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 GP에서의 총기난사 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하다. 브라질전에서 패배한 청소년 축구팀의 패인 분석도 잠시, 언론마다 우리 군복무 여건의 문제점과 대책에 대한 특집기사들로 넘쳐나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들뜬 여론은 곧 가라앉겠지만, 쏟아지는 대책들은 그래도 좀 오래 떠있기를 바란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는 건 작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본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엘리펀트>(2003)이다. 1999년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졌던 총기난사 사건(13명 사망)을 다룬 영화이다. 영화의 제목이 '엘리펀트'인 건 이 일어나서는 안될 사건이지만 버젓이 일어난 사건이 이해되지 않는, 이해가능하지 않은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바둑에서의 복기처럼 두 고등학생이 인터넷을 통해 구매한 자동소총을 들고서 D-데이에 학교를 활보하면서 친구들을 '사냥'하는, 자신들의 '게임'에 빠져드는 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따라간다. 반복적으로, 다중시점으로 리와인드하면서까지. 하지만 결과는 불가해한 죽음들이며, 비디오로 이걸 반복해서 보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도대체, 왜, 어떻게, 이런 일이! 손으로 꼽을 만한 원인들이야 차고 넘치지만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의 진단이고 어느 것도 결정적이지는 않다. 아마도 그들은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이고, 그게 재미있을 거라고 상상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의 불모성/불완전성이 거기에 핑계로서 들러리를 서고 있는 것인지도. 영화는 끝장면에서 두 주인공의 자살 이후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들을 잡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유구무언, 혹은 노 코멘트. 그리고 더이상 아무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번의 총기난사사건도 그러한 우리의 무능력과 대면하게 하는 듯하다.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언어폭력으로 인한 인격모독 때문에? '정신이상' 때문에?(김일병은 우발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으며, 모욕받은/분노한 자기 자신의 대행자로서 차분하고 침착하게 '작전'을 수행했다.) 어떤 경우이건 대개의 군사고는 특정인에 대한 보복이나 자살로 귀결되는데, 이번 사건의 충격은 그것이 동료 소대원 전체에 대한 보복으로 표출되었다는 점에 있다. 김일병은 사건 이전에 모두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말은 우리도 수시로/가끔은 한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에 '말'은 행위에 대한 차폐막 역할을 한다. 즉, 말이 행위를 대신함으로써 말로 그치게 되는 것. 그래서 그러한 행위는 가능한 일의 목록에는 들어가지만  실행가능한 일의 목록에는 빠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현실(reality)이 아닌, 현실을 넘어선 실재(the real)의 차원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의 상식적인 관념속에는 기입되지 않는 것이다.

해서 이번 사건에서 당사자인 김일병과 함께 우리가 조우하게 되는 것은 '실재의 사막'이고, '엘리펀트'이다. 현실이라는 환상이 제거된 상황에서, 그리하여 가능한 일이 언제라도 실행가능한 일로(마치 소총의 잠금장치가 언제라도 발사에 놓여질 수 있는 것처럼) 전화되는 것,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자신을 괴롭히던 선임병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자동소총을 난사하는 건 김일병 자신이 경험적으로 깨달은 바이겠지만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마치 게임에 로그인하는 것처럼. 하지만, 적어도 삶이 헛것이 아닌 한도 만큼 죽음은 헛것이 아니다. 그리고 결과는 돌이킬 수 없다. 리와인드할 수 없고, 다시 로그인할 수도 없다. 그가 게임과 현실을 혼동했을까?

문제는 우리 병영의 '현실'도 '게임중독'도 아니다. 물론 그것들은 개선될 수 있다. 하지만, 결정적이지는 않다.즉 두 문제의 '개선'이 이번 사건의 재발을 필연적으로 방비해줄 수는 없다. 나는 그 사이에, (고참들에게 갈굼당하는) 현실과 (람보처럼 '적들'을 싸그리 제거하는) 게임 사이에 있어야 할 무엇인가가 결여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상식 혹은 공통감각(common sense)이다. 자신의 부모와 가족들, 고참병들의 부모와 가족들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당사자에게는 결락되어 있었던 것. 그런 것들로 구성된 '현실'은 허상이고 판타지일 수 있다. 실재의 적대성을 가로막는. 하지만, 그러한 허상을 놓치게 될 때(그것은 맘먹기에 따라서 무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허상이다), 그리하여 우리 주변의 현실을 상징화할 수 있는 능력,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 때, 우리는 엘리펀트와 만나게 된다.

"고참은 신이고 병역은 신성하다"는 말에 우리는 더이상 속지 않는다.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국적포기자들의 당당한 탈국가적, 국제적 이성(판단)이 그 반증이다(저들의 앞날에 오로지 행운만을!). 하지만, 고참이라는 괴물, 국민이라는 괴물로부터의 해방은 엘리펀트에 대한 충성을 이면으로 갖는다("어디 두고보자, 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마"). 해서, 중요한 것은 서로가 자기안의 괴물을 인지하고 그와 친숙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병영이라는 우리 안에 갇힌, 젊은 '국민들'이 자신의 괴물성을 자각하면서도 "고참은 신이고 병역은 신성하다"고 복창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그러는 사이에 공통감각을 늘리고(물론 가장 좋은 건 문학을 읽는 일이다, 게임할 시간의 절반만이라도 할애해서) 사이공간으로서의 교통공간을 항구적으로 늘려나가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면, (국가고 고참이고 나발이고 좆도 아닌) 세상은 배틀필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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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6-21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방부의 개혁이 왜 이리 먼 길 인지요....

로쟈 2005-06-2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많은 부분이 더 개선되고 개혁되어야 하겠지만, 제 생각엔 많은 '대책들'이 이 사건의 '대책없음'이란 충격/외상과 대면하지 않기 위한 방책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건이 터진 자리와 사건을 봉합하는 자리가 왠지 따로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일단 보다 정확한 사고 (재)조사 결과가 나와야 할 거 같습니다만(아직은 의문점들이 많으므로)...

돌바람 2005-06-2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주변의 현실을 상징화할 수 있는 능력,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 때, 우리는 엘리펀트와 만나게 된다'는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매번 추천만 해놓고 도망가는 것 같아, 다시 와서 도장도 찍습니다.

로쟈 2005-06-23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닉네임과 다르게(?) 여자분이시군요. 너무 묵직하게 찍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학가는 학기말이고 어제는 한동안 (주로 마음만) 바쁘게 했던 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연구실 책상정리를 한참 하고 나서 몇 자 적는다. 세월은 바쁘게도 지나가지만, 일없이도 지나간다. 한 학기 동안 해놓은 일들을 떠올려보니까 게을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게으름에 대한 핑계는 적지 않으므로 법정에라도 선다면 나 자신을 충분히 변호할 수 있지만, 그래도 게으른 건 게으른 것이라는 의미에서 나는 게을렀고, 그 게으름은 '절대적 게으름'이다. 시간은 그 게으름을 통과해 가며, 그에 대한 우리의 후일담은 <벚꽃동산>의 마지막 대사처럼 "아, 산 것 같지 않구나..."이다. 최근에 개봉한 한 영화의 제목처럼 우리는 '태풍태양'처럼 살고 싶지만, 그저 편안하고 아무일없는 오후를 선택한다(<태풍태양>은 흥행에 참패했다고). 그리고는 말한다. "아, 좀 게으르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이 게으른 자들의 철학사: 게르돈, 게르델레스, 겐트, 게겔, 게체, 게르셀, 게르그송, 게코, 겔레즈, 게리다, 게젝...

 

 

 

 

첫번째 책은 게으른 자들의 철학사에서는 '게르트르'로 통하는 사르트르에 관한 책이다.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올해는 이 20세기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최대 지식인의 탄생 100주기를 맞는 해이고, 곧 그의 생일(6월 21일)이다. 그러니, 그걸 기념해서라도 그의 책을 한두 권 읽어둘 만한데,  변광배의 <존재와 무: 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살림)이 추천할 만하다. 일단 게으른 자들은 <존재와 무>(1943) 번역본(삼성출판사, 1991)의 방대한 분량을 감당하기 어려울 뿐더러(사르트르는 원서 722쪽의 이 책을 2년만에 썼다) 30분 이상 집중해서 읽어내기도 힘들다. 하니, 다이제스트가 필요한 것이고,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의 신간으로 나온 <존재와 무>는 그런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그냥 술술 읽힌다).

저자는 이미 작년에 <장 폴 사르트르 - 시선과 타자>(살림, 2004)라는 책으로 한번 워밍업을 해본 지라 사르트르에 관한 이야기라면 나름대로 노하우를 터득한 듯싶다. 사르트르와 <존재와 무>에 관한 주변적인 얘기를 소개하고 <존재와 무>의 주요 개념들을 해설하고 있는 방식으로 책은 전개되는데, 입문서로서 깔끔하다. 이번 여름호 <문학과사회>에도 '우리에게 사르트르는 누구인가'란 특집이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에 부쳐'란 부제를 달고 실려 있는데, 윤정임, 변광배, 서동욱 제씨의 글이 실려 있다. 내가 받은 첫인상은 사르트르 전공자도 세대 교체가 됐구나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몇년 전에 나온 <사르트르와 20세기>(문학과지성사, 1999)에서는 내 기억에 이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정명환, 박이문, 김현, 박정자 등의 책/글을 통해서 사르트르를 눈에 익힌 나로선 '격세지감'을 느낀다.

 

 

 

 

 

변광배 버전의 <존재와 무>에는 부록으로 관련서(참고문헌)들이 나열돼 있는데, 더 읽어야 할 한국어 책의 목록에 박이문의 책들이 빠져 있는 건 유감이다. 오래 전 책들이지만, <인식과 실존>(문학과지성사, 1982)나 <삶에의 태도>(문학과지성사, 1988) 등의 책에는 사르트르에 관한 중요한 글들이 수록돼 있으며 내 경험상 사르트르 입문격으로 아주 유용하다. 이미 제목에도 비치지만 사르트르에게서 중요한 것은 삶과 세계에 관한 '진리'가 아니라 '삶에의 태도'이다. 그 자신이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준 건 아니지만, 자서전 <사물의 언어>(민음사, 1989)에 서술돼 있는 박이문의 삶은 사르트르적 정신에 투철하다(그가 인생의 책으로 꼽고 있는 것이 사르트르의 <구토>이다). 연초에 나온 박이문의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미다스북스, 2005)는 그런 대로 그의 사르트르적인 삶의 태도를 잘 간추리고 있다. '지성의 궤적'을 다룬 1부의 첫머리에 오는 것이 '사르트르와의 만남'이 아닌가(작년 가을 데리다의 사망 이후 발표되었던 나의 스승 데리다'란 글도 실려 있다). 해서 한국에서의 사르트르를 말하면서, 박이문 선생을 빼놓은 것은 실례에 가깝다.

사르트르에 관한 전기로는 안니 코헨 솔랄의 3권짜리 <사르트르>(창, 1993)이 아직까지 가장 충실한 소개서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문학론에 대해서는 정명환 선생이 옮긴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8)이 필독서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해서는 그의 팜플렛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문예출판사, 1999)를 참조하는 것이 필수적.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서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한마당, 1999)를 읽어야 한다. 조금 전문적인 차원에서 분석철학적 관점에서의 사르트르 읽기는 아서 단토의 <사르트르의 철학>(민음사, 1985)가 있으며, 그 책의 역자 신오현의 <자유와 비극: 사르트르의 인간 존재론>(문학과지성사, 1979)도 참조할 수 있다(학부 2학년생이었던 내가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책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존재와 무>의 영역본과 러시아어본(2004, 개정판), 그리고 두 개의 우리말 번역본을 갖고 있다. 언제 게으름 부리지 않고 좀 읽어주는 일이 남아 있는 셈. 

