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서의  '유전'은 遺傳 같은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요즘 언론에서 매일 같이 들먹이고 있는 '러시아 유전개발사업'의 그 油田, 즉 '기름밭'을 말한다(이 기름밭이 자원빈국인 우리 마음의 콩밭이다). 이 유전은 최근, 석유수출로 신흥 경제대국 브릭스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한국인의 고정관념을 대표할 수 있는 키워드로 급부상했다. 그러니까 '러시아'란 수식어구와 가장 안정적인 조합을 이루는 단어로 등장한 것이다. 이름하여 '러시아 유전'. 그것이 기존의 관용적 단어결합인 '러시아 문화', 특히 '러시아 발레'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형국이다.

아침신문은 대개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철도청(현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개발사업 의혹 사건과 관련하여 특검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는 노대통령의 발언을 1면에서 크게 다루었고, 그에 대한 검찰과 정치권의 반응을 자세히 보도했다. 게다가 사설로 훈수도 두고. 이런 사정은 비단 내가 읽은 한국일보만의 것은 아닌 듯싶다. 작년 노대통령의 방러에서도 가장 큰 관심사는 시베리아의 가스 개발 협력건으로 기억된다.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자원부국 러시아는 유전 혹은 가스로 각인돼 있는바, 계속 의혹이 불거져 나오고 있는 유전개발 사업 또한 실상은 그러한 한국식 러시아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게 아니라면, 정상적/통상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 정신이 아닌 듯한 개발투자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사실 그 사건의 내막과 자초지종은 나의 관심이 아니다. 감사원과 검찰, 그리고 특검까지 달려들 태세이므로 사건의 진상은 곧 밝혀질 것으로 믿는다(진상이 없는 사건이 아니라면). 나의 관심은 좀 다른 데 있다. 오늘자 한국일보에는 이달말에 문을 여는 '러시아문화의 집'도 원장 인터뷰와 함께 크게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런 기사들을 읽으면서 러시아를 보는 우리의 시각 자체가 분열(증)적이지 않나 싶었던 것. 이 소개 기사의 타이틀은 "배 곯아도 발레 보는 러시아 알리고파"이다. 

"민간인이 세운 첫 외국문화센터"로서의 의의를 갖는다는 이 '러시아문화의 집'(www.rccs.co.kr) 개원은 러시아문학 전공자로서 반가운 일이고 환영할 만하다. 초대 원장을 맡으신 분과도 안면이 없지 않다(작년 여름에 모스크바 대학 구내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다). 이 분에 따르면,  1991년 유학시절 "모스크바 시내 중심가에 있는 볼쇼이극장과 인근 여러 박물관, 미술관은 항상 만원이었다. 할머니와 손자가 손 잡고 연극을 보러 다녔고, 러시아어 개인교습을 하는 과외선생은 전공자가 아니었는데도 문학 얘기가 평론가 수준이었다.(그런 문호의 풍요를 누리다가 95년 귀국하니 한국은 앙상했다.)"

작년에 러시아어를 가르쳐주던 50대의 여자 교수도 내게 (아마 어릴 적부터 지겹게도 보았을) 발레의 황홀함에 대해 감탄을 곁들여 이야기하던 걸 상기해 보면, 러시아인들의 '문화필'과 자부심은 우리가 못말릴 정도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에 대한 정확한 기술은 "배 곯아도 발레 보는"이 아니라 "배 곯기 때문에 발레(라도) 봐야하는"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러시아 발레의 융성은 그것을 뒷받침했던 제정 러시아 황실의 권력과 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권력의 상관항은 민중의 고통이었다.

 

 

 

 

최근 개봉 10주년 기념으로 다시 개봉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노스탤지어>는 제정 러시아의 한 노예 출신 작곡가의 흔적을 찾아서 이탈리아의 한 온천을 찾아온 러시아 시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에 따르면, 노스탤지어를 못 이기고 다시 조국으로 돌아간 작곡가는 귀족들의 연회가  벌어질 때면 정원에 조각상으로 서 있어야 했다. 러시아 음악과 예술의 그 음울한 깊이는 그러한 고통과 한(恨)을 체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그것은 원래부터 배부른 자들의 예술이 아니라 배곯은 자들의, 배곯은 자들을 위한 예술이었다. 때론 그러한 현실을 초월하고자 했던 간절한 몸짓으로서의 예술(가령 니진스키의 경우).

<노스탤지어>에서의 시인은 이탈리아에는 "구두가 너무 많다"는 독백도 내뱉는데(벤야민은 모스크바에 대해 "시계점이 너무 많다"고 적었다), 그걸 한국식 버전으로 바꾸면 한국에는 "식당이 너무 많다"가 될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아마도 그건 외부자의 시선으로만 감지될 터인데, 러시아에서 1년간 체류하다고 돌아온 내게 가장 눈에 띈 건  너무 많은 식당이었다(가격 대비 만족도에서 한국식당은 짐작에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 느끼한 중국음식을 유난히 좋아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건 떠나기 전의 나로선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렇듯 풍족한 먹거리와 그에 대한 관심(TV의 음식 관련프로그램은 왜 그렇게 많은지!)이 '앙상한 한국(문화)'의 상관항이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극심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추락(러시아는 일시적으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한바 있다) 속에서도 러시아인들을 지탱해준 것이 있다면, 그러니까 그들을 미치지 않도록 해준게 있다면 나는 그것이 '문화적 교양'이 아닐까 한다. 그 교양은 그나마 사회주의 시절 양질의 교육과 문화적 향유를 통해서 형성된 것이었다. 전후 개발독재 과정을 감내하면서 그나마 먹고 살 만한 처지(소위 '물적 토대')를 이룬 한국인들이 자본주의적 물욕과 투기심, 출세욕의 광란 속에서도 버텨올 수 있도록 해준 건, 그러니까 아주 미치지는 않도록 해준 건 '배부르게 먹기'이다(혹은 자식은 배곯지 않게 하겠다는  욕망).

단순하게 말하자면, 러시아가 경제적 허기를 문화의 향유라는 영혼의 끼니로 때웠다면, 한국은 문화적 허기를 복부적 포만으로 무마했다(영혼의 허기는 교회에서 해결하고). 이건 어디가 잘 나고 못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식의 생존을 선택하느냐, 혹은 선택했느냐의 문제이다(그러니까 한국과 러시아는 상사적이지는 않지만 상동적이다).  발레냐 유전이냐.

 

 

 

 

최근 출간된 도이처의 <트로츠키>의 역자는 후기에서 이런 내용을 적고 있다. 지난 99년 그가 언론인으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처음 방문하게 되었을 때 그 책(<트로츠키>)를 번역하던 시절이 생각이 나서 가슴이 뛰기도 했었다고. 그런데, "옛날에는 페테르부르크와 페트로그라드, 레닌이 죽은 뒤에는 레닌그라드로 불리다가 이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그 도시의 언론사 지사장은 그 유명한 동궁(차르의 겨울별장)이 자리잡은 지역의 공산장 서기장을 지냈다고 한다. 나는 소비에트 시절과 지금이 어떻게 다르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는 보드카와 아르메니아산 포도주병을 휘두르면서 우리나라의 폭탄주보다 더 독한 폭탄주를 권하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를 외칠 뿐 혁명의 몰락과 소비에트의 붕괴는 아예 화제로 삼으려 들지 않았다. 그로부터 여섯 해가 니난 지금, 푸틴이 지배하는 러시아는 미국식 자본주의와 부패가 뒤범벅이 된 채 경제대국이 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러나 그 길이 대다수 러시아인들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장담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역자의 암묵적인 전제와는 다르게,  과거 사회주의 시절 러시아에서도 대다수 러시아인들의 삶은 즐겁거나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그건 현재 미국인들의 삶이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방식의 문제이다. 러시아는 과거와는 달리 이젠, 미국과 한국처럼 '배부른 돼지'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유전개발사업에나 눈독들이는 탓에 러시아에 돈을 뜯기기도 하는 한국이지만, 그 길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한 선배이고 교사이다. 러시아는 한국에 배워야 한다).  언젠가 모스크바에도 '너무 많은 극장' 대신에 (이미 많지만) '너무 많은 맥도널드', '너무 많은 식당'이 들어설지도 모를 일이다(그러다가 정말로 우리처럼 '즐겁고 행복하게' 살게 될는지도 모른다)...  

