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때문에 앤디 메리필드가 쓴 <메트로맑시즘(Metromarxism)>(Routledge, 2002), 국역본 제목으로는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시울, 2005)를 읽는다.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메트로맑시스트'들은 '맑스'까지 포함해서 8명인데, 그 중에서 당장에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이는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에 관한 장은 맑스와 엥겔스에 이은 제3장인데, "벤야민은 아마도 20세기 가장 위대한 도시맑스주의자였을 것이다."(149쪽)란 논평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번에 드디어 번역이 나온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의 저자가 '메트로맑시즘' 프로젝트에서 한 자리 차지할 거라는 건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언젠가 한번 언급한 바대로, '벤야민과 도시'란 주제는(아예 질로크의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란 책이 나와있지만) 벤야민과 관련하여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이유로 <메트로맑시즘>의 국역본 출간에 대해서 반가움을 표하기도 했었는데(212쪽짜리 원서가 439쪽짜리 번역서로 탈바꿈했다), 이번에 책을 읽으며 유감스럽게도 그 반가움을 대폭 수정해야 했다(이제 그 반가움의 상당 부분은 당혹감이 채우고 있다). 웬만해서는 한국어 책을 읽고 똑똑해질 수 없는 것이 이런 류의 비협조적인 '번역서들' 때문이란 걸 나는 여러 차례 강조해왔는데, 왜 이토록 부실한 번역서들이 계속 양산되는지 궁금하다(이건 상투적인 표현이다. 사실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이젠 오역서들을 읽는 데도 얼마간 익숙하기 때문이다. 다만, 아깝다는 생각은 한다. 돈과 시간이, 그리고 엉뚱한 데 투여되는 순진한 독자들의 학구열이).

사실 책의 서두에 붙은 '옮긴이의 말'에서부터 아마추어리즘의 냄새를 풍기기는 했다. "Henri Lefevre의 책을 찾기 위해 '르페브르'가 좋을지 '르뻬브르'가 좋을지 걱정하는 일은 또 어떤가"라고 별걱정을 다하는 역자들을 두고 미소를 지어야 할지 쓴웃음을 지어야 할지 헷갈렸기 때문이다(요즘은 Lefevre를 '르뻬브르'로 읽는 게 가능한가? 물론 Foucault를 '푸꼬'로 읽는 걸로로 모자랐는지 '뿌꼬'라고 읽는 이도 보긴 했지만). 어쨌든 다소 미덥지 않았는데, 번역은 생각보다 더 열악했다. 해서, 벤야민이 강조하는바, '세속적 계몽' 대신에 내가 얻은 것은 '세속적 오역'들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런 불만을 털어놓는 것이 '계몽'에 얼마나 이바지 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역의 반복들로부터 (언젠가는!?) 놓여나기 위해서라도 '싫은 소리'를 몇 마디 해야겠다.

애초에 시작은 '사랑' 이었다. 123쪽에서, "니체와 비슷한 주장을 했던 '개인주의의 설교자들'이 '대도시를 그렇게 끔찍하게도 사랑했던 것과 대도시적 인간의 가장 불만족스러운 열망에 대한 예언자이자 구원자로서 앞에 나타난 이유' 사이에 우연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없다..."로 나가는 문장이다. 원문은 "it's no coincidence that these 'preachers of individuality' are so 'passionately loved in the metropolis and why they appear to the metropolitan man as phrophets and saviors of his most unsatisfied yearnings."(52쪽) 굵은 글씨는 내가 표시한 것인데, 번역문은 수동문을 능동문으로 옮겼다. '니체와 비슷한 주장을 했던'이란 말은 역자의 서비스로 들어간 것인데, 그런 서비스 정신이 문장의 기본틀을 간과한 건 유감스럽다. '개인주의의 설교자들'이란 앞 페이지에서 언급된 루소, 러스킨, 니체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대도시의 '군집화 경향'에 대해서 혐오했는데, 대도시에서는 이들이 아주 열정적으로 사랑받았다는 것(그러니까 그들이 대도시를 사랑한 게 아니다. 바로 앞에서 혐오했다고 해놓고, 어떻게 '끔찍하게도 사랑했다'고 말을 바꿀 수 있는가?).

같은 쪽에서 "20세기 초반 베를린에서 보낸 10년간 벤야민은 지적인 욕구를 느꼈고, 그 욕구가 가지는 '활동적인 환상'은 알프레드 되블린의 1929년 걸작인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배경이 되었다."도 원래 끊어진 두 문장을 한 문장으로 바꿔 옮기면서 주어(그 욕구)를 잘못 표기하고 있다. 번역문 대로라면, 벤야민의 지적 욕구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인데, 말이 되는가? 되블린의 작품은 우리말로도 번역돼 있는데(적어도 3종의 번역서가 있다. 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1980년 파스빈더에 의해서 15시간짜리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내용은 프란츠 비베르코프의 하층생활에 관한 이야기인데, 제목에서 암시되듯이, '알렉산더 광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 광장의 바로 그 이웃인 되블린의 작품 속 등장인물이 숨을 들이마시고 그로부터 자양분을 얻었던 그 공기는 벤야민이 들이마셨던 근대 베를린의 공기였다."는 건 말 그대로 '소설'이다. 원문은 "But one of stars of Doblin's book - the Alexanderplatz neighborhood itself - gulped in, and was nourished by, the same modern Berlin air that Benjamin imbibed." 자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문장에서 '소설의 한 배역'과 '알렉산더 광장 지구 자체'는 동의어이다. 번역문은 '지구/지역(neighborhood)'이란 말을 '이웃'으로 오역하는 바람에 연이어 엉뚱한 작문을 한 사례이다.

사실 이런 사례들은 글의 대세(=내용)와는 무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실수들이 허용되다 보면 '유관한' 오역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126쪽에서, "이후 17년 동안 벤야민은 그 도시 자체와 넓은 풍경에 아이와 같은 천진한 포용력을 유지했다."의 원문은 "Seventeen years later, Benjamin retained this wide-eyed, childlike embrace of the city."(53쪽)이다. 먼저, '17년 동안'이 아니라 '17년이 지난 뒤에도'이다. '그 도시'는 파리이고, 파리에 대한 천진한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 호기심어린 시선을 그가 견지했다는 내용. 번역문의 '넓은 풍경'은 무얼 옮긴 것인지 알 수가 없는데, 'wide-eyed'를 옮긴 거라면 눈이 크게 떠질 만한 오역이다.

곧 이어서 "청년이자 성인이었던 벤야민에게, 베를린은 파리의 옆에 있음으로써 핏기를 잃어버린 곳이었다. 파리는 음모, 진기함, 그리고 모험으로 상징화되었지만, 이에 반해, '베를린은 아마도 그토록 작은 것들이 간과되거나 간과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였을 것이다." 같은 대목은 내용을 반대로 옮겼다는 점에서 부도덕한 오역에 속한다. 원문은 "For the young and mature Benjamin alike, Berlin paled alongside Paris. The latter symbolized intrigue, novelty, and adventure. Conversely, 'there are perhaps few cities in which so little is - or can be - overlooked as in Berlin."이다. '청년이자 성인이었던 벤야민'이란 번역은 문맥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데, 'young Benjamin'은 대학시절 처음으로 두 주간 파리를 여행하던 시절의 청년 벤야민을 말하고, 'mature Benjamin'은 그로부터 17년 후 파리에 체류하며 <파리 일기>를 쓰게 되는 중년의 벤야민을 말한다. 그러니까 "청년 벤야민에게서나 중년 벤야민에게서나 똑같이" 정도로 옮겨져야 한다.

똑같이 어쨌다는 건가? "베를린은 파리에 견주면 창백한(=볼품없는) 도시였다"라는 것. 왜? 비밀스럽고 진기한 모험으로 가득 찬 파리와는 달리 베를린은 그토록 작은 것들이 간과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였다? 알다시피, little은 '거의 없다'라는 부정의 뜻이므로 이 대목에서는 간과될 게 거의 없다는 뜻이 된다('그토록 작은 것들'?). 왜? 파리와는 달리 볼 게 별로 없기 때문. 파리에서라면 어제 본 거리와 건물도 오늘 '새롭게' 보이지만, 베를린에서는 '조직적/기술적 정신'의 효과로 한번 보면 더 볼 게 없다는 얘기이다. 해서 약간 의역하면, "베를린만큼 볼 게 별로 없는 도시도 거의 없을 것이다."  

128쪽에서, 'a second dissertation'을 '두번째 박사학위논문'으로 옮겼는데, 역자가 벤야민에 대해서나 독일의 학제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는 걸 보여준다. 벤야민의 박사학위논문은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비평개념>이고(<베를린의 유년시절>에 번역돼 있다), '두번째 학위논문'이라 지칭된 <독일 비극의 기원>은 그의 교수자격취득논문이다(물론 끝내 통과되지 못한). 원문에는 '박사' 운운하는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이 두번째 논문이 'the work of esoteric genius'로 지칭되고 있는데, '비밀스런/비교(秘敎)적인 천재의 작품' 정도가 아니라 '난해한 분위기의 그 논문'이라고 어렵게 옮겨진 것도 이해하기 난해하다.

 

 

 

 

133쪽에서, "블로흐는 다가오는 나치의 무자비한 공격을 마주하는 데 있어서는 벤야민과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벤야민이 망명을 택했던 것이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원문은 "Bloch, however, survived the approaching Nazi onslaught in a way Benjamin never did: he got out."이다. 두번째 문장의 주어(he)를 역자는 블로흐가 아닌 벤야민으로 착각해서 엉뚱한 사람을 망명시켜버렸다.  작년에 대표작 <희망의 원리>(전5권, 열린책들)가 완역돼 나온(영역본은 3권짜리이며 나는 이 책을 갖고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벤야민과 교우관계를 갖고 있었는바, "블로흐가 보여주는 종교적 신비주의와 강경한 공산주의의 혼합은 벤야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블로흐는 벤야민과 달리 비교적 일찍, 1933년에 망명했고(처음엔 스위스로, 그리고는 미국으로)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남았다. 해서 뒷문장은 "그는 탈출한 것이다."로 옮겨져야 하며, 여기서의 '그'는 '벤야민'이 아닌 '블로흐'이다(앞뒤 문장의 주어가 전부 '블로흐'인데, 대명사 'he'가 '벤야민'을 받는다는 건 난데없는 일이다).

블로흐보다 '정통적인' 맑시스트로 벤야민에게 영향을 끼진 이는 블로흐의 친구이기도 했던 루카치이다. 특히나 중요한 저작은 <역사와 계급의식>(1923; 거름, 1992), 이 책을 벤야민은 이탈리아의 카프리에서 걸출한 볼세비키 아샤 라시스로부터 소개받는다(라시스와 벤야민의 관계에 대해서는 특히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참조). "그와 그녀는 때로는 카페에서, 때로는 라시스의 호텔에서 발가벗은 채로 루카치의 책을 함께 소리내어 읽었다." 이런 배경지식하에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은 1920년대의 급진적인 국면을 맹비난했다."란 문장을 읽어보자. 원문은 "...Georg Lukacs, whose History and Class Counscious tore on to the radical scene in the 1920s." 'tear'란 동사에 '비난하다/혹평하다'란 뜻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의 뜻은 내 생각에 말 그대로 '구멍을 내다' '찢어놓다'(=양분시키다)이며, 구어적으론 '들쑤셔놓다' 정도로 보인다.

알다시피, 1930년대에 루카치는 '공식적인 맑스주의'로서의 스탈린주의와 갈등관계에 있었으며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내비친 자신의 사상에 대한 수정을 요구받는다('관념론'이란 멍에를 뒤집어쓰면서). 인용문에 붙은 각주10)은 이에 관한 내용인데,  "최근 들어 밝혀진 바로는, 실제로 루카치가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과거에 그가 집필한 위대한 저작에 대한 폐기통고를 거절하면서 그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에세이를 집필했다."(413쪽) 이에 대한 원문은 이렇다: "More recently it was discovered that Lukacs really believed everything all along: he'd actually written an essay in his own defense, renouncing his earlier denunciation of his great text."(190쪽) 내 생각에 번역문은 일의 영문을 전혀 모른 채 옮겨진 것이다. 당시에 루카치는 소위 '자아비판'을 감행했지만, 그 자신은 스스로가 옳다는 믿음은 내내 견지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다시 옮기면,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루카치는 자신의 신념을 정말로 끝까지 견지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위대한 텍스트(=<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이전의(=30년대의) (자기)비판을 철회하는 자기옹호의 에세이를 쓰기까지 했다." 

물론 그 에세이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며, 그러한 사실이 밝혀진 것은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이다. 루카치가 쓴 에세이가 영어로 번역돼 나온 것이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옹호 A Defense of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Tailism and the Dialectic>(Verso, 2000)이다(이 책의 후기를 슬라보예 지젝이 쓰고 있다). 이 '옹호'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짐작에 이야기의 줄거리는 그러하다. 해서, '맑스주의' 책을 번역하는 역자들이 ('일반 독자'보다 게으르게도) 걸출한 맑시스트들에 대한 기본사항들마저 챙기고 있지 않은 것은 거듭 유감스럽다.

저자인 메리필드는 이후에 <역사와 계급의식>의 주요 내용을 3쪽에 걸쳐서 요약 정리하고 있다. 비록 "벤야민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정확히 알기란 어렵다"란 단서를 잊지 않고 있지만. 그 내용 가운데 134쪽에서, '두번째 자연(second nature)'은 아도르노에게서도 그렇고 '이차적 본성'이라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하다. 그리고 136쪽에서, "모호한 메시지와 억압적인 힘(subtle messages and repressive force)"은 "교묘한 메시지와 억압적인 힘"이 더 적당하겠다.

"이제껏 존재했던 그 어떤 맑스주의자보다도 가장 덜 실천적인 맑스주의자" 벤야민과 루카치의 차이점? 그건 '총체성'에 대한 의견차이에 두어진다. "처음에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이음매 없는 전체로서 파악할 수 없었다."(138쪽) '처음에'는 'To begin with'를 옮긴 것인데, 당연히 '먼저'란 뜻이다(이런 사소한/자질구레한 오역들은 독자를 허탈하게 한다) . "그의 정신은 폐쇄가 아니라 개방에 의해서 풍부해졌다. 언제나 미세한 균열의 틈과 구멍이 존재했다. (루카치의) 상품화는 더할 나위 없는 개념이었지만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문화와 도시주의(=도시화), 모든 건축물 그리고 일상에는 다공성(porosity)이 존재한다."

벤야민이 나폴리에서 발견해낸 '다공성'이란 개념은 '벤야민과 도시'란 주제를 살필 때 핵심적인 것인데,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과 대비시킨 저자의 설명은 일품이다(내가 '다공성'이란 개념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이다). 요컨대, 루카치의 '총체성' 대 벤야민의 '다공성'이란 구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차이 때문에 '가장 덜 실천적인 맑스주의자'가 한편으론 '가장 위대한 도시맑스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내가 아는 한 루카치에게서는 '도시(urbanism)'가 주제화되지 않는다).   

이를 약간 소급시켜서 적용해 보자. 루카치를 읽으면서 벤야민의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은 상품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확장되는데, 그 둘은 결국 동일한 것이었다("they'd become one and the same"을 "그 둘은 하나가 되었고 같은 것이 되었다"라고 옮기는 것도 지극히 보기 드문 일이겠다). "그러나 일상의 문화와 경험을 정치-경제적 궤도에 옮겨놓는 것 또한 루카치의 맑스주의라는 브랜드를 붙여야 했다."(138쪽) 벤야민의 '다공성'에 대한 설명 바로 이전에 나오는 것으로 벤야민식 맑스주의를 루카치의 그것과 대비하고 있는 대목이다. 원문은 "But bringing everyday culture and experience into the orbit of political-economy also required a few caveats about Lukacs's brand of Marxism."(58쪽) 역자가 제대로 옮기고 있지 못한 것은 'caveats'란 단어. '보류' '단서' '경고' 등으로 사전에서는 풀이되고 있는데, 문맥상 '(벤야민식으로) 일상적 문화와 경험을 정치경제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또한 루카치식 맑스주의에 대한 몇 가지 유보사항을 필요로 했다" 정도의 뜻이겠다. 그 유보는 루카치가 가정/전제하는 '총체성'에 대한 유보이다.

