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 자기사랑으로 가는 길
존 페인 지음, 최지원 옮김 / 나비랑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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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옴니 (자기사랑으로 가는 길)

OMNI REVEALS

 

옴(om)은 우주의 소리라고 한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에서는 주인공 싯다르타 가 강가에서 명상을 하며 옴의 소리를 깨닫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천수경 속의 관세음보살의 여섯 글자로 된 진언 '옴마니반메훔' 도 옴을 부르고 있다.

옴 과 훔, 둘다 같은 소리라고 한다.

우리나라 토속 종교인 증산교의 주문(呪文) 태을주에는 '훔치 훔치' 로 시작 된다.

옴은 동양의 종교에서는 진언의 한 종류이며 명상이나 요가를 하는 사람들 에게는  '옴' 이란 소리는 낯설지가 않다.

 

이책 옴니는 그러한 옴과 같은 계열을 지닌듯 전형적인 뉴에이지 계열의 책이다.

영적 진화, 끌어 당김의 법칙, 붓다, 예수, 신, 사랑, 건강, 웰빙, 풍요, 창조가 이 책의 주요 키워드 이다.

 

이책은 보는 사람이 책의 내용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냐 에 따라 쓰레기 같은 책이 될 수 있고, 영적 진화에 관한 안내서가 될 수 도 있을것 같다.

 

이책의 저자(존 L. 페인)는 있지만 일반적인 책의 저자와는 조금 다르다. 이 책은 채널링을 통해 메세지를 써내려 갔다고 여겨진다.

 

채널링이란 사람과 사람이 아닌 존재와 영적으로 소통하는것을 말하는데 작가는 펜만 움직일뿐 다른 비물질계의 개입으로 메세지를 적었다는 뜻이 되는것이다.

<신과 나눈 이야기> (저자: 닐 도날드 윌쉬) 가 그런류의 책이다.

 

즉 우리나라 사고 방식으로 말한다면 대나무 꽂은 집에 사는 사람이 무슨 보살님이나 무슨 장군님의 계시를 받아 쓴 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비유를 하면 너무 수준이 떨어지나? )

서양식으로 표현 한다면 이책은 '고차원적인 영적 존재와의 교감으로 써내려 간 메세지 글이다.' 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쨓든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간'과는 다르게 존재하는 고차원 적인 영적인 존재가 있다는 점은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그게 신일수도 있고, 외계인일 수도 있고, 또 우리 인간중에서 수행으로 차원이 높아진 수행자일 수도 있고...  책에서는 돌고래와 고래를 언급 한다.

인간과 돌고래의 의사소통은 우리의 세계관에 변화를 끼칠 만큼 큰 전환이 된다고 한다.

여기서 의사소통은 단순히 동물원 돌고래 쇼에서 볼 수 있는 조련사와 돌고래 사이의 그런 의사소통 수준은 아닐것이다.

고래라는 종과 인간의 종은 같은 종이고 고래 종의 역사가 인류의 진화와 발전 과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인류의 기원과 다른 동물종과의 관계 까지 알수 있다는 것이다.

 

책의 전체 구성은 '옴니' 라는 존재가 '당신', 즉  읽고 있는 독자에게 해당하는 '나' 에게 보내는 우주 법칙, 창조, 기도, 풍요, 인류, 환생, 종교, 외계 문명, 죽음, 명상 등의 주제에 대한 메세지들로 구성 되어있다.

 

책에서 화자 '옴니'는 물질계의 형상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

옴니는 다차원적 존재이며 하나가 아닌 343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의식인데 하나의 존재 처럼 나타낼 수 있다고 한다.

만약 우리 인간중에 영적인 기운이 열려 옴니를 볼수 있다면 옴니는 '흰색 가운을 입었으며 이마와 가슴에서 빛이 나오는 3미터 크기의 잘생긴 존재' 라고 설명 한 부분이 나오는데 , 솔직히 책의 대중성을 위해서는 이 부분은  차라리 빼는게 나을 뻔 한 게 아닌가 싶다.

어느 누가 3미터 크기의 잘생긴 다차원적인 존재를 믿을 수 있겠는가?

이 부분 빼고 나머지 내용은 다 괜찮다.

 

그건 다름 아닌 주제에 대한 메세지 내용들 때문이다.

 

옴니는 '당신' 이란 표현으로 읽는 독자를 지칭하면서 자신의 메세지를 설파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작가 혹은 타인의 질문에 대한 옴니의 답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종 일관 주장하는 핵심은 명확하다.

 

우리는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세상을 통해 경험을 한다.

우리는 지구행성에서 자신이 곧 신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기 위해 수없는 윤회를 하며 경험을 통해 창조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자신이 설정한 게임을 지구 행성에서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모든 현실의 상황은 붓다나 그리스도의 삶을 깨닫기 위한 과정 과도 같은것이며 이것은 우리 자신이 선택 했다는 것이다.

 

그 선택을 위해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하고, 이때의 사랑은 우리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사랑보다 더 깊다.

 

수용이라고 표현 했는데 이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다. 자신에 대한 수용을 통해 사랑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까지 확장하여 모든 생명과 결국 나는 하나 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 의식이고 더 나아가 붓다 의식은 이 모든 하나가 곧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이것을 통해 곧 신을 알게 되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겨난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현실의 모든 문제는 결핍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결핍을 해결 하기 위해 우리는 욕망을 꿈꾸지만 그런것은 망상에 불과 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풍요, 건강과 웰빙, 창조를 통해 그리스도와 붓다 의식으로 나갈수 있다고 전한다.

 

더구나 사랑의 법칙과 더불어 끌어당김의 법칙을 설명하는데 가만히 보면 시중에 나오는 거의 모든 자기 계발서에는 끌어 당김의 법칙으로 부를 이루고 성공하는 면만을 이용하고 있다.