 

 

 

 

두번째 책은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권태>(열림원). 1960년작이니까 무려 45년만에 소개되는 책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그의 책이 <표범 같은 여자>(문학사상사, 1997)이니까 국내에서 모라비아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대우를 받고 있는 셈인데, 이번 작품도 최근 프랑스의 영화감독 세드릭 칸에 의해 영화화된 작품이 국내에 개봉되면서 원작이 겸사겸사 소개되는 감이 있다(책의 표지로 영화의 스틸사진이 사용됐다). 소개에 따르면, "모라비아는 성과 돈을 주제로, 파시즘 체제와 현대 산업사회에서 소외되어 가는 현대인의 모습, 특히 무관심, 야망, 경멸, 순응주의, 권태 등의 심리를 밀도있게 그려낸 바 있다." 이전에 세계문학 전집 등에 실려 있던 모라비아도 나는 읽지 않았었지만(나는 모라비아가 부르주아의 '나른한 권태'를 다루는 작가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고, 나의 편견에 그런 소설들을 읽을 만큼 나는 한가하지 않았다) 이번엔 제대로 책이 나온 듯하므로 한번 읽어봄 직하겠다(더불어 부르주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즘 나른하고 피로하다).

 

 

 

 

 

<권태>의 역자 이현경씨는 에코의 <바우돌리노>(열린책들, 2002)와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민음사) 등의 칼비노 선집을 옮긴 전문가이다.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을 꼽으라고 한다면 모라비아와 칼비노는 빠지지 않을 터이므로, 번역 작가/작품의 비중으로만 판단하자면 이현경씨는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가장 중요한 번역자이다. 적어도 한국의 독자들에게 그(녀)는 '모라비아'이고 '칼비노'이다. 번역은 해볼 만한 일이다.

 

 

 

 

모라비아의 소설과 함께 지난주에 나온 신작소설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문학사상사)과 박민규의 <카스테라>(문학동네)도 있지만, 한권을 읽어야만 한다면, 모라비아를 읽는 수밖에. 한국일보의 서평을 보니까, 하루키는 최근의 인터뷰에서 "사회나 가족과 떨어지고자 하는 '디테치먼트(detachment)적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 '커미트먼트(commitment)'적 삶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중"이라고 답했다 한다. 선입견이긴 하지만, 그건 내가 그동안 단 한편의 하루키 소설도 읽지 않은 이유도 된다(그런 걸 이제서야 생각한단 말인가?). 나는 '디테치먼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우리는 저마다 위대한 혼자였다" 같은 시구에 나는 감동받지 않는다. 그건 그냥 기분이거나 '개인주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한번도 '디테치'되지 않는다. 삶으로부터, 그리고 이 세계로부터. 자기 방에 혼자 처박혀 있다고 혼자인 걸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신작의 줄거리는 이렇다고 한다: "집에 돌아가기 싫은 19세 소녀 마리는 심야의 레스토랑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 언니의 고등학교 동창인 다카하시를 만나게 된다. 마리는 그의 소개로 러브호텔 '알파빌'에서 손님에게 맞아 쓰러진 중국인 매춘부의 말을 통역해 주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는 알파빌에서 일하는 왕년의 레슬러, 중국인 조직, 곡식.벌레 이름으로 불리는 종업원 등 기묘한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줄거리대로라면 그의 '커미트먼트'는 아직 공동체 범주에 머무르는 것이 된다. 국가(=폭력)과의 조우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니까. 경제학의 차원에서라면, '(화폐에 의한)교환'이 아닌 '증여'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가라타니 고진 같은 똑똑한 비평가를 둔 나라에서 아직도 '상상적인' 소설들이 나온다는 건 의외이다(하루키 애독자들의 반론을 기다려본다).

역시나 한국일보 서평에 인용된 바에 따르면, 첫 소설집 <카스테라>에는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 "이미, 세상이 이렇게 생겨먹어 버린 걸" 등의 문장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고 한다. 세상과 불화한 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데(기자는 '불화하다'란 말을 거리낌없이 쓰는데, 그런 '한국어'의 이물감은 '조까라, 마이싱이다'란 비속어를 소설에서 만나는 이물감에 뒤지지 않는다), 문제는 '세상'과 '나'를 그렇게 이격시켜버린 세계관 자체이다. 아무리 쓰라리더라도, 그것은 낭만주의적 세계관이며, '아름다운 영혼'의 세계관이다(사실주의에서라면 '나'는 '세계'로부터 분리불가능하다). '국제사회'가 냉장고 속의 '카스테라'로 변신할 수 있는 건 그런 세계관이 전제되기에 가능하다. 그의 소설들이 아주 유쾌하다고 하지만, 그 유쾌함의 이면은 유치함이다. 아웃사이더들이라고 해서 유치함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덧붙임: 중앙일보 서평을 보니까, 작가는 6년째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위해서 열심히 써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그런 것이 소위 글쓰기의 '진정성'인바(그의 진정성은 글쓰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생산'에 있다), 그의 글쓰기가 그 자체로 이해되는 대목이다. 박민규에게 소설쓰기란 그 나름의 '지구를 지켜라', 혹은 '어머니를 지켜라'인 것이다. '무규칙 이종 작가'란 닉네임을 한때 달고 다니기도 했었는데, 그는 말 그대로 '이종 격투기' 작가이다. 기존의 모든 문학적 규칙에 도전하는 것은 단순히 유희를 위한 것이 아니다(그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무관하다). '생계'를 위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의 문학은 유쾌/유치하지만, 그건 이유 있는 유쾌/유치함이다. 그의 소설집이 많이 팔려나가길 바란다(관객 없는 이종 격투기만큼 슬픈 것도 드물 테니까)...  

 

 

 

 

세번째 책은 탈신민주의 이론가 스피박에 대한 소개서로 스티믄 모튼의 <스피박 넘기>(앨피). 루틀리지의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의 세번째 권으로 나온 책이다(이미 나온 1, 2권은 지젝과 사이드). 원서는 지난 2003년에 나왔는데, 그때 교보에서 책을 처음 보고 나는 덥석 집어들었었다. 내게 스피박은 탈식민주의 이론가 이전에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영역자로 각인돼 있는데(내가 더 관심있는 쪽도 그쪽이다), 알고 보니 스피박은 데리다와 깊은 교우를 나누었던, '예일 마피아'의 거두 폴 드 만의 제자이다. 제3세계(인도) 출신으로서 그녀가 한 일은 데리다와 폴 드 만의 해체주의를 정치적/경제적 컨텍스트로 확장시킨 것(거기서 '서발턴'이란 주체/주제와 만나게 된다). 신간은 그러한 스피박의 프로젝트에 대한 요긴한 안내서가 될 듯하다.

스피박의 주저 <다른 세상에서>(여이연, 2003)는 이미 우리말로 번역/소개돼 있다. 스피박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저작으로 꼽히는 책이다. 그와 함께 더 소개되어야 할 책은 (우선적으론) <탈식민주의 이성 비판>과 대담집 정도가 아닐까 싶다. 스피박에 대한 또다른 입문서로서는 그녀를 사이드, 호미 바바 등 다른 탈식민주의 이론가들과 함께 다루고 있는 바트 무어-길버트의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한길사, 2001)이다. <스피박 넘기>의 참고문헌('스피박의 모든 것')에는 원서의 서지만이 들어가 있고 이 국역본은 누락돼 있다(그래도 '스피박의 모든 것'?).    

 

 

 

 

네번째 책은 중국사학자 레이 황(황런위)의 <중국의 출로>(책과함께). 레이 황의 책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독자라면 그의 독특한 역사관과 서술에 흥미를 느낄 법한데, 내 경우에도 그랬다. 그의 책으론 국내에 처음 소개된 <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가지않은길, 1997)를 나는 당시 신생출판사에서 얻어 읽었는데(그 출판사에서는 러시아 현대 소설의 번역출간도 검토했었다. 엎어졌지만), 직접 책을 번역한 출판사 사장의 말로는 미국 대학의 필독서 목록에 들어가 있으며 "역사서도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라고. 명불허전이라고 중국사에 큰 관심이 없던 나에게도 책은 아주 재미있게 읽혔다. '매크로 히스토리'(Macro History)라고 하는, 역자의  독특한 사관(史觀)도 매력적이었고. 이후엔 당연히 레이 황의 모든 책이다(중국사학자로 조나단 스펜스를 나는 레이 황과 같은 급으로 친다).

레이 황은 지난 2000년에 타계했다고 하므로, 이번에 나온 책은 그의 유작쯤 되는 듯싶다. '레이 황의 중국사 특강'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말년의 그의 강연문과 기고문들을 모든 책인 듯싶다. 이왕 레이 황의 모든 책이라고 했으니까 번역된 책들을 나열해 본다. 가장 먼저 출간됐던 건 <거시중국사>(까치, 1997), 이 책을 다시 옮긴 것이 <중국, 그 거대한 행보>(경당, 2002)이다(나는 '거시중국사'란 타이틀이 더 마음에 든다). 그리고 <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가지않은길)와 같은 책을 다시 옮긴 <1587 만력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새물결, 2004) - 이건 작년에 내가 없는 새 나온 책이다, 아무일도 없진 않았던 것!  -를 들 수 있겠다. 2001년에는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이산)와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푸른역사)가 차례로 나왔다. 후자는 레이황의 책 중 가장 많이 팔려나간 책이다. 해서, 원서로 치자면 5권 7종이 현재 나와 있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역시 역사서로 분류되는 존 리드(1887-1920)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책갈피).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전에 <세계를 뒤흔든 10일>(두레, 1986)로 번역되었던 책이다(참고로, 러시아사의 '레이황'과 '조너선 스펜스'는 아직 없다. 러시아어로 번역돼 있는 호스킹과 파이프스 정도가 근접하지만, 유려함과 유장함에서 그들을 따르지 못한다). 이전에도 이 책에 대해선 언급한바 있는데, 이번에 절판된 책의 새 번역본이 나오게 되어 반갑다. 소개에 따르면, "미국의 진보적 언론인 존 리드가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사건인 러시아 혁명을 직접 체험하고 쓴 르포 문학. <카탈로니아 찬가>, <중국의 붉은 별>과 함께 르포문학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존 리드에 대해서는 워렌 비티가 제작과 주연을 맡은 영화 <레즈>(1981, 194분)를 참조할 수 있다. 다이언 키튼이 리드의 유부녀-연인으로 등장하며 영화는 혁명보다는 이들간의 로맨스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여간에 그는 여성운동가 루이스 브라이언(다언 키튼)과 함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현장을 취재하러 떠나게 되며 돌아온 이후에도 공산주의 운동에 열성을 올리지만, 모스크바에서 티푸스에 걸려 이른 죽음을 맞는다. 그의 나이 불과 33세.  