나폴리의 '다공성'에 대한 설명. "모든 것은 여기에서 우발적인 것의 '극장', '대중적인 무대'가 되었다. 그래서 어느 곳도 '그렇게 되거나 그 밖의 다른 것이 될 수는' 없다." 두번째 문장의 원문은 "nowhere is it 'thus and not otherwise'"이다. 벤야민의 짤막한 에세이 <나폴리>로부터의 인용인데, 원문의 이중부정을 단순부정으로 옮김으로써 내용을 거꾸로 옮긴 사례이다. 모든 것이 '즉흥성을 향한 열정'에 의해 좌우되며, 우발적인 것에 개방되어 있다면, "어느 것도 그 밖의 다른 것이 될 수는 없다"라는 말은 모순적이다. "때문에 다른 장소가 될 수 없는 장소란 것은 없다"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이해하기 쉽게 옮기면, "모든 장소가 다른 장소로 변신이 가능했다" 정도이다. 해서, 나폴리에서는 공적인 생활/공간과 사적인 생활/공간이 마구 뒤섞이게 되는 것. 참고로, 나폴리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처음 착안되는 장소이다. 때는 1924년 여름. 수잔 벅 모스는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이 벤야민의 텍스트 <나폴리>에 3쪽을 할애하고 있으며, 질로크는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그러한 '과소평가'에 이의를 제기하고 보다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140쪽으로 넘어가자(도대체 언제 끝나는 것인가?). "벤야민은 혁신적이고 경험적인 사상가"였다? '실험적인(experimental)'을 '경험적인'으로 잘못 옮겼는데, 안된 얘기지만 역자가 무식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무성의한가를 보여준다. 좀 심한 비난인가?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무식하며 무성의한가? 141쪽에서 '고상한 초현실주의적 경험(heightened surrealist experience)'는 '강화된/고양된 초현실주의적 경험'이 낫겠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이 그런 경험을 추구했다는 것인데, 벤야민은 좀 다른 방식을 시도한다. 그가 시도한 건 마리화나, 즉 마약이었다. "그는 해시시를 통해 환각 증사에 빠지길 시도했다." '해시시'('하시시')로 옮겨진 'hashish'는 사전에 따르면 통상 '마리화나'라고도 불리는 마약이므로 좀더 익숙한 용어로 옮겨지는 게 낫겠다.

문제는 그 다음 문장. "그(=벤야민)는 의사인 에른스트 조엘에게 수 년 동안 마약중독자란 진단을 받아왔다. 조엘은... 벤야민이 주기적인 우울증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었다." 벤야민이 마약중독자라고? 원문은 "He'd been medically prescribed the drug for years by Dr. Ernst Joel... to help cope with periodic depression."이다. 내용은 벤야민이 주기적인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친구인 의사 조엘로부터 수년간 (치료용)마약을 처방 받아왔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감기약 등에도 치료용 마약이 소량씩 들어 있으며 이를 다량 복용하면 환각 증세를 일으킨다. 벤야민의 복용한/처방받은 것도 그러한 치료 목적의 마약이었는데, 벤야민이 복용량을 늘림으로써 약간의 환각상태를 경험하고 이를 근거로 <마르세이유에서의 하시시>란 글까지 썼다는 것. 벤야민이 '마약중독자'라는 내용을 어디에서 읽을 수 있나?(마약 복용과 마약중독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다.) 

어쨌든 벤야민은 마르세이유의 한 작은 호텔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며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를 읽다가 곧 환각상태에 빠져들게 되며(브라스밴드가 머릿속에서 울려퍼졌다) 그는 거리로 나와서는 항구의 선술집을 헤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약은 '그때까지만 해도 두려워했던 근본적인 예리함을 드러내며 그것의 진정한 마력'을 발휘했다." 벤야민으로부터의 인용문(내가 강조한 대목)의 원문은 "its canonical magic with primitive sharpness that I had scarcely felt then"이다. 이런 대목은 오역을 지적하기도 쑥쓰러운데, 역자는 'scarcely'란 부정부사를 '두려워했던'이라고 옮긴다(좀 심하지 않은가?). 여기서 'canonical magic'은 마리화나의 아주 '전형적인/일반적인 마력'이란 뜻이고, 그 마력의 내용은 감각이 아주 민감/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그때까지 내가 느껴보지 못한 것"이다.(몇 줄 내려가서 "그는 굴 몇 개에, 아마도 토끼고기나 닭고기를 따위를 먹었을 것이다."에서 '-했을 것이다'로 옮긴 조동사 'would'는 내가 보기엔 '-하곤 했다'는 뜻이다.)

이런 류의 '각성(覺醒)'의 경험이 초현실주의에 대한 벤야민의 경도를 설명해주지만, 한편으로 그는 마약에 의한 황홀경에 비판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초현실주의자의 경험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단지 종교적 황홀경이나 마약에 의한 황홀경일 뿐이라고 믿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이다."(142쪽) 진정한 초현실주의적 경험은 '세속적 계몽(profane illumination)'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것은 "유물론적인, 인류학적인 영감"이다. 아주 부실한 번역문들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이 대목에 대한 설명이 또한 ('다공성'에 이어) 메리필드의 책에서 건질 만한 부분이다. 즉, 벤야민에게 있어서 사유란 '뛰어난 마약'이며, 진정한 계몽은 '세속적 계몽'을 통해서, 냉정한 텔레파시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 독서야말로 그 텔레파시의 과정인바, 벤야민이 1930년대 내내 파리의 국립도서관을 드나들며 했던 일, 즉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한 자료를 읽고 정리했던 일이야말로 바로 '세속적 계몽'이었으며, '뛰어난 마약'의 장기복용이었던 것이다!(해서, 우리의 청소년들이 배워야 할 것은 '본드'가 아니라 '독서'이다.)

물론 읽을 만한 대목이라고 해서 오역이 빠지는 건 아니다. "따라서 벤야민이 보기에 '신비스러운 것의 불가사의한 측면'에 있어 '신파조의' 혹은 '광신도적인 긴장'이 여태까지 이루어낸 것은 하나뿐이었다."(143쪽) 무슨 말인가? 원문은 "Thus, 'histrionic' or 'fanatical stress' on the mysterious side of the mysterious' takes one only so far, Bejamin thought."(강조는 나의 것, 역자는 'stress on'으로 이어지는 대목을 잘못 보고 있다) 벤야민이 강조하는 것은 '미스테리한 것'의 일상성, 일상적인 면모이다. 즉, 미스테리한 것은 연출되는 것도 아니며 들뜬 상태에서 포착되는 것도 아니다. 다시 옮기면, "그래서, 벤야민이 생각하기에, 신비스러운 것의 신비스러운 면에 대한 과장적이면서도 열광적인 강조는 기껏해야 일면적일 뿐이다." 왜? 우리는 변증법적인 시각을 통해서, '불가해한 것으로서의 일상', '일상으로서의 불가해성'을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정말로 신비스럽고 불가해한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것들, 벤야민이 보기엔 저 '아케이드'와 '쇼핑몰' 속에 있다. 따라서, 벤야민이 "만약 초현실주의의 아버지가 다다(Dada)라고 한다면, 초현실주의의 어머니는 아케이드였다"(147쪽)라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겠다.

벤야멘에게서 '다공성'과 '세속적 계몽'이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내 생각에 메릴필드에게서 배울 수 있는 핵심은 다 챙긴 것이 된다. 해서, 뒷부분은 그냥 대충 빨리 넘어가기로 하자. 152쪽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풍자적 문체와 천재성에 의지했지만, 파리를 향한 그의 열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게 "맑스보다도 시인 보들레르를 더 마음 속 깊이 사랑"했던 벤야민의 보들레르에 대한 태도인가? 원문은 "Benjamin got turned on by the poet's allegorical style and genus, to say nothing of his prodigious passion for Paris." 지적하기도 멋쩍은 일이지만, to say nothing of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은 말할 것도 없이'란 뜻이다(2+2는 5가 아니라 4라고 지적하는 식이니 낯간지럽다). 그리고 'turn on'은 여기서 '의지하다'가 아니라 '흥분되다' '매혹되다'란 뜻이다.

이어지는 문장. "그는 늘 보들레르에 대한 자신의 작업이 다름아닌 자신의 가슴에 소중한 것이라고 얘기했다." 원문은 "Benjamin always insisted that his work on Baudelaire was more dear to his heart than any other."(65쪽)이고, 다시 옮기면, "벤야민은 언제나 자신의 보들레르론이 어느 작업보다도 그에겐 소중하다고 말했다." 즉, 비평가로서 자신이 많은 글을 썼지만,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은 보들레르론이라는 뜻이다. 'any other'를 '다름아닌'으로 옮겼는데, 문맥상 'any other works'란 뜻이다.

153쪽에서 '모호함(ambiguity)'는 '양가성'으로 옮기는 게 이해하기에 쉽다. 근대 파리의 설계자 오스망의 새로운 파리 건설에 대해서 보들레르/벤야민은 개탄했지만, 한편으론 그러한 파괴/건설이 나은 '감각적 즐거움'이라는 새로움도 인정했다는 것(오스망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하비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가 자세하다). "새로움은 상품의 사용가치와는 독립적인(=무관한) 성질이다. 그것은 부지런한 식료품 상인의 유행이 어떤 것인가와 같은 착각의 원천이 된다." 무슨 소리인가? 원문은 "Newness is a quality independent of the use value of the commodity. It is the source of that illusion of which fashion is the tireless purveyor."이다. 복잡한 문장의 오역이라면, 지적하는 사람도 좀 덜 민망할 것이다. 관계사로 연결된 뒷문장을 분해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즉, Newness is the source of the illusion. + Fashion is the tireless purveyor of that illusion. 해서, "'새로움'이란 (상품물신이라는)환영의 원천이며, 패션은 그 환영의 지칠 줄 모르는 조달자이다."  

벤야민과 엥겔스와의 비교. "벤야민이 '오스망'에 대한 엥겔스의 생각을 인용하긴 했지만, 그의 맑스주의적 방침은 '주택문제'에 대한 엥겔스의 방침보다 오히려 치밀했다. 엥겔스가 자본주의적 근대화로부터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던 반면에, 벤야민은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총체적인 경험에 으해 큰 자극을 받았다."(153쪽). 두번째 문장에서 엥겔스 파트는 "Whereas Engels saw little apart from capitalist modernization"을 옮긴 것인데, 내용은 엥겔스가 자본주의 근대화를 약간 떨어져서, 즉 거리를 두고 보았다는 것이다.

지나가는 김에, 154쪽 끝에서 '1789년의 일(the work of 1789)'은 '1789년의 과업'이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159쪽에서 "진실은 구체적이다(Truth is concrete)"란 브레히트의 유명한 공리는 "진리는 구체적이다'로 옮겨져야겠다. 더불어, 브레히트의 작품 <3페니 소설(Threepenny Novel)>은 <서푼짜리 오페라>를 말하는 것 아닌가? 브레히트와 벤야민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되고 있는데, 아도르노와 숄렘은 모두 브레히트가 벤야민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걸로 평가한다. "그들은 브레히트가 갖고 있던 영악하고 복잡한 심성과 잘 제련되고 세련된 도구가 이제는 벤야민에게 잔혹한 회초리로 변했다고 말했다." 원문은 "Such a sophiscated and complex mind, they said, a fine-tuned instrument of precision, was now converted into a crude mallet."(68쪽) 일단 'Such a sophiscated and complex mind'와 'a fine-tuned instrument of precision'가 동일인으므로 번역문은 지지될 수 없다. '영악하고 복잡한 심성의 브레히트'? 뜬금없는 소리이다. 내용은 벤야민처럼 아주 섬세하면서 복합적인 심성의 소유자가, 아주 정밀하게 조율된 악기 같은 사람이 (브레히트의 영향으로) (투박한) 나무 방망이처럼 변해버렸다는 얘기이다.  

지금까지 지겹게 나열한 이 세속적 '오역'의 대미는 나름대로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벤야민은 자본주의 도시를 세속적 계몽이나 혁명 속의 혁명적인 것으로, 또한 신뢰할 만한 빛의 도시로 평가한 최초의 맑스주의자였다"(160쪽)란 결론에서 마무리되었다면 좋으련만, 그리고 1940년 9월 피레네 산맥에서 스페인 국경을 넘으려던 벤야민이 50알의 모르핀을 한꺼번에 먹고 자살한 장면에서 끝났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으련만, 저자 메리필드는 가정법 문장들로 벤야민 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만약에 벤야민의 희망대로 무사히 미국에 망명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그는 (결국) 리버사이드 도로를 거닐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가 망명에 성공했더라면, 그래서 미국에 살았더라면, "의심할 나위없이 그는 웨스트사이드 위쪽 거리의 유태인 이민문화에 대해 편암함을 느꼈다."(161쪽) 이하의 과거시제 문장들은 전부 오역이다. 가정법 과거완료형의 문장들이기 때문에, '느꼈을 것이다'란 식으로 모두 수정되어야 한다. 다시 한번, 잔뜩 인상을 써야 할지 웃음을 지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번역 연습'을 '번역'으로 착각하고 책을 내는 일은 삼가해주었으면 싶다...

05. 08. 12-14.

P.S. 벤야민 장의 각주는 '발터 벤야민'이 아닌 '월터 벤야민'으로 표기돼 있다. 아마 본문과 각주의 역자가 달랐던 모양이다. 414쪽 각주22)는 유익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번에 국역본이 나온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발간과 관련된 것이다. "그 책은 전설적인 역사를 갖는다. 1940년 벤야민이 죽은 이후에도 그것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벤야민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가로지를 때 끈덕지게 끌고 다녔던 커다랗고 낡은 서류가방 안에 그 원고가 있었던 것일까? 당국에 의해 압수당했던 것일까? 벤야민이 나치의 점령을 피해 달아나기 전에,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그 책을 국립도서관 안에 감추어 놓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1981년, 이것은 1962년에 사망한, 벤야민의 친구이자 도서관의 전 기록보관인(=사서)인 조지 바타이유('조르주 바타이유'를 말한다)의 사유지에서 기적적으로 발굴되었다. 1년후, 파사젠베르크는 그 책을 독일어로 출판했고, 오랜 기다림 후에서야 벨넵(벨크넵) 출판사(Belknap Press)가 마침내 영어판을 출간했다."

'파사젠베르크'는 벤야민이 자신의 원고에 붙인 이름이고, 그것이 1982년에 드디어 출간됐다는 것. 그런데, '파사젠 베르크'가 그 책을 독일어로 출판했다고? 이 '지독한 무지'에 대해서는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할는지? 더불어, 번역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벤야민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가로지를 때 끈덕지게 끌고 다녔던 커다랗고 낡은 서류가방 안에 그 원고가 있었던 것일까?"에 대한 궁금중을 이 각주는 해결해 주는데, 사실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의 책갈피 벤야민 약력에는 "벤야민은 1940년 9월 26일 밤, 에스파냐 국경 지역 포르 부에서 모리핀으로 자살한다. 그는 에스파냐 국경으로 향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파사젠베르크> 원고를 지니고 있었다."고 돼 있다. 물론 매우 '감동적'이지만 믿기지는 않았었는데(그는 원고를 위해서라면 자살해서는 안되었다!), 내막은 따로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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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5-08-16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이 타시겠습니다.^^ 이거 참 한두번도 아니고,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하는 건지, 음란물 유포행위로...로쟈님 말씀처럼 한국말로 유식해지기는 힘들까요? 그나마 이렇게 솎아주시니 다행입니다만...

로쟈 2005-08-16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한국어로 유식해진다는 건, '웬만해선' 힘듭니다. 웬만하지 않은 책들 덕분에...