얼마전에 읽은 '더 마인드' 의 책이나 '역행자' 같은 책에도 끌어 당김의 법칙이 등장하고 그외 성공과 부자가 되는 그런류의 모든 자기 계발서에는 끌어 당김의 법칙이 최고의 무슨 비법 처럼 말 하고 있다.

 

 

 

'원하는것을 생각을 하면 그게 다 곧 나한테 온다' 라는 과장된 설명을 하는데 그건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소망이 현실을 창조 한다' 는 면에서는 사기는 아니지만 일부 작가나 유튜버들은 그걸 이용하여 순진한 사람들 상대로 돈벌이를 하는것은 사실인것 같다. 

그게 다 끌어당김 법칙을 미끼로 사용하여 성공에 목말라 하거나 돈이 필요한 결핍을 느끼는 사람의 호주머니를 터는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끌어 당김의 법칙은 별다른게 아니다. 그냥 유유상종을 말하는 것이다.

대행 큰스님 께서도 금은 금끼리, 은은 은끼리 같은것 끼리 모이는게 세상 이치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이책에서 전하는 메세지는 어렵지 않다. 그뜻도 어렵지 않다.

 

일부 내용은 다소 횡당무계 하지만 그건 보는 사람마다 차원이 다 틀리니까  달리 이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 인류가 통합의 의식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옴니의 메세지에는 적극 공감한다.

또한 인간은 신의 손가락을 가졌으며 비물리적인 면과 물리적인 면을 동시에 가진 존재라는 면도 공감한다.

우리가 가진 마음. 이 마음은 비물질적이지만 이것을 통해 물질화 시킬수 있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즉 공은 여기서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색은 물질을 말한다.

우주는 진동이고 이 진동에 맞추어 우리의 영적 의식을 확장하고 이 생의 삶을 게임을 하듯이 경험하라는 조언.

그리고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나 붓다 의식을 가진 차원의 존재를 스스로 자각하게 되리라는 옴니의 메세지는 2600년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설하신 내용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결국 모두 부처를 이룰것이다.

 

이 책을 읽는 시기에 아들 처럼 아끼고 키웠던 조그만 앵무새 '사랑이' 가 몸을 벗었다.

그때 사랑이가 떠난후 몇일은 슬픔에 빠지며 몇가지 깨달은게 있다.

생명은 크고 작던 다 신비 하다. 그리고 소중하다.

그 자그마한 생명이 살아 있을때는 활발하며 날아다니던 존재가 생명의 빛을 잃으니 순식간에 생기가 없어졌다.

생명의 빛은 한순간에 밝아지고 또 생명의 빛은 한순간에 사라질수도 있는 것이었다.

허무했지만 생멸은 결국 하나이다.

이렇게 사랑이는 떠나면서 작은 깨달음을 전해주고 갔다.

 

옴니가 전하는 메세지 처럼 우리 모두는 연결 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다.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모든 형상 있는것은 모두가 허망하니 모든형상을 본래 형상이 아닌 것을 알면 여래의 형상을 보게 된다)' 의 구절이 있다.

옴니가 상이 없은 존재이니 그가 전하는 메세지도 무상하며 또한 그 상없는 상을 통해 우리는 다시 자기 안의 불성을 볼 수 있으리라.

 

 

 

 

당신은 세상의 한 부분에서 당신이 하는 일이 세상의 다른 모든 부분들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 P28

이것은 우주의 게임입니다. 당신은 사랑으로 돌아가는, 사랑하는 집으로 가는 많은 다른 길들을 경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P49

모든 판단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판단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상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 P78

쓸데없는 대화란 결코 없다. 쓸데없는 생각이란 것도 없다. 모든 생각은 살아 숨쉬며 창조한다.

진정한 힘은 당신이 신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신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데서 나온다. 당신이 곧 신이다.
-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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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 조선 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 - 기행문 겨레고전문학선집 15
강항 지음, 김찬순 옮김 / 보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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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간양록, 조선 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

강항 씀, 김찬순 옮김

 

<선조 정유년(1597) 2월 형조좌랑의 신분으로 나는 전라도 영광에서 부모님과 휴가중이었다... 5월 17일 명()의 부총병 양원은 남원으로 군사 3천을 이끌고 내려왔고 나는 군량을 공급 관리하며 운반을 감독하는 종사관으로 배치되었다.

7월그믐 원균은 한산도를 지키지 못하며 패했고 남원을 향한 왜군의 창끝에 양원은 도망치고 끝내 남원성은 무너져 버렸다... 9월 14일 적은 이미 영광을 불지르고 산과 바다를 샅샅이 뒤져 사람들을 마구 찔러 죽였다...  나는 식솔들을 이끌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9월 20일 나는 새로 임명된 통제사 이순신있는 우수영으로 가기로 했다. 두배에  장정이 모두 마흔이나 되니 통제사를 따라가서 나라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사공의 잘못으로 인해 내가 탄배와 아버지가 탄배가 떨어지는 바람에 아버지를 찾으러 섬을 돌아다니다가 느닷없이 왜선에 잡히고야 만다....>본문 서두 부분 요약.

 

 

 

내가 중국에서 20여년 생활하면서 가장 아쉬운점 하나를 꼽으라면 보고 싶은 한국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수 없다는 점이다.

이번달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된 이순신 장군의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는 너무 너무 보고 싶은데, 그럴수 없다는게 참으로 아쉽다.

