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인생 우습지 않다 - 인생 일타강사 전한길의 50가지 행복론
전한길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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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쇼츠에서 욕을 하며 소리를 치는 강의 동영상이 흥미를 끌었다.

난 처음엔 개그맨이 쇼하는건 줄 알았다.

아마도 유투브가 아니었다면 전한길 강사가 누구인지 평생 몰랐을 것이다.

내가 공무원 시험 본다고 한국사를 공부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한길 강사는 공무원 시험 분야에서 엄청 유명한 일타강사 였다.

'일타강사'란 말 뜻이 나는 처음에는 '일타(一打): (핵심을 )한방에 때려 잡는 강사'로 생각했었다.

핵심을 잡아내서 가르쳐야 하니 '일타는 한방에 때린다'가 맞는줄 알았는데...

그런데 원래 뜻은  '일등 스타 강사' 의 줄임말 이라 하네...

이분이 수업중에 쏟아내는 대구 사투리, 게다가 쓴소리라고 C 발, 네발 하는데 듣기에 불편할수도 있겠지만 앞뒤 맥락을 함께 들어보면 그속엔 뭔가 진심이 느껴졌다.

어쩌면 일종의 나의 편견일수도 있겠지만 학원강사라고 하면 학교선생님보다 급이 낮다고 생각했었다.

명칭도 강사와 선생님으로 나눠진것이 , 강사라 하면 돈을 받고 가르치기만 하는 분들이고, 선생님 하면 공부외에도 정신적으로도 영향을 끼치는 스승의 역할을 하는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즘 메스컴에서 들리는 뉴스들을 보면 학교 선생님의 교권은 완전히 무너져 버린것 같다.

또한 공교육과 선생님이 본래 무슨 역할이였는지를 점점 잊게 되는 시대가 되버린것 같다.

오히려 일타강사로 불려지는 많은 학원선생님들이 공교육의 학교선생님들 보다 영향력이 더 커보인다.

작금의 시대는 헤르만 헤세가 <유리알 유희>에서 언급했던 '산문의 시대' 나 다름없다.

산문의 시대에는 진위를 알수없는 정보와 강연들의 난립해 있다.

그 가운데에서 '전한길 강사'는 주목할만한 인물인것 같다.

그의 책 <네 인생 우습지 않다> 는 자신의 인생담이자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을 담은 책이다.

 <미친듯이 하면 뭐든 성공하고 합격 한다.>

<지치면 지고 미치면 이긴다>

<숨이 붙어 있는한 네 시간은 온다.>

<기죽지 마라, 청춘은 가진것이 많다.>

<눈 감고 필요 이상의 자는것 외에는 다 배우는 거다.>

<핑계 대지 마라, 난신적자들아>

<고난은 감추어진 축복이야>

책의 곳곳에 나오는 이러한 동기부여 격언도 좋았지만 내가 흥미를 느낀것은 전한길 강사의 인생 스토리였다.

고3때, 공부보다 의리로 친구들 하고 노느라 대학 진학을 포기 했었단다.

어짜피 집안도 가난해서 대학갈 형편도 안된다고 생각해서 집안 농사일이나 도울꺼라고 생각 했었단다.

그런데 아버지가 외출하셨다 돌아오셔서는 방으로 따라 들어 오라고 했단다.

아버지는 포대 자루를 턱 내놓고 풀어보라고 해서 풀어보니 거기에 현금이 수북히 들어 있었단다.

당신은 아들 대학 등록금을 모아놓고 '합격' 하길 기다렸는데 아들은 아예 시험 조차 치지 않았다 하니 기가 차셨을 것이다.

그러고는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목 놓아 우셨다고 한다.

그때 학생 전한길은 아차, 싶었단다. 진짜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다음날 바로 다시 짐싸들고 자취방으로 들어가 독하게 재수 생활을 했단다.

그리고 1년뒤 경북 대학교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인생의 황금시기였던 30대, 당시 대구 최고의 스타강사로 떴고 그걸 발판으로 대구에서 제일 큰학원을 인수하여 이사장이 되고 출판사까지 맡아 경영하였다 한다.

게다가 지방 출신강사 최초로 EBS  방송 강사까지 진출해 당시 인기는 최고였단다.

그렇게 잘나기만 할 줄 알았는데, 대학 입시제도가 변하기 시작했고 또 어떻하다가 하던 사업이 갑자기 우르르 무너지더란다.

뒤에 정신 차려 보니 빚만 25억이 남겨졌단다.

그뒤로 졸지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10년간 빚쟁이 빚 독촉에 시달려야 했단다.

그러다가 마치 무림의 고수가 혈혈단신에 칼 한자루를 품에 안고 무림에 뛰어든것처럼 노량진에 올라와 자기 본업인 강사로써 목숨 걸고 강의로 승부를 걸었다고 한다.

그렇게 절실한 마음이 통했는지 결국 재기에 성공해서 빚 청산 다하고 지금은 세금만 한해에 15억을 내는 일등 납세자가 되었단다.

참으로 롤러코스터 처럼 전한길 강사의 인생은 참으로 버라이어티 했다.

그래서 전한길 강사의 쓴소리는 자기 체험과 성찰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셈이다.

자신에게 배운 학생들은 모두 합격 시키겠다는 원을 세우고, 자신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어느 제자가 소홀히 할수 있겠는가?

곧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다.

전한길 강사가 전하는 인생론중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조언을 꼽으라면 두가지가 있다.

첫째 <인간이란 배신 하는 존재다.>

인간 관계에서 배신은 당연한 거란다.

그래서 배신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상종 하지 말아야 할 두 부류의 인간. 감사할줄 모르는 인간, 미안해 할 줄 모르는 인간>

극단적으로 말해 우리가 누리는 것중 하나 부터 열까지 자신이 혼자 한것이 있는가?

입는것, 먹는것, 전부 남의 손을 거쳐서 도움을 받는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돈을 지불한다고 하지만 그 만한 돈으로 혼자 그렇게 만들려면 할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이였다.

성공한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정한 패턴이 있다.

크게 성공하기전에 큰 시련이 닥친다는 것이다.

그 시련을 견디고 버티면 결국엔 성공하는것이 어찌 그리 다들 비슷한지 모르겠다.

운명의 장난인지, 신의 계획인지는 모르겠으나 항상 그렇게 되는것이 우주의 법칙처럼 보인다.

날이 밝기전에 새벽녁이 제일 어둡다는 말이 있듯이 원래 세상 이치가 그런가 보다.

전한길 강사가 지금의 일타강사가 된 계기는 초딩 4학년때 담임 선생님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가난이 창피하다고 생각한 시절, 선생님의 가정방문때 도망을 갔는데 담임선생님은 '가난이 부끄러운게 아니다. 넌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꺼야' 라고 격려하며 안아 주셨다고 한다.

그때 선생님의 따뜻한 기운을 지금도 전강사는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진정한 스승이라면 제자의 모든걸 감싸 안을수 있고 제자가 꼭 잘될꺼라는 믿음을 가지신다는 뜻일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저마다 가슴속엔 불 밝힐 심지 하나를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심지에 불을 밝히려면 이미 먼저 밝혀진 불에서 전달 되어야 할것이다.

