등주의적인 사회를 요구할 거예요. 자본과 사람이 자유롭게 이동하지만 그 안에서 수익성 위주로만 가는 방식에 규제를 가하게 될 것이고, 생태 문제를 포함해 모든 결정에 더 많은 사람이 주체로 참여하는 경제형태로 갈 것입니다."

이러한 전망의 결론은 '장미빛'이다. "복지국가가 되살아나면서 좀더 평등하고, 좀더 많이 참여하고, 계획성이 더 많이 도입되는 자본주의입니다. 복지국가의 개념에서, 기본적으로는 자본가가 주도권을 갖겠지만, 노동자와 일반 시민들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한단계 높은 수준의 자본주의입니다." 요는 신자유주의 단계의 자본주의를 넘어선 '한단계 높은 수준의 자본주의'로의 도약인 것(자본가가 '여전히' 주도권을 갖지만 노동자/시민이 '많이' 참여하는). 아주 듣기 좋은 말이긴 하지만, 나는 이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식의 '참여경제'라면, '정도'의 문제로 포섭될 수 있는 게 아닐까?(저마다의 참여경제!) 

해서 공부가 부족하고 이래저래 의심이 많은 나의 결론은 아직도 푸념이 많이 섞인 것이다. "어져 내 일이야!"(황진이) 같은 것. 그녀의 이 시구를 영어로는 'O my business!'라고 옮겨놓고서 혼자 낄낄대던 적도 있었다. 오래전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같잖은 노동'에 매여 있는 나의 '비즈니스'는 상황이 이제나저제나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 않다... 

05.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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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다른 주저없이 손에 꼽을 수 있는 책 몇 권이 출간됐다. 이런 경우는 반가우면서도 속이 쓰리다. 속이 쓰린 건 당장에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혹은 보다 원초적으론 책을 구입할 만한 여력이 안된다는 것도 이유가 된다. 그러다가 품절/절판되는 책들도 드물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어떻게 해야지 출판사들이 책을 알아서들 보내줄까, 간혹 그런 공상을 하기도 하지만, 주로 칭찬보다는 험담을 늘어놓는 주제이기에 곧 그런 기대를 접어둔다. 물론 나는 거저 얻은 책에 대해서는 험담하지 않으며, 나의 험담은 주로 내 돈 주고 산 책들에 대해서이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투자한 게 있으니!

해서 이것도 일종의 악순환이다. 내 돈 주고 사서 읽으니, 책에 대한 기대가 높을 수밖에 없고, 그러니 자연스레 이것저것 트집을 잡게 된다(물론 완벽한 책은 드물며, 대다수는 엉성한 책들이기에 꺼리들은 차고 넘친다). 또 그러니 이래저래 출판사로선 달갑잖은 독자일 테고 그런 독자에겐 책을 거저 보내줄 리 없다. 해서, 나는 여러 곤란 속에서도 책은 내 돈 주고 사서 읽어야 된다. 더더욱 눈을 부라리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책이냐?!(혹 '출판평론가'라는 이들에겐 책을 거저 보내주는지? 영화평론가들에게 시사회 티켓을 보내주는 것처럼. 사실이 혹 그렇다면 조만간 '평론가'란 직함이라도 구해봐야겠다. 그것도 혹 사야 되는 건가?)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슬라보예 지젝의 책과 그에 관한 책이다. 올해도 두 권의 책이 근간예정으로 돼 있는 지젝은 인문학 출판계에 '아무도 그보다 더 많이 쓸 수는 없다!' 상이 있다면 가장 유력한 후보에 들어가고도 남음이 있다. 이번에 나온 건 그의 주저에 속하는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와 입문서인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이다.

'이론서'로서 <까다로운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인간사랑)이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에 이어지는 책이다(그 사이에 <부정성과 함께 남아있기> 등이 놓여 있다). 지난 토요일 마이어스의 책에 대한 중앙일보의 소개 기사에는 국내에 지젝의 저서가 17종이 번역/소개돼 있다고 했는데(그는 개정판이 나온 <향락의 전이>를 두 권으로 카운트했다), 실제 단독 저작은 히치콕에 대한 책까지 포함해서 13권이다(<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은 지젝이 편집한 책이고, 그의 글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 중 내가 '이론서'라고 분류한 책들이 그래도 번역이 양호한 책들에 속하며 부분적인 오역들을 빠져나가면서 꼼꼼하게 읽으면 읽을 수 있는 책들이다. 물론 아무리 지젝의 책들이라 하더라도 내용이 좀 무겁긴 하다.

 

 

 

 

지젝의 또다른 책들은 '영화책'이라 분류될 만한데, 실제로 영화들을 주된 분석대상으로 하고 있다.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새물결, 2001)을 필두로 해서 <삐딱하게 하기>(시각과언어, 1995),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한나래, 1997),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등이 그런 책들이다. 여기에 분류된 책들도 비교적 읽을 만한데, 나열된 순서를 거꾸로 하면 오역이 그래도 적은 순서가 된다. 지젝의 책 가운데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된 <삐딱하게 하기>는 처음 소개한 공로는 인정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오역이 적지 않다(해서 이 책에 대한 만족도는 뒤로 갈수록 점점 떨어진다). 요즘도 절판되지 않고 계속 팔려나가는 책이므로 개정판이 나올 법하지만, 아주 명백한 오타나 오역들이(적지 않은데) 교정되지 않은 채 판을 찍고 있는 걸로 보아서 출판사로선 그럴 의향은 없는 듯하다(전향적인 방향으로 개정본 출간을 검토해주었으면 한다).