 

 

 

비오듯이 쏟아지는 총탄과 화살 세례, 바다와 하늘을 흔드는 불 뿜는 총통의 포에서 나오는 연기들, 그 가운데 끊이질 않는 우리 병사와 왜놈 들의 고함소리 속에서 나는 다리를 움켜 잡고 있다. 화살이 허벅지를 관통했다. 누가 쏜 화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일어나 싸워야 한다. 온몸은 땀과 피로 범벅이 되었고 지옥같은 전쟁의 한복판에 내가 누워있다. 고통스럽다.

그순간 눈이 떠졌다. 꿈이었다.

내가 어릴때 꾸었던 꿈 내용이다. 이 꿈을 깨고나선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 조선왕조 500년 임진왜란 드라마에서는  ()김무생 배우가 이순신 장군을 열연 하였었다. 아마도 그 날 전쟁장면을 보고 꿈을 꿨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임진왜란으로 생각되는 전쟁 장면이 나의 기억속에 꿈으로 저장되어 있다.

그런데 점차 나이를 먹으면서  혹시 그 꿈이 내 전생이 아니였을까 하는 망상이 가끔 든다.

혹은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라 전체가 집단 무의식으로 임진왜란 같은 큰 전쟁의 역사들을 잠재의식에 깊이 각인 되어 진게 아닐까 ?

결국 영화의 영향으로 다시금 이 책 간양록을 꺼내어 읽었다.

 

 

임진왜란, 그 당시의 역사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배운 역사나 매체, 각종 책을 통한 내용은 풍부하다. 하지만 그 당시 끌려간 포로에 대한 내용은 그다지 많이 다루지 않는것 같다.

'도자기 전쟁' 이란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수많은 도공(陶工)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는 내용의 다큐는 있었던 것 같다.

 

 

이 책 <간양록>은 임란시기, 정확하게는 정유재란때 '강항'(姜沆:호는 수은1567~1618) 이란 선비가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몸소 겪은 일은 '나'의 시점으로 보고 듣고 느낀것을 남긴 글이다. 굳이 분류를 한다면 기행문이라고 할 수있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기행문은 아니다. 책에는 전쟁의 참상과 포로 생활의 고초, 일본에 대한 증오, 특히 전쟁의 원흉인 풍신수길에 대한 저주와 조선 선비로서의 충절, 임금에게 전하는 간곡한 상소문 까지  모두 담겨져 있다.

 

포로로 잡혔으나 관원이란 이유만으로 강항은 죽음을 면했지만 포로로 수송되는 과정에서 죽어가는 가족들을 보며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마음과 일본에서 감시를 받는 가운데 목숨을 건 탈출 시도와 실패,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남은 일, 뇌물을 주고 중국 사신을 만나는 장면, 몰래 수집한 일본에 대한 정보를 은밀하게 조선의 임금에게 까지 전달되는 장면등 긴장감 있는 첩보 영화 한편을 보는 기분이 든다.

 

 

특히 강항은 풍신수길을 향해서 격분에 찬 글을 쓴 후 그것을 성문에 붙히는 장면에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조선선비의 선비정신 기개를 느낄수 있었다.

<...중략...너희는 제 땅이 있으면서도 남의 나라를 침범하고 남김 없이 죽여 없애려 하니 해와 달이 어찌 너희 아침을 받으며 석가가 어찌 너희 불의를 용서하랴!....지금 동방을 맏은 부처를 보내어 글로 너희 군신에게 이르노니 너희 군신이 아직까지 깨닫지 못했다면 나는 큰재앙을 너희 나라에 내릴것이다.... 나는 두말을 아니한다. 너희는 후회함이 없을지어다....중략..>

강항은 이 글을 쓴후 풍신수길이 6월 초부터 병에 누워 죽었으니 이 말에 효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강항의 포로 생활중 가장 큰 운명적인 사건은 순수좌(舜首座: 후에 개명하여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만남이다.

후에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에게서 유학을 배운후 도쿠가와 막부의 스승이 된다. 

나는 이장면을 떠올리면 묘한 아이러니를 느낀다.

강항은 본래 유학자이므로 불교를 숭상하지 않는다. 그런데 풍신수길을 향한 격노의 글에는 부처를 내세운다.

그리고 후지와라 세이카는 원래 스님이였다. 강항에게 유학을 배워 제자가 된 이후 부처를 떠나 유학자가 되었다.  스승은 부처의 힘을 찾았고, 제자는 부처를 벗어났다.

물론 강항도, 제자 후지와라 세이카도, 각자의 신념을 떠난게 아니고 오히려 일본이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나라를 유학으로 기틀을 세우고 한단계 성숙한 나라가 되는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이런점에서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로 이어지는 유학의 법맥은 이후 이에야스에 의해 통일된 일본을 다스리는 이념으로 까지 발전하게 된다.

결국 이 이념은 도쿠가와가의 에도 막부시대 260년을 지탱 시켜준 근간이 되는것이다.

 

 

 

마침내 강항은 4년의 포로 생활 끝에 1600년 5월 제자의 도움으로 자신을 식솔을 포함한 조선인 포로 38명을 데리고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강항은 선조를 만났다. 그전에 강항은 이미 여러 루트를 통해 3번이나 조정에 자신이 직접 몸소 보고 듣고 느낀 일본의 실정을 상소해 올렸었고 또 다시 상소 글을 올린다.

그후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겨 곧 바로 사직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양성했다. 그때 이 책 간양록이 나온것으로 보이는데 강항이 이 글을 쓸 때 원래 제목은 '건차록(巾車錄)' 으로 지었다고 한다. 

건차는 죄인을 호송하는 차량을 말한다. 스스로를 죄인이라 낮춘것을 제자 윤순거 가 펴낼때 간양록(看羊錄)으로  고치게 된다.

 

간양(: 볼 간, 양 양) 은 글자 그대로 '양을 보다' 는 뜻이다.