비연 2005-08-16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krinein 2005-08-18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번역에 대한 몇몇 소문은 들었지만, 그래도 번역본의 출간을 반가움 반 근심반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정말 신고라도 해야할까 봅니다(그런데 어디에?).

주니다 2005-08-1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소개해주신, 할 포스터의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 )>(아트북스)의 역자가 이 책보다 먼저 혼자 번역해서 출간한 토마스 크로우의 <대중문화 속의 현대미술>(아트북스)를 어제 읽었습니다. 결론은 엄청난 번역으로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는 책이었습니다. 오역,오역하지만 이처럼 심각한 경우는 처음입니다. 책 전체가 전형적인 번역투인데다가 오역은 차치하고(오역도 수두룩), 한국말이 아닌 문장들로 빼곡했습니다. 역자 후기는 더 가관인게 "많은 학생들이 내용을 반대로 해석하곤 하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그건 영어만의 문제는 아니지 싶었다."라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데 이거보고 뒤로 자빠졌습니다. 하하핫. 이거 출판사에 환불해달라고 해야 되는건지....처음으로 리뷰를 올리게 될 것 같은 예감이 엄습합니다.^^

로쟈 2005-08-19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의 책은 안 산 게 천만다행이네요(주니다님은 사서 읽으신 거네요!). 아무튼 이런 '문화'는 더이상 지속될 수 없도록 무슨 특단의 조치라도 있어야 할 거 같습니다...

aho 2005-08-19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분석이에요. 저자에게 메일을 보내보는 건 어때요? 이정도 오역이라면 좀 심각한데, 두께로 개정을 포기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로쟈 2005-08-19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건 벤야민 장뿐이지만, 다른 장들의 번역이라고 해서 그닥 나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에, 역자들 자신이 모르고 있을 거 같지 않으며(만약에 그렇다면, 그 '둔감함'과 '무능력'에 대해선 어찌해볼 도리가 없겠죠), 그런 '부실한' 번역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서 책을 낸 거라면(대단히 '오만한' 경우인데) 이 정도의 지적에 꿈쩍할 거라 생각지 않습니다. 기대할 수 있는 건 출판사측에서 회수하고 재번역서를 내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제로이겠죠. 오늘도 생각없는 언론(한겨례 같은)에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이 책을 추천도서로 올려놓았더군요. 사실, 제가 더 뻔뻔하고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는 쪽은 그렇듯 옆에서 부추기는 이들입니다...

주니다 2005-08-19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의 책<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 )>은 학생들과 함께 번역을 해서인지^^ 가독성이 훨씬 좋습니다. 서점에서 잠깐 살펴본 거지만서도. 문제는 그 책이 아니라 '크로우'의 책이죠.^^ 책의 1장은 이미 다른 책에서도 2번이나 번역이 되어 있는데, 결론은 그것도 안봤다는 얘기죠. 역자가 그 이름도 거룩한 <교수님>이시니, 아마도 그 책으로 수업을 진행할터, 죄없는 학생들이 불쌍한거죠. 근데 이 정도 상태면 학생들도 형편없는 번역이란걸 알텐데, 도대체 무슨 배짱일까요?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나저나 비가 좀 오면서 날이 너무 시원해졌네요. 주말을 잘 보내실 준비는 되셨나요? (일들은 좀 마무리가 되시는지....끝없이 쏟아지는 일들을...^^)

로쟈 2005-08-1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불가사의한, 미스테리한 일들 투성이입니다. 한국식 '학술'을 한꺼풀만 벗겨보면 말이죠... 일들이야 늘 소나기 같아서, 안 젖어 있을 도리가 없습니다(주말마다 비맞은 생쥐꼴입니다. 어쩌다 볕들 날 기다리는--;).

주니다 2005-08-19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맞은 생쥐꼴이라...ㅎㅎㅎ, 가족과 함께 주말 편하게 보내시구요...
한겨레 서평에는 이번에도 <베냐민>을 고집했더군요. 그 고집에 경의를^^

리그파 2006-11-18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무식함을 탓하고 있었는데...더 이상 끙끙 앓지 말고 책 덮으렵니다.
로자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로쟈 2006-11-18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 책은 좀 심한 경우였습니다...
 

한동안 바쁜 일들로 제쳐두었던 일들을 주말에 밀린 빨래 해치우듯 해본다. 그간에 신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딱히 첫손가락에 꼽을 만한 책이 눈에 띄지 않았었는데, 며칠 전에 그에 값할 만한 책이 나왔다. 아마도 이 연재를 즐겨 읽어보시는 분이라면 맞히실 수 있을 것이다. 맞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1>(한길사)이 그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신화학>은 전4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분량의 책이며, 말년의 레비-스트로스가 20년에 걸쳐 쓴 것이다. 해서 과연 언제쯤 국역본이 나올 것인가 궁금해 하던 차였는데, 생각보다는 빨리 책이 나왔다. 1권 '날것과 익힌 것'에 이어서 나머지 책들, 곧 2권 '꿀에서 재로', 3권 '식사예절의 기원', 4권 '벌거벗은 인간'도 곧 나오는 건지 궁금하고 곧 나오기를 기대한다. 내가 벌써 이 책을 읽어봤을 리는 없으므로 책에 관한 정보는 레비스트로스의 회고대담이나 2차문헌들에서 얻은 것이다. 대담이란 디디에 에리봉과 나눈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강, 2003)을 말한다. 레비-스트로스 입문서로 가장 추천할 만하다(나는 개인적으로 '사상'과 그 '사람'을 분리시켜서 생각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먼저, 상식적으로 알아둘 일은 <신화학>에서 다루어지는 재료들이 대부분 아메리키 신화라는 것이다(알다시피 지역별로 신화는 무궁무진하며, 거기에 대한 전문가들이 다 따로 있다. '세계의 모든 신화'의 전문가가 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세계 모든 민족'의 민족학자/인류학자가 된다는 게 가능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가령, 푸코의 스승인 뒤메질은 인도 신화 전문가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레비-스트로스는 신화들을 사고의 재료로 사용하여 개별적인 것 너머에 있는 보편적인 구조를 발견하고 기술하고자 한다는 것. 그가 '구조주의' 인류학의 대가인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론을 무리하게 적용하다 보면 신화의 개별성을 무시한 억지를 부릴 수도 있겠다. 이러한 억지에 대해선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민음사, 1996)에서 제기된 비판이 신랄하며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렇다면,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은 '극복'의 대상이며, 극복된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그건 오이디푸스 신화의 구조에 대한 그의 분석을 떠올려봐도 알 수 있다. 신화들을 구성하는 신화소들을 분리/추출해낸 다음에 그가 하는 일은 그 신화소-카드들을 악보처럼 배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매우 아름다운 '사유의 논리'가 구성되게 된다. 그 아름다움에 견주면 현실과의 유관성은 여기서 이차적이다. 요컨대, 신화학자 레비스트로스를 지운 자리에서도 우리는 아티스트, 혹은 작곡가로서의 레비스트로스를 읽어낼 수 있는 것(그 자신이 클래식 음악의 열렬한 애호가였다). <신화학> 또한 음악의 악장 형식으로 구성돼 있어서 서곡에 이어서 변주곡이 나오는 식이다. 이러한 '형식'이야말로 가장 레비스트로스적인 것이다(이러한 '형식'의 기원은 그가 야콥슨에게서 시사받은 음운론이다). 해서 나의 제안은 신화학자나 인류학자로서보다는 음악가로서의 레비스트로스에 주목하는 것이 그의 <신화학>을 읽는 보다 재미있는 방식이 아닐까라는 것(신화들에 별로 관심이 없는 내가 굳이 이 책을 반가워하는 이유이다).

 

 

 

 

책의 역자는 임봉길 교수로 30년전 프랑스 유학시절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고 하는데, 그런 인연이 좋은 번역으로 결실을 맺었으면 싶다. <구조주의 혁명>(서울대출판부, 2000)의 한 장은 임교수가 쓴 '레비스트로스와 구조인류학'이다. 참고할 만한 글이고, 레비스트로스 사상에 대한 자세한 해제는 (초보자가 읽기엔 좀 어렵지만)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인간사랑, 1989)를 참고할 수 있다. 초보자에게 가장 쉬운 책은 주경복 교수의 <레비스트로스>(건대출판부, 1996)이다. 문고본이어서 분량이나 가격 모두 부담이 없다. 최협 교수의 <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풀빛, 1996)는 레비스트로스 입문서라기보다는 인류학 입문서로서 유용하며, 번역서 가운데에서는 에드먼드 리치의 <레비스트로스>(시공사, 1998)가 부담없다. 리치는 레비스트로스의 영국인 '제자'이며, <성서의 구조인류학>(한길사, 1996)의 저자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영향? 친족/민족 연구의 권위자인 이광규 교수가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류학자로 레비스트로스를 꼽은 적이 있다. 물론 그 경우는 <친족의 체계>라는 레비스트로스의 박사학위논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경우이겠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레비스트로스는 모방하기 어려운데,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의 방법론이 '음악적 재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책은 역시나 한길사의 그레이트북스로 나온 <왕필의 노자주>. 저자는 임채우 교수로 "왕필의 역철학 연구"로 학위를 받았고, 이미 <주역 왕필주>(길, 2000)를 역간한바 있다. 동양철학 책을 한두권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왕필(혹은 왕삐)이란 이름을 모를 수가 없는데(나는 김용옥의 책들에서 처음 소개받았다 '아마데우스 왕삐'!)), 삼국시대를 살았던 이 '천재'는 비록 23살의 나이에 요절했지만, 노자에 대한 가장 형이상학적이면서 권위있는 주석을 남겼다(비록 요즘은, 특히 재야에서 그의 주석을 비판하는 이들이 많아진 듯하지만).

이 <노자주>에 대해서는 이미 김학목의 번역으로 <노자 도덕경과 왕필의 주>(홍익출판사, 2000)가 출간돼 있는데, 해석상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책세상에서 새로 나온 <노자> 번역/주해에서 저자인 임헌규 교수는 홍익출판사본에 대해서도 "왕필의 주석을 세밀하고 정확하게 번역해놓은 책"이라 평하고 있다. 함께 읽어볼 만한 책으론 김형효 교수의 <사유하는 도덕경>(소나무, 2004)가 있다. 오래전에 나온 <데리다와 노장의 독법>(정신문화연구원, 1994)의 업그레이드본인데, 역시나 임헌규 교수에 따르면, "<노자> 전체를 수미일관한 철학적 사유로 읽으려고 시도한 책"으로서 "다소 무리한 해석도 있지만, 근래에 연구된 가장 의미있는 연구서 중의 하나"이다. 아울러 백서본, 곽점본, 왕필본 등 주요 노자판본에 대한 비교주해는 이석명의 <백서노자>(청계, 1993)를 참조할 수 있다.

<노자>는 가장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다고 말해지면서도 분량이 부담없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해석과 주석에 도전해보는 책이다. (내가 더 좋아하는 책은 <장자>이지만) 나도 그런 축에 들어서 한때는 <노자> 영역본을 사모으기도 했었다(4-5권을 구했던 듯하다). 작년에 러시아에 있으면서 러시아어본 <도덕경>을 기꺼이 구해들었던 것도 그런 때문이다(이 책에도 상당한 분량이 주석이 포함돼 있다). 아직 여유가 좀 있지만, 아주 늙기 전에 모아놓은 텍스트들을 읽으며 <도덕경>에 대한 나의 생각도 적어두고 싶다. 이건 학구적 바람이기보다는 호사가적인 바람이다(*한길사의 신간 <왕필의 노자주는 생각해보니까 이미 나왔던 책이다. <왕필의 노자>(예문서원, 1997)가 그것이다. 나는 그 책을 갖고 있는데, 알라딘 검색만을 의지하다가 깜박 신간으로 착각했다. 수정된 사항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다시 살 필요는 없어 보인다).

 

 

 

 

세번째 책은 소설로서 중남미소설 선집인 <붐 그리고 포스트붐>(예문). 이 분야의 전문가인 송병선 교수의 번역이다. 우리가 알 만한 중남미 작가들이 대거 망라된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인데, 피서지에서 한번 읽어봄 직하다. 상식적인 문학용어로 알아두어야 하지만, "'붐(Boom)'이란 20세기 후반 세계문학의 중심으로 급부상한 중남미 현대소설을 일컫는다." 붐세대 작가들이란 말도 쓰는 듯한데, 그 다음 세대가 포스트붐이 되겠다. 교양함양 차원에서도 필독서. 이 책과 함께 꼽고 싶은 것은 열린책들에서 새로 나온 줄리안 반즈의 소설들이다. 반즈는 영국의 중견작가인데, 이전에 동연출판사에서 <플로베르의 앵무새>, <내 말 좀 들어봐>와 <10과 1/2장으로 쓴 세계역사>가 나온 적이 있고, 나는 이 책들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태양을 바라보며>를 포함해서 새로운 푸대에 담겨 출간된 것. 나는 그의 책들을 드문드문 읽었지만, 반즈는 유머가 있으며 신뢰할 만한 작가라고 생각한다(이른바 '돈되는 작가'인 것이다).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문학동네, 1998)까지 포함해서 한번쯤 반즈의 세계에 푹 빠져보시길...

 

 

 

 

네번째 책은 다다이즘 예술가 만 레이의 '자화상'  <나는 Dada다>(미메시스). 나는 이름으로만 접해본 작가인데, 소개에 따르면 " 세잔과 피카소의 그림, 브란쿠시의 조각 등을 접하며 유럽 현대 미술에 매혹되었고, 1913년 아머리 근대 미술전에서 유럽의 첨단 회화 유파들의 그림을 보고 결정적으로 유럽 예술의 선진성에 경도되기 시작" "초기에는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회화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가 마르셀 뒤샹과 프랑시스 피카비아와의 만남을 통해 점차 다다이즘에 접근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론 문학적 다다이즘에 관심이 있어서(가령, Deridada는 어떤가?)  <다다와 초현실주의>(한길아트, 2001) 등을 사보기도 했다.

사전적 소개에 따르면,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성과 합리주의가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믿음이 무너지자, 젊은 예술가들은 기성세대들의 편견과 인습에 도전하여 반예술적 부정과 파괴를 표현수단으로 하여 태동시킨 예술유파"이다. 철학자들 가운데는 무정부주의적 인식론을 주장한 과학철학자 파이어아벤트가 다다이스트로 분류되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선 하모니즘과 함께 다다이즘은 예술의 기본정신이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관심은 충분했던 것 같지 않다. 만 레이의 자서전을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건 그런 정신의 시대사적 맥락을 구경해보기 위해서이다.

 

 

 

 

이제 마지막 한 권을 꼽아보기로 하자. 분야별 안배 차원에서 헬렌 피셔의 <왜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가>(생각의나무)로 낙착. 우선 믿을 만한 학자들이 추천하고 있다. "낭만적 사랑에 대한 번뜩임과 구체적 경험을 원한다면 소설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중심부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에드워드 윌슨) 그리고, "헬렌 피셔는 독자에게 인간의 열정, 그리고 그 결과로 일어나는 극도의 환희와 절망들을 잊을 수 없는 인상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인류라는 존재에 대해 지금껏 씌어진 가장 매력적이고 과학적으로 탄탄한 저서 중 하나다."(데이비드 버스)

사실 헬렌 피셔와는 구면인데, 나는 그녀의 <사랑의 해부학>(하서출판사, 1994)도 읽었고, <성의 계약>(정신세계사, 1999)도 읽었다. 데이빗 부스(=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백년도서, 1995), 사라 홀디의 <여성은 진화하지 않았다>(서운관, 1994) 등도 그맘때 같이 읽은 책들이다(*서해문집에서 다시 나왔다). 모두 영장류 학자들이거나 인류학자들이다(버스는 성심리학자이면서 진화심리학자). 이번에 개정판이 나온 <제1의 성>(생각의나무)만 읽지 않았을 따름인데, 그건 자세한 리뷰들을 읽는 걸로 대체했기 때문이었다. 짐작에 신간은 <사랑의 해부학>의 업그레이드 버전인데,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저자는 사랑과 같은 우리의 강렬한 감정과 뇌의 생리학적 변화의 연관성에 주목한다.

