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삶이 불쾌한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박은미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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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삶이 불편한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박은미 지음

 

236년전의 오늘, 1788년 2월 22일은 쇼펜하우어의 탄생날 이다.

 

 

쇼펜하우어(1788~1860)는 지금은 폴란드 영토, 당시에는 독일 영토였던 '단치히' 라는 곳에서 부유한 사업가인 아버지와 여류 문학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마디로 쇼펜하우어의 삶을 요약하자면 아빠, 엄마 찬스를 잘 사용했던 철학자?

물론 쇼펜하우어 자신의 의지는 아니였겠지만 요즘 세대의 시각으로 보면 금수저나 엄친아 정도 아니였을까?

아버지가 남겨준 물질적 유산으로 평생 돈 걱정 없이 살았고 또 정신적으로는 어머니의 문학적 재능과 인맥을 이용한 교육을 아주 그것도 잘 받았다.

 

 

어릴때는 유럽 여행을 하다가 아버지 친구가 있는 프랑스에서 2년을 살며 프랑스어를 배웠고, 이후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의 권유로 라틴어와 그리스어 공부를 하게된다.

이때 학교교장에게 직접 개인 교습을 받았다 하니 쇼펜하우어는 부모님 찬스를 아주 잘 쓰며 자란셈이다.

그렇지만 찬스를 잘 썼다고 쇼펜하우어 전반적인 인생은 순조롭고 또 화려하게 살았던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는 부모님 찬스와는 별도로 당대에 손꼽는 천재중의 한명임은 분명한 것같다.

30세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세상에 내놓았고, 일찍이 당대의 최고 문학가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색채론 연구에 동참하라고 권유를 했다고 한다.

또 훗날 베를린 대학에서 강사를 하며 정반합 변증법으로 유명한 당시 철학계의 거두 이자 이성 철학의 최고봉인 헤겔보다 자신이 한수 위라고 생각 했다고 한다.

그만큼 자신의 천재성에 대해서 자부심이 대단한 양반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종종 말하는 시대를 앞서간 천재들중 쇼펜하우어도 그들중에 한명이었던것 같다.

당시의 명성은 헤겔에 비해 인지도가 거의 없었다고 하니...

늘 철학계의 비주류로 치부 되었지만 말년이 되서야 자신이 30세때 내었던 책들을 쉽게 대중적으로 다시 써내자 많은 사람들이 알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년에서야 비로서 주목을 받게 되고 사후엔 톨스토이, 바그너, 니체에 이르기까지 쇼펜하우어의 천재성에 탄복하게 된다.

 

 

이책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삶이 불쾌한가> 에는 쇼펜하우어가 정의한 '천재' 에 관한 고찰이 나온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직관한 이념을 예술 작품에 구현해 놓는 사람이 천재라 정의 한다.

또한 천재는 천재가 아닌 사람들도 직관을 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천재는 자신의 천재성을 눈앞으로 내보여 준다는 것이다.

대상이 문학이든, 미술 작품이든 혹은 음악이든 또 몸으로 하는 운동이든간에 그걸 사람들 앞에 내놓으면 일반 사람들은 천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놓은 결과물에 대해 공감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천재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통찰해서 전달함으로써 일반인들도 천재가 느끼는것을 그대로 느끼게끔 해준다는 뜻이다.

그래서 천재는 항상 통찰을 해야 하는 시간을 허비하느라 일반 세속적인 삶을 잘 영위하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이 말은 쇼펜하우어 본인이 천재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위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은 어찌보면 바보 같은 면이 있다고 하질 않던가?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천재라기 보다는 뭔가 항상 불쾌함에 찌든 괴짜 철학자 같은 분위기가 물씬 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라고 소개하는 사진을 보면 앞머리는 대머리이고 양옆의 부슬부슬 흰머리는 어릴때 로봇 만화영화을 보면 악당의 편에서 일하는 박사 같은 이미지.

염세주의자로 세간에 알려진 철학자라 나에게는 어쩌면 이번생에 그냥 영원히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철학자중의 한사람이였다.

최근 들어서야 이 사람 철학이 단순히 염세주의 철학이 아니란것을 알게 되었다.

이책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삶이 불쾌한가> 는 쇼펜하우어에 대해 이해 하기 좋은 책이다..

지은이 박은미님은 쇼펜하우어 철학의 입문자들이 쉽게 들어올수 있도록 구성을 잘 한것 같다. (그래 맞다. 달리 EBS 이겠나?)

책의 앞부분은 쇼펜하우어의 전반적인 사상과 철학에 대해 비교적 쉽게 설명되어 있고 뒷 부분의 원래 책을 보는데 참고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철학의 이정표' 란 제목으로 친절히 소개하고 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는 세계의 본질이며 이것은 이성으로 어떻게 해 볼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즉 세계는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며 의지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한다.

또한 의지는 고통을 유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지의 세계는 고통의 세계.

뭔가 비슷 하지 않는가?

 

 

불교의 일체개고(一切皆苦), 즉 일체가 다 고통이다.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자라는 소리를 듣는게 다 이것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불교가 허무주의 종교라는 오해를 듣는것 처럼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염세주의라는것 또한 잘못 이해된 면이 많다고 생각되는 지점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에 종속되지 말고 의지를 극복하는것으로 '동고(同苦)' 를 설파한다. 동고란 남의 고통을 남 아픔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이것도 불교의 자타불이(自他) , 나와 남은 둘이 아니다. 라는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즉 나와 남을 둘로 나눌때, 나와 상대를 분별할 때 그것은 의지의 작용으로 고통을 유발하지만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는 동고일 경우, 본래 하나라는 인식을 한다면 의지로 부터 자유로와 진다는 것이다.

 

즉 불교에서 뜻하는 보살의 경지를 말하고 있다.