'간양' 에 대한 유래는 참으로 오래 됐다.

제자 윤순거(1596~1668)는 스승 강항의 일본 포로 생활을 한나라 시대 흉노에게 잡힌 소무(蘇武: B.C 140~60)에 비유했다.

간양이란  소무가 북해에서 19년간 양을 치며 흉노 선우의 회유와 협박을 거부하며 절개를 지켰다는 고사에서 유래 한다.

이 부분에 관련된 이야기를 찾아 보면 좀 더 흥미로운 내용들이 있다.

 

한나라 무제 시절(B.C141~87) '소무' 라는 한나라 장군이 흉노에 사신으로 왔다가 흉노에 사로 잡히게 된다.  소무의 절개 감동한 흉노의 선우(왕과 동격) 회유를 하지만 소무는 한나라의 지조를 지키고자 회유를 거부하게 된다. 이에 화가난 흉노의 선우는 지금의 바이칼 호수 근처로 유배를 보내고 19 동안 양을 치게 한다. 무제가 죽고 한나라 조정과 흉노가 평화적으로 화친을 함에 따라 외교정책의 변화로 소무는 한나라에 돌아 오고야 만다. 그렇게 한나라로 돌아온 소무는 '충절의 상징' 되어 버린다.

 

(참고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부하중에 김완(金浣:1546~1607) 장수가 있었다. 그는 원균과 칠전량 해전에 참가 했다가 대패하는 과정에서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다.

김완은 일본을 탈출하여 조선에 돌아오는데 조선의 선조는 김완에게 '해동소무'(海東蘇武)라는 어필을 하사했다. 그만큼 '소무'는 충절의 대명사이다.)

 

 

'간양'이란 '소무가 19 동안 적지에서 양치기를 했다' 이야기에서 유래한 '충절' 뜻하는것이다.

여기서 연관 되는 하나의 뜻깊은 사건은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유래' 들수 있다.

소무가 흉노 땅에서 양치기를 하고 있을때 동시대에 '이릉()'이란 한나라 장수가 흉노와 싸우다 붙잡히게 되었다. 이릉은 당시 5천명의 보병으로 3만의 흉노 기마병과 맞서 싸웠으나 결국 패하고 잡히게 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싸움' 임에도 불구하고 이릉은 용감히 싸웠다. 하지만  결국 사로 잡히게 되고 후에 이릉은 선우에게 포섭이 되고야 만다.

소식을 전해 들은  한무제는 폭발하여 이릉 집안의 삼족을 멸하고자 하였다. 수많은 신하들이 잠자코 있었는데 그때 오직 사마천만 이릉을 변호 했었다고 한다.

당시 사마천은 일면식도 없는 이릉을 위해 당시 상황에 근거하여 이릉의 입장에서 변호 했다가 오히려 한무제에게 노여움을 사게되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죽음보다 치욕적인 궁형에 처해지게 된 이유이다.

결국 사마천은 자신의 남성을 버리는 고통과 굴욕을 극복하고 인간 능력의 최고의 정점을 붓끝으로 집약하여  '사마천의 사기' 탄생 시키게 된다.

사마천이 변호했던 이릉은 훗날 소무가 19 포로 생활 끝에 한나라로 돌아가기 전에 서로 만나게 된다.

소무와 이릉의 만남.

이릉은 가고싶지만 돌아갈수 없는 자신의 처지(자신은 이미 충절을 버린셈이 된것이고 또한 고향의 집안은 이미 멸문지화를 당했다) 19년을 양을 치며 충절을 지키다가 결국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소무와의 엇갈린 운명앞에서 동시대의 두 주인공은 서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들의 심금을 울리는 마음이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듯 하다.

 

 

간양록 속에 담긴 16세기말 조선시대 선비 강항의 충절과 2000년전의 소무와 이릉의 엇갈린 운명속의 충절을 생각하면 시간과 공간이야 다를지 언정 하나로 이어지는 운명이 느껴진다.

 

 

나를 만약 한()의 소무(蘇武)에 비춰보면 나도 이미 23년이 넘게 중국에서 살고 있다. 현재 나에겐 내 가족이 양이다. 양이 다 클 때 까지 아직 중국에 남아 있어야 한다.

내가 돌아가야 할 우리나라. 대한민국.

돌아갈 그날이 올때 까지 부지런히 공부해 놓고 있어야 겠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어린양을  돌보는 목자에 비유한다.

나는 내 내면의 어린 양을 키우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

간양, 양을 잘보는것. 여기엔 많은 뜻이 담겨 있는것 같다.

 

 

(만약 간양록을 보기전에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대망>이란 소설을 먼저 읽고 난 후 간양록을 본다면 강항이 수집한 당시 일본의 정세를 담은 내용이 쉽게 이해가 될 듯 하다. )

죄 없는 널 죽였구나 모두가 내 죄여라
백 년 두고 통분해 눈물 언제 마르리. - P22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이마에 땀이 나는 줄도 깨닫지 못하였다.
무인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나는 글 읽은 사람이 아니던가!

..... 중략

만권 서적 읽은 서생 면목이 바이 없네
이태 동안 궁진 신세로 양 치고 있으니.
- P29

한평생 경영한 게 한 줌 흙 된단 말인가
열 층의 황금 전당 부질없이 높구나
탄알만 한 네 땅 지금 남의 손에 갔느니라
무슨 일로 청구 땅에 당돌히도 대들었나 - P31

방비를 위한 충언
관원을 임명할 때 가문을 묻지 마시고
장수들이 백성을 침탈하지 말도록 하옵시고
지리와 성읍 제도를 살펴 고치시길
항복한 왜군을 죽이지 마시고 거두어 주시길
무기를 날카롭게 갖추시옵고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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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록 - 미래사회를 이끌어 갈 주인공들에게 남긴 100년을 내다본 지혜 모음
탄허 지음 / 휴(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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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탄허록(呑虛錄) 미래사회의 주인공들에게 남긴 100년을 내다본 지혜 모음

저자: 탄허

 

유튜브나 인터넷에 우리나라 국운에 관련된 예언을 찾아보면 탄허 스님의 예언은 빠지지 않고 꼭 나온다.