곧 소개에 따르면 "주로 책은 바로 알 수 없는 사랑의 매커니즘을 실험과 조사를 통해 분석해낸다. 책은 일단 흥분, 변덕, 나른함, 집착 등 사랑에 빠졌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시공간과 성별을 초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랑이 전 인류에 공통된 뇌의 작용에 따른 현상이기 때문이라는 것. 사랑에 빠졌을 때 세상이 달라 보이는 이유는 나의 뇌가 변하기 때문이고, 마찬가지로 사랑이 변한다면 그것은 나의 뇌가 변하기 때문이란다." A10신경이나 암페타민, 도파민 등의 호르몬 얘기들도 아마 자주 나올 법하다. 

윌슨의 주장대로, 이러한 대뇌생리학적 환원이 "인간 본성의 중심부를 근본적으로 이해"하는데 요긴하며 필수적일 수 있다. 하지만, 역시나 윌슨의 주장대로, "낭만적 사랑에 대한 번뜩임과 구체적 경험을 원한다면 소설을 읽어야 한다." 우리의 열정이 암페타민과 연관된다는 걸 피셔의 책은 말해주지만, 정작 그 암페타민이 분비되도록 해주는 건 (책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의 대상들이다. 책이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는다는 건 그럴 만하다고 쳐도 책이 우리를 (사랑만큼) 흥분에 빠뜨리지 못한다는 건 씁쓸한 일이다(이젠 옛날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 걸 생각해보라). 해서 우리의 책들은 보다 강(력)해질 필요가 있다. 암페타민 발산제라도 먹이든지, 주사하든지 하여간에...(우리의 떠나간 연인들이 되돌아올 리 없으므로...)

05. 08. 06. 

 

 

 

 

P.S. 본문에서 아깝게 거명되지 않은 책은  장 뤽 낭시 등이 쓴 <숭고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이다. 장 뤽 낭시나 라쿠-라바르트는 '데리다 사단'에 분류되는 철학자들로서 '알튀세르 사단'의 랑시에르와 함께 앞으로 더 많은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책은 낭시가 편집한 것인데, "1984년에서 1986년 사이에 잡지 「포에지」에 발표된 일련의 '숭고 분석'에, 또 다른 네 편의 논문을 첨가한 총 여덟 개의 글을 싣고 있다. 숭고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 그리고 숭고의 개념과 관련된 질문들을 다시 돌아본다." 흥미롭지만, 책의 가독성의 대해서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기에 장담하지 못하겠다.  

다행인 것은 이번에 칸트의 <판단력 비판>(책세상) 발췌역이 나왔다는 것(아무래도 박영사판 <판단력 비판>보다는 읽기 편하겠다). 특히, "미의 분석론"과 "숭고의 분석론"이 번역된바, 미학(특히 요즘 주목받는 숭고론)에 관심을 둔 이라면 반드시 읽어두어야겠다(같은 시리즈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도 <판단력 비판>의 단초를 보여주는 것으로 참고할 만하다). 칸트의 숭고론에 대해서는 리오타르의 강의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현대미학사, 2000)도 참고할 만하지만 철학에 대한 소양을 좀 필요로 한다. 교양수준에서라면, '숭고'와 '시뮬라크르'를 다루고 있는 진중권의 <현대미학강의>(아트북스, 2003)이나 숭고에 대한 통시적인 안내를 시도하고 있는  안성찬의 <숭고의 미학>(유로서적, 2004)이 더 유용하겠다.

더불어 반드시 참고해야 할 책은 지젝 등의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 2005)로서 성적 차이에 대한 라캉주의적 견해를 소개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 성적 차이가 칸트의 숭고론에 대한 재독해, 즉 성별화된 숭고론의 양상으로 전개된다는 것(남성이 역학적 숭고에 대응한다면, 여성은 수학적 숭고와 매치될 수 있다). 특히 조운 콥젝과 지젝의 논문은 필독의 가치가 있다...

 

 

 

 

P.S. 오늘자(8월 8일) '한겨레' 문화란(17면)에 <신화학1>에 대한 리뷰가 실렸다. 지난 금요일에  대한 타블로이드판 북리뷰(책/지성 섹션)란에서는 신간으로 간단히 처리된 책이 갑자기 크게 다루어진 이유는 모르겠다(웬 뒷북?). 담당기자가 늑장을 부린 것인지도. 그런데, 늑장을 부린 원고 치고 좀 부실하다. 보도자료 이상의 내용을 찾아보기 어려운데다가 사실관계를 왜곡한 내용도 포함돼 있어서이다. "국내에 번역 소개된 레비-스트로스의 저술로는 <슬픈 열대>, <보다 듣다 읽다>,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등이 있다."고 했는데, <야생의 사고>(한길사, 1996)이 빠진 건 유감이다. 앞에서 나열한 책들이 '이론적인 저작'이 아니어서 "그의 지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긴 하지만, 그 '정수'를 전하기엔 아무래도 부족함이 있다."라는 진단은 <야생의 사고>를 고려했더라면 다소 완화되었을 것이다.

이어서 기자는 "반면 레비-스트로스의 본격 연구서인 <친족의 기본구조>를 비롯해 <오늘날의 토테미즘> 등은 아직 번역되지 못했고, <구조인류학>은 1950년대에 잠시 출판됐다가 절판된 상태다."라고 했는데, <토테미즘>은 주저라고 하기엔 소략한 책이며(이미 번역돼 있는 <신화의 의미>나 <인종과 역사> 같은 부류이다), <구조인류학>은 김진욱의 번역으로 1987년에 종로서적에 출간된바 있는 책이다(즉,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구할 수 있던 책이다). 웬만한 대학도서관에는 다 비치돼 있는 책에 대한 서지정보를 모르고 있다는 건 기자로서 직무유기다. 레비스트로스의 이론적인 '주저'라 할 <구조인류학>은 2권 분량인데(나는 영역본을 갖고 있다), 김진욱본은 제1권만을 옮기고 있다. 해서 레비스트로스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일은 <구조인류학>이 완간되는 것이다. <신화학>은 매년 1권씩 나온다고 하는데, 그 사이에 <구조인류학> 2권도 껴서 나왔으면 싶다.

정리하면, 레비-스트로스의 주저는 <친족의 기본구조>를 제외하면, <야생의 사고>, <구조인류학>, <신화학> 등이다. 한국어 레비-스트로스는 40% 정도를 카바하고 있는 셈. 이런 상황에 대한 기자의 결론? "그러니까 90년대 이후 한국 지성계를 휩쓸고 있는 구조주의 이론가 가운데, 유독 레비-스토르스만은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 미셸 푸코 등과 전혀 다른 '대접'을 받았던 셈이다." 출간된 주저들을 견주어보건대 그렇다는 얘기인가? 그런데 라캉의 책은 무엇이 나와있는지? 좀 허술한 번역의 <욕망이론>(문예출판사) 말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무슨 '대접'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한국 지성계를 휩쓸[다]' 같은 문구도 교양없는 표현이다. 게다가 '구조주의'에 대한 무슨 붐이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무얼 산출해냈는가? 알튀세르는 저서도 얼마 안되지만, 푸코의 책들이 좀 출간된 걸 가지고 '휩쓸다'라고 하는 것인지? 또, 휩쓸어서 무얼 하는 것인지?

어쨌거나 이번 <신화학>이 "명성은 있는데 그 실체는 분명치 않았던 레비-스트로스를 제대로 이해할 조건"을 마련해주었다는 데는 나도 동의한다(나로선 '이해할 조건'이 아니라 '음미할 조건'이라고 고쳐말하고싶지만). 그리고 "<신화학1>은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한번쯤 도전해볼 만한 학술서"라는 데에도 동의한다(이면에서 얘기하는 건 책을 기자도 안 읽었다는 뜻이겠지만). 한데, 그 여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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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싶다 2005-08-06 17:00   좋아요 0 | URL
<신화론>이 나오다니 레비-스트로스 마니아로서 정말 기대됩니다. <야생의 사고>와 <슬픈 열대>만큼이나 감동을 줄 것을 큰, 희망을 가지고 기대해봅니다.

로쟈 2005-08-06 17:03   좋아요 0 | URL
'마니아'이시라면 벌써 읽으셨어야 하는 책이 아닌가요?!^^ 아무리 그래도 우리말로 읽을 수 있다는 게 반가운 일이지요...

알고싶다 2005-08-06 17:08   좋아요 0 | URL
아니 로쟈님, 제 외국어실력을 너무 믿으시는군요. ^^;

로쟈 2005-08-06 17:16   좋아요 0 | URL
외국어도 그렇지만, 사실 '턱없는' 분량이지요.^^ 1년을 꼬박 읽어도 모자를...

로즈마리 2005-08-07 06:58   좋아요 0 | URL
저도 <신화학>이라는 제목에 눈이 확 떠지네요..^^
칸트의 <판단력 비판> 해제 도 눈에 들어오구요...번역과 해제 쓰신 분이 제 선배거든요..ㅋㅋ

로쟈 2005-09-10 11:29   좋아요 0 | URL
"훨씬 이해하기 쉽고, 명확한 도덕경"을 내시거나 보시거든 꼭 알려주십시오.^^
 

*모잡지의 청탁을 받고 며칠 끙끙거리며 쓴 글이다. 각주를 모두 생략하고, 부분적으로 재편집해서 여기에 올려둔다(한 군데 비문을 바로잡았다). 

 

1. 지젝, 혹은 우리시대의 엘비스

“마돈나가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면서 끊임없이 지절대는 철학자이자 지식계의 스타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선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비단 그가 지난 2003년에 내한한바 있다는 전력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자신의 이름으로 50권 이상의 책을 출간한(국내에는 ‘지젝’이란 이름과 관련된 20권 가량 번역/소개돼 있다) 지젝은 특히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독일 관념론과 라캉 정신분석학의 접속을 주된 이론적 지반으로 하여 글을 쓰면서도 세계적인 명성과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물론 그러한 인기/명성의 원인은 단순한데, 그건 그가 칸트와 헤겔을, 그리고 라캉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대중’이 말이다.

특히나 그의 이름은 일련의 ‘영화책’들 덕분에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됐는데,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삐딱하게 보기>,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같은 책들에서 지젝은 라캉의 난해한 이론과 고급스런 정신분석 담론을 이해하는 데 히치콕이나 할리우드 안팎의 대중영화들이 얼마나 유용하며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21세기형 철학자’를 ‘MTV 철학자’라고도 부른다지만, 그런 포스트모던한 별명보다는 (다소 구닥다리 같더라도) 모던한 별명이 그에겐 더 어울려 보인다. ‘철학계의 록 스타’, ‘문화이론의 엘비스’ 같은.

모호한/난해한 아카데미 담론과 대중문화를 접속시켜줌으로써 지젝은 무슨 일을 하는가? 바로 아카데미 바깥의 대중들이 자신의 생활주변과 자신이 향유하는 문화 속에서 철학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매개자 역할을 하는 것. 그리고, 사실 이러한 역할은 백인의 컨트리뮤직과 흑인의 리듬앤블루스를 결합시킨 록음악의 정신에 얼추 부합하지 않는가? 지젝과 ‘지젝 현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은 한 영화감독의 말대로, 지젝은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의 시대에 지성주의(intellectualism)란 게 얼마나 재미있고 활기차며 뻑적지근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는 ‘우리시대 엘비스’에 값한다(사실 그가 강연 등에서 보여주는 폭발적인 제스처는 역시나 폭발적인 엘비스의 무대매너를 연상시키는 바가 있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얼마나 열정적인 것인지!). 해서 말하건대, 지젝을 읽는 일은 엘비스의 <버닝 러브(Burning Love)>를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흥겨운 일이며 흥분되는 일이다(우리는 그들의 ‘불타는 사랑’에 후끈 달아오르는 ‘품행 불량한’ 헝크(hunk)이고 매스(mass)이다). 그 지젝, 혹은 우리시대의 엘비스와 함께 한국문학을 읽는다? 

2. 이데올로기의 하찮은 대상

지젝이 ‘철학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서구 지식사회에 등록하게 되는 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발표함으로써이다. 지젝은 마르크스/엥겔스의 ‘왜곡된 의식’ 혹은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론만으로는 소위 ‘탈이데올로기화’된 포스트모던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해명하는 데 불충분하다고 본다. 오늘날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며 발견되고 폭로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한껏 비웃어주는 ‘냉소적 주체’이기에. 그리고 바로 그러한 현실이 우리가 탈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환상을 부추긴다. 그것은 물론 ‘환상’이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행동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것은 ‘앎’이 아니라 ‘행함’이다(“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아주 잘 알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행하나이다”). 우리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이데올로그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적 실천 속에서 가령, 변기에서 물을 내리는 것과 같은 ‘하찮은’ 일에서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지젝은 독일과 프랑스, 영국에서의 세 가지 변기 사용법을 예로 든다.

전통적인 독일식 변기에는 물을 내릴 때 대변이 사라지는 구멍이 앞쪽에 있어서 우리가 대변 냄새를 맡고 무슨 병이 있는지 없는지 점검해볼 수 있도록 돼 있다. 전형적인 프랑스 변기에서는 그와는 반대로 구멍이 뒤쪽에 있다. 즉, 물을 내리자마자 대변이 눈앞에서 사라지도록 돼 있는 것이다. 끝으로 영국의 변기는 이러한 두 가지 방식의 통합형, 혹은 중재형이다. 즉, 물통에 물이 가득 차 있어서 대변이 물속에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점검까지 가능한 것은 아니다.

헤겔은 영·불·독이란 지리적 3항에서 세 가지 다른 실존적 태도를 최초로 읽어내고자 했었다. 그에 따르면 독일은 ‘반성적 철저함’(=보수주의)과, 프랑스는 ‘혁명적 조급성’(=혁명적 급진주의), 그리고 영국은 ‘온건한 공리적 실용주의’(=온건한 자유주의)와 짝지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세 가지 변기 사용방식과도 상응한다. 해서, 우리가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살고 있다고 탁상에서 떠들어대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잠시 화장실에 들르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곧장 이데올로기에 ‘몰입하게’ 된다.   

이러한 ‘예기치 않은’ 사례들과의 조우는 지젝을 읽으면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바이지만, 사실 우리의 ‘엘비스’는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가 제안하는바, 여성 음모(陰毛)의 세 가지 스타일에서 우리는 동일한 기호학적 3각형을 만나지 않을까? 무성하게 자란 헝클어진 음모는 자연적 자발성을 존중하는 히피(hippie)족 여성의 태도를 가리킨다. 반면에 여피(yuppie)족 여성은 잘 가꾸어진 ‘프렌치 가든’형을 선호한다(비키니 라인을 따라 양 다리쪽의 음모를 제거함으로써 중앙에 면도선을 따라 좁은 밴드 형태만 남겨놓는다). 그리고 펑크(punk)족 여성의 경우에는 음부 전체를 면도해 버리고 (대개는 음핵에) 고리를 달아서 장식한다.

더불어, 이러한 3각형의 구도는 레비-스트로스의 기호학적 3각형 버전으로 말하자면, ‘날것’으로서의 무성한 음모, 잘 손질된 ‘구운’ 음모, 완전히 면도한 ‘끓인’ 음모에 대응하지 않을까? 이러한 사례들까지 동원하여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가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갖는 가장 은밀한 태도조차도 이데올로기를 ‘발언’하고 ‘실천’한다는 것. 그러니, 누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말하는가? 

3. 그토록 하찮은 문학

지젝이 제안한 바는 아니지만, 문학에 대한 ‘공공연한’ 태도에 있어서도 우리는 세 가지 태도를 대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민족문학’이라는 엄숙주의적 태도를 별개로 한다면, 우리는 히피적 태도, 여피적 태도, 펑크적 태도를 구분해낼 수 있을 것이며 이들을 각각 자유주의, 유미주의, 반항주의에 대응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레비-스트로스의 분류를 가져오자면, 이들의 문학은 각각 ‘날 문학’ ‘구운 문학’ ‘끓인 문학’이 될 것이다. 