"존 리드가 혁명 러시아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와 그 주변 도시들, 혁명의 두 번째 격전지던 모스크바까지 곳곳을 누비며 쓴 이 책에는 레닌.트로츠키 같은 볼셰비키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참호의 병사들, 공장 노동자들, 비참한 처지의 농민들까지 러시아 혁명의 수많은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레닌이 직접 서문까지 써준 이 책은 말 그대로 러시아 혁명의 가장 생생한 현장기록이다. 러시아계 한국인 박노자의 증언: "외국인이 쓴 책을 통해 자신이 태어난 곳의 과거와 현재를 더 선명하고 진실하게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내가 태어난 러시아에 대해 그런 귀중한 깨달음의 시간을 선사해 준 책이 바로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다.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의 독재가 왜곡하고 정권 유지의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전용한 1917년 혁명의 진실한 모습을 나는 바로 이 책에서 배웠다."(그러고 보면, 박노자는 신레닌주의자이다.) 

해서, 그런 걸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다. '태풍태양'의 삶에 대한 갈증을 이 책에서 조금쯤을 달래볼 수 있지 않을까?(그나저나 요즘 '태양태풍'의 삶은 혁명이 아닌 인라인 스케이팅에서나 가능한 걸까? 사실 혁명의 동력은 '민중'이 아니라, 전위조직이다. 그게 레닌주의의 교훈이다. 요즘의 민중주의자들은, 혹은 다중주의자들은 그런 교훈을 폐기하고 있는 듯하다. '혁명의 주체'라는 민중은 (노동자/농민이라는) 선험적인 범주가 아니라 구성적인 범주가 아닐까? 그렇다면 누구에 의해 구성되는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바뀌지 않는 레퍼토리 속에서 운동도 이론도 얼마나 게을러진 것인지.) 그리고 이왕이면, <세계를 뒤흔든 1968>(책갈피, 2004)도 <세계를 뒤흔든 열흘>과 함께 나란히 꽂아둘 일이다. 그러고서 숙고할 일이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두 혁명에 대해서. 혁명의 불가피성에 대해서. 혁명의 피냄새에 대해서. 그리고 도래할 (불)가능한 혁명에 대해서...

05. 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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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1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5-06-11 20:43   좋아요 0 | URL
1등 놓쳤군요.
그래도 이렇게 공부를 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칸트와 오리 너구리 손에 넣었어요.
이번에도 좋은 책 정보 감사드려요. 요즘 이런 책 정보가 제 낙입니다.^^

로쟈 2005-06-11 20:49   좋아요 0 | URL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저도 찔끔찔끔 읽고 있습니다. 독일어본 번역이면서 굳이 그걸 티내지 않으려고 애쓴 번역이더군요...

마냐 2005-06-12 00:24   좋아요 0 | URL
인라인 타는 젊은 것들을 훔쳐보지 않고도....갈증을 달래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새겨두죠.

killjoy 2005-06-12 03:15   좋아요 0 | URL
하루키에 대한 코멘트 와 닿았습니다. 근대문학의 종말이라는 제목이었던가요. 얼마 전 문학동네에 실린 고진의 글에도 하루키에 대한 언급이 있던데요. 내수용이자 무역용 상품이라는 취지의 짤막한 단언이었습니다. 저로서는, 하루키와 스노우캣이 바로 디테치먼트의 환상을 상품화한 경우라고 생각되는데, 로쟈님이 스노우캣을 아실런지. ^^;

로쟈 2005-06-13 08:52   좋아요 0 | URL
마냐님/ <태풍태양>은 특별히 끌리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망했다'고 하니까 안타깝더군요. <고양이를 부탁해>처럼 뒷북이나 쳐야겠습니다. killjoy님/ 스노우캣이라구요? 무슨 캐릭터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동네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killjoy 2005-06-13 17:24   좋아요 0 | URL
캐릭터 이름 맞아요!

rebis 2005-06-14 11:48   좋아요 0 | URL
음... 세상엔,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과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지요.
하지만 단 한 편도 읽어보지 않고 작가를 평가한다는 것은 전세계 하루키 팬들에 대한
실례가 될 것 같네요..
하루키는 단편을 먼저 읽으셔야 그 맛을 알 수 있습니다.

marxbook 2005-06-14 12:54   좋아요 0 | URL
<세계를 뒤흔든 열흘> 읽었는데요.
"사실 혁명의 동력은 '민중'이 아니라, 전위조직이다. 그게 레닌주의의 교훈이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네요. 이런 생각은 레닌주의가 아니고 스탈린주의인 것 같습니다.
레닌은 전위조직 건설을 주장했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의 해방은 오직 노동자 계급 자신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맑스의 주장을 옹호하며, 나로드니키의 대리주의에 반대했습니다. <열흘>에서도 레닌이 일반 노동자들에게 호소해 고참 볼셰비키들에 맞서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릴케 현상 2005-06-14 14:54   좋아요 0 | URL
스탈린 얘기가 나와서 그러는데요 제 수준(이란?)에서 읽을 만한 스탈린에 관한 좋은 책이 있을까요?

로쟈 2005-06-15 11:24   좋아요 0 | URL
yujung52님/ 저는 하루키를 읽지 않았지만, 하루키를 많이 읽은 사람들의 의견은 참조하고 있습니다. 가령 고진 같은 비평가에 기대자면, 하루키는 훌륭한 '문화상품'입니다. 문학은 좀 다른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태훈님/ 글쎄요... 레닌에 대한 이해도 다양할 수밖에 없겠지만, (언제나 이를 수밖에 없는) 혁명의 타이밍에 대해서 판단하는 '주체'도 '민중'이고 '노동자 계급'인지 저로선 의문입니다. 스탈린주의의 아이러니는 그러한 주체의 자리에 한번도 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스탈린은 언제나 역사의 대행자를 자처했지, 주체를 자임하지 않았습니다. 자명한 산책님/ 저도 별반 읽은 게 없지만 스탈린에 대한 책 자체가 드물지 않나요?(아이작 도이처의 절판된 전기가 다시 나온다면 모를까.) 러시아 서점에 즐비하게 꽂혀 있던 스탈린과 그의 시대에 관한 역사서들이 생각나는데, 러시아에서 '스탈린 문제'는 우리의 '박정희 문제'와 아주 유사합니다. '독재'와 '근대화'가 키워드이죠(급수로 치자면, 2천만은 숙청한 스탈린이 그래도 한 수 위이지만).

2005-06-16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06-16 17:47   좋아요 0 | URL
<스탈린이즘>(문학예술사), <스탈린 혁명>(신서원) 등이 참고할 만한 책인데, 현재는 모두 절판된 책들입니다. 스탈린 문화와 관련해서는 보리스 그로이스의 <아방가르드와 현대성>(문예마당)이 가장 참신한 책입니다. 한데, 국역본은 좀 부실한 번역이어서 주의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릴케 현상 2005-06-17 10:43   좋아요 0 | URL
^^감솨합니다

yoonta 2005-07-05 04:49   좋아요 0 | URL
"사실 혁명의 동력은 '민중'이 아니라, 전위조직이다. 그게 레닌주의의 교훈이다. 요즘의 민중주의자들은, 혹은 다중주의자들은 그런 교훈을 폐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부분.....전 다중주의자도 민중주의자도 아닙니다만..레닌주의의 교훈자체를 문제삼는 반레닌주의자들에게 레닌주의의 교훈을 되새기라는 듯하는 대목이라 저같은 반레닌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문구네요...

"'혁명의 주체'라는 민중은 (노동자/농민이라는) 선험적인 범주가 아니라 구성적인 범주가 아닐까? 그렇다면 누구에 의해 구성되는지를 물어야 하지않을까?"
혁명의 주체는 선험적 범주가 아니라 구성적 범주?
혁명의 주체를 전위에 의해 구성될수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벌써 레닌주의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고요..님의 전제에서라면 당연히 구성적 범주일수밖에 없는 혁명의 주체로는 누구에 의해 그것이 구성되어지는가하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겠죠..-_-
그러나 혁명의 주체가 어떻게 (전위에 의해) 구성되어지는가라고 묻는 방식이 아니라 혁명의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자체가 구성적인 것은 아닌가라고 묻는 방식이라면 결론은 전혀 다를수 있겠죠.. 혁명의 주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것의 구성을 이야기하는 것...혁명의 주체라는 것은 미리 주어진 것(선험적인 것)이 아니고..때문에 그것은 우리같은 전위가 어떻게 만들어나가는가하는 것(구성적인 것)이 문제야 하는 방식은.. 저처럼 레닌주의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형적인 레닌주의자들의 독선이자 오만으로 밖에는 안보이는 군요...

로쟈 2005-07-05 12:10   좋아요 0 | URL
예상과 다르게 저는 레닌주의자가 아닙니다만(레닌주의자가 이런 '좀스런' 서재질이나 하고 있겠습니까? 저는 단지 그런 '입장'을 언급했을 뿐입니다), 궁금한 건 전형적인 레닌주의자들의 독선과 오만을 비판하는 반레닌주의자(?)의 포지션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비밀이 아니라면...

yoonta 2005-07-05 14:16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레닌주의자가 아닌데 많고 많은 "입장"들 중에서 하필이면 레닌주의자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듯한...글을 쓰신게 제가 님을 레닌주의자로 오독을 하게 만든 일차적 원인아닌가요? 그렇게(윗 댓글처럼) 말씀하신다면 저도 반레닌주의자들의 "입장"을 언급했을 뿐이므로 반레닌주의자들의 포지션에 대해서는 대답할수없음(혹은 알수없음)이라고 해야 공평하겠군요..그것이 비밀이아니라면...

로쟈 2005-07-05 14:40   좋아요 0 | URL
어떤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 '주의자'가 되어야 하는지요? '저같은 반레닌주의자?'란 yoonta님의 표현이 '언급'에 해당하는 거라면 저도 더 질문드리지 않겠습니다...

yoonta 2005-07-05 16:14   좋아요 0 | URL
물론 어떤 '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겠지요..하지만 로쟈님도 레닌주의자는 아닐지라도 레닌주의적인 입장을 언급하시는 '경향성'과 '선택성'은 있는 것 같은데..아니라면 할말 없구요..-_-
저도 '반레닌주의자'인지 아니면 어떤 '주의자'는 아닌 '반주의자주의'인지는 때로는 분명하지 않을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어떤 내용에 대해 입장과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무슨무슨주의자라고 불리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는 때로는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작동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그런 점에서 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저의 시각에는 로쟈님이 어떤 주의자로 보였다는 점에 대해서 너무 기분나빠 하시지는 마시길바랍니다..^^

로쟈 2005-07-05 16:37   좋아요 0 | URL
또다른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 말씀드리자면, 저는 레닌주의자이길 거부하는 게 아니라 레닌주의자에 미달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질문을 감당할 만한 위인이 못 되기 때문에...
 