05.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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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4-2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배부른 돼지'....주위엔 온통 팍팍하더이다. 그 길 이름 바꿔야하지 않겠슴까. 한줌 배부른 돼지를 만드는 길.....암튼, 어릴적부터 시 낭송회, 발레, 연극, 미술관을 다닌 아이들인데....자라서 달라도 뭐가 다르겠지 하는데...어떤식으로 변할런지.

로쟈 2005-04-20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배부른 돼지들 주변에 허기진 돼지들도 있겠지요...
 

최근에 나온 책들, 그래서 대개 (사지는 못하고) 보관함에 넣어두거나 (일부) 도서관에 주문해놓는 책들을 또 몇 권 적어둔다. 눈에 띄는 신간이 그다지 없다 싶은 한 주였는데, 구내서점에서 '이거다!' 싶은 책을 발견했다(그래서 '감히' 책을 사들었다).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전기 제1권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필맥)가 그것이다. 도이처의 책이라면 이전에 한번 번역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이들도 있을 텐데, 사실이다. 이전에 두레출판사에서 <트로츠키: 한 혁명가의 생애와사상>(1985/1992)란 제목으로 나온 것이 그것. 하지만, 그 책의 역자는 신홍범이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의 역자는 언론인 김종철이다(<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과는 동명이인이다).

 

 



 

그렇다면, 새 번역이 나온 것인가? 그건 아니다. '옮긴이 후기'를 보면 그간의 사정이 기술돼 있다. 19년 전 초판이 나온 책의 경우 당시 해직 언론인으로서 재야단체 대변인을 맡고 있던 역자 대신에 출판사 사장의 이름으로 책이 나왔던 것. 이번에 다시 출간되면서, 비로소 본 역자의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그런데, 역자의 기억대로 1985년에 초판이 나왔다면, 19년 전이 아니라 20년 전이다. 꼬박). 나는 두레에서 나온 두툼한 <트로츠키>를 기억하고는 있지만, 좀 낡고 완간이 아니어서 (안 읽은 것은 물론이고) 사두지 않았었는데, 이번엔 새로운 판형으로 원래의 역자까지도 복원한 것이 반가워서 그만 사들었다.

트로츠키에 대한 (내가 아는 한) 가장 방대한 전기를 쓴 아이작 도이처는 1907년 폴란드 태생이고, 젊은 시절 폴란드 공산당에 가입해서 트로츠키주의자로 활동하다가 반스탈린주의적 활동으로 인하여 1932년 당에서 제명당했다고 한다. 이후에 영국으로 망명하여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한편, 러시아 혁명가들에 대한 평전들을 집필하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3권으로 이루어진 <트로츠키>이다(그의 <스탈린>(한림출판사, 1972)과 <레닌의 어린시절>(두레, 1982)도 오래전에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현재는 물론 절판됐지만). 이 3부작의 1권이 <무장한 예언자>(1879-1921)이고, 2권이 <비무장의 예언자>(1921-1928)이며, 3권이 <추방된 예언자>(1929-1940)이다. 1950년대에 저술된 책들이니까 이미 반세기 전의 책들이다.

 

 

 

 

비록 현실에서의 권력투쟁에서는 패배했지만, 트로츠키는 <러시아혁명사>(풀무질, 2001-04)에서는 물론 <스탈린>, <배반당한 혁명>(갈무리, 1995) 등을 통해서 스탈린이 자신에게 붙인 '혁명의 적'이란 타이틀을 자신의 적들에게 되돌려주고 있으며, 트로츠키주의자로서 도이처의 기본적인 의도 또한 러시아 혁명의 '적통'으로서 트로츠키를 복원/복권시키고자 하는 것임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소 편향적이라 할지라도 이 책은 그 나름의 강점을 갖고 있는데, (옮긴이에 따르면) 트로츠키 자신의 유언에 따라 1980년까지 공개가 금지돼 있던 (하버드대학의) 트로츠키 관련 자료를 이미 1950년대에 (트로츠키 부인의 특별한 배려로) 열람하고서 쓴 저작이라는 것.

레닌과 스탈린에 관해서라면, 아직도 러시아에서 많은 전기와 관련 연구서들이 나오고 있으며, 이들 책들은 역시나 이념적으로 다소간 편향적이라 하더라도 러시아의 1차 자료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1929년 추방되어 망명지 쿠바에서 스탈린에게 암살당한 트로츠키의 총체적인 면모를 재구성하는 일은 오히려(당연한 일이지만) 러시아 ‘바깥’에서야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 러시아에서의 트로츠키 연구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며, 주로 <러시아혁명사> 등의 저작 정도가 소개돼 있는 정도이다. 트로츠키의 생애와 관련해서는 물론 그의 자서전 <나의 생애>(범우사, 2001)이 가장 요긴한 참고문헌이지만, 제3자의 시각에서 쓴 평전으로 가장 권위있는 저작이 바로 도이처의 <트로츠키>이며, 그런 의미에서 한번쯤 읽을 만하다.

 

 

 


'무장한/비문장의 예언자'란 제목을 도이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가져왔는데, 책의 서두에 인용되고 있는 대목은 이렇다. "따라서 모든 무장한 예언자들은 승리했고 비무장의 예언자들은 파멸했다. 이런 점 외에도 민중의 본질은 변화무쌍함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민중을 설득하기는 쉽지만 그들이 설득된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그들이 더 이상 밎지 않게 될 때는 무력에 의해 그들이 믿도록 조치를 위하는 것이 필요하다." 혁명가 트로츠키의 '부상'을 다루고 있는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는 그 '승리'의 이야기이다.

참고로, 이제는 러시아에서조차도 잊혀지고 있는 1917년의 현장기록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미국의 저널리스트 존 리드가 쓴 <세계를 뒤흔든 10일>(두레, 1986)이다(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고, 최근까지도 책이 나오고 있다. 워렌 비티가 제작/주연한 <레즈>는 존 리드와 러시아 혁명에 관한 영화이다). 뒷이야기이지만, 스탈린은 자신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이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10월>(1927)은 혁명을 재구성하면서 존 리드의 책에 근거하고 있는바 원래는 트로츠키의 비중이 훨씬 높게 그려져 있었는데, 이미 20년대 후반 트로츠키 격하 분위기 때문에 그에 관한 내용이 축소되고 약간은 희화화되었다('지식인'이자 멘셰비키였던 트로츠키는 레닌의 볼셰비키 노선에 반대하는 모습으로 몇 차례 등장한다).

그런 수정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이라는 비판을 받은 이 영화 이후에 영화감독으로서 에이젠슈테인의 운명 또한 꼬이게 되는데(그는 10년간 변변한 영화를 완성하지 못한다), 그가 다시 영화감독으로 '재기'하는 것은 스탈린 예찬이란 은밀한 메시지를 담은 애국주의 영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1938)를 완성하면서부터이다(이 영화는 출시돼 있고, 소장품이기도 한 이 영화를 나는 작년에 모스크바에서 TV로도 한 번 더 보았다). 그가 스탈린에 대한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는 건 40년대에 3부작으로 계획했다가 완성 짓지 못한 <이반 대제>(1943-6)에서였다(<폭군 이반>으로 출시되었던가?). ‘전제주의 일시적 진보성’을 다룸으로써 스탈린상까지 받은 이 영화의 1부와는 다르게 그 폭력성을 건드린 2부는 스탈린 비판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에이젠슈테인의 명을 재촉했다. 자신의 영화를 공개할 수 없게 된 그는 1948년에 화병으로 사망한다.

