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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성남 운중동 명태집에서
속초산 명태집에서
명태조림으로 저녁을 먹으며 왜
어떤 건 명태조림이고 어떤 건 코다리조림인가
잠시 궁금해하다가 같은 건가 싶다가
건조건 반건조건 어차피 명태인데
코다리조림도 실상은 명태조림 아니냐
그런 걸 물어보는 건 또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 나름
나도 지식인인데 분자도 지식분자인데
알 건 알고 모르는 건 대충 알고
그런 것인데

그러다
바라본 대형사진의 속초항 속초바다
절반의 고향이건만 못 보던 항구인가 싶어
못 가본 지 오래구나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실향민 아바이마을도 저만치
있구나 싶었다 속초는 38선 이북이니
속초산 명태는 원래 이북에서 넘어온 자들
한류를 타고 내려온 자들
명태조림을 먹었다고 또 검색해보니
명태가 12년만에 동해로 돌아왔단다
동해 연안에서 자취를 감춘 명태가 돌아올 조짐
그러고는 오늘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이 만나고
짜맞춘 것 아니냐 싶게 만나고
이건 실화냐

남북 정상회담은 11년만이라
잃어버린 11년이라 하고
명태는 12년만이라 잃어버린 12년
때 맞춰 명태가 돌아오고
때 맞춰 남과 북이 손을 맞잡고
때 맞춰 나는 어제 명태조림을 먹었구나
명태잡이배 타던 옆집 명수네 아버지도 생각나고
그건 어느덧 38년도 더 전
세월인 줄 알았는데
오늘은 그게 역사로 보인다
흔하디 흔하다 싶던 명태도
때로는 역사적 명태로 등극하느니
그건 모르는 자들 빼고는
다 아는 일
한갓 명태조림 먹은 일로 시를 썼다고
불평하는 자들만 모르는 일
먹여줘도 모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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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내버려두지 말아요
나는 내가 아니에요 내 안의 주머니
빨간 주머니 눈길을 질주하는 철제 기관차
내 안의 금속성
깨어나 보면 모든 게 거울이에요
모두가 나를 흉내 내고 손가락질하고
나는 쉿! 하고 말해주었어요
쉬잇!

나는 잠들지 않아요
내 노래는 멈추지 않아요 방향을 바꾸지
않아요 바꾸려 하지 말아요 밖으로
나가지 못해요 모두가 나를
보고 있어요 브론스키 당신
인가요 브론
스키 나를 내버려두지 말아요

내가 아닌 나는 무슨 꿈을
꾸는지 나는 밖으로 나가지 못해요
당신이 이백 루블을 건넸다고 했죠
과부가 된 여자에게 나는
알았어요 내게 건넨 눈짓이었죠
주머니가 부풀어 올랐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뺨과 입술과 가슴
당신의 손가락이 닿는 가슴

꿈에서처럼 폭설이 내렸죠
죽어가고 있었죠 나는
모든 게 안전했어요
죽어가는 건 쉬운
일이에요 그때 당신을 떨어뜨린 말처럼
가엾은 프루프루
당신은 죽일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비명을 질렀어요 알렉세이 브론
스키 살아있나요 당신

네 흐느꼈지요
우리는 그렇게 넘어버렸어요
그렇게 지나가 버렸답니다
쉬운 일이었어요 나는 왜
미치지 않았던가요 우리는
왜 미칠 수 없었던가요
사랑은
미쳐버린 자들의 평온이에요
당신의 온기가 그리워요

한순간이었어요 촛불처럼
꺼져가고 있어요 기차가
오고 있네요 지금
나는 내가 아니에요 나는
누구의 이름으로
죽게 될까요
죽음은 죽음일까요
눈을 가려주세요
이제는
방향을 바꿀 수 없어요
쉬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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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8-04-27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러시아 두꺼운 소설은
제게 아주 옛날에 <죄와 벌>
<고요한 돈강>에서 끝이라 ;;;
그 유명한 안나 까레니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지않았다는 -.-
전 처음 이 시를 보고 첩보액션 영화를 상상했습니다. 군복, 기차,
여인... 그런 독일영화도 있었어요~
사진은 영화 안나까레니나 장면이지요?^^

로쟈 2018-04-27 12:27   좋아요 0 | URL
네 사진은 소피 마르소 주연의 안나 카레니나.
 