막간을 틈타 몇 자 적는다. 몇 권에 대하여. 흔히 전체주의 사회라고 지칭되는, 그래서 모든 인민이 철저한 감시하에 놓여 있었다고 간주되는 스탈린 시대 소련사회에서도 '인민들'은 (직접적/공식적인 방식은 아니었더라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다 표현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령, <1984년>(문예출판사/민음사)이나 <멋진 신세계>(문예출판사)에서와 같은 '거의 완벽한' 통제사회는 아마도 '이론'이나 '소설' 속에서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이들 반유토피아 소설의 원조가 되는 자먀찐의 <우리들>(열린책들)이 절판된 것은 유감스럽다). 갑자기 이런 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긴급한 프로젝트에 발목이 잡혀서 학교에 나와 있으면서도 손가락은 이런 식으로 '탈주'하며 자신의 '향락'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변호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엔 우리가 말릴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지난주에는 고맙게도 나에게 부담을 주는 책들이 한권도 나오지 않았다. 부담을 주는 책들이란 (1)급하게 읽어야 하는 책, (2)그런데, 읽기가 버거운 책(영어식 표현이 'great books'라고), (3)게다가 값비싼 책이다. 부담감의 난이도는 그런식으로 증가하는바,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에는 고난도의 책이 없었다는 것(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너무 없다 싶어서 네댓 종의 북리뷰들을 읽고 나서도 이래저래 검색을 하다가 찾은 것이  엘스베트 볼프하임의 가벼운 평전 <마야코프스키와 에이젠슈테인>(아카넷)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지만, 저자는 독일 사람이고 슬라브문학을 전공한 문학애호가이다(약력에는 강단에 몸담았다는 기록이 없다). 20세기 러시아문학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썼다고 소개돼 있는데, 약간의 뒷조사를 해보니까, <안톤 체홉>(1996), <불가코프>(1996) 등의 저서를 갖고 있고 이번에 번역돼 나온 건 2000년 신작이다. 203쪽 분량이니까 원서로는 150-160쪽 정도의 분량일 것이고 나로선 특별히 기대할 만한 내용이 없어 보인다. 이미 마야코프스키의 전기와 관련해서는 <마야코프스키>(까치글방, 2001재판)이 나와 있고, 절판됐지만 후고 후퍼트의 <나의 혁명, 나의 혁명>(역사비평사, 1993)도 207쪽 분량이었다. 볼프하임의 책은 그 절반 정도에도 못 미친다. 대신에 에이젠슈테인과 같이 묶었다는 게 특장이다. 에이젠슈테인이 영화론 번역서들이 이전에 많이 출간됐었지만(1990년 전후였다), 기억에도 가물가물해져 가는데, 신간은 그에 관한 기억을 다시 되살려줄지도 모른다.

러시아에서도 몇 년 전부터 에이젠슈테인 전집이 다시 편집돼 나오는바, 작년에 나는 두툼한 책 네 권을 구입했었다. 그의 회고록 2권은 별권이고. 영화사나 혁명영화에 관심있는 이들에게는 필독서가 되겠지만, 그들을 위한 책이 과연 쉽게 (번역돼)나올 수 있을는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회고록은 889쪽 짜리로 영역돼 있다. 영화론은 저명한 소련영화사가 제이 레이다가 엮은 책 2권이 있고, 최근엔 리처드 테일러가 엮은 선집도 나왔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의 연구서 <에이젠슈테인의 영화>(하버드대출판부, 1994)가 영어권의 가장 유용한, 에이젠슈테인 가이드북이다(그만한 연구서는 러시아에서도 나온바 없지 않을까 싶다. 모스크바의 대형서점들에 처음 갔을 때 놀란 것 중의 하나는 어쩌면 그렇게도 '영화학' 책들이 없을까, 라는 것이었다. 나는 '영화박물관'에서 에이젠테인 영화의 카메라나 소품 등을 구경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손은 안으로 굽는다고, 러시아쪽 책부터 소개하는 건 나로선 불가피하다. 두번째 책은 그걸 중탕시키기 위한 꼽은바 로알드 달의 소설집 <맛>(강). 동아일보 리뷰에 굉장히 크게 소개가 되었길래 내겐 생소한 이름이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까 <마틸다>(시공사)의 저자였다. <마틸다>는 내가 드물게 읽어본 어린이 책('주니어부'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인데, "천재이지만 어리석은 부모와 학교에게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마틸다의 학교생활과 어리석은 어른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유쾌하게" 그린 작품. 이 요약에 빠져 있는 건 마틸다가 '천재적인 독서광'이라는 사실. 당연히 내가 좋아할 만한 캐릭터인데, 사실 그런 이유만으로 그 책을 읽은 건 아니고 생업을 위해서 학원강사로 뛸 때 초등학생들에게 읽힐 만한 책을 찾다가 고른 게 <마틸다>였다. 내가 두어 개의 에피소드들을 복사해서 나누어주고 줄거리를 말해봐라, 느낀 점을 써라 등등의 주문을 학생들에게 했다. 비록 기대와는 다르게 '나도 마틸다처럼 독서광이 되고 싶어요'란 반응은 얻어내지 못했지만, 나는 어쨌든 (어른을 괴롭히는 일에 있어서) 마틸다 못지 않을 아이들과의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저자의 이름도 잊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로알드 달이었던 것.

<마틸다>를 떠올려보니까 입심 하나로 유명 여배우와 결혼했다는 작가의 '영웅담'도 허황돼 보이진 않는다. 그가 "현대 동화에서 '가장 대담하고, 신나고, 뻔뻔스럽고, 재미있는" 어린이책을 만든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구미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손꼽힌다."는 것도 믿어줄 만하다(국내에도 이미 '로알드 달 베스트'가 3권 짜리로 나와 있다). 물론 이번에 나온 '선집'은 어른용이지만 말이다. 게다가 역자인 정영목씨 왈 "재미없다는 쪽에 당신이 내기를 걸면 아마 남아날 손가락이 없을 것"이라고 하고, 소설가 성석제가 거들기를 "이제까지 내가 읽었던 소설의 서열을 매기라 한다면 나는 로알드 달의 소설을 다섯 손가락 안에 놓겠다." 이 정도면 거의 칼만 안든 수준 아닌가?


 

 

 

사실 달(Dahl)이란 이름에서 내가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은 로알드가 아니라 로버트이며, 로버트 달은 저명한 정치학자이다. 출간순서를 역순으로 꼽으면 <미국헌법과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4),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문학과지성사, 1999), <민주주의>(동명사, 1999) 등이 그의 책이다. 제목에서부터 '민주주의'론의 권위자란 게 팍팍 드러난다. 한때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란 테마로 책을 좀 읽어보려고 자료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로버트 달 정도 읽어주면 절반은 카바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그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지만(요즘은 다시 전체주의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어쨌든 같은 성씨를 쓰는 걸로 봐서 로알드와 로버트가 인척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그것까지 뒷조사할 여력은 없지만(알라딘에는 세계 미스테리 어쩌구 하는 책들도 로버트 달의 책으로 뜨는데, 로알드와 로버트를 혼동한 착오이다).

 

 

 

 

<정치인을 위한 변명>(개마고원)은 지나가는 김에 꼽아본 책이다. 아직 정치의 계절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런 제목의 책이 나오는 게 좀 이상하지만, 현대의 '상시적인' 정치체제라는 걸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책은 강준만과 떼놓을 수 없는 출판사에서 나왔으므로 '중도 좌파'(?) 정도의 입지점을 갖는지 모르겠고.  저자인 헤르만 셰어의 말을 다시 옮겨둔다. "민주주의는 선택하는 것이고, 선택을 위해서는 구분이 필요하다. 정치인, '정치계층', '정치계급'에 대한 일반화된 폄하와 개별 정치인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가 구분되지 않는다면, 더욱 정열적이고 능력 있는 정치인에 대한 사회의 요구는 공허한 외침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는 참여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민주주의 사회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그 민주주의 공부를 위해서도 나중에 한번 읽어봐야겠다.

 

 

 

 

세번째 책은 <맛>의 역자인 정영목씨와 공역서 <세계를 뒤흔든 반항아 말론 브란도>(푸른숲, 2003)까지 낸바 있는 한겨레의 문화부 고명섭 기자의 <지식의 발견>(그린비)이다. 소개에 따르면, "출판 담당 기자를 지냈던 저자가 예민하고 꼼꼼한 시선으로,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쓴 19권의 책에 대한 서평들을 모아 펴낸 책이다. 저자가 언급하는 책들은 모두 우리 학자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현실을 진단하고 바꿔보려 한 노력의 산물들이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 학자들이 쓴 책 19권에 대한 서평집이라는 것. 아직 실물을 보지 않아서, 그리고 목차에 대한 정보가 뜨지 않아서 19권의 목록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나름대로 한가닥하는 식견과 의식을 갖춘 저자이기에 읽어봄 직하겠다(내게 고기자는 '벤야민'의 표기를 '베냐민'으로 고집하는 기자로 각인돼 있는데, 시집을 낸 경력도 있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됐다. 생각건대, 그러한 고집은 기자의 것이 아니라 시인의 것이지 않을까?).

요즘은 이름이 잘 눈에 띄지 않아 퇴직하거나 휴직한 게 아닐까 생각되는 이로 역시 한겨레의 이상수 기자가 있다. 기자생활과 병행하여 그는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했었는데, 그 부산물이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길, 2001)이었고, 내가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이 책의 일부는 고등학생들 논술 수업에 활용하기도 했다). 해서, 고기자의 <지식의 발견>은 내게 이기자의 <오랑캐의 즐거움>과 나란히 놓인다. 억지스럽지만, 둘을 섞어서 <오랑캐의 발견>이나 <지식의 즐거움>이란 책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으므로 그냥 그렇게 놓도록 하겠다. 하긴 이런 조합도 가능하군. '지식(인)=오랑캐' '발견=즐거움'.

 

 

 

 

네번째 책은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역사비평사). 서평마다 미국의 잡지 <애틀랜틱 먼스리>의 헌사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18세기를 대변하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19세기를 대변한다면,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은 20세기를 대변할 것이다." 물론 대중에 대한 혐오와 독설로 가득 차 있는 책 자체는 세기의 책에 값하진 못하지만, 문제의식 자체는 20세기를 관통하는 것이기에 <대중의 반역>이 갖는 대표성을 얼마간 인정 못할 것도 없겠다. 나는 이전에 한마음사에서 나온 번역본을 갖고 있는데, 이번에 보다 좋은 번역본이 나왔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책이 역사비평사에서 나왔다는 건 다소간 의외인데, 우나무노와 함께 20세기 스페인의 가장 유명한(러시아에도 가세트의 책들은 문고본으로까지 나와 있다) 철학자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론 철저한 엘리트주의자로 평가되는 가세트이기에(이런 점을 표나게 강조한 이가 문학비평가 이동하였다), 내가 알기로 '민중의 역사'라는 역사관을 내세우는 역사비평사와는 뭔가 안 맞지 않은가란 생각 때문.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지만, 한겨레와 동아일보의 서평은 각기 다른 입지점에서 씌어졌다. 먼저, 한겨례: "당시 가세트가 목격한 것이 주로 파시즘의 군중 대열에 선 대중의 신념에 찬 얼굴이며 '유럽의 몰락'과 동시에 등장한 소비에트 정권과 미국의 대량산업 사회의 군중이었다는 점을 고려하고, 또 지금은 자연현상이 된 대중사회가 서투른 '원시성'을 지닌 채 막 등장하던 시대에 성찰한 대중사회 초입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그의 분석은 유익하다. 그래서 '평균'과 '편의'의 안위에 길든 현대인이 바로 가세트의 대중은 아닌지 다시 성찰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그리고 동아일보: "그렇다면 21세기 한국에서 이 책의 의미는 무엇인가. 다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따돌림당하는 '왕따 현상'과, 평범함이 비범함보다 우선되는 반지성주의, 그리고 대중의 '직접 행동'을 강조하는 참여민주주의 시대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겨레는 현대인과 대중간의 간격을 도입하면서, '우리 가세트의 대중은 되지 말자!'라는 자기반성을 유도한다는 데에서 책의 현재적 의의를 찾고 있고, 동아일보는 참여민주주의라고 에둘러서 표현한 현 참여정부('포퓰리즘 정권')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같은 책에서 발견한다. 이런 제각각의 읽기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독자의 반역'을 허락한다는 점에서 <대중의 반역>은 '고전'에 근접한다.  

