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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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체호프 단편선

지은이: 안톤 체호프/ 박현섭 옮김

 

 

러시아 대문호(大文豪)하면 항상 언급되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푸시킨 같은 작가들의 명성은 이름부터 듣는 사람 기를 죽인다.

<전쟁과 평화>, <죄와 벌>,<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처럼 제목은 알지만 막상 책을 대하면 바로 읽어보길 포기하는 고전 문학 작품들.

그래, 책 제목만 봐도 머리가 아파지는 고전을 읽지 않아도 인생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지.

나는 그렇게 소위 러시아 대문호 작품은 제목만 아는 수준으로 거의 반평생을 보냈다.

 

 

 

그러다 나이를 먹고 독서를 하다보니 여기 저기 접하는 책속에서 러시아 작가나 작품들의 내용이 인용되거나 언급이 되어진다.

몰라도 되지만 막상 알면 더 좋을것 같은 생각들.

약간의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들의 작품이 왜 위대한 고전 인지를 이해 할 수 있는 시기가 된 것 일까?

 

 

 

그렇게 나는 이제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러시아 작품을 제대로 만나게 되었다.

(비록 단편 소설이지만....)

곧바로 러시아 대문호 작품은 부담이 되고 비교적 쉬워 보이는 단편소설 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선택한 체호프 단편선. 작가는 안톤 체호프.  

안톤 체호프의 명성은 앞서 언급된 대문호 만큼은 아니지만 단편소설계에서는 세계 3대 단편소설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사실 안톤 체호프(1860~1904) 에 대해서는 이번에 읽은 단편소설 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된것은 아니다.

4년전 '로버트 그린' <인간 본성의 법칙:위즈덤 하우스> 이란 책에서 언급된 안톤 체호프에 대한 내용을 먼저 접했었다.

 

 

 

로버트 그린의 <인간 본성의 법칙> <권력의 법칙>, <유혹의 기술>같은 책과 함께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대판 마키아벨리라는 칭호로 소개되기도 한다.

로버트 그린의 책들에는 많은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만의 스토리 텔링으로 역사속의 주인공과 사건들을 통해 자신이 의도하는 주제의식과 그 의미를 해석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것 같다.

<인간 본성의 법칙>에 등장하는 '안톤 체호프' 에 관한 챕터를 보면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보다 깊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860(쇼펜하우어가 사망한 해), 러시아 남부,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위치한 항구도시 '타간로그' 태생인 체홉은 집안 대대로 농노 신분이 였다고 한다.

체홉은 위로 형이 2, 아래로 남동생 2, 여동생 2명중 세째로 자랐다.

농노라는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 할아버지때 부터 조금씩 돈을 모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때에는 잡화점을 운영하다 빚만 잔뜩 졌버렸다.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언제나 체홉을 비롯한 형과 동생들에게 체벌을 가했다. 심지어는 아이들 엄마까지 학대를 했다.

그러다 체홉의 위에 형 2명 모두가 모스크바 대학으로 진학을 하게 된다.

반면에 아버지는 빚에 더욱더 쪼들리게 되자 모스크바로 혼자 도망을 쳐버린다.

체홉을 비롯한 나머지 가족, 어머니와 동생들은 타간로그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신이 살던 집은 남에게 홀라당 넘어가 버리고 어머니와 동생들은 체홉만 남겨둔체 형들과 아버지가 있는 모스크바로 떠나버린다.

체홉은 당시 16살로 가족 모두 떠난 타간로그에 홀로 남아 자신의 학업과 생계를 위해 고학을 하게 되었다.

 

 

 

타간로그에 홀로 남은 체홉의 이시기는 체홉의 인생에서 마주한 시련의 시기였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자신의 미래를 바꾸는 토대가 되는 시기가 되었다.

이 시기 체홉은 철저한 고독의 시간속에서 삶에 대한 각성을 이룬것 같다.

홀로 남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떠나버린 가족들, 그 가운데서 이 모든 상황을 객관화 시켜 다시 내면의 눈으로 돌아보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것만 같았던 아버지를 마음으로 용서했고 또한 자신에 주어줬던 운명의 굴레를 체홉은 스스로 벗어 던져버렸다.

 

이시기 체홉은 타간로그에서 홀로 서기를 통해 운명을 바꿔 버렸다.