 

이는 이책의 지은이 박은미님도 이와 같은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듭남' 의 상태와 불교에서의 '반야바라밀' 의 경지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척 공감이 가는 내용이라 그동안 세간에 오해 되어져 왔던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 철학자라는 오명을 씻을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특히 이책에서 동고(同苦)라는 개념을 접했을때 '토리노의 말' 로 유명한 일화를 남긴 니체(1844~1900)가 떠올랐다.

1889년, 니체가 죽기 10년전에, 니체가 토리노 라는 광장을 지나다가 채찍으로 주인에게 얻어 맞는 말을 보게 되었다.

주인의 모진 채찍질에도 꿈쩍도 안하는 말을 보고서 니체는 온몸으로 말을 끌어안고 울었다고 한다.

말이 채찍으로 맞는것이 마치 니체 자신이 맞는것 처럼 느꼈다는 것이다.

즉 니체는 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물론 니체가 당신 정신병을 앓아서 그랬다느니 택도 없는 소리라 무시할 수도 있지만.

니체는 젊은 시절에 쇼펜하우어 추종자중의 한사람 이었다.

지금은 니체가 쇼펜하우어보다 훨씬 대중적으로 유명하고 현대 철학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 하지만 당시의 니체의 정신적 스승들 중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지대했으리라 짐작된다.

 

내가 볼때 어쩌면 진정한 쇼펜하우어 철학의 완성자는 니체가 아닐까 싶다.

망치 철학자 니체에게 망치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스승.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헌책방에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만났다고 한다.

스승과 제자가 직접 만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책을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크나큰 영감을 받고 자신의 철학을 만들게 되는 동기가 되는 셈이다.

니체는 본래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단지 고전문헌학 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바로 교수로 임용된것이라고 한다.

그런 그가 철학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쇼펜하우어의 책 때문이다.

니체가 헌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책을 만나지 않았다면, 현대 철학에서 니체는 없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니체의 영역은 철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현대 종교, 문학,예술에 이르기 까지 니체의 철학은 세계를 뒤덥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다.

 

'청출어람이청어람(靑出於藍而靑於藍) '청색은 남색에서 나왔지만 남색보다 더 푸르다.

이렇게 이어지는 이 두사람의 인연도 참 아름답지 않는가?

같은 시대에 접접은 있었지만 둘은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인연.

 

니체를 오늘날 니체로 만들어준 인물.

그게 바로 쇼펜하우어가 아니었나 싶다.

 

 

쇼펜하우어는 그때나 지금이나 제대로 된 평가나 인정을 받지 못한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 더욱 쇼펜하우어에게 빠지게 되는것 같다.  

 

우울할 땐 쇼펜하우어를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벽에 붙은 서가에서
나는 쇼펜하우어를 꺼내본다
그는 이세상살이를 일컬어 ‘슬픔으로 가득찬 감옥‘이라 했다.
그의 말이 맞는다 해도 나는 아무것도 잃은것이 없다.
감옥의 고독 속에서
그 옛날 달리보처럼 행복하게
나 나의 영혼의 현을 깨우니까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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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이 필요한 순간들 (크리스마스 에디션) - 인생의 갈림길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법
러셀 로버츠 지음, 이지연 옮김 / 세계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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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 (인생의 갈림길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법)

러셀 로버츠 지음/이지연 옮김

<(그는) 영국 비글호를 타고 여행하며 77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일지를 쓰고, 1750페이지 분량의 기록을 남기고, 5436점의 동물의 가죽, 사체,뼈를 수집한... 따개비를 8년간 연구 한 사람, 마지막 프로젝트를 위해 지렁이를 29년간 실험한 사람 . >- P.44일부-

 

그는 바로 찰스 다윈(1809~1882)이다.

그를 상징하는 진화론의 등장으로 19세기 동안 서구 유럽의 근간을 지탱해온 일신교의 창조론적 신념 체계는 순식간에 허물어져 버렸다.

또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의 생물학을 토대로 생태학, 유전학, 생명공학, 뇌과학등 자연과학의 범주를 넘어선 다른 과학적 학문과 통합 연구를 진행 하면서 과학이란 학문 자체를 진화 발전 시킨 토대를 마련했다.

이제 과학은 일개 학문적 영역의 경계에서 벗어나 유일신을 대체할 만한 신흥 종교에 버금갈 정도의 위치로 어느새 올라와 버렸다.

또한 그의 업적도 갈수록 식을줄 모르며 지금도 과학계에는 수 많은 다윈주의 추종자가 생겨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대 과학계의 교주와도 같은 위상을 가진 다윈도 한때 인간적인 고민으로 심각하게 고려한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에 대한 문제였다고 한다.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다윈은 노트에 결혼을 한다 안한다 를 적어놓고 서로 비교하며 분석을 했었다는 것이다.

 

그가 당시에 썼던 글에는 결혼을 한다면 '동반자가 생겨 일단 외롭지는 않겠다' 거나 '함께 놀 상대로 개 보다는 나을것 같다', '여성과 수다를 떨수 있고 음악이 주는 매력을 얻을수 있고 자녀가 생기면 노후에 자신을 돌봐 줄수도 있겠다' 고 썼다.

하지만 그에 반해서 '자신은 아내를 즐겁게 해줘야 하는게 시간 낭비가 되고, 아내 친척을 방문해야 하는 수고와 시간 낭비, 자녀에 대한 걱정, 가족 부양을 위해 돈벌이를 해야 하는것, 사교 클럽에서 재치있는 남자들과의 대화를 못하게 되는점 등 자신 뜻대로 살수 없음' 에 무척 아쉬워 했다고 한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그당시 다윈의 황당한 생각에 어이가 없을정도 이지만 당시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한다.

다윈의 시대에는 남자는 독신으로 살아야만 위대한 업적을 이룰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했다고 한다.

아마 다윈도 자신이 위대한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독신을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진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윈의 사후 발견된 당시 일기에 쓰인 글에는 '결혼한다. 결혼한다. 결혼한다. 증명 끝.' 이라 적으며 그의 아내 '에마 웨지우드(1808~1896)' 와의 결혼을 선택 하고야 만다.