아마도 전한길 강사가 어릴때 담임 선생님 한테 받은 따뜻한 온기는 지금은 따뜻한 불이 되어 대한민국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하나하나 전달 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승에서 제자로, 제자는 다시 스승이 되어 다시 또 제자에 전달하고... 이렇게 전등(傳燈) 하는것 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공교육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요즘 세태에 대해 나는 잘 이해가 안가는 면이 많다.

사회는 발전했다고 하는데 왜 선생님들의 교권은 한없이 추락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진정한 스승님이 부재(不在)한 듯한 모습에 씁슬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훌륭하신 선생님은 꼭 학교에만 계시는게 아니지 않는가?

대행선사께서는 만물 만생을 스승으로 삼았고 굴러가는 돌을 봐도 스승으로 여겼다고 하셨다.

 

진정한 스승이 없다는 탄식보다 내 자신이 배우려는 자세가 있는지 부터 생각해야 봐야 될것 같다.

내 불씨 부터 갖춰졌는지 살펴 보는게 우선이겠지?

.

그래, 적어도 난신적자는 되지 말아야지.

난신적자(亂:어려울 난 臣: 신하 신 賊: 도둑 적 子: 아들 자): 임금을 배신하는 신하와 부모에게 패악질 하는 아들 이란 뜻. 한마디로 욕 이다.

‘Authority‘ 라는 것은 ‘권위‘ 라는 뜻인데 이 권위는 자기가 잘났다고 나오느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낮출때 나온다. 자신을 낮출 때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여기서 나온 영어 단어가 understand 다. ‘낮은 곳 under, ‘선다‘stand 의 합성어로 그것이 바로 이해, 상대방의 눈높이, 존중하는 자세.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진짜 진리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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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도 인생도 내려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 실패를 기회로 만드는 등산과 하산의 기술 아우름 10
엄홍길 지음 / 샘터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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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이라....

친구의 성화로 어쩌다 산악회에 몇번 따라 갔다가 덜컥 가입을 하게 되었다.

산에 소풍가는 기분으로 따라 나섰는데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한번 산행을 하면 왕복 18키로 정도 된다는데 계속 걷고 올랐다 내려갔다 하는게 쉽지 않았다.

오를땐 한걸음 한걸음이 무겁고, 내려 올땐 무릎이 아파 고통 스러웠다.

앞으로 한달에 한번 정도는 산엘 가기로 마음은 먹었는데 무릎이 아파 오를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이유로 등산 관련 서적을 찾아보다가 엄홍길 대장님이 쓴 책이 눈에 들어온다.

내 평생 에베레스트 산을 오를 일은 없겠지만 나한테는 매달 올라야 할 산들이 에베레스트 산이라 생각될 정도로 아직 나에겐 힘이 많이 들것 같다.

<산도 인생도 내려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의 지은이는 엄홍길 대장.

엄홍길 대장님에 대해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우리 나라 산악인 하면 엄홍길 대장밖에 안떠오를 정도로 우리 나라 국가 대표급 산악인이다.

하지만 유명세와는 다르게 이책을 읽기전에는 사실 이분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는 잘 몰랐다.

이책은 엄대장님이 힘든 등정을 통해 도전과 좌절, 다시 도전과 성공을 하는 성장기와 같다.

엄대장은 3살때 부터 살게 된 의정부의 원도봉산 골짜기에서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까지 40년을 살았다.

자연스레 어릴때 부터 산과 친숙하게 되었지만 학창시절엔 학교 선생님의 가정방문을 피해다녔을 정도로 한편으론 산에 사는것을 창피해 하기도 했단다.

그리고 혈기 왕성한 20대 UDT로 군제대 후 거칠것이 없었던 시기, 희말라야의 최고봉 에베레스트 8850미터를 등정을 목표로 생애 처음 8천 미터급의 산에 도전했다.

등정을 위해 훈련도 열심히 하고 자신감도 충만했지만 막상 거대한 산앞에서 한없이 작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동료들이 오르다 사고로 다치고, 죽는 과정을 목격하고 자신도 다치고 죽을뻔한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무모함을 깨달았다고 한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큰 차이가 없구나.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순간에 생사가 갈리는 구나.

죽음이라는 것이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서 같이 숨쉬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P. 33 >

산에 오른것을 후회하고 다시는 산에 오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결국 또 오르게 된다.

산이 자기를 내버려 두지를 않더란다.

사람들로 부터 가장 많이 받는다는 질문, 왜 산에 오르는가? (그러게... 왜 산에 오르지? )

엄대장의 대답은 아마 '산이 나를 불러서' 가 아닐까 싶다.

그후 1988년 서울올림픽 성공 개최 기원을 담은 등정에서 결국 에베레스트산의 정상을 밟았다.

<죽을 각오를 하고 임하는 사람은 결국 살아남습니다. 절실한 마음. 이루어 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그 사람을 성장하게 해요. P. 47 >

이후 엄대장은 산에서 여러번 만난 스페인 산악인의 인연으로 인해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8천미터 급 고봉 14좌 산을 오르겠다는 목표를 세우게된다.

<심상사성(心想事成) 간절히 원하고 절실해야 이루어진다. 여러분은 지금 간절히 이루고 싶은것이 있습니까?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P. 50 >

<자승최강(自勝最强)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가장 강하다. 나 자신은 우리가 이겨야 할 대상, 즉 극복인 대상인 동시에 믿어야 할 존재 입니다. P. 65 >

<우리가 정복해야 할 대상은 산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P. 66 >

그렇지만 모든게 생각처럼 순탄하지 않는다. 그도 '풍요인 여신' 이라고 불리는 안나푸르나 산앞에서는 4번의 좌절과 실패를 겪어야 했다. 그 과정중 세명의 동료를 잃고 자신도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결국 안나푸르나 등정은 5번 시도 끝에 정상에 오르게 된다.

<기고 만장하고 교만했던 저를 안나푸르나가 일깨워 준 것입니다. 산이 받아 주어야 오를 수 있다는 것, 산은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P. 74>

하지만 정상에 올랐다는 기쁨보다 내려 오면서 당시 유일한 여성 등반 대원의 실종을 맞이 하는 아픔도 함께 겪는다.

정상을 오르는것도 어렵지만 처음 올라간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하산도 똑같이 어려운 과정이다.

 <서른 여덟번의 팔천미터 등산, 세계 최조 16좌 등정, 실패 할때 마다 생기는 것은 좌절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거듭된 실패 덕분에 오히려 목표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P. 76 >

<후회가 없으니 다시 일어설 힘도 나오는 것이지요. 정말로 두려워 해야 할것은 미련이 남은 상태에서 포기 하는 것입니다. P. 80 >

결국 엄대장은 16좌 등정 도전을 달성하고 계속 자신만의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40이 넘은 나이에 중국어과에 입학해서 중국어를 배우고, 재단을 설립하여 네팔에 학교을 짓는 원을 세우게 된 것이었다.