소련 전문가로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기도 했던 도이처는 문학 평문들도 남기고 있는데, 가장 유명한 건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에 대한 혹평이다. 그런 평론가적 안목에 있어서 트로츠키 또한 빠지지 않는다. 러시아 혁명 최고의 이론분자였던 트로츠키가 남긴 건 <문학과 혁명>인데, 이 책은 우리말로 두 종의 번역서가 있다. 물론 영역본을 옮긴 것인데(<문학과 혁명>이란 제목으로 묶인 러시아어본은 훨씬 두툼한 분량이다), 먼저 나온 <문학과 혁명>(한겨례, 1989)의 공역자 중 한 사람이 소설가 공지영이다. 그래서, 내게 공지영은 트로츠키와 연관하여 떠오르는 이름의 하나이다.

 

 

 



소설가 공지영의 신간도 지난주에 나왔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푸른숲). <봉순이 언니> 이후 7년만의 장편소설이라는데, 작년에 나온 단편집이 호평을 받았다는 것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사전지식이다. 소개된 글에 따르면, “이 소설은 강간, 살인죄로 사형수가 된 27세의 청년 정윤수와 냉소적인 30세의 대학교수 문유정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다.” 거기서 이미 내용이 짐작되는 소설이긴 하므로, 자세한 건 다른 이들의 서평을 참조해야겠다. <인간에 대한 예의>(창비사, 1994) 정도를 완독한 경험이 있는 나에게 공지영은 '감상적 계몽주의' 작가이자 ‘바른생활’ 소설을 쓰는 작가이다(그래서 마치 연기자 차인표를 보는 듯하다).

일종의 선입견일 테지만, 신간과 관련의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그녀가 작품을 쓰기 위해 여러 사람을 취재하던 중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하며, 다정한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대목에 이르면 그 선입견이 오해만은 아닌 듯하다(물론 우리는 ‘상식’도 가끔씩 깨닫곤 하지만). 해서 일단 나의 선택은 500원 더 싼 마르케스의 최신작이다. 원작이 작년 가을에 나왔다는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민음사). 분량상으론 중편소설인데, 자전적이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솔직히 사형수보다는 창녀들의 이야기에 나는 더 끌린다.

 

 



 

 

세 번째 책은 다나 해러웨이의 대담집 <한 장의 잎사귀처럼>(갈무리)이다. 동물학자, 페미니즘 이론가, 문화비평가로서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동문선, 2002)의 저자이기도 한 해러웨이는 흔히 ‘사이보그 페미니즘’ 이론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나는 이전에 그녀의 책을 읽어본바 없지만, 좋은 입문서도 나온 김에(대담집의 역할은 그런 것이다) 한번 읽어볼 참이다. 해러웨이와 관련해서는 아이콘북스로 나온 <도나 해러웨이와 유전자 변형식품>(이제이북스, 2003)도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해러웨이의 책과 함께 꼽을 수 있는 건 <이탁오 평전>(돌베개).

 

 

 



돌발 퀴즈. <한 장의 잎사귀처럼>과 <이탁오 평전>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단적 사상가’? 내가 안 읽어본 책들에 대해서 넘겨짚어 말할 수는 없고, 두 책의 역자들이 이전에 한번쯤 해당 저자의 책들을 옮긴 적이 있다는 게 공통점이다. 해러웨의 책을 옮긴 민경숙 교수는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의 역자이며, <이탁오 평전>을 옮긴 홍승직 교수는 이지(이탁오)의 <분서>(홍익출판사, 1998)의 역자이다(<분서>의 다른 번역본은 한길사에서 2004년에 나왔다). 요컨대 전문 번역자의 번역 작품이라는 얘기다. 턱없는 전문가들도 없진 않지만, 하여간에 이 책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다. 남은 건 어디서 시간과 돈이 굴러 떨어지는 것이다.

 

 



 

네 번째 책은 원로비평가 유종호 교수의 <시 읽기의 방법>(삶과 꿈)이다. 잡지 <삶과 꿈>에 연재된 글들을 책으로 묶었다고 하는데, 내 기준으론 10년 전에 나온 <시란 무엇인가>(민음사, 1995)와 짝이 될 만하다. 같이 묶으면, “시란 무엇이며, 어떻게 읽는가” 정도가 될 것인바, 시를 좀 읽어보고 싶지만 자신이 없는 이들이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유종호의 시비평은 온건하고 상식적이지만 단단하고 단아하다(그는 정지용을 높이 평가하는 대신에 이상이나 김수영은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한다). 내친 김에 말하자면, 시를 읽지 않거나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의 ‘말’들을 나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침묵하거나 행동하면 된다. 떠벌이지 말고.

 

 

 

마지막 다섯 번째 책은 내가 드물게 꼽아보는 산문집이다. 소설가 서재영의 산문집 <진다방 미스 신이 심은하보다 이쁘다>(부키). “세월을 견딘다는 것. 견뎌 내면 무엇이 있으리라는 것. 그 무엇도 알고 보면 허망하다는 것. 그러나 끝까지 가야하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답답한 마음을 털지 않고는 하루의 시작이 시원찮다는 것. 그래서 샘으로 가 찬물로 머리라도 감아야겠다는 생각의 꿈틀거림...” 같은 인용문에서 알 수 있지만, 이 책의 핵심은 ‘지지부진’이고, ‘지지부진한 삶’이다.

 

 



 

문화일보의 서평에서 그 자신 시인이기도 한 배문성 기자는 이렇게 쓴다. “소설가 서재영씨의 산문집 <진다방 미스 신이...>는 전형적인 논다니 생활에세이다. 양아치 인생관이기도 하고 게으름뱅이 생활예찬이기도 하다. 에세이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인생은 어떻게 하면 읍내 은하수 다방에 새로 온 '레지'와 한 말씀 나눠보느냐와 삼성당구장에서 어떻게 하면 돈을 잃지 않고 시간을 때우느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이런 유의 에세이가 쉬 넘어가 버리는 '시골살이의 행복'을 다룬다거나 섣부른 사회성을 드러내 자학성 고지를 하지 않는다는 점도 상찬할 만하다. 저자의 내공은 자칫 제 삶을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촌스러운지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안정돼 있다. 그 공력이 바탕이 된 속 깊은 문장을 읽는 맛도 남다르다.”

그런 촌스러움이라면 지방의 소도시에서 청춘을 보낸 나에게도 낯익은 것이다. 그건 ‘운동’과도 다르고(‘4.19’와 무관하며), ‘교양’과도 다른 어떤 것인바(‘시민정신’과도 무관하다), 그간에 나는 ‘공기’ 정도라고 이름붙이고 있었다(나는 이런 게 ‘노마디즘’이라고 생각하지만 노마디스트들의 반발을 우려해 그냥 ‘논다니즘’이라고 해두겠다. 이 논다니스트들의 꿈은 가급적 일없이 어딘가에 죽치고 있으면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무슨 재밌는 일이 없나 쭈뼛쭈뼛 기웃거리기도 하면서), 아무튼 이 산문집의 공기는 좀 다르다. 그러니, 어찌 안 읽어볼 도리가 있겠는가?..