 

 

 

 

네번째 책은 그러한 가세트의 대중들을 '당나귀들'로 호명하는 배수아의 장편소설 <당나귀들>(이룸)이다. 1995년에 첫 소설집을 냈으니까 올해는 작가가 데뷔한 지 만 10년이 되는 해이고, 그간에 열댓권 이상의 책을 냈으니까 제법 부지런한 작가군에 속한다. 한국 소설 읽기에 둔감은 내가 제대로 읽은 작품은 한 권도 없지만, 이런저런 풍문을 통해서 그녀의 향방에 대해서는 얼마간 가늠하고 있다. 병무청을 그만두고 독일에 둥지를 튼 것까지도(고고학을 배우러 떠난 시인 허수경이 아마 그녀의 말벗이 돼 주는지).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그냥 좀 특이한 여자애' 소설쓰기에서 점차 자본주의, 혹은 자본주의적 대중 비판으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재작년에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던 걸로 기억되는(그리하여 소위 문단의 '주류'로 인정받게 되는) 작품 <일요일 스키야기 식당>(문학과지성사, 2003)이 그런 방향으로의 전환점이 아닌가 싶고(아직 '독자'가 아닌 나로선 확증할 수 없지만).

물론 그러는 과정에서 소설이란 '미학적 형식'은 그녀에게 이전만큼의 제어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듯하다. "계몽의 시대가 도래했어야 할 바로 그 적절한 순간에 굶주림의 시대에서 천박의 시대로 바로 월반해 버린 윌반해 버린 우리의 역사"(25쪽) 같은 대목에 대해 한겨레의 최재봉 기자는 '울림 깊은 문장'이라고 평하지만 내가 보기엔 소설의 문장으로서 천박하다. 그런 문장들로 재단되고 구획될 만큼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나는 작가가 세상에 대한 혐오감(혹은 '복수심'이라도 무방하다)을 그런 서툰 방식(최재봉 기자는 소설의 3요소가 빠진 '독후감 소설'이라고 평했다)이 아니라 보다 본때나는 방식으로 형상화해주기를 바란다. 혐오도 경우에 따라선 '위대한 혐오'에 이를 수 있지 않겠는가?

배수아의 신작과 나란히 나온 소설집은 김경욱의 <장국영이 죽었다고?>(문학과지성사)이다. 배수아와 마찬가지로 내가 별로 읽은바 없는 젊은 작가이지만, 나는 그가 영화를 너무 많이 베낀다는 불만은 한켠에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 불만은 교정되지 않게 돼버렸다. 짐작에 소설은 배수아의 그것보다 재미있을 것이며 더 많이 팔려나갈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 쓴 소설'들의 최상급은 김영하의 소설 정도이다(돈벌게 해주는 '포스트잇'을 쓰는 게 작가이다. 역사도 팔고, 사랑도 팔고, 때론 운명도 팔면서). 해서, 나로선 매끈한 김경욱보다는 천박한 배수아를 지지하겠다. 그가 아닌 그녀에게 베팅하겠다. 신용불량자가 되어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김경욱의 인물은 "그 누구와도 관계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겨우 존재할 수 있다"(9쪽)고 말하지만, 배수아는 어차피 장국영도 없는 세상에서 당나귀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가를 증언한다. 내가 편드는 건 소설의 테크닉이 아니라 작가의식이다.

05. 06. 04.

P.S. 그밖에 마크 롤랜즈의 (미디어2.0)도 눈길을 줄 만한 책이다. "소크라테스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까지 SF 영화로 본 철학의 모든 것"이란 부제 때문에 이미 좀 팔려나가고 있는 책인데, 원제 "The Philosopher at the End of the Universe"(2003)대로 했다면, 다소 무겁게 여겨졌을 법한 책이다. 이른바 SF영화라는 당의정 속에 철학적 주제를 담아놓은 것이 될 텐데, 그런 것에 얼마간 식상한 나로선 별로 새로운 게 없지 않을까 싶었는데, 저자는 <동물의 역습>(달팽이, 2004)을 전작으로 갖고 있는 철학자이다. 해서 신간보다 오히려 눈길이 가는 것은 그의 구간이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그 책은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좌파출판사로 유명한 영국의 Verso Books의 Practical Ethics Series(실천윤리학 시리즈) 중 한 권"이고,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인간사랑, 1999)에 비견될 만한 책이다: "이 책은 핵심적 주장은 "동물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 주제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Peter Singer가 1973년 발표한 <동물해방>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Mark Rowlands가 2002년 발표한 이 책은 더욱 세련되고, 더욱 설득적이며, 더욱 읽기 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아마도 <동물해방>에 못지 않은 새로운 걸작이라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철학자 데리다가 말년에 숙고한 주제 또한 이 '동물(성)'인데,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조만간 가볍고 묵직한 책들이 여러 권 더 선보일 것이다.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주제들로 나는 (죽음 대신에) '노인/노년'과 (타자 대신에) '동물'을 꼽고 싶다. 물론 이때의 동물은 우리 안의 '동물'을 포함하는 것이다. 동물(짐승)과 신 사이의 존재로 인간을 규정했던, 그리하여 "동물에서 신으로!"란 구호를 내건 형이상학이 상승의 철학이라면, 하강의 철학으로서 탈형이상학의 관심은 "신에서 동물로!" 향한다. 아마 이 대목에서 형이상학에 고질적으로 고정된 인간의 지능/두뇌는 고전을 면치 못할지도 모르겠다. 해서, 인간을 대신하여 철학(궁리질)을 담당할 동물들이 나서야 하는지도. 누구? 들뢰즈의 진드기? 데리다의 고양이? 카프카의 물벼룩? 어쩌면 호모 사피엔스를 대신할 호모 사피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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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6-04 18:41   좋아요 0 | URL
배수아의 신간소식은..로쟈님을 통해 처음 듣네요.*^^ 감사..
정치인을 위한 변명,과 지식의 발견,대중의 반역..등도 관심이 갑니다.여러책 소식들,늘 감사하게 잘 보고 있어요.*^^ 추천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물론.

로쟈 2005-06-04 18:48   좋아요 0 | URL
감사까지야... 그런데, 이번엔 파란여우님보다도 먼저 다녀가셨군요.^^

Phantomlady 2005-06-05 02:36   좋아요 0 | URL
배수아의 팬으로서 조금 더 보충하자면 전환점은 그 이전에 쓴 '동물원 킨트'와 '이바나'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의 첫사랑'으로 절정에 이른 뒤 좀 삐딱하게 변해버렸죠 아마 이 작가 특유의 반골기질 때문인 거 같습니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자신의 전환을 문학적으로 검증받은 계기가 되었다고 할까요?

어제 주문한 '당나귀들'을 받고 앞 페이지 몇 장이지만 읽고나서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갈 때 까지 가려는 거 같습니다. 불안한 길이지만 팬으로서 지켜보는 수 밖에 없겠죠.

배수아는 자신 안에 '길들이지 않은 짐승'이 산다고 토로한 적이 있는데 날짐승이 길이 들고나니 우리(밖)를 박차고 나가는 위험한 기운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람(안)을 향한 흉폭함만 남은 거 같아요. 전 아직도 그녀의 최고작은 '심야통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기대를 버리고 있지 않습니다.

배수아가 김경욱보다 영악한 것은 문화적인 아이콘을 빌려오더라도 상당히 쿨한 걸 가져온다는 겁니다. 일례로 상당히 오래 전에 2pac을 말한 적이 있죠.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장국영이 죽었다고? 김경욱의 질문은 시효가 지난 촌스러운 뒷북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즘은 아무도 너바나를 듣지 않거든요.

에고, 너무 길어져서 민망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냥 생각이 나서요 ㅡ_ㅡ;;;

로쟈 2005-06-05 14:22   좋아요 0 | URL
보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palefire 2005-06-09 13:47   좋아요 0 | URL
에이젠슈테인 전집이 러시아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나왔다니 반갑네요. 국내에 번역된 에이젠슈테인 관련 문헌들은 모두 영어 아니면 일어의 중역들(특히 일어중역)이었죠. 에이젠슈테인이나 지가 베르토프와 같은 감독들, 그리고 말레비치나 메이어홀드와 같은 사람들의 문헌도(사실 국내에 아직 나오지도 않은) 러시아어 원전을 통한 번역본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모 소식통을 통해 지가 베르토프의 [KINO Eye:The Writings of Dziga Vertov]가 번역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 책([KINO-Eye])은 Annette Michelson이라는 탁월한 영화학자가 감수하긴 했지만 영역본을 중역하기 때문에 신뢰하고 있지 않습니다.(앞의 짧은 선언문도 걱정이지만 뒤의 그 수많은 일기는 어쩌려고;;) 이런 사례로 알고 있는 가장 최근 경우는 벨라 발라즈의 [영화의 이론](주어캄프에서 독어원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본 중역)이 있겠군요. 참, 그리고 보드웰의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는 보드웰 특유의 꼼꼼한 쇼트분석은 마음에 들지만 그 이상의 의미는 찾기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Jacques Aumont의 [Montage Eisenstein](불어원본/영역본도 있음)이 에이젠슈테인의 이론적 변천과 영화적 실천을 조감하는데 더욱 충실해 보입니다.

palefire 2005-06-09 13:49   좋아요 0 | URL
그리고, [SF철학]은 '정말로 눈길만 주고 말' 정도로 허접스러운 책입니다. '철학으로 영화보기'란 말이 오도되는 가장 전형적이고도 천박한 사례라는 혹평을 던질 수 있어요.

로쟈 2005-06-09 14:21   좋아요 0 | URL
'창백한 불꽃'(에서 따오신 게 맞다면)님의 전공이 확실히 드러나는 댓글이네요.^^ 지가 베르토프에 관한 문헌은 저로서도 러시아에서 구경한 적이 없습니다. 번듯한 책이 나온 적이 있을지 좀 의심스런 경우입니다. 언젠가 참조한 적이 있는 영어 연구서가 그래도 제가 본 가장 훌륭한 책이었구요. 보드웰의 책은 제가 갖고 있는지 어쩐지도 지금 잘 알지 못합니다(책들이 숨어 있길 좋아해서). 그리고, 오몽의 책에 대한 소개는 다른 분에게서도 들었고 현재 주문중입니다. 보충하자면, 에이젠슈테인 전집은 이전에 한번 나왔었고, 요즘 나오고 있는 것은 '영화박물관'에서 새롭게 편집한 것으로 현재 네 권이 나와 있습니다(그새 더 나오지 않았다면)...
 