<언제 부터인가 산만 보이는것이 아니고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보이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P. 104 >

<산은 저에게 삶은 과정이며, 그 힘든 과정을 즐겨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마음속에 불어오는 수많은 자만과 언제 어디서 튀어 나올지 모르는 교만을 버리고 한걸음 한걸음씩 나를 올라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지요. P. 106>

사람들은 성공만 생각하고 실패를 쉽게 무시를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짜 각성은 실패를 통해서 얻을수 있는것이다. 그렇게 보면 성공과 실패는 둘이 아니다.

<욕심이 눈을 가려서는 안됩니다. 평상심을 잃지 말아야 해요.... 늦더라도 포기 할줄 알아야 해요... 판단력은 욕심을 버린 겸허한 마음자세에서 비롯됩니다. P. 112 >

엄대장의 등산 여정은 자신의 삶의 여정과 일치하며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무엇이 도전이고 왜 도전할수 밖에 없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엄대장은 함께 등정하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10명의 대원들의 사진을 항상 품속에 가지고 다닌단다.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등정을 하고 산에서 어려울때마다 항상 그들의 이름을 주문처럼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정상에 오르면 그들의 사진을 정상 꼭대기에 함께 묻어준다.

<살아서는 이루지 못한 너희의 꿈을 안고 오르는 거다. 너희도 지금 나와 함께 가는 거다. 그러니 나에게 용기와 힘을 줘. 이 위기에서 벗어 날수 있도록 제발 날 이끌어 줘. P. 118>

<히말라야 신들이시여, 이들의 영혼을 거둬 주시고 안아주시고 편안하고 따뜻하고 아늑한 곳으로 인도해 주십시요. P. 119>

산에서 힘들때 동료들을 생각하면서 불렀다는 휘비스의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이란 노래.

전에는 익숙한 멜로디로 아무 생각 없이 들어봤던 노래였는데 책에 개사한 내용을 보니 잔잔한 울림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엄대장의 이 모든 도전은 결국 나눔으로 귀결된다.

엄대장은 동료들은 죽고 자신만이 혼자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자신이 왜 살아 남았는지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

<저는 그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산이 저를 살려서 세상밖으로 돌려 보낸 이유라고 생각 합니다. P. 131>

<저는 우리 인간들이 쓰는 언어들 중에 가장 어려우면서도 아름다운 말이 '도전' 이라고 생각 합니다. 사람의 산에 오르며 또 하나의 아름다움 말은 '나눔'입니다. 나누는 순간, 베푸는 순간 손해 보는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P. 140>

엄대장은 가난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세르파일을 하는 네팔의 빈촌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받게 하고, 다리를 저는 여인을 수술시켜 완치케하고 간호사 교육까지 받게 하는 등 지금은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엄대장은 평생을 도전을 하며 살았는데 그 최종 도전이 '나눔의 확장' 이 되고 있다.

도를 깨닫고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처럼, 엄대장님도 그러한 경지가 아닌가 싶다.

<제가 앞으로 올라야 할 산들은 이웃들이 겪는 아픔과 고통의 산입니다. 어쩌면 그산은 히말라야 산보다 더 높을지 모릅니다. 더 춥고 외로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가 해야 할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P. 141>

엄대장은 외롭고 힘들다면 무조건 산에 오르라고 한다.

그래, 천리길도 한걸음 부터라고.  근처 작은 산부터라도 올라봐야겠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산악회에 가입된게 우연이 아닐수도 있다.

혹시 누가 아는가? 몇년 뒤에 진짜 히말라야라도 가게 될지...

어쩌면 산이 나를 부르고 있는게 아닐까?

내가 아직 듣지 못하고 있는것일 수도...

 

 

조금 알면 오만해진다. 조금 더 알면 질문하게 된다. 거기서 조금 더 알면 기도하게 된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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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인 배드민턴 - 개정판
이종인 지음 / 맑은샘(김양수)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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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민턴에 관련된 책을 알라딘에서 뒤져 봤다.

생각보다 종류가 많지 않았다.

우리나라 배드민턴 동호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책은 몇종류가 되지 않는다.

'하긴 운동은 몸으로 하는건데 직접 실기로 배워야지 누가 책으로 배울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지금 나에겐 필요하다.

동호인 클럽에서 매주 4번하고 레슨도 일주일에 2~3번을 하고 있는데도 생각보다 실력이 늘지 않는다.

배드민턴 신이 존재한다면 너무 박한것 아닌가 싶다.

내딴에 이렇게라도 노력 하는데 실력 좀 팍팍 올려 주면 안되나?

 

어쨓든 책값이 레슨하는 비용의 절반도 안되는 가격이니 레슨 하는셈 이라 치고 골라봤다.

모두 각각 다른 종류의 책3권을 알라딘을 통해 구매를 했다.

<동호인 배드민턴>, <시작해! 배드민턴> 그리고 <배드민턴 전술 교과서> 이다.

이 중에 가장 먼저 본 책은 <동호인 배드민턴> 이다.

이 책은 나같은 동호인들을 위한 책이다.

우리나라에 배드민턴 동호인이 약 400만명이란다.

책은 글쓴이가 직접 동호인 배드민턴을 치면서 체득한 노하우를 전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글쓴이는 50이 넘은 나이에 늦게 배드민턴을 시작했고 자신이 10여년을 넘게 동호회에서 운동하면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 되는것들을 담았다.

늦깍이로 시작한 저자는 '어떻하면 시행착오를 줄이고 빠르게 기량 향상을 할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작가 나름의 핵심 포인트를 요약했다.

책에는 교본이라고 할수있는 기본 자세나 기술 방법 같은것은 전혀 없다.

그래서 책의 내용은 처음 배드민턴을 시작하는 초보가 보기에는 별 도움이 안될것 같다.

그런데 구력이 2~3년 정도 되는 동호인이면 쉽게 이해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상대방이 스매싱을 리턴 하는데 그냥 붕붕 올려 주는 것 보다는 공을 살짝 죽여 네트 가까이 떨어뜨리거나 되치기로 양 사이드로 제치는 방법을 말한다. p.32>

<의지력과 상상력의 대결에서는 언제나 상상력이 이긴다.  p.80>

<상대가 칠때 상대의 몸을 보지 말고 라켓 면을 주시하라.  p.128>

작가와 마찬가지로 나도 45세가 넘어 배드민턴을 시작했기 때문에 동병상련(同病相憐), 격하게 공감이 갔다.

특히 대회 전략 편에는 '평상심이 도' 라고 시합에서도 평상심을 가지고 편하게 치라고 조언한다.

수행자들이 수행을 해야 하는 최종 목표가 평상심에 이르기인데 배드민턴도 마찬가지인것 같다.

운동이 수행하고 뭐가 다르랴?

동호인들 끼리 하는 말이 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면 60세에는 다 같은  A 조에서 만난다고.

두번째 <시작해 배드민턴!>은 배드민턴 이론책이다.

동작과 기술이 사진과 함께 설명이 되어 있어있다.

그래서 앞의 책<동호인 배드민턴> 과 상호 호환식으로 보면 좋을것 같다.

이 책은 기초부터 고난도 기술까지 기본적으로 구성이 잘 짜여있다.