05. 0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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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5-04-19 14:2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인사는 처음 드리는 것 같네요.
최근에 나온 책들 시리즈를 잘 보고 있습니다(물론 제가 보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이 많긴 합니다만). 이탁오 평전은 저도 보관함에 넣었다 뺏다를 반복 중입니다. 이러다 언젠가 슬며시 장바구니로 가겠지요.

로쟈 2005-04-19 14:32   좋아요 0 | URL
보관함에 넣는 것 정도야.^^ 저는 보관함에 거의 500권이 묵혀 있습니다...

주니다 2005-04-19 16:26   좋아요 0 | URL
덕분에 또 보관함에 책이 늘었습니다. 대문 그림이 책 읽는 로쟈가 아니라 베이컨의 자화상인 듯 하군요. 영국 작가들의 그로테스크한 경향은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것 같아요. 그 동네의 자연환경 탓인지...몇년 전 EBS에서 우연히 베이컨의 작품세계에 대한 다큐멘타리를 봤었는데, 대단했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습니다. 베이컨의 작품은 물론이고 그걸 분석해내는 시각도 역시.

로쟈 2005-04-19 18:19   좋아요 0 | URL
'자화상'이던가요? 제 기억에 그의 (동성애) 모델이었던 것 같은데(확인해 봐야겠군요). 저도 베이컨의 책들에 대해서는 서평을 쓴 적이 있고, 그의 그림들을 좋아합니다...

주니다 2005-04-19 23:39   좋아요 0 | URL

인상이 베이컨과 닮은 듯 해서 무심결에 '자화상'으로 짐작했었는데, 로쟈님의 말씀을 듣고 찾아보니 다행히(?)자화상이 맞는 듯 합니다. ^ ^ 3점의 연작 중 하나이군요. (이 자료가 정확하다면....ㅎㅎㅎ) 



STUDY FOR SELF-PORTRAIT - 1985

그나저나 '화가의 잔인한 손'을 들춰보다가 발견한 건데요, 책의 뒷편 날개에  '대담' 시리즈 근간으로 예고되었던 책 2권은 안나오고 말았나봐요?


로쟈 2005-04-20 10:4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베이컨의 화집을 본 지 오래돼서,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네요.^^ 이미지는 그냥 후배가 저장해놓은 게 눈에 띄길래 갖다 썼습니다. <대담> 2권은 누구에 관한 것인지 기억이 안 나는군요(그것도 베이컨?)...

바람구두 2005-04-20 14:43   좋아요 0 | URL
드디어... 드디어 다시 나오는군요. 아이작 도이처... 이왕이면 완간된다면 좋으련만...

로쟈 2005-04-20 15:13   좋아요 0 | URL
바람구두님이라면 이미 갖고 계실 듯한데.^^ 글쎄요, 완간은 당분간 좀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

마냐 2005-04-20 17:58   좋아요 0 | URL
배부장의 뽐뿌질, 강력했죠....제목도 기이한 책.

로쟈 2005-04-20 18:06   좋아요 0 | URL
'뽐뿌질'이란 표현을 쓰는가 보군요.^^

바람구두 2005-04-21 09:31   좋아요 0 | URL
제 동생 녀석은 복사본으로 가지고 있는데... 제가 그러지말구 형 좀 주라 하면 동생은 저보고 원서를 읽고 번역하라고 놀렸었지요. 흐흐. 번역된 책이 있는데... 뭐...괜한 수고를 할 필요도, 능력도 없으므로... 기다렸답니다. 나머지도 번역된다면 좋겠네요.

2006-07-04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7-04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7-04 13:57   좋아요 0 | URL
**님/ 그건 더 큰 '생색'이 아니실는지요?^^
 

황종연의 평문 "모더니즘의 망령을 찾아서"는 1994년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실렸던 것인데, 김성기 (편) <모더니티란 무엇인가>(민음사, 1994)에 한번 수록되었다가 이후에 그의 평론집 <비루한 것의 카니발>(문학동네, 2001)에 재수록되었다. 나는 이 3종의 글을 다 갖고 있는 듯한데, 이번에 읽은 건 평론집에 수록된 것이다. 다른 동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책박스를 열어보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지난번에 마샬 버만의 얘기도 나온 김에 그의 <단단한 것은 모두 녹아 날아간다 - 근대성의 경험>(국역본은 <현대성의 경험>)에 대한 해제 성격의 이 평문을 읽어본 것이다(이전에도 읽었을 법하지만,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다).

 

 

 

 

황종연은 먼저 <반시대적 고찰>에 실려 있는 니체의 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를 검토한다. 거기서 제기되고 있는 역사 망각(니체가 부추기는 것은 우리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역사(주의)에 대한 능동적인/긍정적인 망각이다)이란 테마 혹은 망각의 이념이 모더니즘과 친족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즉, 역사에 대한 망각과 부정이 각종 모더니즘(운동)의 공통분모라는 것. 

"모더니즘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지목되곤 하는 '전통과의 결별'이라는 것이 단순히 기존의 문학적, 예술적 관습의 파괴와 혁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것을 경험하는 근대 특유의 방식이라는 차원에서, 다시 말하여 유동적인 현재에 대한 의식에 압도된 생산적인 망각의 전략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비루한 것의 카니발>, 355쪽)

더불어 황종연이 지적하는 것은 모더니즘을 공격하면서 들고 나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구호/수사가 모더니즘의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 "포스트모더니즘의 정당화에 봉사하는 비판적 담론들이 근본적으로 모더니즘적 수사에 기생하고 있다는 것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356쪽) 그런데, 버먼의 <근대성의 경험>은 "포스트모더니즘 자체를 다루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제기된 가장 강력한 비판 중의 하나"이다. 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횡행하던 시절에 버먼의 모더니즘 옹호를 끌고온 배경은 아마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나의 견문으로, 황종연은 우리문학에서 모더니즘의 옹호자를 자임하고 있으며(그러니까 그의 포지션은 리얼리즘도 포스트모더니즘도 아니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러한 입장의 전거를 모더니즘에 대한 버먼의 논의에서 가져온다(이 평문이 비평가 황종연에게 갖는 의미가 거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또한 버먼과 마찬가지로 "모더니즘의 '망령들'과의 대화는 근대성의 현실에서 물러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 보다 정직하게 대면하고 보다 대담하게 싸우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강조해둘 것은 버먼의 책이 '근대성'이 아니라 '근대성의 경험'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그러니까 똑같이 근대성 프로젝트의 유효성을 강조하지만 '근대성' 범주에서 사고하는 하버마스와는 좀 다른 얘기를 '근대성의 경험'을 화두로 하여 버먼을 늘어놓게 되며, 이것이 그의 강점이다. 상대적으로 하버마스는 '미학'이나 '경험'에 무관심하다). 사실 이 제목(부제)만 가지고도 버먼의 입장을 어느 정도 예단할 수 있다.