체홉은 그 이후 모스크바 의과 대학으로 진학을 하게 되면서 가족과 다시 상봉을 했다.

 

 

 

하지만 체홉의 가족은 모스크바의 빈민촌에서 오히려 타간로그 시기 보다 더욱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대학을 다녔던 형들은 노름빚과 술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고 아버지는 여전히 술에 찌들어 있었다.

여전히 폭력에 시달리는 어린 동생들과 어머니에게는 하루 하루가 희망없는 삶이였다.

 

 

 

체홉은 이런 비참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가 가장의 역할을 떠맡았다.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학업과 더불어 자신이 할 수 있는일을 찾기 시작했다.

특히 단편소설과 희곡을 쓰는 작업은 본격적으로 이 시기 부터 시작되었다.

아주 적은 원고료를 받으며 여러 잡지사에 열성적으로 글들을 투고 하게 된다.

이 글들이 오늘날 남아 있게된 체홉 초기의 작품들이 되었다고 한다.

 

 

 

체홉은 빈민촌에 살며 절망과 우울에 빠져 있는 집안 분위기를 점차 바꾸기 시작했고, 마침내 체홉 가족 모두를 물질과 정신적인 면에서 '구원(救援)' 하게 된다.

체홉 자신은 의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졌지만 작가로서 명성이 더 높아지자 의사 보다는 작가라는 직업에 더 매진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 속에 나오는 의사는 체홉의 또 다른 분신 일 정도로 생생한 묘사를 살렸다.)

 

 

 

체홉에게 글쓰기는 자신을 향한 '구원' 이지 않았을까?

체홉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간 군상들, 특히 사회적 신분이 낮은 서민 계층이나 빈민층의 생활을 체홉은 누구보다 여실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본인은 그들이 우울한 현실을 벗어나는 방법을 누구 보다도 더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체홉이 세상을 떠나기 몇해전, 작가적 명성과 더불어 문학계에서는 체홉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일쌈았다.

이때 환멸을 느낀 체홉은 당시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사할린을 여행하기로 결정한다.

그 이전 부터 폐결핵을 앓고 있던 체홉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지인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결국  당시에 지옥이라 불리던 사할린으로 떠나게 된다.

(모스크바에서 사할린은 극동에 속하며 중간에 혹독한 시베리아 벌판을 거쳐야만 한다.)

 

 

체홉은 사할린에서 교도소 죄인들, 특히 살인으로 수감중은 범죄자들과 그의 가족들을 인터뷰하고 또 사할린 섬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그의 이런 현장 체험은 훗날 <사할린 섬>이란 책으로 나오게 된다.

체홉의 <사할린 섬> 책은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이후 사할린 섬의 여건이 상당부분 개선 되었다고 한다.

(안톤 체호프 책<사할린 섬>은 우리나라에도 출판 된적이 있지만 , 현재는 아쉽게도 절판된 상태이다. 중고거래 가격이 엄청나다.)

 

그 이후 체홉의 폐결핵은 더욱 심해졌다.

1904년 겨울, 시골에서 썰매가 타고 싶었던 체홉은 자신의 의지대로 썰매를 타고나서 결국 46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만다.

 

 

 

안톤에게 글쓰기는 곧 '구원(救援)' 과 같은 의미로 생각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글쓰기의 원동력은 밑 바닥 계층의 암담한 현실에서 시작 되었다.

불교에서 '연꽃은 진흙속에서 핀다' 고 전한다.

안톤에게 진흙은 우울하고 비참한 현실, 즉 다양한 중생들이 사는 현실이 아니였을까?

 

 

 

농노라는 신분이지만 나름의 음악적 재능을 가졌던 아버지, 하지만 농노라는 신분을 결국 극복하지 못한 체념속에서 아버지가 할 수 있는것은 술 먹고 화내는 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족들을 힘들게 했던 아버지를 안톤이 어린 나이에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벗어나지 못했던 이런 업의 굴레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안톤에게는 용서하지 못할 아버지나 바꿀수 없는 환경이 문제가 되질 않았다.

소설속에 나오는 수많은 캐릭터 처럼 아버지와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인간 군상들의 운명은 고정 되지 않다는것을 이미 꿰뚫어 보았던 것은 아니였을까?

그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연민은 그의 글에서는 위트와 유모로 승화 되었다.