이 책의 장점은 큐알 코드가 민턴 기술 별로 따로 있어서 스마트 폰으로 동영상을 볼수가 있다는데 있다.

개인이 필요로 한 부분을 동영상을 통해 여러번 반복해서 보고 이해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책이다.

독학으로 배드민턴을 배우려면 필독 할만 하다.

<배드민턴 전술 교과서>는 '후지모토 호세마리' 라고 하는 일본인 코치가 낸 책이다.

나에게는 3권의 책중 가장 끝판왕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된다.

책은 단식, 복식 시합시에 사용되는 전술적인 내용들로 채워져 있어 앞의 두권을 완전히 마스터해야 적용해 볼수 있을것 같다.

옆에 두고 자주 봐야 하겠지만 배드민턴은 이론만 알아서는 절대 실력을 향상 시킬수가 없는 운동이다.

내 딴엔 아주 잘하고 있다고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 반복되는 실수에 좌절에 빠지기도 하고, 운 좋게 이기는 날엔 자만감이 하늘을 찌르기도 하고, 배드민턴은 아주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논다.

그래서 중요한게 부동심의 마음인데 정말 아직도 멀고도 먼 경지이다.

하지만 나의 인생 중반이후 어쩌다 시작한 운동인데 포기 하지 말고 가는데 까지 가본다 는 심정으로 오늘도 배드민턴 라켓을 든다.

다음주말에 동호인 클럽들간의 연합대회가 열린다.

지난번  c 조로 승급한 이후 첫 대회인데 이번에는 마음 편하게 쳐보려 한다.

평상심이 도,  평상심이 도.. 주문 처럼 외운다.

그래도 어쨓든 목표는 A 조.

끝까지 간다.

1. 항상 라켓들고 준비
2. 공을 몸앞에서 빨리
3. 스매싱, 드롭은 중간
4. 푸시는 잡아서 짧게
5. 짧은공, 되면 앞으로
6. 언더 보다는 헤어핀
7. 라켓면 보고 좌우 판단
8. 서브 리턴도 낮은 자세
9. 스매싱 리턴시 전진
10. 허를 찌르는 플레이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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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3-10-30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1승 2패, 첫 게임때 영혼이 탈탈 털려버렸다. 성장을 위한 시련이라고 생각하자. 목표는 명확하게... 멘탈 부터 잡자.
 
유리알 유희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3
헤르만 헤세 지음, 이영임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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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작품 <데미안>, <싯다르타>를 읽고 난후 느꼈던 감동으로 인해 선택한 책<유리알 유희>.

앞의 두 작품은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젊은 시절때 나는 읽지 못했었다.

인생의 중반이 넘어서야 알게된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통해 '내가 만약20대나 30대에 읽었다면 어쩌면 지금같은 감동을 못 느낄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독서를 하면 할수록 '삶의 경험치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그런데 이번에 읽게 된 유리알 유희는 헤르만 헤세의 앞의 작품들과는 결이 다르다.

처음 서문에서 부터 적잖이 당황했다.

책의 서문은 '유리알 유희의 역사를 일반인들을 위해 알기 쉽게 설명하는 글'이라고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냥 읽으면 이해가 안간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바흐, 모자르트, 대위법, 라이프니츠, 스콜라 철학, 베네딕스 수도회, 성 이그나티우스, 여씨 춘추, 우파니샤드 등, 철학과 종교, 인문학에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의 언급과 여러 학문의 내용들이 서문에 인용된다.

게다가 작가가 창작을 위해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도 섞여있어 인물들이 실제인지, 가상인지 따지면서 읽으면 헷갈린다.

또한 유리알 유희에 대해 아주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속에 유리알 유희의 구체적인 형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서문을 읽으면서 내 자신이 난독증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종종 들었다.

그런데 다시 찬찬히 맥락만 살펴 보면 기실은 단순한 내용이었다.

 

결론은 유리알 유희는 '고도의 정신적인 유희라는 것' 이다.

유희(遊戱), 중국어로는 유희를 (游戏 youxi) '요우시' 라고 읽는데 뜻은 '게임','놀이' 로 해석된다.

즉 유리알로 하는 게임, 우리 말로는 '유리알 놀이' 라고 풀이 할수 있겠다.

그리고 '유리알'이란 말에서 나는 어릴때 '유리 구슬'로 놀이를 했었던 것이 생각 났는데, 아마도 그런 연상 때문인지 머리속에서 '구슬 놀이' 의 이미지로 이해 되어져 버렸다.

실제로 작품속에 등장하는 유리알 유희에 해당 하는 게임, 놀이는 우리 현시대 시점에서는 존재 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시점은 2400년경 미래의 시점에서 그보다 200년 과거에 존재했던 인물을 전기(傳記) 형식으로 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는 요즘 유행하는 이세계물(異世界物) 스러운 요소가 있다.)

 

전기의 인물은 당대 전설적인 '유리알 유희 명인' 에 관한 것이다.

즉 서문은 미래의 세계관에 존재하는 유리알 유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부터, 기독교 철학, 고전 음악과 인문학, 수학을 동원해 가며 설명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유리알 유희는 미래에 존재 하는 게임이며 현재 우리의 세계관에서 알고 있는 게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게임이나 놀이인것이다.

현대에 게임이라 일컫는 것은 컴퓨터 오락이나 가상 현실 게임과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인 동양의 장기, 바둑, 서양의 체스나 보드 게임, 각종 카드 놀이가 있을것이다.

그런데 유리알 유희는 우리시대에 존재하는 게임의 틀로는 인식을 하면 안된다. 아니 인식 할수도 없다.

 

21세기 이후 미래의 인류가 내놓은 정신문명의 최상 단계의 게임인것이다.

형식은 음악, 사용 도구는 유리알, 내용은 세상에 존재 하는 모든 학문. 즉 수학, 철학, 언어학, 천문학, 종교학 과 최종적으로 명상으로 집대성한, 모든 인류의 지혜를 통섭화된 형태로 이루어진것이다.

한명, 둘, 셋이 할수도 있고 나중엔 대중이 함께 할수 있는 게임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게임이라고 해서 아무나 할수 있는게 아니다.

유리알 유희는 일반인이 접근하기엔 너무도 쉽지 않은 놀이이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학문을 깊이 있게 체득해야 하고 명상의 경지까지 갖춰야 한다.

즉, 작품속 세계관에서 최고의 천재들을 모아 더불어 명상의 경지까지 오른 정신적으로 최고의 수준이 된 사람만 참여 할수 있는것이다.

 

대략 이렇게만 맥락을 이해하고 서문읽기를 끝내면 책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가 시작된다.

소설 유리알 유희는 유리알 명인(名人)이라 불렸던 <요제프 크네히트> 의 전기문이다.

작가가 미래의 시대, 2200년경에 존재했던 전설적인 유리알 명인의 전기를 2400년에 쓴것이라 읽는 시점이나 보는 관점에서 글을 보는 독자는 혼동이 올수도 있겠다.