"버먼이 모더니즘의 갱생을 위해 망각이 아니라 기억을 실천하고 동시에 촉구하는 배경에는 근대성이라는 것이 그저 유동적인 현재의 경험이 아니라 역사적인 실체성을 갖는 경험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무자비한 망각을 필요로 하는 삶, 그것의 본질적인 역사성을 그는 강조한다. 그가 기억하는 모더니즘은 현재 우리의 삶이 여전히 역사적 근대성의 난제와 곤경 속에 있음을 직시하도록, 문화적 단절의 환상에서 깨어나도록 자극한다."(358쪽) 그리고 "<근대성의 경험>에서 버먼이 제기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모더니즘과 근대화 사이에 존재하는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관계이다."(359쪽)

여기서 '근대화'란 '일군의 사회적 과정'을 뜻하며, 모더니즘은 그것이 야기한 다양한 비전과 이념이다. "모더니즘이 근대화와 맺고 있는 관계는 대단히 복합적"이다. "모더니즘은 근대화에 의존하면서도 근대화에 개입하고, 근대화에 적응하면서도 근대화에 반발한다."(359쪽) 즉, 모더니즘과 근대화는 변증법적인 관계에 놓이며, 여기서 암시되는 바이지만, 모더니즘에 대한 버먼의 정의는 일반적인 정의보다 광범위하며 포괄적이다(그걸 단점으로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도하에서 버먼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인간 경험 양식의 차원에서 근대성의 본질에 접근한다."(360쪽)

"버먼이 말하는 근대성의 경험은 근대화가 유럽 봉건사회를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세계 전체로 확대되면서 인류에게 초래한 보편적인 경험이다. 근본적으로는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에 의해 추동되는 근대성은 비록 시간과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경험이 되었다고 그는 보고 있다. 모든 지역적, 종족적, 이념적 경계를 넘어서 사람들의 개인적, 사회적 생활에 침투한 이러한 근대성은 사람들의 생황을 안정적이고 확실하게 하는 모든 질서 또는 토대의 원천적인 결여를 기본 특징으로 한다."(361쪽) 때문에 근대적인 삶이란 "창조와 파괴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 있는 유동적인 삶"이며, 그것은 "근대적 인간에게 희망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절망의 온상이고, 행복의 약속이면서 동시에 재앙의 저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근대성은 본질적으로 역설의 경험이다."(361쪽)

이러한 전제하에 버먼의 논의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거쳐, 근대성의 원초적 장면을 드러내주는 도시 공간으로 이어진다. 거기서 특별히 자세하게 분석되는 것은 보들레르의 파리와 도스토예프스키의 페테르부르크이다(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전사(前史)로서 푸슈킨과 고골이 다루어진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관심은 (파리보다는) 페테르부르크에 두어지며, 사실 '저발전/저개발의 모더니티'를 다룬  <근대성의 경험> 제3장은 러시아문학 전공자들에게도 많은 유익한 생각거리를 제공해준다.

 

 

 

 

버먼의 해석에 따르면, "러시아의 왜곡된 근대성이 문학에서 표현되는 가장 두드러진 방식은 페테르부르크/뻬쩨르부르그가 '비현실적 도시'로 그려진다는 데에서 찾아진다."(368쪽, 나는 이전에 이 '페테르부르크 테마'에 관한 리뷰를 쓴 적이 있다.) 단적인 예가 고골(리)의 <페테르부르크 이야기>이다(5편의 작품이 묶인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민음사) 참조). 그리고 이 페테르부르크 모더니즘의 고뇌와 열정의 표현으로서 (비단 버먼에게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며, 버먼이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이다.

 

 

 

 

"이를테면, (버먼은)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가난한 서기가 페테르부르크의 네프스키 특구의 군중 속에서 자신이 장교와 사회으로 등등한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장면에서는 도시의 로맨스를 자기 것으로 삼는 정신의 출현, "정신적 근대화 속에서의 거대한 전진적 도약"을 보고 있다."(369쪽)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버먼의 논의를 정리하고 있는 대목에서 황종연은 (국역본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약간 정돈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인용에서 '네프스키 특구'는 '네프스키 거리'나 '네프스키 대로'로 옮겨져야 하는데, Prospect를 '특구'로 옮긴 것은(국역본은 '지구'라고 옮겼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가 고골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는 걸 뜻한다. "도시의 로맨스를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이란 표현도 보다 정확한 맥락을 확인하기 위해서 버먼의 원서(펭귄북)를 뒤적여 봤지만, 찾지 못했다.

황종연의 평문은 버먼의 논의에 대한 가장 유려한 해제로 꼽을 만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해 정리하고 있는 대목만큼은 나로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다. 가령, "버먼이 이해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함은 그가 바로 후진성의 통렬한 고뇌로부터 '공학'으로 표상되는 인간의 건설적, 창조적 활동을 긍정하는 비범한 각성에 도달했다는 데에 있다"(370쪽)는 대목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산물로서의 (근대 건축)공학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입장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의 대심문관의 논리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처럼 양가적인 면모가 있지만,  궁극적으론 비판적이다. 그게 적어도 일반적인 이해이다. 

 

 

 

 

반면에 버먼은 근대화(공학)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비판이 근대화 일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근대화의 일면에 대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그는  근대화를 '모험으로서의 근대화'와 '일상으로서의 근대화'로 양분하고 도스토예프스키의 비판은 후자를 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러시아 문학도에게 흥미로운 건 이 대목이며, 지하생활자와 장교와의 '결투'를 버만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는바, 이건 '새로운' 이해이다). 그런데, '일상(routine)으로서의 근대화'라는 건 황종연의 요약에서 빠져 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의 논의/정리가 삐그덕거리는 건 그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령, "버먼은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에게는 도시생활에 잠재된 욕망과 고통, 투쟁과 환희의 모든 가망한 현실을 포용하는 비전, 정체와 안주를 모르는 영웅적인 근대화의 비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같은 건  작품을 읽지 않고 평문만 읽을 경우 지하생활자에 대한 정반대의 이해를 조장하기 쉽다. '영웅적인 근대화의 비전'이란 말은(역시 원문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반어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면 지하생활자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어지는 대목: "'모험으로서의 근대화'라는 그 비전은 도시의 갈등과 혼란을 종식시킬 계획과 발전을 추구하는, 그리하여 결국은 근대화마저 삶의 활기를 죽이는 판에 박힌 관례로 전락시키는 모든 근대화의 이념들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을 내포한다고 한다."(370쪽) 전체문장의 내용은 '모험으로서의 근대화'라는 비전은 모든 근대화의 이념들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을 내포한다, 이다. 거기서 '모든 근대화의 이념들'은 (1)도시의 갈등과 혼란을 종식시킬 계획과 발전을 추구한다. (2)근대화마저 (삶의 활기를 죽이는) 판에 박힌 관례로 전락시킨다. 나로선 (1)과 (2)가 어떻게 동시에 '모든 근대화의 이념들'을 수식할 수 있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나는 의미론적으로 이 문장이 비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둔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 탓하기에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황종연의 이해가 미덥지 않다.

파리와 페테르부르크에 이어서 버먼이 분석하고 있는 것은 1960년대 뉴욕의 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대립되는 버먼의 입장은 60년대의 활발한 논의를 통하여 성립된 모더니즘의 개념과 이론들에 대한 그의 비판을 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모더니즘에 연관된 60년대의 사상과 논쟁이 근대성에 대한 풍부한 비전들을 산출했음을 인정하면서도 모더니즘과 근대생활의 관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있어서 우직하고 소박한 성격을 드러냈다고" (비판적으로) 본다(374쪽).

60년대 모더니즘의 (후퇴적/긍정적/부정적) 세 가지 경향에 대한 버먼의 비판은 모더니즘에 대한 그 자신의 비전이 지난 포괄적이며 복합적인 성격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자본주의가 모더니즘 문화에 가하는 변질과 부식을 강조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그는 자본주의의 번창이 오히려 모더니즘이 필요로 하는 근대성의 자원과 활력을 꾸준히 생산하리라 믿고 있다... 이것은 모더니즘을 인식하는 그의 입장을 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양쪽 모두와 구별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376쪽). 더불어, 이러한 입지에서 황종연은 맑스주의(창비식 리얼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양자와는 거리를 유지한다.