해서, 영화책들 가운데, 내가 보기에 그래도 가장 안전하게 참조할 수 있는 건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들을 주로 다루고 있는 <진짜 눈물의 공포>인데, 이건 의외로 판매실적이 저조한다. 알라딘을 기준으로 하면, 조잡한 번역의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인간사랑)보다도 세일즈 포인트가 낮게 나온다(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그 책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그리고 몇몇 오타나 오역이 없지 않지만, 나로선 지젝에 입문하려는 독자라면 가장 안전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라고 추천하겠다.

그리고 물론 지젝의 나머지 책들이 있으며 대부분은 오역의 지뢰밭이다(오역 사례집으로의 활용가치는 있겠지만, 일반 독자라면 차라리 안 읽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듯하다). 그러니 지젝을 미워하고 말고 이전에, 지젝은 우리말로 읽는 것 자체가 드물고도 어려운 저자이다(사실, 정도의 문제일 뿐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그렇다. 해서 한국어로 똑똑해진다는 건 정말 힘들다!). 때문에, 일반 독자들이 읽을 만한 입문서가 절실히 요구되는데, 이번에 출간된 마이어스의 책은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책이다. 요컨대, '가장 쉬운 지젝 입문서'.

이미 루틀리지의 같은 시리즈('Critical Thinkers')의 책으로 클레어 콜브룩의 <들뢰즈>(태학사, 2004)가 출간된바 있고, 나는 그 책을 '가장 쉬운 들뢰즈 입문서'라고 부른바 있다. 그러니 마이어스의 책에 대해서도 같은 소개를 하는 것이 형평에 맞을 것이다(신생 출판사로 보이는 '앨피'는 이 루틀리지 시리즈의 에드워드 사이드 편도 출간했는데, 이 시리즈의 저작권을 상당수 인수한 모양이다. 좋은 시리즈인 만큼 양질의 번역서들이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거기엔 니콜라스 로일의 <데리다>도 포함돼 있는데, 나는 로일의 책을 모스크바에서 지난 가을에 읽었더랬다.)

마이어스의 책은 지난 2003년에 나왔는데, 영어권에서도 그런 류의 지젝 입문서로서는 최초의 책이 아닌가 싶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해 나온 것이 사라 케이의 <지젝: 비판적 입문>(Polity, 2003)이고, 작년에는 이안 파커의 <슬라보예 지젝: 비판적 입문>(Pluto Press, 2004)이 출간됐다. 모두 컴팩트한 분량의 '입문서'들이다. 마이어스의 책도 원제는 국역본처럼 요란한 게 아니라 그냥 <슬라보예 지젝>이며, "왜 지젝인가?(Why Zizek?)"와 "핵심 사상(Key Ideas)", 그리고 "지젝 이후(After Zizek)"라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책을 구하러 맘먹고 오늘 구내서적에 갔더니 아직 들어와 있지 않았다).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이 그러하듯이, 쉬운 문장으로 간결하게 서술돼 있고, 핵심적인 아이디어들은 따로 박스처리돼 있는 등 입문서로서의 요건은 깔끔하게 충족시키고 있는 책이므로 일독할 만하다. 그런데, 국역본의 제목은 왜 그 모양인가? 그거야 책이 좀 쉽게 눈에 띄게 하기 위한 출판사측의 계산 때문일 것이다. 그 계산이 통할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모쪼록 지젝에 대한 오해의 많은 부분이 걷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지젝은 그에 대한 숭배자들 못지 않게 많은 혐오자들도 거느리고 있는 사상가이다. 나로선 그가 내가 읽고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더불어 나는 '같잖은' 비판들을 제시하기에 앞서서 중요한 것은 '읽기'라고 생각한다. 데리다의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읽기'는 모든 비판보다 멀리 간다('같잖은'이란 표현은 강유원의 것이다. 그는 현대 프랑스 철학은 '같잖은' 철학이라고 말한다. 사후 50년이 되지 않은 데리다나 들뢰즈 철학은 아직 유아적인 철학에 불과하고. 나는 그의 표현을 '같지 않은'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읽는다. 데리다의 철학은 헤겔의 철학과 '같지 않다'. 그래서 '같잖은' 철학이다. 아울러 지젝의 철학은 알튀세르의 철학과 '같지 않다'. 그래서 '같잖은' 철학이다. 강유원의 프랑스 철학 비판은 그 자신의 시인대로 감정적인 것인바, 내가 읽고 싶은 건 그런 '같잖은' 감정이 아니라 비판의 실내용이다. 그건 지젝에 대한 갖가지 비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두번째 책은 박노자의 <우승과 열패의 신화: 사회진화론과 한국 민족주의 담론의 역사>(한겨레신문사)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의 목적은 '힘 숭배' 수용의 몇몇 초기 단계들-1883년 부터 1910년까지 미국에 다녀온 초기의 조선 지식인들이나 량치차오와 같은 한국 개신 유림의 '큰 스승', 그리고 개신 유림 계통의 주요 논객 등을 중심으로-을 짚어서 오늘날의 '승자 독식사회', '승자를 위한, 승자에 의한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개화기에 사회진화론 사상이 어떻게 수용되었는가에 대한 관심과 문제제기는 이미 박노자의 이전 저작에서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슬라보예 지젝의 '동유럽의 기적' 혹은 '슬로베니아의 기적'이라면, 원래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란 러시아 이름을 가졌던 박노자는 '러시아의 기적'이라 할 만하다. 나는 그가 러시아의 '선진적인' 교육 시스템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으론 그런 시스템과 무관한 '별종'이지 않을까 싶다. 이미 여러 권의 저작을 통해서 한국인보다 더 예리하게 한국의 역사와 사회에 대해서 비판하고 분석해온 그의 작업은 동의하지 않는 부분에서조차도 더없이 값지고 소중하다. 해서 당분간은 '박노자의 모든 책'이다. 그런 책에 대한 여론의 관심은 아주 소략한데, 짐작에 메이저 언론이라는 조중동이 모두 북리뷰에서 이 책을 다루지 않았다. 책을 낸 한겨레에서만 장문의 서평을 실어주었다. '우승과 열패의 신화'(우수하면 승리하고 열등하면 패배한다는 신화)는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유효하다는 걸 그들의 불편한 '침묵'이 말해주는 것은 아닌지.