‘민족문학’이 민족적/사회적 대의(大義)와 문학을 분리시켜서 사고하지 않는다면, ‘날 문학’으로서의 히피문학은 문학과 삶을 연속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구운 문학’으로서의 여피문학은 ‘잘 구운 항아리’, 한갓 ‘예술작품’으로서의 문학을 지향한다. 그것의 다른 이름이 ‘문학주의’이다. ‘끓인 문학’으로서의 펑크문학은 문학행위를 하위문화적/비주류적 (저항)정신의 등가물로서 사고한다. 이 세(네) 가지 태도/주의가 어쩌면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한국문학을 규정지으며 분할해온 구도는 아닐까?(물론 발생론적인 순서에 있어서 가장 먼저 오게 되는 것은 히피문학일 것이다. 여피문학과 펑크문학은 그 뒤를 따른다.) 

 

지난 세기 후반에 한국문학은 흔히 명시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차별적 태도를 준거로 하여 1980년대 문학과 1990년대 문학으로 대별됐었다. 90년대 문학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 과잉시대’로 규정된 전(前)시대, 즉 80년대와의 대척점에서 자신의 세대론적 의의와 문학사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념이란 지주를, 혹은 ‘공룡’을 상실하거나 배제한 문학은 스스로를 ‘하찮은’ 것으로 간주하며 문학의 자리를 ‘그늘’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이 ‘풍금이 있던 자리’, 이념의 공백에서 시작된 새로운 세대, 젊은 작가들의 ‘사소한’ 문학은 80년대 집단적 주체를 대신하는 ‘개인 주체의 귀환’이면서 동시에 ‘비루한 것의 카니발’(황종연)이었다.

 

 

 

 

  

 

이 세대의 작가들은 환멸과 냉소를 삶과 세계에 대한 주된 태도로 갖는 탈이념적 주인공들을 문학사에 등록시켰고, 이 나르시시스트 주인공들은 자신의 사회적 소외를 감내하면서 거창한 이념으로부터,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도덕적 명령으로부터 도주하거나 달팽이처럼 자신의 내면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면서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의 ‘가난한’ 자유를 음미하고 향유했다. 이 히피주의 문학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정서’였으며, 그들의 물질적 가난조차도 그 정서의 빌미였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IMF시대를 통과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우리는 60년대 이래의 다소 유구한 전통을 지닌 자유주의 문학, 히피문학 대신에 보다 대극화된 문학과 대면하게 되는데, 그것이 여피문학과 펑크문학이다(김영하와 백민석은 두 전형이다). 물론 이들의 간극을 낳는 것은 경제적 심급이며, 이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건 ‘가난’이 아니라 ‘빈곤’이다. 즉, 여피문학과 펑크문학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혹은 각기 다른 급으로 문학이란 ‘화장실’을 쓰는 것이다. 이 두 갈래의 문학이 결코 지양되지 않는 사회적 적대와 결코 봉합되지 않는 그 적대의 간극을 문학적으로 반영/반복하고 있다면, 우리는 ‘문학은 없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지젝도 자주 반복하고 있는, (사회적 적대관계에 의해서 빗금쳐져 있기 때문에) ‘사회는 없다’는 명제를 비틀어서 말이다. “우리는 문학으로 하나다”라는 식의 대문자 문학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어쩌면 문학의 가장 순진한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4. 초월적 상상력과 문학의 존재론  

지난 계절에 나온 젊은 비평가들의 몇몇 비평문들은 지젝의 철학/정신분석학을 적극적/암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90년대와 21세기 동시대 작가들의 문학행위에 대한 ‘인지적 지도그리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눈길을 끈다. 그 중에서도 김영찬의 <90년대 문학의 종언, 그리고 그 후>는 ‘90년대 문학’ 이후 한국문학의 지형과 향방에 대한 조감을 제공해주고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그에 따르면, 이 ‘종언’에 관한 이야기는 은희경의 신작소설 <비밀과 거짓말>(2005)로부터 시작되는데, 그것은 이 작품이 그 문학적 성과와는 무관하게 90년대 문학에 대한 ‘형식적 종결’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다분히 우연한 것으로 보였던 ‘90년대 작가’들의 변화에 사후적으로 개입하여 그것을 일정한 집합적 맥락으로 계열화하고 ‘1990년대 문학의 죽음’이라는 분명히 의식화된 지표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밀과 거짓말>에 의해서 ‘90년대 문학의 죽음’은 상상적인 것에서 상징적인 것으로 이행한다.

그러한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허무의식’이다. 작가 은희경의 데뷔작인 <새의 선물>(1996)을 지배하는 주제의식은 ‘환멸’이며, 이 환멸은 자기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애착을 환멸의 예외적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만 작동한다. 부정적인 세계 바깥으로부터 침해당하지 않는 ‘나’를 온전하게 정립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그것은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밀과 거짓말>의 허무의식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이때 허무의 근원에는 세계와의 냉소적인 지적 거리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주체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이 가로놓여 있다.” 이러한 무력함/무능력이 소환하게 되는 것이 ‘죽은 아버지’이다. 그리고 ‘나’는 이 거대한 타자의 질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비극적 자각을 갖게 된다. 

비록 그러한 자각이 ‘주체의 성숙’의 표지이면서 동시에 ‘주체의 위축’을 드러내는 증상일 수도 있지만, 주목할 것은 그러한 소환행위에 의해서 부정되는 것이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상상적 절대화”라는 점이다. 즉, 90년대 문학의 근거가 부정되는 것이다. 90년대 문학의 개인 주체는 크게 보아 ‘상상적 주체’이며, 김영찬은 백민석, 김영하, 조경란, 배수아 등 ‘90년대 작가’들이 최근 보여주는 변화로 이 “상상적 주체의 미묘한 형질변화”를 꼽는다. 그리고 <비밀과 거짓말>은 “그동안 다른 작가들의 소설에서 단편적․분산적 징조로만 드러났을 뿐 완결되지 못한 변화의 가닥들을 하나둘 수렴해 그들을 대표하는 의미심장한 선언으로 완성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90년대 작가들’의 행적과 미래에 대한 ‘반성적 알레고리’가 된다고 평한다.

이러한 구도는 아직 불확정적으로 구획돼 있는 90년대 문학과 2000년대 문학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아주 흥미로우면서 유익하다. 하지만, 문학사적 흐름, 혹은 문맥을 <비밀과 거짓말>이란 작품을 기준으로 하여 소급해가고 있기 때문에, 즉 통시적으로 접근해가고 있기 때문에 공시적인 차원에서 젊은 작가들의 ‘상상적 주체’가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고 또 변모해 가는지에 대한 조명은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더불어, 문학 존재론의 근간이 되는 상상력을 나르시시즘적인 상상계와 거의 동일시하게 되면 문학이 초월적 상상력과 갖는 원초적인 관계양상을 제대로 규명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지젝을 참조할 수 있는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사실 칸트 철학에서 현상계와 예지계, 우리의 감성(=가슴)과 지성(=머리)을 매개해주는 것으로 도입되는 ‘초월적 상상력’의 곤궁 혹은 양면성에 대한 이해는 지젝의 철학적 주저들에서 자주 반복되며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현상계와 예지계 어디에도 환원되지 않는 상상력은 수용적인 동시에 정립적이며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다. 그것은 흔히 감각에 주어지는 다양을 한데 모으는 종합의 능력을 지칭하는데, 이러한 ‘종합활동’의 이면에 놓여 있는 것이 상상력의 ‘부정적’ 특징으로서의 ‘분해활동’이다. 즉, 상상력은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는 다양을 그대로 수용하여 종합하기 이전에 먼저 분해하는 것이다. 그러한 분해활동이 산출해내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세계의 밤’(헤겔)이다. 

"인간은 이런 밤, 즉 모든 것을 단순한 상태로 포함하고 있는 이 텅 빈 무이다. 무수히 많은 표상들, 이미지들이 풍부하게 있지만, 이들 중 어느 것도 곧장 인간에게 속해 있지 않다. 이런 밤, 여기 실존하는 자연의 내부, 순수 자기(self)는 환영적 표상들 속에서 주변이 온통 밤이며, 그때 이쪽에선 피 흘리는 머리가, 저쪽에선 또 다른 흰 유령이 갑자기 튀어나왔다가 또 그렇게 사라진다. 무시무시해지는 한밤이 깊어가도록 인간의 눈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 밤을 목격한다."

헤겔이 묘사하는 바대로 부정적·파열적·분해적 상상력이 하는 일이란 연속적 현실을 ‘부분대상들’로 해체하는 것이다. 즉 “상상한다는 것은 몸체 없는 부분 대상을, 모양 없는 색깔을, 몸체 없는 모양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이 산출하는 ‘세계의 밤’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지점에서의 초월적 상상력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러한 부정적 매개자로서의 상상력의 존재론적 지위가 ‘데카르트적 주체’의 그것과 상동적이라는 사실이다. 지젝에 따르면, 자연과 문화 상태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 곧 ‘사라지는 매개자’가 바로 근대의 ‘데카르트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말하는 존재’로서 자신을 정립할 때 이미 자연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직 문화도 아닌 상태를 창조해야 하는바 데카르트적 회의에서 이것은 전면적인 ‘자기로의 철회(withdrawal-into-self)’라는 제스처로서 나타난다. 지젝에 의하면, 이러한 제스처는 광기의 일종이다. 이 광기는 앞에서 헤겔이 ‘세계의 밤’이라고 부른 것에 대응하는데, 상징적 우주 혹은 문화적 세계가 형성되는 것은 오직 이러한 ‘세계의 밤’, 곧 ‘분해적 상상력’에 의해서 현실이 소거될 때, 그리하여 세계가 절대적 부정성으로서 경험될 때뿐이다. 데카르트의 ‘자기로의 철회’는 이러한 극단적 상실의 경험이다. 그리고 이 상실의 자리, 텅 빈 공간이 바로 주체의 자리이다. 

주체와 상상력의 이러한 차원에 우리가 주목할 때, 우리의 90년대 작가들이 이념의 상실, 이념의 공백 상태에서 직면하게 된 것은 오히려 상상력으로서의 문학 본연의 ‘부정성’이 아니었을까? 종합적 상상력이 아닌 분해적 상상력 말이다. 그리고, 문학이란 이러한 분해적·종합적 상상력에 근거하며 특별히 문학적 주체란 그러한 상상력이 활성화된 주체인바, 시인/작가의 문학적 태도란 이 상상력, 특히 ‘세계의 밤’에 대한 태도로서 규정될 수 있지 않을까? 이 두려운 밤(=상상력), 혹은 견디기 어려운 텅 빈 ‘주체’를 어떻게 채워넣는가, 어떻게 ‘주체화’하는가 하는 차이로써 말이다(‘주체화’란 우리들 자신을 언어 등과 같은 상징적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이다). 



5. 동물원과 미술관 사이 

그렇다면, 문학적 상상력이란 동물원(=자연)과 미술관(=문화)을 매개해주는 것인바, 지난 90년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유난히 동물 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사실은 자연스럽다. 대타자로서의 이념이라는 가로막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상상력의 밑바닥을 헤집으며 상상력의 부정성을 길어 올린다는 의미를 함축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신경숙의 초기 대표작 <풍경이 있던 자리>(1993)의 서두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동물의 행동>이란 책에서 인용된 동물원 풍경이었다. 코끼리 거북을 사랑했던 어느 동물원의 수컷 공작새 얘기 말이다. 이후에 ‘동물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대표적인 90년대 버전으로 우리가 꼽을 수 있는 것은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2000)과 배수아의 <동물원 킨트>(2003)일 것이다. 우리시대의 대표적인 두 ‘펑크작가’에게서 “상상적 주체의 미묘한 형질변화”는 어떻게 비교될 수 있을까? 

 

 

 

 

 

 

먼저, 백민석에 대한 젊은 비평가의 지적은 음미해볼 만하다. 즉 그의 소설들은 포스트모던 시대 상징계의 약화로 인한 오이디푸스의 위기와 이에 대해 ‘이상한 가역반응’으로 대처하는 ‘괴물’(‘포스트모던 리바이어던’)들을 주로 테마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엽기전>의 세계는 편집증이 무대화된 악몽의 체계이며, 그곳에서 사는 인간은 자연상태로 환원된 인간-동물이다.” 물론 체계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문학적 공격은 현실적인 한계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체계는 그에 대한 위반을 허용하는 방식을 통해 가장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백민석의 전복적 서사가 비록 한국문학/문화의 지형도를 바꾸어놓는 데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은 이제 기성 질서와 체계를 위협하는 반란과 탈주가 아니라 오히려 기성 질서 자체가 허락하고 용인한 한도 내에서의 반란과 탈주라는 느낌이 더 짙다.” 즉, 펑크는 분명 기성의 질서나 체계에 시위하고 반항하지만, 그러한 시위/반항 자체가 오히려 체계의 정상성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순기능’을 담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돌파할 수는 없는 것일까? 혹은 그 한계는 ‘엽기전’ 전략이라는 내용층위의 전복 전략이 갖는 함정과 관련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의혹을 갖게 되는 것은 ‘에세이스트’ 배수아의 또다른 펑크 전략이 대체로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동물원 킨트>에서 전면화되고 있는 배수아의 전략은 ‘야수의 탈’을 뒤집어쓰고 아이 유괴, 학대, 살인 등등을 피범벅으로 감행해야 하는 백민석의 전략보다 상대적으로 아주 단순한데, 그것은 순수하게 형식적 차원에서 문학을 일종의 ‘이방인 놀이’로 만드는 것이다. 즉, 자신의 모국어를 외국어로 말하는 것(“가장 좋은 방법은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재를 보고 그런 식으로 말하고, 사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방법이긴 하지만, ‘자기로의 철회’에 있어서 백민석의 경우보다 훨씬 더 철저하면서도 급진적인 효과를 낳는다. ‘동물원’이라는 이러한 철회의 과정을 경유하여 배수아가 도달하고 있는 지점이 ‘에세이스트’이고 <에세이스트의 책상>(2004)이다(‘에세이스트’야말로 배수아 식의 ‘데카르트적 주체’가 아닐까?). 이 작품의 진정한 의의는 ‘작가의 말’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가능하다면 다른 것을 쓰되, 사람들이 그것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는 그런 형태를 원했다.” 문제는 순수하게 ‘형태’적인 것이며, 에세이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무정형의 생성적 형식을 통해서 배수아는 문학주의라는 여피적 태도를 불편하게 만든다. 

‘엽기 소설’과 ‘에세이 소설’을 쓰는 두 펑크작가의 이러한 차이가 예시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90년대 우리문학이 비로소 바닥까지 발을 딛게 된 초월적 상상력에 대한 ‘다시 보기’의 필요성이다. ‘90년대 문학’ 혹은 ‘2000년대 문학’으로 ‘종합’될 수 있는 동질적인 문학장 속에는, 다른 한편으로 하찮은, 하지만 결코 제거할 수 없는 이질성들이 유령처럼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하찮은 차이들’에까지 주목하기 위해선 아마도 우리문학에 대한 재미있고 활기차며 뻑적지근한 사랑, ‘불타는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매개해줄 수는 있는 사랑 말이다. 지젝과 엘비스의 이런 노래처럼. “당신이 나에게 불을 놓았고, 내 머리는 불타고 있어요!”(You gonna set me on fire. My brain is fla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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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랑그인가 언어인가?"는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기호학자 크리스티앙 메츠가 던진 질문이면서, 자크 오몽 등이 지은 영화학 입문서 <영화미학>의 4장(영화와 언어) 2절 제목이기도 하다. 1983년 초판이 나온 이 책은 프랑스에서 나온 대표적인 입문서로 보이는데, 이미 지난 94년에 강한섭 교수에 의해 <영화학, 어떻게 할 것인가>(열린책들)란 제목으로 국역본이 나오기도 했다(현재는 절판됐다). 그때 후배들과 영화학 세미나를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우리말로 읽기에 난감했던 기억은 없다. 'code'를 '기호'라고 옮긴 것이 다소 낯설었을 뿐. 이 책의 새로운 국역본이 <영화미학>(동문선, 2003)이며 역자 후기에 따르면, 1994년에 나온 개정증보판을 옮긴 것이다(들뢰즈에 관한 내용이 추가된 걸로 돼 있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들뢰즈의 <시네마1,2>는 <영화미학>의 초판 이후에 출간됐다).