 

이책<결심이 필요한 순간들>에서는 이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다윈의 심각했던 고민,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에 대한 문제를 소개 한다.

또한 이 문제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 이기도 하다.

저자 '러셀 로버츠'는 세계적 석학의 반열에 오른 경제학자로 저자는 선택을 해야 하는 문제들, 즉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 특히 우리 삶에서 번번히 마주하는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한 성찰을 유쾌하게 담아냈다.

 

삶에서 만나는 수많은 답이 없는 문제들, 찰스 다윈이 고민했던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같은 문제나 이와는 반대로 이혼을 해야 하나 마나,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하나 마나, 아이를 가져야 하나 마나 등등, 내 앞에 놓인 선택의 갈래길에서 결심이 필요한 문제를 나열하자면 수도 없이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 인생의 굴곡점에서 전환을 맞이 하게 될 때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문제들.

하다못해 우리는 '오늘 점심에 뭘 먹을까?' 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던가?

그런 답이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항상 망설이게 된다.

수많은 위인들 조차도 예외가 없다. 그들도 그런면에서 우리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다.

결국 답이 없는 문제는 모든 인간에게는 필연적으로 안고 사는 문제 이기도 하다.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어떻게 결심해야 하는가?

 

경제학자가 쓴 글이니 경제학의 효용적인 측면을 다룬 비용과 혜택에 따르거나 공리주의 입장에 따르는 합리적 의사 결정을 하는 방법으로 답을 구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러셀 노교수는 그러한 경제학적인 이론들 가운데 답을 선택하고 싶지 않은것 같다. (이 또한 답이 없는 문제가 아닌가?)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경제학 이론으로 내세워 펼치지 않는다.

그는 의외의 담론을 펼친다.

 

"답이 없는 문제에서 최선 이라 할 만한것이 그 무엇이든 간에 최선을 찾아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최선의 반대말은 최악이 아니라 '그럭저럭 괜찮음' 이다.

따라서 우리는 삶을 보는 방식을 바꿔야만 한다.

즉 내가 삶이라는 합창에서 디바가 되려고 하지 말고 세상과 앙상블을 이룰 수 있도록 삶의 하모니를 즐겨야 한다.

자신만의 삶의 간결한 원칙을 세워 비용과 혜택을 고려하기 보단 원칙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

그러한 원칙을 두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열망하며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한다.

또한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를 고민하기 보단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더욱 늘릴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선택권이 많을 수록 인생에서의 경험과 좋은 인연을 만날수 있는 가능성의 지평을 더욱 넓혀준다.

삶은 불확실성을 통제하고 제어 하는게 아니라 경험하며 알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당신이 쓰면서 동시에 읽고 있는 한권의 책과 같다."

 

경제학자의 철학적인 대답에 어안이 벙벙하다.

그래서 어쩌면 이런 이유로 최재천 교수 추천사에서  '늘 곁에 두고 매일 아껴 읽고 싶은 책' 이라 했나 보다.

 

우리는 학창시절 부터 객관식 4지, 5지선답, 단답형 주관식 풀기에 익숙해져 있다.

모든 문제엔 반드시 정답이 있다는 생각이 머리속 깊이 박혀 있다.

문제집의 모르는 문제는 아는 사람에게 묻거나 혼자서 문제집 뒷면에 있는 정답과 풀이집을 보면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도서관의 수많은 책는 각종 이론서와 법칙을 내세운 책도 많고 자연계에 존재하는 물리학의 법칙 처럼 삶의 법칙도 존재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삶의 문제집엔 정답지가 따로 존재 하지 않는것 같다.

 

결국 노학자의 삶에 대한 조언은 경제학적 이론과 법칙을 넘어선 무언가 더 큰 심오한 진리를 담은듯 하다.

머리로 재고 따지고 분석 하지 말고 그냥 내 직관을 따르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짜피 내가 살아가는 삶에서 정답은 없다는 명제는 동의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남은것은 오직 선택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선택의 결과에 대해 좋다 나쁘다로 규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인생만사 새옹지마(人生萬事 塞翁之馬) 를 이렇게 이해 할 수도 있을 듯 하다.

 

결과적으로 다윈의 결혼은 아주 훌륭한 선택으로 증명 됐다.

아내 에마는 평생 다윈 곁에서 다윈의 연구를 도우며 훌륭한 아내이자 조력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다윈의 자식들 역시도 위대한 과학자인 아버지 연구를 도왔으며 각자 모두 당대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했다고 한다.

다윈이 결혼을 앞두고 쓴 일기장에 쓴 '결혼한다. 결혼한다. 결혼한다. 증명 끝.' 처럼 다윈은 자신의 인생 여행을 아주 훌륭하게 무사히 마쳤다.

 

 

 

'인생은 탐험과도 같은 여행이며 최고의 질문은 답이 없는 문제들이다' 라고 전하는 저자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열정과 깊은 통찰에 경의를 표한다.

내 인생 여행은 아직도 헤메고 있는 중 같다.

가다가 부딪히고, 순조로운줄 알았는데 막히고, 그래서 돌아가게 되고,

그래도 결국엔 나도 여행을 무사히 마칠수 있게 되리라 기대해 본다.

 

 

당신이 일단 미지의 세계에 뛰어들면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세로운 세상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으로 완전히 달라진 자신이다. - P47

어디에 사느냐는 내가 무얼 경험하게 되느냐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관한 문제이다. - P108

어떤 인생 문제들은 정답이 없다. 그래도 괜찮다.
삶은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일이다.
인생이란 지도 없이 지구를 행군하는 여행이다. - P143

당신이 얼마나 재치 있는 대화를 나눴는지를 음미하기보다는 다른 한 인간과 교류를 나누었다는 경험 자체를 음미하라. - P170

어느 의사 결정이 ‘본질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냐‘를 보여준다면 대가는 고려하지 말라. 자아감을 지키는 쪽을 선택하라.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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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마인드 - 내 안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생 전략
마이클 하얏트.메건 하얏트 밀러 지음, 임윤진 옮김 / 다산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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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초마인드 ( MIND YOUR MINDSET)

마이클 하얏트. 매건 하얏트 밀러 지음/임유진 옮김

안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생 전략

 

한계를 넘어선다. 거창하다.