버먼에 대한 비판은, 황종연도 지적하고 있지만, 페리 앤더슨의 "근대성과 혁명"(<창작과 비평>, 1993년 여름호)을 참조할 수 있다(이 또한 복사해두었었는데, 읽은 기억이 없다. 아, 망각이여!). 그러한 비판을 수용하면서 황종연은 앤더슨의 비판(주로 버만이 모더니즘'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버먼의 논의를 오히려 보충해줄 수 있다고 본다. "버먼이 올바르게 인식했다면 그가 말하는 근대성은 현재 사람들이 처해 있는 유일한 실존적 조건"이며 "그것에 대해 우리는 찬양할 수도 규탄할 수도 있지만 그것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고, "그것을 떠나서는 삶도 없고, 따라서 혁명도 없다"는 결론하에서.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모더니즘은 리얼리즘"이라는 버먼의 주장에 황종연도 동감을 표시한다. 이 경우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 찬 삶을 철저히 사는 리얼리스트는 바꿔 말하면 아이러니스트"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근대성의 경험에 충실하는 것, 그것에 내재한 변증법적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381쪽). 근대성의 경험이 내포하는 '생산적인 역설'에 충실할 때 우리는 아이러니스트가 된다(오랜만에 로티의 구호를 본다!). 그렇다면, 리얼리즘이냐, 모더니즘이냐의 이분법을 넘어서 우리에게 남겨진 시대정신은 '아이러니즘'이다. 슐레겔의 말을 빌면, "영원한 생동성에 대한, 한없이 풍부한 대혼돈에 대한 명료한 의식"! 더불어, "자기 창조와 자기 파괴의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지점들"! 우리는 그런 지점들을 통과하고 있는가?..

05. 0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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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4-14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덕분에 늘 잘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로쟈 2005-04-14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송합니다...

나목 2006-12-30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rospect 는 지구, 거리로만 번역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특히 네프스키는 페테르부르크 안에 특별하게 조성된 지구라는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보면, 특구(특별히 조성된 지구)라는 말은 어색하지 않습니다. 또 "비루한 것의 카니발" 곳곳에 근대문학의 언표로 도스토예프스키가 언급되고 있는데, 읽지 않았다고 단순히 취급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문제로 드신 부분은 "제2장 마르크스, 모더니즘, 현대화"의 핵심이 되는 부분으로, 근대의 지향은 본질상 자신의 지향을 거부하는 것까지를 함의함으로서 '망각'의 소용돌이에 기꺼이 빠져드는 역동성이 있다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는데, 이는 황종연의 해석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비문이라기보다는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근대의 역동적인 모순이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여러모로 명쾌한 글에 궁금한 점이 있어서 댓글을 붙여 봅니다.

로쟈 2006-12-2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전적으론 '네프스키 특구'라고 번역될 수도 있겠지만, 그냥 고골의 작품 제목이기도 한 '네프스키 거리'란 말이 모든 걸 다 카바합니다. 그 자체로 페테르부르크와 러시아 근대성의 상징이 되구요. 필자가 참조하지 않았을 거라고 한 건 국역본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특구'란 말을 안 쓰기 때문에. 아마도 필자는 영역본을 참조했겠지요. 그리고 '비문'이라고 한 건 다시 읽어보니 제가 오버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언제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봐야겠네요.^^ 어쨌든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나목 2007-01-0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가지 더 궁금한 점이 있다면, 근대 문학에서 "영웅적인 근대화의 비전"이란, "세계의 현실적인 변화를 '주도하는'"의 뜻보다는, "세계와 나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의 뜻이 한층 더 큰 것으로 압니다. 훨씬 내향적인 것이지요. 예를 들어, 제임스 조이스의 "스티븐 히어로"에서 히어로는 단순히 반어적인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닙니다. 같은 작가의 "율리시즈"에서 블룸의 행위도 실은 비루하기 그지 없으나, 평단에서는 "영웅적인 근대의 비전"을 가진 인물로 무리 없이 꼽습니다. 황종연의 글은 전반적으로 일상적인 의미의 용어보다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축적된 용어를 쓰는 경향이 농후한데, 저는 문학에는 문학적인 잣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장단점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언젠가^^ 다시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족한 글에 답문 감사합니다.

로쟈 2006-12-30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타석으로 좋은 지적을 해주셨네요.^^ 사실 버먼의 책을 저도 완독한 상태에서 쓴 글은 아니었기 때문에 '숙제'로 남겨놓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덕분에 이번 겨울에 시간을 내봐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는군요.^^
 

별거 아닌 얘기를 간단히 몇 자 적는다. 알라딘을 돌아다니다 보면,  책과 관련된 이런저런 리스트들을 보게 된다. 그게 '마이리스트'라는 건데, 내 생각에 그 '마이리스트'의 기본적인 기능은 '뚜쟁이'의 그것이다. 즉, 이 책과 연결/접속될 만한 '다른 책'을 소개해준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마이리스트라는 뚜쟁이는 수사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은유의 역할을 하기도 환유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가령, '나에게 감동을 준 책'이란 제하의 리스트를 만든다면, 거기에 묶인 책들은 순전히 '감동'이라는 이유만으로 붙들려나온 은유적 계열체들이다. 반면에, '들뢰즈의 책들'이라든가 하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리스트들은(나는 이런 리스트는 왜 만드는지 모르겠다. 검색어로 '들뢰즈'를 치면 되는 것을) 들뢰즈를 구성하는 환유적 통합체들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더 의미있는 리스트란 은유적인 리스트, 은유적인 짝짓기이다(그런 리스트에서 우리는 '타자'로서의 책과 대면하게 된다).

아쉬운 것은 그런 류의 마이리스트를 만나기란 아주 드물다는 것.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은유라는 것 자체가 '천재'의 소산이기도 하지만(다름 속에서 같음을 읽어내는 게 '천재'이다), 너무 범상한 리스트들만이 넘쳐나고 있는 것. 아직 한 건의 리스트도 만들어본 적이 없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주제넘기는 하지만, 그래서 나름대로 '마이리스트의 조건'이란 걸 생각해 보았다.  

첫째, 10권 이상은 안 넘는 게 좋겠다는 것(맥시멈 20권). 가령 베스트5나 베스트10 같은 게 좋겠다. 무작정 늘어놓는 게 아니라. 리스트란 단순히 '목록'의 의미만을 갖는 게 아니라 '선정'이란 뜻도 내포한다. 허다한 책들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권할 만한 책들을 꼽아보는 것. 그럴 경우, 너무 많은 '목록'은 제 살 깎기 식의 목록이며, 스스로의 가치와 품위를 떨어뜨리는 선정이다. 그래서 리스트에 필요한 건 랭킹감각이 아닌가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 책만은 꼭!'이란 생각이 리스트에는 가미되어야 한다.

둘째, 코멘트는 반드시 붙여야 하다는 것. 이건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그런 책을 꼽은 이유를 간략하게라도 제시해야 하는 것. 일반 연구서들을 읽다가도 그런 코멘트가 붙은 참고문헌 서지를 읽다 보면 간혹 감동하게 된다. 먼저 읽고 나서 나중에 읽을 사람들을 위해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정신, 그게 코멘트의 정신이다. 이 책은 이런저런 장단점을 갖고 있다든가, 어디에 핵심이 있다든가, 어떤 의의가 있다는가 하는 내용들이 코멘트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개인적 사연이라도('내가 어젯밤 밤새 읽은 책'이란 식으로). 그런 코멘트 달기가 요구하는 것은 일단 자신이 읽어본 책들에 대해 리스트를 만들라는 것이다(물론 '내가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란 주제의 리스트라면 예외이겠지만, 그 경우에는 왜 읽고 싶은지 코멘트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너무 상식적이거나 상투적인 리스트는 곤란하다는 것. 어떤 분야별 리스트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런 목록은 클릭을 몇 번 하면 찾아볼 수 있는 목록이다. 해서 필요한 건 '창의성'이다. 그리고, 뭔가 새로운 '지역'으로, 새로운 '모험'의 세계로 안내하고자 하는 서비스 정신(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스토커>에서의 주인공처럼). 이왕이면, 그런 정신이 담겨 있는 리스트를 '읽고' 싶다. 그냥 '보는/보여지는' 리스트 말고.