하여간에 책들은 계속 쏟아지고 있다. 마치 책사태처럼. 그런 사태는 지긋이 한번 무시하게 되면 계속 속편하지만, 괜히 한번 눈길을 주게 되면 속절없이 당하게 된다. 남의 돈 세는 일 같아 남세스럽지만, 대개는 사두지 못할 책들을 또 몇 권 나열해 본다(물론 가끔 한두 권씩을 사게 되고 읽게 된다. 나도 당하고만 살지는 않는다).

 

 

 

 

처음에 꼽을 책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처녀작' <세미오티케>(동문선). 아마도 '모스크바통신'을 하릴없이 유심하게 읽은 분이라면 작년에 나온 러시아어본 <크리스테바 선집>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기억할지 모르겠다(모스크바에 온 보람을 안겨주었던 그 책이 내가 작년에 꼽은 '올해의 책'이다). 그 러시아어본에는 바흐친론인 <시학의 파괴>와 함께 <세미오티케>와 <소설 텍스트>가 합본돼 있었다(이 책들은 영어본이 아직 안 나와 있다). '기호분석론'이란 부제의 <세미오티케>(원서 제목은 희랍어로 돼 있다)는 박사학위논문인 <시적 언어의 혁명>과 함께 당시 프랑스 지식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 불가리아 출신의 젊은 여성 '사무라이'가 얼마나 '센지'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아직 영어본도 나오지 않은 까닭에 우리말 번역은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떡하니 서점에 깔려 있어서 '경악'했다.    

그 경악은 이중적인데, 한편으론 놀랍고 반갑지만, 다른 한편으론 지극히 걱정스러웠던 것. 거의 동문선 전속이라고 할 만한 역자는 이미 10여 권의 번역서를 낸바 있고, 그 중에는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권력>과 그녀가 편집한 <미친 진실>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수준은 좀 미심쩍은데, 피에르 마슈레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라는 생각없는 번역서를 보노라면 기본적인 자질까지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미 사건은 터져 버린 것을. 게다가 크레스테바 전공자란 분들의 번역도 대개 기대 이하이기 때문에 이 경우만 유난스러울 건 없으리라는 계산까지 하게 되면, 결론은 '울며 겨자먹기'이다(이 책에 대한 자세한 읽기는 이번 여름에 시도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감스러운 건, 12편의 논문 가운데, 4편이 빠진 채 8편만 번역돼 나왔다는 사실. 역자가 후기에 밝혀놓은 사실인데,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밝혀놓지 않고 있다. 분량 때문에?(도스의 <폴 리쾨르>도 890쪽짜리로 번역돼 나온 걸로 봐서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빠진 논문들을 보니까 대개 기호학을 주제로 한 논문들이다(데리다의 <입장들>에 실린 대담 "기호학과 그라마톨로지"에서도 암시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60년대 후반 크리스테바는 프랑스에서 기호학의 선두주자였다). 해서, 우리말 <세미오티케>는 '기호분석론'이란 부제의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책이 돼 버렸다. 거듭 유감스럽다. 번역의 질이 그 유감을 상쇄해줄 수 있을는지?

 

 

 

 

두번째 책은 작년에 방한하기도 했던 페터 슬로토다이크의 대표작 <냉소적 이성비판1>(에코리브르)이다(이번에 1권이 나왔는데, 2권도 곧 나오는 건지?). 작년에 나온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한길사)를 도서관에서 대출해 놓은지 제법 오래 됐는데(읽을 시간을 못내고 있다), 읽을 거리가 그새 또 추가됐다. 책은 이미 '냉소주의'를 우리시대,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로 지목하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이 틈틈이 참조하고 있는 책으로 낯설지 않은데(<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에서도 이 점은 언급되고 있다) 소개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냉소주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또 그것이 철학적 전통인 계몽주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탐색하는 책이다. 책은 냉소주의가 우리의 시대정신이라는 점에서 출발하여, 그것이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고, 냉소주의와 계몽주의의 관계를 알아본다."

이 신간에 대해서는 동아일보의 리뷰가 요긴한데, 잠깐 옮겨오면, "<냉소적 이성비판>은 철학계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고 부를 만하다. 매우 선정적 방식으로 계몽주의 이후 현대철학의 총체적 파국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를 일약 독일 철학계의 스타로 발돋움하게 한 이 책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지 200주년을 맞은 1981년부터 집필됐다. 이 때문에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 등 3대 이성비판의 뒤를 잇는 '4대 이성비판'이라는 반응을 낳았다. 그러나 슬로터다이크는 칸트보다는 니체의 후계자다. 이성과 비판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계몽의 신화가 무너진 자리에 자기과시적인 '길거리 철학'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3가지 명제로 요약된다. '우리 시대는 냉소적이 됐다. 우리는 계몽됐지만 무감각해졌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를 말해야 한다.'" 물론 그러한 주장을 어디 써먹기 전에 우리는 이 책을 좀 읽어봐야 한다.

 

 

 

 

세번째 책은 미국의 영화학자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의 들뢰즈 영화론 연구서 <들뢰즈의 시간기계>(그린비)이다. 이 책의 의의는 물론 들뢰즈의 <시네마>를 친절하게 소개/해설해 준다는 데 있을 터이고, 그런 종류로는 좀 얄팍하지만 <들뢰즈: 철학과 영화>(열화당, 2004)란 책도 이미 소개돼 있다. 그리고 논문집 <뇌는 스크린이다: 들뢰즈와 영화철학>(이소출판사, 2003)도 이 주제로 참조할 만한 책이다. 한데, 신간은 저자가 이미 <현대영화이론의 궤적>(원제는 '정치적 모더니즘의 위기')란 책으로 널리 알려진 믿을 만한 영화학자이고, 들뢰즈의 영화론에 대해서만 상세하게 다루고 있기에 '참고서'로서 유용할 듯싶다. 문제는 정작 들뢰즈의 <시네마>가 아직 완간되지 않은 것. 애꿎게도 1권 운동-이미지만이 두 차례 번역되었을 뿐이다. 무얼 갖다놓아야 해설을 할 게 아닌가? 그러한 순서개념이 좀 부족한 것은 우리 학계/출판계의 '관행'이므로 크게 흠잡을 건 없지만, 조만간 바로잡히기를 바란다.

 

 

 

 

해설서로서 로도윅의 책에 견줄 만한 것이 철학분야의 신간,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이제이북스)이다. 이미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이제이북스 2004)를 소개한 역자의 '신작'인데, 발리바르와 마슈레는 모두 알튀세르의 제자들이고 조만간 소개될 듯한 자크 랑시에르까지 포함해서 알튀세르 사단의 3총사를 이룬다. 신간은 이들의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수 있는 한 계기를 마련해줄 듯. 앞에서처럼, 이 경우에도 순서는 좀 뒤바뀌었다. 정작 스피노자의 주저들이 번역/소개되기 이전에 대표적인 연구서들이 먼저 책장에 꽂히게 된 것. 역자의 계획대로 제대로 된 스피노자 번역본들이 조만간 소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 분야에서도 주목할 만한 신간들이 여러 권 나왔다.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책세상), 터키의 '대표작가' 오르한 파묵의 <눈>(민음사), 그리고 한국의 '유령작가' 김연수의 작품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창비) 등이 그것이다. 모두가 손꼽을 만하기에 그냥 내버려두고, 나는 좀 삐딱한 마음으로 러시아작품을 고르도록 하겠다. 보리스 필냑(삘냐끄)의 <마호가니>(열린책들)이 그것이다. 잠시 소개문을 인용하면, "보리스 삘냐끄의 '마호가니(Krasnoe Derevo)'는 1929년 베를린에서 출간된 작품으로, 트로츠키 공산주의자의 시점에서 혁명 후 10년의 사회와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 작품으로 인해 당국의 격렬한 비판을 받은 삘냐끄는, 작가 동맹에서 추방당하고 1937년 대숙청기에 체포된 뒤 사살되었다."

 

 

 

 

필냑은 스탈린 체제 하에서 생존하기 위해 30년대에 나름대로 아부도 하고 분투도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하지는 못한 불운한 작가였는바, 그의 대표작 <벌거벗은 해>(1921)은 이미 소개돼 있다. 내가 더 좋아하는 작가/작품은 <마호가니>에 같이 묶인 유리 올레샤의 <질투>(이들 작품들은 모두 이전에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소련동구문학전집에 수록돼 있던 것이 단행본으로 재출간된 것이다). 올레샤는 <기병대>의 작가 이삭 바벨과 함께 오뎃사 출신의 대표적인 '동반자작가'인바, 개인적인 생각으론 새로운 이념에 헌신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그걸 무시하지도 못하는 '동반자' 문학의 핵심이 <질투>에는 잘 그려져 있다. 게다가 아주 코믹하다(하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코믹이다). 그리고 그 코믹은 '감정의 음모'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인데, 작년에는 올레샤의 동화 <세 명의 배불뚝이>(기탄출판)도 출간되었다. 그의 '음모'가 얼마나 코믹한지 한번 구경들 해보시길.  

여러 분야에서 읽어볼 만한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 자리에서 다 헤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끝으로 한 권만 꼽자면, 문학평론가 정과리의 새 비평집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역락). 문학평론집으로서는 최근에 서영채의 <문학의 윤리>에 이어서 꼽아보게 되는 책이다.

 

 

 

 

책은 '존재의 변증법4'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데, 그건 이 책이 그의 네번째 비평집이란 뜻도 된다. <문학, 존재의 변증법>(문학과지성사, 1985)을 시작으로, <존재의 변증법2>(청하, 1986), <스밈과 짜임>(문학과지성사, 1988), <무덤 속의 마젤란>(문학과지성사, 1999) 등이 그가 이전에 낸 비평집들인데, 기억에 아마 시비평들만을 묶은 마지막 책을 제외하고 '존재의 변증법'이란 문구를 제목이나 부제로 갖고 있었던 듯하다. 실상 '존재의 변증법'이란 모호한 문구가 문학의 술어로서 얼마나 생산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굉장히 선호하는 문구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자신의 비평행위를 그 문구에 집약하고자 하므로.  

정과리는 '문지' 4인방의 뒤를 이은 '문사' 세대의 대표적인 비평가로 활동했었지만(작년에 그만두었다고 하고, 이번 비평집도 문지가 아닌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리고 평론가 김현 사후에 그를 계승할 만한 가장 유력한 비평가로 지목됐었지만(적어도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생전에 그의 일부 비평에 대해서 '관념의 체조 같다'는 평을 '스승'인 김현은 내린바 있지만) 비평가로서의 그의 궤적은 그러한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문학의 지형변화, 혹은 문학에 대한 그의 태도변화에 기인하는 게 아닌가 싶다(그 두 가지는 맞물리는 것이지만).

태도의 변화? 가령 이번 비평집에도 수록돼 있지만, "옛날 옛적에 문학이 있었지"라는 식의 태도. 해서, 그의 비평은 문학 이후, 문학의 죽음 이후, 문학의 무덤을 앞에 둔 비평이다. 그러니 애도는 있을지언정 열정은 더이상 자리하지 않는다. 대신에 부각되는 건 <문명의 배꼽>(문학과지성사, 1998). 비평이 '디지털화'하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가를 내게 암시해준 책이고, 한 젊은 비평가의 '패배주의'를 확인하게 해준 책이다. 이후에 그는 알다시피,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도 합류하면서 '최연소' 원로 비평가로 자리하게 된다. 그에게 어떤 영광이 더 남아 있는 것인지?