 

 

 

이처럼 안톤의 글을 통한 구원은 그 자신과 가족, 세상을 향한것이었다.

이것이 안톤의 단편 소설과 희극속 작품에 깔려있는 안톤만의 구원의 방식이 아니였을까 싶다.

안톤식의 구원, 그의 작품속에 그만의 '구원의 힘' 이 담겨 있다.

이제는 안톤 체호프가 남긴 작품들을 시간이 되고 기회가 된다면 틈틈히 읽어볼 예정이다.

나 또한 안톤이 그랬던 처럼, 책을 통해, 글을 통해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원(求原)하는 힘이 생기길 바란다.

 

<救援이 求原이 되길 바라며>

 

 

" 이 젊은이가 자기안의 노예근성을 한 방울 한 방울 모두 짜내서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깨어 더이상 자신의 혈관을 흐르는 피가 노예의 피가 아닌 진짜 인간의 피라는 것을 발견하는 이야기를 글로 쓰려고"

(안톤 체호프가 친구에게 전하는 편지 글에서)<인간 본성의 법칙 P.336>

나는 그대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기 위해,내가 한때 천국을 꿈꾸듯 갈망했으나 이제는 하찮게 보이는 200만 루블을 거부하겠다.
<내기 중에서> - P147

이 무시무시한 뜻밖의 소식은 클리모프의 의식 속으로 온전하게 전달되었지만 그것이 아무리 무섭고 강력한 것일지라도 회복기의 중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동물적인 기쁨을 이기지는 못했다.
<티푸스 중에서> - P160

"제가 침을 튀겼습니다. 각하..... 용서하십시오. 전 그저...... 다만......."
<관리의 죽음 중에서>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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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3 월28

제목: 지켜본다

 

 

지켜보는걸 놓치지만 않는다면

뭔가 힘이 생길것만 같다.

해결이 되는 힘.

 

 

어제 유투브를 통해본 혜자스님 법회.

어느 처사님이 하루동안 마음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지켜봤다는 일화를 듣고

나도 따라 해본다.

 

 

얼마나 지켜 볼수 있을까?

금방 딴 생각, 정신을 한곳에 모을수가 없다.

의식들의 본성은 원래 흩어지는게 아닐까?

쉽지 않다.

 

 

몸속의 의식들이 알아서 이끌어 주는게 아니라

내가 마음을 잘 내야 알아듣고 움직여 준다는

큰스님 법문 구절.

 

 

돌려 놓고, 지켜보고

오직 그거 하나만 하는건데도

아직도 힘들다.

번번이 무너져 버리는 심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보는것 하나만 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용을 쓰면 용을 쓴 만큼

어제까지 우울한 기분과 주위의 상황이

밝아져 보인다.

 

 

과연...

 

지켜보는 것은

돗보기 렌즈로 종이 한곳에 태양빛을 모으면

종이위 한점에서 서서히 불꽃이 생겨 태워 버리는것 처럼

내면의 쓰레기들을 태워버리기 시작한다.

 

 

지켜보기는 초집중이다.

 

 

 

                                                    <어제 혜자스님 유튜브 법문을 듣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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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3 월27

제목: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부럴.

 

 

 

몇일간 우울했다.

물론 지금도 기분이 영 밝지는 않다.

뭐 때문일까?

요즘 흐리고 추운 날씨 탓일까?

희망이 없는 회사 탓일까? 그래도 버텨야 하는데...

아니면 점점 신체 나이를 먹으며 갱년기가 되어가는 육체의 노쇠함 탓일까?

고딩들 아빠이자 완산의 남편으로 살며 점점 무거워지는 아빠란 이름의 무게 탓일까?

 

 

 

그래, 이게 다 내탓이다.

내가 태어났으니 우울하고 괴롭다고 하니

모든게 내가 있어서 괴롭다면

시시때때로 올라와 얽히는 나의 인연의 실타래 때문이라면

어느것 부터 풀어야 하지?

 

 

 

본래 청정한 하늘은 여여한데

잠깐 구름에 가려졌다고 하늘이 탁해지는가?

탁해진 마음이 내 본 마음이 아님을 알지만

아직도 우울하고 밝지못한 주위만 보고 있다.

 

 

 

'심안으로 옳게 보아야 하나니' 가 주문처럼 외워진다.