더구나 중세 유럽의 귀족스러운 분위기의 학교, 고풍의 수도원, 속세를 벗어난 죽림등의 배경으로 인해 작품속에 이세계물의 요소가 녹아있어 과연 미래인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소설의 줄거리는 의외로 정말 단순하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주인공의 성장기이며 또 다른 관점에서는 구도기(求道記)와 같다.

처음 서두에서 유리알 유희가 뭔지 장황한 설명에 읽는이의 진을 다 빼놓는다.

그리고 정작 작품이야기는 쉽게 읽힌다. 작가가 독자를 쥐고 흔들고 있다.

(달리 거장이 아니다. 작가가 명인이다.)

 

전기 형식을 띈 소설은 정말 담담하게 서술된다.

크네히트의 성장기로 보면 카스텔리엔에 들어가게 되는 과정과, 카스텔리엔에서 어떻게 정신적으로 성장하는지, 그리고 성장중에 만나는 인물들에 대해 시간순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리고 구도기적인 측면으로 보면 주인공이 대가나 명인들로 불리는 선지식들을 만나면서 점점 깨닫게 되는 과정이 순차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보통 소설에서 느끼는 엄청 스릴이 넘치거나 흥미진진하진 않다.

어찌보면 밋밋하게 진행된다. 그러면서도 여러 복선이 계속 깔리며 진행된다.

그러다가 전기의 마지막 부분, 소설의 마지막에 최고의 강렬함과 충격을 남겨놓는다.

그리고 곧 바로 크네히트가 남겼던 <유작들>로 이어진다.

여러 편의 시와 산문들, 요제프 크네히트가 마치 정말로 존재했던 인물인양 명인이 남긴 글들이 첨부되어 있다.

특히 책의 마지막 부분, 크네히트가 연구 시절에 작성한 이력서 3편은 따로 별도의 단편 소설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력서라고 해서 우리가 취업할때 내는 그런 이력서가 아니다.)

이 이력서 세편을 읽으면서 현시대의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가 떠올랐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이 책의 이력서의 3편과 결이 상당히 닮았다.)

 

작품을 읽고 난후에야 헤르만 헤세가 전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느낄수 있었다.

작가의 메세지는 작품속에 크게 세부분에서 언급한것 같다.

먼저 크네히트가 번역한 서문의 첫 문단, <알베르 투스 2세, 정신형성에 관한 논고> 에 나온다.

두번째는 크네히트가 카스탈리엔을 떠나기전 교육청에 제출한 장문의 편지글에 있다.

마지막 세번째로 3편의 이력서, <기우사, 고해사, 인도사> 를 통해 작가의 메세지를 확인해 볼수 있었다.

 '서문, 장문의 글, 이력서' 만 따로 다시 보면 전체 맥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실 정작 '유리알 유희'는 복잡해 보이지만 전하고자 하는 작가의 메세지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인것이다.

 

헤세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과연 무엇이었나?

후에 보니 변증법적 구도로 정리가 되어졌다.

먼저, 정()은 잡문의 시대를 논함, 반()은 정신으로의 극복, 합()은 세상속으로 , 이렇게 변증법적인 헤세의 사유체계를 엿볼수 있었다.

 

먼저 잡문(雜文)의 시대를 논하다.()

잡문의 시대란 무엇인가?

<그날그날의 모든 사건에 대해서 급하게 성의 없이 쓴 글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고, 이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서 가려내고 기사화하는 일은 급속도로 무책임하게 대량 생산되는 상품과 완전히 같은 길을 밝고 있었다. 1권 p.26>

<한편 강연 또한 성행했는데....중략... 당시 강연가나 정신의 도둑들은 너 나 할것 없이 논문을 쓰는것 말고도 엄청난 수의 강연을 했다.... 중략... 맹렬한 경쟁을 벌이면서 상상할수 없을 만큼 행해졌다. 1권 p.28>

<조각나고 의미를 상실해 버린 교양 가치나 단편적 지식의 홍수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은 이미 언어의 가공할 만한 가치 상실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1권p.29>

<우리가 보기엔 때로 '전쟁 시대' 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보통은 '잡문 시대' 라고 부르는 정신적 침체와 권력 투쟁의 주요 특징입니다. 2권 p.50>

 

이거 완전히 지금 우리 시대가 아닌가?

유투브의 수많은 동영상, 인터넷 매체의 헤아릴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 더구나 자극적이고 진실치 못한 정보의 오류들 까지. 현시대가 곧 잡문의 시대인것이다.

작품속의 시점으로 보면 과거의 시대, 잡문의 시대를 말한것인데 실제 소설이 쓰여진 1940년대로 보면 미래를 예측 한것이나 다름 없는것이 된다.

헤세는 정확히 예측했다.

인류 역사상 르네상스는 '인본주의'라 부르며 이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인간 중심, 이성 중심'인 세상이 되었다.

그동안 '신 중심, 종교 중심' 의 시대로부터 자유를 얻은 인류는 '인간 중심'은 산업화와 더불어 이기주의로 변질되고 '이성 중심'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물질 만능주의 폐단을 야기하게 되었다.

그러한 문제점은 개인, 집단 이기주의로 세계 곳곳의 정치와 종교, 사회 계층에서 양극화 현상을 심화 시키고 결국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두번째로 이러한 잡문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가는 방안을 정신 세계에서 찾고자 했다.()

소설에서는 유리알 유희로 설명하고있다.

그렇다면 왜 유리알 유희여야만 하는가?

 

<그 시대의 정신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도처에 그들의 새로운 사고 내용의 표현수단을 구하려는 뜨거운 열망이 살아있었다. 사람들은 철학을 동경 했고, 종합을 동경 했으며, 자신의 분과에만 틀어 박히는 종래의 행복을 불충분한 것으로 여겼다. 전문 분과의 한계를 깨고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학자들이 있었다...중략... 많은 유서 깊은 아카데미와 비밀결사가, 특히 아주 유서 깊은 동방 순례자들의 결사가 유희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1권 p.45~47>

 

<유희는 유희자에게 완전한 것을 찾아가는 어떤 상징적인 형식을, 숭고한 연금술을,모든 형상이나 다양성을 넘어서 내면의 고유한 정신 세계로, 즉 신에게 다가가는 것을 의미 했던것이다. 1권 p.50>

 

<‘비상시’에 사람들은 종종 지식인들이 정치적이 되기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후기 잡문시대에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정신의 정치화 또는 군사화에 대한 요구도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중략….

2곱하기 2가 무엇인지 권력자가 결정하도록 내버려 주는 자는 그 이상으로 비겁자이며 배신자입니다. 진리에 대한 지조, 지적 성실성, 정신의 법칙과 방법에 대한 충실성을 다른 이익을 위해 희생시키는 일은, 설혹 그것이 조국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 해도 배신 입니다.  2권 P. 60~61>

 

작금(昨今)의 시대, 즉 잡문의 시대엔 지식인들이 이미 정치화가 되어버리지 않았나?

현재 매체에 나오는 소위 지식인들은 이미 정치화를 넘어서 권력이 되어 버렸다.

더 나아가 군사화까지 된다면 제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에 대해 작가는 그러한 지식인들에 대하여 진리에 대한 비겁자, 배신자라고 유리알 명인의 입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진리는 정치가 아니다.