그래서 제목으로 (: 뛰어넘을 ) 마인드(MIND: 정신/마음) 앞에 넣은것 같다.

책의 겉표지는 얼룩말이 주황색 열린문을 통과 하면서 표효하는 사자로 변한다.

니체는 사람의 정신 성장의 단계를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비유했었다.

낙타는 수동적인 인간의 상징이고, 사자는 삶을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사는 상징으로 비유했고, 나아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아마도 책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도 초식 동물인 얼룩말에서 백수의 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었나 보다.

제목과 표지 그림을 가지고 얼토당토 않은 확대해석을 하며 이야기를 만든가 싶겠지만 이책<초마인드> 바로 이런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경험과 기억, 지식을 사용하여 맥락을 연결 시키려는 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이 그렇게 주의를 줬지만 결국엔 선악과를 따먹고야 만다. 선악과를 먹고 나서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세상에서 분리되기 시작 했다.

아담을 찾는 하나님,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아담은 ' 여기 있습니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끄러워 숨어 있다' 답한다.

이때 부터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최초의 인간 아담은 갖은 이유를 대기 시작한다. 

이브가 뱀에 꾀임을 당해 선악과를 먹었다는 이야기와 자기도 이브가 줘서 먹게 되었다는 변명같은 이유를 줄줄이 말했다.

 창세기를 통해 알수 있는 점은 아담은 어떤 사실에 대한 설명보다 '?' 라는 해명을 우선시 다는 것이다.

인간의 구조에 대하여 우리 인간이란 원래 부터 해명을 하도록 창조 되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해명은 우리의 본능 이다.

해명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뇌속에 이야기를 만드는 '내레이터'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머리속의 내레이터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생성하는데 이야기는 우리의 경험과 기억등을 연결해서 맥락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뇌속의 내레이터는 우리의 기억과 경험을 연결시켜 추측을 하는데 본능적으로 우리는 불확실한것들 혹은 위험으로 부터 또는 불편함으로 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여기서 인간이 사용하는 추측은 직관일 때도 있고 이성을 통한 분석을 사용한 예측일 수도 있다.

직관과 이성은 서로 다른듯 하지만 결국은 우리의 생존과 보호를 한다는 면에서는 둘은 연결이 하다.

 

결국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를 못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나의 경험과 기억, 타인으로 부터 전해들은 정보를  종합해서 하나의 가설과 추측을 만들어 낸 것으로 마지막에 자신이 판단하는 의견에 불과 한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경험치를 쌓게 하고 이런 경험치는 부정적인 인식을 만들며 뇌속의 내레이터는 이야기를 부정적인 암시로 채워 우리에게 들려 준다는 것이다.

 

똑같은 환경일지라도 사람마다 경험을 통한 느낌과 감각은 다르다.

어떠한 사실에 대해 각자의 경험이 사실이라고 말할 지라도 결국 그것은 사실에 대한 의견이거나 가정 혹은 가설, 혹은 이야기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가 말하는 초마인드는 뇌속의 내레이터의 말을 귀담아 듣자는 주장을 하자는것은 아닌것 같다.

작가는 우리가 당면하는 모든 문제들, 삶에서 겪는 불편함들, 그러한 문제에 대한 뇌속의 내레이터에 이끌려 문제를 회피하거나 해결에 대해 포기 하지 말라고 한다.

작가는 부정적인 인식을 만드는 내레이터를 이용하여 우리가 맞딱드린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 수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방법으로 니체가 인간 성장의 단계를 3가지 단계 과정으로 제시 하였듯 우리가 당면한 모든 문제 해결 대하여 이책에서도 3가지 단계를 제시 하고 있다.

문제를 인식하기, 문제에 대해 질문하기, 문제를 재설계 하기.

 

첫번째 단계는 뇌속의 부정적 내레이터를 통해 문제를 인지한 , 문제에 대하여 부정과 회피를 하기 보다 정확하게 바라보는 인식을 한다.

두번째 단계에서는 인식된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있을지 질문을 한다.

질문에 대한 답은 조건이나 제한을 두지 말고 뇌속의 연결 고리를 이용하라고 한다.

어린 아이같은 천진난만한 의식으로 기존의 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질문하라고 조언한다.

세번째 단계는 마지막으로 뇌속의 뉴런 신경망을 새로 설치한다는 의미로 부정적인 한계와 의식을 확장하여 문제를 아예 새롭게 다시 인식하여 이야기를 새로 쓰자는 것이다.

부정적인 내레이터의 목소리를 3가지 단계를 거쳐 긍정의 목소리로 바꾸어 머리속의 다이몬들이 문제 해결을 있도록 의식과 무의식 모두를 활성화 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초마인드라고 작가는 주장한다.

 

책의 공동 저자 마이클 하얏트(아버지), 매건 하얏트 밀러() 자신들이 제시한 초마인드 단계를 통해 자신들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과정을 책속에 담아냈다.

 

그들이 예시로 문제점은 아버지 마이클은 회의시간에 자신의 리더쉽이 부족 했다는 지적을 받았다거나, 매건은 대중 연설에 대한 공포심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내가 때는 그들의 문제를 가지고 초마인드 단계로 설명하는데는 임팩트가 부족하지 않나 싶다.

 

거창한 제목과는 달리 예시로 내세운 자신들의 경험이 작게 느껴져 좀 더 경험의 폭이 넓은 예시 었었다면 을까 싶었다.