책머리에 실려 있으면서 아마도 표제를 빌려주었을 '문학이라고 하는 것의 욕망'이란 평문은 1988년에 씌어진 것이고 나는 그 글을 읽던 때를 기억한다. 대학가의 그 골목과 지금은 없어진 그 서점에서 신간으로 나온 <문학과사회>를 들춰보던 때가 그 때였지 싶다. 욕망은 그때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원로 비평가'의 욕망도 그때 거기서 들끓지 않았을까? 나는 '쿨한' 욕망을 믿지 않는다...  

05.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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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05-30 14:15   좋아요 0 | URL
들뢰즈의 <시네마> 2권 '시간-이미지'가 근간 예정이라고 한다. 구색을 맞추게 돼서 다행이고 반갑다...

주니다 2005-05-30 15:45   좋아요 0 | URL
<세미오티케>는 기대한 책이었건만 난감한 지경이군요. 동문선은 언제나 이름값을 하려는지...<시네마-1>은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던데 어떤게 상태가 좋은지요? 그리고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 <동물, 괴물지, 엠블럼>이라는 책이 의욕적으로 한꺼번에 나왔던데 살펴보셨습니까? 그나저나 이번 학기도 얼마 안남았군요.

로쟈 2005-05-30 16:42   좋아요 0 | URL
예, 말씀하신 두 권도 서점에서 봤습니다(제가 몇 마디 참견할 만한 책들은 아니어서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대단한 필력이다 싶은데, 곧 이주헌씨 뺨치겠더군요.^^ <시네마>는 둘다 깔끔하지는 않다고 들었는데, 제가 비교해보지는 못했습니다(둘 다 갖고 있지도 않지만). 또 <시각영화>라는 책도 번역돼 나왔는데, 저로선 아무래도 제목 번역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청각영화'니 '후각영화'라는 게 있지 않은 한...

주니다 2005-05-30 17:29   좋아요 0 | URL
오, 이주헌씨 뺨 칠 정도라면....<시네마>는 주은우와 유진상씨가 번역했죠? 유진상씨는 미술이론하는 분 같은데, 서점 가면 찾아봐야 겠습니다. <시각영화>는 원제가 Visionary Film이더군요, Visionary의 원뜻으로 보나 "'몽환trance'이라는 맥락하에서 영화들을 분석하고 있다"는 소개글로 보나 탐탁지 않은 제목이로군요. 그냥 편집부에서 쉽게 간 것 같죠? 이 책은 일전의 '재귀적인 영화' 때문에 눈이 번쩍 뜨여서 보관함에 넣어 뒀었는데, 실물을 확인해보고 구입 여부를 결정해야겠네요.(본다고 확인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하핫)

로쟈 2005-05-30 17:36   좋아요 0 | URL
그렇죠. '실물'이 중요합니다. 화장빨이나 얼짱 각도에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palefire 2005-05-30 17:43   좋아요 0 | URL
엄격히 말하자면 [운동-이미지]는 재역이 필요하겠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과거 나온 새길판(주은우/정원)이 좀 더 낫습니다. 비록 영역판을 많이 참고했다는 단점이 있지만 영화적, 철학적 개념어의 번역이나 들뢰즈에 대한 배경지식에 있어서는 새길판(아마도 지금은 절판상태?)이 더 낫습니다. 시각과언어판은 이런 점에서 단점이 많은 번역본입니다. (개정판이 나와주면 좋을텐데) 그리고 Visionary Film=시각영화도 정말 탐탁치 않은 제목이긴 해요. 환영적 영화 또는 몽환적 영화라고 번역하는 것이 시트니의 개념이나, 그가 다루고 있는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의 흐름(당장 Deren과 Anger만 생각하더라도)에도 부합합니다. 저도 번역본은 보지 못했지만, 실험영화를 전공했고 현재 실천중인 시카고 MFA 출신들이 번역자로 참여해서 어느 정도의 신뢰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어의 개념적 정확성에 대해서는 유보적 예측을 해 봅니다.

주니다 2005-05-30 18:36   좋아요 0 | URL
palefire님의 예상치 못했던 답변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시각 언어>에 대한 palefire님의 자세한 서평을 기대해 봅니다.(영화전공이신듯 하여...문외한들을 위하여)

2005-05-31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05-31 17:30   좋아요 0 | URL
주니다님/ <어휘로 풀어읽는 영상기호학>은 오래 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번역에는 역시나 전문용어와 관련하여 오류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됩니다. 일종의 '사전'이기 때문에 구비해놓는 게 요긴한 책이긴 한데(원서를 참조하실 수 있을 겁니다). 크리스테바에 대한 책을 구하신다면, 역시나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에서 나온 <크리스테바>를 권하겠습니다(저는 며칠 전에 복사했습니다). 컴팩트한 분량에 깔끔한 정리가 그 시리즈의 특장이죠. 국내서 중에서는 역시나 리처드 커니와의 대담집을 추천하겠습니다.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 제 기억엔 후기 크리스테바의 '테마들'이 소개돼 있습니다. 마이클 페인의 <읽기 이론/이론 읽기>의 한 장이 크리스테바에 할애돼 있는데, <시적 언어의 혁명>에 대한 해제입니다. 초기 크리스테바와 관련하여 참고하시길...

주니다 2005-05-31 17:55   좋아요 0 | URL
Noelle McAfee가 쓴 것이 맞죠? 일단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부터 찬찬히 읽어 보겠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로쟈 2005-05-31 19:5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2005-06-01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번에 <신곡>의 완역본이 나왔다는 얘기를 전하면서 '실물'을 보지 못한 까닭에 긴가민가해 하며 이전 번역서를 이미지로 올렸지만, 어제 '실물'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래의 책. 968쪽에 38,000원이다. 이전 번역본을 다시 손본 것이라 해도 '본격적인' <신곡> 완역본이라 할 만하다. 역시나 다시 나온 것이긴 해도, 두어 달 전에 나온 <몽테뉴의 인생 에세이>와 함께 올해 나온 고전 번역서로서 손꼽을 만하다.  서해문집에서 같이 나온 <신곡> 해설서와 나란히 놓고 읽으면 구색도 맞으리라.  

 

 

 

 

지난번 신간 소개글을 올린 지 며칠 안 됐지만, 이후에 나온 책 몇 권을 또 열거해 보기로 한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제일 먼저 꼽고 싶은 건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 연구서 <칸트와 오리너구리>(열린책들).

 

 

 

 

아직 서점가에 깔려 있지는 않지만 곧 나올 책으로 돼 있고, 이미 일간지 리뷰에서도 소개된바 있다. 기호학자 에코의 출세작이기도 한 <기호학 이론>(이 책의 불어판 번역서<부재하는 중심>의 우리말 번역서는 <기호와 현대예술>)의 '속편'으로 지난 2000년에 나온 이 책을 나는 몇 년 전에 서울문고에서 처음 보고 구입한 적이 있는데, 이 신간과 함께 이제 읽어볼 만하겠다(분량상 원서를 독파하는 건 상당한 '여유'를 필요로 한다. 원서는 본문 464쪽이고, 번역본은 616쪽). 아마도 '칸트와 누구누구'라는 책 제목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파격적이라고 할 만한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오리너구리 앞에 선 칸트' 정도의 뜻으로, 혹은 유머로 새기면 될 듯하다. 책의 부제는 '언어와 인지에 관한 에세이들'이고, 전체 6개 장에서 2장이 '칸트와 퍼스, 그리고 오리너구리'에 대한 것이다(미국 철학자 퍼스의 책들이 이제껏 소개되지 않는 것도 기이한 일이다).

오리너구리? 한때 논란이 되었던 이 동물은 오리도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다. 그런 한편으로 오리이며 너구리다. 이걸 어떻게 분류해야 하나? 이걸 분류할 수 있는 (칸트식의) 선험적 도식을 우리가 갖고 있는가? 이 난처한 사태에 칸트라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매우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코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은 독자를 일단 다른 철학서들과는 다른, 편안한 태도로 이 책에 접하도록 한다(끝까지 엉덩이를 떼지 않는 건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기호학이론>을 <장미의 이름>보다 더 재미있게 읽어본 사람이라면(드물지만 없지는 않다. 물론 우리말 <기호학이론>은 재미있기에는 너무 곤란한 번역서이다. 개역본이 나와야 될.) 이 책은 배꼽을 잡고 읽을 만하겠다.

 

 

 

 

두번째 책은 '잡설가' 박상륭의 <소설법>(현대문학). 그의 다섯번째 창작집이고, 표제작은 '소설-법'이면서 '소-설법'의 의미라고. 한국문학의 이단적인 작가이면서 (많은 마니아들을 거느린) '주류' 작가이기도 한 박상륭에 대해서 사실 나는 별반 읽은 게 없다. 그의 <죽음의 한 연구>(작가는 <죽음의 연구>라는 제목을 끝까지 고집했었다고)를 비롯해서, 여러 권의 책을 사두긴 했지만, '잡설들'을 읽을 만한 '여유'를 그간에 갖지 못했던 것.  가령, "'小說'이라는 개새끼[怪色鬼]는, 어떻게도 갈블 수 없이 雜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깊어지는데, 이는, '감성'과 '이성'이, 어지럽게, 그리고 사련적邪戀的으로 혼합되어, 학(鶴,은, 言語의 상징이기도 하거니!)의 털을 뽑고, 시뇨屎尿의 가마솥에 넣어 삶는 잡탕이라는 그 생각이 (글쎄, 패관만을 한정해 말이지만) 패관께는 깊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같은 '소설론'을 읽으면서 소설에 대해 깨치는 바가 있는 이라면, '난놈'이라 할 만하지만, 나는 박상륭 마니아도 아니고 '난놈'도 아니다. 다만, 그의 잡설들이 우리의 '근대소설'을 비춰보는 '거울'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 소개에 따르면, 그는 "동서고금의 종교 신화 철학을 아우르는 심오하고도 방대한 사유체계와 우주적 상상력으로 전개되는 거대한 스케일, 독보적인 문체로 한국문학의 지평을 확장시켜왔다"고 하는데, 그런 경우라면 All or Nothing이다(박상륭은 한국문학보다 크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  

 

 

 

 

세번째 책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생애를 다룬 <평전 파솔리니 - 죽음과 삶의 몽타주>(이룸). 소개에 따르면, "영화감독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그는 뛰어난 재능의 시인이자 소설가, 그리고 문학과 사회 분야의 평론가이자 생애와 작품이 모두 현대 유럽 사회의 예술과 정치, 종교와 성 담론에서 시대를 뒤흔들었던 현대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다." 사실 그의 전기로는 로로로 시리즈의 <파솔리니>(한길사, 2000)가 이미 소개돼 있지만, 이번에 나온 건 훨씬 방대한 분량이고(613쪽), 엔초 시칠리아노라는 이탈리아의 평론가의 솜씨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 Pasolini는 '파솔리니'와 '파졸리니', 어느 쪽으로 발음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씨네21> 같은 영화지에서는 '파졸리니'라고 기재하기 때문이다.