그러므로 잡문의 시대 반작용으로 사람들은 정신 문명을 추구 하게 되는것이었다.

우리의 지금 현시대는 과도기가 아닌가 싶다.

물질 문명의 폐단에 대한 반성과 자성의 목소리가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나오고 있지 않는가?

그런한 바램이 소설에서는 유리알 유희로 완성되게 된다.

카스탈리엔이란 수도원과도 같은 교육기관을 통해 인류는 영재중의 영재를 선별하여 교육을 시킨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순수 학문들, 지혜들을 연구하고 통섭한후 다시 또 명상을 통해 완성되는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어찌보면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언급했던 철인이 다스리는 국가, 혹은 플라톤이 세웠던 아카데미와 같은 역할을 하는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듯하다.

유리알 유희는 단순히 학문 지식 연구만을 강조 하지 않는다. 지식 보다 한단계 위, 지고한 정신의 결정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희를 신성과도 같은 개념으로 까지 발전 시켰다.

 

유리알은 한마디로 구슬이다.

옛부터 동양에서는 불로장생이라 하여 신선이 되길 갈망 했었다.

그때 빚어지는 영단(靈丹)은 구슬과 같은 환()이라고 한다. 지금도 한약재중에 구슬처럼 빚어서 환으로 만든 약들이 있다.  한약재를 농축 집적하여 구슬 처럼 둥글게 만든것이다.

그래서 둥근것은 또한 진리를 함축것이 되며 세상의 모든 학문을 응축한 결정체를 뜻한다.

게다가 유리의 영롱한 모습은 명상이라는 신비스러운 정신 세계한다.

그래서 유리알은 정신세계의 최고의 경지를 응축한 결정체의 상징이라고 볼수 있다.

그런데 유리는 쉽게 깨질수 있다. 정신세계의 총화도 쉽게 깨질수도 있는 단점이 있는것이다.

작가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메세지는 이런 단점을 극복하는 단계까지 제시하기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잡문의 시대를 거쳐 유리알 유희로 완성되는 정신의 시대를 거친후 반드시 다음 단계가 오리라 예견했다. ()

잡문의 시대를 극복한 정신의 시대도 영원할수 없는것이다.

정신의 시대에서 유리알 유희도 영원히 지속 될수 없으며 카스탈리엔이란 수도원도 결국엔 끝이 오리라고 내다 봤다.

그 시대의 마지막에는 잡문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군사적 혁명에 영향을 미칠수 있다고 보았다.

모든 현상은 고정되지 않는다. 항상 변한다. 그게 곧 진리다.

 

<카스텔리안의 존속의 문제가 될때는 유리알 유희가 가장 먼저 없어지게 될것 입니다…중략…유리알 유희는 우리가 지은 건축물의 최첨단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가장 위태로운 부위입니다. 2P.63>

 

<아무리 아름다운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역사가 되고 지상의 한 현상이 되는 즉시 무상한것이 되기 마련입니다. 2권 P.64>

 

<우리는 저 속세에 있는 학교에 겸손하면서도 막중한 책임을 지고 봉사하는일을 우리의 과제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명예로운 부분으로 인식하고 그 일을 완수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권 P. 65>

 

결국 크네히트는 유리알 명인이란 최고의 직책과 자신의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카스텔리안을 떠나고자 한다.

지고한 정신의 수준도 결국 깨지기 쉬운것이고 모든것은 변하고 영원하지 않는 진리를 생각한다면 그 또한 덧없다는 것이다.

정신 세계의 최고의 경지라고 해도 역사가 있고 현실이 있는한 세상과 동떨어진 소수인들만 누릴수 있는 카스텔리안이란 곳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현실의 세계로,  대중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헤세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것이 아닐까?

 

선불교에서는 십우도(十牛圖) 로 깨달음의 단계를 소를 찾는 비유를 통해 묘사한 그림이 있다.

소는 마음의 본성품, 불성을 말하고, 그것을 찾는 목동(동자승)은 수행자를 상징한다.

목동이 잃어버린 소를 찾는 심우(尋牛)로 시작하여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는 견적(見跡), 마침내 소를 보는 견우, 그리고 소를 얻게 되는 득우, 소를 기르는 목우, 소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잊고 사람만 남는 망우존인(忘牛存人), 소와 사람 둘다 잊는 인우구망(人牛俱忘), 본래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반본환원(返本還源), 시중에 들어가 중생을 돕는 입전수수(入廛垂手) 단계로 총 10개의 그림으로 묘사를  했다.

선불교의 관점으로 본다면 크네히트가 유리알 유희의 명인으로 깨달음을 얻은후 카스탈리안을 떠나 세속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십우도의 마지막 단계의 입전수수의 경지에 해당된다고 비교 할수 있겠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불교의 대의와도 부합되는것이다.

결론적으로 헤세의 이러한 메세지는 크네히트의 3편의 이력서를 보면 보다 쉽게 이해가 된다.

<소위 말하는 이력서로, 원하는 과거의 어느 시대로 자신을 옮겨 놓는 가상의 자선전이다. 1권  p.148>

 

3편의 이력서에서 특히 마지막 인도사는 우리의 삼국시대 설화 '조신의 꿈'을 연상케하고 중국의 설화인 '한단지몽'(邯鄲之夢)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우리가 현실에서 진짜라고 철썩 같이 믿는게 사실은 '다 공()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현실을 도피하지 않는다.

 

작품속에서 작가는 현시대에 무차별적 드러나는 서양 문명의 폐단을 예측했다.

그래서 그에 따른 대안으로 정신 문명의 승화, 동서양의 모든 정신세계의 조화라고 보았다.

그리고 또한 그러한 깨달음은 세상과 동떨어진 일부의 전유물이 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정신적인 경지는 모든 인류에게로 전파가 되어야 하고 인류 전체가 영적으로 한단계 올라서야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다시 한번 서문의 첫장을 보면 헤세의 뜻을 보다 분명히 읽을수 있다.

 

<즉 있음을 증명할 수도 없고, 있을것 같지도 않은 어떤 것을 경건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어느 정도 실제하는 것 처럼 다룸으로써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생겨날 수 있는 가능성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들 만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도 없지만 또 그만큼 절실히 사람들 눈 앞에 그려 보여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도 없다. 1권 p.12  알베르트 2세의 서문 구절.>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를 도라고 할수 없고, 이름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의 구절이 떠오르지 않는가?

있긴 있지만 증명할수 없고 이름 지어질수 없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할 그것, 그것을 도라고 할수도 뭐라 할수도 없는 그것, 헤세는 절실히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것이 불교의 공()이요, 도가의 도(), 기독교의 복음(福音)과 다르지 않는것이다.

헤세의 유리알 유희는 작가가 현대와 미래의 인류에게 전하는21세기의 간절한 메세지라 생각된다.

 

독서를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을 둘러싼 알 껍질에 금이 간다.

독서는 알 껍데기를 깨고 나와서 세상 밖을 비상(飛翔)하기 위한 몸부림이어야 한다.