 

 

 

 

자크 오몽의 책으로는 자신을 포함하여 영화학자 4인의 공저로 돼 있는 이 '교과서' 말고도 또다른 공저 <영화분석의 패러다임>(현대미학사, 1999)과 단독저서인 <영화감독들의 영화이론>(동문선, 2004)이 번역/소개돼 있다.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오몽은 한국 여성과 결혼했으며 여럿의 한국인 제자들을 가르쳤고, 그런 인연들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프랑스에서 대표적인 한국영화의 옹호자이다(특히 홍상수를 지지한다고). 이른바 '한국통'인 것이다. 해서 그의 책들이 더 많이 소개되어 나쁠 건 없어 보인다(개인적으론 그의 '교과서적인' 책들에 큰 감흥을 느끼진 않지만, 영화학도들이 적극 추천하는 <몽타주 에이젠슈테인>의 영역본까지 구해두었다) .

이런 '좋은 얘기'들로 화기애애하게 책 이야기를 이어나갔으면 좋겠지만, 굳이 이런 자리를 빌어 오몽 얘기를 꺼내는 것은 <영화미학>의 번역에 다소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부터는 정색을 하기로 하자. 오래전 책이라 책꽂이에서도 찾을 수 없지만, <영화미학>보다는 <영화학,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읽는 게 더 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판단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영화, 랑그인가 언어인가?"란 절이며 여기서는 213-4쪽 두 페이지를 따라가본다. 내가 읽은 것은 국역본 외에 2004년(5판)에 나온 영역본 (텍사스대학출판부)이다. 이 영역본은 2002년에 처음 나왔지만, 1983년의 초판본을 옮긴 것이고(해서 본문에서는 들뢰즈에 대한 언급이 딱 한번 등장한다), 참고문헌만이 업데이트 돼 있다. 덧붙여 말해두자면, '영화와 언어'를 다룬 4장은 공저자 중 미셸 마리가 집필했다.

영화학사에 관련한 책을 한번이라도 들춰본 독자라면 '영화와 언어'라는 문제가 중요한 쟁점이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그것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다섯 가지 쟁점 가운데 하나이다). 여러 영화학자들이 '영화언어'에 대해 언급하고 자기주장을 펼쳤지만, 이 문제에 관한한 권위자는 단연 메츠이다. 일단 그 자신이 언어학자였던 메츠는 영화학에서 다소 무분별하게, 혹은 언어학적 엄밀성을 결여한 채 사용되고 있던 영화-언어의 문제에 메스를 가하면서 이 문제를 새롭게 정식화한다. "영화, 랑그인가 언어인가?"라는 물음은 그러한 메츠의 문제의식을 집약해주는 물음이다.

문제는 불어에서의 '랑그'와 '언어(랑가주)'의 구별을 영어나 한국어는 안 갖고 있다는 것. 해서, 불어권에서 유의미하게 제기되고 정리된 문제가 영어나 한국어에서는 다소 현학적인 논쟁으로 비쳐질 수 있다. 불어의 '랑그'나 '랑가주'나 일반적으론 '언어'라고 통칭되기 때문이다(마치 '개'나 '소'나, 처럼). 둘 사이의 구별을 영어에서는 '언어체계(language system)'와 '언어(language)'라는 말로 표시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한국어 대응어가 다소 어색한 조합이지만 '랑그'와 '언어'이다.

그런 사전지식을 배경으로 다음의 문장들을 읽어보자. "크리스티앙 메츠의 연구 방법의 출발점은 이런 명제에서 시작한다. 영화는 어법으로 가정되지만 곧 문법적으로는 언어로서 연구된다." 무슨 뜻인가? 문제는 제목에서 던진 '랑그'와 '언어'의 대립이 이 두 페이지에서는 실종되고 대신에 '언어'와 '어법'으로 대치된 데 있다(이건 좀 이상한 일인데, 214쪽부터는 '랑그'란 말이 다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설마 이 두 페이지만 어떤 미숙한 조력자가 번역을 따로 했던 것일까?)

어려운 내용이 아니므로 불어본과 별 차이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영어본에서 이 대목을 옮겨오면 이렇다: "By contrast, the point of departure for Christian Metz's work is based on a very different assumption: the cinema is postulated as a language, yet it is immediately studied as a verbal language system."(142쪽) 우리말로 옮기면, "크리스티앙 메츠의 작업은 이와는 좀 다른 가정에서 출발한다. 영화가 언어(=랑가주)로 간주되면서도 실제로는 랑그로서 연구되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언어학에 좀 '약한' 이들이 언어와 랑그의 차이를 무시한 채 '영화언어' 얘기를 늘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짐작에 국역본은 (랑그도 아닌) '랑가주'를 '어법'으로 옮기고, '랑그'를 '언어'로 옮겼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교통정리가 되는 건지?

이어지는 문장이 더더욱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겠다: "메츠는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이 되는 삼분법(언어와 말의 총체로서의 어법)에서 착상하여 영화 언어를 언어를 규정하는 특징들에 대립시키면서 영화언어의 규범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이 되는 삼분법이 '언어의 총체로서의 어법'이라는 내용을 어떤 독자가 이해할 수 있을지, 혹은 인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3분법이니까 우선 세 항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인바, 번역문에서 그 세 항은 '언어' '말' '어법'이다. 짐작에 그 세 항은 원문에서 '랑그'와 '파롤', 그리고 '랑가주'이며, 이것은 영어로는 'verbal language system'(=랑그), 'speech-act'(=파롤), 'language'(=언어)이다. 그런데, 어떻게 '어법'이란 것이 그보다 더 큰 '언어'와 '말'의 합, 그러니까 <어법=언어+말>이 될 수 있는가?

그런 의문을 따져보는 건 한가한 시간에 하고, 일단 진도를 나가자면 소쉬르가 제시한 3분법이란 <언어=랑그+파롤>을 말한다(이건 나의 '잡학'과는 정말로 무관한 지극히 기본적인 내용이다. 모든 언어학 개론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해서, 인용문장을 다시 옮기면, "언어를 랑그와 파롤의 총합으로 이해하는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적인 3분법에 의거하여, 메츠는 영화언어를 랑그의 특징들과 대조시킴으로써 영화언어의 지위를 자세히 해명하고 있다."

언어체계로서의 랑그란 말이 생소한 분이 있다면, '이중분절체계로서의 언어'라는 걸 떠올리시면 된다. '이중분절'이란 건 우리가 쓰는 자연어(한국어, 불어, 영어 등)에서 각 단어가 형태소로 분절되고, 또 그 형태소는 더 작은 단위의 음운으로 분절되는 식의 현상을 가리킨다. 이러한 분절의 가능조건은 '형태소'나 '음운' 같은 단위들의 존재이다(기호학의 가장 기본적인 작업은 그러한 단위들을 분리/추출하는 것이다). 영화의 쇼트나 프레임이 그러한 단위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이 '영화언어'의 지위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질문이다. 그리고 메츠의 입장은 영화언어가 그런 이중분절체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 즉 랑그가 아니라는 것이다(에코는 보다 강경하게 랑그로서의 영화언어를 주장한다).

뒤따르는 부연설명: "이런 대조적인 측면은 본질적으로 1964년 <코뮈니카시옹> 제4호에 처음으로 실렸고 <영화의미론> 제1권에 수록된 "영화, 언어인가 어법인가?"라는 논문에서 알 수 있다. 이 잡지에는 또한 그후 10년간 기호학 연구의 프로그램에 뛰어든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의 여러 가지 요소"라는 논문도 실려 있다." 즉, <코뮤니카시옹>이란 잡지의 제4호에 매우 중요한 논문 두 편이 실려 있는 것. 메츠의 책 <영화의미론>의 원제는 <영화의 의미작용에 관한 시론> 정도가 되며, 두 권짜리이다. 그 중 1권이 <영화언어(Film Language)>로 영역돼 있다. 바르트의 책은 흔히 <기호학 요강>으로 알려진 책이고, <영도의 에크리뛰르/ 기호학의 원리>(동인, 1994)란 책에 포함돼 있다(역시나 번역은 추천할 만하지 않다. 절판된 책이어서 구하기도 어렵지만). 그리고 "기호학 연구 프로그램에 뛰어든" 게 아니라 "기호학 연구 프로그램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기호학이 본격화되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기호학은 다른 어법들의 언어학적 착상의 분석방법의 일반화로 규정될 수 있다." 젠장, 오역은 차치하고라도 한국어가 왜 이 모양인가? 영어로는 "Semiology may be summarized as the application of the process of analysis originating in linguistics to other languages."이다. 이런 대목은 기호학의 기본 상식이기에 알아둘 필요가 있다. "기호학은 언어학의 분석절차를 다른 언어들에 적용하기로 정리될 수 있다." 이때 다른 '언어들'이란 '영화' '회화' '음악' '사진' 등등을 말한다. 그리고 물론 '언어학'은 우리가 쓰는 자연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지식을 뜻한다. 이게 모델이 되는 것이고, 그걸 다른 분야(언어)들에 적용해본다는 것.

그리고 이 시기(1964-1970) 연구의 주종은 내러티브 연구, 즉 서사학이었다. 브레몽, 주네트, 토도로프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브레몽의 단행본 저작은 번역된바 없으며, 토도로프의 경우엔 <구조시학>(문학과지성사, 1987)이나 <산문의 시학>(문예출판사, 1992; 예림기획, 2003) 이 대표적인 초기 연구서이다. 서사학 관련서들은 차고 넘치지만, 영화와 관련하여 네 권만 언급하자면, 앙드레 고드로 외 <영화서술학>(동문선, 2001), 서정남의 <영화서사학>(생각의나무, 2003), 그리고 채트먼의 책 두 권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민음사, 1999),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동국대출판부, 2001)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처음 관심을 갖는 분이라면, 서정남의 <영화서사학>이 안전할 듯하며, 서사학 전반에 대한 개관으로는 박진의 <서사학과 텍스트이론>(중앙M&B)을 참조하는 게 간편하겠다(신간인 이 책은 나도 아직 실물을 구경하지 못했다). 사실 나로선 현단계 서사학에 별 흥미를 못 느끼지만, 유리 로트만의 플롯이론이나 폴 리쾨르의 철학이 접맥되고 정신분석적 서사론이 더 보강된다면(피터 브룩스가 대표적이다) 서사학도 업그레이드 될 가능성은 있다.

 

 

 

 

하여간에 당시의 그런 분위기 때문에 메츠도 영화에서의 서술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이렇게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의미론>은 우선 영화 서술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1971년에 출간된 <언어와 영화>에서는 루이 옐름슬레우의 <언어이론의 전제 원리>(1943)의 개념들을 직접 사용하여 언어학적 착상의 방법론적 급진화가 강조되고 있다." 거명된 옐름슬레우의 책은 <랑가쥬 이론 서설>(2000)이란 제목으로 다름아닌 동문선에서 출간된 책이다. <영화미학>의 역자는 들춰보지도 않았다는 얘기(물론 그 번역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지만). 옐름슬레우 계보의 적통을 잇고 있는 구조주의 언어학자는 쥘리앙 그레마스이다. 메츠의 <영화언어>가 아직 번역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 못지 않게 기이한 것은 그레마스의 <구조의미론>이 아직 번역되지 않고 있는 것. 말도 안되는 번역서가 나오는 것보다는 그 편이 오히려 낫다는 생각은 들지만 인문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좀 허전한 일이다(참고로, <구조의미론>의 러시아어본은 작년에 나왔으며, 메츠의 경우 논문들은 번역돼 있지만 단행본은 출간되지 않았다).  

어쨌든 <언어와 영화>에서 메츠의 영화기호학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준다는 얘기였다. 그 다음은? "언어학적 유산이 <상상적 기호표기>(1977)에서 더욱더 결정적인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완성된 것은 속임수와 관객에 대한 연구로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대충 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번역은 '속임수'이다. 영역은 "It was only by Metz's gradual progression from working on film devices to working on the spectator that linguistic heritage was further complemented by the psychoanalytic illumination that gained more and more acceptance after his Imaginary Signifier(1974)." 다시 옮기면, "언어학적 유산이 정신분석적 조명(통찰)에 의해 더욱 보완되는 것은 메츠의 관심이 영화적 장치들에서 관객으로 점차 옮겨감으로써이다. 그러한 (영화에 대한) 정신분석적 조명은 그의 <상상적 기표>(1974) 이후에 더욱 광범위하게 수용된다."

이제 마지막 문단이다: "사실 기호학은 연구 분야마다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통일된 도표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학 분야에서는 어떤 동질성이 인정될 수 있지만 그 반면에 루이 마랭의 회화기호학과 장 자크 나티에즈의 음악기호학은 이후에 폭넓게 다시 연구된 최초의 기준이 되는 것만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기호학과 공통성이 있다." 뜻은 이렇다. 뒤에 '기호학'이란 이름만 갖다 붙이면, '회화기호학'이니 '음악기호학'이니 '영화기호학'이니 하는 게 되지만, 이들간의 공통성, 동질성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 그저 "최초의 기준이 되는 것"(?), 즉 이러한 연구들이 처음 참조하는 문헌들(가령 소쉬르의 <일반기호학 강의>나 바르트의 <기호학 요강> 같은)이나 공통될 따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두가 '기호학 패밀리'에는 속할 테지만, 얼굴이 제각각이고 성격도 제각각이며 하는 짓도 제각각이라는 얘기다. 

영화언어와 랑그에 관한 이야기는 이어서 계속된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 존중되는 것이다. 요즘처럼 인터넷 클릭만 몇 번 해도 대략 필요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 '비상식적인 번역문'들이 계속 양산된다는 건 미스테리한 일이다(이젠 입아픈 일이다). 얼마만큼의 계몽이 우리에겐 더 필요한 것일까?..

05. 07. 30.

P.S. 기호학 참고문헌들을 좀 나열하다가 지워버렸다. 사실 '너무 많은' 기호학 서적들을 나열하는 것 자체는 별의미가 없을 듯하다(그냥 '기호학'을 검색어로 집어넣으면 된다). 다만, 우리에게 좀 드물게 소개된 것이 음악기호학인데, 이에 대해서는 서우석 교수 등이 쓴 <음악의 연구>(문학과지성사, 2000)에 실린 논문들을 참조할 수 있다(또 건축기호학과 관련하여 <현대건축과 기호학의 대화>(시공문화사, 2000)란 책도 있는데, 기호학에 문외한인 건축학 교수들이 옮긴 관계로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다. 언어학/기호학에 대한 무지가 '부실한 번역'을 낳을지언정 '부실한 건축'을 낳는 건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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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8-01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자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로쟈 2005-08-0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니다 2005-08-01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이 마랭의 회화기호학은 "시각예술과 기호학"이라는 책에 실린 논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도 오래전이라 내용은 잘 기억 나지 않지만, 기호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던터라 이해를 잘 못했던 것 같습니다. 번역도 영 시원찮았던 것 같고...원서와 대조하면서 다시 한번 읽어볼 생각입니다. 올 여름에는 후배들과 함께 기호학/언어학 책들을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대학원/박사과정 애들이 왜 그렇게 바쁜지 사람을 못 찾았습니다. 핑계김에 아직 시작도 못했고, 여름은 거의 끝을 보이고 있군요....ㅎㅎㅎ, 이왕 말 나온김에 초보자를 위한 입문 필독서 몇권만 추천해주시죠^^

로쟈 2005-08-01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저도 그 책은 갖고 있는데, 읽은 기억이 없네요.^^ 문화기호학에 대한 강의를 이전에 몇 학기 한 적이 있습니다(아마 내년에 다시 하게 될지도 모르구요). 그래서 눈에 익힌 책들입니다. 저는 존 피스크의 <커뮤니케이션학이란 무엇인가>(커뮤니케이션북스)란 책을 주로 추천합니다(리뷰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성문영어' 같은 식으로 핵심만 정리해 놓아서 보기에 편하고, 다른 기호학 책들과는 달리 '이데올로기'에 관한 장이 붙어 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미첼의 <아이코놀로지>도 참조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은 <대중매체의 기호학>(나남)이 읽기 쉬웠다고도 하더군요. 국내 필자들에 의한 책들도 그간에 많이 나왔기 때문에 참조할 수도 있습니다. 근데, 기호학 책들은 좀 읽다보면 지루합니다. 형식논리적이어서 그런 듯한데(영화기호학의 경우도 그렇고), 한 마디로 하면 될 걸 공연히 길게 늘어놓는 듯해서요. 거쳐갈 필요는 있지만 오래 머물 자리는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주니다 2005-08-01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호학과 시각예술"이었네요.원제는 "Calligram"이구요. 문화기호학에 대한 강의를 다시 하신다면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안타깝군요.