 

 

 

 

세번째 책은 진화생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의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철학과현실사)이다. 이 양반이 지난 2월에 작고했다는 걸 서평을 보면서 알았는데, 1904년생이니까 101세의 장수를 누린 셈이다. 책은 그가 100세 때에 쓴 마지막 저서라고 하는데, 이래저래 경탄스럽다(103세에 세상을 뜬 철학자 가다머를 떠올리게 한다). 미국 진화생물학계의 태두로서 진작부터 '20세기의 다윈'으로 불린 마이어이지만, 국내에 출간된 그의 책은 빈약하다. <진화론 논쟁>(사이언스북스, 1998)으로 처음 소개됐고, <이것이 생물학이다>(몸과마음, 2002)로 거장의 면모를 살짝 보여주었을 뿐. 마이어의 모든 책이라고 하기엔 너무 빈약하게 소개됐지만, 나중에 나온 두 권 정도는 읽어둘 만하다(<진화론 논쟁>은 소략한 책이다). 같이 나온 과학책으론 개리 마커스의 <마음이 태어나는 곳>(해나무)이 있다(마이어의 책이 아니었더라면, 이 책이 지난주의 교양과학서이다). 저자는 미국 인지과학계의 새로운 기대주인 듯한데, 노암 촘스키나 스티븐 핀커 같은 대가들이 추천사를 쓴 걸로 봐서 집어들어 손해보지 않을 책이다.

 

 

 



네번째 책은 사이먼 윈체스터의 <영어의 탄생>(책과함께)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OED라고 불리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곡절 많은 사전 편찬사이며, OED와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 노력, 자부심, 좌절 등을 함께 담은 흥미로운 휴먼스토리이다. OED 제작에 깊이 관여한 머리 교수와 죄수 마이너의 이야기를 담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교수와 광인>의 저자 사이먼 윈체스터가 썼다." 내가 덧붙일 말은 없으며, '영어의 시대'를 살고 있는 만큼, 그 사전 편찬과 관련한 이야기도 한번쯤 귀담아 들어봄 직하다. <한국어의 탄생> 같은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끝으로, 이젠 '원로' 비평가가 된 김윤식 교수의 <김윤식 선집 7 - 문학사와 비평>(솔출판사)이다. 서점에 깔린 것만 보고 책을 들춰보지는 않았는데, 하여간에 아직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비평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선집이 거의 다 추스려지고 있는 듯하여 한편으로 세월무상을 느끼게 된다. 학부시절 신간으로 나온 <낯선 신을 찾아서>(일지사, 1988)를 서점에서 사들고는 도서관에서 읽던 기억이 새로운데 말이다. 나는 이 독보적인 문학사가이자 비평가의 '자질'이 '낯선 신'에 대한 갈망과 열정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갈망/열정을 안은 이라면, 방황은 영원할 수밖에 없으며 책읽기 또한 종결될 수 없다(그때 비평은 운명의 표정을 갖게 되리라). 개인적으로 비평집들을 읽을 때 내가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러한 열정/수난의 함량이며, 그 기준은 김윤식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 선집과 함께 나란히 나온 것이 <비도 눈도 내리지 않는 시나가와역>(솔출판사)인데(역시 예술기행), 책읽기의 어느 경지에 이르면 비도 눈도 내리지 않는 어떤 영토에 가닿게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시방 내가 있는 곳은 아직도 바람 많이 불고 꽃이파리 나부끼는 땅, 생의 푸르름이 아직 이념의 회색빛보다 진한 곳, 진하다고 믿어지는 곳. 비도 눈도 내리지 않는 그 어느 저녁을 위해서 아직은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다. 갈길이 멀다..

05. 04. 25.

 

 

 


 

P.S. 좀 지난 책이지만, 지난 2월말 정현종 시인의 정년퇴임 기념으로 나온 책 <영원한 시작>(민음사)도 기록해 두고 싶다. 후배 교수인 정과리가 시인의 제자들의 글을 묶은 것으로 일종의 기념논총이다. 소개에 따르면, "필자들은 정현종 시학의 요체가 '상상력'이라고 보았고, 상상은 질료의 운동과 교감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은 1부 '질료'와 2부 '운동'으로 구성돼 있고, 3부에서는 '교감'이란 제하에 스승과 제자들이 나우었던 정담을 싣고 있다. 이러한 구성을 틀지우고 있는 건 물론 바슐라르의 상상력론인바, 그것이 한 시인의 총체적인 시세계를 조명하는 데 바쳐지고 있는 것은 드문 경우이다. 해서 정현종의 독자와 바슐라르의 독자가 모두 한번쯤 읽어볼 만하겠다. 읽어서 남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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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4-25 18:08   좋아요 0 | URL
출판평론가에겐 물론 책을 보냅니다^^

로쟈 2005-04-25 20:14   좋아요 0 | URL
그들이 듣기 좋은 소리들만 늘어놓는 이유가 있는 거겠죠...