지난주 <씨네21>에서는 30년 전에 살해당한(목이 잘려서 도심 쓰레기통에 버려졌다던가?) 이 문제적 감독 살인사건이 재조사될 거라는 외신을 전하고 있는데("동성애 혐의로 공산당에서 추방된 경험도 있는 그는 1975년 많은 의혹을 남긴 채 로마의 빈민가에서 17세의 동성애자에게 난자당해 숨졌다") 살해 혐의로 9년간 복역했던 용의자(동성애자)가 최근 한 인터뷰에서 파졸리니를 죽인 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세 청년이었고, 이들이 그를 "더러운 공산주의자"라고 욕하면서 구타해 숨지게 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비참한 죽음을 맞은 거지만, 요는 그가 동성애자로 죽었는가 아니면 공산주의자로 죽었는가 하는 것.

'파졸리니'란 이름으로는(그래서 '파솔리니'로는 검색되지 않는다) 10년 전에 그의 소설 <폭력적인 삶>(세계사, 1995)이 번역/소개된바 있고,  그의 영화로는 <마태복음> <테오레마> 등이 출시되었던 걸로 기억된다. 나는 오래전 영화를 전공하던 선배로부터 빌린 비디오로 <살로, 소돔의 120일>, <오이디푸스왕>, <캔터베리 이야기> 등을 본 적이 있다. 이번주 <씨네21>의 작은 기사를 보니까 <살로, 소돔의 120일>은 네티즌들이 출시를 고대하는 DVD로 4위에 꼽혔다. 한 네티즌 왈 "과연 파졸리니 영화도 우리나라에 출시될 수 있는 건가요? 흠... 특히 무삭제로 나온다면 우리나라의 영화산업의 한 획을 긋는 충격적인 사건이겠네요." 이미 제자인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이 무삭제 개봉됨으로써 '한 획'은 그어졌지만, 스승의 <소돔 120일>은 같은 '한 획'이더라도 붓의 종류가 좀 다르다. 파졸리니의 '악몽'에 견주면, 베르톨루치의 '몽상'은 가히 천진난만이다.

같은 이탈리아 사람 에코의 책을 거명한 김에, 파솔리니/파졸리니의 평전을 거푸 거명하는 것이 '의리'에 맞을 듯하지만, 거리를 둔 건 이 신간의 편제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상하고 육중하다. 나는 그런 모양새가 '격렬한 삶' 혹은 '폭력적인 삶'을 살았던 파솔리니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물론 덕분에, 글자도 큼직큼직하게 박은 책값은 아주 '격렬'해졌다).      

네번째 책은 문화비평가이자 '미디어 이론가'의 대명사 마샬 맥루한의 마지막 책 <지구촌>(커뮤니케이션북스)이다. 실상 그는 '지구촌(global village)'이란 말의 저작권자이기도 하다.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종언을 예언한 맥루한인 만큼 그에 책들에 대해서 주절이주절이 늘어놓는 건 어울리지 않을 듯하다. 이미지들로 대신한다.

 

 

 

 

제일 왼쪽이 이번에 나온 책이고, 오른쪽으로는 이어지는 두 권은 <미디어의 이해>에 대한 2종의 번역서이다(민음사판이 더 많이 팔리고 있다). 세번째는 또다른 주저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인데, 이전에 번역이 잘 안 읽힌다는 서평들을 읽은바 있다. 그리고 다섯번째 책이 <미디어는 맛사지다>(커뮤니케이션북스, 2001)인데, 분량으론(100쪽) 별볼일 없는 책이다. 맥루한의 책들이 대개 난해하다지만, 이 책도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맛사지용으로도 불편하고. 그리고 마지막 <맥루안>은('맥루안'을 고집한 역자의 고집이 돋보인다) 가장 얇으면서 유일한 입문서.  

신간에 대한 한국일보의 리뷰를 잠깐 인용하면, "맥루한의 글은 화려한 비유로 넘치지만 비교적 읽기 좋게 번역한 데다 곳곳에 친절한 역자 주가 붙어 있어 읽기에 썩 어렵지는 않다. 다만 책의 무게에 걸맞지 않게 잡지처럼 너무 가벼운 표지를 쓴 것이나, 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쓴 마샬 맥루한 영자 이름에 탈자를 낸 성의 없는 편집이 아쉽다." 그 탈자라는 표지에서 마샬(Marshall)의 'r'을 빼먹은 것(보이시지요?). '읽기 좋게 번역한' 것만으로도(그게 사실이라면) 다행스러움에는 틀림없지만, 외치건대, "마무리를 잘하자!"

 

 

 

 

다섯번째 책도 마무리가 잘 안된 책이다. 영국의 저명한 비평가 프랭크 커모드(1919- )의 <셰익스피어의 시대>(을유문화사)가 그것. 뒷표지처럼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문학가'는 아니지만(어떻게 비평가가 '가장 위대한 문학가'가 될 수 있는가? 과대포장도 예의는 아니다. 그냥 '이 시대 최고의 비평가' 정로로만 띄워좋도 충분하다. 물론 그것도 영국에서의 일이고), 프랭크 커모드는 명망있는 비평가이고 믿을 만한 저자이다(그는 기사작위까지 받았으니, '커모드 경'이다). 비록 우리에게 소개된 건 일천하지만. <종말의식>(1967/2000)이 <종말의식과 인간적 시간>(문학과지성사, 1993)으로 번역된 게 단행본으론 전부이다. 한 추천사에 따르면, 이 신간에는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이 책에 격조있게 담겨 있다." 거기에 장점은 분량이 얇은 것. 200쪽 정도니까 반나절만 투자해도 남을 만한 분량이다(이미 여러 권 출간된 셰익스피어 관련 서적/평전 중에서 가장 얇다. 가장 지명도 있는 저자임에도).

내가 '마무리'를 들먹인 건 책날개에 실린 약력에서 커모드의 저서로 <로맨틱 이미지: 종말의 의미>라고 소개한 대목 때문. <로맨틱 이미지>와 <종말의 의미>는 각기 다른 책이고, 후자는 언급한 대로 국역돼 있다. 표지나 책날개처럼 눈에 잘 띄는 것도 없을 텐데, 좀더 세심한 교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책의 역자는 이미 이 책의 포함된 크로노스 총서에서 <르네상스>, <민족과 제국> 등을 번역한바 있는 전문가이다. 해서, 내용은 믿어봄 직하다. 한편, 셰익스피어 관련으로 내가 고대하는 책은 커모드급, 혹은 그 이상의 비평가 해롤드 블룸의 <셰익스피어: 인간성의 발명>이다(블룸의 셰익스피어를 결산하고 있는 이 책은 본문에 각주가 단 한 개도 달려 있지 않다). 방대한 분량이지만, (지명도만으로도) 소개되어야 할 책이다.     

이렇게 다섯 권을 다 꼽아버렸는데, 약간 아쉬운 책은 <수량화 혁명 - 유럽의 패권을 가져온 세계관의 탄생>(심산)이다. 제목만으로도 내용은 어림짐작할 수 있다. 소개에 따르면 "중세 후기에서 르네상스에 이르는 동안 서구 문명이 성취했던, 질적 관점에서 양적 관점으로의 전환을 논하는 책이다. 이러한 전환이 근대의 과학기술, 관료제, 상업 등을 가능하게 했고, 시공간의 정확한 측정 및 수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대체적 추세로서의 '양화'가 아닌, 양화의 실상 즉 시간, 공간, 수학, 시각화, 음악, 회화, 부기 등 다양한 문화 아이템 각각에서 양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살핀다. 저자는 바로 그 양화가 유럽 제국주의의 성공을 가져온 요인으로 설명한다."

 

 

 

 

저자, 앨프리드 W. 크로스비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이미 "다른 대륙, 다른 문명의 사람들과 달리 유럽인들은 근대 이전부터 해외로 팽창하여 왔다.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그런 곳으로서 이곳에서는 유럽 출신 백인들이 기존의 정주민들을 내몰고 그 땅을 빼앗은 다음 거기에 유럽 문명을 복제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단지 인간의 소행일 뿐만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가 팽창한 결과라는 점이 중요하다."(주경철)란 요지의 <생태 제국주의>(지식의풍경, 2000)가 우리에게 소개돼 있다.

05. 05. 23. 

P.S. 지난 20일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아침 신문에서 읽었다(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명복을 빈다). 1913년 생이니까 그는 지상에서 꼬박 아흔 두 해를 살았다. 백 세를 넘겼던 가다머에 비하면 아쉬움이 있지만, 결코 짧았다고는 할 수 없는 생애이며, 그가 남겨놓은 업적과 자취 또한 후학들이 따라가기에 버거울 정도로 깊고 광대하다. 나는 부랴부랴 도서관에 들어온 프랑스와 도스의 전기 <폴 리쾨르 - 삶의 의미들>(동문선)을 앞당겨 대출했다. 890쪽이니까 그의 생애에 그 나름으로 견줄 만하다(참고로, 한 서평에 따르면 이 책은 200쪽까지 무난하게 나가지만 이후엔 '재난'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제 그를 읽을 시간이 되었다.

 

 

 

 

리쾨르의 책들이 그래도 여러 권 번역돼 있지만, 리쾨르에 관한 책은 아직 드물며, 때문에 입문서로 적당한 것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건 리처드 커니의 대담집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에서의 리쾨르 편이다. <폴 리쾨르>의 중간에 실린 화보에는 1988년 한 학회에서 커니와 리쾨르가 함께  찍은 사진도 들어 있는데, 당시 75세의 노학자 리쾨르에 비해 커니는 20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은' 모습이다. 커니의 책은 현대 사상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고 있기에 다른 철학자/사상가들에 대한 입문서로서 아주 요긴하고 유익하다(데리다에 대한 두툼한 책을 쓴 존 카푸토는 데리다 입문서로도 이 대담집을 꼽은바 있다).    

지난 세기 프랑스 철학의 거장들 가운데, 이제 1908년생인 레비-스트로스 정도가 아직 지상에 남아 있는 듯하다(동급생인 메를로-퐁티가 죽은 지 거의 반 세기가 흘러가고 있다). 사상은 날로 '발전'해 가는 문명에 비례할 듯도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거장들이 하나둘 무대를 떠나고 나면, 말 그대로 텅 비게 된다. 빈 자리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하다못해 올해로 상대성이론 탄생 100주년을 맞았지만, 21세기의 아인슈타인이 가능할지는 의심스럽다). 20세기 영화사가 그러하고 한국 현대시사가 그러하며, 한국문학 비평사가 그러하다. 해석학으로 분야를 지극히 한정하더라도 리쾨르 이후에 자신의 이름을 세울 만한 이가 또 나올는지는 의심스럽다(사상에는 구조주의가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남은 건 안락한 아류들의 지루한 여생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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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5-23 11:50   좋아요 0 | URL
칸트와 오리 너구리 리뷰 읽었어요.
기대되는 책이고, 또 구매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더군요.
전, 님으로부터 책공부와 러시아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말씀드렸던가요?^^

갈대 2005-05-23 13:11   좋아요 0 | URL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번역이 걱정됩니다(미네르바 성냥갑의 안 좋은 기억). 역자가 독어본을 중역한 것 같은데 말이죠.

로쟈 2005-05-23 15:28   좋아요 0 | URL
파란여우님/ 역시 빠르시네요.^^ 갈대님/ 역자는 다르지요? 이번에는 <괴델, 에셔, 바흐>의 역자분인데, 저는 반신반의하는 쪽이고 확실한 건 '물건'을 열어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

2005-05-26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