로쟈 2005-08-02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강좌가 개설되었고, 마침 저에게 할당되었을 뿐이지 제가 특별히 할 얘기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에코와 로트만, 바르트를 좀 읽었다는 것밖에 내세울 게 없었는데, 정작 강의시간에 그런 얘기들을 하면 대개 졸더군요. 해서, 이론 약간만 하고 대개는 실습을...
 

전편에 이어지는 내용이며, 타르코프스키의 주로 <스토커>(<잠입자>)에 대한 분석이다. <노스텔지어>와 <희생>에 대한 내용도 포함돼 있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번역해두고 싶지만,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다. 생계와 무관한 일이기에...

The same fantasmatic staging concludes Tarkovsky's Nostalgia: in the midst of the Italian countryside encircled by the fragments of a cathedral in ruins, i.e. in the midst of the place in which the hero is adrift, cut from his roots, there stands an element totally out of place, the Russian dacha, the stuff of the hero's dreams; here, also, the shot begins with a close up of only the recumbent hero in front of his dacha, so that, for a moment, it may seem as if he has effectively returned home; the camera then slowly pulls back to divulge the properly fantasmatic setting of the dacha in the midst of the Italian countryside. Since this scene follows the hero's successful accomplishment of the sacrificial-compulsive gesture of carrying the burning candle across the pool (after which he collapses and drops dead - or so we are led to believe), one is tempted to take the last shot of Nostalgia not only as the hero's dream, but as an uncanny scene which, since it follows his decease, stands for his death: the moment of the impossible combination of Italian countryside in which the hero is adrift with the object of his longing is the moment of death. (This deadly impossible synthesis is announced in a previous dream sequence in which Eugenia appears in a solidaric embrace with the hero's Russian maternal wife-figure.) What we have here is a phenomenon, a scene, a dream experience, which can no longer be subjectivized, i.e. a kind of non-subjectivizable phenomenon, a dream which is no longer a dream of anyone, a dream which can emerge only after its subject ceases to be... This concluding fantasy is thus an artificial condensation of opposed, incompatible perspectives, somehow like the standard optician's test in which we see through one eye a cage, through the other eye a parrot, and, if our two eyes are well coordinated in their axes, when we open both eyes, we should see the parrot in the cage.(7)

Tarkovsky added not only this final scene, but also a new beginning: while the novel starts with Kelanvin's space travel to Solaris, the movie's first half hour takes place in the standard Tarkovskian Russian countryside, in which Kelvin takes a stroll, gets soaked by rain and immersed into humid earth... As we have already emphasized, in clear contrast to the film's fantasmatic resolution, the novel ends with the lone Kelvin contemplating the surface of Solaris, aware more than ever that he has encountered here an Otherness with which no contact is possible. The planet Solaris has thus to be conceived in strictly Kantian terms, as the impossible apparition of the Thought (the Thinking Substance) as a Thing-in-itself, a noumenal object. Crucial for the Solaris-Thing is thus the coincidence of utter Otherness with excessive, absolute proximity: the Solaris-Thing is even more "ourselves", our own inaccessible kernel, than the Unconscious, since it is an Otherness which directly "is" ourselves, staging the "objectively-subjective" fantasmatic core of our being. Communication with the Solaris-Thing thus fails not because Solaris is too alien, the harbinger of an Intellect infinitely surpassing our limited abilities, playing some perverse games with us whose rationale remains forever outside our grasp, but because it brings us too close to what, in ourselves, must remain at a distance if we are to sustain the consistency of our symbolic universe - in its very Otherness. Solaris generates spectral phenomena that obey our innermost idiosyncratic whims, i.e. if there is a stage-master who pulls the strings of what happens on the surface of Solaris, it is ourselves, "the Thing that thinks" in our heart. The fundamental lesson here is the opposition, antagonism even, between the big Other (the symbolic Order) and the Other qua Thing. The big Other is "barred", it is the virtual order of symbolic rules that provides the frame for communication, while in the Solaris-Thing, the big Other is no longer "barred", purely virtual; in it, the Symbolic collapses into the Real, language comes to exist as a Real Thing.

Tarkovsky's other science-fiction masterpiece, Stalker, provides the counterpoint to this all-too-present Thing: the void of a forbidden Zone. An anonymous bleak country, an area known as the Zone was visited 20 years before by some mysterious foreign entity (meteorite, aliens...) which left behind debris. People are supposed to disappear in this deadly Zone, which is isolated and guarded by army personnel. Stalkers are adventurous individuals who, for a proper payment, lead people to the Zone and to the mysterious Room at the heart of the Zone where your deepest wishes are allegedly granted. The film tells the story of one such stalker, an ordinary man with a wife and a crippled daughter with the magic capacity of moving objects, who takes to the Zone two intellectuals, a Writer and a Scientist. When they finally reach the Room, they fail to pronounce their wishes because of their lack of faith, while Stalker himself seems to receive an answer to his wish that his daughter would get better.

As in the case of Solaris, Tarkovsky inverses the point of a novel: in the Strugatsky brothers' novel The Roadside Picnic, on which the film is based, the Zones - there are six of them - are the debris of a "roadside picnic", i.e. of a short stay on our planet by some alien visitors who quickly left it, finding us uninteresting; Stalkers themselves are also presented in a more adventurous way, not as dedicated individuals on a tormenting spiritual search, but as deft scavengers organizing robbing expeditions, somehow like the proverbial Arabs organizing raiding expeditions into the Pyramids (another Zone, for wealthy Westerners; are Pyramids not in effect, according to popular science literature, traces of an alien wisdom?). The Zone is thus not a purely mental fantasmatic space in which one encounters (or onto which one projects) the truth about oneself, but (like Solaris in Lem's novel) the material presence, the Real of an absolute Otherness incompatible with the rules and laws of our universe. (Because of this, at the novel's end, the hero himself, when confronted with the "Golden Sphere" - as the film's Room in which desires are realized is called in the novel -, does undergo a kind of spiritual conversion, but this experience is much closer to what Lacan called "subjective destitution", a sudden awareness of the utter meaningless of our social links, the dissolution of our attachment to reality itself - all of a sudden, other people are derealized, reality itself is experienced as a confused whirlpool of shapes and sounds, so that we are no longer able to formulate our desire...). In Stalker as well as in Solaris, Tarkovsky's "idealist mystification" is that he shrinks from confronting this radical Otherness of the meaningless Thing, reducing/retranslating the encounter with the Thing to the "inner journey" towards one's Truth. It is to this incompatibility between our own and the Alien universe that the novel's title refers: the strange objects found in the Zone which fascinate humans are in all probability simply the debris, the garbage, left behind after aliens have briefly stayed on our planet, comparable to the rubbish a group of humans leaves behind after a picnic in a forest near a main road... So the typical Tarkovskian landscape (of decaying human debris half reclaimed by nature) is in the novel precisely what characterizes the Zone itself from the (impossible) standpoint of the visiting aliens: what is to us a Miracle, an encounter with a wondrous universe beyond our grasp, is just everyday debris to the Aliens... Is it then, perhaps, possible to draw the Brechtian conclusion that the typical Tarkovskian landscape (the human environment in decay reclaimed by nature) involves a view of our universe from an imagined Alien standpoint? The picnic is thus here at the opposite extreme to that at the Hanging Rock: it is not us who encroach upon the Zone while on a Sunday picnic, it is the Zone itself which results from the Alien's picnic...

For a citizen of the defunct Soviet Union, the notion of a forbidden Zone gives rise to (at least) five associations: Zone is (1) Gulag, i.e. a separated prison territory; (2) a territory poisoned or otherwise rendered uninhabitable by some technological (biochemical, nuclear...) catastrophe, like Chernobyl; (3) the secluded domain in which the nomenklatura lives; (4) foreign territory to which access is prohibited (like the enclosed West Berlin in the midst of the GDR); (5) a territory where a meteorite struck (like Tunguska in Siberia). The point, of course, is that the question "So which is the true meaning of the Zone?" is false and misleading: the very indeterminacy of what lies beyond the Limit is primary, and different positive contents fill in this preceding gap.

Stalker perfectly exemplifies this paradoxical logic of the Limit which separates our everyday reality from the fantasmatic space. In Stalker, this fantasmatic space is the mysterious "zone", the forbidden territory in which the impossible occurs, in which secret desires are realized, in which one can find technological gadgets not yet invented in our everyday reality, etc. Only criminals and adventurers are ready to take the risk and enter this domain of fantasmatic Otherness. What one should insist on in a materialist reading of Tarkovsky is the constitutive role of the Limit itself: this mysterious Zone is effectively the same as our common reality; what confers on it the aura of mystery is the Limit itself, i.e. the fact that the Zone is designated as inaccessible, as prohibited. (No wonder that, when the heroes finally enter the mysterious Room, they become aware that there is nothing special or outstanding in it - the Stalker implores them not to impart this news to the people outside the Zone, so that they do not lose their gratifying illusions...) In short, the obscurantist mystification consists here in the act of inverting the true order of causality: the Zone is not prohibited because it has certain properties which are "too strong" for our everyday sense of reality, it displays these properties because it is posited as prohibited. What comes first is the formal gesture of excluding a part of the real from our everyday reality and of proclaiming it the prohibited Zone. Or, to quote Tarkovsky himself: "I am often asked what does this Zone stand for. There is only one possible answer: the Zone doesn't exist. Stalker himself invented his Zone. He created it, so that he would be able to bring there some very unhappy persons and impose on them the idea of hope. The room of desires is equally Stalker's creation, yet another provocation in the face of the material world. This provocation, formed in Stalker's mind, corresponds to an act of faith".(8) Hegel emphasized that, in the suprasensible realm beyond the veil of appearances, there is nothing, just what the subject itself puts there when he takes a look at it...

In what, then, does the opposition between the Zone (in Stalker) and the planet Solaris consist? In Lacanian terms, of course, their opposition is easy to specify: it is the opposition between the two excesses, the excess of Stuff over symbolic network (the Thing for which there is no place in this network, which eludes its grasp), and the excess of an (empty) Place over stuff, over the elements which fill it in (the Zone is a pure structural void constituted/defined by a symbolic Barrier: beyond this barrier, in the Zone, there is nothing and/or exactly the same things as outside the Zone). This opposition stands for the opposition between drive and desire: Solaris is the Thing, the blind libido embodied, while the Zone is the void which sustains desire. This opposition also accounts for the different way the Zone and Solaris relate to the subject's libidinal economy: in the midst of the Zone, there is the "chamber of desires", the place in which, if the subject penetrates it, his desire-wish is fulfilled, while what the Thing-Solaris returns to subjects who approach it is not their desire but the traumatic kernel of their fantasy, the sinthom which encapsulates their relation to jouissance and which they resist in their daily lives.

The blockage in Stalker is thus opposed to the blockage in Solaris: in Stalker, the blockage concerns the impossibility (for us, corrupted, reflected, non-believing modern men) of achieving the state of pure belief, of desiring directly - the Room in the midst of the Zone has to remain empty; when you enter it, you are not able to formulate your wish. In contrast to it, the problem of Solaris is over-satisfaction: your wishes are realized/materialized before you even think of them. In Stalker, you never arrive at, reach, the level of pure, innocent wish/belief, while in Solaris, your dreams/fantasies are realized in advance in the psychotic structure of the answer which precedes the question. For this reason, Stalker focuses on the problem of belief/faith: the Chamber does fulfill desires, but only to those who believe with direct immediacy - which is why, when the three adventurers finally reach the threshold of the room, they are afraid to enter it, since they are not sure what their true desires/wishes are (as one of them says, the problem with the Room is that it does not fulfill what you think you wish, but the effective wish of which you may be unaware). As such, Stalker points towards the basic problem of Tarkovsky's two last films, Nostalgia and Sacrifice: the problem of how, through what ordeal or sacrifice, might it be possible, today, to attain the innocence of pure belief. The hero of Sacrifice, Alexander, lives with his large family in a remote cottage in the Swedish countryside (another version of the very Russian dacha which obsesses Tarkovsky's heroes). The celebrations of his birthday are marred by the terrifying news that low-flying jet planes have signaled the start of a nuclear war between the superpowers. In his despair, Alexander turns himself in prayer to God, offering him everything that is most precious to him to have the war not have happened at all. The war is "undone" and, at the film's end, Alexander, in a sacrificial gesture, burns his beloved cottage and is taken to a lunatic asylum...

This motif of a pure, senseless act that restores meaning to our terrestrial life is the focus of Tarkovsky's last two films, shot abroad; the act is both times accomplished by the same actor (Erland Josephson) who, as the old fool Domenico, burns himself publicly in Nostalgia, and as the hero of Sacrifice, burns his house, his most precious belonging, what is "in him more than himself". To this gesture of senseless sacrifice, one should give all the weight of an obsessional-neurotic compulsive act: if I accomplish THIS (sacrificial gesture), THE Catastrophy (in Sacrifice, literally the end of the world in an atomic war) will not occur or will be undone - the well-known compulsive gesture of "If I do not do this (jump two times over that stone, cross my hands in this way, etc.) something bad will occur". (The childish nature of this compulsion to sacrifice is clear in Nostalgia where the hero, following the injunction of the dead Domenico, crosses the half-dry pool with the burning candle in order to save the world...) As we know from psychoanalysis, this catastrophic X whose outbreak we fear is none other than jouissance itself.

Tarkovsky is well aware that a sacrifice, in order to work and to be efficient, must be in a way "meaningless", a gesture of "irrational", useless expenditure or ritual (like traversing the empty pool with a lit candle or burning one's own house); the idea is that only such a gesture of just "doing it" spontaneously, a gesture not covered by any rational consideration, can restore the immediate faith that will deliver us and heal us from the modern spiritual malaise. The Tarkovskian subject here literally offers his own castration (renunciation of reason and domination, voluntary reduction to childish "idiocy", submission to a senseless ritual) as the instrument to deliver the big Other: it is as if only by accomplishing an act which is totally senseless and "irrational" that the subject can save the deeper global Meaning of the universe as such.

One is even tempted here to formulate this Tarkovskian logic of the meaningless sacrifice in the terms of a Heideggerian inversion: the ultimate Meaning of sacrifice is the sacrifice of Meaning itself. The crucial point here is that the object sacrificed (burned) at the end of Sacrifice is the ultimate object of Tarkovskian fantasmatic space, the wooden dacha standing for the safety and authentic rural roots of the Home - for this reason alone, Sacrifice is appropriately Tarkovsky's last film. Does this mean that we encounter here nonetheless a kind of Tarkovskian "traversing of the fantasy", the renunciation to the central element whose magic appearance in the midst of the strange countryside (planet's surface, Italy) at the end of Solaris and Nostalgia provided the very formula of the final fantasmatic unity? No, because this renunciation is functionalized in the service of the big Other, as the redemptive act destined to restore spiritual Meaning to Life.