비로그인 2005-04-25 20:47   좋아요 0 | URL
유혹하는 책들이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르는데 그것에 손을 뻗을 수 없을때는 가슴이 쓰라립니다...;;; 자본의 압박...;;;

릴케 현상 2005-04-25 21:08   좋아요 0 | URL
ㅎㅎ 전번에 발마스님은 쓴소리했다가 잘렸잖아요^^출판인회의 이달의 책이었던가?

로쟈 2005-04-26 12:56   좋아요 0 | URL
잘릴 만했지요. 발마스님이 좀 직설적이잖아요. 아주 훌륭한 책이지만, 몇 가지 '옥의 티'가 있다고 하면 됐을 것을(물론 서평은 그 티잡기로 도배를 하더라도)...

2005-04-26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4-26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4-26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니다 2005-04-27 09:58   좋아요 0 | URL
메일 받으셨나요? 발송 실패했다는 메세지가 자꾸 뜨는군요. 내용을 저장하질 않아서 못받으셨으면....ㅠ.ㅠ
 

"발레냐 유전이냐"란 글에서 한국과 러시아의 두 가지 생존방식에 대해 몇 마디 한 바 있는데, 오늘자 한겨레의 한 기고칼럼을 읽으면서 다시금 돌이켜보게 되었다. 김형태 변호사는 "평범한 이들을 위한 변명"이란 기고문에서 <지식인의 두 얼굴>(폴 존슨의 이 책에 대해서는 나도 언급한 적이 있다)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전제하고("이 책은 우리가 떠받드는 위인들의 또 다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중 톨스토이의 사례를 들어서 지식인들의 '위선'에 대한 비판과 함께 (지식인이 아닌) '평범한 이들'의 행복론을 펼친다.

 

 



 

먼저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교훈소설"을 썼지만, 그 자신이 "평생을 성욕, 물욕, 명예욕에 시달렸다. 저 자신이 여자들에게 욕심을 내놓고는 거꾸로 여자들을 음탕과 방종의 원흉이라며 사람 취급을 안 했다."(이런 위선이!) "톨스토이 자신의 지나친 욕심에 대해 그저 '내 탓이오'라고 조용히 혼자 되뇌었으면 될 것을 성욕 자체를, 나아가 애꿎게 여자들을 마귀 대하듯 했던 그는 세상 그리고 존재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미숙아이지 싶다." 차라리 "그가 가르치려 들었던 보잘것없어 보이는 농노는 아마 그 이치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폴 존슨의 (이전 번역본인) <지식인들>을 읽은 지 자못 오래 되었으므로, 그의 신랄한 지식인 비판의 내용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브레히트 비판이었다. 나 또한 이후에는 브레히트의 수사적인 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톨스토이에 대해서만 그가 유난히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 것은 아니고, 또한 톨스토이 자신이 그런 비판으로부터 면제될 이유가 없다는 점에 나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을 가능하게 한 '전거들'이 대부분 러시아문학의 이 '거인'에게서 나왔다는 점도 고려해볼 필요는 있다. 우리가 그의 '성욕, 물욕, 명예욕'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참회록> 등을 필두로 한 톨스토이 자신의 '반성문' 덕분이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말하더라도) 톨스토이에게는 '반성하는 자아'와 '반성되는 자아' 사이의 자기분열이 있었던 셈. '반성되는 자아'에만 초점을 맞추어 ('도덕의 달인'이라 할 만한) 그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좀 과한 일이지 싶다.

"그가 가르치려 들었던 보잘것없어 보이는 농노는 아마 그 이치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란 대목도 (존슨의 생각인지 김 변호사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정작 톨스토이 자신이 강조해마지 않은 것이 그 농민들의 미덕이다(1861년에 러시아에서는 농노해방이 단행되었으므로, 1828년생인 톨스토이의 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주로 '농노'가 아니라 '농민'이다. 그러니까 지주-농노 관계가 아니라 지주-소작농 관계이다). 그리고 톨스토이가 가르치려 들었던 것은 그 농민들이 아니라 러시아의 지배계급, 즉 귀족과 지주들이었다.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농민들에겐 책이란 것 자체가 무용지물이었고. 톨스토이 자신은 '농민이 되고자 했던 (참회하는) 귀족/지주'였던 만큼 "그가 가르치려 들었던 보잘것없어 보이는 농노"란 표현은 톨스토이에 대한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그는 농민들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런 정도의 오해는 문학에 문외한인 '평범한 이들'이 가질 만한 오해이다. 하지만, 톨스토이와 같은 (잘난 체하는) 지식인 비판에 이어지는, 김 변호사의 무임승차성 주장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성욕 말고 물욕도 그렇다. 사자는 저 살기 위해 영양 새끼를 갈가리 찢는다. 거기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이 피곤한 세상 겨우 살아가려면 좋은 학교 나와 좋은 직장 가지려고 아등바등할 수밖에 없다. 집 한 채 마련하려면 부동산 투기며 주식투자도 안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처세술이 지식인의 (위선적인) '두 얼굴'과는 다른 '평범한 이들'의 맨얼굴인가?