그런데 우리의 미래에 대한 예지는 대개 밝지 않고 어두운 감정을 수반한다.

그 원인은 인류의 종말이나 성경의 묵시록에 나오는 인류 최후의 심판 같은 어둡고 공포스런 이미지가 항상 뒤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탄허 큰스님께서 마치 노스트라다무스 같은 예언자 같이 분류 되고 있어 안타깝지 그지 없었다.

어찌 큰스님의 경지를 한낱 예언자 수준으로 떨어뜨리는가 싶었다.

  

<한마음 요전>을 읽어본 선원 신도님들이라면 탄허 스님이 낯설지 않고 친근하기 까지 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요전에는 큰스님의 행장기와 일화에서 여러 차례 언급이 되어져 있다.

두분 모두 방한암(方漢岩) 큰스님의 제자이시기도 하지만 한분은 유불선(儒佛仙)을 하나로 꿰 뚫는 교학(敎學)적인 면에서 대표성을 지니셨고 한분은 절학무위(絶學無爲)적인 면에서 대표성을 띠신것 같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두분 모두 선()과 교(), 유()의 세계와 무()의 세계를 통달 하신 선지식임에는 틀림 없다.

한마음 요전에도 나온 내용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탄허 스님의 교학적인 부분만 봤지 진정 탄허 스님의 선적(禪的)인 경지를 알지 못하는것 같다고 큰스님께서 언급하셨다.

다행히 최근 해인사의 문광(文光) 스님께서 탄허학을 연구하신후 탄허 큰스님의 전체 사상에 대해 재조명을 받고 있다.

탄허 스님의 진면목을 세상에 다시금 알리는 의미에서 참으로 기쁜일인것 같다.

이책 <탄허록>은 탄허스님의 생전에 남기신 어록과 자료를 다시 정리하여 발간되었는데 (2012년 초판, 2020년10쇄) 나는 이제서야 보게 되는 인연이 되었다.

책에는 국운(國運) 예지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모두가 마음 공부를 해야 한다는 스님의 간곡한 마음을 전해 들을수 있다.

탄허스님이 지금 다시 회자(膾炙)가 되는 부분이 예지 능력 때문인데 탄허스님의 예지 능력은 수행을 통한 깨달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본다.

이책의 첫 장은 바로 국운에 관한 내용에서 부터 시작 된다..

주역에서 우리 나라는 간방(艮方)에 위치 하는데, 간방의 뜻은 소남(小男) 즉, 젊은 청년을 뜻하고 시기적으로 간도수에 해당하는 지금의 우리 나라에서 세계의 문제가 시작되고 끝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

즉 5천년동안 고난과 역경에 속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의 불행한 역사는 종식된다는 것이다.

분단된 우리나라가 통일을 하고 평화로운 국가를 건설 하겠지만 세계적으로는 혼란을 맞이 하게 되는데 이는 서양의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지구 종말과 마치 흡사 하다. 그렇지만 이때 우리나라만 가장 적은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금의 정역의 시기에는 지구 멸망이 아닌 성숙기를 맞이 한다는 것이다.

지구는 땅속의 불에 의해 북극의 빙하가 녹을것이고, 23도 7분 가량 기울어진 지축이 바로 서고, 중국은 분열되고 일본 열도는 가라 앉게 되지만 미국과 우리나라는 지속적으로 좋게 지내게 된다고 하셨다.

이때 지구의 바다와 육지의 면적이 뒤바뀌어 육지의 면적이 지금의 3배로 늘어나게 된다고 하셨다.

이 내용은 스님께서 지금으로 부터 약 50년 전에 하신 말씀 하신것인데 그때는 환경 오염을 지금 처럼 심각하게 생각 하지도 않았고 우리나라는 막 가난을 벗어난 시점이라 그냥 흘려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시간이 흘러 지금 현시점에서 돌아보니 하나하나 맞아 들어가는 부분에서 세상 사람들은 다시금 언급하는 것이다.

분명 이러한 예언은 우리 나라에게 희망을 주는 기분 좋은 예언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스님은 뒤에 덧붙혀 말씀하시길 이런 역학의 원리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고 하신다.

우리 스스로 더 성장하기 위헤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 하신다.

그래서 이 책의 뒤부분은 전부 마음 공부에 관련된 말씀만 하신다.

탄허 스님께서는 원래 출가전 부터 유교와 도교를 공부를 하셨던 분 이셨다.

그래서 불문의 귀의 한후 유교 불교 도교, 즉 유불선을 모두 하나의 도()로 융합하여 풀어 내시고 21세기 시대의 학문의 통섭과 같은 개념으로 종교의 종파까지 뛰어 넘게 되리라고 내다 보셨다.

경계가 허물어 지는것, 즉 둘이 아니고 하나로 융합되는 도리, 그것이 선의 도리이고 인류를 진화 시키는 도리가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  '마음이 가난한자가 복이 있나니' 라는 구절이 있는데 한문 성경에는 '허심자수복(虛心者受福)' 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성경 해석은 '마음이 가난한자' 로 되어 있지만 원래는 허심(虛心): 빌 허(), 마음 심() 즉 '마음을 비워야 하는' 뜻이 된다.

마음을 비운다는것은 불교의 무심과도 같은 뜻이 된다.