What elevates Tarkovsky above cheap religious obscurantism is the fact that he deprives this sacrificial act of any pathetic and solemn "greatness", rendering it as a bungled, ridiculous act (in Nostalgia, Domenico has difficulties in lighting the fire which will kill him, the passers-by ignore his body in flames; Sacrifice ends with a comic ballet of men from the infirmary running after the hero to take him to the asylum - the scene is shot as a children's game of catching). It would be all too simple to read this ridiculous and bungled aspect of the sacrifice as an indication of how it has to appear as such to everyday people immersed in their run of things and unable to appreciate the tragic greatness of the act. Rather, Tarkovsky follows here the long Russian tradition whose exemplary case is Dostoevsky's "idiot" from the novel of the same name: it is typical that Tarkovsky, whose films are otherwise totally deprived of humor and jokes, reserves mockery and satire precisely for scenes depicting the most sacred gesture of supreme sacrifice (already the famous scene of Crucifixion in Andrei Roublev is shot in such a way: transposed into the Russian winter countryside, with bad actors playing it with ridiculous pathos, with tears flowing).(9) So, again, does this indicate that, to use Althusserian terms, there is a dimension in which Tarkovsky's cinematic texture undermines his own explicit ideological project, or at least introduces a distance towards it, renders visible its inherent impossibility and failure?

In Nostalgia, there is a scene which contains a Pascalean reference: in a church, Eugenia witnesses the procession of simple peasant women in honor of Madonna del Parto - they are addressing to the saint their plea to become mothers, i.e. their prayer concerns the fertility of their marriage. When the perplexed Eugenia, who admits that she is unable to comprehend the attraction of motherhood, asks the priest who also observes the procession how one becomes a believer, he answers: "You should begin by kneeling down" - a clear reference to Pascal's famous "Kneel down and that act will render you feeble-minded" (i.e. it will deprive you of false intellectual pride). (Interestingly, Eugenia tries, but stops half-way: she is unable even to perform the external gesture of kneeling.) Here we encounter the deadlock of the Tarkovskian hero: is it possible for today's intellectual (whose exemplary case is Gortchakov, the hero of Nostalgia), separated from naive spiritual certainty by the gap of nostalgia, to return to immediate religious immersion, to recapture its certainty by asphyxiating existential despair? In other words, does the need of unconditional Faith, its redemptive power, not lead to a typically modern result, to the decisionist act of formal Faith indifferent towards its particular content, i.e. to a kind of religious counterpoint of Schmittean political decisionism in which the fact THAT we believe takes precedence over WHAT we believe in? Or, even worse, doesn't this logic of unconditional faith ultimately lead to the paradox of love exploited by the notorious Reverend Moon? As is well known, Reverend Moon arbitrarily chooses the conjugal partners for the unmarried members of his sect: legitimizing his decision by means of his privileged insight into the working of the divine Cosmic Order, he claims to be able to identify the mate who was predestined for me in the eternal Order of Things, and simply informs by letter a member of his sect who is the unknown person (as a rule from another part of the globe) he is to marry - Slovenes are thus marrying Koreans, Americans are marrying Indians, etc. The true miracle, of course, is that this bluff works: if there is an unconditional trust and faith, the contingent decision of an external authority can produce a loving couple connected by the most intimate passionate link - why? Since love is "blind", contingent, grounded in no clearly observable properties, that unfathomable je ne sais quoi which decides when am I to fall in love can also be totally externalized in the decision of an unfathomable authority.

So what is false in the Tarkovskian sacrifice? More fundamentally, what IS sacrifice? The most elementary notion of sacrifice relies on the notion of exchange: I offer to the Other something precious to me in order get back from the Other something even more vital to me (the "primitive" tribes sacrifice animals or even humans so that God will repay them by sending enough rainfall, military victory, etc.) The next, already more intricate level is to conceive sacrifice as a gesture which does not directly aim at some profitable exchange with the Other to whom we sacrifice: its more basic aim is rather to ascertain that there IS some Other out there who is able to reply (or not) to our sacrificial entreaties. Even if the Other does not grant my wish, I can at least be assured that there IS an Other who, maybe, next time will respond differently: the world out there, inclusive of all catastrophies that may befall me, is not a meaningless blind machinery, but a partner in a possible dialogue, so that even a catastrophic outcome is to be read as a meaningful response, not as a kingdom of blind chance. How, then, are sacrifice and the Thing related? The very title of Claude Lefort's essay on Orwell's 1984, "The Interposed Corps",(10) provides the clue to this link. Lefort focuses on the famous scene in which Winston is subjected to the rat-torture - why are rats so traumatic for poor Winston? The point is that they are clearly a fantasmatic stand-in for Winston himself (as a small child, Winston behaved like a rat, ransacking refuse dumps for remainders of food). So, when he desperately shouts "Do it to Julia!", he interposes a corps between himself and his fantasmatic kernel, and thus prevents being swallowed by the traumatic Ding... Therein consists the primordial sense of sacrifice: to interpose an object between ourselves and the Thing. Sacrifice is a stratagem enabling us to maintain a minimal distance towards the Thing. We can see, now, why the motif of the Id-Machine has to lead to the motif of sacrifice: insofar as the paradigmatic case of this Thing is the Id-Machine that directly materializes our desires, the ultimate aim of the sacrifice is, paradoxically, precisely to prevent the realization of our desires...

In other words, the aim of the sacrificial gesture is NOT to bring us close to the Thing, but to maintain and guarantee a proper distance towards it; in this sense, the notion of sacrifice is inherently ideological. Ideology is the narrative of "why did things go wrong", it objectivizes the primordial loss/impossibility, i.e. ideology translates the inherent impossibility into an external obstacle which can in principle be overcome (in contrast to the standard Marxist notion according to which ideology "eternalizes" and "absolutizes" contingent historical obstacles). So the key element of ideology is not only the image of the full Unity to be achieved, but, even more, the elaboration of the Obstacle (Jew, Class Enemy, Devil) that prevents its achievement - ideology sets in motion our social activity by giving rise to the illusion that, if only we were to get rid of Them (Jews, the class enemy...), everything would be OK... Against this background, one can measure the ideologico-critical impact of Kafka's The Trial or The Castle. The standard ideological procedure transposes an inherent impossibility into an external obstacle or prohibition (say, the Fascist dream of a harmonious social body is not inherently false - it will become reality once one eliminates Jews, who plot against it; or, in sexuality, I will be able fully to enjoy once the paternal prohibition is suspended). What Kafka achieves is to traverse the same path in the OPPOSITE direction, i.e. to (re)translate external obstacles/prohibition into inherent impossibility - in short, Kafka's achievement resides precisely in what the standard ideologico-critical gaze perceives as his ideological limitation and mystification, i.e. in his elevation of (the state bureaucracy as) a positive social institution that prevents us, concrete individuals, from becoming free, into a metaphysical Limit that cannot ever be overcome.

What nonetheless redeems Tarkovsky is his cinematic materialism, the direct physical impact of the texture of his films: this texture renders a stance of Gelassenheit, of pacified disengagement that suspends the very urgency of any kind of Quest. What pervades Tarkovsky's films is the heavy gravity of Earth that seems to exert its pressure on time itself, generating an effect of temporal anamorphosis that extends time well beyond what we perceive as justified by the requirements of narrative movement (one should confer here on the term "Earth" all the resonance it acquired in the late Heidegger) - perhaps, Tarkovsky is the clearest example of what Deleuze called the time-image replacing the movement-image. This time of the Real is neither the symbolic time of the diegetic space nor the time of the reality of our (the spectator's) viewing the film, but an intermediate domain whose visual equivalent are perhaps the protracted stains which "are" the yellow sky in late van Gogh or the water or grass in Munch: this uncanny "massiveness" pertains neither to the direct materiality of the color stains nor to the materiality of the depicted objects - it dwells in the kind of intermediate spectral domain of what Schelling called "geistige Koerperlichkeit", spiritual corporeality. From the Lacanian perspective, it is easy to identify this "spiritual corporeality" as materialized jouissance, "jouissance which turned into flesh".

This inert insistence of time as Real, rendered paradigmatically in Tarkovsky's famous five minute slow tracking or crane shots, is what makes Tarkovsky so interesting for a materialist reading: without this inert texture, he would be just another Russian religious obscurantist. That is to say, in our standard ideological tradition, the approach to Spirit is perceived as Elevation, as getting rid of the burden of weight, of the gravitating force which binds us to earth, as cutting links with material inertia and starting to "float freely"; in contrast to this, in Tarkovsky's universe, we enter the spiritual dimension only via intense direct physical contact with the humid heaviness of earth (or stale water) - the ultimate Tarkovskian spiritual experience takes place when a subject is lying stretched out on the earth's surface, half submerged in stale water; Tarkovsy's heroes do not pray on their knees, with their heads turned upwards, towards heaven; instead they listen intensely to the silent palpitation of the humid earth... One can see, now, why Lem's novel had to exert such an attraction on Tarkovsky: the planet Solaris seems to provide the ultimate embodiment of the Tarkovskian notion of a heavy humid stuff (earth) which, far from functioning as the opposite of spirituality, serves as its very medium; this gigantic "material Thing which thinks" literally gives body to the direct coincidence of Matter and Spirit. In a homologous way, Tarkovsky displaces the common notion of dreaming, of entering a dream: in Tarkovsky's universe, the subject enters the domain of dreams not when he loses contact with the sensual material reality around him, but, on the contrary, when he abandons the hold of his intellect and engages in an intense relationship with material reality. The typical stance of the Tarkovskian hero on the threshold of a dream is to be on the lookout for something, with the attention of his senses fully focused; then, all of a sudden, as if through a magic transsubstantiation, this most intense contact with material reality changes it into a dreamscape.(11) One is thus tempted to claim that Tarkovsky stands for the attempt, perhaps unique in the history of cinema, to develop the attitude of a materialist theology, a deep spiritual stance which draws its strength from its very abandonment of intellect and from an immersion in material reality.

If Stalker is Tarkovsky's masterpiece, it is above all because of the direct physical impact of its texture: the physical background (what T.S.Eliot would have called the objective correlative) to its metaphysical quest, the landscape of the Zone, is a post-industrial wasteland with wild vegetation growing over abandoned factories, concrete tunnels and railroads full of stale water, and wild overgrowth in which stray cats and dogs wander. Nature and industrial civilization here again overlap, through their common decay - civilization in decay is in the process of again being reclaimed (not by idealized harmonious Nature, but) by nature in decomposition. The ultimate Tarkovskian landscape is that of a humid nature, river or pool close to some forest, full of the debris of human artifices (old concrete blocks or pieces of rotten metal). The actors' faces themselves, especially Stalker's, are unique in their blend of ordinary ruggedness, small wounds, dark or white spots and other signs of decay, as if they were all exposed to some poisonous chemical or radioactive substance, as well as irradiating a fundamental naive goodness and trust.

Here we can see the different effects of censorship: although censorship in the USSR was no less stringent than the infamous Hayes Production Code in Hollywood, it nonetheless allowed a movie so bleak in its visual material that it would never pass the Production Code test. Recall, as an example of Hollywood material censorship, the representation of dying from an illness in The Dark Victory with Bette Davis: upper-middle class surroundings, painless death... the process is deprived of its material inertia and transubstantiated in an ethereal reality free of bad smells and tastes. It was the same with slums - recall Goldwyn's famous quip when a reviewer complained that slums in one of his films look too nice, without real dirt: "They better look nice, since they cost us so much!" Hayes Office censorship was extremely sensitive to this point: when slums were depicted, it explicitly demanded that the set of the slum be constructed so that it not evoke real dirt and bad smell. At the most elementary level of the sensuous materiality of the real, censorship was thus much stronger in Hollywood than in the Soviet Union.

Tarkovsky is to be opposed here to the ultimate American paranoiac fantasy, that of an individual living in a small idyllic Californian city, a consumer paradise, who suddenly starts to suspect that the world he lives in is a fake, a spectacle staged to convince him that he lives in a real world, while all the people around him are effectively actors and extras in a gigantic show. The most recent example of this is Peter Weir's The Truman Show (1998), with Jim Carrey playing the small town clerk who gradually discovers the truth that he is the hero of a 24-hours permanent TV show: his hometown is constructed on a gigantic studio set, with cameras following him permanently. Among the predecessors of The Truman Show, it is worth mentioning Phillip Dick's Time Out of Joint (1959), in which a hero living a modest daily life in a small idyllic Californian city of the late 50s, gradually discovers that the whole town is a fake staged to keep him satisfied... The underlying experience of Time Out of Joint and of The Truman Show is that the late capitalist consumerist Californian paradise is, in its very hyper-reality, in a way IRREAL, substance-less, deprived of material inertia. So it is not only that Hollywood stages a semblance of real life deprived of the weight and inertia of materiality ?in late capitalist consumer society, "real social life" itself somehow acquires the features of a staged fake, with our neighbors behaving in "real" life like stage actors and extras... Again, the ultimate truth of the capitalist utilitarian de-spiritualized universe is the de-materialization of "real life" itself, its reversal into a spectral show.

It is only now that we confront the crucial dilemma of any interpretation of Tarkovsky's films: is there a distance between his ideological project (of sustaining Meaning, of generating a new spirituality through an act of meaningless sacrifice) and his cinematic materialism? Does his cinematic materialism effectively provide the adequate "objective correlative" for his narrative of spiritual quest and sacrifice, or does it secretly subvert this narrative? There are, of course, good arguments for the first option: in the long obscurantist-spiritualist tradition reaching up to the figure of Yoda in Lucas's The Empire Strikes Back, the wise dwarf who lives in a dark swamp, rotting nature in decay is posited as the "objective correlative" of spiritual wisdom (the wise man accepts nature the way it is, renouncing all attempts at aggressive domination and exploitation, any imposition of artificial order upon it...). On the other hand, what happens if we read Tarkovsky's cinematic materialism as it were in the opposite direction, what if we interpret the Tarkovskian sacrificial gesture as the very elementary ideological operation of overcoming the unbearable Otherness of meaningless cosmic contingency through a gesture that is itself excessively meaningless? This dilemma is discernible down to the ambiguous way in which Tarkovsky uses the natural sounds of the environs(12); their status is ontologically undecidable, it is as if they were still part of the "spontaneous" texture of non-intentional natural sounds, and simultaneously already somehow "musical", displaying a deeper spiritual structuring principle. It seems as if Nature itself miraculously starts to speak, the confused and chaotic symphony of its murmurs imperceptibly passing over into Music proper. These magic moments, in which Nature itself seems to coincide with art, lend themselves, of course, to the obscurantist reading (the mystical Art of Spirit discernible in Nature itself), but also to the opposite, materialist reading (the genesis of Meaning out of natural contingency).(13)

(7) Is not the exemplary case of such a fantasmatic formation combining heterogeneous and inconsistent elements the mythical Kingdom (or Dukedom) of Ruritania, situated in an imaginary Eastern European space combining Catholic central Europe with the Balkans, the Central European noble feudal conservative tradition with the Balkan wilderness, modernity (train) with primitive peasantry, the "primitive" wilderness of Montenegro with the "civilized" Czech space (examples abound, from the notorious Prisoner of Zenda onwards)?

(8) de Vaecque, op.cit., p. 110.

(9) See de Vaecque, op.cit., p. 98.

(10) See Claude Lefort, ?rire. A l'epreuve du politique, Paris: Calmann-Levy 1992, p. 32-33.

(11) See de Vaecque, op.cit., p. 81.

(12) I rely here on Michel Chion, Le son, Paris: Editions Nathan 1998, p. 191.

(13) Therein resides also the ambiguity of the role of chance in Kieslowski's universe: does it point towards a deeper Fate secretly regulating our lives, or is the notion of Fate itself a desperate stratagem to cope with the utter contingency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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