기본적인 세계관. 우리 사회는 사자가 영양을 잡아먹는 식의 야생적인, 혹은 양육강식적인 세계이며 서로가 먹고 먹히는 이 세계에는 선도 악도 없다. 있는 건 생존투쟁뿐이다. 이 피곤한 세상, 곧 생존투쟁의 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직장' 잡아야 한다(이게 사자의 발톱이고 이빨일 테다). 그리고, 더불어 '부동산 투기며 주식 투자' 해야 한다. "안 할 수가 없다"는 이중부정은 무슨 뜻인가? 안 하고 싶지만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왜? '아등바등' 어떻게든 살아야 하겠기에.

변호사인 필자는 아마도 좋은 학교를 나왔을 것이고, 부동산 투기며 주식투자도 '안 할 수가 없을 만한' 나름대로의 경제적 여유도 갖고 있을 것이다(현 주미대사의 말대로, 어쩌면 '출발'이 달랐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런 처지를 일컬어 그는 '평범한 이들'이라고 통칭한다(세칭 '좋은 학교'를 나왔지만, 그런 '여유'와는 거리가 먼 나는 졸지에 '비범한 이들'에 속하게 됐다). 하긴, 과거 한 대통령이 자신을 '보통 사람'이라고 칭한 적도 있으니 변호사가 자신을 우리사회의 '평범한 이들'로 분류한다고 해서 흠이 될 건 아니겠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나'란 에고(ego)나 '존재'는 그 속성상 깨달음이나 성스러움과는 같이할 수가 없다. '나'란 '존재'가 깨닫고 성인 되려는 것 자체가 '나의 확대'라는 더 고차원의 욕심일 터. 깨달으려, 성인되려 안달하지 말고 그저 내 옆의 보기 싫은 인간이며 밤잠을 설치게 하는 모기며 우리를 순식간에 빈털터리로 만드는 태풍과 어찌 화해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필부필부인 내 주제에 맞는 일이지 싶다. 삼시 세 때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것도 참 즐겁고 암수가 서로 어울려 구름과 비처럼 정을 나눔도 참 즐거운 일이다."

필자의 논리에 따르면, '평범한 이들'이란 '나'라는 '에고'를 포기하지 않는,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깨달음/성스러움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걸 다르게 말하면, '평범한 이들'이란 실상 고차원의 욕심에 들려 있는 위선적인 지식인들이니 성인들이니 하는 부류가 아니라 솔직담백하게 그저 저차원의 욕심이나 충족시켜가며 살아가는 이들이다. 한국 사회에서 소위 (일반적으론 '평범한 이들'이 아니라) '지도층'에 속하는 변호사께서 모기 걱정, 태풍 걱정 하시는 게 대국적인 견지에서인지(이 경우는 나름대로 '고차원' 아닌가?) 직접적인 생존과 관련하여서인지 의문스럽지만, 하여간에 '필부필부'의 소망은 가족들과 같이 식사하고 때로는 ('내 옆의 보기 싫은 인간'은 아닐) 여자들과 운우지정을 나누는 것이다.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요지는 잘난 지식인들/성인들에 주눅들지 말고 우리는 그저 저차원적 욕심에 만족하며 즐겁게 살자라는 것이겠다. 저들이 '욕심 내지 말고 살자'라고 꼬드기지만, 다 '고차원적 욕심'에 지나지 않는바, 괜히 도덕적인 자괴감 같은 거 가질 필요 없다는 얘기. 어차피 인생은 생존투쟁이고 거기엔 선도 악도 없지 않은가. 그저 자식들 공부 잘하고 암수 서로 정다우면 장땡이다, 등등. '평범함 이들'에 대해서 좀 특이한 정의를 내리는 걸 제외하면(지식인/성자가 아니면 다 '평범한 이들'이다? 재벌이나 변호사나 노숙자나 노가다나?) 새삼스러운 건 아니므로 그러라고 해두자. 그렇게 살라고 내버려두자. 교황이나 성철 스님 같은 성인들도 못 말릴 일을 어찌 말리겠는가?

게다가 고차원적인 걸 기대하지도 않으므로, 문학작품에 대한 '평범한 이'의 사소한 오독 또한 그냥 넘어갈 만한 문제이다. 하지만, '비범한 이'인 나로선 좀스럽게도 그런 거나 지적하고자 한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교훈소설을 썼다. 죽을 둥 살 둥 뛰어다녀 봤자 죽을 때는 제 관이 묻힐 한 평 땅밖에 못 가지니 욕심 부리지 마라. 이 이야기를 읽고는 '맞아, 욕심내지 말고 살아보자'고 다짐해 보지만 치열한 생존경쟁의 현실에서 그 다짐은 하루도 못 간다." 일단,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교훈소설'이 아니다. 그냥 '우화적인 이야기'이다(그리고 초등학생들에게 적합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해가면서). '소설'이란 용어를 오지랖 넓게 사용한다는 점은 물론 필부필부다운 일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아니라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내용이다. 다 비슷비슷한 교훈적인 이야기들이니 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하는 것도 지극히 필부필부다운 태도이겠다.