하나님도 인격체의 하나님이 아닌 진리를 의미한다고 하신다. 그러니 진리에서 멀어지면 지옥이 되는것이다.

이러한 경지는 노력없이 그냥 얻어지는게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 자신부터 정립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자가정립(自家 定立), 즉 자기 공부가 되어야 한다.

자리이타(自利利他)는 스스로 먼저 자기가 서야지 할 수 있는것이지, 자신도 제대로 못세우고 남 부터 돕는다는것은 위선(僞善)이라고 단호히 말씀 하신다.

우리는 아는것이 끊어진 자리, 시공간이 끊어진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그래서 책에서는 첫장 예언 외에는 전부 공부에 대한, 마음 닦는것에 대한, 선()의 경지에 대한, 기독교의 진리까지 분별하지 말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고구정녕(苦口丁寧) 당부하신다.

예언은 예언일뿐 아직 오지 오지 않았다.

중요한것은 지금 이순간 내 공부를 하는 것이다.

미래가 밝은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만 믿고 아무 준비도 안한다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내자신을 아는것 부터 시작이다.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자신을 바로 세워야 한다.

내 자신이 스스로 당당하고 주인이 될 수 있을때, 이런 사람들이 하나둘 더 늘어날 때 우리나라가 진정 세계의 중심이 되지 않겠는가?

탄허 큰스님은 당대에 무아(無我)가 되자는 발심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무아가 되고자 하는 노력은 이번생에 도를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생을 위한 씨앗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내가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되는것, 그런 공부는 절대 헛된 연습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것은 선지식들 께서 바라시는 일이요, 우리 내면의 주인공이 바라는 일이기도 하다.

(탄허 큰스님의 진정 전하는 메세지는 국운예지에 가려서는 안된다.)

 

진정 자신을 회복해야 하는것이야 말로 지금 우리가 당장 힘써야 할 일인것이다.

일체 선지식과 내가 둘이 아님을 믿고 한걸음 한걸음 오늘도 천천히...

오직 공부할 뿐이다.

지금 전국의 사찰에서 동안거가 진행중이다.

이번 한철 불퇴전의 마음으로 용맹정진 각오를 다진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면 1천명의 스님과 1천명의 도인보다는 종교와 도를 잘 아는 한사람의 정치인이 필요하다. - P74

동양철학의 관점에서 칸트의 최종적인 결론은 뭔가 미흡하다. - P98

유교는 뿌리를 심고,도교는 뿌리를 거두고, 불교는 뿌리를 뽑는다.(儒植根,道培根,釋拔根) - P117

우리가 고요한 곳에서 도 닦는 것은 시끄러운데 쓰기 위함이다. 예를 들면 돈벌이하는 것은 가난한데 쓰자는 것이요, 깨달음은 얻어서 수많은 중생 구제를 하기 위함이다. - P152

동양학의 3교인 유불선의 성인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시공이 끊어진 자리를 알려 주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천당 지옥의 유치원 법문‘ 이 생기게 된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 이라는 것도 시공이 끊어진 자리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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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생명 이야기 아우름 1
최재천 지음 / 샘터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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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생명 이야기)

저자: 최재천

 

어린시절 초등학교때 학교 복도에는 나비류의 곤충 표본과 표본병에 담긴 물고기와 각종 동물의 배아기 표본들이 있었다.

 

 

그때는 '국민학교' 라 부르던 시기 였는데 어린 나는 그 복도를 지날때면 항상 무서웠다.

'살아있었던 생물들을 왜 저렇게 물에 담가 놨을까?' 그때는 이해가 안갔다.

물고기와 개구리, 토끼 같은 죽은 사체를 투병한 병속 액체에 담가져 전시 되어 있는 장면은 꿈에서도  종종 나타났는데 그 시절 두려움은 학교 괴담 같은 전설과 더불어 그냥 나에게는 공포 였다.

 

 

 

 

시간이 흘러 중학시절, 우리의 교육과정중 생물에 대해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중학 과학 시간에 배웠던 생명체의 거의 모든 종의 형태는 배아기때 9 자 모양의 귀걸이 형태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초등 학교 표본병에 담긴 동물 생명체들의 초기 모습은 똑같은것 같았다.

종의 기원은 같았지만 나중에 종의 형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진화 되는게 신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또 그 당시 기억중 중 2때엔 개구리를 잡아 과학시간에 해부를 했었다. 주위 친구들은 개구리 잡기 부터 해부까지 아주 재미있어 했지만 나에게는 구역질만 나왔다. 그때만 해도 개구리는 주위에서 쉽게 잡을수 있는 생명체중 하나 였다.

더구나 행상인들 중에서는  몸 보신에 좋다고 개구리를 말린후 그걸 줄에 꿰어 팔러 다니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흔했다. 그걸 누가 사먹을까 생각 했지만 분명 누군가는 먹었을 것이다.

(윽,생각만 해도...)

다시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생물은 시험을 위한 암기 과목으로 변했다.

어쨓든 나에게 과학의 생물은 징그럽고 공포와 구역질의 이미지만 남긴것 같다.

 

 

이책의 저자 최재천 교수는 이런 나와는 정반대의 기억을 가졌다.

강릉 태생으로 서울에서 자랐지만 어린시절 부터 방학때 마다 강릉 시골집 내려가서 자연과 함께 있는 시간을 가장 행복해 했단다.

쥐새끼를 잡아 놀고, 쇠똥구리랑 놀고, 논 병아리 잡으로 다니는 시골 생활이 그렇게 좋았단다.

어린 시절 존경하는 인물이 '타잔' 이라고 했을 정도 였으니 그의 자연과 동물에 대한 애정이 결국 그를 생물 학자로 이끈것은 당연한 결과인 것 같다.