육안으로는 외부의 현상을 보고

심안으로는 내면의 현상을 보고

육안으로 들어온 상과 심안으로 비춰지는 상이 둘이 아니라 하시지만

 

 

 

아직도 육안으로 보는 것에 끄달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안으로 옳게 봐야지.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탓도 하지 말자.

내 탓도 하지 말자.

 

 

 

지연이의 씨부럴,

정말로 잘 돌려놓네?

듣기 참 좋다야. 씨부럴.

 

 

<문술법우가 전해준 지연이 관노트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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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3 월21

제목: 내 좁디 족은 속그릇

나의 속은 참 좁다.

아량이나 배포가 좀 더 넓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마음공부를 해서 마음을 넓히고

책을 보면서 지식과 지혜를 넓히고

여유있게 세상과 나를 관조하고 싶은데

세상은 내 마음 같지 않아 괴롭고

나는 아직도 마음에 휘둘려 주인 노릇을 못하고

아집, 아만, 아상이 가득차 버렸다.

어디 걷어서 덜어 놓을때 없나?

덜어 놓긴, 어디다 뭘 덜어 놔.

다시 놓아버려야지.

먼저 집어 들어야 놓을수 있다.

집기는 무척 힘들지만 일단 겨우 집어들면

아집, 아만, 아상은 이미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어느새 줄어져 버린다.

그걸 다시 놓으면

속그릇에 비해 작아진다.

그릇이 커야 담기도 수월한 법

작은 내 그릇

그릇을 키울수 없다면

담는걸 줄일수 밖에.

<어느 한 친구에게 계속 서운함이 올라와서 관 해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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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애니멀 - 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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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스토리텔링 애니(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지은이: 조너선 갓셜/ 노승영 옮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요한복음 1 1>.

"여시아문(如是我聞)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모든 불교 경전의 첫구절>

 

 

 

우리 인간의 말하는 능력과 듣는 능력의  결합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어떤 종류의 생물체 보다 우수해진것은 틀림없는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유발 하라리는 200만년전 영장류중에 가장 힘이 없던 종에 불과 했던 호모사피엔스가 오늘날 지구에 주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인지혁명(認知革命) 을 꼽았다.

우리 인류는 이야기로 소통을 하고 믿음을 공유하며 개인과 부족간의 유대를 하며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결국 이야기의 활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가장 별볼일 없는 종에서 가장 뛰어난 사회적 동물로 발전한 셈이다.

 

 

이제 인류에게 이야기는 떠날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오늘날 인류가 만들어 놓은 문학, 영화, 게임, 오락, 음악, 무용, 철학, 정치, 과학 등등  모든 문명의 바탕에는 스토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게 다 태초의 말씀 때문일까?

그렇다면 이야기가 곧 신이 되는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조너선 갓셜의 책<스토리텔링 애니멀>은 일독 할 만하다.

이 책을 보기전 나는 작년에 같은 작가의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를 먼저 읽었었다.

그때 당시 책을 읽는 내내 놀라웠던 작가의 통찰은 이야기라는 것이 살아있는 유기체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인류가 멸망치 않고 존속하는 한 이야기 또한 같이 살아 나간다것 이다.

 

책에서 작가는 이야기의 효용에 대하여 모든 이야기의 목적은 '상대를 구슬린다는데 있다' 는 관점으로 해석했다.

즉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꼬신다' 는 것이다.

상대를 나의 의도에 맞게 구슬리려면 짜임새 있게 서사를 넣어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행위가 결국은 '구슬림' 이란 것이다.

상대를 구슬림으로 이야기에 공감하게 하고 화합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효용 반면에 작가는 '이야기 꾼을 믿지 말라' 고 했다.

<플라톤의 국가>를 언급하며 플라톤의 위대한 스승이 당시의 시인들(이야기 꾼) 에 의한 선동으로 인해 대중은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즉 이야기는 상대에 대한 분열 , 불신, 증오를 조장을 할수도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탈진실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은 범람하는 정보 미디어 홍수들, 가짜 뉴스, 보이스 피싱, 매일 실시간으로 업로드하는 유투버들의 선정성 콘텐츠들. 정치가들과 선동자들의 분열적인 구호들과 음모론 속에서 헤매고 있다.

더구나 인공지능의 발달로 우리는 심지어 챗GPT가 진실을 말하는지도 검증해야 한다. (살아가기가 점점 힘들어 진다.)