아마도 필자는 톨스토이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을 듯하며, 그저 <지식인들의 두 얼굴>에서 얻은 귀동냥을 밑천삼아 (지난달에 국내에서 대규모 전시회까지 열렸던) 잘난 '톨스토이'도 별거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에 스스로 흡족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내친 김에 ‘평범한 이들’의 저차원적 욕심을 적극적으로 옹호해보자는 발상이 들었는지도. 하지만, 심리학 개론에 나오는 기본적인 얘기지만, ‘평범한 이들’도 저차원의 욕심이 충족되면 곧 고차원의 욕심까지 품게 되는바, 그런 욕심의 확대 또한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영양 새끼를 갈가리 찢어먹는 사자 노릇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내가 굳이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란 ‘사자답지 않은’ 고민도 떠안게 되는 것이다(그런 고민을 무시하는 태도는 ‘평범한 이들’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이해에서 나온다).

성욕, 물욕, 명예욕에 평생 시달렸던 톨스토이이지만, 누구보다도 그러한 욕망과 절연하고자 안간힘을 썼던 이도 톨스토이이다. 1910년 82세의 나이로 가출까지 감행하는(그래서 결국엔 객사하는) ‘노익장’은 그러한 자기부정의 안간힘에서 나왔을 법하다. 그러한 그의 태도에서 ‘위선’만을 읽는 건 자유이다(그걸 ‘평범한 이들’의 자유라고 옹호하는 것까지도). 그리고 그 자유는 그냥 다 톨스토이가 쓴 것인 만큼 대충 작품의 제목과 줄거리를 바꿔치기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자유와 상통한다. ‘농노’에 대한 계급주의적이고 차별적인 시각을 가졌던 위선적인 지주로 톨스토이를 이해하는 태도와도.


 

 

  


하지만, 부동산 투기며 주식투자로 아등바등할 시간을 조금만 쪼개서 톨스토이의 <참회록>이나 <인생론>이라도 제대로 읽어보는 것은 어떨는지. 자기 자신의 에고를 넘어서 자신의 이웃으로 관심을 확대하고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이 경우에는 사회적 기득권)에 한번쯤 의문을 던져보는 것이 그토록 ‘비범한 일’이며 ‘성자(만)의 일’일까? 호랑이나 사자는 죽어 가죽을 남기겠지만,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 또한 (톨스토이의 말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의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예지이다. 해서, ‘평범한 동물’로서의 실존을 선택한 이들의 자기변호를 ‘평범한 인간들’의 그것으로 슬쩍 바꿔치기하는 건 보기에 흉하다(‘평범한 인간들’의 ‘상식’은 한 변호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고귀하며 존엄하다).

05. 04. 25.

P.S. 이 기고문은 한겨레의 여론란에 실렸는데, ‘입바른 소리’들을 주로 해대는, 혹은 그런다고 자부하는 한겨레는 2000년 벽두부터 재테크에 관한(그 실내용이란 게 결국은 부동산 투기와 주식투자 등의 돈 굴리기인데) 특집기사를 실어 한 애독자를 등 돌리게 하더니(재테크와 자본주의 비판은 어떻게 양립가능한가?), 이젠 ‘평범한 인간들’과 ‘평범한 동물들’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젠 ‘평범한’이란 형용사마저도 조심스레 가려서 써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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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4-25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잘 읽었습니다^^

urblue 2005-04-25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퍼 갑니다.

로즈마리 2005-05-02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해서, 저도 비범인 축에 끼게 되는 군요..^^
 

뤽 페리와 단짝을 이루는 알랭 르노는 <68사상과 현대 프랑스 철학>(인간사랑, 1995)으로 우리에게 소개돼 있다. 칸트와 피히테 전문가라는 그는 68사상, 혹은 그들이 '반휴머니즘'이라고 규정하는 구조주의 시대 철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주체 철학, 혹은 새로운 개인주의를 모색하고 있다. 나의 견문으론 그렇다.

 

 

 

 

알랭 르노의 <개인: 주체철학에 관한 고찰>(동문선, 2002)은 짐작에 그의 또다른 주저 <개인주의의 시대>(1989)의 또다른 버전, 혹은 포켓북 버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컴팩트한 분량이어서 프랑스에서의 개인주의 논쟁의 전말과 페리/르노가 주장하는 개인주의 철학이 어떤 것인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줄 수 있을 듯한 책. 하지만, 이 역시나 양질의 번역일 경우이다.

 

 

 

 

우리에게 <패션의 제국>(문예출판사, 1999)으로 번역 소개된 질 리포베츠키의 책을 <덧없음의 제국>이라고 옮길 때부터 좀 의심이 가기 시작하더니 <사유의 패배>(동문선, 1999)의 저자 알랭 핑켈크로트를 다룬 절에서의 아래와 같은 번역은 역자가 어떤 '계산'으로 번역했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게 한다.