하지만 작가 본인은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수도 없는 방황을 했고 그 방황이 아름다웠다고 했다.  

지금은 결과론적으로 천생 그의 운명은 생물학자가 되는게 맞다고 느껴지지만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한 노력의 여정을 소개했다.

그래서 아직도 길을 찾지 못한 나같은 사람에게는 정말 부럽고 존경 스럽다.

 

 

저자는 중학교때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탔을 정도로 문학에도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본인은 문과를 택하려 했지만 학교에서 본인의 뜻과는 반대로 이과로 결정 짓는 바람에 의예과를 지원했었다고 한다. 결과는 (작가의 표현으로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로 떨어지고 재수 후에 생물학과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볼 때는 운명 같지만 저자 본인은 진정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시도를 끊임없이 했었다.

고등학생 때 부터 방송국 앵커를 찾아가고, 사회운동가를 찾아가고, 조각가를 찾아가고, 심지어는 종교인 까지 되려고 했던 저자는 늘 항상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은 생물학이라는 학문, 거기서 결국 자신의 스승(에드워드 윌슨 교수) 을 찾아내고야 만다.

 

 

 

 

 

 

이제 작가는 생물학계의 대표 교수가 되어 생물학으로 인문과학과 자연 과학의 연결을 시도하며, 서로 다른 영역의 학문의 통섭(統攝)을 통해 인류가 보다 더 큰 진화를 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나는 그가 주장하는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 라는 학명보다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즉 공생(共生)하는 인간이라 불러야 한다는 그의 통찰에 적극 동감한다.

 

<이번 세기가 지나기 전에 우리 인간은 공생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끼리도 같은 종내에서도, 다른 종과도 공생하는 인간으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인류의 미래는 밝지 않다고 생각 합니다.>

 

 

이책은 최재천 교수의 에세이 집이긴 하지만 저자 본인의 인생의 길에서 자신과 생물 과학이란 학문을 만나는 구도기의 시점으로 볼 수도 있다.

마치 그는 화엄경에서 선재동자가 자신의 길을 찾는 구도(求道)의 여정처럼 말이다.

 

 

그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방황도 결국은 아름다울 것이다.

 

방황이 아름다운것은 자기가 자신의 모든것을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DNA 의 입장에서 보면 생명은 한번도 죽은 적이 없는, 끊이지 않은 영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 P13

진화란 최선의 방법을 발견해서 이 세상에서 1등을 했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누군가가 도태되어 사라지는 것입니다. - P55

풍요로운 시대가 오면 아무도 탈락하지 않고 , 도태되지 않을 수가 있는데, 우리는 왜 지금까지 금메달이 아니면, 1등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살았을까요? - P57

학문의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넘나들 수 있는 스티브 잡스, 제임스 카메룬 같은 사람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골치 아픕니다. 대부분의 경우 난장판을 만듭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내는 난장판 속에 다음 세대의 먹거리가 발견될 것입니다. - P71

내가 평생 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막 두드려 보았습니다. 그것은 방탕이 아니라 방황이었습니다...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매 순간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 단 한순간도 이것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악착같이 찾는 아름다운 방황을 하기 바랍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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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가 - 우리의 문명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 접근
바츨라프 스밀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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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세상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가 (How the World Really Works)

저자: 바츨라프 스밀/ 강주헌 옮김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우리 인류에 대해 폭넓게 조명 했었다.

아프리카 한구석에서 시작해서 다른 종들에 비해 무척 약하고 힘이 없었던 우리의 조상이 어떻게 살아 남고 진화를 거쳐 현재 우리의 행성 지구에 주인이 되는 과정을 무척 흥미롭게 탐구했었다.

유발 하라리는 우리 인간은 신이나 국가, 인권 그리고 돈에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집단 신화를 믿는 능력 덕분에 행성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통찰했다.

그후 출간된 <호모데우스>에서는 우리 사피엔스가 불멸, 행복, 신성을 추구하며 결국엔 '' 같은 능력을 지니게 되는 호모데우스(호모 사피엔스+제우스) 되리라고 내다 봤다.

얼마전에 읽었던 송길영의 <시대예보> 에는 지능화와 고령화란 양대 사이에 우리는 개인의 능력이 강화된 핵개인으로 탄생하리라는 예측을 했다.  다른 관점에서는 단순한 탄생이 아니라 시대에 흐름에 따른 변화를 긍정적으로 내다 본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미래에 대한 예측은 대체적으로 낙관적인 전망이 주를 이룬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 읽게 <세상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가> 대한 미래 예측은 그렇지만은 않은듯 하다.

 

책의 저자 <바츨라프 스밀> 인간의 특성이나 인류의 미래에 대한 초점보다 현대 세상이 돌아가는 구조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래에 대한 예측에 대한 작가의 통찰을 눈여겨 봤으면 한다.

지금 현대 사회에서 바라보는 우리 미래에 대한 예측은 양극단으로 나뉜다.

하나는 아포칼립스와 같은 인류 종말이나 아마게돈 같은 세상의 종말을 예측 하는것이 있다. 이에 대한 종교적인 예언뿐만 아니라 일부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찬 종교인, 작가, 언론인들 에게서 볼수 있다.

다른 하나는 특이점(Singularity) 으로 인공 지능이 인간의 사고의 확장을 뛰어넘게 되고 과학기술은 우리 인류가 생각하는 모든 고민들을 해결해 주리라는 기술 만능주의 세상을 예측 하는것이다.

그러나 저자 바츨라프 스밀은 두가지 견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어떤것도 진실일 수가 없다고 말한다.