오히려 17 암벽 등반가 ' ' 등산 사고로 양다리를 절단한 불행을 극복하고 더욱 각성하여  다시 재기한 일화가 초마인드라는 주제를 설명하는데 공감이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최근까지 연구된 과학을 기반으로 내레이터를 재설정 있다는 주장, 창의성이란 '무에서 유를 만드는것' 아니라 기존의 경험과 기억의 연결 고리를 이어서 새롭게 의미를 만들어 내는데서 나온다는 주장등 책에는 곱씹어 만한 내용들이 많다.

 

' 없다. 된다. 망했다'   마음속의 내레이터의 부정적인 속삭임으로 비롯된 이야기에서 벗어나서 재입력하여 ' 있다. 것이다. 성공 한다' 인생 이야기로 다시 새롭게 쓰고자 한다면  이책은 일독 만하다.

 

내레이터는 다른게 아니다. 생각을 말한다.

부정적인 생각도 '' 에게서 나왔고 긍정적인 생각도 ' ' 에서 나왔다.

(): 뛰어넘는다는 것은 기존의 고정된 관념을 벗어나라는 뜻이다.

결국  한계는 내가 만든것이고 한계를 넘어서는 것도 내가 하는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것은 용기 뿐이다.

초마인드는 한마음 이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 P27

과거의 기억이란 사실의 기억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당신의 상상에서 비롯된 기억이다. - P77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 P103

제가 다리를 잃은 것이지 생각이나 정신을 잃은것이 아니잖아요. - P107

우리의 목표는 우리가 더 나은, 그리고 더 힘이 나는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 P108

이야기를 새로이 만들어낼 때 핵심은 꾸준함이다.계속 실험하고 반복하면서 획득한 피드백을 활용해 시고를 좀 더 정교하게 만들자....중략...
실험적 마음가짐은 증명하려는 욕구가 아니라 발견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 P217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과학은 원래 주관적이다.....중략..... 과학의 개인적인 부분은 주관적이라 할 수 있지만 대중과 접촉해야 하는 외적 부분은 개관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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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계 -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동서고금의 통합적 접근
켄 윌버 지음, 김철수 옮김 / 정신세계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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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무경계 ( No Boundary)

켄 윌버 지음/김철수 옮김

 

 

 

그리스 델포이 신전 기둥 벽에 세겨졌다는 글귀이자 아테네 거리에서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구하는 당시의 그리스 청년들에게 툭툭 던졌다는 말, '너 자신을 알라' .

이때 '너 자신을 알라' 고 전해 들은 대화 상대는 문득 자신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

그리고는 '나' 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 '나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나라 선불교의 화두중에 가장 대표 되는 공안, '이 뭐꼬?' 가 있다.

한자나 중국어로는 '시심마(是什么 쓰션머)' 즉 '이것은 무엇인가?' 라는 뜻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라는 화두가 선방에 계시는 경상도 스님들의 사투리로 '이 뭐꼬' 로 굳어져 버렸다.

지금 현재, 여기에서 보고 듣고 말하고 있는 이것은 무슨 작용인가?

무엇이 있어 나를 이끌고 다니는가?  무엇이 나를 이끄는가? 이게 과연 무엇인가?

이는 곧 '나는 누구인가?' 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 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영원한 화두이자 풀어야 할 숙제 처럼 느껴진다.

인류가 생겨난 이후 수 많은 철학적 논쟁과 종교와 영적인 차원, 그리고 오늘날 과학에 이르기 까지 '나' 란 존재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선뜻 내놓기가 어렵다.

어쩌면 지구상의 인간이 80억명이라면 80억개의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주관적이기도 해서 만약에 보편적이고 타당한 대답을 원한다면 우리의 철학, 종교, 과학은 아마도 서로 일치된 견해를 내놓기가 어려워 보인다.

 

철학은 나에 대하여 존재와 실존을 연결하여 설명 할 것이고, 종교는 나와 신성을 연결해서 설명 할 것이고, 과학은 생명의 기원과 유전자를 연결해서 설명할 것이다.

 

 

 

이 책 <무경계> 에서 켄 윌버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명제에 대한 동서양 철학, 심리학, 종교와 영성에 까지 이르는 광대한 분야를 하나로 귀결시키는 통합을 시도한다.

 

그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의식의 영역과 그에 상응하는 심리학의 각 분야를 스펙트럼화 시켜 명제에 대한 답을 자신만의 통찰으로 내보이는 작업을 한 것이다.

 

먼저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모든 답은 정확히 '나인 것(self)'과 '내가 아닌 것(not-self)' 사이에 경계선(Boundary)을 긋는 기본적인 절차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나/ 나 아님' 의 경계는 '나의 피부 경계선' 으로 나누어 진다고 한다.

이런 표현은 생소하지만 '나'는 내 피부 경계선 안에 해당되는것이고 '나 아님'은 내 피부 밖이라는 표현은 참신하다.

또한 경계는 선()을 의미하고 선은 구분과 분별을 뜻하며 이는 확장시키면 곧 전선(戰線) 과도 같아 경계는 '나/ 나아님' 의 투쟁의 상징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란 정체성은 내가 어디에 그 경계선을 긋느냐에 따라 달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정체성은 하나가 아니며 수준에 따라 각기 다른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그게 바로 정신 의식의 스펙트럼이자 이 책의 핵심을 관통하는 내용이다.

나/ 나 아님에서 출발한 의식은 '에고' 또는 '자아상'을 정체성으로 하는 페르소나와 그림자로 나뉘게 된다.

페르소나는 가면이란 뜻의 '외부로 드러난 인격'을 말한다.  '나' 가 페르소나의 일부를 자신과 동일시 하면 나머지 '나가 아님' 은 그림자로 나뉘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수준을 페르소나 수준이라 정했는데 페르소나 수준에서는 나 아님을 상징하는 그림자는 페르소나와 대립이 되는 관계로 나와 저항을 하며 경계를 긋는다는 것이다.  즉 저항은 경계를 상징한다.