 

 

 

 

 

참고로 작품속의 서문을 쓴 '알베르 투스 2세'는 가상인물이며, 역사적 실제 인물 알베르 투스는 '신학대전'을 완성한 스콜라 철학의 대부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승 알베르 투스에게서 '철학자의 돌' 이라고 불리는 연금술사가 사용하는 돌을 물려 받았다고 한다. '철학자의 돌'은 파울로 코엘류 '연금술사'에 언급된다.

 

동방 순례자들에게 바친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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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 - 예의 바른 무관심의 시대, 연결이 가져다주는 확실한 이점들
조 코헤인 지음, 김영선 옮김 / 어크로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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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읽다, 이제는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것에 관한 책'까지 읽게 될줄이야...

'아이구, 참나. 나 살기도 바쁜데 웬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말을 걸어야 한다니... 누군줄도 모르는데... 왜 그래야 하는데? 그리고 이런걸 또 책으로 내는 사람도 있다니...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책으로까지 나왔을까?' 제목에서 부터 호기심을 자극했다.

책의 제목은 쉽고 가벼운 주제 같은데 막상 읽어보니 생각보다 쉬운 주제가 아니었다.

이 책은 소통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상의 화두가 들어 있다.

작가의 경험에서 책은 시작한다.

대서양 어느섬에서 시나리오 작가들의 교류행사가 있었다.

행사와 파티를 치르고 저녁에 동료 작가들과 택시를 탔었다.

그때 그 택시에서 작가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마주하게 된다.

우연히 마주친 낯선이에게서 한평생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완벽하게 요약한 타인의 인생담을 듣게 될줄 몰랐단것이다.

그후 작가는 낯선이에 대한 생각과 왜 우리는 낯선이에게 쉽게 말을 걸지 못할까? 낯선이에게 말을 걸어 대화를 나누면 어떤일이 생길까? 등의 의문들이 떠올랐다고 한다.

사실 오늘날 현대 사회는 외로움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사는 도시엔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매일 수많은 사람을 보고 지나치지만 서로간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냥 서로다 모른다.

이제는 모두가 모두에게 낯선이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는 우리가 점점 잃어가고 있는 '낯선이에게 말을 거는 능력' 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낯선 이는 위험하다는 말과 달리, 낯선 이와 대화할때가 오히려 대화 하지 않을때 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한다. 낯선 이와의 대화는 단순히 살아가는 방편이 아니라 살아 남는 전략이다. P.21>

책은 크게 두가지 구조로 짜여진것 같다.

첫째는 작가가 직접 배우고 참여하는 실험정신 가득한 체험들.

작가는 낯선이에게 말을 거는 방법에 대한 수업을 듣거나 그러한 모임들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조언을 구한다.

즉 작가가 현장감 있게 몸소 체험하면서 낯선이에 말을 걸면 어떤 잇점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구성이다.

둘째는 학구적인 방법으로 낯선 이에 대한 인류학적, 종교학적, 심리학적, 정치학적인 면까지 다양한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원시시대부터 인류 문화의 낯선이에 대한 규정, 이방인에 대한 성서속의 규정들, 세계 곳곳  문화속의 환대에 대한 인식들, 현대사회에서 낯선이에 대한 두려움의 이유, 점점 심해가는 정치적인 양극성에 대한 해결책 제시등.

낯선이에 대한 규정이 단순하게 내 주위의 '모르는 사람'만을 지칭하는게 아니다.

좀더 나아가 '나와 다른 사고를 가진 사회적인 계층'과 '정치적인 양극단'의 소통에 대한 문제까지 다루어 진다.

그래서 이 책엔 비교적 방대한 연구와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그냥그냥 쉽게 읽혀지는 내용은 아닌것 같다.

결국 이 모든 구성은 서로 교차해서 이어지며 이 책의 주제, 낯선이에게 말걸기로 완성 되어진다.

그런데 책에서 작가가 배우고 쌓아온 학습의 결과, 낯선이에 말거는 방법은 막상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 (말을 걸어야 하는) 먼저 상대의 눈을 바라본다. 친절한 마음을 담아서...

둘째, 상대를 향한 다정한 미소를 짓는다.

셋째, 그후 반응을 보고 다가가 자신이 상대에 대한 호의가 있음을 밝힌다. 이때의 호의는 작업을 거는것과 다르다.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드려도 되는지~?' 혹은 '제가 이런 자리에서 얘기를 하면 안된다는것은 알지만~', 등의 대화전에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닌란것으로 안심시킨다.

넷째, 인사를 하거나, 질문을 하거나, 같이 보고 있는 관심사에 대한 얘기로 연결을 시도한다.

다섯째, 반응을 보고 상대가 불편해 하면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다.

여섯째, 계속 대화가 시작 되면 경청하기.

자. 이게 낯선 이에게 말걸기 요약 내용이다..

그런데 이게 쉬운것인가?

실제는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낯선 이에게 다가가 쉽게 말걸기 위해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고, 수많은 시행착오가 예상된다.

작가는 이런 방법을 시간과 돈을 써가며 배웠다는게 어찌보면 이해가 안가는 면도 있지만 그만큼 작가는 진심으로 '낯선이에 대한 말걸기 화두'에 매달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낯선이에게 말걸기 훈련이 쌓이자 나중에는 본인이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다가와 자신한테 말을 걸기 시작했단다.

내 경험담이다. 약 25년전 쯤, 군대 제대한후 곧 바로 나는 중국 배낭 여행을 떠났었다.

대학에서 중문과를 전공중이었지만 당시에 나의 중국어는 무척 서툴렀다.

그래서 복학전에 중국어라도 단련하자는 의미에서 무협지속의 중국천하를 주유하는 나를 상상하며 여행길을 떠났다.

내 생에 처음으로 외국으로 나가는 경험이라 중국에 대한 기대는 정말 컸다.

그런데 공항에 내리자마자 맡게된 중국 특유의 이상한 냄새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의 차림새, 한창 짓고 있는 고층건물들의 외벽을 감싼 굵은 대나무 플렌트 구조물, 도로에 굴러가는 똥차 같은 차들. 모든게 낙후된 세계로만 보여졌다.

내가 어릴때 부터 막연히 동경하던 중국하고는 달랐다.

기차를 타면 더욱 황당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기겁을 했는데 기차 창문을 통해 사람들이 영화 '부산행'의 좀비처럼 올라탔다.

정상적인 문으로 출입을 할수 없을정도로 사람과 짐으로 막혀있기 때문이다. 기차안 통로도 꽉 막혀있어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지정좌석은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개념자체가 아예 없었고 자리가 나면 아무나 앉아버렸다.

겨우 끄집고 들어가 내 자리를 찾아서 앉아있던 사람 쫓아내고 앉으면 자리 밑에 뭔가 물컹한다.

그래서 내려다보면 좌석 밑바닥까지 사람들이 누워있었다.

심지어 화장실안에 까지 사람이 짐과 함께 꽉~차있어 14시간동안 오줌을 정말 필사적으로 참아야만 했었다.

나의 중국에 대한 모든 환상은 기차여행을 통해 전부 무너져 내렸다.