"민주적 개인주의의 전망인 난폭함. '유로디즈니'로 회사를, '쥐라기 공원'으로 영화를, 또는 마돈나의 콘서트를 나타냄으로써 구호 만들기의 요구에 스스로를 바치는 방법이 잔인함의 엄청난 희생자들에게 모욕은 아닌지 우리는 분명 자문할 수 있을 것이다. 말놀이는 그 근본원리가 신비한 단어를 대상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 단어들이 아주 심각하게 사물들을 구속할 때는 아마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잔인함이 표현되는, 이론의 여지가 있는 형태를 빼고 생각한다 해도 반론은 계속될 것이고, 그 반론의 논리 또한 검토되어야 한다."(43-4쪽)

이 책은 영어로도 번역돼 있지 않으며 국내 도서관에는 불어본도 들어와 있지 않다. 그러니 나로서는 원문의 내용이 어떠한지 확인할 길이 없고, 그저 이 '난폭한' 번역에 '모욕'을 느끼면서 '희생자'가 되는 수밖에는 없다. 그 모욕을 역자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 "도대체 번역이란 것의 근본원리가 원문을 신기한 단어들로 대체하는 건 아닐 텐데, 이런 식으로 아주 심각하게 오역을 해놓으면, 그건 더 이상 번역으로서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런 식의 번역에 잔인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는바, 아무리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냥 내버려두다면 '반역'(=번역)은 계속될 것이고, 그 반역의 논리 또한 더더욱 뻔뻔스러워질 것이다." '덧없는 번역'은 이젠 그만 나와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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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21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가끔 전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무식해서가 아닐까 고민할때도 있습니다만은..^^

근데 번역글들을 읽어보면 이해를 못했기에 그런 글을 쓴다는 생각이 들고 외국어라는게 제대로 번역하기에 쉽지 않은게 사실인만큼 과연 얼마나 나은 번역을 갖게될지는 희의적입니다.
번역을 교수들 논문실적으로 쳐주거나 (이거 아직도 그렇죠? 갑자기 자신없네요..) 돈을 엄청 주거나 그럼 나아질까요?

로쟈 2005-04-21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을 연구업적으로 평가하는 데 좀 인색한 게 사실입니다. '돈을 엄청 준다면' 당연히 나아지겠죠.^^ 더불어 당연한 얘기지만, 고전이나 중요한 인문/과학 서적의 번역을 위한 국가적/사회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번역자들이 좀더 정신 차려서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제목에서의  '유전'은 遺傳 같은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요즘 언론에서 매일 같이 들먹이고 있는 '러시아 유전개발사업'의 그 油田, 즉 '기름밭'을 말한다(이 기름밭이 자원빈국인 우리 마음의 콩밭이다). 이 유전은 최근, 석유수출로 신흥 경제대국 브릭스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한국인의 고정관념을 대표할 수 있는 키워드로 급부상했다. 그러니까 '러시아'란 수식어구와 가장 안정적인 조합을 이루는 단어로 등장한 것이다. 이름하여 '러시아 유전'. 그것이 기존의 관용적 단어결합인 '러시아 문화', 특히 '러시아 발레'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형국이다.

아침신문은 대개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철도청(현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개발사업 의혹 사건과 관련하여 특검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는 노대통령의 발언을 1면에서 크게 다루었고, 그에 대한 검찰과 정치권의 반응을 자세히 보도했다. 게다가 사설로 훈수도 두고. 이런 사정은 비단 내가 읽은 한국일보만의 것은 아닌 듯싶다. 작년 노대통령의 방러에서도 가장 큰 관심사는 시베리아의 가스 개발 협력건으로 기억된다.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자원부국 러시아는 유전 혹은 가스로 각인돼 있는바, 계속 의혹이 불거져 나오고 있는 유전개발 사업 또한 실상은 그러한 한국식 러시아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게 아니라면, 정상적/통상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 정신이 아닌 듯한 개발투자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사실 그 사건의 내막과 자초지종은 나의 관심이 아니다. 감사원과 검찰, 그리고 특검까지 달려들 태세이므로 사건의 진상은 곧 밝혀질 것으로 믿는다(진상이 없는 사건이 아니라면). 나의 관심은 좀 다른 데 있다. 오늘자 한국일보에는 이달말에 문을 여는 '러시아문화의 집'도 원장 인터뷰와 함께 크게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런 기사들을 읽으면서 러시아를 보는 우리의 시각 자체가 분열(증)적이지 않나 싶었던 것. 이 소개 기사의 타이틀은 "배 곯아도 발레 보는 러시아 알리고파"이다. 

"민간인이 세운 첫 외국문화센터"로서의 의의를 갖는다는 이 '러시아문화의 집'(www.rccs.co.kr) 개원은 러시아문학 전공자로서 반가운 일이고 환영할 만하다. 초대 원장을 맡으신 분과도 안면이 없지 않다(작년 여름에 모스크바 대학 구내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다). 이 분에 따르면,  1991년 유학시절 "모스크바 시내 중심가에 있는 볼쇼이극장과 인근 여러 박물관, 미술관은 항상 만원이었다. 할머니와 손자가 손 잡고 연극을 보러 다녔고, 러시아어 개인교습을 하는 과외선생은 전공자가 아니었는데도 문학 얘기가 평론가 수준이었다.(그런 문호의 풍요를 누리다가 95년 귀국하니 한국은 앙상했다.)"

작년에 러시아어를 가르쳐주던 50대의 여자 교수도 내게 (아마 어릴 적부터 지겹게도 보았을) 발레의 황홀함에 대해 감탄을 곁들여 이야기하던 걸 상기해 보면, 러시아인들의 '문화필'과 자부심은 우리가 못말릴 정도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에 대한 정확한 기술은 "배 곯아도 발레 보는"이 아니라 "배 곯기 때문에 발레(라도) 봐야하는"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러시아 발레의 융성은 그것을 뒷받침했던 제정 러시아 황실의 권력과 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권력의 상관항은 민중의 고통이었다.