 

코로나 19 팬더믹이 오기전 지구촌의 어느 누구 하나 전염병에 대해서 미리 예측을 했었던적이 없었다.  또한 팬더믹이 발생하고 나서도 전세계의 모든 나라가 초기 대처에서 부터 정신없이 헤매기만 반복 했었다.

한마디로 우리의 대응능력은  '0' 이였다.

우리가 인정하던 세계 최강대국 미국 조차 팬더믹 초반에 기초 의료 부품이 없어서 의료 기관은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었다.

지금은 팬더믹 사태가 막을 내린것 같지만 우리는 전염병의 치료법을 아직도 개발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다시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다 해도 인류는 여전히 같은 곤란을 겪을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미래는 인류 종말이나 인류 신과 같은 권능을 기대하게 되리라는 두가지 상반된 견해속에서 어느것을 선택해야할 알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불가지론(不可知論) 택한다.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중대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는 기후변화 '지구 온난화' 대한 관점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현재 세계의  대부분의 국가 ( 150여개 ) 에서 2030 에서2050년까지 소중립을 시행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또한 세계 각국은 점차적으로 매연기관 자동차를 줄이고 전기차로 대체 하거나, 화석 연료 대신, 태양열 복사광이나 수력, 풍력을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하는 대체 에너지 보급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과연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의 목표에 대해 강한 부정을 내세운다.

저자는 "탄소 중립은 무모하다" 한다.

 

이렇게 단호하게 내세우는 이유는 각국의 여러 정치가들과 환경 연구자들이 지구 온난화를 줄이기 위해 내세웠던 모든 시나리오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만든 허구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현대 문명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인류의 성취는 화석연료를 벗어날수 없다는 태생적이고 구조적 한계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현재 80억의 인구가 탄소 중립을 위해 화석연료 대신 대체 에너지를 사용한다고 한다면 곧바로 전세계 인구의 절반에 해당되는 40억의 사람들에게 심각한 식량 부족을 야기하게 되고 극단적으로는 굶어 죽게 수도 있다.

 

현대 문명에서 화석원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우리가 상상했던것 이상으로 의존하고 있다.

저자는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네가지 기본 물질 암모니아, 강철, 시멘트와 플라스틱 화석연료와 어떻게 연관성이 있으며 현대사회에서 얼마나 사용되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암모니아는 식량생산에 필요한 비료로, 강철은 현대사회에서 운송 역할의 자동차, 선박, 비행기등에 사용되고, 시멘트는 건축, 구조물등에 플라스틱은 일상 생필품에서 부터 의료 기기 까지 널리 사용되어지고 있다.

더구나 4가지 물질은 전세계적으로 매년 생산량이 계속 증가 하고 있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30년안에 네가지 물질을 대체할 있는 신소재나 기술이 나올수가 없다면 '2050 까지 탄소 중립을 실현하겠다' 구호는 그저 허울 좋은 소리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기후변화에 대한 여러 대책 시나리오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친 나리오인지에 대해   해당 이유와 근거를 데이타 수치 자료 제시하면서 설명한다.

 

저자 바츨라프 스밀은 50년간 환경과학자와 경제 사학자로서 에너지, 환경, 식량, 인구, 경제, 역사의 모든 부분을 연구했으며 모든 분야를 통합한 작가의 통찰이 이책엔 담겨 있다.

 

2 세계대전의 처참한 상태에서 당시 인구는 30억에 불과 했다. 그러나 현재 2세대가 지난 시점에 인구는80억으로 증가 했으나 인류 역사상 최고의 물질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1945년도에는 아무도 현대사회가 이렇게 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새롭게 야기 되는 문제들, 환경오염, 기후 변화로 인한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역시 누구 하나 정확히 예측할 없다. 우리의 예측은 항상 틀렸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아직도 모른다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예측 보다 결국 우리는 현재 우리 자신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미래에 대한 지나친 비관과 낙관을 경계 해야 하는 불가지론의 입장에서 작가는 데카르트의 말을 인용하며 미래를 말한다.

<뭐든지 의심하라. 지금 우리의 행동에 따라 미래는 달라진다. 우리에게 미래는 지금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미래는 우리가 이루어내는 성취와 실패로 부터 결정될 것이다.>

 

작가가 책에서 구성한 에너지, 식량, 물질, 세계화, 위험, 환경, 미래에 대한 통찰에 깊이 공감하며 유발하라리의 명쾌했던 통찰을 한방에 뒤집는 그의 다른 통찰을 통해 유발하라리의 미래 예측과 상호 보완적 시각으로 이책을 보면 좋을것 같다.

현재 이러한 나를 둘러싼 외부 세계가 중요한것 처럼 내 안의 세계도 똑 같이 중요하다. 내 안의 세계는 진실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2007년부터 2015년까지 매년 세계를 위협하는 위험순위를 발표했다... 자산가격 붕괴와 금융위기를 비롯한 금융체계의 실패가 여덟번, 수자원 위기가 한번 선정되었지만, 팬더믹 위험은 한번도 뽑힌 적이 없었다. 세계적 의사 결정자들의 집단 예지력이 이런 수준이다. - P288

화석연료의 의존에서 하루 아침에 벗어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앞으로도 수십년 동안 화석연료의 연소는 기후 온난화의 주범으로 남을 것이란 뜻이다. - P335

대규모 전기저장, 비현실적인 대규모 탄소 포집과 영구적인 지하 저장에 의존하는 혁명을 노래할 뿐이다. 이런 과장된 예측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다. - P360

극단적 상황을 예상하고 상상하기는 매우 쉽다. 하지만 관성에 의한 발전과 예측하지 못한 중단에서 비롯되는 현실적인 미래를 예상하는 건 여전히 어렵다. 예측 모형이 아무리 많아도 그 어려움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우리의 장기 예측은 계속 틀릴 것이다. -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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