지금와서 돌아보건데 당시 중국은 지금의 중국하고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모든 상식이 전부 무너지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때 중국 여행에서는 나는 철저한 이방인이였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에서 언급했던 노바디(NOBODY) 였던것이다.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특별한 존재(SOMEBODY) 가 되는게 아니라 개별성을 잃어버린다. 결국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 일 뿐이다.>

-<여행의 이유> 일부 중에-

그런데 신기한것은 여행을 다니면서 그 낯선 세계의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웬지 모를 즐거움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점점 그 즐거움이 앞의 나의 모든 실망을 전부 덮어버렸다.

낯선 세계, 낯선 사람들, 낯선 문화속에서 나는 철저히 이방인이었지만 그들은 내게 크고작은 호의를 베풀었다.

말도 잘 못하는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내가 혼자 여행하는것을 걱정해주고 심지어는 어떤 목적지까지 같이 동행하거나 차를 태워주기도 했었다.

물론 바가지를 노골적으로 씌우는 일부 사람들을 만나긴 했지만 그건 세상 어느곳이나 있으니 스스로 조심하면 됐다.

그때엔 호기심 가득한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그들도 내게 많은 호기심어린 걱정과 호의를 베풀었다.

이때 나는 내가 사는곳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많은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경험을 했던것이다.

그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거의 몇달을 여행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계속 생각이 났다. 만났던 사람들, 가봤던 곳들, 또 다시 보고 싶은 사람들.

정말이지 또 한번 더 가고 싶다는 생각이 난생 처음으로 마음에서 생겼던 것이다.

그렇게 그리움이 되어 버렸다.

결국, 그 바람이 지금은 실현되어 벌써 20년이 넘게 이곳에 살게 되어 버렸다.

(그때 바람이 너무 컸었나 보다.)

작가가 배우고 체험한 경험과 나의 경험을 종합해서,

지금 돌이켜 보면 낯선이에게 말을 건다는 행위는 자신의 마음을 먼저 열어야 가능한것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의 문을 우선 여는것이 상대의 마음과 겉모습을 고려하는것 보다 중요한것이다.

우리는 보통 자기 마음에서 우선적으로 걸려버린다.

'상대가 어떻게 날 생각할까? 날 이상한 놈으로 보지 않을까? 괜히 말걸지 말자.'

그렇게 상대방의 알지도 못하는 마음을 핑계로 내 마음부터 닫아버린다.

상대가 아니라 내 마음부터 봐야 했던 것이다.

여행지에서 철저히 나는 나만 볼수 밖에 없었던것이다.

철저하게 낯선 이로 '노바디'에서 시작할수 밖에 없었던것이다.

여행지에서는 마음을 열수밖에 없는 환경인것이다.

그러니 상대가 누구든 먼저 재고 따질 필요가 없다. 그냥 상대방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 말을 걸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들의 대부분은 내가 열어둔 마음 상태로 그쪽 마음도 함께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야 상대와 내가 서로 마음이 열린상태에서 대화가 될수 있었던 것이 아니였을까?

그렇기에 당시에 중국어가 서툰 나는 상대에게 전하고자 하는 뜻을 상대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수 있었다.

결국 내 자신의 마음을 연다는것이 가장 중요한것이다.

이것은 불교식으로 표현 한다면, '나'를 내려 놓는것이 되는것이다.

결국 수행도 '나' 라는 관념 부터 내려 놓아야 시작 하는셈이 아닌가?

나를 내려 놓을수 있어야 스승의 가르침도 받아 들일수 있고, 만물 만생의 뜻도 받아들일수 있게 되는것이다.

그러니 노바디가 되는 '나'가 없는 경험을 하는데는 여행의 환경이 최적이였던것이다.

그것은 내 마음이 열리며 상대와 내가 둘이 아님을 경험했던것 이었다.

그래서 그때 여행의 경험을 잊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여행은 구도가 되는 것이었다.

책의 작가 존코헤인은 지금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서부 출신의 저널리스트이다.

작가가 주창하는 낯선 이와 말을 걸어야 하는 것만으로는 지금의 현대 사회에 발생하는 문제점들 (고독, 계층간 분열, 정치적인 양극성 등) 을 해결 할수있는 열쇠가 될 수 없음을 나는 안다.

하지만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와 실험정신은 진심으로 느껴진다.

작가의 그 진심은 현시대에 던지는 조그만 돌과 같다. 그 돌은 곧 화두이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나와 타인, 즉 낯선 이에 대한 소통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게 하는 화두를 던진것이다.

작가가 던진 그 돌이 물위에 동심원처럼 점점 커져가는 파장이 되길 바란다.

1994년 6월 르완다의 후투족이 난데 없이 들고 일어나 투치족 이웃과 동료를 살해했다.

살해된 이는 50만에서 10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2022년 2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다. 현재까지 전쟁중이며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이 전쟁으로 희생을 당하고 있다. 양쪽의 희생자가 앞으로 얼마나 될지 아무도 모른다.

2023년 10월 이스라엘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이슬람 저항운동 단체인 하마스가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규모가 어떻게 될지, 어떤 영향을 끼칠지?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예의 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은 지금 이순간에도 발생하고 있다.

남의 일이 아니다. 무슨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가?

이웃 나라에서 행해지는 전쟁과 살인에 대해 우리는 전혀 무관한것인가?

우리나라 상황은 이미 남과 북이 분단상태이고 대한민국 내에서도 정치의 양극화와 계층간, 부의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

개인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국가간의 이기주의가 팽창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발전하고 사회는 복잡다양 해졌지만 정작 현실의 우리는 갈수록 고립화가 되고 우울해지며 점점 생각의 폭은 좁아지고있다.

기술 발달로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온 세계의 소식은 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우리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마음은 전혀 모른다.

이제는 나 조차도 정확히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다가올 곧 미래엔 우리가 선택하고 소통해야될 문제를 AI가 대체하는 시대로 변해버릴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통하는 '주체적인 나' 는 없어진다. 그 '나'는 관념의 울타리에 더욱 더 갇히게 될것이다.

각자가 스스로 주인이 되고 '고정된 나' 라는 관념을 벗어나, '나'와 '너'가 '우리'로 서로 소통하는길은 마음 밖에 없는것 아닌가?

지금 우리의 마음은 닫히고 있다. 관념에 갇혀있는것이다. 고정 관념은 점점 심해진다.

소통은 점점 힘들어진다.

나만 옳다는 관념. 남들은 틀렸다는 관념.

그렇게 둘로 보는 생각이 세상에 만연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낯선 이와 소통할수 없을것이다.

먼저 나부터 돌이켜 봐야한다.

내가 과연 열린 마음으로 있는 상태인지.

나의 마음을 지켜보지 않으면 영원히 상대를 볼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위해, 인류를 위해, 평화로운 마음으로 내 자신 부터 돌아봐야겠다.

그리고 나서 나와 다르지 않은 낯선 이를 바라봐야겠다.

이것이 내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낯선이도 나의 형제요 자매요, 부모란 마음으로 생각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하는것을 걱정하라.(不患人之不己知,患不知人也)
군자는 두루 사귀어 편벽하지 않다.소인은 편벽해 두루 통하지 못한다.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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