 

이러한 저항은 페르소나, 자아수준, 켄타우로스 수준 까지 이어지는데 그림자, 몸, 환경 ,초개아 순으로 계속 존재하며 각각의 다른 수준에서 저항을 수용 하게 되면 경계는 무너지고, 즉 저항이었던 경계가 없어지면 계속해서 의식의 스펙트럼은 확장을 하게 된다.

작가가 고안한 의식의 스펙트럼 도표를 보면 보다 쉽게 이해가 되는데 결국 작가는 인간의 의식 수준마다 각기 다른 경계가 있고 이는 곧 저항을 뜻하며 이러한 경계가 결국은 없어지게 될 때 의식은 확장한다는 것이 요지가 된다.

 

 

 

 

도표를 보면 위에서 출발하여 아래로 향하는 하향으로 표시를 했는데 이는 각 수준 의식의 대립이 무너질 수록 작가는 더 깊어지는 것이라 본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의식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점점 내려 가는 하향으로 표시를 한 것 같다.

 

켄 윌버는 이러한 경계를 실제하는 것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것이라 봤다.

선과 악,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 쾌락과 고통, 가치와 상실, 자기와 타인, 사랑과 증오, 낮과 밤에 이르기 까지 모든 한쌍의 대극은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게 되는데 부정적인 면을 근절 시켜야만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떠한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건에 대한 양극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대극은 암묵적인 동일성을 공유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양극은 결코 분리할 수 없으며 상호 의존적이 되는 것이며 결국 이런 경계는 사실은 없다는것, 결국 선불교적 표현으로는 둘이 아니라는 것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 시간과 공간 또한 서로 잘 짜여진 통합체 이자 하나의 연속체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물리학의 실제에 대한 대극의 일치와도 상통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켄 윌버는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경계는 결국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것이다.

결국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의식의 스펙트럼의 수준에 따라 답은 수준별로 다르게 답할수 있으며 그 수준이 깊어짐에 따라 결국은 '합일의식' 이라는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이는 철학적이며 영적인 수준에서 접하게 되는 현자들의 모순 처럼 보이는 수많은 답들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다.

하지만 이는 곧 수준별에 따른 답이 되므로 그런 모순되어 보이는 답들이 사실은 틀리지 않다는 작가의 의견에 공감을 할 수있게 된다.

 

우리는 시간의 존재를 넘어 오직 '스쳐가는 현재( 눙크 플루엔스)' 에서 '영원한 현재( 눙크 스탄스)' 로 확장되는 순간이 될 때 결국엔 합일의식의 본질, 무경계에 도달하며 여기에서 진정한 나를 만나게 되리라 내다봤다.

 

이러한 작가의 통찰은 작가가 불과 23세(1977년)때 발표한< 의식의 스펙트럼> 이라는 책을 통해 이루어 졌는데 약관의 나이에 동서양을 넘나들며 학술적으로 자신만의 통합적 사상을 전개 했다는데 놀라운 면이 있다.

 

켄 윌버, 나에게는 생소한 이름의 영성 철학가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인류 의식의 발달과 진화에 대한 통합이론의 사상가 였다.

책에는 작가의 사상을 형성한 수많은 심리학과 의학, 정신 계발 서적들에 대한 추천이 있다. 

그런데 추천한 책들은 60~70년대 책들이라 이미 절판 되었거나 아마도 현대 심리학과 의학의 발전, 정신 분야의 진화에 따라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부분도 분명 존재 하리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작가가 책에서의 내세운 내용이  50년이란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지금까지도 수정된게 없을 정도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켄 윌버는 그 당시 이미 세상과 인류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냉정한 시각으로 본다면 작가의 동서양을 아우르는 학술적인 통합적 통찰은 경탄을 하지만 깨달음에 대한 부분은 본인의 체험이 아닌 알음알이로 깨달음을 이론화 시킨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떠오른다.

 

물론 깨달음은 각자의 영역이다.

켄 윌버의 의식의 스펙트럼 처럼 깨달음의 영역도 분명 스펙트럼 처럼 존재하리라 생각된다.

아마도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언급하면 '십지보살'이니 '여래지' 를 언급하면서 단계별, 수준별로  깨달음을 철저하게 분류를 하고 있다.

아직은 그의 사상에 대한 다른 책을 읽어 보지 못했지만 이미 확보한 <통합불교>, <모든 것의 역사>를 계속해서 좀 더 읽어 본후 판단해야 겠다.

 

다만 그가 지금으로 부터 반세기전에 70년대에 이런 사상을 내세운것은 분명 놀랄만한 업적인 것임에는 확실하다.

그래서 켄 윌보가70년대에 이 책을 쓴 배경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미국의 60년대 후반에서70년대는 그러한 의미에서는 독특한 시대인것 같다.

69년도 미국은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하며 인간의 작은 발자국을 남기지만 인류의 위대한 도약을 하게 되는 시기를 맞이한 시점이다.

하지만 이시기 미국은 베트남에서 명분도 없는 전쟁에 대한 당시 젊은이들의 반전의식과 정신적인 방황은 반항으로 이어져 히피즘 문화가 최고저에 이르렀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처럼 미국은 2차 대전이후 세계의 초강대국 반열에 들어섰고 전세계를 마음먹은대로 움직일수 있는 물질문명이 가장 발달한 국가 였었다.

그런데 반대 급부로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공황을 맞이한 시기 이기도 했다.

히피즘의 자유와 반전사상은 70년대 넘어 오면서 약물의 남용및 사상은 급진 과격적 성향으로 변질이 되어 버리고 그에 따른 비판과 재제를 맞이 하게 되었다.

 

결국 이시기의 히피즘의 정신적인 방황은 동양적인 요가나 불교 사상에서 극복하고자 한 시도가 보이기 시작 했다.

즉 방황의 시기 동양의 사상은 서구 물질문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바라봤다는 것이다.