이렇듯 조건을 몇 개 달아놓았으니 조만간 나서서 시범이라도 보여야 할 판이지만, 언제일는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저 동의하시는 분들의 동참이 있으시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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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9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4-10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엄한 잣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제 생각만 그럴까요?
어차피 이 곳 서재라는게 (아니 이 곳뿐만 아니라 요즘 모든 블로그가 그렇지만) 그냥 본인의 독서생활과 취향을 올리는 곳이 아닌가 하거든요
책을 자꾸 주문하다보니 이 곳도 알게되고 또 그렇게 각 서재를 꾸려가시는 분들을 보면서 아 이런 분들은 이런 책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재미가 제겐 있답니다.
그리고 나의 서재 나의 리스트라는게 물론 남들에게 도움이 되면 금상첨화겠으나 자기 독서기록이나 정리의 목적으로 만드는게 당연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책만 주문하고 서재에 별 신경안쓰다가 얼마전부터 공개로 해놓고 사이버서재로 이용할려는 마음을 먹었던 저로선 갑자기 주춤하는 마음이 생기네요..^^

로쟈님 서재에 왔다리 갔다리 하는 사람인데 제 수준상 전혀 코멘트달 기회가 없다가 첫 인사를 이렇게 드립니다.

어쨋든 댓글은 그것도 비공개로 하나 추천이 네 개인걸 보면 남들도 저처럼 널럴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구나 싶습니다만..하하


로쟈 2005-04-11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그동안의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사야님/ 제가 제시한 조건은 물론 '강요사항'이 아니라 '제안사항'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중요한 책들이라면, 그에 대해 코멘트를 해주는 것이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게 아닐까요? 아무런 코멘트 없이 수십 권의 책들을 목록에 올려놓은 리스트들은 그런 의미에서 저에겐 '애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냥 찍어놓은 '이성'의 리스트들을 보는 것처럼...

비로그인 2005-04-21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부분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게 또 쉽지가 않더라구요..;; 누군가에게 '제대로' 도움 되는 리스트 좀 만들어보고 싶은데,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서투른가봅니다..;;;
 

매주 연재할 의도는 아니었지만, 매주 쏟아지는 책들을 '무시'하기도 뭐해서 몇 자 적는다. 먼저, 우리 고전에 대한 얘기 몇 마디부터 하고. 양양에서 큰 산불이 났었던 지난주 식목일(화요일) 한겨레에는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이 실렸는데(이 때문에 화요일에는 한겨레를 보기로 했다) 정 교수는 '조선인들의 눈에 비친 세계'를 다루면서, 이수광의 <지봉유설>, 최한기의 <지구전요>,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우리가 자랑할 만한 '책'으로 지목했다.


 

 

 

 

 

 

 

 

<지봉유설>이나 <서유견문> 정도는 한국인이라면 국사시간에 달달 그 이름을 외워둔 책들이지만, 정작 몇 명이나 읽어보았을까 의심이 가는 책들이기도 하다. 호기심에 알라딘을 검색해보았더니 <지봉유설 정선>(현대실학사, 1990)과 <서유견문>(서해문집, 2004) 등으로 번역돼 있었다. 물론 최한기의 <지구전요>는 아직 우리말 번역이 없는 듯하고, 대신에 그의 <기학>(통나무, 2004)이 작년에 (다시) 번역돼 나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이지만. 해서 우리 조상들이 쓴 ‘동서문물의 백과사전’(<지봉유설>)과 ‘개화사상의 교본’(<서유견문>)은 맘만 먹으면 읽어볼 수 있는 책들이다.


 

 

 

 

 

 

 

오늘(토요일)자 동아일보의 한 독서칼럼에서는 최한기의 <기학>이 ‘전근대’ 사회 속에서 과거와의 단절을 과감히 시도했던 조선 후기 지식인의 문제적인 저작으로 역시 ‘탈근대’ 사회 속에서 근대화의 연속성을 읽어내고 있는 마샬 버먼의 <현대성의 경험>(현대미학사, 2004)과 같이 비교되고 있었다. 칼럼에서도 지적되고 있는 것이지만,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란 원제를 가진 버먼의 책은 지난 1994년 엉터리 번역으로 출간됐다가 1998년에 개정본이 나오고, 작년에 다시 재개정본이 나왔다. 2004년판을 자세히 검토해보지는 않았지만, ‘페테르부르크’를 여전히 ‘페테스부르그’란 이상한 명칭으로 표기하고 있는 걸로 봐서 그다지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

 

 

 


 

버먼의 책의 한 장은 ‘저개발의 모더니즘’으로서의 19세기 페테르부르크에 할애되고 있다. 푸슈킨의 <청동기마상>과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단편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 분석되고 있는데, 버먼은 번역과 2차 문헌만을 읽고서도 이 주제와 관련하여 최상급의 비평적 에세이를 써냈다. 하지만, 우리말 번역본에서 그 ‘최상급’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고도의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한다(이 경우는 상상력을 길러주는 게 아니라 상상력을 쥐어짜내게 한다). 나처럼 빈곤한 상상력의 게으른 독자로선 짜증스런 일이다.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그래도 <현대성의 경험>은 기본자세는 돼 있는 번역서이다. 독자를 만족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AS해보겠다는 자세 말이다(이전의 졸역본들을 다시 교환해주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하지만, ‘상상력’만을 강조하는 대부분의 오역서들에는 그런 자세/성의가 결여돼 있다. 아마도 <현대성의 경험>만큼 ‘압박’을 덜 받아서 그런 모양이다. 가령, (정말로 믿지 못할) <믿음에 대하여>(동문선)나 (무너지기 쉬운 번역의)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인간사랑) 같은 지젝의 허다한 번역서들은 왜 개정본이 나오지 않는가? 데리다의 <불량배들>(휴머니스트)이나 부르디외의 <강의에 대한 강의>(동문선), <텔레비전에 대하여>(동문선), 마슈레의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백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동문선) 등은 무슨 생각으로 개정본을 내지 않는가? 이 문제 또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게 빈곤한 나로서는 그저 혀를 찰 뿐이다.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건 애꿎게도 또 동문선에서 나온 것이다. 프랑수아 도스가 쓴 <폴 리쾨르>. 번역서 분량으로는 890쪽이고 책값도 38,000원이나 되는 ‘숭고한’ 책이다. 거기에 견줄 만한 책은 역시 1004쪽이나 나가고 똑같이 38,000원인 <과학의 탄생>(동아시아) 정도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두 책이 일단 내가 손으로 꼽아두고 싶은 책이다. <구조주의의 역사>를 쓴 프랑수아 도스는 리쾨르의 제자이고, 언젠가 방한 강연시에 리쾨르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는 걸로 들은 것도 같다. 그 책이 지난 1997년에 나온 <폴 리쾨르, 삶의 의미>라는 책이고, 이번 번역서는 그걸 옮긴 것이다.