 

 

 

 

최근 개봉 10주년 기념으로 다시 개봉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노스탤지어>는 제정 러시아의 한 노예 출신 작곡가의 흔적을 찾아서 이탈리아의 한 온천을 찾아온 러시아 시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에 따르면, 노스탤지어를 못 이기고 다시 조국으로 돌아간 작곡가는 귀족들의 연회가  벌어질 때면 정원에 조각상으로 서 있어야 했다. 러시아 음악과 예술의 그 음울한 깊이는 그러한 고통과 한(恨)을 체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그것은 원래부터 배부른 자들의 예술이 아니라 배곯은 자들의, 배곯은 자들을 위한 예술이었다. 때론 그러한 현실을 초월하고자 했던 간절한 몸짓으로서의 예술(가령 니진스키의 경우).

<노스탤지어>에서의 시인은 이탈리아에는 "구두가 너무 많다"는 독백도 내뱉는데(벤야민은 모스크바에 대해 "시계점이 너무 많다"고 적었다), 그걸 한국식 버전으로 바꾸면 한국에는 "식당이 너무 많다"가 될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아마도 그건 외부자의 시선으로만 감지될 터인데, 러시아에서 1년간 체류하다고 돌아온 내게 가장 눈에 띈 건  너무 많은 식당이었다(가격 대비 만족도에서 한국식당은 짐작에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 느끼한 중국음식을 유난히 좋아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건 떠나기 전의 나로선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렇듯 풍족한 먹거리와 그에 대한 관심(TV의 음식 관련프로그램은 왜 그렇게 많은지!)이 '앙상한 한국(문화)'의 상관항이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극심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추락(러시아는 일시적으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한바 있다) 속에서도 러시아인들을 지탱해준 것이 있다면, 그러니까 그들을 미치지 않도록 해준게 있다면 나는 그것이 '문화적 교양'이 아닐까 한다. 그 교양은 그나마 사회주의 시절 양질의 교육과 문화적 향유를 통해서 형성된 것이었다. 전후 개발독재 과정을 감내하면서 그나마 먹고 살 만한 처지(소위 '물적 토대')를 이룬 한국인들이 자본주의적 물욕과 투기심, 출세욕의 광란 속에서도 버텨올 수 있도록 해준 건, 그러니까 아주 미치지는 않도록 해준 건 '배부르게 먹기'이다(혹은 자식은 배곯지 않게 하겠다는  욕망).

단순하게 말하자면, 러시아가 경제적 허기를 문화의 향유라는 영혼의 끼니로 때웠다면, 한국은 문화적 허기를 복부적 포만으로 무마했다(영혼의 허기는 교회에서 해결하고). 이건 어디가 잘 나고 못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식의 생존을 선택하느냐, 혹은 선택했느냐의 문제이다(그러니까 한국과 러시아는 상사적이지는 않지만 상동적이다).  발레냐 유전이냐.

 

 

 

 

최근 출간된 도이처의 <트로츠키>의 역자는 후기에서 이런 내용을 적고 있다. 지난 99년 그가 언론인으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처음 방문하게 되었을 때 그 책(<트로츠키>)를 번역하던 시절이 생각이 나서 가슴이 뛰기도 했었다고. 그런데, "옛날에는 페테르부르크와 페트로그라드, 레닌이 죽은 뒤에는 레닌그라드로 불리다가 이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그 도시의 언론사 지사장은 그 유명한 동궁(차르의 겨울별장)이 자리잡은 지역의 공산장 서기장을 지냈다고 한다. 나는 소비에트 시절과 지금이 어떻게 다르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는 보드카와 아르메니아산 포도주병을 휘두르면서 우리나라의 폭탄주보다 더 독한 폭탄주를 권하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를 외칠 뿐 혁명의 몰락과 소비에트의 붕괴는 아예 화제로 삼으려 들지 않았다. 그로부터 여섯 해가 니난 지금, 푸틴이 지배하는 러시아는 미국식 자본주의와 부패가 뒤범벅이 된 채 경제대국이 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러나 그 길이 대다수 러시아인들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장담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역자의 암묵적인 전제와는 다르게,  과거 사회주의 시절 러시아에서도 대다수 러시아인들의 삶은 즐겁거나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그건 현재 미국인들의 삶이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방식의 문제이다. 러시아는 과거와는 달리 이젠, 미국과 한국처럼 '배부른 돼지'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유전개발사업에나 눈독들이는 탓에 러시아에 돈을 뜯기기도 하는 한국이지만, 그 길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한 선배이고 교사이다. 러시아는 한국에 배워야 한다).  언젠가 모스크바에도 '너무 많은 극장' 대신에 (이미 많지만) '너무 많은 맥도널드', '너무 많은 식당'이 들어설지도 모를 일이다(그러다가 정말로 우리처럼 '즐겁고 행복하게' 살게 될는지도 모른다)...  

05.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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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4-2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배부른 돼지'....주위엔 온통 팍팍하더이다. 그 길 이름 바꿔야하지 않겠슴까. 한줌 배부른 돼지를 만드는 길.....암튼, 어릴적부터 시 낭송회, 발레, 연극, 미술관을 다닌 아이들인데....자라서 달라도 뭐가 다르겠지 하는데...어떤식으로 변할런지.

로쟈 2005-04-20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배부른 돼지들 주변에 허기진 돼지들도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