 

 

 

이시대의 이야기 꾼은 다양하게 진화를 했고 또 현재도 진행중이다.

 

 

 

모든게 진짜 같아 보인다.

진짜 처럼 보이는것은 진짜가 아니다.

결국 우리는 눈에 보이고 들리는 말들을 다 믿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야기 꾼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혼란을 조장하는 시대의 이야기가 바로 2500년전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았던 그리스 시대와 다르지 않다고 본 작가의 통찰과 시공간을 연결하는 작가의 독창적인 해석력에 감탄했었다.

 

그때 받은 감동으로 작가의 전작 <스토리텔링 애니멀>을 이번에 읽게 되었다.

 

(<스토리텔링 애니멀:민음사 출판> 2014년 에 출판이 되었고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위즈덤 하우스 출판>  2023년에 나왔다.)

 

두 책의 작가(조너선 갓셜)은 영문학 교수이자 과학적 인문학의 선두주자를 자처한다.

작가는 스토리와 인간의 상관관계를 생물학, 심리학, 신경과학을 넘나들며 시종 유쾌한 어투로 이야기속의 세상 즉 네버랜드에 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두 책 모두 인류를 '호모 픽투스(Homo fictus:이야기 하는 인간)'라는 관점 에서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다만 아쉽다면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통찰은 훌륭하지만 워낙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정신없이 풀어 놓아서 읽고난 후 정리가 잘 안되고 있다.

(독후감을 쓰면서 뭘 쓰고 있는건지 나도 헤매고 있다가 다 지워버렸다.

결국 당연히 나의 문해력의 문제라고 봐야지. )

 

 

그렇지만 작가의 두 책을 비교한다면 나에게는 작년에 읽었던 후속작<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위즈덤 하우스 출판>이 더 쉽고 재미있게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소장가치를 따진다면 전작<스토리텔링 애니멀:민음사 출판>은 서가에 두고두고 읽어볼 책이 될것 같다.

 

 

 

앞의 태초의 말씀과 여시아문을 다시 살펴본다면,

기독교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불교는 듣는것에서 시작한다.

말하는것과 듣는것 중 어느것이 먼저 인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청각장애인은 말을 못한다.

그렇게 보면 듣는게 좀 더 중요 하지 않을까?

 

 

 

나의 어린시절, 초딩 3학년때 였다.

그 당시 우리반에서 장기자랑 시간을 가졌던 적이 있다.

다른 애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고 나는 '옛날 이야기' 를 말했다.

어른이 된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에 우리가 표현했던 춤이나 노래, 옛날 이야기 하기 같은 장기자랑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넓게 본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존재의 행위가 나를 표현하는 것이고 이는 곧  말하는 것이 되며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즉 나의 이야기속에서 나는 주연이 되는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세상에서는 내 뜻대로 만들수 있지않을까?

 

태초의 말씀은 곧 내가 되는 것이다.

 

단어를 늘어놓는 것은 작가이지만 단어 자체는 생명이 없어 생기를 불어넣을 촉매가 필요하다. 그 촉매는 독자의 상상력이다. - P26

우리 몸은 ‘지금 여기‘라는 구체적 시공간에 늘 갇혀있지만 상상력은 우리를 해방해 시간과 공간을 마음껏 넘나들게 해준다. - P32

...뽕 가기 위해서...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의 요점이다. 픽션은 코카인과 같은 마약이다. - P51

모든 사람의 뇌에는 작은 셜록 홈스가 들어있다...이야기하는 마음은 의미 중독자이다. - P133

이야기는 공동체의 가치를 강화하고...사회를 결속하는...
이야기는 젊은이를 문화에 적응시킨다.
이야기는 집단을 정의한다.
이야기는 무엇이 고귀한 행동인지, 무엇이 비난받을 행동인지 알려 준다.
이야기는 사회의 윤활유이자 접착제이다.
이야기는 우리를 균질화한다. 즉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 P170

우리중 90퍼센트는 자신의 운전이 평균 이상이라 생각하며 대학교수 중 94퍼센트는 자신의 업무 능력이 평균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위비곤 호수 효과:라디오 방송에 등장하는 가상의 마을로, 이곳에 사는 여자들은 모두 힘세고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고 아이들은 모두 평균이상이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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