 

 

 

 

 

 

 

도스의 책들은 그간에 여러 권이 번역돼 나왔지만, 권할 만한 건 <구조주의의 역사1>이다(아날 학파를 다룬 <조각난 역사>는 내가 자세히 읽어보지 못했다). 내용이 권할 만하다는 게 아니라 번역이 그래도 제일 낫다는 의미에서. <구조주의의 역사>(2-4권)은 어느 정도 상상력을 갖춘 경우에 한에서 도전해볼 만하다. 역사가이지만 디디에 에리봉처럼 굉장히 저널리스틱하게 글을 쓰는 도스이건만 다른 번역본들은 어느 것 하나 쉽게 읽히지 않는다. <역사 - 성찰된 시간>(동문선, 2001)은 무슨 암호문 같은 책이고, 작년에 나온 <역사철학>(동문선)은 내가 기피대상으로 꼽은 역자의 ‘작품’이어서 들여다볼 생각도 않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게 <폴 리쾨르>인지라 사실 걱정이 앞서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역자들이 나름대로 최상의 진용이라는 것. <구조주의의 역사1>을 공역한 이봉지 교수 같은 이는 신뢰할 만한 번역자이다. 해서, 가격에 대한 부담만 떨쳐낼 수 있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 될 것이다.

 


 

 

 

 

 

 

 

폴 리쾨르에 대한 책을 제일 처음 꼽은 것은 사실 그의 <시간과 이야기> 전3권이 완역돼 있고(<살아있는 은유>나 <프로이트와 철학> 등이 더 번역되어야 하는 책들이다) 연구서도 몇 권 나오는 등, 게오르그 가다머와 함께 현대 해석학을 양분하고 있는 그의 사상과 저작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여건이 어느 정도 성숙돼 있는 걸로 보이기 때문이다. 1913년생이지만, 아직도 ‘현역’인(2004년에도 영어와 러시아어로 그의 <기억, 역사, 망각>이 번역 출간되었다) 리쾨르는 현대사상가로서 한번 도전해볼 만한 봉우리이다.


개인적으론 <살아있는 은유>(영어본은 <은유의 규칙>)의 번역 스터디에 참여해본 적도 있어서 리쾨르가 낯설지 않고, 그에 대한 책들도 많이 갖고 있다. 지난주에는 <해석의 갈등>(아카넷, 2001)을 영어본, 러시아본(완역본은 아니고 3/4이 번역돼 있다)과 같이 펴놓고 읽어보기도 했다. <해석의 갈등>은 <악의 상징>과 마찬가지로 역자가 긴 문장들을 전부 토막을 쳐서 번역했기 때문에 읽기에는 편하지만 모호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대목들이 많다(리쾨르는 영어본도 가다머보다 읽기에 불편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용하기가 께름칙하다. <시간과 이야기>는 러시아아로도 아직 완간이 안돼 있는데(3권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우리말로는 읽어볼 만한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직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도스의 <폴 리쾨르>가 출간된 것. 그래서 의미가 있다(재정상 도서관에나 주문해놓았기 때문에 최소한 한달쯤 후에나 나는 책을 손에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꼽은 <과학의 탄생>은 여러 신문에서 크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말을 아끼도록 하겠다. 내용의 방대함 못지않게 저자인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특이한 이력이 흥미로운데, (1)동경대 물리학과의 수재였다가 (2)1960년대 학생운동 당시 ‘전공투’(우리의 ‘전대협’쯤 되는 건가?) 의장이었고, (3)이후엔 입시학원 물리강사. 무려 20년간 준비해서 63살에 완성한 책이라고 한다. (연봉이 수십억에 이르는 입시학원 강사들도 여럿 된다는데) 우리 주변엔 이런 책을 써줄 만한 입시학원 강사가 없는 건지?(대학 교수들은 ‘문제의식’이 다른지라 이런 종류의 책을 쓸 리 만무하고.)


 

 

 

 

 

 

 

세 번째 책은 중국의 신좌파 지식인 왕후이의 <죽은 불 다시 살아나>(삼인). 이미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창비, 2003)로 소개된바 있는데,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어떤 문제틀을 갖고 사고하고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고자 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듯하다.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에는 저자의 자전적 (학문)편력과 대담이 수록돼 있으므로 아마도 그 책부터 읽어보는 것이 순서에 맞을 듯도 하다. 창비에서 나오는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 시리즈는 단발로 끝나고 아직 후속타가 없는데, 좋은 기획인 만큼 계속 이어졌으면 싶다. 이와 보조를 맞출 만한 것이 민음사에서 나오는 ‘현대의 일본지성’ 시리즈인데, 그 외에는 더 많은 기획들이 선보여서 미래 ‘동아시아’ 연대를 위한 사상적 교류의 물꼬를 트고 동시에 공통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으면 한다.

 

 

 


 

 

 

네 번째 책은 문학비평가 서영채의 신작 <문학의 윤리>(문학동네)이다. <소설의 운명>(문학동네, 1995) 이후에 10년 만에 낸 비평집인데, 4년 터울로 책을 냈던 김현이나 매년 책을 내고 있는 김윤식 등에 비하면 젊은 비평가들의 ‘게으름’이 (내용도 없는 가운데) 상당하지만, 황종연과 함께 ‘문학권력’ 문학동네의 대표적인 비평가로서 서영채는 주목할 만하다(1991년에 <비루한 것의 카니발>을 낸 황종연은 15년 주기로 책을 낼 모양이다(*착오이다. 황종연의 비평집은 2001년에 나왔으며, 내년쯤 책이 보태지면 5년 주기가 된다). 비평가들에겐 각자의 사정이 있으며 저마다의 주기가 있다). ‘권력’에 관해서가 아니라 ‘문학’에 관해서. 그리고 그의 단정한 문장에 관해서. 내가 특별히 그의 글을 많이 읽은 거 같지는 않지만,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그는 문제를 깊이 다루되 ‘오버’하지 않았다. 그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미덕은 그가 낸 책들의 제목에서도 확인된다. <소설의 운명>에서 (이광수, 염상섭, 이상 연구서인) <사랑의 문법>과 <문학의 윤리>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자수율과 단어결합 패턴을 자랑한다(비평서의 제목으로 가장 애호되는 ‘○○과 ○○’도 아니고). 조금 오버해서 말하자면, 그는 문학에서건 생활에서건 ‘바람’을 피울 만한 위인은 아닌 듯싶다.


지난주에 미국의 노벨상 수상 작가이자 포크너와 함께 ‘20세기의 두 작가’로도 꼽히는 솔 벨로가 세상을 뜬바, 그의 책들을 검색해 보았더니, 달랑 <클라라의 반지>(한국학술정보, 2004) 정도만 구할 수 있는 책으로 뜬다. 거기에 그에 관한 연구서만 서너 권(작품도 없는 연구서라는 건 얼마나 생뚱 맞는가!). 통계상 국내에서 출판되는 책들의 대략 30% 정도가 번역서라고 하는데(지난주 한국일보 기사처럼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지식생산능력이 전세계의 몇 %나 되기에 고작 30%의 출간률이 부끄럽다는 말인가? 문제는 번역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번역될 만한 책들이 양질로 번역된다면 그 비율은 60%가 되어도 무방하다), 뒤져보면 없는 책들이 태반이다.


 

 

 

 

 

 

 

 

 

다섯 번째 책은 하는 수없이 안데르센의 <즉흥시인>(웅진닷컴)을 꼽는다. ‘하는 수없이’라는 건 이 작품이 고전으로서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 작품에 대해서 내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읽은 건 그저 그의 동화들뿐이었기 때문에. 1835년작인 <즉흥시인>은 동화가 아니라 소설이다. 시대상황으로 봐서는 낭만주의 소설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올해가 안데르센(1805-1875) 탄생 20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한 만큼 한번 읽어보는 기회를 가질 만하다. 게다가 역자는 전문번역가인 김석희씨이다. 믿고 추천할 만하다. 580쪽에 18,000원. 물론 이 책을 손에 집어든다면, <안데르센 자서전>(휴먼&북스, 2003)도 함께 참조하는 게 좋겠다. 언젠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책이다...


05. 04.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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