때마침 영화계에는 '브루스 리(이소룡)'의 등장으로 서양인의 동양인과 문화에 대한 경계가 점차 옅어지는 시점의 출발이 된 게 아닐까 싶다.

 

또한 이시기 불교가 종교가 아닌 명상의 한 분야로 점차 확산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선불교는 60년대 부터 시작해서 샤쿠 소우엔('나스메 소세키' 의 선 스승) , 스즈키 다이세쓰(선을 일본식 발음 '젠Zen'이란 명칭을 사용) , 스즈키 순류('스티븐 잡스'의 선 스승) 로 이어지는 선사들이 미국에 알려 지면서 '젠(Zen)' 의 열풍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때 이어진 일본의 젠불교는 하나의 문화로 미국내 대중적으로 자리 매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는 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숭산 스님께서 도미(渡美)를 했는데 이때 일본의 젠불교는 우리나라 선()불교가 들어서는 교량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무경게>에 소개된 선사상은 스즈키 순류의 <선심초심>을 많이 참조했다고 켄 윌버는 밝히고 있다.

(다만 참조한 일본 선불교가 전체 선불교를 대표 하는것 같아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면이 있다. 아직 중생심이 남아 있으니 이것 조차 둘로 보는 것이라... )

 

결국 70년대 시기는 물질문명의 한계와 동양 정신문명의 대안의 전환기라 볼 수 있을듯 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에서  켄 윌버의 사상을 이해하면  약간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건 지극히 내 생각이다. (아무 하등의 관계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오늘날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 현상이라고 본다.

정치, 경제, 환경 분야등 모든면에서 양극화로 분열하고 나뉘고 있다.

하지만 통합이란 본질적인 열망도 양극화라는 틀 가운데 본래 함께 하고 있는듯 하다.

이미 수많은 학문의 경계도 무너지고, 계층 세대간의 벽도 무너지고, 수많은 고정 관념의 경계도 동시 다발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분열과 통합은 결국 둘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하나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파도가 아무리 많이 쳐도 결국 바닷물에 불과 한것이다.

그 바탕은 한 바다 였다.

 

 

 

 

이책 <무경계>에서 제시한 통합이란 관점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성찰과 함께 현대 사회의 양극화라는 문제점을 해결 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결국 둘이 아니다.

본래 경계는 없다.

No Boundary.

 

성장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지평(地坪)을 확대하고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 P45

창세기에 따르면, 아담에게 부여된 첫 번째 과제는 자연계에 속하는 동식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다...중략...
그는 다양한 동물 집단 사이에 마음속에서 ‘경계를 긋는‘ 일을 배워야만 했다....중략...
마음속에서 구분 짓고,도식화한 것은 바로 아담이었다. 아담은 최초의 위대한 지도 제작자였다. 아담이 경계를 그려냈다. - P49

경계란 본래 환상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66

당신이 가진 유일한 도구가 망치일 경우, 모든 것은 못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사실 당신은 실제로 경계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경계를 만들어 낼 뿐이다. - P86

‘초월적 나‘를 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무슨 수를 써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당신의 눈은 자신의 눈 자체를 볼 수 있겠는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자신의 기억, 마음, 몸, 감정, 사고와의 잘못된 동일시를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깨는 일뿐이다. - P228

본증묘수(本證妙修)는, 진정한 영적 수행이란 ‘깨달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으로부터‘ 샘솟아 나오는 것임을 뜻한다.수행이 합일의식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수행은 처음부터 사실상 언제나 합일의식이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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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 대승기신론 낭송Q 시리즈
마명 지음, 김혜영 옮김, 고미숙 기획 / 북드라망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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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낭송 대승기신론

마명지음, 김혜영 풀어 읽음, 고미숙 기획 , 출판사 북드라망

 

중고등 역사시간에 무엇에 대한 답 인지는 모르겠지만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란 명칭이 몇십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왜 아직도 머리속에 남아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나라를 빛낸 위인들 하면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신라 시대 원효 스님.

해골물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았다는 일화 ,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와 요석공주와의 러브 스토리,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 설총 이야기등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원효 스님이 무슨 업적을 남긴건지는 대부분 모른다.

그냥 '원효는 대승기신론소를 남겼다'  는 역사 교과서의 한줄만 머리속 어딘가에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이책 <낭송 대승기신론>은 세월이 흘러도 머리속에 남아 있던  궁금증을 풀어줄 책이다.

대승기신론은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궁금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를 지은이는 마명 이란 AD150 년 경에 살았던 시인이자 스님이라 한다.

원효대사가 지은게 아니었다.

원효스님은 마명 스님이 쓴 대승기신론에 소 ()를 붙였는데 이는 곧 대승기신론의 주석서이다.

그렇다면 책에 주석을 달아 놓는게 그게 무슨 대단한 업적이라고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것일까?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실 주석을 단다는게 지금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문제가 아닌것 같다.

조선 성리학에서는 공자의 유학 경전에 주석을 단 주자(朱子)를 거의 공자님 반열에 올려 놓지 않았던가? 그래서 주희의 주석에 대해 다른 해석을 용납하지 않았고 만에 하나 주자의 해석에 비판이라도 가하는 자는 바로 이단이나 사문난적(斯文亂賊: 학문을 어지럽히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도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예전시대에는 주석이란게 참으로 중요했었나 보다.

그렇다면 주석서를 달 정도의 원작은 분명 쉽게 이해 되지 않는 난해한 수준일 것이다.

아마도 주석서를 달 정도의 수준이 되려면 원작자의 사상을 완전히 이해한 상태에서  출발 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원작을 처음 접한 독자나 이해가 안가는 독자를 이해 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그 수준에 맞게끔 재해석 해내야 한다.

그러니 주석서를 단다는 것은 원작의 이해를 넘어선 경지에 들어서야 한다.

그렇다면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는 대승기신론의  어떠한 위치에 오른 주석서 일까?