그게 뻔한 일인지도 모르죠
사랑한 사람들과 사랑할 뻔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모르는 인연이죠
모르는 꽃들도 향기를 뿜는 것처럼
잊혀진 사람들도 자국을 남겨요 여기
이렇게 잊혔노라 때로는 그때에 잊혔노라
어제도 오늘도 아니 잊고 그때에
그런 건 아니에요
내게 시슬레 소녀는 절반만 잊혀진
잊혀지다 만 소녀죠
언젠가 시슬레의 초원을 선물해주고 떠난 소녀
알프레드 시슬레를 가장 좋아한다고
시슬레의 풍경화를 좋아한다고
구름과 목책이 있고 초원이 펼쳐진 그림을
방문에 붙여놓았죠
아침마다 풀밭에서 잠이 깼어요
술을 마신 날도 마시지 않은 날도
초원으로 걸어가듯 하숙방을 나서서
구름들과 하루를 배회하고
풀꽃들의 안부를 물었죠
아침마다 중얼거렸어요 시슬레
마네 모네 드가 시슬레
언제나 넘버 포였어요 시슬레
풀꽃 향기가 날 것 같은 소녀를 나는
다시 만나지 못했어요
뻔한 일이었는지도 모르죠
풍경을 좋아하진 않았어요 그녀는
버섯을 좋아했죠 자원식물을 사랑했죠
소녀를 사랑했느냐고요?
모르는 인연이에요 다정하게
만나고 배웅하고 다시
만나지 않았어요 내겐
시슬레만 남았죠 시슬레의 초원만
남아서 시슬레 소녀를 기억했죠
그런 이야기예요
그렇게 잊혀졌죠 그녀에게
그녀가 나를 기억할까요?
우리에겐 저 구름이 전부일 뿐이에요
전부일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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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8-04-26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업상 좋아하는 소설보다 건강관련책을 읽고 라디오음악프로
대신 정치 팟캐를 듣는 현실에서, 유일한 즐거움은 아침출근길 차창너머 보는 초목. 올핸 작년에 안보이던 등나무꽃이 연보라빛으로
피어 있더군요. 그 화사함을 닮은 로쟈님의 시^^ 좋아하는 활동 중 퍼즐맞추기. 인상주의 풍경의 1000피스 액자가 거실에 걸려있어요. 올리신 그림, 퍼즐로
딱인데!^^*

로쟈 2018-04-26 13:05   좋아요 1 | URL
네 퍼즐로도 있을 것 같은데요.~

two0sun 2018-04-26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어 없어진 연애세포처럼,
잊어 사라져 버린
아련함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시네요.

로쟈 2018-04-26 22:51   좋아요 0 | URL
30년 전 얘기가 떠올라 적은 시예요.~
 

엘리펀트는 코끼리인데 코끼리는
육중하고 엘리펀트는 불가해하다 왜
엘리펀트일까 모스크바에서
언제던가 구스 반 산트의 영화를 보면서
나는 손인지 발인지 코가 손인지
무엇이 코로 들어가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지
콜럼바인 고등학생 둘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친구들을 사냥했지
아무렇지도 않게 난사했지 아니
조준했지 울면서 벌벌 떨기도 했었나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엘리펀트처럼
두 친구는 친구답게 냉정하고 무자비했다네
나는 아이다호의 구스 반 산트를 보러 갔다가
이런 구스 반 산트 같으니
이것이 엘리펀트인가 엘리펀트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지만
영화에서 난 코끼리를 본 건지 기억이 없는 건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방관했지 우리는 모두가 목격자였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숨죽이고 있었다네 여기는 모스크바
콜로라도가 아니라오
두 친구가 돌아보기 전에 우리는 입을 씻기로
아무도 공중전화로 달려가지 않았다네
아무일도 없었던 그날
콜로라도 하늘엔 흰구름 떠가고
모든 상황은 민방위훈련처럼 종료되었지
왜 엘리펀트인가 묻지 않았네
그런데 이제 와서

엘리펀트, 그러니까 코끼리가 지구를
떠받치고 있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날
모스크바의 하늘에도 흰구름 떠가고
나는 불가해한 일들에는 불가해한
표정으로 응대하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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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눈으로 보았을까
너의 그 눈이 아니었다면 나는 나도 볼 수 없는
눈을 가졌다네 하늘도 보고 하늘의 언저리도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보고 보다 말아도 보고
그래도 나는 볼 수 없는 만지기만 할 뿐 볼 수 없는
너의 눈동자 속의 나를
네가 보는 나를
이불 속에서도 이불 밖에서도 길 밖에서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
밥 먹으면서도 커피를 마시면서도
그러다 눈을 감아도 다시 눈을 떠도
앉아도 주저앉아도 가끔은 눈에 안약을 넣어도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음에도
잃지 않았음에도
나는 보지 못하네
네가 보는 나를
너의 그 눈이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나를
너의 눈동자 속의 나를
이제 다시는
이제 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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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8-04-24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통 주변에 널린 책들을 집어서 읽지만, 가끔 옛날에 본 책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얼마전엔 서점에서 페이퍼미니북을 보고 반가와서 몇
권 챙겼지요. 고전문학. 어릴 적, 시각적 묘사가 풍부한 작품을 좋아했
나 봐요^^ 로쟈님 시 내용이 시각을 추구하지만 대만영화 장면이 계속
떠오르는 ...암튼 기이한...

로쟈 2018-04-24 22:37   좋아요 1 | URL
어떤 대만영화인가요? 저는 홍콩영화.^^

로제트50 2018-04-25 09:03   좋아요 0 | URL
오래전 본 거라 제목이
생각 안나요.
빈집에 숨어 지내는 남자, 부동산업자가 들어와 침대 밑에 숨은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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