이책은 마명의 대승기신론과 원효가 주석을 단 대승기신론소와 별기 일부를 함께 읽을 수 있게 되어있다.

대승(大乘)은 대승불교 소승불교를 나눌때 쓰는 그 '대승' 이다. 즉 큰수레라는 뜻을 가졌다. 마명은 대승은 곧 일체 중생으로 보았다. 일체 중생의 마음. 그 마음이 한마음(一心)이라는 것이다.

기신(起信)은 믿음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혹은 믿음을 세운다. 논()은 논의 하다. 즉 조리 있게 따져서 말한다. 정도로 해석 할 수 있겠다.

즉 모두 합쳐 이해 하자면 '한마음을 믿는 마음을 일으키는 논' 이다.

마명은  대승, 즉 한마음은 두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 진여는 우리 본성품을 말하고 생멸문은 나고 죽는 생사로 나타내어 지는 현상을 말한다.

즉 철학으로 따지면 본체와 객체로 나눌 수 있고, 본질과 현상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진여문과 생멸문을 통해 한마음을 믿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설명한 책이 바로 대승기신론이 되는것이다.

쉽게 표현하면 '일심이문(一心二門)'  이 핵심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뭐야? 대승기신론이 이렇게 쉬운것 이였어?

설마 이렇게 이해가 되는것을 원효스님이 다시 주석을 달았다면 이런 나의 이해가 틀린것일까? 뭔가 더 심오한 내용이 있는게 아닐까?

그렇다.  더 심오하다.

그런데 틀린것이면서 틀린게 아닌게 된다

진여문과 생멸문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여문과 생멸문이 둘이 아니고 그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처음 깨닫게 되는 시각(始覺), 확연히 깨달은 본각(本覺), 그리고 깨닫지 못한 불각(不覺)' 으로 나뉘어 지지만 사실 이 세가지 깨달음이 서로 의존하며 다르지 않다고 설하고 있다.

왜 그렇게 될까?

깨달음의 경지는 그 근본이 같기 때문에 가능한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그 경지는 깨달음이라는 물 맛을 봐야 알 수 있다.

그래서 원효스님과 같이 유학길에 올랐던 의상(義湘) 조사의 법성계(法性界)에는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즉 '깨친 지혜로 알 일일뿐 다른 경계로 알수 없네' 라고 하지 않았던가?

대승기신론의 둘이 아닌 경지에 대한 거듭되는 논의는 원효 스님이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은 경지, '일체 유심조' 사상, 즉 '모든것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는 근본 사상과 상통한 면이 있다.

그러니 원효스님은 자신이 깨달은 바가 마명 스님의 전하는 대승기신론의 논지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알고 그에 대한 주석서를 달아 놓게 된것이 아닐까 싶다.

원효 스님의 주석서 '대승기신론소' 는 후에 중국과 일본으로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 스님들이 인도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업적을 가지고 있다면 한국 스님은 그 번역을 토대로 다시 원래 인도 불경의 참뜻을 이해를 했다고 볼수 있다.

즉 붓다의 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선()이다.

다만 일본은 한국과 중국을 통해 그저 겨우 수입해서 자신들이 따라 하는 수준 정도 였다고 볼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일본을 비하하는것은 아니고 물론 이건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불경은 부처님 말씀을 문자로 표현 한 것이고 그 문자 이전의 마음을 우리 조상 스님들이 알았다면 그건 깨우침을 통해서 알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부처님 열반이래 깨달음의 불빛이 꺼지지 않고 인도와 중국으로 전해지는 것을 전등(傳燈)이라고 표현 하는데 깨달음의 경지가 결국 우리나라 까지 전해져 온것은 참으로 희유한 일이 아닐수가 없다.

오직 깨친 눈밝은 사람만 알아 볼수 있는 경지.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

아직 그 경지는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모르는 나(불각) 가 바로 진여의 작용이고, 그 진여는 생멸과 다르지 않다고 대승기신론은 설하지 않는가?

그러니 무엇이 걱정인가?

오직 지켜 볼 뿐이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고 선방(禪房) 스님들은 표현 하신다. 원래 공부는 목숨을 다해서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전 선사들은 매달린 벼랑 끝에서 손을 놓는 마음으로, 잘 벼린 칼 끝에서 서있는 마음으로 공부를 했다고 한다.

'부처님 마음과 중생의 마음이 둘이 아니라고' 했듯이 바로 '내 자신이 바로 부처이고 그 것을 믿는 마음을 일으키는것' 그것 이야 말로 대승기신론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인 아닌가 싶다.

그래서 법성계에선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變正覺: 처음 발심하는 마음이 바로 바른 깨침을 이룬 때이다)이라고 한것 아닐까?

그것이 바로 불각(不覺)이 시각(始覺)으로 변하고 다시 시각이 바로 본각(本覺), 즉 정각이 되는 경지인것이다.

이 세가지 깨달음이 결국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낭송하고 또 낭송해야 겠다.

마명 스님이 전하고자 하는 마음과 원효 스님의 간곡히 다시 전하는 마음이 내 마음속에 훈습(훈습: 연기에 스며 들듯 천천히 젖어 들게 되는 )이 되도록 ...

모두가 한마음 이다.

 

 

이 논은 간략한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붓다의 넓고 크고 깊은 가르침을 모두 담았다. 그런 까닭에 이 논을 지었다. - P26

불각 이라는 망상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름과 의미를 분별하여 참된 깨달음(眞覺)에 대해 말할 수 있다. - P45

만약 여러 불보살과 선지식 등 외부에서 그를 돕는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드는것은 불가능하다. - P72

삼매에 들면 존재의 근본이 하나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모든 붓다의 법신과 중생이 평등하여 둘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 P123

이 글을 쓰는 것은 중생이 의심을 없애고, 잘못된 집착을 버리고, 대승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일으켜서 붓다의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리기 때문입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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